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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27/161)

폭주 에스퍼 24화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온통 땀에 젖어선 발그레한 차인호가 웃으며 서 있었다. 머리는 흐트러지고, 얼굴은 자두처럼 발갰는데도 미모는 죽지 않았다.

잠시간 넋을 놓았던 주현은 아닌 척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쫓아온 사람은 없으니까 안심하세요.”

“일하던 거 아니었습니까?”

“그렇긴 한데 괜찮아요. 어차피 상대 배우가 지각해서 촬영이 늦어진 거라. 저도 복수했다고 치죠, 뭐.”

“스태프들은 무슨 죄인데요?”

어깨를 으쓱인 차인호가 벤치에 앉았다. 아이 한 명 정도 앉을 수 있을 틈을 남겨 둔 그가 기분 좋은 얼굴로 웃었다.

“차인호가 촬영장에서 얼마나 안하무인인지 소문날 거 각오하고 온 건데, 뭐 할 말 없어요?”

땀에 젖은 얼굴이 불쑥 다가왔다. 분명 가로등은 꺼져 있는데 차인호의 눈은 반짝이고, 이마에 묻은 땀방울도 그러하고, 약간 부어오른 볼이 선명하고. 소리가 크다 싶더니 역시나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뺨을 가만 보던 주현이 정면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전 오라고 한 적 없는데요.”

생각보다 더 투정 부리듯 나온 말에 목덜미가 뜨끈해지는 게 느껴졌다.

가벼운 웃음을 흘린 차인호가 벤치에 등을 기댔다. 그에게선 은근한 향수 냄새와 희미한 땀 냄새가 뒤섞인 묘한 향이 났다. 솔직히 나쁘지 않았다. 옆에서 흘러나오는 방사 가이딩에 불안했던 마음이 약간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가이딩에는 파장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부분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나 보다. 주현이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더운지 옷깃을 잡고 팔락인 차인호가 숨을 고르듯 깊은 숨결을 내쉬었다.

문득 주현은 의아해졌다. 차인호는 왜 땀이 날 정도로 뛴 걸까? 왜 그를 찾아 이런 곳까지 온 걸까?

‘조심해라.’

가람의 목소리가 또다시 어디선가 들려왔다. 한 번 흔들린 탑은 무너질 때까지 진동을 멈추지 않는다.

가이드에게 집착하게 되는 것은 모든 에스퍼의 공통된 습성인가? 주현은 주머니 속에서 권총을 어루만졌다. 불과 한 시간도 되기 전에 한 사람의 인생을 끝내고 왔다고 하면 차인호는 무슨 표정을 지으려나.

우습게도 알고 싶지 않았다. 이왕이면 영원히.

“저 보러 온 거예요?”

“아뇨. 그냥, 주변에 올 일이 있어서 어쩌다…….”

“폭주 에스퍼는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하는 줄 알았어요.”

그 목소리엔 조롱이나 떠보는 듯한 가벼움이 없었다. 그러나 그저 의문만 담긴 것도 아니어서 주현은 겸연쩍은 기분으로 대답했다.

“마음대로 못 돌아다니는 거 맞습니다. 이러고 있는 거 들키면 폭탄 터뜨릴걸요.”

만약 C동에 있는 누군가가 위치 추적기를 확인하고 직원을 임무 현장에 보내 그들이 없다는 걸 확인한다면 망설임 없이 스위치를 누를 것이다.

“폭탄?”

옷깃을 내린 주현이 목을 감싸고 있는 굵은 초커를 내보였다. 그러고 보니 평소엔 스카프로 가리고 다니는 터라 차인호에게 여러 기계가 붙어 있는 목줄을 보여 주는 건 처음이었다.

“터져도 제 머리만 날아가고 끝이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옷은 좀 더러워지겠지만.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삼킨 주현이 가볍게 다리를 떨었다.

담배를 물고 싶었지만, 예전에 차인호가 담배 냄새가 배면 안 된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촬영 중이니까. 카메라에 냄새도 담기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러고 보니……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차인호의 미간을 구기기 위해 애썼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주현은 그의 눈치나 살피며 순진한 개를 연기하게 되었을까.

조심하라는 가람의 말, 적갈색으로 말라붙은 차인호의 시계. 번갈아 떠오르는 모순된 사실에 머리가 어지러워 주현은 당장 생각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일단 미뤄 놓기로 했다.

겁에 질리든 안도하든 무슨 말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차인호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머쓱하게 아랫입술을 혀로 문지른 주현이 슬그머니 옆을 보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초커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공포도 분노도, 하다못해 호기심조차 없는 시선에 주현은 서둘러 옷으로 초커를 가렸다. 그제야 차인호의 까만 눈동자가 움직여 주현의 얼굴을 담았다.

“여기 상처가 있네요.”

늘 그렇듯 따뜻한 손이 주현의 볼을 스쳤다. 며칠 전 범규 때문에 났던 생채기가 순식간에 아무는 게 느껴졌다.

“팔은 다 나았어요?”

“네, 덕분에.”

