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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10/161)

폭주 에스퍼 10화

“어떠냐?”

“뭐가.”

“차인호.”

툭 떨어진 말에 주현이 책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정리 안 된 곱슬머리와 삐죽삐죽 솟은 턱수염 때문에 제 나이보다 몇 살은 더 많아 보이는 남자, 승철이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얼마 전 스물아홉 번째 생일이라고 그에게 C동 매점에서 가장 비싼 과자를 사 줬던 주현이 대수롭지 않게 책장을 넘겼다.

“그냥 그래.”

“그럴 리가 있나. 무려 매칭 가이드인데.”

“매칭 가이드라고 해도 늘 붙어 있는 것도 아닌데 뭐.”

그 말대로 차인호는 기껏해야 주에 두 번밖에 오지 않는다. 매칭 가이드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물론 그것마저도 감지덕지한 입장이라는 건 주현도 알고 있다. 눈앞의 승철만 해도 벌써 닷새째 가이딩을 받지 못해서 이틀 전에 난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으니까.

“가이딩은 잘해 줘?”

“그럭저럭.”

“이상한 짓은 안 하고?”

주현의 검붉은 눈이 승철에게 닿았다. 시선에 담긴 뜻을 알면서도 승철의 얼굴은 꿋꿋하게 자그마한 화면에 고정돼 있었다.

“니코틴 패치 준 거 말곤 딱히.”

“하하, 그거 써 봤어?”

“그럴 리가.”

청 테이프로 둘둘 감긴 리모컨이 승철의 커다란 손안에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등받이에 팔을 걸친 그가 테이블 위로 다리를 올리며 말했다.

“마음에는 안 들겠지만, 너무 기분 더럽게 하는 거 아니면 그냥 참아 줘. 우리 같은 놈들 가이딩하겠다는 녀석이 흔한 게 아니잖아.”

“우리 같은 놈들이 뭔데?”

주현보다 좀 더 검은색이 많이 섞인 붉은 눈동자가 바라보는 게 느껴졌으나 주현은 책을 읽는 척하며 시선을 피했다.

“우리가 가이드를 죽이기를 해, 때리기를 해?”

“그럴 가능성이 있지.”

맥이 탁 풀렸다. 주현은 굴러다니던 휴지 조각을 책장 사이에 끼우곤 소파에 드러누웠다.

그들은 ‘다시 한번 폭주할 가능성’ 때문에 평생을 갇혀 살아야 한다. 그것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는, 진작에 체념했다.

다만 웃기지도 않는 매칭 가이드가 나타나고, 가이딩이 부족하지 않은 상황은 처음이라서. 그래서 문득 주현은 C동에 있는 에스퍼 중 오직 자신만이 그런 혜택을 받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바깥에 있는 에스퍼들은 이걸 일상적으로 받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라 어쩐지 가슴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죄책감과 분노가 번갈아 치밀어 올랐다.

‘차인호와 무언가 대단한 걸 하지도 않아. 기껏해야 손을 잡는 게 다인데, 가이드들은 오직 가능성을 이유로 죽어 가는 우리들의 손 한 번 잡아 주지 않지.’

주현은 죄가 많으니 그렇다 쳐도 이곳의 다른 이들까지 그런 것은 아니다. 심지어 승철은 운 좋게도 폭주할 때 어떤 민간인도 휘말리지 않았다.

불퉁한 표정으로 주현이 갈색 소파를 문지르고 있자 뜨거운 손바닥이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쓰다듬는다기보단 헝클인다고 해야 할 정도로 거칠었으나 주현은 거부하지 않았다.

살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준 사람은 승철이 두 번째였다. 처음으로 큼지막한 손이 머리로 다가왔을 땐 때리는 줄 알고 눈을 꾹 감았었다.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것이 위협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아무튼 언제 떠날지는 몰라도 네 손으로 쫓아내지는 말라는 말이다. 이왕 생긴 가이드, 최대한 쭉쭉 뽑아 먹어야지.”

“내가 쫓아내면 형한테 기회가 올지도 모르는데?”

주현은 자신에게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어서 차인호가 선택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다. 결국 차인호가 원하는 건 폭주 에스퍼일 테니 C동에 있는 누구라도 상관없으리라.

늘 무신경하면서도 이상한 곳에서 날카롭게 굴곤 하는 승철이 주현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넌 제대로 된 가이딩이 뭔지도 모르잖아.”

주현은 이례적으로 발현과 동시에 폭주했다. 그 직후 바로 C동으로 이송되었으니 평범한 에스퍼들과 같은 경험을 할 기회조차 없었다.

“우리한테 미안해하지 마라. 우리 것을 빼앗은 게 아니라, 그냥 원래부터 네 거였다 생각해.”

자신만의 것을 손에 쥐어 본 적이 거의 없는 주현은 여전히 죄책감을 떨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노력해 보기로 했다.

표정이 풀린 것을 알아챈 승철이 몸을 물리며 씨익 웃었다. 괴물 같은 폭주 에스퍼보단 동네 백수 삼촌 같은 느낌의 그가 수염이 돋은 턱을 벅벅 긁었다.

“혹시 알아? 의외로 네가 마음에 들었다면서 계속 가이딩해 줄지?”

“1년 계약이라고 말했잖아.”

“언제든 연장할 수 있는 거지.”

“그럴 일은 절대로 없거든.”

그래. 절대로 없다. 누구도 말해 주지 않았지만, 주현은 차인호가 굳이 폭주 에스퍼와 매칭한 이유를 어렴풋이 예측하고 있었다.

