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에스퍼 3화
‘어느 정도의 퍼포먼스가 필요한 걸까. 폭주 에스퍼가 날뛰기라도 하면 더욱 화제가 될까? 지금껏 가이드라는 걸 숨겼다는 의혹이 묻힐 정도로?’
그러나 주현은 굳이 처음 보는 사람을 위해서 일주일 동안 구속된 채로 일상을 보내 줄 만큼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차피 다시는 만날 일 없는 남자. 곧 있으면 차인호는 폭주 에스퍼를 만났다는 가십거리와 함께 돌아가고, 주현은 여전히 전과 같은 하루하루를 보낼 것이다.
생각을 마친 주현이 끝까지 타들어 간 꽁초를 손목에 비벼 껐다.
변명부터 하자면, 딱히 고통을 즐겨서 그런 건 아니었다. 물론 차인호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저 익숙한 행동일 뿐이었다. 처음 담배를 피운 것은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이고, 스스로를 벌주기 위해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새 몸에 익어 버렸다.
워낙 많이 다치는 터라 이 정도는 상처 축에도 안 드는 데다 가이딩을 받으면 순식간에 사라지는 상처라서 신경도 안 썼다. 애초에 가이딩 룸에는 재떨이가 없기도 했고.
C동 사람들은 이미 익숙하고, 무엇보다 각자 자신의 지옥을 견디는 것만으로 힘에 부쳐서 주현에게 그만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현은 차인호가 벌떡 일어나서 소리치는 것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신주현!”
찌푸린 얼굴로 다가온 차인호가 어중간한 거리에서 멈춰 섰다.
주현의 인생 전반에 대해 적힌 서류를 봤을 테니 그가 이름을 아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친근하게 부르는 것은 분명 이상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주현이 멈칫한 사이, 어느새 코앞에 선 차인호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일그러진 시선이 손목 위 상처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를 눈치챈 주현이 씨익 웃었다. 날카로운 눈매가 사르르 녹아내리고, 볼을 밀어 올리며 입꼬리가 휘었다.
“아, 혹시 드디어 기분 상했어요? 저 감옥 가는 겁니까?”
주현은 갸우뚱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폭주 에스퍼의 검붉은 눈동자가 조롱으로 반짝였다. 어릴 때부터 가이드로서 교육받은 게 아니라 얼마 전까지 일반인이었다면 눈앞에서 상처 입는 게 익숙하지 않을 만도 했다.
‘일반인’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는 터라 가볍게 놀렸을 뿐이다. 이상하긴 해도 나쁜 놈으로는 보이지 않는 차인호가 굳이 엿 먹이기 위해 직원들에게 주현의 악담을 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차인호는 주현이 기대했던 대로 기분 나빠 하며 인상 쓰지도, 놀림에 당황하지도 않고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이딩해야 하는데 만져도 됩니까?”
당연한 물음이라는 듯 진지한 얼굴에 주현이 다시 한번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나는 에스퍼고, 당신은 가이드고, 결국 이 상처에 대해 목줄을 쥐고 있는 사람은 당신인데. 그 누구도 폭주 에스퍼에게 가이딩을 위해 접촉해도 되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스킨십조차 아닌 폭력에 익숙해진 주현이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애매하게 손을 뻗은 채 머뭇거리고 있는 차인호의 뒷주머니에는 평소 직원들이 자주 차고 다니던 전기충격기가 들어 있다. 당연히 손톱만 한 담뱃불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프다.
그러면서도 이따위 작은 상처를 걱정하는 그가 참 웃겨서 주현은 불쑥 손을 뻗어 허공에 멈춰 있던 차인호의 손가락을 천천히 감싸 쥐었다. 놀란 표정을 지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부드러운 가이딩이 손끝에서부터 퍼져 나가는 걸 음미했다.
작은 화상 자국은 순식간에 아물었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받는 제대로 된 가이딩에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B급 가이드치고는 파장이 뚜렷하고 깨끗했다.
“됐습니까?”
손을 놓으며 묻자 차인호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볍게 흔들리는 머리카락 끝에 작은 먼지가 붙은 게 문득 시야에 들어왔다.
주현이 손을 뻗자 불쑥 다가온 흉터투성이 손에 놀랐는지 차인호가 움찔 떨었다. 그리고, 찰칵. 버튼이 눌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주현은 알고 있었다. 너무나도 익숙해서 모를 수가 없었다.
쾅! 거칠게 문이 열리고, 주현은 순식간에 제압되어 테이블에 얼굴을 박았다. 중무장한 직원들은 빠르고도 능숙한 솜씨로 주현의 양손을 뒤로 꺾어 굵은 쇠사슬로 묶었다.
워낙 강하게 부딪힌 탓에 코를 넘어 입안에서까지 비릿한 피 내음이 맡아졌다. 테이블 위로 붉은 핏방울이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만하세요! 잘못 누른 겁니다!”
“위협당하지 않았습니까?”
“네, 그냥 실수로 눌렀습니다. 그러니 그거 얼른…….”
