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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4/161)

폭주 에스퍼 4화

“재수 없게. 가이드가 가이딩하는 게 좋은 일 하는 거냐?”

화면은 작은 주제에 부피는 커다란 TV가 푹 소리와 함께 꺼졌다. 청 테이프로 둘둘 말린 리모컨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여자가 팔짱을 끼곤 낡은 소파에 몸을 묻었다.

C동은 상당히 넓지만, 워낙 인원이 적어 사람 사는 느낌이 드는 곳은 한정되어 있다. 휴게실도 그중 하나인데, TV가 나오는 곳이 이곳밖에 없어 언제나 한두 명은 머물렀다.

오늘은 휴게실에 두 사람이 있었다. 일괄적으로 지급되는 실내복을 입은 주현과 세화였다.

짧은 초콜릿색 머리카락과 주현보다 조금 옅은 붉은 눈을 가진 세화는 폭주 에스퍼가 된 지 6년이 막 넘어가는 에스퍼였다. 주현만큼은 아니지만, 폭주 에스퍼치고는 오래 버틴 편이었다.

“난 저 새끼 싫어.”

“나도 딱히 좋지는 않아.”

조금 떨어진 소파에 앉아 표지의 글자가 잘 보이지도 않는 지저분한 책을 읽던 주현이 대답했다.

현재 폭주 에스퍼 중에서 매칭 가이드가 있는 사람은 주현뿐이다. 며칠 전 계약을 위해 다시 만난 차인호는 누구에게 협박당한 표정도 아니었고,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태도로 사인하지도 않았다. 물론 딱히 행복해 보이지도 않았으나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데 재능이 없는 주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주현의 신경을 가장 많이 건드린 것은 차인호라는 놈이 왜 그와 매칭하기로 결정했냐는 것이다. 어쩌면 호기심이나 뭐 그런 걸지도 모른다. 사실 주현의 동료들도 그것 말고는 답이 없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지 좀 챙기겠다고 폭주 에스퍼와 매칭하는 것은 손가락에 가시가 박혔다고 손가락을 잘라 내는 것과 같았다. 얻는 것에 비해 너무 과한 처사라는 말이다.

이유를 모르니 경계심이 커지고, 그렇다 보니 저절로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그러나 주현은 두꺼운 계약서를 작성하는 내내 싫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위에서 정한 일이라 주현이 싫다고 거부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지만.

그리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저번보다 가까이 앉은 차인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방사 가이딩이 너무 기분 좋았다. 결코 풍족하지는 않지만, 은근하게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에 계약서 작성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러나 두꺼운 종이는 얼마 되지 않아 다 넘어갔고, 사인을 마친 주현은 의자에서 일어나야 했다. 그는 1초 만에 떨어진 악수를 끝으로 돌아가는 차인호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고작해야 그 정도의 가이딩에 홀린 자신에게 화가 났다.

차인호는 제대로 된 가이딩도 안 했으면서 직원과 함께 방을 나가기 전, 주현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모른다.

“이상한 놈인 것 같아.”

“이상한 놈이겠지. 전에도 말했지만, 멀쩡한 놈이었으면 폭주 에스퍼랑 매칭했겠어?”

세화가 날카롭게 말하곤 소파에 풀썩 드러누웠다. 찢어진 곳에 역시나 청 테이프가 발린 소파는 낡았지만 제법 아늑하다.

하지만 결국 할 게 없던 세화는 다시금 TV를 켰다. 작은 화면 가득 차인호의 얼굴이 차올랐다. 그는 웃고 있었는데, 며칠 전 봤던 미소와는 조금 달랐다. 띡, 리모컨이 조작되고 채널이 바뀌었다.

주현은 시선을 옮겨 말없이 페이지를 넘겼다.

* * *

“안녕하세요. 일주일 만이죠?”

살가운 목소리에 차인호를 힐끗 본 주현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은 날씨가 꽤 덥네요.”

“네.”

“점심은 드셨어요? 오다가 맛있어 보이는 가게를 봤거든요.”

“네.”

“혹시 저 싫어하세요?”

“네.”

섬뜩한 검붉은색 눈동자와 말간 검은색 눈동자가 허공에서 맞닿았다.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간 말에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주현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면전에서 싫다는 말을 들을 일이 거의 없을 잘나가는 배우는 재밌다는 듯 피식 웃었다. 잘생긴 눈썹이 구부러지고, 예쁜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었으며, 장인이 섬세하게 붓질해서 그린 듯한 입술이 위로 올라갔다.

정면으로 보기엔 조금 눈이 부셔서 주현은 은근슬쩍 시선을 피했다.

“실수라고 안 하네요.”

“아니니까요.”

어깨를 으쓱인 차인호는 곧장 얼굴에서 가식적인 표정을 지워 냈다. 화사한 미소와 시답잖은 질문은 자주 사용하는 관계 쌓기용 기술인 듯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그의 미소 한 번에 간이고 쓸개고 빼줄 것처럼 굴 게 뻔한데도 말이다.

의자가 불편한지 자세를 바꾸던 차인호가 테이블에 조금 더 바싹 다가앉았다. 그와 동시에 가이딩이 약간 짙어졌다.

