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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21/161)

폭주 에스퍼 19화

“내가 그 자식이 가이드라고 어디서 말할까 봐 그 전에 먼저 선수 쳤다는 생각 안 들어?”

주현 또한 가람의 말을 듣자마자 첫 번째로 떠올린 생각이긴 했다.

‘그래도…….’

주현은 끝까지 타들어 간 담배를 나무에 비벼 껐다. 안 그래도 가이딩이 부족한 상태인데 상처를 늘릴 필요는 없었다.

“아무튼 뭔가 뒤가 구린 느낌이야. 조심해라.”

라이터를 열자 딸깍하는 소리가 울렸다. 묘하게 중독성 있는 소리를 몇 번 더 듣던 주현이 라이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을 열었다.

“……단순히 타이밍이 안 맞았던 거 아닌가?”

“뭐?”

“발현하고 검사 결과 나오기 전에 너와 만나서, 어쩌다 보니…….”

목소리는 갈수록 작아졌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는 건 알지만 어째서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목소리가 먼저 나왔다.

차인호를 변호해 봤자 얻는 것은 없다. 가람이 준 정보를 가지고 경계를 더 세우며 숨죽이는 게 최선인데 왜 주현은 더듬더듬 차인호를 대신해서 변명이나 지껄이고 있는가.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으나 뱉은 말을 주워 담는 방법은 없다.

어쩔 수 없는 일에 매달리지 않는 주현이 입을 다물었다.

“너…… 아니다, 됐다. 나도 아마 같은 말 했겠지.”

“뭐야. 왜 말을 하다 말아. 신경 쓰이게.”

“그냥 너도 에스퍼구나 싶어서.”

가람은 미묘하게 웃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이유는 몰라도 내려다보는 시선에 갸륵함이 담겨 있어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 내가 에스퍼지 가이드겠어? 그 거지 같은 렌즈 좀 빼. 제대로 보지도 못하네.”

절로 까칠하게 나간 말에 가람은 평소처럼 달려들지 않았다. 그저 눈을 크게 뜨곤 영혼 없는 얼굴로 중얼거렸을 뿐이다.

“성질 더러운 폭주 에스퍼랑 수상쩍은 가이드. 괜찮네. 잘 어울리네. 백년해로해라.”

1년 계약이라는 걸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다. 1년 후 매칭 가이드가 없어질 거란 사실을 가람이 알게 되면 엄청나게 놀릴 게 틀림없으므로.

그때, 가람의 주머니에 들어 있던 통신기에서 수습이 끝났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임무가 끝났다.

서둘러서 멀어지는 커다란 날개를 보며, 주현은 마른세수를 했다.

* * *

주현이 사인한 계약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가이딩은 일주일에 두 번, 차인호가 원하는 날에. 당장 오늘 너덜너덜한 꼴로 임무에서 돌아왔다 해서 바로 가이딩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원래는 이것조차 없는 게 당연한데, 인간은 욕심의 동물이라는 게 사실인 모양이다.

지저분한 흙먼지를 차가운 물로 흘려보낸 주현이 세로로 금이 간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두 눈은 평소보다 훨씬 더 짙게 물들어 있었고, 출혈이 많았던 탓인지 피부가 창백했다.

벨트 자국이 남은 팔에는 괴물의 뿔에 찢어진 살갗이 흉한 상처를 내보이며 빠끔히 열려 있었다. 가이딩을 받으면 금방 낫겠지만 지금 그를 가이딩할 사람은 없다.

주현은 익숙한 솜씨로 붕대를 강하게 동여맸다. 너무 세게 묶은 탓에 손가락이 저릿저릿했지만, 출혈이 계속되다가 폭주하는 것보단 훨씬 낫다.

묘하게 힘이 없는 몸을 간신히 버티고 서 있던 주현이 거울에 이마를 박았다. 차가운 냉기에 조금이지만 두통이 가시는 것도 같았다.

차인호가 언제 오는지는 모른다. 오늘은 아직 수요일이고, 차인호는 월요일에 한 번 왔다 갔으니까.

‘일요일만 아니면 좋겠는데…….’

어지러운 머리로 생각하며 주현은 무언가를 꿀꺽 삼켜냈다. 어쩌면 분노. 어쩌면 고통. 어쩌면 울음. 뭔지는 주현도 모른다. 그저 정말 맛이 없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 * *

차인호는 토요일에 왔다. 늘 그렇듯 깔끔하고 잘생긴 얼굴로 가이딩 룸에 들어온 그는 주현을 보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인사조차 건너뛰고 다가와 손을 붙잡는 게, 그가 보기에도 상태가 많이 별로인 모양이었다.

