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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25/161)

폭주 에스퍼 22화

한숨을 삼킨 주현이 허리를 굽혀 바닥에 엎드려 있던 남자를 잡아 올렸다. 눈물로 얼굴이 푹 젖은 남자는 이가 맞닿을 정도로 떨고 있었다.

“살, 살려-”

“넌 아무것도 못 본 거야. 알겠어?”

남자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컨테이너 틈새로 한순간 등대 빛이 번뜩였다.

“어디 가서 입이라도 벙긋해 봐. 끝까지 쫓아가서 죽여 버릴 거다.”

대답도 듣지 않고 얼굴을 때려 기절시킨 주현이 남자를 바닥에 내던졌다.

목격자를 죽이지 않았다는 불안과 기묘한 안도가 동시에 차올랐다.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으나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됐어?”

“응. ……그래도 나 아직 화 안 풀렸어.”

범규가 가리킨 손끝에는 눈도 감지 못하고 죽은 남자의 시신이 있었다.

이미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당시엔 그게 최선이라고 판단해서 한 행동이기에 주현은 사과할 생각이 없었다. 범규도 일단 한 명을 살려 준 데다 임무가 있기에 당장 더 따질 생각은 없는 듯했다.

주현은 기절한 남자의 두 손을 등 뒤로 모아 묶은 후 가장 가까운 컨테이너로 다가갔다.

끼익- 뻑뻑한 문을 열자 안에는 나무 상자가 잔뜩 쌓여 있었는데, 불법 가이딩 약물이 상자마다 가득 들어 있었다.

“엄청 많네. 이거 다 터뜨리면 되는 거지?”

“어. 그런데 잠깐만.”

평범한 학생인 척 위장하기 위해 메고 있던 가방을 내린 주현이 그 안에 약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채경이 형 주려고.”

가이딩 약물에 중독된 채경은 금단증상이 일어날 때마다 상당히 고통스러워한다. 주기적으로 가이딩을 받으면 나을 수 있겠지만 그럴 상황이 되지 않으니 고통이라도 줄이는 게 최선이었다.

C동은 가이드가 부족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에스퍼에 비해 가이딩 약물에 의존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아직 그에 익숙하지 않은 범규는 찝찝한 표정이었으나 채경이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봤기에 주현을 말리지는 않았다.

과정에 비하면 임무 자체는 우스울 정도로 쉽게 끝났다. 범규의 손짓 하나에 컨테이너 안의 모든 것이 터져 나갔다.

빈 컨테이너까지 샅샅이 확인한 두 사람은 기절한 남자를 두고 항구를 떠났다. 어두컴컴한 길을 걷는 동안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범규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고, 주현은 후드 주머니 속에서 권총을 움켜쥔 채 긴장하고 있었다.

“아까 봄이 누나랑 승철이 형한테 맞을 거라는 게 이런 뜻이었어?”

범규의 목소리에는 묘하게 힘이 없었다. 바닥에 고정된 범규의 검붉은색 눈동자가 희미하게 빛났다.

“다들 이런 임무를 맡는 거야? ……사람 죽이고 그런 거.”

주현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침묵은 가끔 훌륭한 긍정이 되곤 한다. 범규의 발끝에 차인 깡통이 큰 소리를 내며 저 멀리 굴러갔다.

“안 슬플 만하네. 매일 살인을 하는데 한 사람 더 죽었다고 왜 눈물이 나오겠어.”

“우리가 원해서 한 건 줄 알아?”

생각보다 더 매섭게 나온 말이 고요한 항구를 울렸다. 멈춰 선 주현보다 몇 걸음 앞서 걷던 범규가 뒤돌아섰다.

“그렇게 쉽게 누군가를 죽이면 안 되는 거잖아. 이런 일을 하면 안 되는 거잖아. 이런 일을 시키면 안 되는 거잖아.”

범규는 울고 있었다. 두 눈을 벌겋게 물들이고 온 뺨을 눈물로 적신 채 입술을 꾹 깨물며 울고 있었다.

치솟았던 분노는 애처로운 얼굴을 보자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늘 주현의 어깨에 매달려 있는 망자가 오늘따라 유달리 무겁게 느껴졌다. 소매로 아무리 닦아도 눈물이 쉽사리 그치지 않는지 코를 훌쩍인 범규가 축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나 누나가 죽은 거 슬퍼?”

“……그래.”

“그런데 왜 안 울어?”

짜디짠 바다 내음이 코를 스쳤다. 주현은 범규를 달래 주고 싶었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우는 게 그렇게 중요해?”

“중요하지. 기쁠 땐 웃고, 슬플 땐 울고. 그런 당연한 걸 안 하면서 산다고 말할 수 있어?”

한나의 죽음에 C동 에스퍼들이 울며 슬픔을 표현하지 않은 게 범규에겐 제법 큰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주현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누군가의 죽음에 숨이 넘어갈 듯 울었던 게 언제인지 생각했다. 과거를 곱씹어 봤으나 애초에 눈물을 흘린 일조차 까마득했다.

사실 폭주하기 전부터 감정에 따라 웃고 우는 게 당연한 삶을 살지 못했던 그는 범규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폭주 에스퍼가 된 이상 C동을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 죽음만이 유일한 탈출구고, 바깥과는 격리된 채 평생 회색 벽 안에서 살아야 한다. 목줄을 차게 되었으니 범규도 언젠가는 삭막한 현실을 깨닫고 울지 않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범규는 폭주 에스퍼의 삶을 산 지 고작해야 6개월밖에 되지 않았고, 그의 눈물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커다란 테트라포드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볼을 비릿한 바닷바람이 쓰다듬었다. 어느 정도 울음을 그친 범규가 쓰라린 눈을 문지르며 코를 훌쩍였다.

