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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11/161)

폭주 에스퍼 11화

“주현 씨, 보라도 가이드라는 거 아세요?”

“B급 가이드 아닙니까? 연예인치곤 흔치 않게 매칭 없이 주기적으로 센터에 들러 가이딩한다던데.”

물론 전부 승철이 말해 준 것들이다. 서보라와 만나게 된 계기를 줄줄 읊은 탓에 머릿속에 콕 박히고 말았다.

“많이 아시네요. 저 발현하고 나서 보라가 많이 도와줬어요.”

“아, 네.”

“정말 좋은 가이드죠? 친절하면서도 공과 사를 잘 구분하고.”

“아니…….”

만난 적도 없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버릇처럼 뱉으려던 비꼬는 말을 꿀꺽 삼킨 주현이 어색하게 대꾸했다. 상황 자체가 불편해서 그런지 다리가 절로 떨렸다.

세상에 대가 없는 친절이란 없다. 정확히 말하면, 무척 드물다. 차인호에게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주현을 긴장시켰다.

“그런데 주현 씨가 그런 부탁을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네요. 자존심 엄청 강해 보였거든요.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나 봐요.”

계약에는 어긋나지만, 일주일 동안 가이딩을 빼먹어도 된다는 걸 대가로 제시할지 고민하던 주현이 고개를 들었다. 차인호는 웃고 있었지만 두 눈이 가라앉아 있었다. 평소에도 썩 호의적인 남자는 아니었으나 지금은 확실하게 악의를 담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주현은 자존심 하나만을 가지고 지금껏 살아왔다. 폭주 에스퍼의 검붉은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뜩였다.

“사인 한 장 받아 달라는 게 그렇게 기분 나쁠 일입니까?”

“저 기분 안 나쁜데요.”

“사람 바보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그럼 당신이 지금 행복하다고 말하는 겁니까?”

부탁하는 입장이니까 그냥 좀 져 주면 될 텐데 주현은 그게 어려웠다. 겁 많은 개가 크게 짖는 것처럼, 주현의 날 선 반응은 이미 습관이었다.

“그렇지는 않죠. 애초에 이런 곳에서 어떻게 행복하겠어요.”

언성이 조금도 커지지 않은 부드러운 목소리에 주현은 말문이 막혔다.

C동은 겉보기에도 음울하고 칙칙하며 심지어 오는 길조차 험하다. 안에는 위험한 폭주 에스퍼가 가득하고, 벽도 바닥도 가구도 하나같이 낡았다.

이미 너덜너덜한 자존심이 날카로운 송곳에 푹 찔려 그곳을 중심으로 쩌적 금이 갔다. 괜히 손톱을 신경 쓰는 척 고개 숙인 주현이 엄지에 남은 작은 흉터를 손끝으로 덧그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여기 있기 싫으면 가도 됩니다만.”

주현은 벌써 11년째 C동에서 살고 있다. 분명 거지 같고,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11년이었다. 하지만 행복을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나? ……잘 떠오르지 않았다.

“……주현 씨, 방금 말은 사과할게요.”

“괜찮습니다. 사실인데요, 뭐.”

분노도 슬픔도 완전히 사라진 어투에 차인호가 안경을 벗어 눈가를 문질렀다.

차인호는 죄책감을 느끼는 듯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주현은 정말로 괜찮았다. 오히려 그가 신경 쓰는 이유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폭주 에스퍼는 곁에 다가가면 안 되는 이들이다. 언제 폭주해서 날뛸지 모른다. 광견병 걸린 맹견들이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우리 속에서 행복을 느끼기란 어려운 게 당연하다.

열린 창문을 통해 창살 틈새로 신선한 산바람이 불어닥쳤다. 주현은 눈을 감고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흐트러지는 걸 음미했다. 역시 괜한 부탁을 했다는 생각과 함께 승철의 실망스러운 표정이 아른거렸다.

아쉬움을 갈무리한 주현이 습관적으로 담배를 입에 물고 흐린 연기를 뱉어 내던 때였다. 안경을 접어 테이블에 내려놓은 차인호가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여기에 오면 그리운 추억이 떠올라요.”

차인호의 눈동자에 스며 있던 악의는 이미 지워졌다.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떠올리듯 아련하면서도 따뜻했다.

“어릴 때 살던 집이 이곳처럼 나무에 둘러싸여 있었거든요.”

“…….”

“C동에 오면서 아주 오랜만에 다람쥐를 봤습니다.”

깊은 산속에 있는 덕에 거대하고 위험한 건물 주변에는 제법 많은 산짐승이 돌아다닌다. 출입 금지 팻말이 여기저기 있으나 동물들에겐 그저 차갑고 이상하게 생긴 나무일 뿐이다.

“다람쥐 좋아하시나 봐요?”

“그럼요. 귀엽잖아요.”

“귀엽긴 하죠. 전에는 제 방 창틀에 한 마리가 올라와서…….”

저도 모르게 대화를 이어 나간 주현이 힐끔 차인호를 살폈다. 그는 집중하고 있다는 뜻으로 몸을 기울이며 계속 말하라 손짓했다.

“땅콩을 두니까 잠시 사라졌다가 어느 순간 돌아와서 가득 물고 가더라고요.”

“하하, 귀엽네요.”

“그런데 안 먹고 저장하는 건지 계속 돌아오길래 결국 한 봉지를 다 주고 말았어요.”

