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16화
평소였다면 주현은 제 매칭 가이드를 챙기는 가람을 다른 세상 이야기 보듯 시큰둥하게 봤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주현에겐 차인호가 있다. 만약 차인호가 이 자리에 함께 있었다면 주현은 자신도 가람처럼 행동했을지 궁금했다. 물론 의미 없는 궁금증이다.
만전의 준비를 위해 진한 포옹을 끝으로 문을 닫은 가람이 주현에게로 걸어왔다.
“뭐 해? 안 가고. 늦장 부릴 생각하지 마.”
기다려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들을 거라곤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말없이 돌아선 주현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도착한 ES-23은 빛무리가 이리저리 산란하는 추상형 게이트였다. 일반적으로 원형과 사각형 게이트가 많기는 하지만 추상형이라고 더 위험하다는 통계는 없으니 상관없었다.
문제는 게이트 앞 흙바닥에 무언가 거대한 게 끌린 자국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풀이 꺾이고 짓눌려 있는 걸로 미루어 이미 괴물이 게이트를 통과해서 나온 게 분명했다.
숨을 죽이고 주변을 살폈지만, 온통 나무와 풀로 뒤덮인 산은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어쩔래? 괴물을 쫓을까, 아니면 게이트 안을 먼저 볼까.”
“주변에 민가도 없으니 게이트 먼저 가는 게 낫겠지. 다른 놈들이 나오면 골치 아프니까.”
고개를 끄덕인 가람이 먼저 게이트로 발을 밀어 넣었다. 순식간에 사람이 사라진 놀라운 광경이지만 에스퍼들에겐 당연한 일상과도 같았다.
게이트 너머는 발이 푹푹 꺼지는 사막이었다. 게이트 속 환경은 매번 달랐지만, 그중에서도 사막은 상당히 나쁜 축에 속했다.
“아, 하필이면 사막이야? 짜증 나게…….”
가람이 날개를 움직여 머리 위를 가렸다. 공기 자체가 뜨겁게 달궈져 있기에 별 효과는 없지만 그래도 땡볕 아래보다는 나은 듯했다.
그조차 없는 주현은 땀을 닦을 수 있도록 스카프를 풀어 손목에 묶었다.
“그건 언제 봐도 흉악하네. 광견병 걸린 개한테 딱 맞는 디자인이야.”
“버리고 가기 전에 입 다물고 따라와.”
“참 나, 버려도 내가 널 버려.”
뜨거운 햇볕 때문에 초커가 달궈져서 피부가 뜨끔뜨끔했다. 익숙하게 무시한 주현이 푹푹 빠지는 발을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갈 길이 멀었다.
“폭주 에스퍼.”
“…….”
“폭주, 하아…… 신주현.”
“왜.”
“넌 어떻게 생각해?”
“뭘.”
“게이트 말야. 역시 다른 행성일까?”
게이트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지만, 이론적으로 확실하게 정해진 건 없다. 가람의 말처럼 게이트 너머의 공간은 다른 행성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한데, 환경이 지구와 흡사하다 보니 평행 세계의 지구가 아니냐는 설이 큰 지지를 받고 있다.
“몰라. 알고 싶지도 않아.”
“삭막한 놈.”
“그래도 차라리 빨리 밝혀졌으면 싶기도 해. 일반인들이 호기심에 들어갔다가 실종되면 골치 아프니까.”
인간 문명도 없고 괴물만이 가득한 세상이지만 지구와는 다른 신비로운 공간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게이트를 넘어가려는 일반인이 꾸준히 나오고 있었다. 괴물 때문에 위험한 데다 길이라도 잃어 버리면 끝장이기에 법적으로 엄중하게 금지되어 있는데도 말이다.
주현은 다시 한번 스카프로 이마를 훔쳤다.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뙤약볕도 힘들지만, 무엇보다 발목까지 잡아먹는 모래 때문에 체력이 빨리 소모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괴물이 안 보이는 게이트는 드문데. 신기하네.”
깃털 몇 장이 허공에서 뭉쳐 부쳐 주는 바람에 가람의 금발이 살랑였다. 그걸 잠시 바라보던 주현이 깃털 뭉치를 한 손에 움켜쥐곤 놓아주지 않았다.
“성질 더러운 것 좀 봐.”
가람이 투덜거렸으나 주현은 신경 쓰지 않았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주변에 있는 것이라곤 모래뿐, 괴물의 흔적은 없었다.
평균적으로 게이트를 넘어와 5분 동안 에스퍼가 만나는 괴물의 수는 열 마리 내외 정도가 된다. 약해서 뭉쳐 다니는 괴물이라면 수가 더 많고, 거대하고 강할수록 수가 적어진다.
말 그대로 평균이니까 극과 극의 사례가 있는 게 이상할 건 없으나, 그저 운이 좋다고 생각하기엔 어딘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바로 그때, 주현과 가람이 멈춰 섰다. 모래에 반쯤 파묻혀 있는 사체가 제법 거대했는데, 건조한 기후 때문인지 바짝 말라 있었다.
가람의 손짓에 깃털들이 날아가 모래를 헤쳤다. 드러난 괴물은 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으나 워낙 훼손이 심해서 어떤 식으로 공격당했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이 정도 크기면 옐로 정도는 되겠는데?”
괴물은 크기와 강함에 따라 무지개를 상징하는 색으로 등급이 나뉜다. 레드, 옐로, 그린, 블루, 퍼플. 그중 퍼플이 가장 약하며 위로 갈수록 강해진다. 옐로 등급 괴물을 해치우기 위해선 평균적으로 A급 에스퍼 세 명이 필요하다.
“이 녀석을 사냥한 놈들은 어디 있지? 네 능력으로 못 찾아?”
