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어느 좋은 날
35.
“사장님. 저 사장님 다큐멘터리 찾아봤어요.”
깔깔거리는 여고생 소리가 들렸다. 지나쳐 가던 안재림이 머쓱해했다.
“감사합니다.”
“재미는 있었는데 영상이 실물을 다 못 담은 것 같아요. 아, 같이 사진 찍어 주시면 안 돼요?”
“지금은 좀 그렇고……. 잠시만요.”
양해의 손짓을 한 안재림이 발걸음을 돌렸다. 접시에 남은 볶음밥을 한꺼번에 입에 넣은 문성하가 열심히 씹다 고개를 들었다. 다가온 안재림이 곁에 앉으며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부재중 전화가 찍힌 핸드폰이었다.
“그 사람 또 연락 왔어. 어떻게 해?”
“프랜차이즈 사업하자고 한 장우환 사장?”
“어.”
“무시해. 그 인간 여러 가지로 소문이 안 좋아. 일단 계약하고 나면 창업자 무시해 가며 독단적으로 일 벌인다고 얘기가 자자해.”
“하지만 그 사람이…….”
“재림아. 형 말 들어야지. 응?”
엄하게 타이른 문성하가 빈 접시를 옆으로 치웠다. 안재림이 눈을 끔뻑거리며 망설였다. 곧 기죽은 목소리를 꺼냈다.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업계에서 형 매장도 시킬 수 있다 했단 말이야. 지나가는 소리이긴 했지만.”
문성하가 가는눈을 떴다. 안재림은 한껏 초조한 표정이었다. 지켜보던 문성하의 입에서 허, 소리가 났다. 대충 상황은 파악이 됐다. 안재림이 제 형에게 약하다는 걸 알고 그딴 식의 으름장 아닌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순진한 안재림은 그걸 또 믿었고.
“재림아. 형이 누구야.”
문성하가 안재림의 손을 덥석 잡았다. 머뭇거린 안재림이 답했다.
“문성하.”
“문성하 성격이 어때.”
“더러워.”
“잘 아네. 그 새끼는 아주 죽었어.”
그간 주입한 말을 곧이곧대로 읊는 안재림에 대고 문성하가 이를 갈았다. 대뜸 빠진 손이 안재림의 핸드폰을 가져왔다. 이미 알고 있는 비밀번호를 눌러 창을 열고, 부재중 전화 목록에서 문제의 핸드폰 번호를 찾아 눌렀다. 두어 번 신호음이 간 끝에 중년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어, 안 대표! 벌써 결정한 거야?]
“한 번만 더 제 동생 쥐고 흔들면 죽습니다.”
문성하가 경고했다. 상대방이 조용해졌다. 문성하의 어조에 날이 섰다.
“사장님 작년에 빌먼파스타 사업하면서 창업자에 가야 할 수익 1억 2000만 원 빼돌린 것 압니다. 거기 회계 맡은 사람이 제 지인입니다. 안 그래도 창업자에 소송당해 변호사 수임료 족족 나가고 있는 중이죠. 거기에 한 술이라도 더 얹고 싶지 않으면 이 번호로 연락하지 마십시오.”
[이 봐. 문 대표.]
“알았어, 몰랐어?”
문성하가 버럭 했다. 침묵을 지키던 남자가 퉁명스런 숨을 뿜었다. 나 참, 재수가 없으려니까. 투덜거린 그가 말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액정에 통화 종료 알림이 떴다.
“됐어. 이제 연락 안 올 거야.”
문성하가 핸드폰을 돌려줬다. 받아 든 안재림이 벙한 표정을 지었다. 인상을 푼 문성하가 물었다.
“왜. 아직도 불안해?”
“그게 아니라…….”
안재림의 시선이 슬금슬금 비껴 났다. 문성하는 가만히 그가 응시하는 쪽을 봤다. 곧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다가온 남자가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기탄없이 맞은편에 앉은 그가 멋대로 물컵을 입에 가져가 비우며 시시덕거렸다.
“이야. 문 대표님 목청 좋으십니다. 아주 깜짝 놀랐어요.”
제임스 임이었다. 문성하가 얼떨떨하게 질문했다.
“언제 오신 거예요?”
