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26화
차인호를 어떻게 부르지? 범규를 둘러업고 촬영장까지 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전화기가 없고, 범규도 그렇고, 직원, 직원은…….
여전히 구겨진 채 주현의 서랍에 들어 있는 쪽지 속 번호는 이미 외웠다. 딱히 외우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한 번 본 순간 머릿속에 박혔다.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을 직원에게 가야 했다. 차에 타서 차인호에게 간다면 어떻게든 될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때까지 범규가 버틸 수 있냐는 것이다. 애초에 가이딩이 부족한 상황에서 임무 때문에 능력을 상당히 사용했다. 그런데다 총에 맞은 부위가 너무 안 좋았다.
범규의 말을 듣지 말고 그냥 아까 죽일걸. 하던 대로 할걸. 괜한 짓 하지 말걸. 주현은 수없이 밀려오는 ‘만약’의 파도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후회는 지금 해야 하는 일이 아니었다.
“형, 나, 폭주, 폭주하고, 엄청 힘들었는데…… 그래도…….”
“말하지 말라니까!”
주현은 다급하게 가방을 열어 불법 가이딩 약물을 꺼냈다. 큰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없는 것보단 나으리라.
“형들이랑 누나들, 만나, 쿨럭, 만난 거, 그건 다행…… 이라고, 생각해.”
해 준 것도 없는데. 오히려 그들이 밝고 쾌활한 범규에게 많이 위로받았다. 그리 살갑게 대하진 않았으나 주현에겐 유일한 동생이라 나름대로 마음이 쓰이는 녀석이기도 했다.
“뭐 좋은 사람들이라고 다행이야.”
주사기 바늘을 밀어 넣으며 뱉은 말에 범규가 작게 웃었다. 불법이지만 효과는 나쁘지 않은지 범규의 호흡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졌다.
이 틈에 차로 가서 직원을 만나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한 주현이 범규를 부축하려던 순간이었다.
“저번에…… 화내서 미안해.”
“됐어. 화날 만해.”
“엄마, 엄마가 말해 줬는데, 쿨럭, 쿨럭, 사람은 각자 슬픔을 다루는 방법이 다르대.”
‘넌 화난 게 아니라 슬픈 거야.’
문득 오래전 누군가가 해 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물론 이 상황에서 도움 되는 말은 아니다. 추억을 재빨리 털어 버린 주현이 범규를 부축하며 일어섰다.
축 늘어진 몸은 무거웠지만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범규의 팔을 어깨에 걸치고 옆구리를 붙잡고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디뎠다.
폐에 박힌 총알 때문에 범규의 숨결은 거칠고 불안정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입술 틈새로 붉은 피가 툭툭 떨어졌다. 숨결 하나하나에 마치 범규의 영혼이 담겨 빠져나오는 기분이었다. 너무 과한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떨림마저 줄어드는 범규의 몸에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파도 소리로 가득 찬 항구를 걸으며, 주현은 답지 않은 희망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직원의 전화기로 차인호에게 연락하고, 그동안 남은 가이딩 약물로 버티면 범규는 살 수 있어.’
그러나 늘 그렇듯 세상은 누군가를 엿 먹이고 싶어 안달이 나 있다. 그리고 오늘은 주현의 차례였다.
“주현이 형…… 좀 웃고, 살아.”
“뭐?”
“나 죽었다고, 헉, 안 울어 줘도 되니까…….”
범규의 입에서 울컥 핏덩이가 올라왔다. 그러나 주현은 그것에 신경 쓸 수가 없었다.
방금까지 힘없이 주현에게 매달려 있던 몸이 발작하듯 격하게 움직였고, 동시에 범규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주현은 그것이 뭔지 알고 있다. 잔잔하던 파도가 요동치는 것만 봐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폭주. 범규는 다시 한번 폭주하고 있었다.
가이딩 수치가 지나치게 떨어진 게 원인인지, 혹은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나빴던 건지. 이유는 몰라도 폭주는 시작했고, 막을 방법은 없다.
죽어 가던 범규가 비틀거리면서도 두 다리로 서서 머리를 부여잡았다. 폐에 구멍 뚫린 사람답지 않은 커다란 비명이 그에게서 터져 나왔다.
더 이상 가이딩이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에스퍼의 폭주는 대부분 사망으로 끝난다. 한 번 살아남은 게 기적이었다는 말이다.
펑! 퍼버벙! 쾅! 범규의 능력이 마구잡이로 주변의 것들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바닷물이 터지고, 단단한 콘크리트 바닥이 움푹 팼다.
압도적인 역량 차이가 있지 않은 이상 에스퍼의 폭주를 홀로 막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내버려 두면 어떤 피해가 일어날지 모르는 데다 수치 이상을 알아챈 C동에서 버튼을 눌러 곧 폭탄을 터뜨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정말 싫고, 앞으로 며칠은 악몽에 시달릴 거란 확신이 있으면서도 해야 하는 일이었다.
주현이 주머니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 이를 악문 채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총구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대로 두면 범규는 폭주 에스퍼로서 처형당하게 된다. 아무런 갈등 없이 책상에 앉은 이가 누른 버튼 하나로 범규의 인생이 날아간다. 머리 없이 몸만 남은 시신이 누구의 것인지 신경 쓰는 사람은 없다.
