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4/161)

폭주 에스퍼 21화

혹여나 모를 감시를 피하기 위해 한참 떨어진 곳에서 내린 두 사람이 항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버려진 항구라서 주변에 민가나 상가가 많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폭주하면 어쩌지? 혹은 우리가 폭주 에스퍼라는 걸 알아본 사람들이 비명 지르며 도망치기라도 하면? 폭주하고 폭탄이 터지기 전에 선량한 사람을 살해한다거나…….

주현은 머릿속이 복잡했는데, 불과 반년 전까지만 해도 자유롭게 밖을 돌아다녔던 범규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와, 바다 냄새 진짜 오랜만이다. 주현이 형, 얼른 와!”

아까까지만 해도 어색하게 따라오던 주제에 비릿한 바다 내음에 흥분했는지 범규가 활짝 웃으며 주현을 불렀다.

분위기가 경직되어 있는 것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풀어지는 것도 문제다. 주현은 누가 없나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목소리 낮춰. 우리 놀러 온 게 아니라 일하러 온 거야.”

“나도 알아. 매일 게이트만 뺑뺑이 돌다 보니 사람 사는 곳 오는 게 즐거워서 그랬어.”

범규도 눈치가 있는 사람인지라 C동의 다른 에스퍼들이 자신처럼 게이트에만 보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내가 폭주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 거 맞지? 언제 또 그렇게 될지 모르니까. 그래도 드디어 나도 편한 임무에 오게 됐네.”

“편한 임무?”

가로등마저 꺼진 항구에는 저 멀리서 번쩍이는 등대 불빛만이 전부였다.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지 기쁜 표정을 짓고 있는 범규를 잠시 바라본 주현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 그거 봄이 누나랑 승철이 형 앞에서는 말하지 마. 얻어맞는다.”

범규가 왜냐고 물었지만 주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주현은 사람을 죽이고 살아나는 것보다 괴물에게 잡아먹히는 게 훨씬 더 행복하다는 걸 알고 있다. 능력의 특성상 여기저기 자주 불려 가는 봄과 살인에 유독 거부감이 많은 승철이 듣는다면 분노 이전에 상처받을 게 분명했다.

인기척을 죽이고 한참 걷자 사전에 들었던 컨테이너가 즐비한 장소가 나왔다. 낡고 녹이 슬어서 누가 봐도 버려진 곳이었으나, 그렇기에 나쁜 짓에 사용하기 딱 좋았다.

정보에 따르면 약물을 싣고 온 배는 이미 떠났다고 한다. 단속을 피해서 컨테이너에 약물을 두고 내일 옮길 예정이라고.

그러니 오늘 이곳에 있는 걸 전부 다 없애야 했다. 이렇게 많은 약물이 유통된다면 얼마나 많은 이가 중독될지 모른다.

그게 바로 임무를 내린 협회의 주장이었으나, 사실 주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불법인 걸 알면서도 가이딩 약물에 손대는 이유는 간단했다. 가이딩이 부족하니까.

모든 가이드는 협회에 등록되어 있고, 응급 상황이나 매칭이 아닌 이상 멋대로 가이딩하는 것은 불법으로 지정되어 있다. 협회가 가이드를 손에 쥐고 있기에 가이딩을 받지 못하는 에스퍼가 있다. 그들은 살기 위해 약물에 의존하는 것이다.

바로 그의 곁에도 약물에 중독된 사람이 있기에 더더욱 이 일이 꺼려졌다.

그러나 이미 임무는 내려왔다. 주현이 실패한다면 결국 다른 사람에게 같은 일이 돌아갈 것이다. 어차피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라면 그가 하는 게 낫다.

조심히 걸음을 옮긴 주현이 따라오라고 범규에게 손짓했다. 주현의 능력으로 컨테이너 위로 올라간 두 사람은 몸을 낮춰 아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이 일 끝나면 보너스 나온다는 소문 진짜야?”

“당연하지. 양을 봐라, 양을. 이렇게 많이 들여온 건 처음이잖냐.”

총을 어깨에 걸친 남자 두 명이 시시덕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 외엔 주변을 둘러봐도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돈이 되나? 얼마나 쩌는 약이길래. 하나 정돈 없어져도 아무도 모르겠지?”

“아서라. 에스퍼한테만 효과 있는 거야. 괜히 손댔다 모가지 날아가지 말고.”

눈이 째진 남자의 말에 턱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타박했다. 주변에는 컨테이너가 몇 개나 쌓여 있었다. 이 중 얼마나 많은 컨테이너에 약이 들어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은 양은 아닐 게 분명했다.

“내일이면 잠 좀 잘 수 있겠네. 협회 놈들이 이곳을 알 리가 없는데 왜 망 따위를 서야 하는 거야?”

“그래도 덕분에 며칠 밤새우는 걸로 우리가 큰돈을 가질 수 있는 거니까.”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작은 캠핑 의자에 앉았다. 팔짱을 끼고 고개 숙이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잠시 눈이라도 붙이려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약을 밀수한 조직의 말단인 듯 자세한 정보는 모르는 듯했다. 그렇다면 더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주현은 후드 밑에서 소음기가 달린 총을 꺼내 남자에게 겨눴다.

