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주민이 1만 명도 안 되는 섬에서 한성연은 젊은 남성이라면 누구나 아는 유명한 여학생이었다. 미모가 뛰어난 것도 그랬지만, 직설적이며 뻔뻔한 성격을 지닌 것으로 더 명성이 높았다. ‘걔 엄청 예쁜 애잖아’ 하면서도 남자들은 뜸을 들이다 ‘그런데 나는 걔 좀 무섭더라’ 식의 말을 꼭 붙였다.
김원태는 고등학교 2학년 내내 한성연의 짝이었다. 덕분에 그녀의 만 17세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매우 근접한 곳에서 목격했다. 학교 뒤편에서 담배 피운 걸 언급하며 부모님을 모셔 오라는 담임에 대고 ‘어머니밖에 안 계신데 오늘내일하세요’라며 이기죽거린 것도. 섬에서 제법 큰 식당의 장남이 밥을 사 주겠다며 치근대는 걸 두고 ‘촌스러운 게 주제를 모른다’며 짜증 낸 것도. 여학생이 길바닥에 무슨 침을 그렇게 뱉고 다니냐며 지적하는 낚시 가게 주인에게 ‘그럼 아저씨도 뱉으시든가요’라며 쏘아붙인 것도. 김원태는 전부 봤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한성연의 어머니는 서울의 큰 병원으로 옮겨졌다. 한성연은 ‘아프지 않든가 죽든가 하나만 하지, 하여간 귀찮다’며 구시렁거렸다. 김원태는 한성연과 졸업 기념사진을 찍자고 했다. 한성연은 찍는 대신 자신에게 담뱃값을 달라고 했다. 김원태는 2500원을 줬다.
“이제 여기로는 안 올 거야.”
학교 인근의 구멍가게에서 담배를 산 한성연이 말했다. 김원태는 서울에서 취직해 자리를 잡을 예정이냐 물었다. 도리질 친 한성연이 답했다.
“아니. 아주 잘 사는 남자랑 결혼해 섹스리스로 지내다 바람나게 만들어서 현장 적발한 다음 위자료를 엄청나게 뜯을 거야. 그걸로 내 가게를 차리는 거지.”
김원태는 잠자코 주억거렸다. 한성연에게 매우 어울리는 멋진 계획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것이 김원태가 기억하는 ‘학생 한성연’의 마지막이다.
한성연은 정말로 꽤 오랫동안 섬에 나타나지 않았다. 딱히 연락을 주고받는 섬사람이 없어 소식을 알 길도 없었다. 김원태는 한성연이 돈 많은 남자를 만나 위자료를 챙긴 다음 장사를 하는 데 성공했나 보다 했다. 그녀라면 실제 어려울 일도 아니었다.
20년 만에 나타난 그녀를 만나기 전까진 그랬다.
“췌장암이래. 내일모레 입원하겠지만 별 효과는 없을 거야. 의사 말로는 갈 데까지 갔대. 아, 이건 내가 해석한 거야. 실제 멘트는 그거 아니었어. 아무튼 병원 들어가 봤자 돈 낭비일 것 아니까 최대한 늦게 입원하려고. 병원 밥이 아주 맛있는 곳으로 골랐어. 죽을 때 죽더라도 식사는 좋은 걸로 해야지.”
한성연은 재미없는 책을 낭독하듯 자신의 상황을 소개했다. 김원태는 석상처럼 앉아 따발총처럼 쏟아지는 얘기를 들었다. 잠자코 눈을 굴리다 일별한 식당 문 너머에 기웃거리는 남학생이 있었다. 한성연을 향해 손을 흔든 남학생이 외쳤다.
“엄마, 나 슈퍼 가서 과자 사 먹어도 돼요?”
보지도 않은 한성연이 손짓했다.
“돈 있으면 그러든가.”
그 말에 김원태의 어머니가 역정을 냈다.
“아가 뭔 돈이 있따고! 아야, 할미캉 가제이.”
남학생이 신이 나 어머니의 팔을 잡았다. 김원태는 자리를 벗어나는 남학생의 옆얼굴을 유심히 봤다. 갸름하고 흰 볼이며 느른하게 휜 눈초리가 한성연과 제법 닮아 있었다. 아주 곱상하게 잘생긴 남학생이었다.
“몇 살이야?”
김원태가 물었다. 귤 하나를 집어 까기 시작한 한성연이 대꾸했다.
“열여섯.”
“중학교 3학년?”
“어.”
“애는 너 이렇게 된 것 알아?”
“아직 몰라.”
“아직도 모르면 어떻게 해.”
“알면 뭐 달라져?”
귤 조각 두 개를 한꺼번에 입에 넣은 한성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김원태는 그저 입을 다셨다. 하긴, 맞는 말이었다.
“고향엔 왜 왔어?”
김원태가 다른 걸 물었다. 한성연이 기다렸다는 양 주머니에서 쪽지 하나를 꺼냈다. 받아 든 김원태가 꼬깃꼬깃한 종이를 펼쳤다. 한 주소지가 적혀 있었다.
“거기가 내 장지야. 정확히 말하자면 장지 예정지. 우리 어머니도 거기에 묻혀 있어. 나 죽으면 너한테 연락 갈 거야. 수고비는 미리 줄 테니 네가 이쪽 매장 절차 좀 치러 줘. 어려운 것 아니니 괜찮지?”
“야, 수고비는 무슨……. 그리고 이런 건 나보다 네 아들에게 먼저 말을 해야지. 지 아들 과자 사러 보내 놓고 매장 절차 치러 달라는 얘기가 나와?”
“어린애가 뭘 알아? 쟤가 감당할 문제 아니야.”
손을 내저은 한성연이 새 귤 조각을 입에 넣었다. 여물처럼 씹어 대는 걸 본 김원태의 입에서 끙, 소리가 났다. 테이블을 배회하던 손이 빠졌다. 팔짱을 끼고는, 자못 진지하게 물었다.
“애는 어떻게 할 거야.”
“애?”
“어. 네가 정말 위자료 받을 돈 많은 남자를 만났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만약 아니라면…….”
김원태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한성연은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김원태를 응시했다. 망설이던 김원태가 말을 이었다.
“애를 누군가가 책임져야 할 것 아니야. 그거 어떻게 할 거냐고.”
“안 그래도 찾고 있어, 책임질 사람.”
남은 귤을 통째로 문 한성연이 다시 주머니를 뒤적였다. 빠져나온 또 다른 종이가 김원태의 앞으로 왔다. 멀뚱히 본 김원태가 미간을 좁혔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남학생 사진이었다. 운동을 하는 아이인지 축구복을 입고 있고, 벌써부터 반듯한 이목구비가 상당한 미남이 될 것 같다는 인상을 줬다.
“귀엽지?”
한성연이 키들거렸다. 김원태는 영문 모르는 표정으로 그녀를 봤다. 사진을 톡, 건드린 한성연이 덧붙였다.
“얘 아버지가 교수야. 아주 유명한. 이쪽에 보낼까 생각 중이야.”
“너하고 만났었어?”
“어. 아주 오래전에.”
“지금은.”
“연락 안 하지.”
“그런 사람에게 갑자기 애를 보내면, 받아 주겠어?”
“그건 내가 알아서 해. 문제는 이 남자애지.”
한성연이 사진을 꾹 눌렀다. 아이의 훤칠한 눈매를 타고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한성연이 목을 젖혔다.
“ADHD라고 알아?”
“주의성 결핍 어쩌고……. 아무튼 심각하게 집중 못 하는 어린애 병명 아니야?”
“얘가 그걸 앓고 있어. 그게 걱정되더라고. 이 아픈 애 때문에 성하가 거기서 잘 지내지 못하면, 일부러 골라 보낸 의미가 없잖아.”
“그래서.”
“내가 한번 애 학교에 찾아갔어. 상태가 얼마나 나쁜지 확인하려고.”
한성연이 피로한 숨을 흘렸다. 어깨를 늘어뜨린 그녀가 읊조렸다.
“상상 이상으로 안 좋더라고. 하교하는 애에게 아이스크림 쥐여 주며 말을 붙여 봤는데, 받은 걸 집어던지더니 악을 쓰며 신경질을 내는 거야. 전혀 대화가 안 통하는 수준인 거지.”
“그런 애하고는 못 지내. 네 아들도 아직 어리잖아. 서로 힘들걸.”
“그래서 이 집은 안 되겠다, 성하 못 보내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돌아서려는데 성하한테서 전화가 왔어. 방방 뛰는 애를 앞에 두고 잠시 받으려는데 이 애가 내 전화기를 채 가는 거야. 제 분에 못 이겨 내 뭐라도 부수지 않고는 참지 못해 그랬겠지.”
“그래서. 부쉈어?”
“부수지 않았어. 그것과 별개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지금부터야. 내가 이것 때문에 성하를 이 집에 보내야겠다, 한 거거든.”
한성연의 등이 반뜻해졌다. 사뭇 맑아진 그녀의 눈이 빛났다. 김원태는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봤다.
“성하가 건너편에서 뭐라 뭐라 하는데, 갑자기 애가 조용해지는 거야. 두 손으로 핸드폰을 꼭 쥐고는 성하 말을 꼬박꼬박 경청하더라고. 나중에 물어보니 성하는 그 애가 나라고 생각해 학교와 관련한 얘기를 했을 뿐이래. 그게 참 희한한 일이지. 방금 전까지 길길이 날뛰던 애가 성하 목소리만 듣고 홀린 것처럼 얌전해지는 게. 그때 그 애 표정이…….”
한성연이 당시를 회상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날연한 언어가 따라붙었다.
“꼭 친형이라도 만난 것처럼 애틋했어.”
김원태의 목구멍이 휑해졌다. 저도 모르는 새 낯이 일그러져 갔다. 심각한 질문이 건네졌다.
“고작 그것만으로 애를 거기에 보내겠다고?”
“어. 안 돼?”
“너무 위험해. 애초에 네 아들이 거길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가게 되더라도 아주 많이 고생할 거야. 그 애나 네 아들이나. 문제 있는 애라면서. 쉽게 생각하면 안 돼.”
“그래? 난 그 아이가 문제 있는 애라는 생각이 전혀 안 들던데. 그때.”
갸웃한 한성연이 귤껍질을 테이블 구석으로 치웠다. 샛노란 과피가 팔랑거리다 늘어졌다. 한성연이 혼연히 턱을 괴었다.
“예감이 들어. 성하하고 아주 잘 지낼 것 같다는.”
“너무 안일한 것 아니야? 너.”
“안일한 게 당연하지. 나는 시간도 없고, 선택지도 없는 입장이니까.”
