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61)

폭주 에스퍼 12화

“그럴 수도 있지. 좀 놔둬라. 왜들 그리 야박해?”

“저거 저거, 연예인 사인 한 장 받았다고 홀라당 넘어간 것 봐라.”

“홀라당 넘어가다니. 너희 마음에 여유가 너무 부족한 거겠지.”

승철이 씨익 웃으며 거들먹거리자 질린 표정을 지은 세화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신문을 들어 냅다 던졌다. 나흘 전 날짜가 찍혀 있는 신문은 승철에게 닿기도 전에 불에 타서 재가 되어 흩어졌다.

“나 아직 못 봤는데!”

범규가 외쳤으나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억울한지 반쯤 남은 신문을 들고 쪼그려 앉은 범규에게 소파에 드러누워 있던 채경이 말했다.

“나중에 봄이한테 고쳐 달라고 해.”

“봄이 누나 공짜로 안 해 준단 말야.”

“원래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이란다. 그런데 네가 신문도 읽었었나?”

“요즘 십자말풀이 하고 있는데 재밌더라고.”

이미 모든 칸이 채워져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채경이 입을 다물곤 온화하게 웃었다. 새까만 선글라스가 형광등에 반사되어 빛났다.

“재밌으면 해야지. 이따 봄이 오면 같이 부탁해 줄게.”

“진짜? 고마워!”

세화와 승철은 여전히 쓸데없는 걸로 다투고 있고, 범규는 남은 조각을 최대한 그러모았다. 은근히 복작복작한 광경에서 채경은 고개 돌려 멍한 얼굴로 앉아 있는 주현을 바라보았다.

“주현아, 그거 마음에 들었나 봐?”

아름다운 무늬가 음각으로 새겨진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던 주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니. 불붙이면 담배에 기름 냄새 쩔어.”

“그런 것치곤 손에서 놓질 않네.”

다시 한번 찰칵 소리가 울렸다. 주현은 슬쩍 세화의 눈치를 살피곤 입술을 혀로 적시며 대답했다.

“그냥. 신기해서.”

채경이 손을 내밀었다. 대충 던졌음에도 채경은 한 손으로 가볍게 라이터를 받았다.

“기름 라이터 오랜만에 봐. 이거 비싼 브랜드인데.”

“그래?”

“응. 안 들키게 조심해. 바로 뺏어 갈걸.”

C동에는 금지된 물건이 많이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라이터인데, 충동적인 폭주 에스퍼가 가지고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건물에 불을 지르는 건 성냥으로도 가능하지만, 지금껏 성냥으로 불 지른 사람이 없기에 아직 성냥은 금지 품목이 되지 않았다.

라이터를 돌려받은 주현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묵직한 기름 냄새가 훅 풍기곤 사라졌다.

“확인은 했어?”

채경과 주현, 두 사람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주현은 채경을 보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C동에 오는 가이드 중에 멀쩡한 놈은 없다. 범주를 나누자면 단순하게 못된 놈들부터 음습하게 못된 놈들까지 다양했는데, 세화는 작년에 음습하게 못된 가이드에게 잘못 걸려 지독하게 괴롭힘당한 적이 있다.

에스퍼의 폭주로 가족을 잃은 가이드가 C동에 대한 소문을 듣고 복수하기 위해 찾아왔었다. 해당 에스퍼는 폭주 끝에 결국 목숨을 잃어서 갈 곳이 없어진 분노가 살아 있는 폭주 에스퍼들에게 향한 것이다.

가이드는 복수만 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좋았던 것 같았다. B동과는 달리 가이드의 의견을 최대한 맞춰 주는 C동이기에 어떤 에스퍼를 원하냐는 말에 아무나 좋다고 대답했으니까.

가이딩은 처음엔 순조롭게 흘러갔다고 했다. 그러다 다섯 번째로 가이드가 찾아온 날, 그는 세화에게 작은 라디오를 선물했다.

세화는 방으로 돌아가 라디오를 틀었고, 그 순간 날카로운 이명이 들려왔다. 동시에 그동안 세화의 목숨을 수도 없이 구한 본능이 도망쳐라 강렬하게 외쳤다.

결국 방은 반파되고 왼팔이 날아갔으나, 그녀는 살아남았다. 그날 진봄이 C동에 있지 않고 임무를 나가기라도 했다면 세화는 영원히 팔 하나를 잃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가이드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반입 불가 물건을 받은 죄로 세화가 일주일간 독방에 갇혔다. 임무에 나가서 우연히 그 자식을 만나게 된다면 반드시 양팔을 뽑아 버릴 거라고 외치는 소리가 일주일 동안 복도를 울렸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 가이드는 C동에 들어올 수 없게 되었다. C동의 모든 에스퍼는 수리비와 기타 추가 비용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아무튼 그 후 세화는 가이드를 완전히 경멸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좋은 사람인 척 구는 가이드는 특히나 더더욱. 물론 세화 말고도 폭주 에스퍼는 누구나 가이드를 경계하지만, 차인호가 공인이라는 점에서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주현이 실금이 간 시계를 올려다보곤 벌떡 일어났다.

