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7화
조금 더 미소 짓고 있던 차인호가 표정을 갈무리했다. 방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좀 더 깔끔하고 만들어진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다.
“사람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진짜 저에 대해 알려지는 게 아니니까 괜찮습니다.”
순식간에 그어진 선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너도 그렇다는 듯 밀쳐 내는 벽에 얼얼할 지경이었다.
그래서였다. 차인호의 어깨 너머 창밖에서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게 보이고, 평소보다 느릿하게 퍼지는 방사 가이딩이 손끝을 스쳐서. 그래서 주현은 언뜻 부드러운 어조를 가장해 말했다.
“얼마 전에 발현했다는 거 거짓말이죠?”
뜬금없는 물음에 차인호가 눈을 깜빡였다. 약간의 경계심이 말간 눈동자에 떠올랐다가 이내 가려졌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나요?”
스무 살이 넘은 후에 발현하는 것은 너무나도 드문 일이라 지금껏 숨겨 왔다는 게 객관적으로 훨씬 현실성이 높다. 그러나 세상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누군가를 엿 먹이는 걸 아주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확률만으로 타인의 상황을 넘겨짚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다는 말이다.
최연소 폭주 에스퍼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주현은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코끝을 찡그리며 웃었다.
“고작해야 발현한 지 한 달 된 가이드라기엔 너무 잘하거든요.”
가이딩이란 그저 신체 접촉만 하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많지만, 사실 받는 입장에선 가이드의 능력에 따라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높은 등급일수록 파장의 세기가 강해서 보다 적은 힘으로도 높은 효율을 낼 수 있다. 고작해야 B급인 차인호는 파장의 양 자체는 적으나 미세한 조절을 잘했다. 밀어 넣는 파장의 양은 늘 일정하고, 무엇보다 스스로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결코 막 발현한 이로는 볼 수 없었다.
“못해도 10년은 가이딩해 온 것 같은데.”
직접 가이딩 받은 에스퍼만이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공식적으로 차인호의 첫 매칭 에스퍼인 신주현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보이며 히죽거렸다.
반면 차인호의 무표정은 약간 압박감이 느껴질 정도로 싸늘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천사 같았던 얼굴이 지금은 고드름이 생각날 정도로 차갑고 뾰족했다. 물론 타인의 미소보다 찡그린 얼굴을 훨씬 더 많이 보며 살아왔던 주현에겐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제가 워낙 재능이 넘쳐서.”
아주 느린 어조로 속삭인 차인호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고드름이 순식간에 녹으며 봄이 왔다. 표정이 휙휙 변하는 게, 다른 이가 그랬다면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으나 미모란 대단한 것이었다.
다만 곤란한 부분을 찔린 사람치고는 기분 좋아 보이는 게 이상했다.
이상한 사람을 싫어하는 주현의 미소가 사라졌고, 그에 반해 차인호의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거의 진심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런데 제 가이딩이 마음에 들었습니까?”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죠?”
“제가 잘한다면서요.”
싫냐 좋냐로 묻는다면, 당연히 좋았다. 아프거나 굴욕적이지 않고 그저 따뜻하고 온화하게 다가오는 가이딩을 싫어할 에스퍼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그러나 왠지 기분 좋다는 듯 싱글거리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순순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주현은 시선을 굴리며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로 말했다.
“나쁘지 않은 편입니다. ……저번에 왔던 가이드보다는 별로지만.”
물론 거짓말이다. 이곳에 왔던 모든 가이드 중에서 차인호는 세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괜찮은 가이드였다. 문제는 차인호가 그다지 특별한 일을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저 평범한 가이딩일 뿐인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면 폭주 에스퍼라는 게 더욱 부각될 것 같아서 거짓말했다.
“매칭 가이드 앞에서 다른 가이드 이야기하는 거, 무례하다고 안 배웠습니까?”
매칭 가이드. C동에 있는 에스퍼들은 생길 거라곤 평생 꿈조차 꾸지 않는 매칭 가이드가 눈썹을 구부리며 주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말을 고르던 주현은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대화를 포기했는지 차인호는 고개를 가볍게 내젓곤 다시금 대본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에스퍼와 가이드가 서로에게 각인되면 호르몬 변화로 인해 에스퍼는 타인에게 가이딩을 받을 수 없고, 가이드는 다른 에스퍼에게 가이딩해 줄 수 없다. 하지만 그건 각인되었을 때의 일이지 그저 계약서로 묶인 매칭과는 관련 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몇몇 연구원은 매칭만으로도 미약하지만 호르몬 변화가 있다고 말한다. 주기적으로 만나는 과정에서 서로의 파장에 물들어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이 있다.
호르몬이 솟아오를 때의 증상은 다양한 게 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상대에 대한 집착이다. 가이드보다는 에스퍼에게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증상이다.
물론 주현과 차인호는 호르몬 변화가 일어날 만큼 오랜 시간 함께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인호가 다시는 손잡아 주지 않을까 두려운 이유는, 주현이 망할 폭주 에스퍼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괜찮아도 당장 내일부터 열흘 간 아무 가이딩 없이 고통에 허덕이게 될지도 모를 폭주 에스퍼.
