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8화
“어린애라고 봐준 거 모를 줄 알았나?”
“아닙, 쿨럭, 아닙니다.”
“폭주 에스퍼 주제에 상부의 명령보다 네까짓 놈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나 보군.”
마흔을 넘은 나이임에도 다부진 손이 주현의 옷깃을 잡아챘다. 피투성이가 되어 벌써 퍼렇게 멍이 들기 시작한 얼굴을 코앞까지 잡아당긴 태석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쓸모없는 버러지 자식을 주워다가 먹이고 입히며 살려 주고 있는데, 은혜를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정말 안 드는 건가?”
“…….”
“넌 우리의 자비로 살아 있다는 걸 잊지 마라. 네가 저지른 짓은 즉시 사형 판결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야. 나는 쓸모없는 개새끼를 계속 키울 정도로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다.”
태석의 피부에서 새어 나온 가이딩에 주현의 멍이 미약하게 사그라들었다. 등급이 낮은 탓에 작은 생채기나 좀 사라질 정도였음에도 태석은 눈앞의 에스퍼를 가이딩했다는 사실이 불쾌한지 미간을 찌푸렸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그 미친 가이드에게 괜한 말을 하지 않길 바란다. 그 자식은 귀찮은 곳과 연이 있는 모양이니까.”
마지막 문장은 혼잣말처럼 작게 나왔으나 일반인보다 신체 능력이 좋은 에스퍼의 귀에는 선명하게 들렸다.
입가를 훔치자 입술이 찢어진 건지 혹은 코피가 흘러내린 건지 피가 흥건히 묻어났다. 여기저기 온통 시퍼런 멍이 들었을 몸은 무척 아팠으나 주현의 표정은 여전히 고요했다.
“바닥 치우고 돌아가라.”
주현을 내던진 태석이 혀를 차며 화려한 집무실에 딸린 욕실로 향했다. 목욕이라도 할 셈인지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임무 때보다 훨씬 더 큰 상처를 입은 주현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욕실 문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올린 그가 피가 섞인 침을 퉤 뱉었다.
에스퍼는 일반인보다 튼튼하다. 심지어 주현은 에스퍼로 발현하기 전부터 두들겨 맞는 데 이골이 나 있었다. 그러니 겨우 이 정도 맞는 걸로 한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아주 이득인 거래였다.
최악의 경우 놓친 타깃을 쫓아가서 임무를 마무리 지으라고 할까 봐 긴장했지만,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인지라 위험을 감수할 가치는 없는 듯했다.
“후…….”
주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곤 익숙하게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평범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 * *
“…….”
“…….”
“할 말 있으면 하시죠.”
정적을, 정확히는 시선을 견디지 못한 주현이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눈조차 깜빡이지 않으며 주현의 얼굴을 끈질기게 응시하던 차인호가 천천히 손을 들어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 간단한 동작마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게 만드는 차인호는 감정을 가라앉히려는 듯 낮고 긴 숨을 내쉬었다.
상처가 익숙한 이곳에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처음이라 주현은 괜히 초조함을 느끼며 제 발 저린 듯 입을 열었다.
“에스퍼가 임무 중 다치는 건 흔한 일입니다. 이런 걸 대비해서 가이드가 있는-”
“그게 임무 때문에 다친 거라고 말하는 겁니까?”
놀랍게도 차인호는 화난 듯한 목소리였다. 꽉 다물려 떨리는 턱. 힘을 준 눈가. 차인호는 화를 내도 아름다웠으나, 화면 너머에선 본 적 없는 위압감이 있었다.
“누가 봐도 사람 주먹에 맞았는데?”
어느새 다가온 차인호가 주현의 볼을 감싸 쥐었다. 늘 따뜻한 손이 제법 조심스럽게 보랏빛으로 물든 피부를 쓰다듬었다.
밀어닥치는 가이딩이 순식간에 고통을 몰아냈다. B등급 가이드라 완전히 나으려면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그래도 몇 분이면 멍 정도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주현은 분노와 걱정이 반쯤 뒤섞여 있는 차인호를 올려다보았다.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을 걱정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말했듯이 에스퍼가 다치는 건 늘 있는 일이고, 그 이유가 뭐든 차인호가 왜 신경 쓰겠는가.
“여기 찢어진 건 뭐야. 어디 구둣발에라도 차였어요?”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입니까?”
차인호의 손이 멈췄다. 그는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멍한 표정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굳어지는 얼굴은 방금보다 훨씬 더 큰 분노를 담고 있었다. 주현으로선 정말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뭐?”
“제가 누구한테 얻어맞든 무슨 상관이냐고 물었습니다.”
비꼬는 것도, 일부러 속을 긁으려고 한 말도 아니다. 순전히 호기심만으로 뱉은 질문이다. 그럼에도 차인호는 지금껏 그를 불쾌하게 만들려던 주현의 어떤 시도보다도 훨씬 더 기분 나빠 보였다.
차인호는 눈에 힘을 주고 이를 악물었으나, 가이딩은 멈추지 않았다. 조금 간지럽다 싶을 정도로 가볍게 주현의 볼을 매만진 그가 어쩐지 체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기억력이 나쁜가 본데, 전 신주현 씨의 매칭 가이드입니다. 당신이 다치면 가이딩해야 하는 건 저란 말입니다. 그런데도 제가 아무 상관 없습니까?”
