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20/161)

폭주 에스퍼 18화

죽어도 게이트 너머에서 죽는다면, 괴물이 익숙한 모래밭 속으로 파고들 확률이 높았다. 결국에는 에스퍼를 파견해서 잡아야겠지만 당장 다시 한번 가이드를 노리거나 산을 더 헤집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주현의 죽음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죽음이 된다. 폭주 에스퍼치고는 영광스러운 끝이다.

다만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게 있다면, 불과 보름 전에 차인호가 주현을 살리기 위해 애써 주었는데 벌써 이렇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다소 겸연쩍다 생각한 것도 잠시. 늘 그랬듯 신주현의 인생은 이번에도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과도한 능력 사용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목구멍에서 비릿한 맛이 올라왔고, 눈앞이 핑핑 돌았다. 지금 당장 능력을 멈추고 쉬면 좀 낫겠으나 힘을 빼는 순간 괴물에게 잡아먹힐 게 분명했다.

그러나 결국 게이트에 도착하지 못한 채로 주현은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오늘 컨디션이 그다지 좋지 못한 것도 한몫했다. 힘을 쥐어짜 괴물의 눈알을 찌른 주현이 기침과 함께 피를 뱉어 냈다.

이토록 능력을 많이 쓰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어쩌면 너무 아껴서 굳어 버린 걸지도 모른다.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나? 피식 웃으며 다가오는 괴물을 올려다본 순간이었다.

-눈 감아.

통신기 너머에서 가람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주현은 망설임 없이 제 목숨을 노리는 괴물 앞에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콰르릉! 마른하늘에서 번개가 내리꽂혔다. 눈꺼풀이 닫혀 있었음에도 한순간 시야가 희게 점멸할 정도로 밝은 빛이었다.

“용케 살아 있었네.”

천천히 눈을 뜬 주현 앞에는 날개 달린 천사가 시건방진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그 너머에는 통구이가 된 괴물이 김을 뿜으며 미동도 없이 늘어져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냐?”

“게이트 통과한 거 두 마리였어. 부부인가? 생긴 게 좀 다르네.”

바지를 털며 비척비척 일어난 주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긴장이 한 번에 풀리며 안 그래도 없던 힘이 완전히 사라졌지만, 아직 임무는 끝나지 않았다.

“두 마리인 게 확실해?”

“내가 온 산을 헤집으며 확인했어. 실수로 두더지를 세 마리나 기절시켰다고. 땅굴을 얼마나 파헤쳤는데.”

걸음을 옮긴 주현은 죽어 버린 괴물을 찬찬히 관찰했다. 아무리 봐도 사기적인 능력이었다. 주현은 피를 토하면서도 도망치는 게 고작이었는데, 가람은 번개 한 번 내리꽂으면 웬만한 건 다 해결되니 말이다.

“그나저나 꼴이 엉망이네.”

가람의 푸른 눈이 비웃음을 담고 가늘어졌다. 온 얼굴에 피 칠갑을 한 채 여기저기 상처가 가득한 주현의 모습은 엉망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사실이라서 대꾸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주현은 느린 손짓으로 스카프를 풀어 얼굴을 닦으며 지끈거리는 두통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기분은 어때? 폭주할 것 같아?”

“조금.”

“걱정 마. 네가 폭주하면 내가 바로 제압해 줄게. 머리털이 타서 없어질 정도로 지져 버려야지.”

히죽거리는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멀리서 가람이 부른 지원군이 오는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현은 애써 스카프를 접어 목에 둘렀다. 가람의 말대로 흉악한 디자인의 초커가 피에 젖은 스카프에 가려졌다.

“그럴 필요 없어. 네가 손대기도 전에 머리가 날아갈 테니까.”

풀이 헤쳐지며 망토를 두른 에스퍼가 나타났다. 그는 가람을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가 이내 주현을, 정확히는 그의 옷에 있는 붉은색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그는 불쾌함을 숨기려 하지 않았고, 주현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게 폭주 에스퍼를 대하는 일반적인 태도였으므로. 그저 그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멀찍이 물러서며 주현은 욱신거리는 팔을 조심히 매만졌다.

* * *

지원으로 온 이들은 에스퍼 두 명과 가이드 세 명으로 이루어진 팀이었다. S급 한 명과 A급 한 명이면 괴물이 더 나타나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타 버린 사체를 처리하는 동안, 주현은 한참 떨어진 곳에 홀로 앉아 쉬고 있었다. 고개 숙이고 숨을 고르자 다행스럽게도 출혈은 멈췄다. 가이딩 약물까지는 없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는 괴물이 쓰러뜨린 나무에 앉아 있었는데, 누군가가 옆에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누구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았다. 이곳에 있는 사람 중 주현에게 선뜻 다가오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부부가 아니라 새끼잖아. 덩치가 완전히 다른데.”

“그래? 내가 보기엔 부부였어.”

뻔뻔한 목소리에 주현이 입을 다물었다. 가람이 먼저 처리했다던 괴물은 새끼인지 주현이 싸운 놈보다 절반은 작았다. 그러나 오히려 작아서 가람이 더 고전했을지도 모른다. 작은 만큼 찾기가 어려우니까.

