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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19/161)

폭주 에스퍼 17화

주변에는 풀이 무성했고, 하늘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나무가 우거졌고,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파삭, 풀을 헤친 주현은 굳은 얼굴로 쓰레기처럼 널브러진 사슴을 내려다보았다. 사슴은 하반신이 완전히 사라진 채 눈도 감지 못하고 죽어 있었다. 땅을 붉게 물들인 피는 아직도 흥건하게 흘러내리며 방금까지 사슴이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일반적인 비위로는 보기 힘든 장면이었으나, 주현의 관심을 끈 것은 그 옆에 있는 큼지막한 구멍이었다.

언뜻 봤을 때 2m가 조금 안 되는 크기의 구멍은 어두워서 안이 보이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크기는 생각보다 작지만, 땅속을 기어 다닌다면 찾기가 훨씬 어려울 것이다.

그나마 이런 외진 곳의 산속에 있는 게이트에서 나와서 다행이지, 만일 도심지에서 이만한 괴물이 돌아다녔다면 어땠을지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나왔다.

부지런히 돌아다니던 주현은 곳곳에서 구멍을 발견했다. 그 근처에는 대부분 동물의 사체가 있었고,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도 무언갈 잡아먹은 흔적이 꼭 남아 있었다.

얼른 찾아야 피해가 적을 텐데 워낙 험한 산지라서 그런지 속도가 나지 않았다.

이를 악문 주현이 허리까지 자란 풀을 헤친 순간이었다. 귀에 꽂혀 있던 통신기에서 가람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당장 내 차로 가.

괴물이 낸 구멍은 산발적으로 퍼져 있고, 나와서 돌아다닌 흔적은 없다. 게이트 너머에서 사체로 발견된 괴물들은 다른 상처 없이 죄다 복부가 뜯겨 있었다. 마치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무언가에 방어할 틈도 없이 공격당한 것처럼.

짧은 새 생각을 끝낸 주현은 망설이지 않고 능력을 사용했다. 그의 의지에 따라 높이 자란 풀이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만들었다.

능력을 사용해 거의 날 듯이 달리며, 주현은 가람의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가이드가 제발 무사하길 바랐다.

쏜살같이 산길을 내려간 주현은 죽은 괴물들이 입은 상처에 비해 왜 그렇게 구멍이 작았는지 알게 되었다.

자동차 앞에서 몸을 한껏 세운 괴물은 뱀을 닮은 긴 몸을 가지고 있었으며, 구멍보다 족히 두 배는 넓어 보이는 몸통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갈색 비늘로 덮인 몸에는 길고 뾰족한 뿔이 잔뜩 솟아 있었는데, 스치기만 해도 피부가 벗겨질 만큼 거칠어 보였다.

어떤 구조인지는 몰라도 땅속을 길 때는 원활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뿔을 접고 몸을 구겨서 작게 만드는 것 같았다.

숨을 죽인 주현이 침을 꿀꺽 삼켰다.

거대한 몸. 땅속을 휘젓고 다니는 능력. 거기다 존재감을 죽이고 옐로급 괴물을 단번에 사냥할 수 있는 것까지 합하면 레드급에서도 상위 포식자였다.

그것도 게이트 너머가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싸워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그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곳에선 도망쳐서 지원을 부르는 게 최선이다. 주현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절반이 날아간 자동차 속에서 좌석에 딱 달라붙은 가이드는 기절하기 일보 직전인 얼굴로 숨도 못 쉬고 있었다.

주현은 능력을 사용해서 괴물의 등을 힘껏 찔렀다. 역시나 단단한 비늘은 뚫리지 않았다. 홱 돌아선 괴물은 여덟 개의 눈을 가지고 있었고, 사방을 빙글빙글 돌던 눈이 한순간 주현에게 꽂혔다.

“그래. 나랑 놀자.”

결코 이길 수 없는 괴물과 마주한 폭주 에스퍼가 사납게 웃었다.

* * *

주현의 정보를 적어 놓은 서류 능력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More physical psychokinesis. 보다 물리적인 염동력.]

말 그대로 염동력인데, 일반적인 염동력보다 훨씬 물리적으로 다룰 수 있다. 예를 들면 날카롭게 만들어서 상대를 찔러 죽인다든가 계단처럼 밟고 올라서는 등, 다양한 사용법이 있다.

물론 방어막처럼도 만들 수 있는데 S등급 에스퍼의 방어막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쓸 만했다.

챙강! 그런 방어막이 괴물의 몸짓 한 번에 산산조각이 났다. 곧바로 다른 방어막을 만들어도 쉽게 깨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주현은 벌써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여기저기 생채기가 가득했으나 괴물은 지친 기색 하나 없었다.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그래도 주현은 그렇게까지 나쁜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눈앞의 괴물은 확실히 레드 등급 중에서도 강하지만 블랙 등급까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주현이 시간만 잘 끈다면 설령 그가 죽어도 눈앞의 괴물은 금방 지원 온 에스퍼들에게 사냥당할 것이다.

-조금만 더 버텨. 가고 있으니까.

통신기 너머에서 가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코앞까지 훅 다가온 괴물에 주현이 황급히 옆으로 몸을 굴렸다.

괴물의 입안에는 상어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했다. 죽은 괴물과 동물의 몸이 단번에 잘려 나가기 충분할 정도였다.