비식거린 한성연이 뇌까렸다.
“그러니 노래할 때하고 똑같이 하는 수밖에 없어.”
“노래가 왜.”
“눈 감고, 머리 비우고. 그냥 흘러가는 음률에 전부 맡기는 거야. 과거에 대한 의심에서부터 현재에 대한 추정, 미래에 대한 예측까지 전부. 노래할 때는 그게 너무나도 잘돼. 그래서 내가 그걸 좋아하는 거고.”
“너 학교 다닐 때 노래 잘하긴 했지. 축제 때 직접 키보드 치면서 자작곡 불렀잖아. 동창들 만나면 지금도 그 얘기 한다.”
김원태의 입이 말라 갔다. 흘러간 시선이 가만히 귤껍질을 바라보는 한성연에 걸렸다. 막힌 목에서 텁텁한 한 마디가 새어 나왔다.
“그놈의 노래를 마지막까지 부를 줄은 몰랐지만.”
대답을 하지도, 김원태를 보지도 않은 한성연이 접시에 담긴 새 귤을 쥐었다. 당겨지던 귤이 문득 손에서 빠져 툭, 떨어졌다. 김원태는 저 밑에서 데굴데굴 굴러가는 귤을 말없이 봤다. 꽤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도 과피 하나 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생기롭게 반질거렸다. 연주하는 음반에서 갓 튕긴 음표 같았다.
***
김원태의 이야기를 듣는 데 두 시간이나 쏟은 탓에 예약한 점심 식사는 전부 폐기 처분을 지시해야 했다. 대신 김원태의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김원태의 어머니는 갓 잡은 해산물로 덮밥과 물회를 해서 내줬다.
주혜성은 잘 먹지 못했다. 날생선을 좋아하지 않는 듯 보였다. 입에 안 맞아? 덮밥을 절반 가까이 비운 문성하가 뒤늦게 물었다. 놓다시피 한 젓가락을 고쳐 쥔 주혜성이 말했다. 형, 먹어 봐. 문성하가 실눈을 떴다. 이미 먹고 있잖아. 주혜성이 턱짓했다. 더 먹어 달라고. 조금은 정중하고, 조금은 투정 어린 어조였다.
문성하는 의아해하면서도 덮밥을 마저 떴다. 관찰하던 주혜성이 따라서 제 앞에 놓인 걸 먹었다. 지켜보던 할머니가 박수를 쳤다. 시야랑 사이가 억시기 좋다! 문성하는 왠지 쑥스러워 그릇에 얼굴을 처박다시피 했다. 덮밥을 다 비우고 고개를 돌렸을 때, 똑같이 빈 주혜성의 그릇을 봤다.
숙소로 가는 길에 잠시 어머니의 묘에 들렀다. 모르면 지나치기 십상일 정도로 외진 곳에 있었다. 무덤은 총 아홉 개였고, 각각의 묘비에 어머니의 친가 사람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어머니의 바로 위 무덤이 그녀의 어머니이자 문성하의 할머니 것이었다. 문해주.
외삼촌 무덤도 찾아봤다. 자신이 그의 호적에 아들로 입적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름이, 문래…… 뭐였는데. 중얼거리며 둘러보다 어머니의 대각선 방향에서 발견했다. 문래영. 다가간 문성하가 가볍게 묘비를 만져 보았다. 30년 넘게 주민 등록 등본에서 본 이름을 이제야 만났다. 묘비로.
산책하듯 무덤을 배회하다 다시 어머니의 묘비 앞에 섰다. 둥근 봉분은 어머니를 닮아 적막하며 권태로웠다. 터가 좋은 것인지, 혹은 자주 왔다 가는 사람이 있는 것인지. 다른 무덤에 무성한 잡초도 여기엔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삐죽거리는 풀을 하나하나 뽑으며 봉분을 짚어 보았다. 어릴 때 만진 어머니의 머리카락처럼 보드라운 촉감이 느껴졌다. 잊었던 감각을 반추하듯 쓸어 대던 문성하의 손이 문득 멎었다. 자신의 손등에 막혀 우왕좌왕하는 개미 한 마리가 보였다. 문성하는 손을 거뒀다. 비로소 개미가 힘차게 올라갔다.
“이유가 있었겠죠.”
손을 턴 문성하가 몸을 일으켰다. 먼 치에서 담배를 피우는 주혜성이 보였다. 그가 담배를 문 건 처음 봤다. 흡연자라는 걸 얼핏 짐작하긴 했지만, 확인할 길이 없어 속으로만 유추할 뿐이었다. 묻어 둔 궁금증이 해소되는 데에 5년이 걸렸다.
살다 보면 시간이 많이 흘러야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결국 어머니 뜻대로 됐어요. 형태야 어찌 되었든.”
문성하의 양손이 주머니로 들어갔다. 바닥의 죽은 풀을 발끝으로 비비적거리다, 잘근잘근 지르밟으며 뇌까렸다.
“후회 없으시길 바랄게요.”
밀려온 서풍에 파스스, 소리를 내며 풀들이 흩어졌다. 문성하의 몸이 돌아갔다. 공허한 무덤을 등지고, 조곤조곤 덧붙였다.
“저도 이제 후회하는 거 지겨워요.”
내뻗은 발이 나아갔다. 서벅서벅 걸어가는 내내 등 너머에서 바람 소리가 짙어졌다. 풀 떼 나부끼는 소리가 동굴 속 울림처럼 커져 갔다. 저편의 주혜성을 다시금 담은 문성하의 망막이 불현듯 뻐근했다. 성에가 낀 것처럼 보대껴,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바람 소리가 갈수록 웅장해졌다.
클라이맥스에 치달은 연주자의 울부짖음 같았다.
***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저녁이었다. 호텔이라기보다 저택에 가까웠다. 본관으로부터 떨어진 2층짜리 별관이었고, 다른 손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앞장선 매니저가 넓은 1층 거실을 가로질러 2층 쪽으로 안내했다. 계단을 올라가는 내내 문성하는 신기함을 감추지 못하고 이곳저곳 둘러봤다. 태어나 처음 보는 형태의 숙소였다. 언젠가 1박에 1000만 원씩 하는 국내의 섬 리조트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여기가 그곳인 듯싶었다. 내부가 굉장히 넓었다. 여러 투숙객이 사용하는 공간을 통째로 빌린 듯한 느낌마저 줬다.
“객실은 이쪽입니다.”
매니저가 한 룸의 문을 열어 줬다. 먼저 들어간 주혜성이 재킷을 벗어 커다란 침대 위에 던졌다. 따라 들어간 문성하가 실내를 살피다 똑같이 했다. 가방도 옆에 내려 뒀다.
“저녁 식사 바로 내 주세요. 정찬성 셰프는 올 것 없고, 음식만 받겠습니다. 와인은 말씀드렸던 라피트 로칠드 2000으로.”
“침실로 올려다 드릴까요?”
“침실은 좁지 않습니까. 거실로 해 주십시오.”
“예.”
주억거린 매니저가 문득 우두커니 서 있는 문성하를 살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주혜성도 고개를 돌렸다. 눈만 깜빡거리는 문성하와 침대에 올려 둔 재킷을 번갈아 본 그가 미세하게 주춤했다. 문성하는 속으로 갸웃했다.
왜 당황했지.
“침실 같이 쓰려고?”
침대 위의 재킷을 가리킨 주혜성이 물었다.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재킷을 일별한 문성하가 뒤늦게 화들짝했다. 급하게 손을 뻗어 제 것을 채고는, 가쁜 도리질을 쳤다.
“아니. 그……. 잠깐 재킷만 둔 거.”
“옆 룸이 더 뷰가 좋죠.”
주혜성이 매니저에 물었다. 꾸벅한 매니저가 답했다.
“고객 평가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럼 형이 옆 룸 써. 내가 짐 옮겨 줄게.”
주혜성이 문성하에 들린 재킷과 바닥의 가방을 가져갔다. 바로 등을 보이는 그를 보며 문성하는 소리 없이 탄식했다. 뒷덜미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끈거렸다.
왜 당연히 같은 침실을 쓸 거라 생각했을까. 주혜성은 그게 불편할 수도 있는데.
***
저녁 식사는 1층 거실의 식탁에 차려졌다. 말차를 올린 전복구이, 송로버섯과 조리한 도미찜, 복분자 양념을 한 장어구이, 누룽지를 품은 영계찜 같은 것들로 구성돼 있었다. 음식에 들인 정성도 정성이지만 데코레이션이 워낙 뛰어나 요리보다는 예술 작품에 가깝다는 인상을 줬다.
주혜성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굳이 찾아온 월우당 셰프는 음식 하나하나를 마치 프레젠테이션을 하듯 소개했다. 설명까지 곁들여야 비로소 자신의 요리가 완성된다고 믿는 유형인 듯싶었다. 심정은 이해가 됐다.
“내일은 올라가시죠?”
젓가락을 든 주혜성이 물었다. 셰프가 또박또박 답했다.
“네. 내일 조식 준비하고 바로 서울로 올라갑니다.”
“빠듯하게 움직이시네요. 내일 바쁜 일정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그렇다기보다는, 본래 자리가 월우당에 있으니까요. 가서 주방을 총괄해야죠.”
“그래요.”.
수긍한 주혜성이 젓가락을 까딱거렸다. 맞은편에서 물을 마시는 문성하의 귓가에 의미심장한 혼잣말이 내려앉았다.
“그러면 굳이 내일 갈 필요가 없다는 거네.”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셰프가 깊숙이 몸을 굽혔다. 곧 허리를 세우며 인사했다.
“그럼 즐거운 식사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주혜성이 고개를 마주 숙였다. 돌아선 셰프가 입구를 향했다. 문 앞에 다다른 그가 대기하던 매니저와 함께 빠졌다. 잠시 열렸던 문이 닫히고, 널따란 공간에 문성하와 주혜성만이 남았다.
“와인하고 같이 먹어, 형. 셰프가 일부러 마리아쥬 고려해 메뉴 정한 거야.”
몸을 일으킨 주혜성이 테이블에 둔 와인병을 집어 들었다. 문성하의 잔 위로 올라온 병의 목이 기울었다. 조르륵, 액체 흐르는 소리 틈틈이 파도 소리가 끼어들었다. 문성하의 눈이 돌아갔다. 바깥을 훤히 품은 통유리창 너머로 출렁이는 밤바다가 비쳤다.