“……성가시면 안 해도 되는데요.”
“계약서에 사인할 때 같은 자리에 있었잖습니까. 당신 상처 그냥 넘기는 거 계약 위반이에요.”
확실히 차인호 입장에서는 매칭 에스퍼가 임무도 아닌 곳에서 다쳐 오면 귀찮긴 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주현의 상처는 임무의 연장선이었지만, 그걸 차인호가 알 리 없다. 주현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차인호는 조금 누그러진 표정을 지었는데, 눈이 마주치자 미간을 구기며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그러나 너무 과장스러워서 조금도 진심처럼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가이딩하고 나면 온몸에서 힘이 쫙 빠지거든요.”
태석의 군화에 차여서 난 상처에 가이드의 엄지가 닿았다. 이마 아래 눈썹 근처에 난 터라 반사적으로 눈이 감겼다.
“아무튼, 그러니까…….”
지나치게 부드럽고 어딘가 여린 음성에 주현이 눈을 뜨려 했으나, 따뜻한 손바닥이 눈가를 덮어서 그럴 수 없었다.
“다치지 마요.”
주현이 눈꺼풀을 들었을 땐 이미 차인호가 멀어진 후였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자리로 돌아가 무심히 눈을 내리깐 채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주현에게는 시선 한 줌 주지 않는 게, 볼을 스쳤던 손길이 꿈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A급은 안 되어도 평균적인 B급보다는 파장이 강한지 주현의 손등을 덮었던 멍도 사라졌다. 찢어진 상처는 나았으나 여전히 끝이 깨져 있는 손톱을 매만지던 주현이 툭 내뱉었다.
“생각해 볼게요.”
차인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고개 숙인 그에게서 작은 피식거림을 들은 것도 같았다.
* * *
C동은 겉으로 봐도 제법 크지만, 내부는 지하층이 깊다 보니 훨씬 더 넓다. 지하는 3층까지 있는데 1층은 창고, 2층은 훈련장, 그리고 3층은 휴게실로 이루어져 있다.
창고 말고는 지상층에 있어야 할 장소들이나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언제 폭주할지 모르다 보니 폭주할 거면 차라리 지하에서 폭주하고 그대로 건물에 깔려 죽으라는 뜻이다.
옛날에는 지하 1층에 창고 대신 숙소가 있었는데, 새로 도입한 안전장치 덕분에 어느 정도 제한이 풀려 그나마 햇빛을 보며 잠에서 깨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주현은 현재 그 안전장치를 수리받는 중이었다.
“…….”
“아, 저, 죄, 죄송합니다.”
“아뇨.”
주현의 대답에 수리 기사의 어깨가 강하게 튀어 올랐다. 그에 주현은 그냥 입을 다물고 시선을 먼 곳으로 돌렸다. 여전히 목 근처에서 긴장으로 떨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안전장치는 폭주 에스퍼들의 붉은 스카프에 있다. 정확히는 그 안에 숨어 있는데, 목을 감싼 두꺼운 초커는 이런저런 기계와 전선이 달린 탓에 보기에 썩 좋지 않다.
미적으로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투박한 디자인이지만 이 작은 기계는 사실 무척이나 비싸다. 그야 그럴 것이 3분 단위로 위치를 입력하는 GPS가 들어 있고, 필요한 경우 임무 중 통신 장치로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기능이자 C동 에스퍼들이 자기 전 침대에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게 해 준 가장 큰 공신, 폭탄이 들어 있다.
한 번 더 폭주할 경우 인명 피해를 늘리지 않기 위해선 높으신 분들이 버튼 하나만 누르면 된다. 그러면 주변에는 영향 없이 오직 초커를 차고 있는 사람의 머리만 시원하게 날아간다.
다시 말해, 초커는 폭주 에스퍼에게서 시민을 지키는 안전장치임과 동시에 상부가 쥐고 있는 목줄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초커의 GPS 기능에 이상이 생겨 주현의 위치가 전송되지 않는 오류가 발생했다. 당시 지하 2층에서 훈련하고 있던 주현은 자신을 찾으러 온 직원에게 이끌려 센터장에게 불려 갔다.
‘도망간 줄 알고 하마터면 누를 뻔했잖은가.’
센터장은 주현을 보지도 않은 채 신문에 푹 빠져 있었다. 펜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십자말풀이라도 하는 듯했다. GPS가 고장 난 걸 모르고 임무라도 나갔다면 꼼짝없이 머리가 날아갔을 주현은 그다지 살았다는 기분도 없이 바닥을 응시했다.
‘앞으로 조심하게.’
그가 초커를 조종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뭘 조심하라는 건지 통 알 수 없었으나, 주현은 늘 그렇듯 순순히 대답하며 센터장 집무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현재, 그는 대학을 막 졸업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앳된 수리 기사의 손에 목숨을 맡긴 채 얌전히 앉아 있다.
원해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게 뻔히 보이는 기사가 침을 꿀꺽 삼키곤 전선을 연결했다. 창문 하나 없이 사방이 막힌 이곳은 설령 폭탄이 터져도, 누군가 비명을 지른다고 해도 소리 하나 새어 나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