“블랙은 아니고 레드 등급이래. 사막 속을 헤엄치다 갑자기 기습하는 방법 덕에 자신보다 강한 괴물도 손쉽게 사냥했다나 뭐라나.”

분명 임무는 같이했는데 주현을 빼고 가람에게만 정보를 알려주는 게 이제 와 서운하지도 않았다.

여전히 평소보다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이 귓가에서 쿵쿵 울렸다.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자 산바람이 이마를 스쳤다.

주현은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기름 냄새가 훅 끼치고 매캐한 연기가 폐로 스며드는 게 느껴졌다.

“담배 좀 그만 피워. 하다못해 나 없는 데서 피우라고.”

“그럼 가든가.”

가람이 혀를 차자 그에 따라 등에 달린 날개가 불만스럽게 팔락였다. 정전기로 붙여 뒀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진짜 날개처럼 보이는 게 신기했다.

“그런데 이제 성냥은 안 쓰나 봐?”

“……받았어. 내 매칭 가이드한테.”

그 물음에 그리 대답한 건 왜일까?

가람은 계약으로 맺은 매칭 가이드만 세 명이나 있다. 가이드에게 집착하는 에스퍼답게 세 명 전부 다 아끼며 무척 좋아한다. 그렇기에 아까도 괴물이 제 가이드를 노린다는 걸 알고 주현에게 부탁하지 않았는가.

고개를 돌리자 가람의 파란 눈이 커다래진 게 보였다. 그렇게나 놀랄 일인가 싶었는데 사실 그렇게 놀랄 일이 맞기는 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던 주현은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평소보다 붉은 눈이 가늘게 접히고, 덜 닦인 피가 묻어 있는 얼굴에 자랑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왜. 나한테 가이드 있는 게 이상해?”

하나로 묶은 가람의 금발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는 마치 큼지막한 짱돌을 꿀꺽 삼키는 어린애를 만난 듯한 표정으로 외쳤다.

“그럼 이상하지, 안 이상하냐?”

혼란스럽게 움직이는 날개를 움켜쥐자 깃털이 한가득 잡혔다. 손을 놓으니 순식간에 날개에 달라붙는 모습이 자석 같았다.

“어떤 미친놈이 폭주 에스퍼랑…… 아, 설마 그거 차인호야?”

가람은 눈을 크게 뜨곤 주현의 어깨를 잡았다. 푸른 눈동자가 뚫어지게 주현을 응시했고, 그는 묘한 압박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알지 그럼. 그렇게 늦게 발현한 거 처음 본다고 여기저기서 엄청 시끄러웠잖아.”

탈색된 금발이 손가락에 잡혀 가볍게 잡아당겨졌다. 무릎에 팔꿈치를 올리곤 한참을 끙끙거리던 가람이 슬그머니 허리를 폈다. 고민하던 것과는 달리 그의 표정은 생각보다 무심하고 덤덤했다.

“아…… 뭐…… 네가 어떻게 되든 별로 상관은 없는데.”

“말 한번 예쁘게도 하네.”

“내 가이드 구해 준 보답이다.”

새하얀 날개가 확 펼쳐지더니 두 사람을 감쌌다. 어둠 속에서 인공적인 푸른색이 반짝였다.

“그놈 조심해라.”

“그놈?”

“차인호 말이야.”

작게 속삭인 가람이 날개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한순간 고요해졌던 게 거짓인 양 갑작스럽게 주변 소리가 들어찼다. 바람 소리, 새소리, 풀벌레 소리. 그 평화로운 소리를 들으며 주현은 이를 악물었다. 검붉은 눈동자에 스친 감정은 분노였다.

“나한테 매칭 가이드 생겼다고 이간질할 생각이라면-”

“그런 거 아니거든? 사람이 기껏 생각해서 말해 줘도 난리야.”

투덜거린 가람이 앞에 있던 돌멩이를 걷어찼다. 가볍게 찼음에도 S급 에스퍼답게 돌멩이는 순식간에 날아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예전에 방송국에서 그놈을 만난 적이 있어.”

“네가 연예인도 아닌데 방송국에는 왜 가.”

“나름대로 화면에 얼굴 꽤 비쳤다고 생각했는데. 너 집에 TV 없어?”

애초에 그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집도 없지만, 주현은 결핍을 털어놓을 생각 따윈 없다. 더 말하라는 듯 고갯짓하자 가람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순순히 이야기를 이어 갔다.

“아무튼 같은 방송에 나간 건 아니고, 그냥 복도에서 마주쳤거든? 나 살면서 그렇게 파장 조절 잘하는 사람 처음 봤다. 내가 S급이 아니었으면 눈치도 못 챘을걸.”

결국 또 자기 자랑이냐고 빈정거리기에는 담긴 내용이 생각보다 무거웠다.

“녀석이 가이드란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으니까 물어봤지. 당신 가이드였냐고.”

“그러니까 뭐래?”

가람은 목소리를 낮춰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삭였다.

“그냥 웃고 말더라. 그리고 나흘 뒤에 가이드라고 기사 났어.”

멈칫한 주현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우연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냥 넘어가기에는 상당히 수상했다.

“네가 생각해도 이상하지?”

가람의 물음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단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마저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