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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13/161)

폭주 에스퍼 13화

가장 먼저 인식한 것은 소리였다. 가느다란 바람 소리, 누군가의 인기척, 자신의 숨소리. 그 후에는 알싸한 소독약 냄새와 함께 어딘가 익숙한 샴푸 냄새가 코를 스쳤다.

주현은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사실에 치밀어 오른 감정이 안도인지 아쉬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 맞을지도 모르고, 둘 다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약간의 권태감과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떠올랐을 뿐이다.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서 영원히라도 잘 수 있을 것 같았으나 게으름과 방심은 임무 실패의 커다란 요인이 되곤 한다.

주현이 눈을 떴다. 그리고 아까부터 옆에서 느껴지던 인기척을 향해 곧장 손을 뻗었다. 다친 폭주 에스퍼의 곁을 맴도는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멀쩡한 인간은 아닐 것이다.

“……사람 놀라게 하는데 뭐 있네요.”

순식간에 손목을 잡혀 훅 당겨진 차인호가 느린 어조로 말했다. 그는 조금 지친 얼굴이었는데, 다듬어지지 않고 부스스한 머리와 거뭇한 눈가 때문에 평소 말끔한 차인호와는 다르게 보였다.

“왜, 큼,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잠긴 목을 풀며 손을 놓자 차인호가 마른세수와 함께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락이 왔습니다. 제 매칭 에스퍼가 죽어 가고 있다고.”

“바쁘시다면서요.”

“그렇다고 죽게 내버려 둬요?”

차인호는 거의 노려보듯 가늘어진 눈으로 주현을 힐긋거렸다. 당연한 걸 묻는다는 태도였다.

다른 에스퍼면 몰라도 주현은 폭주 에스퍼고, 폭주 에스퍼의 죽음은 누구나 반길 것이라는 말은 그냥 꿀꺽 삼켰다.

일에 대한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 그가 굳이 말할 정도로 바쁘면서, 주현이 죽어 간다는 말에 곧장 가이딩하러 왔다. 주현은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솔직하게 나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과 비슷했다. 조금 놀랍고 얼떨떨하며 조심스럽게 받아 드는 기분.

몸을 일으킨 주현은 욱신거리는 상처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붕대 너머로 느껴지는 상처는 어느 정도 아물었으나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

“할 수 있는 스킨십에 제한이 있다 보니 완치는 못 했습니다.”

스킨십의 수위가 높아질수록 더 많은 가이딩을 받을 수 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차인호는 지금까지 기껏해야 손을 잡는 것만으로 가이딩을 해 왔고, 주현이 정신을 잃은 후에도 그것은 달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제한이 뭐였죠?”

부러진 뼈를 고정하는 부목을 매만지며 주현이 물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붙기는 했는지 움직일 수는 있었다.

주현이 알기로 계약서에는 가이딩에 따른 접촉은 온전히 차인호의 판단에 맡긴다고 적혀 있었다. 그가 정한 제한선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현의 상처는 악수 정도로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를 위해 어디까지 내줄 수 있습니까?”

폭주 에스퍼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씨익 올라간 입꼬리는 상대를 놀리는 것처럼 장난스럽기까지 했다.

그동안 주현을 가이딩했던 가이드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몰아치거나 혹은 두려움에 떨며 손끝만 간신히 닿거나. 차인호는 어느 범주에 들어갈까? 두려움은 없으나 그어 놓은 선이 명확해서 따지자면 후자일 것 같았다.

“무슨 오해를 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여전히 지친 얼굴의 가이드가 조금 성가시다는 듯, 혹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뻑뻑한 눈을 문질렀다. 고운 미간이 일그러지고 기다란 속눈썹이 마구잡이로 구겨졌다. 차인호의 손목시계에는 누구 것인지 모를 피가 배어 짙은 갈색으로 굳어 있었다.

“주현 씨 누가 멋대로 손대는 거 싫어하잖아요.”

“…….”

“반대로 제가 물을게요. 오늘처럼 위험한 상황이 닥쳤을 때 제가 어디까지 해도 되나요?”

문득 두 사람이 만난 첫날, 차인호가 가이딩을 위해 만져도 되냐고 물었던 게 떠올랐다. 원래 그렇게 사소한 터치 하나도 깊게 생각하며 상대의 허락을 구하는 타입인지, 아니면 신주현이라서 그런 것인지.

늘 남들에게 휘둘리며 살아온 주현은 어떤 상황에서 무언갈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 본 적이 거의 없었다. 반쯤 부러져 핏방울이 맺힌 약지 손톱을 만지작거리던 주현이 슬그머니 대답했다.

“……좋을 대로 하시죠.”

주현은 새삼 땀과 먼지, 그리고 피에 절었던 머리카락과 피부를 누가 닦아 줬는지 조금 궁금해졌다.

“어차피 이 계약에서 갑은 당신이니까.”

가이드에게서 그런 질문을 들은 게 처음이라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른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다.

뭘 하든 당신 마음이라는 뜻이었는데, 주도권을 쥔 사람치고 차인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오히려 아까보다도 훨씬 기분 상한 얼굴이었다.

“아무한테나 다 그렇게 말해요?”

“예?”

“가이드라면 누구라도 좋을 대로 하라고 말하냐 물었습니다.”

굳은 얼굴로 말하면서도 차인호는 손을 뻗어 주현의 깨진 손톱을 어루만졌다. 피가 질금질금 새어 나오던 상처가 즉시 아물며 통증이 사라졌다.

