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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5/161)

폭주 에스퍼 5화

주현은 차인호가 무척 좋은 배우라는 걸 깨달았다. 성격이나 행동거지가 좋다는 게 아닌,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는 뜻이다.

다른 건 몰라도 어렸을 때부터 먹은 눈칫밥으로 타인의 적의에 민감한 주현은 눈앞의 가이드가 자신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가라앉는 눈동자나 묘하게 긴장한 어깨, 여전히 주머니에 들어 있는 호출기를 보면 모를 수가 없다.

분명 뭔가 원하는 게 있어서 매칭한 주제에 좋은 사람인 척 구는 차인호의 가식이 신경 쓰였다. 특히나 앞에 있는 게 폭주 에스퍼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라는 듯 짓는 미소는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꼴도 보기 싫었다.

“아무튼 가이딩을 시작할까요? 해 줬으면 하는 게 있습니까?”

정말 친밀한 사이가 아닌 이상 어떤 가이드도 이런 식으로 모든 선택권을 에스퍼에게 주지 않는다.

방금 위협당했다는 사실을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운 것만 같은 가이드를 보며 주현이 입술을 모아 연기를 내뱉었다.

훅 끼쳐 온 연기가 매운지 눈을 깜빡인 차인호는 조금 곤란한 듯 웃었다. 마치 장난스러운 어린애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미소. 그게 주현을 화나게 했다.

“네. 여기 상처가 있어요.”

“어디요?”

가이드가 조금 더 다가왔다. 그에 주현은 보란 듯이 꽁초를 손바닥에 비벼 끄곤 차인호를 힐끗 살폈다.

미소가 완전히 지워진, 싸늘한 얼굴의 그가 살갗이 녹아내린 동그란 자국을 응시하고 있었다. 약간의 충격과 불쾌감이 걱정을 가장하며 예쁜 얼굴에 떠올라 있다.

고작 이런 걸로 승리감을 느끼는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며, 붉은 눈의 에스퍼가 웃었다.

* * *

신주현과 차인호가 맺은 에스퍼-가이드 계약은 일반적인 계약서와는 조금 달랐다. 여러 부분 중에서도 가이드의 입장을 지나치게 배려한다는 점이 특히 두드러졌다.

일주일에 딱 두 번. 그것도 가이드가 원하는 날에 오면 된다는 조항은 언뜻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차인호가 악의적으로 이용하면 주현은 열흘이 넘는 시간 동안 아무 가이딩도 받지 못하게 된다.

거기다 매칭 가이드는 에스퍼가 급히 가이딩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을 때 1순위로 불리는데, 두 사람의 계약서에는 가이드의 사정에 따라 그것을 거절할 수 있다고 적혀 있다.

그러면서도 일반적인 계약서와 똑같이 에스퍼가 받는 소득에서 일부분을 가이드에게 준다는 조항은 빠지지 않고 들어갔다.

그야말로 호구 잡혔다고 해도 할 말이 없지만, 주현은 그 어떤 가이드에게 이것을 내민다 해도 거절당하리라는 걸 알고 있다. 왜냐하면 상대가 폭주 에스퍼니까.

아무리 좋은 조건이라고 해도 폭주 에스퍼와 매칭하는 가이드는 없을 것이다. 아니, 없었다.

“책이 무척 낡았네요. 좋아하는 책인가 봐요?”

주현은 짜증스레 눈을 굴리곤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있는 남자를 흘겨보았다. 차인호는 여전히 다정함을 꾸며 낸 얼굴로 턱을 괸 채 웃고 있었다. 사실은 아무 관심도 없는 주제에 흥미롭다는 듯 깜빡이는 눈이 웃기지도 않았다.

“여기 있는 책은 다 낡았어요.”

“아, C동에 도서관이 있나요?”

“아뇨.”

수갑에 감싸인 손이 페이지를 넘겼다.

물론 C동에 도서관 같은 편의시설이 있을 리가 없다. 이곳에 있는 책은 폭주 에스퍼들이 개인 물품으로 가져온 것 혹은 버려진 걸 떠넘기듯 기부받은 게 전부다.

남이 버린 걸 소중하게 받아 읽고 있다는 걸 들키기 싫었던 주현이 입을 다물었다. 굳이 캐물을 생각은 없었던 듯, 차인호는 부드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A동에 갔었는데, 거기 엄청 넓더라고요. 무슨 박물관이랑 기념품점도 있고, 다른 볼거리도 많아서 그런지 소풍 온 유치원생들도 있었습니다.”

“그럼 여기 있지 말고 거기 가시지 그래요.”

무뚝뚝한 대답을 가볍게 넘긴 차인호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몸을 일으켜 주현의 앞에 내려놓은 그것은 작은 상자였다.

열어 보라는 손짓에 주현은 경계를 풀지 않으며 조심스럽게 상자를 잡았다. 힐끗 차인호를 보자 그는 자애롭기까지 한 얼굴로 고갯짓했다. 물러서는 것도 어쩐지 자존심이 상해서 주현은 아무렇지 않음을 가장하며 상자를 열었다.

“…….”

“약국도 있더라고요.”

내용물을 확인한 주현이 눈썹을 구기며 차인호의 태연한 낯을 노려보았다. 치아까지 완벽한 남자가 꽃처럼 웃었으나 주현은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이래 봬도 연예인이라 담배 냄새 배면 안 돼서.”

‘니코틴 패치’라고 적힌 상자가 구겨져 차인호의 앞까지 굴러갔다. 애초에 고마워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는지, 선물이 코앞에서 내던져졌음에도 차인호는 마음 상한 기색이 없었다.

