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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26/161)

폭주 에스퍼 23화

“미쳤어? 우리 폭주 에스퍼야. 언제 어디서 다시 폭주할지 모르는데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마음이 풀렸는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범규는 조금 붉은 눈으로 입술을 삐죽였다.

“당장 한두 시간 안에 폭주할 것 같지는 않아.”

“그건 아무도 모르지. 너 아까는 나보고 사람 죽이지 말라며. 도시 한복판에서 네가 폭주하기라도 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휘말릴지 모르겠어?”

낮고 빠르게 흘러나온 말에 범규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적을 상대할 때처럼 위협적인 말투라 미안했지만 주워 담을 생각은 없었다.

처음 폭주하고 나면 C동에서 팔다리가 묶인 채 자신이 타인에게 얼마나 위험한지 뇌에 박히도록 교육받는다.

수 시간 동안 영상으로 폭주 에스퍼에게 사망한 이들의 가족, 무너진 건물, 비명, 피, 날리는 흙먼지를 보고 나면 죄악감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차오른다. 애초에 자신이 했다곤 믿을 수 없는 참상을 듣고 나면 스스로가 두려워져서 사방이 막힌 C동이 감사하기까지 하다.

범규는 폭주한 지 이제 겨우 반년밖에 되지 않았다. 아직 때때로 폭주했을 때의 감각이 떠올라 몸서리친다는 걸 알고 있는 주현은 범규의 말을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알아. 아는데……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어.”

눈물은 이미 그쳤는데도 어째서인지 울고 있을 때보다 훨씬 처량한 목소리였다. 단 한 번도 그런 감정을 느껴 본 적 없는 주현은 입술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기회가 다시 올지 모르잖아.”

“…….”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르고…….”

범규가 시선을 내리며 속삭였다. 주현과의 대화로 자신의 죽음을 보다 선명하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평소였다면 주현은 절대로 안 된다고 못 박았을 것이다. 끝까지 우긴다면 능력을 사용해서라도 끌고 갔을 터다.

그러나 오늘은 평소와 다른 점이 많았다. 평범한 후드티를 입었고, 목격자를 죽이지 않았고, 오랜만에 과거를 떠올렸고, 누군가에게 속에 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주현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에 반쯤 가려진 달이 희미하게 떠올라 있고 별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검은 밤이었다.

범규는 C동에서 유일하게 가족과 연락하는 에스퍼다. 수화기를 잡고 웃는 얼굴을 몇 번이나 봤는지 모른다.

“우리 집 여기서 가까워. 진짜 부모님 얼굴만 잠깐 보고 올게. 응?”

“들키면 죽을 수도 있어.”

“절대 안 들킬게. 들켜도 나 혼자 무단으로 도망쳤다고 할게. 형한테 피해 가는 일 없을 거야.”

폭주 에스퍼의 탈주는 테러로 취급된다. 함께 가지 않았어도 마땅한 이유가 없다면 주현도 처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도 무조건 안 된다고 말해야 했다.

그러나 정신 차리라고 외치는 대신 주현은 손목에 감긴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자정을 막 넘긴 시간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임무를 마쳤기에 한 시간 정도 늦게 가도 의심받지는 않을 터다. 목에 찬 초커 때문에 위치는 알려지겠으나, 임무에 나가는 에스퍼들의 위치를 매시간 확인하는 사람은 없다. 주현의 초커 속 GPS가 고장 났다는 것도 3일 만에야 알아챘으니 말 다한 셈이다.

커다란 한숨을 내쉰 주현이 두 손을 꼭 모은 범규에게 말했다.

“딱 한 시간이야.”

“지, 진짜? 가도 돼? 알았어! 한 시간!”

“대신 네가 폭주하면 난 망설임 없이 널 쏜다. 너도 그렇게 해야 해.”

범규의 머리통이 몇 번이고 위아래로 흔들렸다. 매서운 눈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현은 차갑게 식은 손가락으로 주머니 속 권총을 매만졌다.

죽는 건 두렵지 않다. 죽이는 게 두려울 뿐.

불과 몇십 분 전에 망설임 없이 남자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긴 했으나 그것은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었다.

폭주하고 3년 정도 지난 어느 날, 더 이상 이런 일을 하고 싶지 않다고 외친 주현을 위해 그의 임무를 대신 받았던 에스퍼가 있다. 그는 주현이 미룬 임무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그 후로 주현은 제 임무를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았다.

“앞장서.”

“어?”

“너희 집 간다며.”

“……응!”

입술을 꾹 깨물며 벌어지려는 입을 다문 범규가 기쁨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크게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며 설령 테러 위협으로 사살당한다 해도 아쉽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한 주현이 천천히 범규의 뒤를 따랐다.

자정이 넘은 시간임에도 거리에는 사람이 제법 있었다. 주현은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에 숨도 쉬기 어려웠는데, 범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기서 자주 간식 사 먹었는데.”

익숙한 곳인지 손끝으로 가리키며 설명하는 범규의 두 눈은 그리움에 젖어 있었다.

“다른 데 눈 돌리지 말고 너희 집이나 가.”

“알았어. 아! 저 가게 처음 보는 건데. 언제 생겼지?”

“구범규.”

