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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28/161)

폭주 에스퍼 25화

주현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잊어 본 적 없다. 그날의 참상은 아직도 생생하게 꿈에 나타나곤 한다.

그럼에도 후드를 덮어쓰고 벤치에 앉아 있다 보면. 불이 꺼진 가로등 아래에서 차인호와 손잡고 있다 보면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이다. 마치 목에 폭탄이 달리지 않고, 주머니에 권총이 없는 듯한.

조금 전에 사람을 죽이고 오지 않은 것처럼. 그저 늦은 시간 밤 산책을 즐기는 평범하고, 위험하지 않고, 어디에나 흔히 있는 그런 사람이 된 것처럼.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자신이 분수에 맞지도 않는 꿈을 꿀 정도로 긍정적인 사람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주현이 슬그머니 팔을 움직이자 차인호는 미련 없이 손을 놓았다. 양손을 주머니에 쑤셔 넣은 주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 슬슬 가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시간이 꽤 지났네요. 볼도 가라앉았고. 이만 돌아갈까요?”

“그거야 그쪽이 알아서 정해야죠.”

피식 웃은 차인호가 벤치에서 일어났다. 땀이 마른 얼굴로 잠시 바람을 만끽하던 그는 천천히 돌아서서 주현 앞에 섰다.

“밖에서 만날 수 있어서 반가웠어요.”

왜?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는데도 차인호는 주현의 의아함을 알아챈 것 같았다. 어쩌면 주현이 생각보다 속내를 숨기지 못하는 사람인 걸지도 모르고.

“그거 알아요? 아까 그 많은 사람 중에서 주현 씨를 알고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어요.”

후드 아래에서 검붉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거리에서 마주친다면 누구라도 비명 지르며 도망칠 악마의 눈을 들여다본 차인호는, 뭐라고 해야 할까……. 황홀하다? 그것 말곤 마땅한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

자신의 지식 부족을 욕한 주현이 차마 시선을 피하지도 못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거야, 당연하죠.”

“그런데 절 알고 있는 사람도 당신뿐이에요.”

가끔 묘한 말을 하는 차인호는 이번에도 무슨 뜻인지 말해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주현은 가벼운 인사와 함께 멀어지는 등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곳에 앉아 있으며 범규와 한나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의 예상대로 죽어 버린 한나와 기쁠 땐 웃고, 슬플 땐 울어야 한다던 범규. 그게 중요한 거라고 말했던 범규.

어둠 속에서 잠시 더 시간을 보낸 주현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현관문을 두드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범규가 나왔다. 그는 눈물로 젖었으면서도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뒤따라 나온 그의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는데, 고작해야 만난 지 몇 분 만에 그들이 얼마나 화목한 가정이었는지 손에 잡힐 듯 보였다.

“몸조심하고. 응?”

“알았다니까. 엄마야말로 등산 적당히 다녀요. 다칠까 봐 걱정돼.”

“네 엄마는 내가 알아서 지킬 테니까 너나 항상 조심해. 다음에 또 시간 나면 언제든 집에 와라.”

세 가족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범규가 폭주 에스퍼라는 사실은 어떠한 장애물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아뇨, 괜찮습니다.”

“오늘 주현이 형 덕분에 집에 올 수 있었던 거야. 형, 인사해. 이쪽은 우리 부모님.”

싱글벙글 웃으며 팔을 잡아끄는 범규를 차마 뿌리치지 못한 주현이 쭈뼛거리며 중년 부부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신주현이라고 합니다. 범규와 함께 일하고 있는, 동료입니다.”

누군가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경험이 그리 많지 않은 주현이 어색함을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붉은 눈이 무서울까 봐 시선은 땅에 고정한 채였다.

“안 그래도 아까 범규가 말해 줬어요. 늘 잘 챙겨 주신다고.”

살가운 성격이 아닌 주현은 그다지 범규를 챙긴 기억이 없으나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주현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자 여전히 기쁨에 젖어 있는 얼굴이 환하게 웃었다. 눈이 마주쳤음에도 감사가 담긴 눈동자에 두려움이 차오르는 일은 없었다. 마치 차인호처럼.

괜히 옷깃을 정리하는 척 초커를 숨긴 주현이 두어 걸음 물러났다. 범규가 다시 한번 부모님과 포옹했고, 주현은 그들 모두가 살아서 헤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깊이 감사했다. 폭주한 범규가 손에 피를 묻히는 것과 눈앞에서 아들의 머리가 터져 나가는 것. 둘 다 너무 끔찍하니까.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다. 두 사람의 불길한 눈동자가 가려질 정도로.

돌아가는 길, 오랜만에 부모님을 만난 게 좋은지 범규는 날아갈 듯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원래 사소한 일로도 큰 소리로 웃는 범규지만 이토록 행복해 보이는 미소는 처음이었다.