조금 더 바짝 다가온 차인호가 옷감에 감싸인 주현의 팔을 가볍게 주물렀다. 상처를 방치한 탓에 흉터는 남았으나 다른 부작용 없이 완전히 나았다. 물론 차인호의 가이딩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현의 대답에 코앞까지 다가온 차인호는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듯 부드럽게 웃었다. 그 산뜻한 미소에 주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리 범위가 좁다지만 그래도 폭탄이 있다는데 멀어지긴커녕 더 가까이 붙는 차인호가 수상쩍었다.

“임무 갔다 오는 길이에요?”

“네.”

“그럼 피곤하시겠네요.”

아무래도 오늘 차인호는 밀지 않고 당기는 콘셉트인 것 같다.

주현의 손을 잡은 그가 새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이 앉은 곳은 빛이 없어 어둡지만, 그만큼 다른 벤치보다 달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자리였다.

“안 무섭습니까?”

제가 물은 주제에 움찔한 주현이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떨어진 곳에 있는 가로등 주변으로 빛에 이끌린 벌레들이 날아다니는 게 보였다.

“폭탄이 터질까 봐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물음에 주현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차인호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떠올리고 황급히 손에서 힘을 풀었지만.

“목에 폭탄 달고 있는 사람 앞에서 어떻게 겁을 먹어요.”

주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차인호를 바라보았다. 풍성한 속눈썹이 깜빡임에 따라 가볍게 흔들렸다. 그는 여전히 밤하늘을 감상하고 있었다.

할 말이 없던 주현도 따라서 턱을 들었다. 별이 거의 없어서 그다지 예쁘지도 않은데, 그래도 새파란 하늘 아래보다는 훨씬 숨쉬기 편했다.

맞잡은 손바닥이 따끈따끈했다. 벌써 피로가 완전히 사라졌지만, 주현은 그 사실을 차인호에게 말하지 않았다. 나쁜 짓일지도 모른다. 가이딩을 하고 나면 가이드는 기력이 빠진다고들 하니까. 촬영을 더 해야 할 텐데 그가 지치면 많은 사람에게 폐를 끼칠 것이다.

그러나 주현은 무서운 괴물, 폭주 에스퍼다. 영화 속 괴물은 보통 이기적인 편이 아닌가?

주현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차인호가 조금 더 강하게 손을 잡았다. 까만 하늘에서 별이 하나 반짝였다.

불편하지 않은 침묵이 몇 분 정도 지났을까. 돌연 차인호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까 그 부분, 엄청 슬픈 장면이었는데.”

아직도 약간 부어 있는 볼이 즐겁게 위로 올라갔다. 주현을 발견하기 직전, 상대 배우에게 뺨을 맞은 장면을 말하는 듯했다. 확실히 거리 때문에 주현은 대사조차 못 들었으나 표정만 봐도 참 슬프긴 했다.

“대사는 떠올랐지만 감정선이 무너져서 연기를 못 하겠더라고요. 슬프고 고통스러워야 하는데 완전히 상반된 감정을 느꼈으니까.”

일반적으로 슬픔의 반대는 기쁨이다. 그렇다면 차인호는 주현을 본 순간 기쁨을 느꼈나?

주현은 그 추측을 떠올리자마자 곧장 마음속 쓰레기통에 쑤셔 넣었다. 그를 발견했다고 차인호가 기쁠 이유 따윈 없으므로.

“나무 사이에서 주현 씨 얼굴을 봤을 때, 처음엔 환각인 줄 알았어요.”

“귀신이 아니라요?”

“사실 그 생각도 했어요.”

차인호의 말은 농담과 진담을 구분하기 어렵다. 이번에도 구분하기를 포기한 주현이 더 이야기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진짜라는 걸 안 순간 촬영 중이라는 것도 잊고 웃음이 나온 거 있죠?”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서, 주현은 못 들은 척 입을 꾹 다물곤 괜히 바닥을 앞코로 두드렸다.

“밖에서 주현 씨를 만날 수 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우연과 우연이 겹쳐서 일어난 일이긴 했다. 범규가 부모님을 보고 싶다 하지 않았다면, 그 소망을 주현이 거절했다면, 공원으로 오지 않았다면 둘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어차피 며칠 후면 C동에서 만났을 테니 딱히 지금 만난다고 뭐가 달라지는 건 없지만.

“오늘 임무는 어땠어요?”

“그냥 평범했습니다. 다른 동료와 둘이서 갔는데 예상보다 빨리 끝났어요.”

“그거 잘됐네요.”

촬영장과 상당히 떨어진 곳이라 주변에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파사삭, 밤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나뭇잎들이 부딪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이 온통 나무로 둘러싸여 산속에 있는 C동과 닮은 것 같으면서도 근본적으로 완전히 달랐다.

주현은 사방이 탁 트인 공원을 훑어보았다. 전기가 통하는 철조망 따윈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할 일 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야말로 시한폭탄이자 위험인물인 의미 그대로의 살인자. 결코 곁에 있으면 안 되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괴물. 공원에 있는 사람 누구도 자신 곁에 어떤 괴물이 있는지 모른다.

폭주 에스퍼의 무단이탈은 테러로 취급된다. 다시 말해, 근처에 있는 사람 모두가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과 같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차인호는 옆에 있는 게 우리에 가둬 둬야 할 폭주 에스퍼가 아니라는 듯 웃고 있다.

신주현은 평범한 사람이 아닌데. 11년 동안 단 한 순간도 평범해져 본 적 없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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