어둠 속에서도 충분히 황홀한 풍경을 감상하던 문성하가 시선을 넘겼다. 자신과 주혜성이 착석한 테이블을 관찰했다. 10명은 족히 앉을 법한 대형 식탁이었다. 건너편과 야외에도 비슷한 크기의 테이블이 있다. 2층에는 일반 객실 크기만 한 침실이 4개나 된다.
공간이 크고 넓어 좋긴 하지만,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에 투숙하는 고객 단위는 통상 두 명, 많아야 네 명이다. 이 건물을 통째로 대관해 파티라도 열면 모를까, 특정 개인 고객에게 전부를 내 주는 건 공간 낭비에 돈 낭비로 보였다.
“여기 너무 아깝다.”
“뭐가.”
읊조린 말에 주혜성이 얼굴을 들었다. 문성하가 설명했다.
“1박에 한 단위 고객만 묵는 거. 이 1층만 해도 무슨 파티장처럼 넓잖아. 2층엔 침실이 네 개나 되고, 우리는 둘이라서 두 개밖에 못 썼지.”
“그야 원래 투숙객실 자체가 네 개인 곳이니까.”
주혜성이 도미찜을 적당히 잘라 문성하의 앞으로 들이밀었다. 일단 받아 문 문성하의 낯이 찌푸려졌다. 주혜성이 태평하게 덧붙였다.
“위에 있는 룸, 침실이 아니라 객실이야. 그러니까 4개 객실 손님을 받는 건물인 거지, 여기가. 오늘은 우리밖에 없지만.”
“나머지 두 개 객실은. 예약이 안 됐대?”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지. 내가 여길 통째로 빌렸으니까.”
문성하의 입이 떡 벌어졌다. 질색하는 소리가 나왔다.
“호텔에서 뭐라 하지 않아?”
“별로. 4개 객실값 전부 지불한다 했더니 별말 없던데.”
검붉은 와인을 한 모금 삼킨 주혜성의 고개가 비스듬해졌다. 정색한 문성하가 쏘아붙였다.
“너 총 얼마 냈어.”
“내가 결제한 것 아니라 몰라.”
“내가 알기로 이곳 객실당 1박에 1000만 원이야. 4개면 4000만 원이고. 그걸 정말로 다 냈다고?”
“형이 아무리 물어봐도 난 정말 몰라. 그런데 그거 중요한 얘기야?”
주혜성이 뚫어져라 문성하를 봤다. 천진한 눈망울에 황망함에 젖은 문성하가 빼곡하게 담겼다. 할 말을 잃은 문성하가 무작정 팔을 뻗었다. 앞에 놓인 와인 잔을 집어 입가로 끌어 올렸다. 입술 틈을 비집은 와인이 벌컥거리며 삼켜졌다. 순식간에 잔이 절반가량 비었다. 맞은편의 주혜성이 작게 피식거렸다.
괜히 흘겨본 문성하가 탁,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와중에도 입 안에 맴도는 타닌의 풍미가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감미로웠다. 문성하는 속으로 욕을 했다. 망할, 비싼 와인은 때와 상황을 가리지 않고 그냥 더럽게 맛있기만 하구나.
불만스럽게 까물거리던 눈꺼풀이 다시금 들렸다. 눈치채지 못한 새 또 주혜성의 젓가락이 눈앞까지 와 있었다. 이번에는 연둣빛 말차 가루를 올린 전복이었다. 문성하는 받아먹지 않았다. 대신 팔짱을 끼며 주혜성을 주시했다. 주혜성의 눈이 둥그레졌다.
“뭐 하나만 묻자.”
건조한 질문이 나왔다. 젓가락을 여전히 든 채로, 주혜성이 부드러운 고갯짓을 했다.
“응. 형.”
“왜 나하고 여기까지 오자 했어?”
주혜성의 윗눈썹이 일순 굼틀거렸다. 문성하의 눈초리가 꼿꼿해졌다. 차분한 지적이 튀어나왔다.
“아까 어머니 친구 얘기도 그다지 경청하지 않았고, 우리 어머니 묘지에서도 제대로 참배하지 않았어. 그럴 거면서 뭐 하러 나하고 여기까지 오자 했어? 그냥 바람 좀 쐬러 온 거야? 너에게는 얼만지도 중요치 않은 비싼 숙소에서 돈 낭비하러. 그러려고 왔어?”
문성하의 목울대가 쿨렁였다. 이렇게까지 하려 한 건 아닌데, 저도 모르게 격양된 태도를 취하고 말았다. 회의감에 고개를 내린 문성하가 와인 잔을 쥐었다. 붉은 표면에 담긴 자신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양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문성하는 아무것도 보지 않은 것처럼 와인 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대로 기울여 남은 것을 전부 들이켰다.
단 한 방울 남지 않고 텅 빈 잔이 내려갔다. 먼 곳에 밀어 둔 문성하가 제 머리를 쓸었다. 산산조각 난 파편이 튀어 다니는 것처럼 뇌리가 어질어질했다. 문성하는 억지 심호흡을 했다. 갑갑한 가슴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모르겠다. 왜 자신이 이 상황에서 화를 내고 있는지. 엄밀히 따지면 주혜성이 잘못한 건 없다. 어머니 친구의 말이야 내키지 않으면 듣지 않을 수 있고, 묘에 참배하는 일도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1박에 4000만 원을 지불한 숙소에서 문성하는 주혜성과 떨어진 방을 썼다. 자신으로부터 몇 발자국 물러난 듯한 주혜성의 태도는 이 섬에 온 직후 내내 이어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주변을 맴돌며 관찰만 하는 느낌. 문성하는 그것이 한편으로는 감시 같고 한편으로는 기망 같았다. 이성과 별개로 학습된 의심이었다.
그래서 너무나도 불안했다.
“나 왔었어. 여기.”
돌연 나지막한 한마디가 찾아들었다. 문성하의 고개가 덜컥거렸다. 젓가락을 내려놓은 주혜성이 시선을 피하며 먼 곳을 봤다. 서슴거리는 그의 입 안에서 메마른 혀가 꾸물거렸다. 침묵을 헤아리던 입이 재차 열렸다. 파도를 가르는 바람 같은 소리가 나왔다.
“엊그제 당일치기로.”
문성하의 눈이 커졌다. 주혜성은 여전히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사막 같은 문성하의 입에서 허탈한 질문이 터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왜 그랬는데.”
“아무런 준비 없이 형하고 이곳에 오면 내가 감당이 안 될 것 같았어. 형을 낳은 분을 만나는 것도, 그와 관련한 얘기를 듣는 것도. 전부. 이성적이지 않은 감각에 얽매여 나 자신을 잃을 것만 같았어. 그래서 사전에 연습을 하기로 했어. 살면서 충격받은 일은 항상 형과 관련한 것뿐이었고, 그때마다 난 항상 실수를 했으니까. 이번엔 그러고 싶지 않았거든.”
주혜성의 눈이 미끄러졌다. 시름 하는 눈망울에 문성하가 맺혔다. 테이블을 덮은 문성하의 손이 내려갔다. 떨어져 덜렁거리는 손에 온몸의 힘이 빠졌다. 주혜성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형 어머니 묘에 가서 참배도 하고, 비서 통해 식당 할머니로부터 얘기도 전달받았어. 그날 비서가 할머니께 얘기했어. 내일 정오 넘겨 바깥에 나와 계시면, 한성연 씨 아드님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나이 든 분이라 그걸 기억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시간 맞춰 나와 계시더라고. 그 집에서 형 어머니 친구까지 만난 건 계산 밖이지만.”
숨을 고른 주혜성이 이마를 짚었다. 굼적거리는 손등에서 핏줄이 두드러졌다. 주혜성이 착잡하게 뇌까렸다.
“그런데 나는 결국 이래. 형. 연습하지 않으면 연습하지 않아서 실수를 하고, 연습을 하면 연습을 해서 실수를 해. 어릴 때부터 정해진 걸 학습하는 일에만 익숙해서, 기본적으로 변수에 약해. 다행히도 사는 게 순탄한 편이었던지라 변수랄 게 딱히 없었어. 누군가에게 변수가 될 수 있는 일도 나에겐 아니었으니까. 유일하게 변수라 부를 수 있는 건 하나뿐인데, 그게 나에게는 일반적인 변수보다 수백 배는 어렵게 다가와. 매번 긴장을 하고 연습도 해 보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해.”
주혜성의 고개가 젖혀졌다. 먼 치에서 물결치는 바다를 힐금한 그가 또 말했다.
“오늘 밤에는 형과 같은 침실을 쓰려고 했어. 아까 2층에 올라가 재킷을 벗어 두기 직전까지 그랬어. 그런데 형 재킷이 내 것하고 나란히 있는 걸 보니, 갑자기 생각하지 않은 게 떠오르더라고.”
넘어간 주혜성의 눈길이 문성하를 머금었다. 그의 입매가 자조적으로 비뚤었다.
“‘오늘 밤 이 호텔에서 형과 한 침대를 쓴다’는 거, 연습한 적 없잖아. 상상만 해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벌써 이러니 내가 뭔 짓을 할지 예측이 안 되더라고. 결국 또 실수할 것 같았어. 그래서 먼저 멍청한 짓을 했어.”
들숨을 삼킨 그가 젓가락을 들었다. 식은 닭고기에 끄트머리를 꽂아 안을 헤집다가, 포기하고 다른 손으로 와인 잔을 채웠다. 묵묵히 지켜보던 문성하의 입이 말아 물렸다. 목덜미를 적시며 올라오는 열기가 따스하지만 까끌까끌한 목도리 같았다.
그 어떤 것도 연습한 적 없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다.
***
침대에 누웠다. 베개에 누인 머리를 틀어 통유리창을 봤다. 완연한 어둠에 잠긴 저편에서 노랗고 하얀 점이 둥둥 떠다녔다. 이 시간에 바다로 나가는 고깃배일 거다. 오늘 밤에도 어떤 이는 흔쾌히 바다 한가운데 몸을 던진다. 수십 번, 수백 번 연습한 결과다.
지잉, 시트 위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문성하는 돌아보지 않았다. 묵묵한 머리통 너머에서 핸드폰이 계속해 울려 댔다. 지잉, 지잉, 지잉. 한숨 쉰 문성하가 찌푸린 눈을 넘겼다. 신경질적으로 확인한 액정에는 ‘동생’이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깜짝한 문성하가 핸드폰을 챘다. 바로 아이콘을 누르고, 귀에 가져갔다.
“어. 재림아.”
[아, 형……. 자는 것 아니었어요?]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성하는 빠르게 부정했다.
“아니야. 안 자.”
[네.]
“무슨 일 있어?”
[아니요. 그냥 했어요.]
