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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30/161)

폭주 에스퍼 27화

‘그거 안 하면 안 돼?’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주현이 무릎을 감싸 안고는 불퉁한 얼굴로 물었다. 면도날을 쥐고 제 손목을 바라보던 한결은 미안함과 씁쓸함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뒤돌아 있을래?’

말려도 듣지 않고, 그런 짓을 한 후에는 조금 더 편한 미소를 짓는 한결을 알기에 주현은 늘 뒤돌아서 시간이 지나길 기다리곤 했었다.

물을 조종한다는 강한 능력과 위험한 상황을 매번 빠져나가는 지력, 거기다 동료들의 신뢰까지 받고 있던 한결을 죽일 수 있는 임무는 없었다.

그러나 한결은 자기 자신은 이기지 못했다.

그는 제 방에서 목을 매 죽었다. 그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주현이었다. 허공에서 흔들리는 푸른색 발끝은 아직도 생생하게 꿈에 나타난다. 그날 후로 주현이 생각하는 자신의 끝에는 밧줄에 매달려 있는 장면이 추가되었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의 죽음에 마지막으로 운 게 아마 그날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짧은 망설임 끝에 주현은 밧줄을 불 속으로 내던졌다. 그 위로 기름을 부으니 한층 큰불이 생겼다.

주현은 이렇게 튼튼한 밧줄을 어디서 구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러니 아마 한결과 같은 방식으로 죽지는 못할 것이다. 밧줄에 매달려서 흔들리던 한결이 마치 하늘을 나는 천사 같아서 이왕이면 그렇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말이다.

문득 주현은 차인호를 떠올렸다. 정확히는 뺨을 맞은 후에 행복한 미소를 지었던 그 얼굴이 생각났다.

통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보니 그게 무슨 뜻인지, 정확히는 진심으로 웃은 것인지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차인호의 미소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를 보며 그리 웃는 사람이 있는데 굳이 죽음을 재촉할 필요는 없었다.

울어 달라고 약속했던 범규에겐 미안하지만 여전히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지금 눈이 따끔거리는 건 연기가 매워서 그런 게 분명했다.

잠시 불길을 바라보던 세화가 돌아서서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낡은 C동에 있는지도 몰랐던 스프링클러가 작동하며 천장에서 물이 쏟아져 내렸다.

쏴아아- 온 방을 적시며 강하게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에 다들 놀라 굳은 사이, 온통 젖어 버리고 말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얼굴도 폭삭 젖어선 마치 커다란 울음이라도 터뜨린 것처럼.

타오르던 불길도 잠잠해졌다. 그리 오래 탄 것 같지도 않은데 멀쩡한 물건 하나 없이 죄다 재로 변해 있었다.

“너 완전 물에 빠진 생쥐 꼴이잖아!”

“이세화, 너는 어떻고?”

젖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던 폭주 에스퍼들은 하나둘씩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크게 웃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물놀이 같은 걸 해 본 적은 없는데, 아마 이런 기분이 아닐까.

“난 여기에 이런 장치가 있는지도 몰랐어.”

“나도. 능력 아무리 써도 경보 한 번 울린 적 없는데.”

물에 젖은 밧줄 잔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주현이 고개 들어 열린 창문 너머 주홍빛 하늘을 응시했다. 여전히 창살에 세로로 쪼개진 노을이지만, 그럼에도 그 찬란한 아름다움은 잃지 않았다.

* * *

‘주현이 넌 가이딩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지?’

본인의 능력으로 흠뻑 젖은 채 훈련장 바닥에 누운 한결이 말했다. 그 옆에서 가쁜 숨을 내쉬던 주현은 인상을 팍 찡그렸다.

‘왜 몰라. 나도 매주 받고 있는데.’

‘아니. 넌 몰라. 마음이 통한 사람에게서 받는 가이딩은 이곳에서 받는 역겨운 거랑 차원이 다르게 좋아.’

그게 어떤 건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주현은 모른다. 그야 그는 제대로 된 가이딩 한 번 받아 보기 전에 폭주해서 C동에 왔으니까. 에스퍼로서 주현의 세계는 삭막한 회색빛 C동이 전부다. 일반적인 에스퍼가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가이드를 만나는지 그가 어떻게 알겠는가.

‘……매칭 가이드가 있다고 했지?’

‘그래.’

‘어떤 사람이야?’

몸을 돌려 팔을 괴며 엎드린 주현이 물었다. 사실 이미 몇 번이고 들었기에 전부 다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매칭 가이드에 대해 말하는 한결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타인의 즐거운 미소를 볼 기회가 잘 없는 주현은 매번 그에게 묻곤 했다.

‘센터에서 처음 만났는데…….’