“주현이 형, 오늘 진짜 고마웠어. 사실 허락해 줄 거라고 기대 안 했거든.”

“나도 내가 허락해 줄지 몰랐어.”

말 그대로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누구 한 명이라도 두 사람이 임무 현장을 벗어났다는 걸 알아챘다면 그 자리에서 머리가 날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운 좋게도 둘의 짧은 일탈을 알아챈 사람은 없었다.

물론 차인호가 있기는 하지만, 그가 다른 이들에게 말할 것 같지는 않았다. 주현은 자신이 언제부터 차인호를 이렇게 믿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계하고 꺼렸던 것 같은데.

물론 경계심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그는 너무나도 수상하니까. 그러나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조금 들었을 뿐이다.

어차피 1년은 함께해야 하니 이왕이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주현은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변명 같은 생각을 하며 눈을 깜빡였다.

주현과 범규는 원래 임무 장소였던 버려진 항구를 어슬렁거리며 자동차가 대기하고 있을 장소를 향해 걸었다. 원래 세웠던 계획보다 조금 늦어졌으나 현장에선 늘 생각지도 못한 일로 시간이 늘어지곤 한다. 이 정도로 직원이 수상하게 여기진 않을 것이다.

“부모님은 어때?”

“건강해 보이더라. 나 아빠가 그렇게 우는 거 처음 봤어.”

워낙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으나 범규의 눈시울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 그러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있어서 주현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형이랑 누나는 못 만났지만 둘 다 잘 지내고 있대.”

“아쉽겠네.”

“괜찮아. 부모님 만난 것만으로도 만족해. 그리고 살다 보면 언젠가는 또 이런 날이 오지 않겠어?”

주현은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그다지 특별한 말도 아닌데 직접적으로 들어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그의 인생은 내내 시궁창이었고, 내일 아침이 오늘보다 나을 거라고 기대해 본 적이 없어서.

범규가 또다시 임무 중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가족과 만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애초에 범규는 시내 쪽으로 임무가 배정되는 일이 거의 없고, 설령 배정받는다 해도 다른 사람과 동행할 텐데, 허락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운 좋게 허락받아도 그때야말로 머리가 날아갈지도 모른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에스퍼의, 특히나 폭주 에스퍼의 고질병이다.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이 많았지만 굳이 뱉어서 분위기를 해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주현은 슬며시 웃으며 범규의 희망을 살려 주기로 했다. 비록 언젠가는 희망이 부서지고 훨씬 큰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미래가 오겠지만, 그래도 하루 정도는 행복해도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 혹시 모르지. 살다 보면 또 좋은 날이 올지.”

팅팅 부은 범규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형. 몰랐는데, 웃으니까 예쁘네.”

“넌 감사 인사를 원래 그렇게 징그럽게 해?”

“아니, 진짜로.”

이게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태어난 곳이 그러하듯 어둠에 빠져 평생을 불행하게 살아야 하는 신주현이 웃어서.

변명하자면 너무 어두웠고, 파도 소리가 너무 컸고, 일탈이 들키지 않았다는 사실에 너무 긴장을 풀었고……. 그런 여러 이유가 합쳐져서 주현은 근처에서 들려오던 인기척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사소한 방심은 커다란 대가로 돌아왔다.

탕. 총성이 들림과 동시에 주현의 능력이 발동했다.

보이지 않는 힘에 순식간에 심장을 꿰뚫려 땅에 쓰러진 남자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까 범규의 만류로 죽이지 않고 살려 줬던 조직의 말단. 쭉 찢어진 눈을 가진 남자는 겁에 질린 얼굴 그대로 숨을 멈췄다.

그가 무슨 이유로 총을 들었는지는 모른다. 아마 약을 몽땅 잃어 버렸다는 죄로 조직에서 어떤 벌을 받을지 몰라 두려웠던 거겠지. 이유가 뭐든 상관없었다. 이미 죽었으니까.

“…….”

주현은 가슴을 감싸며 누워 있는 범규를 품에 안았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창백한 얼굴엔 고통이 가득했다.

이 정도 상처를 바로 고칠 수 있는 건 높은 등급의 가이드밖에 없다. 물론 당장 범규를 위해 달려올 수 있는 가이드는 없다. 그는, 그들은 폭주 에스퍼니까.

“혀, 형…….”

“말하지 마. 숨 쉬는 것에만 집중해.”

범규의 회색 후드티는 벌써 절반이나 붉게 물들었다. 강하게 압박해도 출혈이 멈추지 않았다.

주현의 머릿속에 번뜩 차인호가 떠올랐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그가 있고, 부르면 와 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마도.

“나, 죽…… 어?”

“에스퍼가 총알 한 발에 죽겠어?”

두 사람 다 에스퍼가 일반인보다 큰 상처를 입고도 일어날 수 있는 이유는 가이딩이 있는 덕분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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