“오늘 새벽에 입국했습니다. 그나저나 여긴 그새 확장을 했네요.”
제임스 임이 느긋하게 매장을 둘러봤다. 문성하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그와 함께 눈길을 넘겼다. 제임스 임 말마따나 개점 초기보다 두 배는 넓어진 매장이 빈자리 없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한쪽 벽면에 ‘술 드실 분은 2층’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위층에 주류를 함께 파는 테스트 매장이 있어서다. 스푼G는 이제 어엿한 강남권 대형 매장이었다. 주혜성이 한국을 비운 삼 개월 새의 변화다.
매장에 대한 소문은 SNS를 타고 충분히 퍼지고 있었으나, 일전에 촬영한 다큐멘터리가 방영하며 유명세에 불이 붙었다. 힘든 10대 시절을 보낸 끝에 자수성가한 20세 CEO의 사연은 남녀노소 대중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출중한 외모와 성실한 이미지는 효과적인 옵션으로 작용하기까지 했다. 대중은 안재림에 대한 응원을 아끼지 않았고, 덩달아 고객이 배 이상 늘었다.
주로 테이크아웃에 집중하던 매장이지만 안재림을 보겠다며 몰린 손님 때문에 매일 같이 입구에 수십 명씩 줄을 섰다. 그 무렵 옆 스테이크 가게에서 ‘스푼G 때문에 장사를 못 하겠다’며 매장을 내놓았고, 고심 끝에 그 자리를 가져오기로 했다. 매장을 넓히는 김에 이전부터 눈여겨보던 위층의 빈 사무실을 함께 계약했다. 스푼G의 신규 콘셉트 매장을 위한 자리였다.
강남 이외의 지역에도 매장을 냈다. 유동 인구가 많은 사당과 을지로에 두 개를 추가 개점했다. 전부 직영점이었다. 프랜차이즈 제안이 적지 않게 들어왔지만 품질 관리에 대한 연구가 필요해 문성하 선에서 거절했다.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좋지만,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작정 사업을 벌이는 건 위험하다 문성하가 설명했고 안재림은 수긍했다.
그사이 주혜성은 미국 NGX 본사에서 일어난 일명 ‘CEO 보이콧 사태’를 성공적으로 수습했다. FBI를 동원해 닐슨 CFO의 천만 불대 횡령 혐의를 까발렸고, 혐의가 드러나자 그를 지지하던 NBT가드너와 주주들은 일제히 등을 돌렸다. 예정된 주주 총회는 취소됐고, NGX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갔다
모든 것이 평온했다. 안재림과 주혜성 모두. 비록 청신투자는 제자리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평탄하게 지내는 걸 볼 수 있는 것에 문성하는 만족했다.
그렇다 해 불만이 아예 없던 건 아니다. 모든 게 워낙 완벽하다 보니 오히려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쓰게 됐다. 주혜성과의 연락 빈도는 그중 압도적으로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문성하는 주혜성과 하루에 몇 번의 화상 통화와 전화를 하고, 메시지를 주고받았는지 습관적으로 외웠다. 기억력이 좋다 할 수 없는 편이지만 그것만큼은 대체로 기억했다.
그들의 연락은 하루 기준 ‘1,2,3N’의 법칙을 따르고 있었다. 한 번의 화상 통화, 두 번의 전화 통화, 30여 번의 메시지 전송. 문제는 최근 사흘 새 이 법칙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사흘 동안 단 한 번의 화상 통화를 했고, 전화는 고작 두 번 했다. 메시지는 10번도 채 주고받지 않았다.
당연히 불만이 생겼다.
“혜성이 무슨 일 있어요?”
문성하가 툭 따졌다. 제임스 임은 못 들은 사람처럼 보다 먼 곳을 봤다. 문성하의 눈이 구겨졌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뻔뻔한 사람 특성상 평소였다면 따지지도 않고 부정하는 대답부터 꺼냈을 거다. 그런데 지금은 어쩐지 눈부터 피하는 느낌이다.
“왜 묻는 말에 대답을 안 하고…….”
“아. 없습니다.”
제임스 임이 뒤늦게 부정했다. 표정이 아주 천연덕스러웠다. 하여간 여우 같은 인간이다. 문성하가 탐탁지 않게 턱을 괴었다. 불퉁한 물음이 나왔다.