가이드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는 의혹은 벌써 폭주 에스퍼에 대한 이야기로 묻혔다. 1년이 지난 후에도 계약을 유지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어느새 TV로 시선을 돌린 승철이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주현은 회색 천장을 보며 눈을 깜빡이다 크게 하품했다.

“그런데, 차인호……. 친구는 좀 있다냐?”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혹시 서보라랑 친하대?”

“그러니까 내가 그걸 어떻게…… 아니, 싫어. 안 들어줄 거야.”

싸한 느낌에 주현이 몸을 일으켰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어깨를 잡은 단단한 손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일어나서 휴게실을 벗어났을 것이다. 평소였다면 힘으로 밀리지 않겠지만 지금은 자세가 안 좋았다.

승철이 형광등보다도 밝게 웃었다.

“주현아.”

“싫다고 했어. 쪽팔린 부탁 하지 마.”

“사인 한 장이면 돼.”

“싫다니까!”

“정말 고맙다! 너만 믿고 있을게!”

“난, 분명, 싫다고- 윽!”

두꺼운 팔뚝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던 주현은 겨우 뿌리치고 일어나 뒹굴 듯이 소파에서 내려왔다. 승철은 여전히 환히 웃고 있었다.

서보라는 주현이 가끔 들었던 이름이다. TV가 아니라 승철의 입에서. 폭주하기 전, 센터에서 우연히 그녀에게 가이딩을 받은 후로 아직까지도 푹 빠져 있다고 했다.

C동 에스퍼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는다. 서로의 상처를 핥아 주기엔 이미 지쳤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몇 번이고 들었을 정도로 승철이 서보라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는 상황에서 무작정 못 들은 척하기가 좀 그랬다.

물론 차인호에게 부탁하는 건 너무나도 싫었지만, 이 삭막한 곳에서는 사소한 일 하나로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결국 주현은 승낙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네?”

“그러니까, 서…… 해 주면…….”

“죄송한데 하나도 안 들려요.”

늘 당당한 얼굴로 상대를 위협하는 주현이지만 오늘만큼은 수줍은 곰과 다를 바 없었다.

주현은 조금 따뜻해진 볼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누군가에게 부탁해 본 적이 거의 없어 초조하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냥 별것 아니라는 듯 뱉었으면 괜찮았을 텐데, 괜히 망설이다가 상황만 이상해졌다.

폭주 에스퍼가 힐끗 가이드를 살폈다. 웬일로 안경을 쓰고 평소보다 흐트러진 차림으로 온 그가 수상하다는 듯 주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추레하다고 말할 수 있는 차림새도 차인호가 하니 인간적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여전히 반칙 같은 얼굴에 남몰래 혀를 찬 주현이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연예인에게 사인을 부탁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신주현이 차인호에게 사인을, 그것도 남의 사인을 부탁하는 것은 이상한 걸 넘어서 지독하게 부끄러웠다.

하지만 잠시간의 쪽팔림을 참고 넘기면 승철이 행복해진다. 늘 누군가를 불행하게 만들었던 주현에게 잘 오지 않는 기회였다.

목을 가다듬은 주현이 시선을 굴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툭 뱉어냈다.

“혹시 서보라 압니까?”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 깨끗한 눈매가 조금 벌어졌다. 주현에게서 들을 줄 몰랐던 이름에 고개를 약간 기울인 그가 대답했다.

“알죠.”

“친해요?”

“……같은 영화에 출연한 적 있어서. 그럭저럭 연락은 합니다.”

본인은 몰랐지만, 주현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에 따라 차인호의 눈은 가늘어졌다.

연예인이라고 전부 친한 것은 아니니 사실 큰 기대는 없었는데 예상외의 결과에 주현의 가슴이 들떴다. 의심이 듬뿍 담긴 차인호의 시선을 알아챈 주현이 헛기침과 함께 애써 표정을 굳히고 힐끔거리며 물었다.

“그럼 사인 같은 것도 해 주겠네요?”

관심 없다는 듯 소매를 가지고 노는 손가락이 지나치게 분주했다. 차인호는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무표정이 되어 테이블에 팔을 올렸다.

“……보라 사인을 가지고 싶은 겁니까?”

무의식적으로 몸을 기울였던 주현이 머쓱하게 목덜미를 문질렀다. 대놓고 물어보니까 어쩐지 민망했다.

“그럼, 뭐, 안 됩니까?”

“안 될 건 없는데, 음…….”

주현은 차인호가 해 주겠다고 말하길 간절히 바랐다. 쪽팔림을 무릅쓰고 부탁까지 했는데 그가 거절하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다.

“알겠어요.”

의외로 산뜻하게 돌아온 짧은 대답에 주현이 환하게 웃었다. 승철의 기뻐하는 얼굴이 벌써부터 훤했고, 그 앞에서 잔뜩 거들먹거릴 생각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렇게 웃는 거 처음 보네.”

“네?”

“주현 씨가 보라 팬인지는 몰랐네요.”

생긋 웃은 차인호가 손바닥에 턱을 괴었다. 별다른 메이크업을 하지 않았음에도 여전히 반짝이는 외모였으나 다른 생각을 하느라 주현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딱히 팬은 아니지만, 사인을 부탁한 주제에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좀 그렇겠지. 주현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연예인에 관심 없는 줄 알았어요.”

“없는 거 맞습니다.”

“……보라만 예외다?”

말투가 묘했다. 분명 얼굴은 웃고 있는데 은근히 까칠한 어조에 주현은 어떻게 굴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원래 성격대로라면 배 째라 했겠으나, 주현을 평범하게 대해 주는 극소수의 사람 중 한 사람인 승철에게 멋진 생일 선물을 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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