호출기를 꾹 쥔 차인호는 어쩐지 화난 기색을 풍기며 직원들을 말리기 위해 애썼다. 찡그린 얼굴과 직원을 말리려고 뻗은 손. 주현은 안대로 눈이 가려질 때까지 그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규정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입에 재갈까지 문 주현은 직원들의 거친 손길에 순순히 따랐다. 차인호와의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방으로 돌아왔음에도 여전히 양손이 등 뒤로 묶인 채 침대에 누워 있던 주현은 멍하게 눈을 끔뻑였다. 안대에 닿은 속눈썹이 간질간질했다. 오른쪽으로 누워 있느라 눌린 팔이 저렸지만 이제 와서 이따위 통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코를 지나 입으로 넘어온 피를 대충 뱉어낸 주현이 한숨이라기엔 지나치게 미약한 숨결을 뱉어냈다. 세상 사람 모두가 사라졌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고요하고 어두운 곳에서, 에스퍼는 조용히 생각했다.
‘먼지 떼 주는 척 몰래 닿으려던 생각이 들켰나.’
오랜만에 받은 가이딩은 무척 좋았다. 더러운 의도가 없는 가이딩이어서 더 그랬다.
평소 만나던 가이드들은 벌을 주려고 혹은 재미로 호출기를 누르고 끌려가는 에스퍼를 보며 비웃는데, 그토록 당황하고 미안해하며 직원들을 말리는 가이드는 처음 봤다. 솔직히 좀 웃겼다. 자기가 눌러놓고 안절부절못하는 꼴이 재밌었다.
그래도 아마 다시는 그 남자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돈 많은 연예인이라면 굳이 폭주 에스퍼가 아니어도 선택지가 많을 텐데, 이런 지독한 곳에 누가 다시 스스로 발을 들이겠는가.
주현은 정말로 괜찮았다. 이런 꼴로 밤새도록 방치되는 것도 익숙했고, 누군가가 자신을 껄끄러운 눈으로 보는 것도 익숙했다. 그러니 그저 담배 한 대만 피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아침이 올 때까지 침묵 속에서 생각했다.
* * *
주현이 잘못 판단했다. 차인호는 생각보다 더 이상한 놈이었다.
“앞으로는 제가 주현 씨의 매칭 가이드네요. 잘 부탁드려요.”
부드럽게 말한 가이드, 차인호가 손을 내밀었다. 전과 마찬가지로 톡 튀어나온 마디에 시원하고도 길게 뻗은 부드러운 손이 코앞에서 흔들렸다.
주현은 본능적으로 그 손을 잡아 가이딩을 만끽하고 싶은 욕망을 내리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옆에선 직원이 에스퍼-가이드 전속 계약 서류를 검토하고 있고, 건너편에선 자신을 차인호의 소속사 사장이라고 소개했던 남자가 무뚝뚝한 얼굴로 앉아 있다. 그리고 다시 앞을 보았을 때, 차인호는 여전히 손을 내민 채 약간 웃고 있었다.
폭주 에스퍼의 매칭 가이드. 누구라도 농담이라고 생각할 헛소문이 사실이 된 순간이었다.
* * *
“요즘 이 소식으로 여기저기 떠들썩하죠? 가이드로 발현한 소감이 어떠세요, 인호 씨?”
“하하, 아직도 얼떨떨하지만 조금씩 적응해 가고 있습니다.”
차인호는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긴 다리를 꼬았다.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허리를 편 그가 당당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가이드로 발현하기에는 조금 늦은 나이라고들 하던데요?”
“네. 그래서 저도 놀랐습니다. 병원과 센터에서 몇 시간 동안 시달렸죠. 기쁘게도 전부 다 정상으로 나왔습니다.”
“와, 정말 다행이에요.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라고 해서 저는 물론이고, 인호 씨의 팬분들도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몰라요.”
높은 목소리로 재잘거리는 인터뷰어에 차인호는 눈을 약간 찡그리곤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미 서로 알고 있는 문답이라는 티가 전혀 나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인터뷰는 순조롭게 흘러갔다. 예전에 에스퍼 역할을 맡았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물 흐르듯 현재 촬영 중인 작품도 은근슬쩍 홍보했다. 가이드로 발현했지만, 활동은 변함없이 할 거라는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그러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종이를 넘긴 인터뷰어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하는 연기가 수준급이었다.
“이건 아까 전 들어온 따끈따끈한 소식인데, 인호 씨가 무려 폭주 에스퍼랑 전속 계약을 맺었다는 소문이 들어왔어요. 사실인가요?”
“아, 벌써 소문이 여기까지 퍼졌나요?”
차인호가 느리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충격적인 이야기에 대답하는 사람치고는 무척 덤덤한 움직임이었다.
안달 난 기색의 인터뷰어와 시선을 맞춘 그는 의식적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곤 슬그머니 볼을 붉히며 고개를 기울였다. 수줍음과 설렘이 동시에 담긴 얼굴은 그를 순진한 천사처럼 보이게 했다.
“이왕 가이드로 발현한 거, 좋은 일에 써 보려고요.”
표정, 자세, 말투. 모든 것이 사전에 의도된 대로였다. 같은 말이어도 주변을 둘러싼 비언어적 표현들에 의미는 천차만별로 바뀐다.
차인호는 순식간에 늦되게 발현했다는 게 사실인지 알 수 없는 가이드에서 자진해서 악명 높은 폭주 에스퍼를 가이딩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멋모르지만 용감하고 다정한 가이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