“한국엔 왜 오셨어요.”
“그냥, 뭐……. 사무실 세팅할 일이 있어서.”
“무슨 사무실이요.”
제임스 임의 눈동자가 느릿느릿 움직였다. 또 먼 곳을 본 그가 말했다.
“NGX 빌딩 지을 때부터 나름의 용도가 있어 비워 둔 탑 층 사무실이 하나 있는데, 거길 오늘부로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왔습니다.”
문성하는 속으로 갸웃했다. 그게 한국에 급하게 올 정도로 중요한 일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 봤자 내부 사정이라 자신이 관여할 부분은 아니지만.
“아. 잠시만요.”
제임스 임이 돌연 제 주머니를 뒤적였다. 진동하는 핸드폰이 잡혀 빠져나왔다. 액정을 확인한 그가 묘하게 눈치를 봤다. 이내 미적미적 통화 아이콘을 누르고, 귀에 가져가며 속삭였다.
“어. 어어……. 그거 내가 결재한 부분인데? 뭘 또 확인을 하고 있어. 하여간 누구 걸린 일이라면 영 깐깐해 갖고…….”
질색한 제임스 임이 또 문성하를 힐끔거렸다. 액정과 번갈아 보며 한숨 쉰 그가 자못 차분하게 물었다.
“지금 문성하 대표하고 있어. 바꿔 줘?”
건너편에서 뭐라 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억거린 제임스 임이 팔을 뻗었다.
“받아 봐요.”
문성하의 손에 핸드폰이 들어왔다. 액정에 ‘MASON’이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황급히 일어난 문성하가 자리를 떴다. 부리나케 안쪽의 작은 사무실로 들어가다, 여학생들과 사진을 찍는 안재림과 스치듯 눈이 마주쳤다.
“너 왜 내 메시지에 답이 없어.”
들어오자마자 문을 닫은 문성하가 엄포를 놓았다. 건너편에서는 답이 없었다. 문성하가 인상을 썼다.
“3개월이야. 서로 못 만난 기간. 얼굴을 못 보면 연락이라도 잘해야 할 것 아니야. 왜 당연한 걸 안 지켜? 내가 싫어하는 것 뻔히 알면서…….”
[사랑해.]
불현듯 착 깔린 목소리가 들렸다. 문성하의 머리통이 흠칫했다. 사르르 풀린 손가락이 옴짝거리다 핸드폰을 고쳐 쥐었다. 속눈썹을 세운 문성하가 볼멘소리를 냈다.
“그깟 걸로 내가 풀릴 것 같아?”
[알아. 그냥 말하고 싶었어.]
주혜성이 뇌까렸다. 문성하는 가만히 아랫입술을 씹었다. 계속 화를 내고 싶은데 이 이상 뾰족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사랑해. 그 한 마디에 차오른 열기가 혀마저 녹여 버려, 사흘간 솟아 있던 가시가 쑥 들어가고 말았다.
[나 지금 일 있어서 통화 길게 못 해. 일단 끊고 나중에 다시 하자. 그리고…….]
주혜성이 뜸을 들였다. 문성하는 가만히 기다렸다. 낮은 숨을 고른 그가 말했다.
[형도 사랑한다 해 줘.]
“뭐…….”
문성하가 아물거렸다. 습기 찬 입 안에서 맥없는 혀가 너울거렸다. 그러다 여름처럼 맹렬해지는 훈기에 사로잡혀 견고하게 자리를 잡고 말았다. 사흘에 걸쳐 목구멍에 박혀 있던 언어가 스멀스멀 치솟았다.
“사랑해. 혜성아.”
곧 짤막하게 덧붙였다.
“내 애인.”
건너편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한층 느른해진 음성이 찾아들었다.
[이러다 날 새겠다. 내가 먼저 끊을게.]
“그래.”
문성하가 끄덕였다.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통화가 끊겼다. 깜빡거리는 액정을 바라보던 문성하가 손을 뒤로 뺐다. 하얀 벽면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고, 몸을 틀었다. 막 입구에 걸린 시선이 소스라쳤다. 소리도 없이 들어온 안재림이 서 있었다.
“재림아.”