일반적인 에스퍼들이라면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미약했지만, 늘 목마른 사람에겐 한 방울의 물도 소중한 법이다. 가뭄 속에서 사는 주현은 그것만으로도 좀 살 것 같았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주현은 그것을 티 내지 않는다. 오히려 일부러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뒤로 젖혔다.

그와 동시에 찰카당, 손목에 걸려 있던 수갑에서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압당할 때처럼 무식하게 굵은 사슬은 아니지만 그래도 수갑은 수갑이었다. 불편하고, 성가시고, 조금 아팠다.

“그런데 그건 왜 끼고 계신 겁니까?”

아까부터 흘긋거리더니 드디어 본론을 꺼낸 차인호는 무표정 틈에서 걱정이라고 착각할 것 같은 감정을 희미하게 띠곤 주현의 손목을 살폈다. 꼭 토끼가 호랑이를 신경 쓰는 꼴이었다. 물론 토끼는 자유로웠고, 호랑이는 우리 속에서 바짝 말라 죽어 가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 사실을 인정하기엔 주현이 가진 것이라곤 자존심 하나뿐이어서, 그는 삐딱한 어조로 말했다.

“안전 조항이요. 저번에 호출기 눌렀잖아요.”

“벌써 열흘은 지난 일인데도요?”

“규칙이라서. 앞으로 당신 만날 때마다 세 번은 더 차야 합니다.”

불편하지만, 이미 익숙해졌다. 몇몇 가이드는 무섭고 불안하다며 애초부터 구속구를 씌운 상태가 아니면 가이딩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죄인과 같은 취급이나 실제로 죄인이 맞기에 따질 생각은 없었다. 누구라도 사람을 죽인 괴물은 두려운 법이니까.

“말도 안 되는 규칙이네요.”

하지만 어째서인지 차인호는 두려워하지 않고 손을 뻗어 차가운 금속을 매만졌다. 그 과정에서 매끈한 손가락이 주현의 손등을 가볍게 스쳤다.

“……안전을 위해서니까요.”

“이게 있다고 제가 더 안전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주현의 손목에 감긴 수갑은 에스퍼의 힘을 억제하는 특수한 수갑이므로. 능력을 완전히 막지는 못하는 대신 극심한 통증을 안겨 준다. 즉, 주현이 마음만 먹는다면 차인호는 순식간에 목숨을 잃는다.

다만 그 과정에서 주현도 고통을 맛볼 뿐이다. 굳이 그럴 이유가 없고 아프기도 싫으니 하지 않을 테지만, 이런 얇은 수갑 따위로 에스퍼를 완벽히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한 게 사실이다.

“그리고 이게 없다고 제가 덜 안전하지도 않을 것 같고요.”

차인호는 그리 말하며 저번에 꽁초에 지져진 부위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 위로 몇 번 더 담배가 지져진 탓에 희미한 흔적이 남은 곳에 매칭 가이드의 가이딩이 흘러들어 왔다.

그 순간, 덜컹 소리가 가이딩 룸을 울렸다. 벌떡 일어난 주현이 수갑에 묶인 손으로 차인호의 멱살을 잡았다.

아무리 덩치가 좋아도 에스퍼의 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가볍게 끌려온 차인호는 코앞에 불쑥 다가온 희미한 연기 냄새에 잠시간 숨을 멈췄다.

“나를 무슨 목줄 맨 개새끼 정도로 보나 본데.”

“…….”

“그렇게 방심하다간 큰일 날지도 몰라.”

폭주 에스퍼의 시선 속에서 불꽃이 일렁였다. 검붉은 눈 속에 차인호의 고운 얼굴이 틀어박혔다.

솔직히 주현은 다시 한번 호출기가 눌릴 각오까지 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차인호의 두 손은 호출기나 전기충격기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바로 이런 게 방심이라는 말이다.

폭주 에스퍼가 잡아먹을 듯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아주 느리게 손을 풀었다. 주현이 멀어짐과 동시에 차인호가 조금 비틀거렸다.

기실 주현은 차인호가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다짜고짜 위협할 정도로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너무 친근하게 구는 그가 불편했다.

폭주 에스퍼가 위험한 이유는 언제 다시 폭주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당장 내일 폭주해서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지도 모르는데, 매칭했답시고 괴물이 아니라 생각해 다가오다 괜히 휘말리면 큰일이다.

‘다시 한번 폭주로 죄 없는 민간인을 죽이는 건 사양이야.’

폭주한 에스퍼 상대로 가이드 한 명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주현의 곁에선 늘 긴장을 풀지 않고 있어야 목숨이라도 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쯤이면 일반인으로 평생을 살다가 갑자기 에스퍼와 가이드의 세계로 내팽개쳐진 이 남자도 어느 정도 정신 차렸을 것이다.

주현이 불편한 손으로 품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성냥에 불을 붙이는 건 수천 번을 해 온 일이라 눈 감고도 할 수 있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간이 큰 건지 멍청한 건지 구분할 수 없는 차인호가 웃었다. 그 미소의 뜻을 알지 못하는 주현은 시선을 돌리며 씁쓸하면서도 달콤함이 담긴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목구멍이 따끔거리는 감각은 중독성 있었다. 텁텁하게 말라가는 혀끝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문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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