퓩- 작은 소리와 함께 날아간 총알이 정확히 남자의 뒤통수에 꽂혔다. 덩치 큰 몸이 앞으로 쏠리며 의자에서 떨어지자 바다를 보고 있던 눈이 째진 남자가 서둘러 다가갔다.

“왜 그래?”

엎어져 있던 몸을 뒤집은 그는 초점 없는 눈과 흘러내리는 피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시신을 밀어 냈다.

주현은 망설임 없이 눈이 째진 남자를 향해 총구를 겨눴지만, 날아간 총알은 한참 떨어진 컨테이너에 맞았다. 주현의 팔을 잡은 범규는 충격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그건 내가 할 말인 것 같은데.”

날카로운 목소리에 주현이 실수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아챈 범규는 당황한 눈치였다. 미동조차 없는 시신을 내려다본 그가 분노와 혼란이 뒤섞인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왜…….”

“왜 죽였냐고? 그야 임무에 방해되니까.”

“우리 임무는 약을 없애는 거잖아. 누굴 죽이라는 말은 없었어!”

은밀하게 움직이라는 말은 목격자를 남기지 말라는 뜻과 같다.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던 주현은 아래쪽에서 움직이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컨테이너를 때린 총알 소리에 자신도 안전하지 않다는 걸 깨달은 남자가 통신기를 꺼내 무언가 말하려 하고 있었다. 떨리는 손 때문에 버튼이 잘 눌리지 않는지 욕을 중얼거리는 게 들려왔다.

혀를 찬 주현은 범규를 밀쳐 내곤 곧장 남자를 향해 뛰어내렸다.

탁, 능력을 사용해서 가볍게 착지한 주현이 남자를 걷어차곤 바닥에 떨어진 통신기에 총알을 박아 넣었다. 고작 수 초 만에 이어진 동작은 물 흐르듯 부드러웠다.

괴물보다 사람을 상대하는 데 익숙한 자신을 비웃으며 주현이 남자를 향해 총을 겨눴다. 그러나 주현은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눈을 꾹 감았다 뜬 그가 옆으로 돌아섰다.

“또 뭐가 문젠데?”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여?”

“그런 건 나중에 따지고 비켜. 일하기 싫으면 돌아가든가 해. 나 혼자 알아서 할 테니까.”

“이러니 한나 누나가 죽었다는 말에 울지도 않지. 매정한 살인자들이니까!”

주현이 움직임을 멈췄다.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던 남자가 바닥을 기며 멀어지려 해 폭주 에스퍼는 단단한 부츠로 그 등을 짓밟았다.

“잘 들어. 여기서 이 자식을 살려 두면 결국 정보가 퍼지기 마련이야. 그럼 피해는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받는다고.”

떳떳하지 못한 조직인만큼 공격당했다는 말을 쉽게 퍼뜨리진 못하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빌미를 주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전 아무것도 몰라요.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

남자는 잔뜩 겁에 질려 울먹이며 빌었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게 두꺼운 부츠 너머로 여실히 느껴졌다.

주현은 남몰래 볼 안쪽을 씹어 날카로운 통증을 이용해 정신을 차렸다. 동정심은 인간이나 베푸는 것이다. 괴물과 다를 바 없는 폭주 에스퍼에게 그런 것은 사치일 뿐이다.

망설임을 갈무리한 주현이 다시금 총을 겨누자 범규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살인이 정당화되지는 않아.”

에스퍼는 압도적인 강함 때문에 발현한 순간부터 주기적으로 안전 교육을 받는다. 시민을 지켜야 하고, 결코 그들에게 힘을 사용해선 안 되며, 능력은 오로지 괴물을 상대로만 쓸 수 있다는 안전 교육을.

물론 발현과 동시에 폭주한 주현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C동의 다른 에스퍼들은 누구나 교육을 받았다고 말했다.

보통 발현은 열네 살 정도에 하니 그때부터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반복해서 들어온 이야기에 흔들리지 않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주현은 단호한 얼굴의 범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짜고 비린 바다 냄새가 주변을 맴돌았다. 시체가 널브러져 있고 붉은 컨테이너가 쌓아 올려진 곳에서 서로를 노려보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 냄새가 더 향긋하게 느껴졌을지 궁금했다.

“굳이 죽일 것까지는 없잖아. 그냥 우리 일만 하고 가면 되는 건데.”

정의롭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순진하다고 말해야 할까.

주현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살려 준 죄로 지독하게 두들겨 맞았다. 명백한 목격자인 조직원을 살려 뒀다는 게 들키면 어떤 벌을 받을지는 몰라도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범규의 손을 들어 주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주현은 가질 수 없었던 순진함에 대한 열망? 이제 와서 치밀어 오르는 죄악감? 어쩌면 내내 등을 밀리기만 했는데, 잡아 주는 사람이 나타난 것에 취했을지도 모른다.

남자는 그들이 폭주 에스퍼라는 사실을 모른다.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고 애초에 에스퍼라는 사실조차 모를 가능성이 컸다. 설령 그들에 대해 조직에 말한다 해도 후드를 눌러쓴 남자 두 명이라는 것밖에 할 말이 없다.

‘그 정도는 괜찮을지도.’

힐끔 살펴본 범규는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 여전히 딱딱한 얼굴이었다. 범규는 주현보다 한 살 적다. 본인도 몰랐지만, 현재 C동에서 가장 어린 에스퍼인 그를 주현도 제법 아끼게 되었나 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