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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33/161)

폭주 에스퍼 29화

강훈은 안 그렇게 생겨선 무척 말이 많았다. 입만 다물면 날카로운 눈과 큰 덩치로 과묵하고 카리스마 있어 보이는데, 쉬지 않고 말을 쏟아 서 그런 인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쩌면 주현이 쉽게 말을 못 한다고 알고 있기에 어색하지 않도록 더욱 많이 얘기하는 걸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주현에겐 썩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에스퍼라면 식당은 언제든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 그 외 다른 시설도 웬만하면 공짜니까 다 가 보고.”

식당 앞을 지날 땐 맛있는 냄새가 코를 스쳤다. C동에선 늘 차갑게 식은 도시락을 식사로 주기에 따뜻한 음식을 마지막으로 먹은 게 언제인지도 모른다.

A동엔 에스퍼를 위한 시설이 다양하게 있었다. 헬스장, 목욕탕, 사우나, 미용실 등등. 심지어는 영화관도 있었는데, 현재 상영 중인 영화를 무료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도서관 앞에서 저도 모르게 머뭇거리느라 조금 더 긴 시간을 보낸 주현은 앞서가는 강훈을 서둘러서 따라갔다.

“원래 있던 센터는 어땠어?”

원래 있던 센터. 정확히는 앞으로도 쭉 있어야 하는 C동. 잠시 망설이던 주현은 옷깃을 잡아 내려 입술만으로 속삭였다.

‘거지 같아요’.

눈을 동그랗게 뜬 강훈은 더 말할 생각 없어 보이는 주현에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조용하던 것도 잠시. 훈련장에 도착하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가 훈련장이야. 각자 능력에 따라 필요한 곳에 가면 되는데, 넌 어디가 어울릴까?”

훈련까지 도와줄 생각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에 주현은 강훈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위치만 확인할 생각이었습니다. 데려다주셔서 고마워요’.

소리 없이 입술만 움직였음에도 알아들은 듯 강훈이 호탕하게 웃었다.

“앞으로 자주 볼 사이인데 감사 인사할 거 없어!”

주현은 속으로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 ‘현신주’라는 에스퍼가 없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은 강훈이 어디서 어떻게 말을 퍼뜨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해결 방법은 있고, 그리 어렵지도 않다. 현신주가 다른 곳으로 전근 갔거나 임무 중 사망했다는 정보만 슬쩍 흘리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A동에 에스퍼가 한둘도 아니고, 임무 중 사망하는 것도 자주 있는 일이니 강훈은 금방 주현을 잊을 것이다.

다만 주현은 이런 간단한 임무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고 태석에게 먼지 나게 두들겨 맞을 거란 사실에 속이 쓰렸다.

그래도 이미 벌어진 일.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드디어 끝난 임무에 주현이 고개를 푹 숙이고 돌아서려던 순간이었다.

“신주현?”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왔다. 쿵쿵거리며 강하게 뛰어대는 심장박동에 속이 울렁거렸다.

손을 꽉 움켜쥔 주현이 옆을 힐끗 보았다. 새하얀 날개, 하나로 묶은 금색 머리카락. 윤가람이 경악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훈련하러 온 것인지 운동복을 입은 그는 이내 의심이 가득 담긴 눈으로 주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필이면 이곳에서 가람을 만날 게 뭐람. 주현을 썩 좋아하지 않는 가람이 폭주 에스퍼가 왜 여기 있냐는 말이라도 한다면…….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감각이 선명했다.

입술 안쪽을 강하게 깨문 주현이 뭐라도 말하기 위해 입을 연 찰나, 옆에 서 있던 강훈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 어쩐지 화가 난 어투로 말했다.

“사람을 착각한 모양인데, 이 녀석의 이름은 현신주다.”

“현신주? 뭐야, 그 웃기지도 않은 이름은.”

“이봐! 남의 이름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강훈의 잔소리에 가람은 어이가 없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누가 봐도 신주현의 이름으로 대충 만든 가명인데 타인의 이름을 놀리는 못난 사람 취급이라니.

기분이 상했으나 그렇다고 가명이 어쩌고저쩌고 말하기에는 주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평소와 달리 새까만 눈동자나 바짝 굳은 어깨, 바닥에 고정한 시선 등. 원해서 이곳에 있는 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애초에 폭주 에스퍼는 안전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A동에 들어올 수 없다. 죽어도 밖에서 죽어야 한다는 뜻이다.

폭주 에스퍼가 어떤 임무를 받는지는 가람도 정확히 모르지만, 이 사실이 드러나면 문책받을 사람이 한둘이 아닐 터. 그중에는 분명 눈앞의 폭주 에스퍼도 있으리라. 저번에 가람의 가이드를 지켜 준 신주현 말이다.

자신이 궁지에 몰렸다는 걸 확실히 알고 있는 듯 주현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심지어 검은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재수 없는 원래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자기가 무슨 고양이 앞에 선 햄스터야? 어울리지도 않게 입이나 다물곤.’

