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61)

폭주 에스퍼 6화

“응급 상황에서 지혈할 때 쓰는 겁니다.”

“아, 그냥 멋으로 단 게 아니군요.”

“이런 게 멋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제 눈에는 멋있는데요.”

다른 에스퍼들에게는 없는 것이라 그렇게 느껴지나 본데, 사실 주현은 늘 팔에 매달려 있는 지혈 벨트가 부끄러웠다.

다른 에스퍼들에게 없는 이유야 뻔했다. 그야 필요가 없으니까. 늘 가이드가 가까이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지혈 따위를 해야 하는 상황이 얼마나 자주 있겠는가. 가이드 여럿이 붙어서 가이딩을 퍼부으면 금방 나을 텐데.

A동은 물론이거니와 B동에도 최신식 의료 설비가 갖춰져 있다. 응급 환자가 생겼을 시 빠르게 대처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폭주 에스퍼는 A동에도 B동에도 가지 못한다. 시한폭탄을 그런 곳에 출입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죽어 가는 응급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현장에서 응급조치를 마치면 곧장 외진 곳에 있는 C동으로 이송된다.

C동에 간다고 해도 상주하며 대기하는 가이드는 없으니 비상시에만 사용하도록 권장하는 가이딩 약물을 1차로 주입받고, 가석방 등을 빌미로 가이드를 불러서 간신히 목숨을 붙여 놓는다. 그 과정에서 조금이나마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벨트를 달고 다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주현은 그의 죄를 상징하는 적색을 볼 때마다 수치스러웠다.

대답하지 않으니 금방 흥미가 떨어졌는지 차인호는 어느새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보고 있었다. 바로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터라 볼 생각이 없어도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와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는 것 같았다.

전화기보단 무전기에 더욱 익숙한 주현은 슬그머니 차인호의 손을 놓았다.

멀어지는 손을 차인호는 붙들지 않았다. 아직 가이딩이 부족하지 않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저 의자에서 일어나 건너편으로 가서 앉을 뿐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두 사람은 그저 서로의 이익을 위해 계약한 비즈니스적인 사이니까. 물론 차인호가 그렇듯, 주현 또한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매칭을 진심으로 믿을 생각 따위는 티끌만큼도 없었다.

일정하게 늘어선 직선에 닿아 부서진 햇볕이 손끝을 스쳤다. 가이드가 멀어짐에 따라 다시금 공허함이 슬금슬금 차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주현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직 시큰거리는 발목에 대해 말하지 않을 것이다. 위험하니까 방심하지 말라고 제 입으로 지껄여 놓고는 이제 와 다시 한번 옆으로 와서 손을 잡아 달라고 말할 바엔 죽음을 택하는 게 낫다.

다행스럽게도 주현은 통증에 익숙했다. 사실 C동에 있는 모든 에스퍼가 그렇다.

“시간 다 됐네요.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음 주에 보죠.”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일어난 차인호가 가벼운 인사를 끝으로 가이딩 룸을 나섰다. 달칵,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차인호가 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홀로 앉아 사라져 가는 가이딩을 느끼던 주현은 불이 붙은 꽁초를 들고 잠시 고민하다 테이블 귀퉁이에 문질렀다. 방금과는 다른 의미로 숨쉬기가 불편했다.

* * *

차인호는 연예인이다. 정확히는 배우. 직원이 머릿속에 확실히 박아 넣으라던 프로필에는 그가 고등학생 때 데뷔했다고 적혀 있었다.

솔직히 말해 그것에 대해 주현은 아무 생각도 없었다. 고작해야 작은 화면에서 몇 번 본 걸로 연예인에 대한 환상을 가지기엔 그는 너무 바쁘고 고된 삶을 살아왔다. 거기다 차인호 본인부터가 연예인이라고 거들먹거린 적이 한 번도 없어서 그 인식이 더욱 흐릿해지기도 했다.

그렇기에 대본을 쥔 채 진지한 낯으로 글자를 읽는 차인호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그는 주현이 가이딩 룸에 들어섰을 때부터 그것을 읽고 있었는데, 그냥 책인 줄 알고 형광펜으로 여기저기 긋는 행동에 혀를 찼다. 새 책이라는 걸 가져 본 적이 없는 주현은 물건 귀한 줄 모른다고 속으로 욕하곤 일부러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의자를 잡아끌었다.

그제야 주현이 들어왔다는 걸 알아챘는지 번뜩 고개를 든 차인호가 조금 곤란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디 다친 곳 없습니까?”

“전부 멀쩡합니다.”

이젠 익숙하게 품에서 담배를 꺼낸 주현이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렸다. 눈이 뻑뻑하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손등으로 눈꺼풀을 문지르고 있자니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 참 다행이네요.”

손을 내리니 빈정대는 듯한 어조와 달리 평소처럼 예쁘게 다듬은 미소가 차인호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게 보였다. 이유는 몰라도 저번과 같은 차가운 태도를 유지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실례가 아니라면 가이딩하는 동안 이것 좀 봐도 될까요?”

그는 방금까지 실컷 낙서하던 책을 가볍게 흔들었다. 저번엔 시간을 죽이기 위해 몇 번이고 휴대폰을 들여다봤으면서 이제 와 무슨 말인지.