말을 마친 안재림이 조용해졌다. 문성하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정적을 지켰다. 전파를 타고 미약한 숨소리가 들렸다. 문성하는 안재림에게도 비슷한 소리가 들릴까 궁금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기대와 함께.
형제니까, 종종 닮은 것을 공유하는 게 나쁘지 않았다.
[같이 여행 간 사람 있잖아요.]
안재림이 운을 뗐다. 문성하는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주억거렸다.
“응.”
[그분이에요? 예전에 동생인 줄 알았던.]
“아, 어……. 맞아.”
얼떨떨하게 응수한 문성하가 눈을 구겼다. 심각한 질문이 건네졌다.
“어떻게 알았어?”
[그냥 그럴 것 같았어요.]
안재림이 또 입을 다물었다. 문성하의 손가락이 잠잠한 핸드폰을 타고 미끄러졌다. 이제는 호흡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그게 자못 불안했다. 동생이 그곳에 있다는 걸 그런 소리로나마 느꼈으면 싶은데, 아무것도 없으니 그저 허전하다. 그래서 문성하가 소리를 냈다. 내심 의심하던 걸 물었다.
“혹시 불안해? 재림아.”
반대편에서 흠칫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확신한 문성하가 닦달했다.
“형이 너 말고 예전 동생하고 둘이 여행 온 게 불안해?”
[아니, 그런 게…….]
안재림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연신 머무적거리던 그가 곧 숨을 몰아쉬었다. 들릴 리 만무한 그의 심장 박동이 귓가에 고스란히 내려앉는 것 같아, 문성하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꽤나 긴 시간 호흡만 반복하던 안재림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조금은 결연한 어투였다.
[실은 그래요.]
“왜? 내 동생은 너잖아.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이 사람도 알아. 내가 너를 두고 이 사람과 여행 왔다 해서 네가 내 동생인 게 달라지는 건 아니야.”
[그래도 서운해요. 왜 둘이 그렇게 급히 여행을 갔어요? 형 이제 사람 만나기 시작해서 오늘 미팅도 세 개나 있다 했고, 저녁엔 우리 신메뉴 품평해 주는 자리에도 참석하기로 했으면서. 그렇게 갑자기…….]
안재림이 울걱거렸다. 멍해진 문성하의 귀에 원망에 찬 언어가 날아들었다.
[동생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문성하의 동공이 확장됐다. 마른 등에 진땀이 맺히는 것만 같았다. 가쁜 숨을 뱉은 문성하가 간신히 핸드폰을 부여잡았다. 버겁게 정돈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런 것 아니야. 재림아. 형이 서울 올라가서 자세히 얘기해 줄게. 그러니 속상해하지 마. 알았지?”
안재림은 답이 없었다. 문성하는 최대한 다정하게 달랬다.
“사랑해. 내 동생.”
눈을 녹이듯 건넨 말에, 마침내 안재림이 먼 곳에서 응답했다.
[저도요. 형.”]
끄덕인 문성하가 통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시트 구석에 밀어 놓고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멀거니 앉아 있다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쿵쿵거리는 진동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어깨가 엇박자로 들썩였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에, 도무지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
맞다. 자신은 왜 이렇게까지 했던 걸까. 있던 약속을 전부 취소해 가면서, 이렇게 급하게. 동생도 뭣도 아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과 여행을 왔을까.
이유를 도출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문성하는 그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주혜성에게도 해당되는 답일 터였다. 문성하보다 더 무거운 현실을 버려 가며 이곳에 온 사람이다.
알면서도 때때로 헤매는 답이 있다.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용기가 부족해서다.
시계를 봤다. 오후 11시 58분. 주혜성은 자고 있을까. 설령 그렇다 해도 상관은 없다. 부쩍 힘이 실린 몸이 일으켜졌다. 성큼성큼 걸어 입구로 간 뒤, 문을 열어젖히고 복도로 나섰다. 가느다란 빛줄기 하나 새지 않는 옆 룸을 향해 걸었다. 하나, 둘, 셋, 넷. 내리막길을 타는 것처럼 걸음의 속도가 빨라져 갔다.
커다란 객실 문 앞에 다다라 손잡이를 잡았다. 휙 돌리자, 바로 문이 젖혀졌다. 안에 들어선 문성하가 침대를 향해 직행했다. 팔 하나를 이마에 올린 채 시트에 누워 있던 인영이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침대 맡에 선 문성하가 시트를 짚으며 몸을 낮췄다. 어둠 속에서 미동하는 주혜성의 눈동자가 너무도 잘 보였다. 마른침을 삼킨 문성하가 입을 열었다.
“그냥 같은 침대 쓰자.”
문성하의 속눈썹이 빳빳해졌다.
“그러려고 온 거잖아. 우리.”
곧 자신 없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싫으면 어쩔 수 없지만…….”
마주 보던 주혜성이 대뜸 팔을 뻗었다. 단숨에 붙들린 몸이 훅 당겨졌다. 순식간에 기운 상체가 주혜성의 품에 파묻혔다. 담담한 대꾸가 머리를 울렸다.
“아니. 하나도 싫지 않아.”
등을 감싼 팔뚝이 성난 것처럼 불끈거려, 살이 아릴 지경이었다. 단잠 같은 한 마디가 귀를 녹였다.
“어차피 자정 되면 내가 가려 했어.”
***
상체를 가둔 팔이 하염없이 안락했다. 문성하는 기나긴 여행을 마친 후 여독을 푸는 사람처럼 까무룩 눈을 감았다. 온 시야가 깜깜한 어둠에 휩싸이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잠이 쏟아졌다. 자장가처럼 혈관을 채워 오는 주혜성의 심장 소리에 오감을 맡긴 채 오랜 기간 헤매었던 숙면에 빠졌다.
정신을 차린 건 부스럭거리는 기척 때문이었다. 허리를 두른 주혜성의 팔에서 파동이 느껴졌다. 간지러웠다. 밑에서는 이따금 후덥지근한 누기가 올라왔다. 가물거리는 눈을 뜬 문성하가 고개를 들었다. 코앞의 면상과 바로 눈이 마주쳤다.
“안 자고 뭐 해.”
잔뜩 잠긴 질문이 나왔다. 움찔한 주혜성이 시선을 비꼈다. 뭔가를 들킨 사람의 표정이었다. 옴짝달싹하는 낯에서 소년 같은 불안감이 열렁였다.
문성하가 서서히 눈길을 떨궜다. 동굴처럼 컴컴한 이불 속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손이 비쳤다. 문성하는 조심스럽게 팔을 집어넣었다. 척척한 손에 깍지를 끼고는 위로 끌어 올렸다. 얼굴 가까이 가져오자 비릿한 내음이 훅 풍겼다. 문성하는 또 주혜성을 봤다. 주혜성이 탄식하듯 제 얼굴을 짚었다.
“미안.”
“뭐가 미안해.”
“못 참아서.”
퍽이나 한탄 어린 어조였다. 달빛을 담요처럼 덮은 높다란 콧날이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완전히 문성하로부터 얼굴을 숨긴 그가 불안정한 호흡을 내쉬었다. 이제는 정말로 소년 같았다.
“나 봐 봐. 혜성아.”
잔잔하게 불렀다. 주혜성이 느릿하게 고개를 틀었다. 반쯤 음영 진 얼굴이 문성하를 향했다. 뚫어져라 감상하던 문성하가 맞잡은 손을 입가에 붙였다. 가볍게 입을 맞췄다가, 혀를 내 손등을 핥기 시작했다. 점성 높은 체액이 혀의 돌기를 조금은 쓰게 물들였다. 주혜성의 미간이 옴씰거렸다. 희미한 신음이 들렸다.
“하아…….”
“혼자 하면 어떻게 해.”
“너무 잘 자기에 깨울 수가 없었어.”
“좋았어? 그래서.”
겹친 손을 뒤집어 손바닥을 드러냈다. 남자 살냄새 나는 손금이 미미하게 번들거렸다. 문성하는 제 얼굴을 밀착시켜 가며 혀를 보다 붙였다. 접착한 혀가 익숙한 냄새에 취해 꾸물거렸다. 훈훈한 물에 잠긴 것처럼 혓바닥이 녹아 갔다.
“형…….”
“몇 번 쌌어?”
유독 젖은 부위를 할짝대며 짓궂게 물었다. 주혜성은 잠시 답이 없었다. 문성하가 재촉했다.
“형이 물었잖아. 혜성아.”
“안 세서 모르겠어.”
“언제부터 했는데.”
“형이 잠든 직후부터.”
남은 물기를 전부 핥은 문성하가 고개를 돌렸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협탁을 더듬거리다, 끄트머리에 놓인 핸드폰을 짚었다. 환해진 액정에 숫자가 떴다. 오전 4시 32분. 문성하가 잠든 건 자정 무렵이었다.
“형.”
4시간 반, 을 읊조리던 문성하의 허리가 뒤에서 감겼다. 문성하의 머리통이 원위치 됐다. 다가온 주혜성이 귀에 입을 붙였다. 후끈한 목소리가 귓불을 간지럽혔다.
“그런데 아직도 못 참겠어.”
내려온 손이 문성하의 가운 틈을 파고들었다. 다짜고짜 허벅지 안의 말랑한 살을 움켜쥐는 힘이 짜릿해, 문성하의 아랫입술이 덜컥 깨물렸다. 무춤한 사이 힘 있게 당겨진 몸이 주혜성의 품으로 들어갔다.
허겁지겁 이동한 손이 가운을 여민 끈을 풀었다. 부드러운 천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실상 알몸이 된 문성하를 눕힌 주혜성이 허벅지를 겹쳐 왔다. 위로 마주 본 문성하가 팔을 내뻗었다. 우악스레 잡힌 주혜성의 팔뚝이 쿨렁거렸다.
“내가 위에서 할래.”
색색거리는 한 마디가 나왔다. 영문 모르는 눈빛이 멀거니 문성하를 품었다. 문성하가 찬찬히 몸을 일으켰다. 주혜성의 어깨를 잡아 시트 위로 밀어뜨리고, 단숨에 올라탔다.
“이래야 얼굴이 잘 보여.”
다부지게 말했다. 주혜성이 잔웃음을 쳤다. 반쯤 들려 있던 그의 상체가 침대에 늘어졌다. 곤로한 손이 올라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가슴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다정하게 말했다.
“섹시하네.”
문성하의 눈매가 언짢게 접혔다. 대뜸 기운 얼굴이 주혜성의 목에 묻혔다. 탄탄한 가죽을 물고 잘근잘근 씹었다. 아. 기분 좋은 신음을 낸 주혜성이 목을 젖혔다. 문성하가 경고했다.