목 아래에서 긁어 올린 위협적인 목소리에 드디어 범규가 입을 다물었다.

가깝다던 범규의 주장과 달리 집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지만 사람 없는 곳에서 적당히 능력을 사용해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오고 싶어 했으면서 막상 아담한 2층 주택 앞에 선 범규는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주현은 반년 만에 가족을 만나는 게 어떤 기분일지 잠시 상상했으나, 그런 경험이 없기에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얼른 들어가 봐.”

“자는 거 아냐?”

“자겠지. 불 꺼져 있잖아.”

몇 번이고 등을 두드리고 나서야 범규의 손가락이 초인종을 눌렀다. 한 번도 아니고 다섯 번을 누르고 나서야 현관문이 거칠게 열렸다.

“누가 이 시간에-!”

“엄마.”

잠옷 위에 카디건을 걸친 중년 여인은 범규와 무척 닮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야밤에 잠에서 깨어나 잔뜩 일그러졌던 미간은 범규를 보자마자 순식간에 펴졌다.

“오랜만이야.”

“버, 범…….”

입술을 뻐끔거리던 그녀는 멀찍이서 봐도 덜덜 떨리는 팔을 뻗어 범규를 끌어안았다. 무너지듯 안기는 몸을 지탱한 범규가 울면서 웃었다. 아들의 볼을 감싸 쥐는 손은 무척 조심스러웠는데, 꼭 건들면 사라질까 봐 두렵다는 듯한 손길이었다.

“여보, 여보! 얼른 나와 봐!”

비명처럼 외친 여인의 뒤로 범규와 꼭 닮은 입매를 가진 남자가 나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보던 주현은 그들의 너무 사적인 모습을 훔쳐보는 기분이 들었다.

아들인 폭주 에스퍼는 몰라도, 그냥 타인인 폭주 에스퍼는 두려울 게 분명하다. 잠시 망설이던 주현은 고작 한 시간 만에 폭주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으며, 정확히는 하늘에 빌며 천천히 골목 너머로 사라졌다.

* * *

차인호는 가이딩할 때 배우 일에 대한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다. 물어보면 말해 주긴 하겠지만 주현도 딱히 묻지 않았다. 다시 말해, 차인호가 이곳에서 촬영하고 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범규의 집에서 멀어진 주현은 최대한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곁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잔뜩 움츠린 채 성큼 멀어지는 모습이 상당히 수상했으나, 다행스럽게도 사람들은 타인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도착한 곳이 널찍한 공원이었다. 심야에 공원에 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11년 동안이나 고립된 곳에서 살았지만, 그 법칙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주현의 확신을 배신하듯 풀과 나무가 예쁘게 꾸며진 공원에선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어린 시절 잠을 자기 위해 새벽에 공원을 찾곤 했던 주현은 내심 놀랐으나 그보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컸다. 왔던 길을 돌아가려던 주현은 반대편에서 오는 커플을 발견하곤 그들을 피하기 위해 일단은 안쪽으로 향하기로 했다.

후드를 눌러쓰고 나무 사이로 몸을 숨기며 걷던 주현은 왜 이 시간에 이렇게 사람이 많은지 알게 되었다. 유독 크고 예쁜 나무 아래로 사람이 한 무더기 모여 있었는데, 커다란 카메라가 곳곳에 있어 촬영 현장이라는 게 멀리서도 확연했다.

혀를 찬 주현이 돌아서려던 찰나였다. 사람들 틈으로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잡혔다.

차인호는 꽃다발을 든 채 울 것 같은 얼굴로 앞에 선 배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늘 무표정이나 빙글빙글 웃는 얼굴만 봐 왔던 주현은 가벼운 충격을 느끼며 걸음을 멈췄다.

그가 무슨 말을 하자 앞에 선 배우가 뺨을 때렸다.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거리인데, 마찰음은 선명히 들릴 정도로 강한 타격이었다.

주현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눈을 깜빡였다. 때리는 척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돌아간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린 차인호가 입을 벌린 그 순간, 주현과 시선이 마주쳤다. 검은색 후드티를 입은 데다 나무 그늘에 숨어 있는 그를 발견하는 건 힘든 일이다. 그런데 운이 좋은 건지 뭔지, 차인호는 분명하게 주현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멈칫한 주현은 이유도 모른 채 시선에 붙잡혀 있었다.

상대 배우가 아닌 다른 곳을 보며 굳어 버린 차인호에 당황한 건 주현만이 아닌 것 같았다. 이어지지 않는 대사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결국 NG 사인이 나왔다.

차인호는 감독으로 보이는 사람과 대화를 주고받고는 꽃다발을 스태프에게 건네고 어딘가로 향했다.

물론 주현은 따라갈 생각은커녕 계속 구경할 생각조차 없었다. 망설임 없이 돌아선 그는 더욱 깊은 어둠을 찾아 공원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줄어들수록 마음이 안정되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잘 관리된 공원에서 어두운 곳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어떻게 꺼진 가로등 하나를 발견한 주현은 그 밑 벤치에 앉아 고요를 만끽했다.

벤치에 한쪽 발을 올리고 무릎에 턱을 괸 그는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참 찾았잖아요. 내가 헛것이라도 본 줄 알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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