[키에에엑!]

벌린 입안을 송곳처럼 날카롭게 만든 염동력으로 찌르자 괴물이 몸을 비틀며 괴성을 질러 대었다. 거대한 몸이 몸부림침에 따라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흔들렸다.

“날개 부러졌어? 왜 이렇게 늦어?”

-시끄러워.

“곧 있으면, 윽, 안 시끄럽게 될 거다.”

다시금 덤벼 오는 괴물을 간신히 피한 주현은 그 과정에서 날카로운 뿔이 팔뚝을 베어 내는 것을 미처 막지 못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팔을 감싸 쥔 그가 괴물이 휘두르는 꼬리를 피해 풀숲에 몸을 숨기곤 빨간 벨트를 상처 위에서 꽉 조였다.

“덩치에 비해 빠르지만 독이나 다른 능력은 없어. 크기는, 10m 좀 넘으려나?”

쾅! 위에서 내리꽂히는 괴물의 몸을 방어막으로 막은 주현이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은 최대한 오래 시간을 끌며 미지의 괴물에 대한 정보를 넘겨주는 것이다.

쨍그랑, 또다시 방어막이 깨지며 나무에 강하게 부딪힌 주현이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아무래도 오늘 그의 능력은 기껏해야 B등급인 것 같다.

괴물의 눈알이 희번덕거리며 빛났다. 작고 약한 주제에 쉽게 잡히지 않는 먹이에 화가 난 건지 괴물이 낮은 울음소리를 흘렸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과는 달리 빽빽하게 난 나무에 자꾸만 뿔이 걸리는 것이 여간 성가신 게 아닌지 괴물의 몸부림은 점차 심해져 갔다. 주로 기습을 이용해서 단번에 사냥하는 녀석인데 주현이 자꾸만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가는 것도 심기를 건드리는 데 한몫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다 지쳐서 머뭇거리는 순간이 내가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주현이 비릿한 침을 꿀꺽 삼키곤 숨을 고르던 순간이었다. 돌연 괴물이 움직임을 멈췄다.

잠시 눈알을 굴리던 괴물은 근육을 움직여 절반보다도 작게 부피를 줄이고는 뿔을 비늘에 바짝 눕혔다. 앞으로 쏠려서 뾰족하게 모인 뿔은 순식간에 바닥을 파헤치곤 땅속으로 기다란 몸을 밀어 넣었다.

“젠장!”

주현은 괴물이 어디로 가는지 곧바로 알았다. 아까 전 거의 다 잡았던 쉬운 먹이를 향해 가는 것이다.

벌써 가이딩이 떨어지기 시작했는지 두통이 엄습하고 팔다리가 무거웠다. 그러나 주현은 움직여야 했다. 지금껏 죽인 목숨에 대한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라도 많은 생명을 구해야 했다. 어차피 이곳에서 살아남는다 해도 내일이면 또 다른 생명을 앗아 가겠지만, 그래도.

주현은 11년 전 그날을 단 한 번도 잊어 본 적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널브러진 몸뚱이는 여전히 새벽마다 그를 괴롭힌다. 붉은 피, 보름달, 무너진…….

‘그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강하게 주먹 쥔 주현이 생명을 구하기 위해 괴물이 있는 곳을 향해 발을 뻗었다.

땅속을 파고드는 괴물은 무척 빨랐으나 주현이 최대한 능력을 사용해서 허공을 내달린 덕에 그리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주현이 손을 뻗었고, 행동 요령에 따라 에스퍼와 약속한 자리에서 대기하던 가이드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그 직후, 절반 남은 자동차가 땅에서 솟아오른 괴물의 입속에서 완전히 박살 났다. 놀란 표정의 가이드를 나무 위에 내려놓은 주현이 흘러내리는 코피를 스카프로 닦았다.

“미안한데 난 아직 더 놀고 싶거든. 어울려 주라.”

완전히 흥분한 괴물이 온몸의 뿔을 세우곤 입을 크게 벌렸다. 어떻게 된 구조인지, 아까보다 1.5배는 커진 덩치에 절로 질린 얼굴이 되었다.

이곳에서 죽는다고 해도 주현은 아쉽지 않았다. 오히려 목에 달린 폭탄으로 머리가 날아가는 것보다 수백 배는 나은 죽음이다.

C동에서 죽음은 일상과도 같고, 이미 여러 동료를 잃은 그들이 주현의 죽음을 크게 슬퍼할 것 같지는 않다. 가족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도 없고, C동을 제외하면 친구도 없다. 그리고 차인호, 차인호는…… 주현의 죽음에 슬퍼해 줄까?

그럴 것 같기도 하고, 아닐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아마 아닐 것이다. 고작해야 이익을 위해 맺은 매칭인데 왜 슬픔을 느끼겠는가.

다만 자꾸만 차인호에 대해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죽어 가던 주현을 살렸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생명의 은인. 그리 거창한 건 아닐지 모르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다.

[키르르륵!]

다른 생각을 하는 걸 알았는지 괴물이 달려들었다. 이미 한계에 가깝게 능력을 사용했지만 이제 와서 멈출 수는 없다.

죽고 나서 최대한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폭주 에스퍼가 게이트를 향해 날기 시작했다. 생각한 대로 괴물은 풀과 나무를 헤치며 작고 성가신 먹이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기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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