“그게 뭔데요?”

“대본이요. 갑작스럽게 수정돼서 시간이 부족하거든요.”

새삼스럽게도 주현은 차인호가 배우라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렸다. 물론 그걸 깨달았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주현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할 건 없는데.”

“일하는 중에 다른 일을 하면 기분 나쁜 게 당연하잖아요.”

생각도 못 했다는 듯 눈썹을 씰룩인 주현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서 그냥 관심 없는 척했다. 대충 재를 털어 내고 입술에 필터를 물자 차인호도 다시금 대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거 전부 다 외워야 하는 겁니까?”

잠시 후 은근슬쩍 흘러나온 질문에 차인호가 고개를 들었다. 재떨이 대신 테이블에 비벼져 불이 꺼진 꽁초를 힐끗 본 그가 천천히 대본을 매만졌다.

“전부는 아니고, 제 대사만 외우면 되는데 사실 합을 맞추기 위해 웬만해선 상대 것까지 외우는 편입니다.”

“흐음……. 힘들겠네요.”

검은 옷에 감싸인 다리가 옆에 있던 빈 의자에 올라앉았다. 낡은 의자에 깊게 몸을 기댄 주현은 창살로 막힌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 너머로 새파란 하늘과 높게 자란 나무가 보였다.

이곳이야 약간의 계절감을 제외하면 늘 같은 풍경이지만, 차인호는 C동에서 살지 않는다. 밖으로 나가면 자신의 일상이 있는 것이다.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다. 직업도 있고, 심지어 이미 성공해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가이드라는 부분은 그의 인생에서 아주 작은 소수의 영역일 뿐이다. 에스퍼가 인생 전부인 신주현과는 다르게.

문득 바쁜 시간을 쪼개서 이 삭막하고 위험한 곳에 와 폭주 에스퍼 따위를 가이딩해야 하는 그가 조금 불쌍하게 느껴졌다. 물론 둘을 비교하면 누구라도 주현의 인생이 훨씬 비참하고 불쌍하다고 말할 테지만, 생각 정도는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남들은 편하게 돈 번다고 하던데요. 카메라 앞에서 대사 몇 마디 하는 걸로 큰돈이 들어온다고.”

대꾸하는 와중에도 차인호의 눈은 대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몇 번이고 같은 대사를 중얼거리는 그를 보며 주현이 입을 열었다.

“차인호. 스물여섯 살. 열여덟 살 때 <고래의 바다>로 데뷔. 186㎝. 취미는 헬스. 가족 관계는 부모님과 남동생. 최근에 남우조연상을 탔으며, 지금껏 가이드라는 걸 숨기고 있었다는 의혹이 있음.”

의아함이 가득 담긴 얼굴이 주현을 똑바로 응시했다. 풍성한 속눈썹이 가볍게 팔랑였다.

가이딩은 결국 파장이고, 그것을 내뿜는 가이드의 몸 상태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아주 지친 상태가 아니라면 질 자체에는 별 차이 없으나 어느 정도 파장이 흐려졌다는 게 느껴진다. 신선한 채소와 덜 신선한 채소의 차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오늘 차인호의 가이딩은 평소보다 덜 깨끗했다.

“제 눈엔 그리 편해 보이지 않네요. 알지도 못하는 인간들이 나에 대해 줄줄 꿰고 있는 거 소름 끼칠 것 같은데.”

주현이 내뱉은 것들은 직원이 인터넷에서 긁어 왔을 게 뻔한, 누구나 알 수 있는 정보들이다.

널리 이름 알려진 연예인이 드러나지 않다 못해 꽁꽁 숨겨진 에스퍼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잠시 침묵하던 그가 형광펜으로 덧칠된 대본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제 데뷔작은 <고래의 바다>가 아닙니다.”

“예?”

“그 전해에 <작일>이라는 독립 영화에 나왔어요. 대사는 딱 한 줄밖에 없는 엑스트라였지만.”

주현은 독립 영화라는 게 뭔지 모른다. 그렇지만 무지를 굳이 드러낼 필요는 없기에 그냥 잠자코 있었다.

“겨울날 눈 속에서 네 시간을 기다렸는데, 촬영은 3분 만에 끝났어요. 돌아갈 때 김밥 한 줄이랑 5만 원을 주더라고요.”

썩 즐거운 추억도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하게 차인호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늘 웃는 얼굴인 차인호지만, 미소가 진짜였던 적은 없다. 계약서를 쓰고 한 달이 넘었는데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가이드가 아닌 차인호를 만난 기분이었다.

“헬스는 취미로 하는 게 아니고 몸을 만들어야 해서 하는 겁니다.”

“그렇습니까.”

“네. 그리고 저 가족 없습니다. 연 끊은 지 오래라서.”

차인호의 주머니에는 아직도 호출기가 들어 있다. 그것도 바로 손을 뻗을 수 있는 왼쪽 주머니에.

비록 매칭은 했으나 두 사람은 서로를 믿지 않고, 경계를 내려놓지도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왜 약점이 될 수 있는 사실을 불쑥 말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내가 어디 가서 말하면 어쩌려고.’

물론 주현에게 그런 걸 털어놓을 사람이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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