당혹감에 찬 외침이 터졌다. 입을 꾹 다문 안재림이 시선을 떨궜다. 허망하게 올라간 문성하의 손이 입을 감쌌다. 뒷덜미에 진땀이 고이는 기분이었다. 안재림은 전부 들었다. 합리적인 직감이었다.
3개월을 함께 살며 안재림의 생활 습관 대부분을 파악했다. 별일이 없는 한 이 애는 항상 문성하를 보고 있다. 문성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경우는 두 가지였다. 문성하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이거나, 문성하에게 서운한 일이 발생했을 때이거나.
지금은 후자다. 전자의 후보가 없었다.
“재림아. 이리 와 봐.”
심호흡을 한 문성하가 손짓했다. 뭉그적거린 안재림이 다가왔다. 가까워지는 인영을 지켜보며 문성하는 머릿속에 담아 둔 수많은 시나리오를 헤적거렸다. 주혜성과의 관계를 어떻게 고백하는 게 좋을지, 그간 셀 수 없을 정도의 시뮬레이션을 해 왔다. 쌓아 둔 걸 뒤집다시피 했으나 지금 상황에 걸맞은 게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이 경우는 예상에 없었다.
더듬거린 입이 서서히 열렸다. 어느덧 눈앞에 선 안재림은 여전히 정수리를 보인 채였다. 문성하는 간신히 목을 다잡았다. 예측한 적 없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이 순간 자신은 진실을 말해야 했다. 삼 개월 사이 뼈저리게 체감한 사실이다.
형제이기에, 안재림에게는 숨기는 게 없어야 했다.
“사실 형은 주혜성하고…….”
“알아.”
돌연 안재림이 말을 잘랐다. 문성하가 멈칫했다. 조심스레 눈을 맞춘 안재림이 말을 이었다.
“이상하다 생각했어. 그냥 예전에 동생인 줄 알았던 사람일 뿐인데 왜 그렇게 손에서 놓지를 못하는 걸까, 왜 그렇게 애절하게 찾아 대며 상처를 주고받은 사이처럼 구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한 가지 결론밖에 나오지 않더라고. 그리고 그게 나를 등지고 주혜성 대표을 보는 형을 납득시킬 유일한 이유였고.”
“재림아.”
“난 괜찮아. 형 인생이잖아. 내가 좋아하는 걸 형이 막은 적 없듯, 나도 형이 좋아하는 걸 막을 생각 없어.”
전에 없이 정연하게 말을 한 안재림이 갑자기 목을 떨었다. 그의 눈시울이 조금조금 붉어져 갔다. 문성하는 넋 나간 채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숨을 몰아쉰 안재림이 대뜸 팔을 내뻗었다. 문성하의 어깨가 확 잡혀 당겨졌다. 덜컥 문성하를 안은 안재림이 울먹였다.
“그래도 형 동생은 나밖에 없지. 그건 맞지?”
외출하는 부모를 두고 평생 멀어질 거라 생각해 겁먹은 아이처럼 구는 안재림을 보며, 문성하는 쓴 미소를 지었다. 넘어간 손이 그의 등을 다독였다. 파들거리는 울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안도의 시간을 주듯 오랫동안 두드리고 난 문성하가 입을 뗐다. 하염없이 다정한 언어가 흘러나왔다.
“그럼. 형 동생은 재림이밖에 없지.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고.”
길게 쓸고 난 손이 떨어졌다. 곧 잔뜩 젖은 안재림의 눈시울을 닦아 줬다. 문성하가 부드럽게 물었다.
“형이 어떤 사람이 되었든, 그건 재림이도 마찬가지고. 그렇지?”
바들거리던 어깨가 축 처졌다. 우물쭈물한 그가 제 눈을 훔치며 시근덕거렸다. 가까스로 가라앉힌 대답이 찾아들었다.
“응……. 형.”
***
“대체 거기 건물주는 왜 그래? 그렇게 갑자기 사무실을 팔아넘기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고?”
스푼G 문을 열고 나선 문성하가 소리를 쳤다. 건너편의 최재율이 한탄했다.
[열은 받지만 어떻게 하겠냐. 건물주가 갑인 게 이 나라 섭리인걸.]
“그렇게 체념한 듯 굴지 말고. 그래서, 언제까지 나가래?”