“두 사람 싸우는 건 좋은데, 힘은 쓰지 마. 안 그래도 가이딩 부족한 인간들이 뭐 하는 거야. 그리고 범규야. 십자말풀이 두식이가 이미 다했다. 형은 애 좀 그만 놀려.”

“뭐? 임두식 나쁜 놈!”

센터장의 이름을 외친 범규가 눈물을 머금으며 끌어안았던 신문지 조각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리고 알면서 자신을 꼬드겨 봄에게 이것저것 뜯기게 만들려 했냐며 채경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하하, 들켰네. 어, 주현이 임무 가? 조심히 다녀와.”

“주현이 형, 혹시 신문이나 잡지 같은 거 보면 좀 가져와 주라.”

그럴 가능성은 낮았지만 주현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승철을 이긴 세화가 콧방귀를 뀌며 눈짓으로 주현을 배웅했다.

방을 나선 주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라이터를 안주머니 깊숙한 곳에 넣었다. 약간 묵직한 무게감은 곧바로 익숙해졌다. 기름 냄새와는 다르게.

* * *

11년 전, 주현이 처음 C동에 왔을 때 이곳에서 만난 에스퍼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이는 없다. 그나마 가장 오래 있었던 이는 4년 전에 죽었다. 그는 강한 에스퍼였고, 어떤 임무에서든 살아 돌아왔으나 자기 자신은 이기지 못했다.

주현은 가끔 자신이 잘못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다들 그랬듯 그도 슬슬 죽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살아 있다는 생각.

늘 그런 생각을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데 어떠한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는 이유 말이다.

이번 임무의 타깃이자 협회의 적은 자신을 해치기 위해 누군가 찾아올 거라 예상한 듯 총으로 중무장한 경비가 가득했다. 주현은 그들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임무 대상은 단 한 사람이고, 그 때문에 관에 들어갈 사람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으므로.

결코 오만해하거나 방심하지 않았다. 그저 봐주면서 싸웠을 뿐이다.

물론 어느 정도 봐준다 해도 에스퍼와 일반인의 차이는 압도적이지만, 그건 늘 가이드가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일반적인 에스퍼의 이야기다. 언제 다시 가이딩 받을지 모르는 폭주 에스퍼는 능력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건 주현 또한 마찬가지였고, 결국 임무는 완수했으나 커다란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직원이 대기하고 있는 차로 돌아온 주현은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평소와 다른 점은 거의 다 그의 몸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평소에는 팔에 매달려 있는 벨트가 지금은 허벅지를 강하게 묶고 있다. 그 외에도 총알이 지나간 자리는 무수히 많았다.

가이드에게서 받는 가이딩이 적당한 온수에 몸을 담그는 느낌이라면, 가이딩 약물은 한순간 용암에 빠지는 느낌이다. 정신이 번쩍 들며 온몸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가 또 금방 열기가 가라앉는다. 능력이 요동치는 감각은 줄어들지만, 결코 충분하지 않다.

뒷좌석에 누운 주현이 헐떡이며 기침했다. 입안에 비릿한 맛이 가득 차올랐다. 호흡이 힘들어 고개 돌려 뱉어 내자 직원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에 얼굴을 코앞까지 들이밀어도 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게 선팅된 자동차가 C동을 향해 빠르게 달렸다. 그러나 주현은 그곳에 도착해도 별다른 구명줄이 있지는 않다는 걸 알고 있다.

총에 너무 많이 맞아서 일반적인 의료 기술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타이밍 좋게 봄이 임무를 마치고 C동에 있다 해도, 주현은 이미 예전에 그녀의 손으로 목숨을 건진 적이 있다. 봄은 어떤 것도 고칠 수 있지만, 단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다. 그는 이미 기회를 써 버렸다는 뜻이다.

게다가 차인호는 오지 않는다. 촬영 일정이 빠듯해서 금요일은 되어야 올 수 있다고 말했으니까.

오늘은 화요일이고, 주현은 오늘 죽을 것이다.

무섭지는 않았다. 두렵지도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별다른 미련도 없었다. 인생을 의미 있게 가꾸지 못한 탓에 죽음마저 가벼워졌다. 지금껏 그가 죽지 못한 유일한 이유는 자살만은 하지 말자던 작은 약속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어쩔 수 없는 죽음은 자살이 아니니까……. 그렇지?’

주현은 누구에게 건네는지도 모를 생각을 하며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욱신욱신 쑤셔 오는 상처에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놀이기구라도 탄 기분이었다. 물론 놀이기구 같은 걸 타 본 적은 없지만.

그러나 이토록 의미 없는 삶이지만 약간의 미련, 아니, 아쉬움이 있다면…….

‘차인호에게 이러다 죽겠다 싶을 정도로 가이딩해 달라고 해볼걸.’

가이딩을 충분히 받는다는 건 온몸에 힘이 차오르고 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대단한 감각이라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었다. 그걸 못 느끼게 되었기에 이곳이 더욱 지옥 같은 거라고, 지금은 없는 누군가가 말하기도 했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한 번 정도는 그렇게 해 달라고 말해 볼 걸 그랬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차가 다시 한번 흔들렸고, 이번에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직원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으며 주현은 눈을 감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