“더 성의 있게 해.”
“하……. 어떻게 할까.”
“야하게.”
“그런 거 좋아해?”
주혜성이 빙긋거렸다. 문성하는 대답 대신 독촉하듯 그의 밑동을 쥐었다. 사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채 식지 않은 살덩이가 철근처럼 실팍해져 갔다. 딱딱해지는 주름을 더듬거린 문성하가 재차 그의 목을 물었다.
“엄청 좋아해. 나 변태 같은 거 알잖아.”
성기를 쥔 손에서 엄지가 올라왔다. 움찔거리는 귀두 구멍을 문질러 가며 하반신을 낮췄다. 벌어진 엉덩이 틈에 살덩이의 강고한 머리가 꽂혔다. 숨을 몰아쉰 문성하가 자위를 하듯 제 회음부를 비비적거렸다. 꿀렁이는 귀두에서 꿀 같은 액이 샜다. 회음부가 점점 젖어 갔다. 오싹거리는 감각을 참지 못한 문성하가 시트를 쥐어짰다.
“흐으…….”
“나 따먹어 줄래? 형.”
대뜸 속삭인 주혜성이 허리를 감은 손을 내렸다. 성기 쥔 문성하의 손을 덮어 쥐고는, 안달이 난 것처럼 움켜 대다 냅다 입구에 갖다 박았다. 화염 같은 귀두가 벌름거리는 구멍을 벌려 왔다. 상체를 지탱하던 문성하의 팔이 무너질 듯 푸들거렸다.
“흐읍……!”
“잘 못 먹네.”
주혜성이 기롱했다. 문성하는 억지로 아랫배의 힘을 풀었다. 그간 수십 번씩 했던 일이 지금 이 순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주혜성과 할 때는 자주 이랬다. 쌓이고 쌓인 추잡하며 음란한 흔적이 그와 교접하면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희석되곤 했다.
꼭, 매번이 첫 경험인 것처럼.
채 풀리지 않은 배 안을 가르며 생식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곧 내벽의 중간 지점을 비벼 대다, 가까스로 안착했다. 미처 잠에서 깨지 못한 점막이 미적미적 소스라치며 살덩이에 엉겼다. 성기에 묻은 체액 덕분에 아주 뻑뻑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버거웠다. 여전히 몸이 위축돼 있었다.
찡그린 문성하가 밑을 확인했다. 벌써 젖은 머리카락을 털며 주혜성이 고개를 까딱했다. 나긋한 목소리가 다가왔다.
“가슴 줘. 형.”
뒤에서 올라온 손이 문성하의 등을 덮었다. 자신 쪽으로 이끈 주혜성이 얼굴을 내밀며 중얼거렸다.
“빨면 풀릴 거야. 형도 나도.”
주혜성의 입술이 스친 유두에서 찌릿한 전류가 튀었다. 문성하의 등줄기가 흠칫거렸다. 물러나지 못하게끔 꽉 부둥킨 주혜성이 입을 열어 유두를 품었다. 추웁, 하는 질척한 소리가 시트를 울렸다. 예민한 살이 통째로 집어삼켜지는 기분에 아랫배가 벌벌거렸다. 문성하의 입에서 야릇한 소음이 터졌다.
“으음…….”
“형은 나하고 할 때마다 많이 긴장하더라고. 나 기분 이상해지게.”
우물거리던 그의 입이 벌어졌다. 빠져나온 혀가 빳빳한 젖꼭지를 널름거렸다. 가슴께를 타고 오소소 소름이 일었다. 저도 모르는 새 진 빠진 허리가 느슨해졌다. 틈을 놓치지 않은 남근이 확 치솟았다. 배 안을 쪼개며 파고든 살덩이가 우렁차게 꿀렁였다. 문성하의 머리통이 넋을 잃고 기우뚱거렸다. 주혜성이 살짝 웃었다.
“이제야 풀리네.”
할딱인 문성하가 주혜성의 머리통을 끌어안았다. 완전히 그의 입에 자신의 가슴을 갖다 붙이고는, 달뜬 어조로 칭얼거렸다.
“더 해 줘…….”
“더 해 줘?”
아이 다루듯 되물은 주혜성이 눈웃음을 쳤다. 왼쪽 유두에서 떨어진 입이 반대쪽 유륜으로 다가갔다. 둥글게 자리 잡은 돌기들을 농락하는 것처럼 핥아 대다, 과실을 따 먹듯 중심부를 물었다. 스위치가 켜진 것처럼 내벽이 요동을 쳤다. 배 안의 살에 쫀득하게 감긴 음경이 함께 발정 나 꿈틀거렸다. 주혜성이 헐떡였다.
“하아……. 부러지겠어.”
“으음…… 아파?”
“글쎄…….”
주혜성이 의뭉스레 웃었다. 문성하의 가슴에서 벗어난 입이 얼굴 쪽으로 올라왔다. 달싹이는 입술에 제 입을 맞추고는, 부드럽게 덧붙였다.
“더 아프게 해 줘.”
문성하의 입이 오므라들었다. 주혜성의 머리통에서 떨어진 손이 볼을 타고 미끄러졌다. 딱딱한 귓바퀴를 어루만지다, 대뜸 어깨를 잡았다. 갑자기 밀려 난 주혜성이 시트 위에 눕혀졌다.
베개에 뒷덜미를 붙인 남자가 물끄러미 눈길을 건넸다. 똑바로 마주 본 문성하가 허리를 높였다. 배 안에 들어찬 생식기가 귀두만 남긴 채 슬금슬금 빠져나왔다. 문성하가 속삭였다.
“기꺼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엉덩이가 내려 붙여졌다. 철썩, 소리를 내며 남근이 훅 들어왔다. 밑동을 조금 남긴 채 전부 흡입된 살덩이가 내벽과 흡착하며 꿈적거렸다. 하아. 주혜성이 신음하며 제 눈가를 덮었다. 음경을 씹어 먹듯 구멍을 조였다 푼 문성하가 주혜성의 가슴팍에 입을 붙였다. 단단한 흉곽을 혀로 문지르고는, 소곤소곤 물었다.
“지금은.”
주혜성이 농몽하게 대꾸했다.
“너무 좋은데.”
다가온 팔뚝이 문성하의 어깨를 부러뜨릴 양 안았다. 이를 세운 문성하가 아까 주혜성이 했던 것처럼 그의 유두를 씹었다. 힘이 실린 아랫배가 생식기를 터뜨릴 기세로 쥐어짰다. 제대로 배 안에 갇힌 살덩이가 울렁거리며 몸부림쳤다. 어금니를 문 주혜성이 들릴 듯 말 듯 욕을 했다.
“후으. 씨발…….”
문성하의 귓바퀴가 문득 굼틀거렸다. 주혜성의 유두를 길게 핥고 난 얼굴이 들렸다. 올곧게 눈을 맞춘 문성하가 말했다.
“다시 해 봐. 욕.”
주혜성이 미간을 구겼다.
“내가 언제 욕을 했어.”
“방금 했잖아.”
“안 했…….”
서둘러 부정한 주혜성이 멈칫했다. 비로소 진실을 상기했는지, 난감한 표정으로 제 얼굴을 더듬었다. 부쩍 상체를 끌어 올린 문성하가 안달했다.
“제대로 욕해 줘. 나한테.”
“왜.”
“흥분되잖아.”
“안 돼.”
주혜성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형한테는 욕 못 해.”
문성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곰곰이 주혜성을 살펴보다, 확신의 고갯짓을 했다. 내려간 얼굴이 아까처럼 그의 가슴팍에 밀착했다. 시위를 하듯 성기 문 하반신을 들썩인 문성하가 중얼거렸다.
“이제 하게 될 거야.”
주혜성의 눈 밑이 움칠거렸다. 문성하는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욕하는 횟수만큼 조여 줄 거거든.”
당돌하게 올려다보는 문성하를 보며 주혜성이 헛웃음을 쳤다. 마주 본 눈초리가 은은하게 휘었다. 나지막한 한 마디가 들렸다.
“엄청 야한 협박이네. 씨발.”
***
통유리창 너머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품은 바다가 현현해지고, 제법 후덥지근한 공기가 실내를 메울 때까지도 둘은 서로를 부둥킨 채였다. 침대 시트가 젖지 않은 데가 없어 눕는 게 불편해졌을 무렵 옆 룸으로 옮겼다. 거기서 또 섹스를 했다. 바깥이 환했지만, 뻥 뚫린 바다 전경이라 커튼을 치지 않고 알몸으로 몸을 섞어도 부담이 되지 않았다.
몇 시간에 걸쳐 했는지는 몰라도 주혜성이 욕을 한 횟수는 기억했다. 어떻게든 참으려던 주혜성은 문성하가 그의 성기를 조이거나 가슴을 핥으며 도발하면 이를 갈며 끝내 욕설을 뱉었다. 문성하는 그게 좋아 쉼 없이 그를 자극했다. 그러다 마침내 주혜성으로부터 변태 새끼, 라는 욕을 들었다. 문성하가 흐뭇하게 물었다.
“그래서 소감은.”
문성하는 주혜성의 무릎에 앉아 있었다. 직전까지 주혜성은 문성하의 양 허벅지 밑에 팔뚝을 넣어 띄우고는, 내벽이 갈릴 정도로 성기로 절구질을 했다. 그러다 막다른 내벽에 짓눌린 음경에서 체액이 뿜어지고, 잇달아 문성하마저 사정하는 바람에 허벅지가 온통 젖고 말았다. 축축한 액에다 엉덩이를 비빈 문성하가 주혜성의 쇄골에 입술을 묻었다. 주혜성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좋아.”
“뭐가.”
주혜성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느른한 목소리가 찾아들었다.
“예쁘기만 한 줄 알았는데, 야하기까지 해 줘서.”
문성하가 그의 쇄골을 깨물었다. 흠칫한 주혜성이 눈을 깔았다. 바라본 문성하가 쏘아붙였다.
“욕으로 해 줘.”
주혜성의 입매에 웃음이 걸렸다. 문성하의 뺨에 입술을 붙인 그가 속삭였다.
“싫어. 흥분돼.”
심통 맞게 쇄골을 빤 문성하의 눈이 불현듯 까물거렸다. 잠도 잊고 성욕과 사정감에만 몰입해 있던 신체가 뒤늦게 본연의 사이클을 자각한 듯, 온몸이 날연해져 왔다. 꺼떡거리던 문성하의 머리가 주혜성의 어깨에 푹 묻혔다. 키들거린 주혜성이 문성하의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잔잔한 인사말이 들렸다.