“욕심쟁이 다람쥐군요.”

부드러운 대답에 주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람쥐가 얼마 전 철조망을 통과하다 실수로 몸이 걸려 감전되어 죽었다는 걸 모르는 차인호기에 오로지 즐거운 추억만 말할 수 있어서 좋았다.

“C동에서 땅콩을 파나요?”

“그것 말고도 많이 있습니다. 아몬드랑 호두, 캐슈너트……. 담배는 한 종류밖에 없으면서 말이에요.”

하얀 막대가 타들어 갔다. 주현은 그것을 피부에 문지르는 대신 테이블 귀퉁이에 비벼 불을 껐다. 가이드는 안도인지 아쉬움인지 구분하지 못할 미소를 지었다.

의미 없는 이 대화가 차인호 나름의 화해 손길이라는 걸 알고 있다. A동과 B동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가이드가 철저히 갑인 C동에서 주현의 기분을 신경 써 주는 게 어색하면서도 머쓱했다.

그래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누군가와 문제가 생기면 홀로 방에 틀어박혀 곱씹다가 결국 검고 진득한 감정으로 변해 마음속에 남아 버리는 주현으로서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차인호가 팔을 들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잘은 몰라도 반짝거리는 게 비싸지 않을까 싶었다.

“벌써 한 시간이 지났는데 가이딩이 더 필요한가요?”

“아니요. 충분합니다.”

안경을 들어 안주머니에 넣은 그가 낡은 의자를 테이블에 밀어 넣었다. 주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보라 사인은 다음에 올 때 가져다줄게요. 이름도 적어 달라 할까요?”

“그래도 됩니까?”

“안 될 거야 없죠.”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다. 주현은 이왕 이렇게 된 거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자존심을 굽히기로 했다. 나중에 승철에게서 새로 배급받은 셔츠를 두 장은 얻어 내겠다고 생각하며, 주현이 말했다.

“그러면 거기다 ‘연승철’이라고 적어 달라 해 주세요.”

차인호가 움찔거렸다. 한참을 가만히 있던 그는 로봇처럼 묘하게 굳은 움직임으로 주현을 바라보았다.

“연, 승철?”

“그 사람이 부탁한 거라서요. 연, 승, 철.”

“……신주현이 아니라?”

“네? 아, 예. 제 거는 필요 없습니다.”

뭐든 가치를 아는 사람이 가져야 쓸모가 있지, 주현이 받아 봤자 버릴 수도 없는 종잇조각일 뿐이다.

입을 다문 채 굳어 있던 차인호가 천천히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목덜미가 불그스름했다.

확실히 돈 귀신 센터장이 냉난방을 잘 안 해줘서 약간 덥기는 했다. 물론 아직 여름이 온 것은 아니라 피부가 달아오를 정도로 덥지는 않았으나, 가이드의 생리를 주현이 알 리가 있나.

유독 더위를 많이 타는구나, 생각하고 있으려니 차인호가 손을 내렸다. 얼마나 새빨간지 하마터면 민망해서 그런 거라고 착각할 뻔했다.

“보라 사인은 책임지고 받아 오겠습니다. 연승철 씨라고 했죠?”

“책임질 필요까진 없는데. 아무튼 고마워요. 이름 틀리게 적어도 그 인간은 기뻐할 거니까 너무 신경 안 써도 됩니다.”

갑자기 밝아진 차인호의 태도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주현은 목덜미를 문지르며 발끝으로 바닥에 난 금을 가볍게 두드렸다.

“혹시 주현 씨는 따로 필요한 거 없으십니까?”

“딱히 없는데요.”

“뭐든 괜찮으니까 말해 보세요.”

사람들의 인생을 평균으로 나누면 주현은 상당히 아래쪽에 처박혀 있다. 살면서 선택권이 많았던 적이 없고, 누군가 그의 희망 사항을 들어준 적도 거의 없다. 가끔 호의를 베푸는 이들의 계기는 동정심이고, 그 외에는 뒤통수를 치기 위함이다.

차인호가 주현을 속여서 얻을 수 있는 건 없으니 이번에는 동정이 주된 이유일 터다. 설령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유가 뭐든 호의에 대처하는 법을 잘 모르는 주현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나쁜 버릇이 도졌다.

“왜요?”

스스로 듣기에도 날카로운 말투였다. 아차 싶었으나 이제 와서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는 차라리 당당하게 턱을 들었다.

“제가 필요한 걸 그쪽이 왜 신경 쓰는데요?”

차인호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그래도 화가 나 보이지는 않았다. 그게 또 이상했다. 보통 주현이 상대를 거칠게 밀어내면 누구든 인상 쓰며 괜히 불쌍하게 여겼다 침을 뱉곤 멀어지기 때문이다.

“그냥 그러고 싶으니까요.”

입술을 달싹였으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마땅한 이유가 없다는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주현은 고개 숙여 심지가 타 버린 성냥을 만지작거렸다. 손끝에 까만 재가 묻어났다.

“그럼…….”

* * *

찰칵. 찰칵. 찰칵.

“그거 좀 그만하면 안 되냐?”

십자말풀이가 완전히 채워진 신문을 내던지며 세화가 외쳤다. 범규도 동의한다는 듯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주현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손안에는 은색 라이터가 들려 있었다. 뚜껑을 열 때마다 울리는 짤깍 소리가 거슬린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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