“그냥 흙바닥이면 몰라도 모래밭에선 안 돼.”
“……쓸모없기는.”
“너보다는 낫거든? 폭주할까 봐 능력 잘 쓰지도 않는 주제에 투덜거리지 마.”
그 말대로 주현을 포함한 폭주 에스퍼들은 워낙 가이딩이 부족한 탓에 웬만해선 능력을 아끼는 경향이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능력을 사용하면 발이 빠지지 않고 편하게 걸어 나갈 수 있음에도 주현은 꿋꿋이 모래밭을 헤쳤다.
구름 하나 없는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본 주현이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 후로 두 사람은 몇 구의 사체를 더 발견했다. 하나같이 몸통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바짝 말라 있었다.
게이트의 위치를 표시해 주는 탐지기의 최대 거리는 10㎞ 정도 되는데, 그 끄트머리까지 갔음에도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그것뿐이라면 이미 괴물들이 떠난 평화로운 게이트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신경 쓰이는 점이 있었다. 바로 죽은 괴물들이 하나같이 최소 옐로 등급은 된다는 것이다.
영역 다툼이라기엔 차지한 영역을 지키는 괴물이 없고, 사냥이라기엔 옐로 등급 괴물을 몇 마리나 사냥할 정도면 최소한 그린 등급 괴물이 열 마리 이상 무리 지어야 하는데 그런 흔적이 없었다.
“아무것도 안 보여. 그냥 모래뿐이야.”
날개를 펄럭이며 공중에서 한참 동안 주변을 살피고 온 가람이 고개를 내저었다.
“단순히 버려진 게이트인가?”
“자기들끼리 영역 다툼이라도 했나 봐. 잘됐지 뭐.”
게이트는 공간을 연결하지만 모든 괴물이 게이트를 넘으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그저 게이트를 발견하고 운 나쁘게 넘어올 뿐이다.
게이트 근처를 지나는 괴물이 많을수록 넘어올 확률이 높으니 에스퍼가 주기적으로 확인해야 하지만, ES-23처럼 괴물이 적으면 그만큼 신경을 덜 써도 된다.
“나가서 게이트를 넘어간 괴물만 처리하면 임무도 끝이네. 아, 성격 나쁜 폭주 에스퍼 얼굴 그만 볼 수 있어서 좋다!”
그때 주현이 우뚝 멈춰 섰다. 그에 따라 몇 걸음 더 걸어간 가람이 눈썹을 씰룩이며 돌아섰다.
주현은 가만히 선 채로 조금 떨어진 모래밭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커다란 발톱이 박힌 괴물의 앞발이 모래밭 틈에서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왜? 뭐 이상해?”
“저거 꺼내 봐.”
평소였다면 왜 나한테 명령하냐고 짜증 냈을 가람은 순식간에 S급 에스퍼의 얼굴이 되어 모래를 헤쳤다.
“……저번에 BN-6에서 레드급 괴물 나왔던 거 알지.”
“어. 그놈한테 에스퍼 두 명이나 당했잖아.”
“그게 이거야. 들었던 모습이랑 똑같아.”
당시 임무에는 승철이 포함되어 있었고, 겨우 살아 돌아온 그는 괴물이 얼마나 강한지 세세하게 말해 주었다.
레드 등급 괴물은 비교적 만나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적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주현이 굳은 이유는 레드급 괴물의 배가 옐로급 괴물들과 마찬가지로 깔끔하게 뚫려 있었기 때문이다.
“영역 다툼이 아니야. 일방적으로 포식자한테 사냥당한 거다.”
주현의 검붉은 눈동자와 가람의 새파란 눈동자가 마주쳤다. 수많은 전장을 넘어온 두 사람의 감은 결코 무디지 않았다.
레드급 괴물을 망설임 없이 잡아먹은 괴물은 지금 어디에 있지?
“꽉 잡아. 할 수 있는 최고 속도로 날 거니까.”
건조하고 뜨거운 공기를 가르며 두 에스퍼가 허공을 날았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게이트에 주현이 깃털을 헤치곤 뛰어내렸다.
“난 왼쪽으로 갈 테니까 넌 오른쪽으로 가!”
“명령하지 마. 내가 왼쪽으로 갈 거야!”
가람의 외침에 고개를 내저은 주현이 게이트를 뛰어넘어 오른쪽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괴물의 등급은 레드부터 퍼플까지 다섯 개로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 그 위로 하나가 더 있다. 너무나도 드물어서 없는 것과 같은 취급을 당하기는 하지만 분명 존재하기는 하는 등급, 블랙.
가장 최근에 나온 블랙 등급 괴물은 8년 전 GW-11 게이트에서 출몰했다. 정확히는 그 너머에서 발견되었는데, 당시 처음 녀석을 발견했던 이들의 구성은 A등급 에스퍼 한 명과 B등급 에스퍼 세 명이었다. 그리고 누구도 돌아오지 못했다.
S급이나 SS급 같은 귀한 몸을 아무 임무에나 보낼 수는 없다며 협회에서는 낮은 등급의 에스퍼로 이루어진 팀을 계속 보냈고, 여전히 돌아오는 이들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SS급 에스퍼를 GW-11로 보냈다.
그곳에 있는 건 흉악하다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괴물이었다고 했다.
그런 블랙 등급 괴물이 게이트를 넘어 사방을 헤집고 다닌다면 어떤 피해가 생길지 모른다. 물론 아직 블랙 등급이라고 확정된 것은 아니다. 좀 강한 레드 등급일 수도 있으나 어쨌든 위험한 건 마찬가지다.
길조차 없는 산을 이리저리 내달리던 주현은 목덜미를 스치는 위화감에 멈춰서 숨을 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