“그거야 그쪽 사정이지.”

주현이 활짝 웃었다. 확 휘어진 눈과 드러난 치아 때문인지 차인호가 움찔거리는 게 좁아진 시야에 들어왔다.

굳은살이 잔뜩 박인 손이 담배를 꺼내 들었다. 칙- 성냥에 불이 붙고, 불꽃은 망설임 없이 싸구려 담배로 옮겨붙었다. 흩어지는 연기 너머 말라붙은 피와 닮은 눈동자가 즐겁게 번뜩였다. 표지가 닳아 버린 책이 덮이고, 매캐한 냄새가 가이딩 룸을 맴돌았다.

차인호는 조금 질린 표정으로 손을 내저어 연기를 흩뜨린 후 패치 상자를 손에 쥐었다.

“진짜 성격 나쁘네요.”

“유일한 취미를 그만두라는데 순순히 ‘네, 그럽시다’ 하겠어요?”

“보통 흡연이 취미 범주에 들어가던가요?”

“보통 생각하고 여기 온 건 아니잖아요.”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C동에서 평범한 것이라곤 어디를 둘러봐도 없다. 당장 주현만 해도 두 눈동자가 짐승처럼 불그스름하니까 말이다.

더 따질 생각은 없는지 차인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패치 상자는 다시금 그의 주머니 속으로 사라졌다.

거의 끝까지 타들어 간 담배를 쥔 주현이 불을 어디에 끌지 고민하다 문득 차인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어쩐지 단호한 눈을 하고 있었다. 조금 비난하는 것 같기도 했다.

무척 익숙한 시선인데다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았으나, 상처가 생긴 후 어쩔 수 없다는 듯 가이딩으로 치료해 주는 건 왠지 싫었다. 그것도 니코틴 패치 따위를 선물이랍시고 내민 후에는 더더욱.

쓸데없는 가이딩을 피하기 위해 금연시키려 한다는 생각은 억측일지도 모르지만, 차인호는 원해서 매칭한 게 아니므로 상당히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 주현은 꽁초를 바닥에 떨어뜨려 밑창으로 문질렀다. 바닥도 신발도 전부 더러워졌다.

혀를 찬 주현과는 달리 차인호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까딱였다. 가이드인 주제에 가이딩이 싫어서 어떡하냐고 비꼴까 고민하던 주현은 그냥 한숨을 삼키며 다시금 수갑에 묶여 불편한 손으로 책을 펼쳤다. 빌어먹게도 페이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 * *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한 누구도 앞에 있는 사람이 에스퍼인지 가이드인지 일반인인지 구분할 수 없다. 외적으로 보이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스퍼는 분명 일반인과는 다른 힘을 가지고 있다. 그를 드러내기 위해 위원회에서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에스퍼들에게 제복을 입혔다.

기본적으로 검은색 일색에다 편의를 위해 주머니가 잔뜩 달린 제복은 가슴팍에 에스퍼를 상징하는 로고가 은빛으로 박혀 있다. 물론 사적인 자리에서는 사복을 입지만, 에스퍼가 평소에 가장 많이 입는 옷은 제복이다.

일상복과도 같기에 원한다면 개인이 어느 정도 커스텀도 할 수 있었다. 대부분은 크게 모양을 바꾸지 않지만, 아예 반바지로 만든다든가 망토를 단다든가 하는 식으로 큼직하게 바꾸는 이도 적지는 않았다.

그중 주현은 지급된 옷에 손대지 않는 편에 속했다. 애초에 나갈 수가 없으니 바꿀 방법도 없고, 무엇보다 협회가 허락하지 않는 탓이다.

그럼에도 주현의, 정확히는 C동 에스퍼의 제복은 일반적인 에스퍼들의 것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신발 끈, 주머니, 팔뚝에 매인 벨트, 목을 감싼 스카프까지. 온통 붉은색이었다. 마치 위험한 폭주 에스퍼에게서 도망치라고 외치는 것 같은 강렬한 포인트 컬러였다.

에스퍼는 가이딩 수치가 위험할 정도로 낮아지면 눈동자가 붉게 물든다. 색소가 빠져나간다기보단 악의로 가득 찬 붉은색에 먹혀드는 느낌으로 서서히 색이 번져간다.

특히 에스퍼가 폭주할 때는 두 눈동자가 완전히 붉게 물드는데, 그건 폭주 에스퍼의 악명에 제법 큰 힘을 실어 주는 부분이기도 했다. 사방을 난도질하며 날뛰는 에스퍼의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가 마치 악마처럼 보인다고 두려워하는 이가 많았다.

그리고 폭주에서 살아남더라도 그 적색은 눈동자에 흔적을 남긴 채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결코 지울 수 없는 낙인. 결핍은 죄가 되어 남았다.

그렇기에 에스퍼에게 붉은색은 불길함의 상징과도 같았다. 에스퍼나 가이드 중 그걸 모르는 이는 없는데,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일반인이었다던 차인호는 그조차 모르는 모양이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이건 뭡니까?”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평소보다 수치가 많이 떨어진 날이었다. 처음으로 수갑 없이 차인호와 만나는 날이기도 했다.

잡힌 손에서 흘러들어 오는 가이딩이 상처를 낫게 하고 머릿속을 맑아지게 만들었다. 계속 이렇게 있고 싶은 마음과 영원히 느끼지 않았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교차되어 지나갔다.

주현은 차인호가 턱짓으로 가리킨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팔을 감싸고 있는 붉은색 벨트가 궁금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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