가이드는 가이딩을 통해 에스퍼를 치료하고 파장을 잠재우지만, 그 과정에서 상당한 기력을 소모한다. 죽음에 가까웠던 주현을 되살렸으니 제법 지쳤을 텐데도 차인호는 잡은 손가락을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차인호는 판단하기가 무척 어렵다. 주현을 꺼리는 듯 말하고, 실제로 그런 행동을 하면서도 돌아서면 곁에 서서 손을 잡고 있다.

목적이 뭔지 모르니 경계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의심스러운 사람 옆에 있는 건 스트레스가 쌓이는 일인데 이상하게 그가 싫지만은 않다.

보통 에스퍼는 자신의 고통을 없애 주고 안정감을 주는 가이드에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C동에 오는 가이드는 하나같이 사랑하기엔 인격적으로 하자가 있어서 주현은 가이드라면 학을 떼며 싫어했다.

그리고 차인호가 왔다. 손등을 덮는 부드러운 온기, 눈이 마주치면 설핏 휘는 눈동자, 지친 낯으로 주현의 곁을 지킨…….

솔직히 말해서 주현은 자신이 차인호에게 집착하게 될까 봐 무서웠다. 길어 봐야 1년이면 계약은 끝나고, 차인호는 떠난다. 주현은 홀로 남아 비참함을 느끼며 청승 떨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제가 누구한테 뭐라 말하든 그쪽이 왜 참견합니까? 그리고 애초에 웬만한 가이드는 저한테 그런 거 묻지도 않거든요.”

까칠하게 뱉은 말에 차인호가 화를 내길 기대했으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주현의 손을 조금 더 크게 감싸 쥐곤 피식 웃었다.

고개 숙인 차인호에게선 주현이 쓰는 것과 같은 샴푸 냄새가 났다. C동에서 배급해 주는 샴푸는 당연히 싸구려인데 왜 그에게서 나는 향은 조금 다르게 맡아지는 걸까.

“누구한테든 그렇게 재수 없게 구는 거죠?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

걱정. 그게 걱정이었나? 주현이 다른 가이드에게 마음대로 하라고 말할까 봐 차인호가 걱정했다고? ……왜?

주현이 슬쩍 손에 힘을 줘서 당기자 차인호는 별말 없이 쥐고 있던 손가락을 놓아주었다.

“재수 없다는 말은 그쪽이 훨씬 더 많이 듣고 살았을 것 같은데.”

“생명의 은인에게 할 말이 그거밖에 없습니까?”

차인호가 오지 않았다면 주현은 확실하게 목숨을 잃었다. 가이딩 약물에도 한계가 있고 폭주 에스퍼를 가이딩하겠다고 나서는 가이드는 좀처럼 없으니까.

스케줄이 많아서 바쁘다던 차인호는 일을 뒤로 미루고 주현을 위해서 C동까지 와 주었다. 일반적인 시선으로 봐선 감사 인사만으로 때우기 민망할 정도로 큰 은혜였다. 게다가 그게 가이드가 할 일 아니냐고 큰소리치기엔 주현은 평범한 에스퍼가 아니었다.

이럴 때일수록 아무렇지 않게 툭 말하면 될 텐데, 슬프게도 주현은 슬금슬금 볼이 뜨거워지는 걸 생생하게 느꼈다.

“……니다.”

“하나도 안 들리는데요.”

“고맙, 고맙습니다. ……딱히 필요는 없었지만.”

“필요 없다뇨, 저 아니었으면 죽었을 텐데요?”

주현이 대답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자 차인호는 질린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무척 과장스러운 한숨이라서 상처가 되지는 않았다.

“하여튼 고집부리는 건…….”

애매하게 뒷말을 끊은 그가 손목을 들어 피가 말라붙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슬쩍 훔쳐보니 짧은 바늘이 1을 가리키고 있었다. 창밖이 어두운 걸 보니 새벽 한 시일 게 분명했고, 그 말은 주현이 정신을 잃은 후로 여섯 시간 가까이 지났다는 뜻이다.

“바쁠 텐데 얼른 가세요.”

가이드와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있는 건 처음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고비를 넘긴 후에도 차인호가 남아 있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있을수록 모르는 게 늘어나기만 한다.

“제가 가길 바라세요?”

차인호의 목소리는 고요했다. 그 물음에 담긴 의미가 에스퍼로서 가이딩이 더 필요하냐는 뜻인지, 혹은 다른 무언가가 있는지. 뭐라도 말하기 위해 입을 벌렸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는 건 없었다.

그렇다고 하면 차인호는 가지 않고 남아 있을까? 애초에 주현은 그가 가지 않고 이곳에 머물길 바라고 있나?

결국 에스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술을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잠시간의 침묵이 지나가고, 숨소리와 닮은 웃음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고개 들어 바라본 차인호는 웃고 있었다. 즐거워 보인다고 말할 수도 있는, 마치 아이를 바라보는 듯 다정한 미소였다. 숨 막힐 듯 아름다운 얼굴은 어두운 방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다.

“지금은 그거면 됐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기도 전에 차인호의 손이 주현의 어깨를 감싸 쥐곤 침대에 눕게 했다. 평소였다면 그리 쉽게 눕지 않았겠으나 아직 부상이 다 낫지 않은 상태여서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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