늘 같은 부분에서 시작하는 이야기임에도 주현은 흥미롭게 들었다. 그는 겪어 본 적 없고, 겪지도 못할 세상의 이야기는 항상 재미있었다.

이야기를 마친 한결이 주현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눈이 반달 모양으로 접히고 보조개가 생기는 예쁜 미소는 그의 매칭 가이드에 대해 말할 때만 나온다.

‘언젠가는 너에게도 그런 가이드가 나타나면 좋겠다.’

‘그럴 리가 없잖아. 누가 폭주 에스퍼랑…….’

퉁명스러운 대답에도 한결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손목에 선명히 남은 여러 개의 선을 힐끗거린 주현은 졸린 척하며 눈을 감았다.

잠시 과거를 생각한 주현이 제 앞에 앉아 있는 가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앞으로 불쑥 밀려와 있는 쇼핑백을 툭 건드렸다.

“이게 뭡니까?”

“후드티예요. 저번에 입으신 거 보니 잘 어울리더라고요.”

당연한 걸 묻는다는 태도에 주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겁먹고 주저앉았을 기세에도 차인호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이었다.

쇼핑백 속 새하얀 후드티를 들여다보던 주현은 무심코 피가 튀면 안 지겠다고 중얼거렸다가 선물을 받아들이는 걸 전제로 생각한 자신에게 놀라고 말았다. 그에 대한 반발 심리로 더욱 강하게 차인호를 노려보자 그가 언뜻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주현 씨는 흰색이 잘 어울려요.”

온몸에 검은색을 두르고 있는 사람한테 잘도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검은색도 잘 어울리지만요.”

가끔 차인호는 주현의 생각을 꿰뚫어 보듯 굴 때가 있다.

의식적으로 표정을 갈무리한 주현이 쇼핑백을 손끝으로 잡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왜 그리도 크게 들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확실히 후드티는 편하긴 했었다. 물론 사적인 외출 같은 걸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방에서는 입을 수 있을 터다.

“……전 이런 거 부탁한 적 없는데요.”

“그냥 제가 드리고 싶어서 샀습니다.”

“아무 날도 아닌데 말입니까?”

잠시 눈썹을 들어 올린 차인호는 이내 아주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 자애로운 미소에 주현의 기분이 팍 나빠졌다.

“조금 늦었지만 매칭 기념 선물이라고 할까요?”

주현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딱히 줄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재산, 명예 등 모든 면에서 주현은 차인호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한다.

“이 매칭은 순전히 제 요구로 이루어진 것이니까 제가 주는 게 맞죠.”

다시 한번 차인호가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에스퍼가 아닌지 의심한 주현은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일부러 사 온 겁니까?”

주현에게 주겠다는 생각으로 굳이 갈 필요 없는 가게에 들러 돈을 내고 옷을 사서 이곳까지 들고 오다니. 그가 받기엔 너무 큰 수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생각지도 못한 매칭으로 가이딩도 받고 있고, 목숨까지 구원받았는데.

“그냥 지나가는 길에 산 거예요. 부담 가질 필요 없습니다.”

폭주 에스퍼의 상처 난 손가락이 와작 쇼핑백을 구겼다. 그러나 차인호는 이번에도 그의 속내를 들여다봤을지도 모르겠다. 아닌 척 즐겁게 웃는 걸 보면 거의 확실했다.

사실 안 그래도 얼마 전 나름의 애도를 하며 상당수의 옷을 태워 버린 탓에 옷장이 텅 비어 하나하나가 귀해지기는 했다. 결국 주현은 옷을 받기로 했다. 니코틴 패치처럼 짜증 나는 것도 아니고. 준다는데 거절할 필요가 없었다.

“……고마워요.”

차인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러면서도 당연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벼운 태도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투명한 비닐에 싸인 옷을 보고 있자니 후드티를 입고 함께 임무에 갔던 범규가 떠올랐다. 범규는 기쁠 땐 웃고, 슬플 땐 울어야 한다고 말했었다. 주현의 방심 때문에 그의 손에 죽은 범규는 주현에게 웃으라고 말했다.

잠시 주춤거리던 주현이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평소처럼 비웃는 미소도, 화난 걸 보여 주기 위해 짓는 웃음도 아니었다.

태어나서 처음 웃어 보는 사람처럼 아주 어색했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나 차인호는 분명히 본 것 같았다. 동그란 눈을 한 채 한참을 굳어 있던 그는 그날 평소보다 일찍 돌아갔다. 보기 싫을 정도로 못생긴 미소였나 보다.

기분이 좀 나빴지만 그래도 차인호가 준 새하얀 후드티는 무척 부드럽고 따뜻했다. 마치 깃털이나 구름에 감싸인 것처럼.

한결이 말한 것 같은 운명적이고 마음이 통한 가이드는 아니지만, 그래도 주현은 자신의 임시 매칭 가이드가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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