주현은 누구도 원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차인호가 그의 매칭 가이드가 된 것이 인생에서 다시는 없을 행운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물론 차인호가 계약을 파기하고 매칭을 끊겠다고 말한다면 주현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붙잡는 짓만큼은 죽어도 하지 않을 테다.
그러나 가이딩도 안 해주면서 매칭을 이어 나간다면, 그것은 곧 주현의 폭주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주현은 그게 무서웠다. 주변 사람들이 휘말릴까 봐. 폭주할 제 몸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은 지 오래다.
침묵하던 에스퍼가 늘 그렇듯 품속에서 성냥과 담배를 꺼내 들었다. 성냥에 피어오른 불꽃이 담배로 옮겨붙었다.
필터를 씹으며 담배를 피우던 주현이 힐끔 차인호를 살폈다. 그는 여전히 고개 숙인 채 바쁘게 대본을 읽고 있었다.
하얀 막대가 절반쯤 타들었고, 주현은 약간의 망설임 끝에 그것을 팔뚝에 비볐다. 쏘이는 것처럼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평소보다 조금 더 긴 시간 동안 꽁초를 누르던 주현이 슬그머니 손을 떼어냈다.
머뭇거림을 숨기며 시선을 돌리니 차인호가 어느새 대본을 내려놓고 주현과 그의 팔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묘하게 굳어진 얼굴로 잠시 가만히 있던 그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뻗었다. 가이드의 손바닥은 따뜻했고, 그 은근한 온기는 금방 동그란 화상을 밀어냈다. 상처가 사라졌음에도 차인호는 가이딩을 멈추지 않았다.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하세요.”
“아무 불만 없는데요.”
대본은 덩그러니 내팽개쳐진 채였다. 바짝 다가온 차인호는 작게 투덜거리며 가이딩을 이어 나갔다. 훅 밀어닥치는 파장을 느끼며, 주현은 남몰래 부드러운 숨결을 내쉬었다.
결코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것은 안도와 닮아 있었다.
* * *
가벼운 손짓에 두둥실 떠오른 시신이 둥글게 묶여 있던 밧줄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힘을 풀자 몸이 떨어짐과 동시에 밧줄이 팽팽해졌다.
주현은 주먹을 쥐었다 펴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평화롭고 행복했을 가정집은 그야말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바닥을 나뒹구는 물건들, 부서진 가구. 무엇보다 사방에 붉은 피가 낭자한 게, 스릴러 영화의 한 장면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현실이다. 이곳은 협회의 정보를 빼돌린 연구원의 집이며, 이곳은 연구원의 가족이 숨을 거둔 장소다.
묘한 간지러움에 손등으로 볼을 문지르자 아직 마르지 않아 축축한 피가 묻어났다. 그는 다치지 않았으니 남자의, 혹은 여자의 피가 튄 모양이다.
한 에스퍼가 이곳에 왔다 갔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격한 부부 싸움 끝에 배우자를 죽이고 본인도 목을 매달았다고 생각할 터. 바로 그것을 의도한 주현이 연구원의 노트북을 들고 천천히 현관을 향해 걸어 나갔다.
아니,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으니 걸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허공에 떠서 움직이던 주현의 몸이 우뚝 멈췄다. 장식장 위에는 화목한 가정답게 가족사진이 담긴 액자가 여럿 장식되어 있었다.
이젠 싸늘한 시신이 된 두 사람이 찍힌 것도 있었고, 그들 가운데에 한 아이가 활짝 웃으며 브이를 내보이는 사진도 있었다. 그것들을 잠시 바라보던 주현은 몸을 돌려 밖을 향해 날아갔다.
몇 분 후, 자신을 이웃이라고 말한 남자의 신고로 구급차와 경찰차가 건물을 에워쌌다. 사진 속 아이는 다급한 전화에 수업을 듣다 말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흰 천에 싸인 부모님의 시신 앞에서, 소년은 친척의 품에 안겨 큰 소리로 울었다.
* * *
짝! 살과 살이 닿는 날카로운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돌아간 고개를 정면으로 움직인 주현이 앞에 선 이를 바라보았다.
C동의 부센터장이자 실질적으로 C동을 운영한다고 말할 수 있는 남자, 류태석이 싸늘한 얼굴로 다시 한번 손을 들었다.
“타깃은 세 명이었다. 그런데 왜 하나를 살려 둔 거냐.”
“……해당 타깃을 놓치는 것이 제 존재를 들키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소음 때문에 신고가 들어간 상태여서 오래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그게 네가 생각한 변명인가 보지?”
임무에 나가는 것도 아니면서 젊은 시절처럼 늘 군화를 신고 다니는 태석이 주현의 복부를 걷어찼다. 신음 한번 없이 바닥에 쓰러진 주현이 담담한 표정으로 일어섰으나 밑창은 다시금 날아왔다.
그렇게 한 번 더 걷어채고 나서야 주현은 쓰러진 상태로 얌전히 발길질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