[다음 주까지는 비워 달라는데……. 나도 미치겠다. 옮긴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이 사달을 겪고 있는지. 진짜 우리가 운이 없어도 한참은 없는 모양이야.]
“일단 끊어. 내가 그쪽으로 갈게.”
통화 종료를 누른 문성하가 발을 뻗었다. 분연히 나아가던 걸음이 문득 멎었다. 멀거니 선 문성하가 애꿎은 핸드폰을 꽉 쥐었다 놓았다. 떨떠름한 질문이 나왔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우뚝 서 있던 현주원이 턱짓을 했다. 안여한 한 마디가 다가왔다.
“잠깐 대화나 하자. 십 분.”
***
내키지 않는 걸음을 이끌며 현주원과 간 곳에는 검은색 리무진이 있었다. 웬 리무진일까 싶으면서도 일단 현주원이 열어 주는 대로 뒷좌석에 올라탔다. 막 시트에 앉는 문성하의 곁에서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문성하는 찬찬히 내부를 둘러봤다. 차곡차곡 쌓아 둔 커다란 캐리어 서너 개가 보였다.
“어디 가?”
문성하가 물었다. 팔꿈치를 차창에 기댄 현주원이 답했다.
“상해 발령.”
“무슨 일로.”
“뉴스 못 봤어?”
“글쎄.”
문성하의 눈이 깜빡였다. 진심으로 몰라서 물은 것이었다. 평소 뉴스를 열심히 보지 않는 데다가, DF그룹 관련 소식에는 의도적으로 담을 쌓고 지냈다. 현주원이 피식거렸다. 허탈한 혼잣말이 들렸다.
“정말 몰랐던 모양이네.”
“왜 가는데.”
“그쪽에서 태양광 신사업 시작할 건데, 회장이 모든 걸 나에게 일임했어. 좋게 말하면 기회를 준 거고 나쁘게 말하면 최후의 보루를 준 거지.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한동안 그쪽에 있어. 최소 3년은 머물 거야.”
현주원이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한 대를 빼 문 그가 바로 라이터를 켜 붙을 붙였다. 룸 미러를 살피던 운전기사가 버튼을 찾아 눌렀다. 지잉, 소리를 내며 현주원 쪽 차창이 내려갔다.
“가는 길에 얼굴이나 볼까 해서 들렀어.”
“화풀이라도 할 셈이야?”
“비슷할지 모르지.”
훅, 연기를 뿜은 현주원이 뇌까렸다. 정색한 문성하가 따졌다.
“확실하게 말할게. 형이 이렇게 된 건 주혜성이 짠 판의 영향도 있지만, 형이 형 가족으로부터 충분한 신임을 얻지 못한 게 더 커. 그러니 나나 혜성이에게 책임 물을 생각…….”
“내가 말한 화풀이는 그거 아니야.”
말을 자른 현주원이 손가락에 끼운 담배를 기우뚱거렸다. 문성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데. 그러면.”
“내가 애초에 왜 너와 얽혔을까? 생각해 봐.”
뜬금없기 짝이 없는 질문이었다. 문성하의 눈매가 찌뿌둥해졌다. 왜 현주원이 자신과 얽혔냐고. 그에 대한 답은 언젠가 장본인으로부터 들은 기억이 있다. 깨끗한 척 안 해서 좋다고. 필요한 것, 하고 싶은 것, 욕망하는 것을 가감 없이 드러내서 좋다고.
현주원과 만난 직후 세 번의 섹스를 했다. 일반적인 성교와는 많이 다른, 변태적이며 뒤틀린 섹스였다. 만족한 현주원은 약속한 세 번이 끝나고 문성하를 DF벤처스 심사역으로 채용했다. 그리고 더 많은 섹스를 했다.
천박하며 저질스러운 채용 과정을 주도한 건 문성하였다.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돈은 진작 떨어졌고, 당장 다음 달 낼 집세조차 부족한 형편이었다. 취직할 번듯한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벼랑 끝이었다. 가진 거라곤 변변치 않은 4년제 대학 졸업장과 몸뚱이뿐이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담보로 삼았다. 이것이 알려져 불특정 다수로부터 손가락질 받는다 해도 문성하는 개의치 않았다. 자신은 그런 걸 따져도 될 정도의 품위와 가치를 갖춘 인간이 아니었다. 애초에 살면서 그런 취급을 받아 본 적이 드물었다. 치이고 치인 허접한 깡통에게는 들어갈 수납장만 있어도 감지덕지였다.
