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28화
집무실로 들어서자 C동의 부센터장인 태석이 날카로운 눈으로 주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기 시작했다. 여기서 통과하지 못하면 곧장 발길질이 날아온다.
속으로 중지를 치켜세운 주현이 완벽한 무표정으로 올곧게 섰다.
“임무가 있다. 이걸 A동 7층, H-12 사무실 책상에 두고 와라.”
말이 임무지 심부름과 다를 거 없었다. 이런 건 우체국을 이용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말이 목 끝까지 기어올랐으나 꿀꺽 삼킨 주현이 서류 봉투를 건네받았다.
“네가 C동에서 온 폭주 에스퍼라는 걸 절대 들키지 마라.”
맹수가 으르렁거리듯 싸늘하게 말한 태석은 알았으면 얼른 나가라며 턱짓했다.
서류 안에는 뒤가 구린 찝찝한 문서가 들어 있을 게 분명했다. 물론 주현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는 그냥 맡긴 일만 완수하면 된다. 그 외의 곳에 눈 돌리는 순간, 간신히 서 있는 발판이 무너져 누구도 모르게 사라질 터다.
집무실에서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제복을 내밀었다.
암살 임무에 갈 때마다 입는 새까만 옷도, 게이트를 처리하러 갈 때 입는 통상적인 폭주 에스퍼용 제복도 아니었다. 일반 에스퍼가 입는, 붉은 포인트 컬러가 없는 평범한 제복이었다.
다만 목과 하관 전체를 가리는 형태로 약간 개조되어 있었는데, 이 정도는 다른 에스퍼들의 수선에 비하면 그다지 눈에 띄지도 않을 것이다. 처음 보는 제복은 아니었다. 일반 에스퍼로 위장해야 할 때마다 가끔 입곤 하는 옷이었다.
묵묵히 옷을 갈아입은 주현이 검은색 렌즈를 눈에 넣었다. 거울 속에 비치는 사람은 분명 평생 봐 온 자신이지만 무척 어색하게 느껴졌다.
고작 붉은색을 감췄을 뿐인데 괴물이 아니라는 듯 사람들 틈에 섞여들어도 되는 거냐고. 그런 의문에서 눈을 돌린 주현이 차에 올라탔다. 단단한 강화유리를 잠시 매만지던 그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칙칙한 회색 건물이 멀어져 갔다.
* * *
에스퍼-가이드 센터 A동은 이름값답게 아주 큰 부지를 가지고 있다. 임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담긴 봉투에는 A동의 지도도 있었는데, 심지어는 건물 안에 수영장까지 있었다.
그중 주현이 가야 할 곳은 본관 7층에 있는 한 협회 관계자의 사무실이었다. 그 사람이 태석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몰라도 썩 좋지는 않을 것이다. 안 그러면 굳이 폭주 에스퍼를 보낼 이유가 없으니까.
임무에 은근한 협박이 담겨 있다는 걸 모르기엔 주현은 C동에서 너무 오래 있었다.
마지막으로 매무새를 정리한 주현이 차에서 내렸다. 눈을 살짝 가리는 앞머리와 코까지 덮은 옷 때문에 얼굴이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주현은 손끝이 떨리는 걸 숨기며 서류를 움켜쥐었다.
‘차라리 레드급 괴물이 나오는 게이트에서 구르는 게 나은데.’
신체적으로는 힘들지언정 심적으로는 그쪽이 훨씬 편했다.
주변에는 사람이 넘쳐났다. 주현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태연하게 코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목덜미에 소름이 섬찟하게 돋았다.
그러나 늘 그렇듯 아무리 싫고 두려워도 해야 한다. 주현이 살아 있는 유일한 이유가 남들은 하기 힘든 더럽고 위험한 임무를 떠맡기 위해서니까.
눈을 꾹 감았다 뜬 폭주 에스퍼가 굳은 발걸음으로 A동을 향해 나아갔다.
A동은 워낙 일반인의 출입이 잦다 보니 입구가 크게 두 개로 나뉘어 있다. 에스퍼 전용과 일반인 전용으로 나뉜 입구는 당연하게도 들어가는 방법도 다르다.
A동이 집이자 직장인 에스퍼는 신분증을 기계에 대기만 하면 통과할 수 있다. 보안을 위해 직원이 하나하나 확인 절차를 거치는 일반인 전용 입구와는 달리 빠르게 통과할 수 있으나, 물론 그건 출입 가능한 신분증을 가지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에스퍼는 누구나 이름과 소속한 곳, 등급 등이 적힌 신분증을 가지고 있다. 주현도 가지고 있는데, 그의 것에는 폭주 에스퍼라는 낙인이 찍혀 있다.
일반인이 줄을 서 있는 입구를 지나친 주현이 머릿속에 박아 놓은 지도를 뒤적여 에스퍼 전용 입구로 곧장 걸어갔다. C동의 허술하고 삭막한 입구와는 비교도 안 되는 크고 세련된 문 앞에 선 주현이 심호흡을 내뱉었다.
다가서자 자동으로 열리는 문에 잠시 움찔한 그는 C동 직원에게 받은 카드를 스캐너에 가져다 대었다.
다행히도 별일 없이 초록색 불과 함께 통과할 수 있었다. 정말로 이게 끝인가 싶어 잠시 주변을 둘러본 주현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는 직원과 시선이 마주쳐 얼른 건물로 들어섰다.