“왜 안 우냐고 물었지?”

갑작스러운 물음에 범규가 부어오른 눈으로 옆을 봤다. 주현은 새까만 바다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결국엔 전부 다 죽을 거라고 미리 생각해서 그런가 봐.”

평범한 후드티를 입은 그는 폭주 에스퍼가 아닌, 그냥 어디에나 있는 일반인처럼 보였다. 조금 지치고 우울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 등대 빛에 반사되는 검붉은색 눈동자만 아니었다면 누구라도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평소 범규는 주현을 보며 옷뿐만 아니라 몸을 감싼 분위기가 어딘지 위험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아마 다른 때보다 표정이 부드럽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난 C동에 11년 동안 있었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알아?”

범규가 고개를 저었다. 본인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 주현의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부드러움이 담겨 있었다.

“나도 몰라. 하나하나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으니까.”

“그 정도야?”

“그래. 결국 전부 다 죽을 거야. 폭주하든, 임무를 실패하든, 오작동으로 갑자기 폭탄이 터지든, 해가 떠오르는 게 너무 두려워지는 밤이 오든.”

범규는 주현에게도 그런 밤이 온 적이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냥 질문을 삼키고 입을 다물었다. 모든 일에 무관심하게 행동하는 주현이 이렇게 깊은 속내를 드러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괜한 질문으로 이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비관적인 생각을 하는 게 아니야. 그저 전부 다 예상 가는 일이라는 거지.”

“킁, 예상 가는 일?”

“응. 넌 예상했던 일이 벌어지면 무슨 생각이 들어?”

“……역시 이럴 줄 알았어?”

그제야 범규는 주현의, 다른 형과 누나들의 마음을 깨달았다. 한나의 죽음은 모두가 이미 예상한 일이기에 소식을 듣는다고 깜짝 놀라거나 울음이 터지지 않는 것이다.

슬픔은 상대의 죽음과 이후에 따라올 상실을 미리 생각한 순간에 겪었다.

주현뿐만이 아니다. 채경이나 봄, 세화, 그리고 승철까지. 모두가 서로의 죽음을 생각하고, 예상하고, 곱씹어서 곧 다가올 슬픔에 대비하고 있었다. 사례가 너무 많아서 생각하기 싫어도 사고가 그리 흘러간다.

동료의 죽음에 지나치게 익숙해졌다는 게 무슨 뜻인지 확실하게 알았다. 기껏 멈췄던 눈물이 다시금 터져 나왔다. 범규는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채 아이처럼 울었다.

주현은 등을 쓰다듬는다거나 어깨를 토닥여 주지는 않았으나, 시끄럽다고 자리를 뜨지 않았다. 나름대로 최선의 위로일 것이다.

범규는 문득 주현이 제대로 울어 본 적이 있기나 할지 궁금해졌다. 11년이나 그 삭막한 곳에 있으며 울 때 위로해 준 사람이 있기는 했을지.

새까만 바닷물이 흔들리고 등대 속 전등이 다시 한번 빙글 돌았다.

“그래도 난 내가 죽었을 때 형도 누나도 울어 줬으면 좋겠어.”

그들은 범규의 죽음도 이미 예상했을 것이다. 그가 죽으면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말과 함께 잊어 버리는 걸까?

“내 죽음에 엄청난 의미가 있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함께한 시간이 있으니까 눈물 정돈 받을 수 있는 거잖아.”

지금껏 범규도 에스퍼로 일하며 동료의 죽음을 몇 번이고 봐 왔다. 매번 슬펐지만, 장례식장에서 죽을 듯이 울고 나면 조금이나마 가슴이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기쁠 땐 웃고, 슬플 땐 울고. 전 세계 모든 사람이 말도 통하지 않으면서 같은 행동을 하는 데엔 이유가 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주현이 피식 웃었다. 여전히 바다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웃는 옆얼굴은 무척 다정해서, 범규는 주현에 대한 인상이 조금 달라지는 걸 느꼈다.

“그렇게 원한다면 울어 줄게.”

“약속했어. 잊지 마.”

“대신 너도 약속해. 앞으로도 누군가 죽으면 애처럼 엉엉 울겠다고.”

“애처럼 울지는 않았거든?”

놀리는가 했는데 어느새 범규를 바라보고 있는 주현의 눈은 무척 진지했다. 잠시 우물쭈물하던 범규가 다시금 소매로 눈을 문지르곤 대답했다.

“약속할 일이 아니잖아. 난 쭉 그럴 건데.”

말없이 가만 바라보던 주현은 벌떡 일어나며 범규의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승철이었다면 뿌리쳤겠지만, 주현이 그런 스킨십을 하는 것은 처음이라 범규는 싫다고 소리치면서도 손을 내치지는 않았다.

“이제 돌아가자.”

후드를 뒤집어쓴 탓에 주현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코를 한 번 더 훌쩍인 범규가 따라 일어났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를 바다가 고요하게 그들을 배웅했다.

* * *

“형. 우리 생각보다 임무 빨리 끝난 거 맞지?”

범규가 그렇게 물은 것은 항구를 거의 다 빠져나온 때였다. 몸을 긴장시킨 채 주변을 살피던 주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놀다 갈래?”

목이 뻐근할 정도로 빠르게 고개를 돌린 주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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