당연히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고, 그 누구의 사랑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럴 수 있었다. 아주 기꺼이,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최재율 소개로 처음 만나 셋이서 식사할 때, 너 크게 열났던 것 기억나?”
담배 필터를 씹은 현주원이 물었다. 문성하는 고개를 저었다. 기억나지 않는다. 자잘한 과거를 떠올리지 못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문성하는 구질구질한 발자취에 미련이 없었다. 그에 해당하는 대다수 기억들이 쉽게도 휘발했다.
“네가 게 알레르기가 있다 해 네 코스에서는 게살을 빼 달라 사전에 얘기했는데, 셰프가 깜빡하고 그냥 넣어 버렸지. 모르고 먹은 너는 바로 두드러기가 났고, 체온까지 급격히 올라가 온몸이 불덩이 같았어. 덕분에 최재율이며 식당 사장이며 전부 난리가 났지.”
“그런데.”
“문제는 정작 넌 아무렇지 않아 했다는 거야.”
현주원이 키들거렸다. 문성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금은 기억이 날 것도 같다. 현주원과 처음 만난 청담동의 고급 일식집. 생각도 못 하고 게살이 들어간 스프를 먹었고, 때문에 발진과 고열에 시달렸다. 그런 와중에도 자신은 태연하게 자리를 지켰다. 이유는 단순했다. 이렇게 비싼 코스 요리를 눈앞에 둔 게 처음이었다.
당장의 위험보다 평생 접할까 말까 한 걸 놓치지 않는 게 중요했다. 제 몸을 지키는 것보다 마음이 이끄는 욕망을 채우는 데 급급했다. 문성하는 항상 ‘지금 이후’를 생각하지 않았다. 떠오른 게 있으면 즉시 실행했고 결심한 것은 웬만해선 바꾸지 않았다. 대단한 열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런 것이나마 하지 않으면 할 게 없어서였다.
“딱 보고 알았지. 이 새끼 진짜 오늘만 사는구나. 내일에 대한 기대가 없구나. 어떤 의미에선 본인 삶을 남의 것처럼 사는구나.”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형도 대충 알잖아, 내가 어땠었는지.”
“그게 바로 내가 마음에 들어 한 부분이야.”
현주원이 입을 뻐끔거렸다. 허공에 뜬 연기가 안개처럼 흩어졌다. 문성하는 잠자코 시트 위의 손을 움츠렸다. 현주원이 말을 이었다.
“나와 잘 맞을 거라 생각했어. 실제로 그랬고. 따지고 보면 어디 하나 빠지는 게 없을 정도로 잘 맞는 파트너였잖아. 우리가. 나는 원하는 만큼 널 범했고, 너는 흔쾌히도 그걸 받아들였고.”
“그 얘기가 왜 나와.”
“기대감이 없어 가능했단 얘기야. 너나, 나나. 나는 네게 욕심내는 게 없었고, 너도 내게 욕심내는 게 없었지. 아주 편리하고 합리적인 관계였어.”
현주원의 손이 내려갔다. 세팅된 재떨이에 끄트머리를 꽂은 그가 눈을 깔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기대를 한 모양이야. 이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을 거라고.”
의미심장한 곁눈질이 문성하를 쓸었다. 현주원의 입매가 비뚤었다.
“그런데 결국 아니더라고. 주혜성이 나타나자, 너는 내 기대를 제대로 저버리기 시작했으니 말이야.”
이기죽거리는 한 마디가 덧붙었다.
“사랑을 하더라고. 천하의 문성하가. 제 주제를 모르고.”
문성하의 입이 달막였다. 심히 불쾌한 얘기를 들었음에도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속 어딘가에서 얼핏 동의하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차분한 눈길이 현주원을 머금었다. 문성하의 입이 열렸다.
“미안. 주제도 모르고 그딴 걸 해서.”
“사과할 것 없어. 애초에 내가 잘못 본 거니까. 첫 만남 때 네가 어느 정도 힌트까지 줬음에도 불구하고.”