그냥 무시하고 싶었지만, 소매 밑으로 흉터가 가득한 주먹이 가늘게 떨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혀를 찬 가람이 껄끄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 본 것 같네. 아는 사람이랑 너무 닮아서.”

놀란 듯 고개를 든 주현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지 작게 끄덕이곤 돌아서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의심을 받지 않도록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평균적인 속도였다.

눈썹을 구기고 있던 가람이 힐끗 옆을 보았다. 강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주현이 사라진 복도를 응시하고 있었다.

최강훈. 호탕하게 굴지만 속내를 쉽게 알 수 없는 남자다. 귀찮은 일에 엮이는 건 딱 질색인 가람은 말없이 훈련실로 들어섰다.

* * *

두 사람에게서 멀리 도망친 주현은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벽에 등을 기대며 주르륵 미끄러졌다. 역시 몰래 들어갔다가 슬쩍 빠져나올 수 있는 암살이나 목숨 말곤 걱정할 게 없는 게이트 임무가 훨씬 나았다.

C동과는 달리 늘 일정한 온도로 유지되는 A동은 복도마저도 시원했다. 식은땀을 날린 주현이 천천히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화장실에 들어가 환풍구로 올라간 주현은 이런 곳에서 안도를 느끼는 자신이 시궁창 쥐새끼 같다고 생각하며 비소를 지었다.

다양한 능력을 가진 에스퍼들이 모인 곳이지만, 다행히 환풍구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건물이 큰 만큼 널찍한 환풍구를 기며 최대한 조용히 밖으로 나가기 위해 애쓰던 주현은 밑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무심코 시선을 내렸다.

“그 일은 아무도 모르게 처리해.”

“네.”

자세히는 몰라도 알아서 좋을 것 없는 게 분명한 대화였다. 혀끝을 가볍게 깨문 주현이 앞으로 계속 나아가려던 때였다. 임무를 받은 에스퍼가 뒤로 돌아섰다. 위에서 보는 것임에도 주현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사람은, 그 에스퍼는…….

‘폭주 에스퍼를 제압했습니다.’

머리가 어지럽고 심장이 거세게 뛰고 나서야 주현은 자신이 숨을 참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가슴이 아프고 머릿속이 지끈거렸다. 주현은 차게 질린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지 않으면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그랬다.

11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만큼 남자의 얼굴에도 변화가 있었다. 깔끔하게 넘긴 옆머리에 희끗희끗한 새치가 몇 가닥 있었고, 못 보던 흉터도 생겼다.

그럼에도 그 얼굴을 보자 과거가 똑같이 눈앞에서 재생되었다. 피에 젖은 손, 널브러진 시신, 몇 시간 전만 해도 함께 웃었던 사람들의 차가운 몸, 무너진 건물, 피, 선생님, 부러진 손톱, 뱀처럼 기어 오는…….

‘주현아, 난 네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문득 주현의 움직임이 멈췄다. 머리를 붙잡던 손도. 웅크리던 다리도.

시간이 멈춘 듯 미약하고 느린 숨만 내쉬던 주현이 다시 한번 작은 틈 사이로 밑을 보았다. 그 남자, 주현이 폭주했을 때 그를 제압했던 에스퍼는 이미 방을 나간 듯했다.

주현의 팔을 잡고 무릎으로 등을 짓눌렀던 에스퍼가 없다.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남자가 사라졌다.

‘그럼 지금 내가 폭주한다면 누가 막아 주지?’

너무나도 극단적인 생각이었으나, 오랜만에 떠올린 과거에 잠식된 주현은 당장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본능과도 같은 맹렬한 외침 말곤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덜커덩! 가장 가까운 출구를 발견한 폭주 에스퍼가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다.

4층 벽에서 갑자기 사람이 떨어졌으나, 잠시 고개를 든 시민들은 곧바로 관심을 껐다. 에스퍼의 기행은 흔한 일이었다. 특히나 A동에서는 더더욱.

주현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달렸다. 사람이 보이면 피해 다른 쪽으로 달렸지만, 사실 어딜 가도 사람이 넘쳐났다.

“아, 잘 좀 보고 다녀요!”

어깨를 부딪쳐도 사과조차 하지 못했다. 고개를 들면 악마의 상징인 붉은 눈동자가 드러날 테고, 그럼 상대는 겁에 질릴 테니까. 지금은 렌즈에 가려져 있다. 그러나 그 사실조차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주현은 현재 깊은 패닉에 빠져 있었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어딜 가야 사람들이 안전할까? 폭주에 휘말리지 않게 하려면 뭘 해야 하지?

“…….”

물론 주현은 답을 알고 있다. 언제나 알고 있었다. 시한폭탄을 없애려면 회로를 잘라 버리면 된다. 게이트에서 나온 괴물이 사람을 죽이기 전에 먼저 죽이는 것처럼, 주현도 그렇게 하면 된다.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로 새까만 눈이 허공을 비췄다.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은 손을 더럽다는 듯 몇 번이고 옷에 문지른 그가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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