당연한 말이지만 건물 안에는 에스퍼가 가득했다. 일반인이 둘러볼 수 있는 공간과 분리된 듯 제각각 취향대로 커스텀한 제복을 입은 에스퍼들이 바쁘게, 혹은 느긋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주현은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를 쏘다니며 최대한 사람들의 시선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애썼다.
“후…….”
겨우 본관 건물의 비상계단을 찾은 주현이 귀퉁이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라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 즐비한 A동이다. 만약 주현이 폭주한다면 10초 내로 사살당할 게 분명하다. 그런데…… 만약 10초 사이에 누군가를 죽인다면?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주현이 폭주하고 다행스럽게 누구도 죽이지 않고 사살당한다 해도, 뒤늦게나마 그가 폭주 에스퍼라는 사실은 드러날 것이다.
그렇다면 안 그래도 여론이 좋지 않은 C동 동료들의 입지는 훨씬 더 작아질 게 분명했다. 감시가 더욱 삼엄해지고, 숨 쉴 구멍 하나 없어지겠지. 물론 혼자 고민해 봐야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최대한 빨리 임무를 끝내고 돌아가는 게 최선이다.
다시 한번 단단히 결심한 주현은 벌떡 일어나 7층을 향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워낙 넓고 높은 건물이라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가 잘되어 있어서 그런지 계단을 사용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참 올라가던 주현은 문득 옆을 보았다. 통유리라 밖이 훤히 보였다.
6층 높이에서 내려다본 광경은 아름다웠다. 거리에는 많은 사람이 돌아다니고, 높은 건물이 사방에 널려 있다. 각자 바쁘게 어디론가 향하는 모습은 임무가 없을 때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하게 앉아 있는 폭주 에스퍼들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한때는 C동의 동료들도 이런 삶을 살았을 것이다. 폭주하기 전에는 하루하루 알차게 보내고 미래를 꿈꾸며 웃으면서 그렇게.
주현은 사회생활을 해 본 적이 없다. 폭주하며 간신히 잡은 행복을 모조리 잃기는 했으나, 지위나 권력 등은 가지지 않았기에 남들보다 덜 잃었다고 말할 수 있다.
원래부터 없는 것과 있다가 빼앗기는 것. 무엇이 더 고통스러울까? 어떤 게 더 비참할까?
남들보다 훨씬 가진 게 적은 주현은 아름다운 광경에서 눈을 돌렸다. 계단을 올라가는 부츠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 * *
H-12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혹시 몰라 화장실에서부터 환풍구를 기어 사무실을 들여다본 주현은 괜한 고생을 했다고 생각하며 방 안으로 뛰어내렸다.
널찍하지만 필요한 가구만 적당히 놓인 사무실은 물건의 값어치를 잘 모르는 주현의 눈에도 상당히 돈을 바른 티가 났다.
까만색 책상 위, ‘최윤건’이라고 적힌 명패 옆에 서류 봉투를 내려놓은 주현이 돌아서서 사무실 문을 향해 걸었다.
누구도 모르게 도착한, C동에서 보낸 서류. 폭주 에스퍼가 협회의 더러운 임무를 도맡고 있다는 사실은 상층부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다. 폭주 에스퍼가 은밀하게 자신의 사무실에 들어왔다 나갔다는 사실만으로도 제법 큰 압박이 될 것이다.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임무는 끝이다. 너무 간단해서 임무라고 말하기도 민망했지만 여하튼. 매무새를 다시 한번 정리한 주현이 가벼운 동작으로 문을 연 순간이었다.
“거기 마음대로 들어가면 안 되는데.”
주현의 어깨가 움찔거리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너무 과하게 긴장하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연한 몸짓을 가장하며 복도로 완전히 나와 사무실 문을 닫은 주현이 옆을 보았다. 짧은 머리카락과 큰 키, 그리고 단단해 보이는 근육을 가진 에스퍼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은 어떤 임무에서든 일어날 수 있다. 주현은 몰랐다는 듯 태연히 고개를 저으며 슬쩍 신분증을 내밀었다.
“현신주. 아, 목소리를 사용하는 능력이구나?”
현신주? 그제야 신분증의 이름을 확인한 주현은 아무리 가명이라지만 너무 대충 지은 거 아니냐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런데 왜 이곳에 들어간 거지?”
이런 상황을 예측했던 주현은 그냥 환풍구로 나갈 걸 후회하며 준비한 서류를 내밀었다. 그곳에는 현신주라는 이름의 C급 에스퍼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적혀 있었다.
“지방 센터에서 일하다가 A동으로……. 오늘 왔네? 그럼 길 잃을 만하지, 하하. 여기가 좀 넓어?”
다행히 눈앞의 에스퍼는 의심을 지운 듯했다. 주현이라면 이딴 종잇조각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며 상대를 붙잡고 엉엉 울 때까지 심문했겠지만, 이곳은 C동이 아니었다.
“난 최강훈이다. 같은 에스퍼로서 잘 지내보자. 그나저나 가려던 곳이 어디야? 데려다줄게.”
쓸데없는 친절을 거절할 명분이 없던 주현은 주섬주섬 지도를 꺼내 가장 구석진 곳을 가리켰다. 사람이, 적어도 일반인은 없을 만한 곳.
강훈은 희미한 흉터가 남은 손가락이 훈련장을 가리키는 걸 보곤 활짝 웃었다.
“나도 거기 가려던 참이었는데. 잘됐네!”
차갑게 식은 손가락을 주먹 쥔 주현이 고맙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