문성하의 눈이 동그래졌다. 손목시계를 확인한 현주원이 뒷좌석 문손잡이를 잡았다. 고리 안에 손가락을 넣은 그가 뇌까렸다.
“그날 식사 자리에서 서빙 받은 내 메뉴 중 가시가 깨나 박혀 있는 생선 살이 하나 있었는데, 넌 아무렇지 않게 그걸 끌어다 놓고 하나하나 발라냈지. 할 필요 없다 했더니 어릴 때 동생에게 같은 걸 해 준 적이 많아 버릇이 들었다며 끝끝내 해 주고 돌려줬어.”
실소한 그가 중얼거렸다.
“스스로에 기대가 없는 건 확실한데, 행동거지에 족적처럼 누군가의 기대가 남아 있다는 생각을 했어.”
철컥, 소리가 났다. 문을 젖히며 바깥으로 나선 현주원이 고갯짓을 했다.
“가 봐. 웬만하면 다시 보지 말고.”
찡그린 문성하가 발을 뻗었다. 바깥으로 몸을 빼고는, 현주원에게 쏘아붙였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야.”
허탈하게 웃은 현주원이 도로 차에 올랐다. 문 닫힌 리무진이 바로 출발했다. 문성하는 예기치 않은 정박지에서 내린 선객처럼 멀어지는 리무진을 응시했다. 점처럼 작아져 가는 현주원의 흔적이 하나의 마침표 같았다.
실로 그러했다. 오랜 문성하의 삶을 독식하던 체념의 시절이 자신도 모르는 새 막을 내렸다. 전혀 인지하지 못한 사이 그렇게 됐다. 석양이 지는 것처럼 느릿느릿 진행돼 미처 알지 못했다. 새 시절을 인지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동이 트는 것처럼 시작돼 해가 중천에 걸린 후에야 알았다.
그늘 밑에 사무쳐 있던 삶에 주혜성이라는 햇살이 드리웠음을, 어느 날 무심코 알았다.
***
논현동에 있는 청신투자 사무실은 사람도 물건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입이 떡 벌어진 문성하가 허전한 공간 한가운데서 우왕좌왕했다. 다음 주 중 빼 달라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벌써부터 사무실을 비우는 건 도가 지나치다. 최재율이 직접 한 걸까, 아니면 건물주가 억지로 한 걸까. 문득 멈춘 문성하가 이를 갈았다. 어느 쪽이든 용서할 수 없다.
“최재율 이 새끼도 문제야. 이걸 참아?”
주머니로 들어간 손이 핸드폰을 찾아 뒤졌다. 마음과 달리 쉽게 빠지지 않았다. 괜히 성이 나 허공에 발길질을 한 문성하가 멈칫했다. 유일하게 남은 응접용 테이블 위에서 네모난 종이 하나가 비쳤다. 다가간 문성하의 눈이 커졌다. 익숙한 카드였다. 언젠가 주혜성의 병실에서 본 적 있는, 스페이드 에이스.
성급한 손이 카드를 잡았다. 뒤집어 반대편을 확인했다. 드러난 뒷면에서 작은 포스트잇이 팔랑였다.
「이사 완료. NGX 빌딩 탑층 3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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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X 빌딩 로비 직원은 문성하를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까지 했다. 마주 인사한 문성하가 열린 게이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애매한 오후 시간대라 로비가 그다지 붐비지 않았다. 바로 엘리베이터를 잡을 수 있었다.
올라가는 동안 문성하와 함께 탄 두 남녀가 숙덕거렸다. NGX코리아 직원으로 보였다. 남자직원이 물었다. 넌 어떻게 할 거야. 여자 직원이 대꾸했다. 난 여의도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집이 거기서 가깝거든. 남자 직원이 한숨을 쉬었다. 곤란하네, 난 여기가 집하고 가까운데 가고 싶은 부서가 여의도에 있어.
문성하의 눈이 말똥해졌다. 여의도 얘기가 왜 나올까 싶었다. NGX코리아 사무실은 전부 강남에 있는 걸로 아는데.
중간층에서 직원들을 내려놓고 난 엘리베이터가 보다 올라갔다. 문성하는 이따금 카드 쥔 손을 옴지락거렸다. 마지막 층에 가까워지는 숫자를 보고 있자니, 점점 가슴이 뛰어 왔다. 그 카드를 메모지로 택한 게 우연일 수도 있다. 혹은 주혜성이 시킨 심부름이거나. 하지만 혹시나.