“잘 자. 형.”
***
눈을 떴을 때는 어두침침한 밤이었다. 일어난 문성하는 낯선 공간에 떨어진 우주인처럼 앉은 자세로 서성였다. 헤매던 시선이 저편의 협탁에 걸렸다. 눈길이 닿자마자 지잉, 하며 핸드폰이 울렸다. 깜짝한 문성하가 팔을 뻗었다. 액정에 ‘James Lim’이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반사적으로 통화 아이콘을 누른 문성하가 핸드폰을 귀에 댔다.
“네. 이사님.”
[지금 어딥니까? 문 대표님.]
“아직 울릉도에……. 그런데 지금 시간이 몇 시…….”
[하아, 진짜.]
건너편의 제임스 임이 깊이 탄식했다. 뭔가 할 말이 많은데, 차마 문성하 앞에서는 못 하겠다는 것처럼 이만 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얼떨떨하게 핸드폰을 귀에서 뗀 문성하가 시간을 확인했다. 바로 입이 떡 벌어졌다. 오후 8시 40분.
제임스 임이 신신당부한 오후 4시를 한참이나 넘겨 버렸다. 분명히 오후 9시에 중요한 화상 회의가 있다고 들었는데.
“저기, 이사님. 여기서라도 화상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방법을 제가…….”
급하게 어물거리던 문성하가 멎었다. 입구 쪽에서 철컥,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성큼성큼 걸어온 가운 차림의 주혜성이 문성하의 손에서 핸드폰을 챘다. 제 귀에 가져간 그가 심드렁하게 입을 뗐다.
“회의, 내일 같은 시간으로 옮겨. 내일은 꼭 갈 거야.”
바로 핸드폰 너머가 시끄러워졌다. 우악스럽게 부르대는 제임스 임의 소리였다. 핸드폰을 멀리 떨어뜨린 채 허공을 보던 주혜성이 한참 후에야 다시 액정을 귀에 붙였다. 단조로운 언어가 꺼내졌다.
“내가 전혀 지나치다 생각하지 않아. 3년 넘게 휴일도 잊어 가며 회사 운영에만 매진한 게 누군데. 단 며칠 일탈하는 거, 전혀 큰 사건 아니야.”
주혜성이 들숨을 삼켰다. 화면을 힐긋한 그가 고저 없이 덧붙였다.
“NGX는 내 회사야. 내 행위가 회사 운영에 악영향을 끼쳤는지 아닌지 여부는 그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판단해. 애초에 누구 때문에 만든 회사인데, 내 손으로 그르칠 일 없어.”
곧 조금은 타이르듯 말했다.
“걱정 마, 제이미. 다 잘 될 거야.”
핸드폰을 내린 주혜성이 통화 종료 아이콘을 눌렀다. 시트 위에 툭 기기를 던지고는, 문성하의 옆에 몸을 앉혔다. 올라온 손이 문성하의 얼굴을 짚었다. 깜빡이는 눈시울을 타고 기다란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상냥한 물음이 다가왔다.
“배 안 고파?”
제 눈을 비빈 문성하가 답했다.
“고파.”
“식사하자. 어제 그 셰프 안 올라갔어. 내가 하루 더 잡아 뒀거든.”
“어제처럼 1층에서 식사해?”
“아니. 여기서 해. 이따가 트레이 들어올 거야.”
“좁아서 싫다며.”
“좁아도 돼. 이제는 괜찮아.”
주혜성이 문성하의 알몸을 끌어안았다. 순순히 안긴 문성하가 가만히 눈동자를 끌어 올렸다. 주혜성이 문성하의 귀에 숨을 불어넣었다.
“1층은 창밖에 사람들이 들락거려서 안 돼.”
“그게 무슨 상관이야. 밥 먹으면서도 야한 짓 하게?”
문성하가 시큰둥하게 물었다. 주혜성이 입꼬리를 올렸다.
“어떻게 알았어?”
문성하의 눈이 미세하게 찡그려졌다. 입 안에서 허탈한 혼잣말이 굴러갔다.
정말이지, 밝히기 시작하니 한도 끝도 없다 싶었다.
***
욕실에서 샤워를 하는 사이 문 너머에서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기척을 느꼈다. 주혜성이 말한 트레이를 가지고 셰프와 직원이 온 모양이었다. 물줄기 떨어지는 소리 틈으로 관자, 독도새우, 떡갈비와 같은 단어가 들려왔다. 어제처럼 셰프가 메뉴를 브리핑하는 듯했다.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소리를 들은 후에야 샤워기 물을 껐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털며 욕실 문을 열었다. 가운을 둔 자리를 찾아 더듬는데, 잡히는 게 없었다. 찌푸린 문성하가 문을 젖혔다. 후끈한 김이 빠져나가며 체온이 자못 낮아졌다.
“이리 와. 형.”
앞 접시를 정리하던 주혜성이 손짓을 했다. 문성하가 물었다.
“내 가운은.”
“가운이 있었어?”
주혜성이 천연덕스럽게 응수했다. 머리에 덮은 타월을 홱 내린 문성하가 발을 뻗었다. 분연히 걸어가, 주혜성의 몸에 걸쳐진 가운을 마구 잡아당겼다. 심통 난 소리가 나왔다.
“가운 내놔.”
“싫어. 어디에 있는지 몰라.”
“그럼 네 거라도 내놔.”
“의미 없을 텐데.”
주혜성이 문성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살며시 실린 힘에 문성하의 몸이 낮춰졌다. 털썩 시트에 걸터앉은 문성하의 머리에 주혜성이 타월을 덮어 줬다. 남은 물기를 세심하게 털어 낸 그가 뇌까렸다.
“어차피 곧 벗을 거거든.”
문성하가 소리를 질렀다.
“야.”
“밥부터 먹자. 형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다.”
타이른 주혜성이 젖은 타월을 바닥에 내려 뒀다. 이내 손을 뻗어 트레이 위의 젓가락을 찾아 쥐었다. 당연히 문성하의 손에 들려 줄 줄 알았는데, 트레이를 살핀 끝에 투명한 접시에 담긴 관자구이 하나를 집고 끝냈다.
하얀 관자가 얼굴 앞으로 다가왔다. 주혜성이 아, 하는 입 모양을 해 보였다. 문성하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어제도 그랬지만 또 먹여 준다. 챙김받는 일은 생소하지만 최소한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살면서 이런 걸 겪어 본 적이 드물었다.
“매니저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갓 씹은 관자에서는 레몬 향이 났다. 딱 알맞게 구워져 질기지도 무르지도 않았다. 우물거린 문성하가 되물었다.
“뭐라고 했는데.”
“나머지 룸도 편히 쓰래. 어차피 숙박비 다 지불한 거니까.”
“그게 뭐.”
“우리가 어제 옆방에서 하다 시트 다 버리고 이 방까지 온 걸 아는 거지.”
관자를 곱씹던 문성하의 목에서 꿀꺽, 소리가 났다. 말라붙은 입에 점점 틈이 생겼다. 덜컥 커다란 목소리가 터졌다.
“그…… 우리 둘이서 한 건 모르겠지? 여자 데려와서 했다고 생각하겠지?”
“그건 모를 일이지. 한데 같이 밤을 보내면 보통은 숙박도 같이 하지 않나.”
주혜성이 아무렇지 않게 젓가락을 옮겼다. 이내 잘 구워진 떡갈비 한 점을 집어 또 가져왔다. 멍하니 올려다보는 문성하의 아랫입술을 잡고는, 벌어진 틈에 떡갈비를 넣어 줬다. 의식도 없이 받아 문 문성하가 서둘러 떡갈비를 씹었다. 자잘하게 조각나는 양념 고기는 달달하며 부드러웠지만, 워낙 빨리 먹어 음미할 시간은 없었다.
“그 사람이 소문내면 어떻게 해?”
떡갈비를 삼킨 문성하가 안달복달했다. 주혜성은 고개만 갸우뚱했다.
“내면 내는 거지.”
“너 말이야, 너. 네가 문제야. 너 남자랑 하고 다닌다고, 그런 소문 나면…….”
“소문나면? 고마울 것 같은데.”
주혜성이 안여하게 트레이를 헤적거렸다. 이번에 젓가락에 걸린 건 분홍색 생새우였다. 이 섬의 특산물로 취급되는 독도새우 회인 듯했다. 탱글탱글한 새우 살을 문성하의 아랫입술에 붙인 주혜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형은 내가 창피해?”
“뭐.”
어이가 없어 벌어진 입 안으로 젓가락이 들어왔다. 먹기 편하게 어금니에 맞춰 새우를 놓아 준 주혜성이 젓가락을 빼며 뇌까렸다.
“나하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나는 게 부끄럽냐고.”
“그런 문제가 아니고.”
문성하는 일단 음식물을 씹었다. 신선하며 달큼한 해산물은 몇 번 씹지 않았음에도 쉽게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입 안을 비운 문성하가 불안한 손으로 주헤성의 가운을 잡았다.
“나는 상관없고, 네가 문제라고. 나야 널리고 널린 흔한 사람이지만 넌 아니잖아. 세계 어디를 가도 주목받는 입장이잖아. 넌 충분한 유명인이고, 너를 둘러싼 소문을 항상 경계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이야. 넌 그런 자각이 없어?”
“그런 자각을 왜 해야 해? 참으로 이상한 얘기네.”
젓가락을 내려놓은 주혜성이 등을 젖혔다. 노곤한 눈빛이 문성하의 얼굴을 쓸었다. 주혜성이 한숨처럼 말했다.
“난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나에 대해 어떤 얘기를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아. 아무리 많은 사람이 내 얘기를 해도 나에게는 형 목소리만 들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살아온 거, 누구보다 형이 잘 알잖아.”
벙한 문성하의 눈이 흔들렸다. 주혜성이 가볍게 혀를 찼다.
“형 진짜 안 되겠다.”
느슨한 손이 문성하의 팔을 거머쥐었다. 슬그머니 밀어붙이는 힘에 절로 몸이 넘어갔다. 풀썩 시트에 누운 문성하의 볼을 매만지며 주혜성이 말했다.
“밥 좀 먹여 줘. 나 서운하게 한 벌로.”
문성하의 눈이 깜박였다. 황망한 대꾸가 나왔다.
“이렇게 하고 무슨 밥을 먹여.”
“왜 못 해? 충분히 하지.”