주현 본인은 그렇게 죽어도 상관없지만, 범규는 아주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 않은가. C동에서 동료가 죽었다고 우는 이는 없어서 범규의 눈물이 더욱 가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주현은 한나가 부러웠다. 죽었다고 울어 주는 사람이 있어서. 잃어 버린 삶을 아쉬워하고, 죽음을 슬퍼하고. 주현은 결코 그런 걸 받지 못할 테니까. 한편으로는 마음껏 울 수 있는 범규가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절망에 빠져 눈물마저 말라 버린 자신이 부끄러웠다.
비틀거리며 사방을 폭발시키던 범규가 기어코 바닥에 쓰러졌다. 그 순간, 주현은 평소보다 훨씬 새빨간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주현도 저랬을까? 그가 폭주했을 때도 저런 표정과 저런 눈빛이었을까? 그건 모르는 일이다. 당시의 기억은 하나도 없으니까.
돌연 총을 내린 주현이 범규를 향해 힘껏 뛰었다. 뜨겁게 달아올라 벌벌 떠는 몸을 끌어안자 벗어나려는 듯 범규가 바르작거렸으나 주현은 놓지 않았다. 비록 그에겐 포옹이 아니라 결박으로 느껴지겠지만, 그래도 혼자 외롭게 죽는다는 생각은 하지 않기를 바랐다.
범규는 죽기엔 너무 따뜻하고, 너무 어리고, 너무 다정하며, 너무 자주 웃는다. 지금도 봐. 폭주로 정신없는 와중에도 주현을 향해 곧장 능력이 날아오지 않고 있다.
다시 한번 그를 비켜난 능력에 주현이 이를 악물었다.
‘내가 책임지마. 내가 짊어지고 살게. 네 죽음을 잊지 않을게.’
“……날 용서하지 마.”
또 한 번의 총성이 항구를 울렸다.
* * *
불법 가이딩 약물을 없애는 임무는 성공이었다. 임무에 투입되었던 폭주 에스퍼 두 명 중 한 명이 임무 도중 사망했으나, 늘 있는 일이기에 협회의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사망한 에스퍼의 시신은 유족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폭주 에스퍼임에도 예외적으로 외부 묘지에 안장되었다. 비석에는 선명하게 이름이 박혔고, 화장시키기 전 시신은 몸과 머리가 온전히 붙어 있었다.
그게 부러웠나? 잘 모르겠다.
주현은 담배를 꺼내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가 폐를 죽이는 감각은 언제나 중독적이다.
사람이 잘 오지 않는 방에 홀로 선 주현이 작은 산을 이루며 쌓인 물건들 위로 불붙은 성냥을 던졌다. 몰래 구해 온 기름을 뿌려서 그런지 생각보다 크게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주현은 연기를 내뿜었다.
물건은 전부 죽은 이에게서 받은 것이다. 정확히는 그들이 죽은 후 멋대로 가진 것이지만, 아무튼 유품이라고 볼 수 있다. 신발, 셔츠, 책, 볼펜 등등. 종류도 다양하고 원래 주인 또한 다양하다.
“뭐 해?”
반쯤 열려 있던 문이 완전히 열리며 채경이 다가왔다. 여전히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그는 활활 타오르는 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 하는 것 같아?”
“글쎄. 불놀이?”
“그럼 그런가 보지.”
말이 없던 채경은 돌아서서 방을 나갔고, 주현은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러나 채경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뒤에 다른 이들까지 데리고서.
승철, 봄과 함께 들어온 그는 주현이 만든 불더미에 품에 안고 온 물건들을 쏟아 버렸다. 잠시 주춤하던 불길은 이내 물건을 삼키곤 더욱 크게 타올랐다.
“나도 버릴 게 많았거든.”
승철은 작은 나무 조각상 하나를 버렸고, 봄은 버리진 않았으나 가만히 서서 따스함을 만끽했다.
그리고 한참 후, 슬그머니 세화가 나타났다. 묘하게 구겨진 얼굴로 다가온 그녀는 봄을 힐끗 보더니 불길 속에 누구 것인지 모를 티셔츠를 던져 넣었다. 여성용이긴 했으나 몸집이 작은 세화한테는 너무 컸을 티셔츠는 한나가 곧잘 입곤 하던 것이었다.
기실 불길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건 장례식이다. 제대로 된 애도조차 받지 못하고 스러져 간 폭주 에스퍼를, 동료를 위한 장례식.
갑자기 그들에 대한 슬픔과 후회가 샘솟는다든가, 마음을 고쳐먹었다든가. 그런 이유는 아니다. 다만 슬픔을 다루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고, 그저 묵혀 둔 채 홀로 기억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을 뿐이다.
많은 이의 삶과 죽음을 담고 있는 불을 바라보던 주현은 옆에 빼놨던 상자를 들어 올렸다. 안에는 거칠고 두꺼운 밧줄이 들어 있었다. 그 사람이 이것을 어디서 구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은, 한결은 주현이 폭주하고 3년 후에 C동에 들어왔다. 주현보다 다섯 살이 많았는데, 형처럼 다정하게 챙겨 준 그를 주현은 무척 따랐었다.
그러나 부드러운 만큼 성정이 유약했던 한결은 폭주 에스퍼로서의 삶을 잘 견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