정말로 혹여나.
꼭대기 층에 다다른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나오는 문성하를 보며 프런트 여직원이 벌떡 일어섰다. 급하게 손 안내를 한 그녀가 말했다.
“3실은 이 복도 안쪽에 있습니다.”
꾸벅한 문성하가 직원이 가리킨 복도에 들어섰다. ‘3’이라는 숫자가 적힌 문을 향해 서벅서벅 걸었다. 십여 걸음 만에 도착해, 반짝거리는 금색 손잡이를 잡았다. 돌려서 밀자 고급스러운 원목이 부드럽게 젖혀졌다.
안은 넓었다. 청신투자 사무실의 세 배는 돼 보였다. 공간이 낯설어 뒤꿈치가 절로 들썩였다. 곧 느슨해졌다. 곳곳에 배치된 데스크와 의자, 책장이 너무도 익숙한 기존 사무실의 그것이었다.
흘러가던 문성하의 시선이 문득 멎었다. 한 면을 다 채우다시피 한 대형 화이트보드가 보였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표면을 응시하다, 왼쪽 상단 구석에 적힌 글자를 발견했다.
가장 윗줄에 NGX의 설립일인 3년 전 날짜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밑으로 이어지는 문장을 읽던 문성하가 얼어붙었다. 뒤늦은 그림자를 발견한 양 목덜미가 오싹해 왔다.
「NGX Preferred deals list
NGX 선순위 딜 목록
1. 청신투자」
“일찍 왔네.”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여전히 화이트보드를 본 문성하가 입을 뗐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나왔다.
“왜 말도 안 하고 왔어.”
“대외비로 진행하는 딜이 있어서. 좀 조용히 움직였어.”
문성하의 얼굴이 돌아갔다. 데스크에 걸터앉은 주혜성이 양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문성하가 물었다.
“언제부터 했어? 이런 생각.”
주혜성이 고개를 까딱했다.
“NGX 설립한 날. 보드에 적혀 있잖아.”
우두커니 있던 문성하의 머릿속이 문득 아득해졌다. 제임스 임이 한 말이 뒤늦게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NGX 빌딩 지을 때부터 나름의 용도가 있어 비워 둔 탑 층 사무실이 하나 있는데, 거길 오늘부로 채워야 합니다.
“청신투자 인수하고 싶어. 아주 어려운 딜이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제안할게.”
확고한 언어가 따라붙었다.
“내가 거길 갖고 싶어.”
문성하가 대꾸했다.
“조건은.”
“여러 가지 있지만……. 일단은 내가 계속 형 곁에 있는 걸로 하자.”
주혜성의 입매가 길어졌다.
“NGX 뉴욕 본사 곧 분리될 거야. 나 이제 서울에서 근무해.”
“설마 본사 일부를 아예 한국으로 옮겨 버리는…….”
“세세한 건 나중에 알려 줄 테니 일단 나 좀 안아 줘. 이 주일 내내 밤샘 근무해서 아주 피곤해.”
주혜성이 나른하게 양팔을 펼쳤다. 멀거니 있던 문성하의 발이 내디뎌졌다. 더듬더듬 나아가다, 돌연 걸음을 빨리했다. 한달음에 주혜성의 앞에 다다라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마주 안은 주혜성이 허겁지겁 문성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이윽고 굶주린 것처럼 체취를 음미해 왔다. 움켜잡힌 그의 등판이 짐승처럼 헐떡였다. 흡족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하……. 이제야 살겠네.”
손바닥을 타고 쿵쿵거리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손금이 절로 달았다. 후들거리던 손가락이 웅크려졌다. 문성하의 목에 힘이 실렸다.
“그래. 너 가져.”
자못 다부진 언어가 튀어나왔다. 시선을 내려 눈을 맞춘 문성하가 또 말했다.
“대신 놓지 마. 이제는.”
마주 본 주혜성이 입꼬리를 올렸다. 느릿하게 올라온 손이 문성하의 뺨을 덮었다. 흡족하게 어루만진 그가 읊조렸다.
“더할 나위 없이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