손을 뒤로 뺀 주혜성이 접시를 더듬거렸다. 눈꽃 얼음에 파묻혀 있던 새우 살이 딸려 나왔다. 보다 몸을 낮춘 그가 손을 내렸다. 얼음장 같은 새우가 왼쪽 가슴 한가운데 떨어졌다. 유륜을 둥글게 감은 모양새였다. 갑작스러운 찬기에 문성하의 배가 울렁거렸다. 주혜성이 속삭였다.
“이제 먹여 줘.”
말을 마친 그의 고개가 기울었다. 새우가 있는 자리를 물고는, 오물거리며 턱에 힘을 실었다. 쭈웁, 소리와 함께 미끈한 새우 살이 빨렸다. 덩달아 흡입 당한 유륜에 오톨도톨한 소름이 일었다. 문성하가 놀라 허둥거렸다.
“하으……! 아…….”
“최근 먹은 것 중 가장 맛있네.”
혀를 넓게 펼쳐 남은 물기를 훔친 주혜성이 읊조렸다. 새우 살을 품은 교근이 만족스레 불끈거렸다. 문성하가 불퉁하게 따졌다.
“이게 무슨 벌이야. 그냥 네가 하고 싶은 걸 한 거지.”
주혜성이 갸웃했다.
“그럼 다른 벌로 줘?”
문성하의 입이 다물렸다. 머릿속에서 지난밤 주혜성이 ‘벌’이라는 명목으로 한 행위들이 스쳐 지나갔다. 거의 야화 모음집 수준이었다. 속으로 학을 뗀 문성하가 도리질을 쳤다.
“아니.”
피식거린 주혜성이 몸을 틀었다. 하얀 접시 위의 윤기 도는 생선 살이 잡혔다. 다시 문성하의 앞으로 온 그가 알몸을 살핀 끝에 배꼽 중앙에 그것을 올렸다. 음식물에 남은 온기 때문에 배꼽이 간질거렸다.
혀를 내민 주혜성이 생선 살을 올린 부위 밑에 표면을 붙였다. 말랑한 뱃가죽을 살금살금 핥아 대다, 위로 쓸어 올리며 음식물을 품었다. 뱃가죽이 뿌리까지 뽑히는 기분에 등줄기가 전율했다. 아. 방심해 있던 문성하의 무릎이 덜커덕거렸다.
“형이 날 안심시키면 상이고, 날 불안하게 하면 벌이 돼.”
몇 번 씹지도 않은 주혜성이 목을 꿀꺽했다. 이어 또 혀를 빼고는, 소금기가 남아 있는 배꼽을 중심으로 둥글게 원을 그렸다. 세워진 끄트머리가 돌연 배꼽 한가운데 꽂혔다. 흡! 문성하의 목이 넘어갔다. 딱딱하게 곤두선 혀가 움푹 팬 구멍을 집요하게 쑤석거렸다.
“내가 형하고 할 건 항상 정해져 있어. 거기에 어떤 이름표를 붙이느냐가 다를 뿐이지.”
주혜성이 서서히 입을 모았다. 잔뜩 긴장한 배꼽을 한입에 문 그가 세차게 흡입했다. 치아에 스친 뱃살이 오싹거렸다. 문성하가 도무지 못 참겠다는 양 시트를 내리쳤다.
“하지 마. 간지러워, 진짜 간지럽…….”
“이제 우리 무슨 사이야? 형.”
불현듯 주혜성의 얼굴이 들렸다. 부쩍 초연한 면상이 망막을 메웠다. 순식간에 빈 문성하의 입이 여짓거렸다. 뇌리에서 동일한 말이 뱅글뱅글 맴을 돌았다.
무슨 사이.
형제도 아니고, 단순한 남도 아닌 사이. 하룻밤 내내 시트를 온통 적셔 가며 정사를 벌이는 사이. 서슴없이 서로에게 애정을 드러낼 수 있는 사이. 통상 그런 관계를 두고 세간에서 부르는 이름이 있긴 한데.
분명히 아는 답이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는다. 멍청해서도,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고. 그저.
낯설어서. 문성하의 인생에는 지금껏 없던 이름이라서.
신기루처럼 제 것이 아닌 것만 같아서.
“알면서 뭘 물어봐.”
문성하가 머뭇머뭇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벽면에 눈을 맞추고 들리지 않게 숨을 삭였다. 반듯하게 주시해 오는 눈길에 볼이 저렸지만 차마 마주 보지 못했다. 막연하기만 한 자신의 죄목에 그가 이름표를 붙여 줄 것만 같았다.
비겁함.
“꼭 15년 전 겨울처럼 군다. 형.”
주혜성이 손을 뺐다. 보지도 않고 등 너머의 트레이를 만지작거리다, 작은 유리컵 하나를 쥐어 가져왔다. 문성하는 곁눈질로 그것을 봤다. 안에서 하얀 점액이 찰랑거렸다. 요거트였다.
“스스로를 지키기 급급해 도망쳤지. 그때도.”
어투가 부쩍 이성적이었다. 강인한 판단력을 지닌 성인 남성의 음성. 허를 찔린 기분에 문성하가 목을 굽혔다. 잠잠한 낯을 힐금한 주혜성이 빈손을 내밀었다. 늘어져 있던 문성하의 허벅지를 움켜쥐고는, 위를 향해 젖혔다. 움찔한 문성하가 섟을 냈다.
“뭐 하는 거야.”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은 주혜성이 답했다.
“디저트. 식사 끝나면 할 얘기 있거든.”
유리컵이 벌어진 엉덩이 틈으로 들어왔다. 벌벌거리는 회음부를 검지로 쓸다가, 컵을 기울였다. 덩어리진 점액이 뚝뚝 떨어졌다. 요거트에 파묻힌 입구가 놀라 벌름거렸다. 문성하의 발가락이 웅크려졌다.
“하으……. 미친놈아.”
목울대를 떤 문성하가 욕을 했다. 요거트를 전부 쏟아부은 주혜성이 빈 잔을 트레이에 올리며 저소했다. 노려보는 문성하를 마주 본 그가 미소를 보였다.
“좋다. 욕 들으니까.”
이를 간 문성하게 쏘아붙였다.
“너 나 놀리는 거면 그만둬.”
대답을 피한 주혜성이 상체를 낮췄다. 하얀 점액에 젖어 번들거리는 회음부에 얼굴을 붙이고, 아래에서 위로 핥아 올렸다. 혀가 쓸고 간 가죽이 송연함에 취해 경련했다. 문성하의 양 눈이 질끈 감겼다.
“하아……!”
“놀리는 것 아닌데.”
주혜성의 눈이 반쯤 감겼다. 붓처럼 기어오른 혀가 척척한 액에 덮인 은밀한 살을 쑤셔 댔다. 혀의 돌기에 스친 구멍이 반사적으로 빠끔거렸다. 숙성한 젖 냄새가 훅 풍겨 왔다. 야릇한 냄새와 소양감에 도취된 문성하가 시트를 갉작였다. 달달거리는 입술 틈에서 보대끼는 소리가 나왔다.
“으으음…….”
“형한테서 배운 걸 잊지 않았을 뿐인데.”
널름거리는 혀가 구멍을 말끔히 닦은 끝에 이동했다. 주변에 남은 요거트를 게걸스럽게 핥은 주혜성이 뇌까렸다.
“내가 가진 것의 구 할은 형에게서 나왔어.”
꿀꺽, 요거트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점액이 사라진 자리에는 미끄덩거리는 특유의 점성만이 남았다. 약간의 젖 냄새는 덤이었다.
“그래서 나는 형이 필요해.”
주혜성이 다시 구멍에 입술을 붙였다. 또 다른 디저트를 탐하듯 한입에 품고는 쭈웁, 소리 나게 빨아들였다. 슬그머니 들어온 혀가 입구를 홈착거리며 간지럼을 태웠다. 진 빠진 문성하가 제 얼굴을 쥐어짰다.
“하아아……!”
“알아?”
“알아…….”
“나하고 계속 있을 거지? 그럼.”
아래를 흡입하는 힘이 거세졌다. 내장까지 흡수당하는 기분에 문성하의 솜털이 쭈뼛 섰다. 버둥질한 문성하가 색색거리며 머리를 들었다.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날짐승처럼 치부를 빨며 눈을 맞춰 오는 주혜성이 비쳤다. 넋 놓고 마주 본 문성하가 두서없는 대답을 꺼냈다.
“그야 당연……. 당연히…….”
“그래?”
불현듯 입을 푼 주혜성이 몸을 일으켰다. 단숨에 끌어 올려진 상체가 문성하의 머리통을 사이에 두고 양손을 내려 시트를 짚었다. 의미심장한 응달이 얼굴에 내려앉았다. 어둠 속에서 눈을 빛낸 그가 말했다.
“나하고 미국 가자. 형.”
문성하의 아랫입술이 툭 떨어졌다. 주혜성은 여전히 문성하를 응시하고 있었다.
***
“저 사람, TV에서 봤는데.”
호텔 로비에 앉아 있던 남녀 커플이 숙덕거렸다. 둘 중 하나가 등을 보인 채 매니저와 대화를 나누는 주혜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문성하는 곁눈질로 그들을 봤다. 한참이나 대화를 나누던 그들이 답을 찾았는지 펄쩍 뛰었다. 여자가 손바닥을 짝, 쳤다.
“맞아! 그 돈 많은 사람.”
“돈 많은 건 NGX지. 저 사람이 아니지.”
“아니야. 저 사람도 엄청 많아. 추정 재산이 10조 원 이상이라 했어.”
여자가 손사래를 쳤다. 허, 소리 낸 남자가 다시 주혜성의 뒤통수를 봤다. 심드렁한 한 마디가 나왔다.
“애인하고 왔나.”
“회사 사람이나 친구일 수도 있지.”
“이런 데를 누가 동성이랑 와? 딱 보니 비싸기로 소문난 별채에서 묵었네. 붙어 있는 매니저가 한둘이 아니잖아.”
“그래?”
여자가 기웃거렸다. 눈치를 본 문성하가 몸을 틀었다. 바깥에 미리 나가 있을 셈이었다. 서둘러 발걸음을 떼는 문성하의 뒤편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형! 차 준비됐대.”
바로 등이 소스라쳤다. 오도 가도 못하는 문성하의 곁으로 구둣발 소리가 다가왔다. 옆에 선 주혜성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아니. 나가자.”
몰래 손을 치운 문성하가 입구 쪽으로 턱짓을 했다. 의아하게 바라보던 주혜성이 눈을 비꼈다. 시선이 문성하가 힐긋거리는 쪽에 걸려 있었다. 눈이 마주친 아까의 커플이 주춤거렸다. 한숨 쉰 문성하가 주혜성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뭘 또 보고 있어? 가자.”