예쁜 얼굴은 인상을 써도 예쁘다. 멍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감기라도 걸렸어요? 안색이 너무 안 좋은데.”

“조금 성가신 임무가 있었을 뿐입니다.”

표정을 굳힌 차인호가 몸을 뒤로 물리곤 주현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기 시작했다. 다친 곳을 찾는 시선에 툴툴거릴 기력이 없던 주현이 느린 손길로 겉옷을 벗었다.

“임무가 언제였죠?”

“수요일이요.”

“……수요일에 다친 걸 지금까지 그냥 참고만 있었습니까?”

어차피 가이딩만 받으면 나을 것이기에 신경 쓰지 않았더니 팔뚝에 난 상처는 곪아 버리고 말았다. 차인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거멓게 물든 붕대를 풀었다. 드러난 상처는 보기 흉했으나 주현에겐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당신…….”

차인호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내 입을 다물곤 가이딩에 집중했다. 양손으로 팔을 감싸 쥔 차인호에게선 이름 모를 향긋한 냄새가 감돌았다.

훅 밀어닥치는 포근한 가이딩에 온몸을 잠식하던 피로와 통증이 순식간에 물러가는 게 느껴졌다. 주현은 저도 모르게 몸에서 힘을 빼고 차인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밀쳐질까 생각했으나 가이드는 다친 에스퍼를 밀어내지 않았다. 잠시 굳었던 차인호는 서서히 긴장을 풀더니 곧 팔을 뻗어 조심스럽게 주현의 등을 감쌌다.

차인호와의 포옹은 아주 따뜻하고 기분 좋았다. 심지어는 안전하다는 느낌까지 들었는데, 주현의 인생에서 정말로 흔치 않은 일이었다. 에스퍼가 먼저 접촉하면 안 된다고 계약서에 적혀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주현은 잠시 잊은 척하기로 했다.

가이드의 따뜻한 손이 등을 쓰다듬었다. 이마가 닿아서 그런지 두통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문득 가람의 말이 떠올랐다.

‘그놈 조심해라.’

“가이딩이 필요한 상황이었으면 저에게 연락하셨어야죠.”

회상을 가르고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현은 달래질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물에서 건져진 사람처럼, 혹은 뭍에서 물로 돌아간 물고기처럼 숨 쉬던 주현이 물었다.

“어떻게요?”

“그야…….”

주현에겐 차인호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다. 그의 연락처를 아는 것도 아니고, 차인호를 불러 달라고 해도 직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을 테니까.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며 요동치던 파장도 잠잠해졌다. 멀어지는 차인호의 손길에 주현은 고개를 들었다. 맑아진 시야가 어쩐지 낯설어 저도 모르게 눈을 문질렀다.

“제 개인 전화번호입니다. 언제든 연락하세요. 매번 받을 수 있다고는 장담 못 하지만 최대한 받을게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싶더니 제 번호를 쓴 모양이다. 주현은 종이를 내밀고 있는 차인호를 잠시 바라보았다.

기사가 뜨기 전부터 가이드였을 거라고는 짐작하고 있었다. 막 발현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이딩 솜씨가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인의 입에서 그 사실을 확정받고 나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차인호는 목적이 뭘까? 왜 가이드라는 사실을 숨겼으며, 뒤늦게 밝혔을까? 어째서 하필이면 폭주 에스퍼인 주현과 매칭하겠다고 이곳에 왔을까?

“전화든 문자든 괜찮아요. 꼭 가이딩이 필요할 때가 아니라 누군가와 대화하고 싶을 때라도.”

흉터투성이 손이 작은 종잇조각을 받아 들었다. 차인호의 필체는 부드럽고 단정했으며 왠지 모르게 눈에 익었다.

C동에 있는 에스퍼 중 휴대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든가,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라든가, 대꾸할 말을 고르던 주현은 그냥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한 듯 차인호는 눈을 접으며 미소 지었다.

수상쩍은 가이드. 차인호는 수상쩍은 가이드일지 모르나 어쨌든 주현의 매칭 가이드였다.

유명 배우의 개인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구기듯 접은 주현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가이드에게 집착하지 않겠다던 결심이 아래에서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정확한 시작은 확신할 수 없지만, 확실한 진동을 느낀 건 죽음을 각오했다가 살아서 눈을 뜬 순간이다. 말라붙은 피와 먼지 속에서 주현의 손을 붙잡았던 지친 얼굴은 그날 후로 이따금 꿈에 나타나곤 한다.

에스퍼는 치밀어 오르는 공포를 숨기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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