“저기서 뭐라고 하기라도 했어?”
“그런 게 아니라…….”
문성하가 난처하다는 양 입을 다셨다. 나지막한 한마디가 건네졌다.
“애초에 이런 데는 남자 둘이서 오는 곳이 아니야. 일단 나오기부터 해.”
다급한 발이 내뻗어졌다. 멈춰 있던 주혜성이 약간의 텀을 두고 걷기 시작했다. 단숨에 따라붙은 그가 문성하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강고하게 감싸 오는 힘에 절로 아랫배가 옴씰거렸다. 주혜성이 안여하게 말했다.
“확인 사살.”
문성하의 표정이 불퉁해졌다. 흘겨보는 문성하에 태연히 웃어 보인 주혜성이 마저 발을 내디뎠다. 눈앞에서 회전문이 빙글 돌았다.
***
리무진을 타고 헬기 착륙장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3시 30분이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발견한 건 전혀 생각지 못한 인물이었다. 주혜성 때문에 일부러 이곳까지 온 제임스 임도 그랬지만, 그 옆에 있는 사람은 정말로 예상 밖이었다.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제임스 임이 다짜고짜 한탄했다. 문성하는 그의 곁을 지나쳐 나아갔다. 우두커니 선 안재림이 어찌할 바 모르고 뭉그적거렸다. 문성하의 걸음이 빨라졌다. 안재림의 앞에 우뚝 서서는, 그의 어깨를 잡고 그새 수척해진 얼굴을 확인했다.
“재림아. 여길 어떻게 알고 왔어?”
“저분이 데려다줬어요.”
안재림이 제임스 임을 가리켰다. 막 차에서 내린 주혜성이 허리를 짚으며 이쪽을 봤다. 이마에 미세한 금이 가 있었다.
“어제 우리 강남 매장에 왔었어요. 저분께서요.”
“어제? 왜”
문성하가 휘둥그레졌다. 그새 근처로 온 제임스 임이 설명했다.
“혹시나 해서 갔었습니다.”
“그러니까, 뭐가 혹시나 했는데요.”
문성하가 윽박질렀다. 주혜성의 눈치를 본 제임스 임이 몸을 낮췄다. 문성하의 귀에 입을 가까이하고는, 작게 속삭였다.
“어제 하루 종일 혜성이가 연락 두절 상태였습니다. 문 대표님께서 제 전화를 받기 직전까지 그랬어요. 호텔 측은 보안이라며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고……. 워낙 답답해 문 대표님 동생분이라도 찾았습니다. 그쪽에서 뭔가 들은 게 있을까 싶어서요. 아무것도 모르더라고요. 대신 저에게 형이 있는 곳을 알면 데려다 달라고 안달복달했고요.”
말을 마친 제임스 임이 몸을 세웠다. 문성하의 눈이 돌아갔다. 안재림은 죄라도 지은 양 머리를 푹 숙인 채였다. 가만히 바라보던 문성하가 고개를 마주 숙였다. 좀처럼 자신을 보지 않는 그의 볼을 손으로 덮고는, 조곤조곤 물었다.
“재림아. 그렇게 불안했어?”
“네…….”
“그래도 그렇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그런 부탁을 하면 어떻게 해?”
“어차피 같은 NGX 직원이잖아요. 형하고 같이 간 분이나, 저분이나. 심지어 저분 역시 형하고 같이 간 분 행적을 찾는 중이었으니 그리 무리한 부탁이 아니라 생각했어요.”
울걱거린 안재림이 답했다. 문성하가 흠칫했다.
“그 사람이 NGX 직원인 걸 어떻게 알았어?”
“그 쪽지하고 같이 있던 게 NGX 직원용 넥타이였으니까요.”
침울함을 삭인 안재림이 눈을 굴렸다. 자못 조심스레 저편을 보다가, 뒷걸음질을 쳤다. 문성하의 뒤에 숨다시피 한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리무진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주혜성에 눈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분은 어디에 있어요?”
“뭐.”
문성하가 멍해졌다. 눈을 끔벅거린 안재림이 뇌까렸다.
“주혜성 대표하고 아주 가까운 사이인가 봐요. 일부러 여행 일정 맞춘 거예요?”
문성하의 입술이 말라 갔다. 하긴, 자신이라도 그렇게 생각하겠다 싶었다.
문성하가 누누이 말한 ‘동생이었던 사람’이 주혜성이라는 걸, 안재림이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저기. 재림아.”
문성하가 급하게 운을 뗐다. 안재림의 눈이 말똥해졌다. 문성하의 손이 공연히 이마를 훔쳤다.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몰라 혀만 정처 없이 하느작거렸다. 언젠가는 얘기할 생각이었지만, 시기가 너무도 빨리 찾아왔다. 들을 안재림에 대한 준비는 물론이고 말하는 자신에 대한 준비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형 동생이 말이지.”
“형.”
돌연 등 뒤에서 팔이 잡혔다. 문성하의 얼굴이 돌아갔다. 옆에 있는 제임스 임에게 꽁초를 넘겨준 주혜성이 넌지시 헬기를 봤다. 텁지근한 언어가 찾아들었다.
“일단 타기부터 하자. 기상 상황이 실시간으로 안 좋아지는 모양이야. 나야 또 여기서 형이랑 묵어도 상관없지만, 그러면 제이미가 기절할지도 몰라. 어서 가자.”
주혜성이 먼저 등을 보였다. 급히 따라붙은 제임스 임이 문성하를 향해 손짓했다. 빨리 와요! 문 대표님.
멀거니 서 있던 문성하가 뒤늦게 안재림을 봤다. 마주친 안재림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문성하를 담는 둥 마는 둥한 눈동자가 헬기 쪽으로 흘러갔다. 위에 오르는 주혜성을 바라본 그의 면상이 점점 파리해져 갔다. 문성하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곤두세웠다. 안재림을 에워싼 기류를 느끼는 것만으로, 그의 지금 심정이 뼈저리게 와닿았다.
공포.
***
헬기 안은 소란하면서도 고적했다. 우박처럼 쏟아지는 프로펠러 소음 때문에 귀가 아릴 지경이었지만, 누구 하나 움직이는 사람이 없어 시야는 한적했다.
문성하는 안재림과 주혜성의 사이에 앉아 있었다. 안재림을 창가 쪽에 앉히고 문성하와 주혜성이 나란히 착석했다. 안재림은 미동도 없이 창에다 얼굴을 붙인 채였다. 문성하는 종종 그를 살피다 이따금 주혜성을 봤다.
다리를 꼰 주혜성은 제임스 임이 가져온 영문 서류를 읽고 있었다. 스크랩한 신문 기사와 보고서 등이 섞인 것이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주혜성의 미간이 좁혀 들었다. 관찰하던 문성하가 눈길을 내렸다. 페이퍼 상단의 볼드체 영어 제목이 한눈에 들어왔다.
「Can NGX fire a CEO?」
『과연 NGX는 CEO를 해고할 것인가.』
머무적거린 눈망울이 끌어 올려졌다. 피로한 듯 페이퍼를 덮은 주혜성이 눈가를 짚으며 고개를 젖혔다. 높다랗게 부푼 가슴팍이 느릿느릿 가라앉았다. 부족한 숨을 억지로 확보하듯 호흡하는 그를 보며 문성하는 발꿈치를 들썩였다. 이런 주혜성은 처음이다. 일에 있어서 만큼은 한 번도 실패라는 걸 경험한 적이 없는 걸로 아는데, 지금의 그는.
그 글자의 그림자 정도는 밟은 사람 같았다.
“형.”
문득 창가 쪽 어깨가 톡, 건드려졌다. 문성하의 얼굴이 돌아갔다. 옴지락거린 안재림이 조심스레 몸을 붙여 왔다. 쥐고 있던 것이 문성하의 무릎 위에 올라왔다. 쪽지였다. 물끄러미 본 문성하가 종이를 집어 들었다. 차곡차곡 접힌 걸 펼쳐 눈앞으로 가져왔다. 덜컹이는 헬기 안에서 삐뚤빼뚤한 글씨가 자리를 잡아 갔다.
「형. 진짜인 저보다 가짜인 쪽이 더 대단하고, 훌륭하고. 도움이 되는 동생인 걸 알지만 그래도 저를 잊진 마세요.」
문성하의 동공이 흔들렸다. 도르르 흘러내린 망막에 마지막 문장이 새겨졌다.
「저 버리지 마요. 형.」
* * *
헬기가 떨어지자마자 제임스 임은 거의 뛰쳐나가듯 문밖으로 나섰다. 대기 중인 차를 손으로 부른 그가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빨리 나와! 시간 없어.”
주혜성이 몸을 일으켰다. 잇따라 내리려던 문성하가 잠시 뒤를 돌아봤다. 문성하가 돌려준 종이를 꼭 쥐고만 있는 안재림이 보였다. 가붓하게 등을 두드려 준 문성하가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재림아.”
이내 일어섰다. 그대로 빠져나와 휑한 헬기장 한가운데를 디뎠다. 재촉하는 제임스 임의 소리를 들으며 세단을 향해 걷는 주혜성이 보였다. 사뭇 다급한 발이 나아갔다. 몇 개의 돌을 툭. 툭, 차 가며 돌진한 문성하가 주혜성의 앞을 가로막았다. 주혜성이 멈칫했다.
“회의 잘하고, 연락해.”
차오른 숨을 삭이며 말했다. 주혜성의 이마가 구겨져 갔다.
“같이 안 가고?”
“재림이하고 산책 좀 하고 가려고. 지금껏 애하고 제대로 외출한 적이 없어. 항상 집 아니면 내 사무실, 쟤 매장이었어.”
“그래도…….”
“그리고 혜성아.”
문성하가 주혜성의 손을 잡았다. 부여잡은 손아귀에 조금조금 힘이 실렸다. 주혜성의 윗눈썹이 꿈틀거렸다. 안 좋은 일을 예감한 사람 특유의 불안함이 비쳤다. 알면서도 차분히 눈을 맞춘 문성하가 입을 열었다. 곤로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나 미국 못 가. 형 생긴 지 일주일도 안 된 애 두고 어떻게 가.”
곧 나긋나긋 사과했다.
“미안해. 혜성아.”
주혜성의 턱이 불뚝거렸다. 깍지 낀 그의 손이 딱딱해져 갔다. 탁한 숨을 뿜은 주혜성이 고개를 돌렸다. 먼 치의 지평선을 본 그가 굵은 침을 삼켰다. 건조한 입술 틈에서 쓰라린 욕설이 샜다.
“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