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이름 안재림. 나이 만 19세. 중학교 3학년 때 가출한 후 분식을 팔며 트럭 생활을 하다 지난해 수원에 요식 매장 ‘스푼G’를 오픈. 가게가 소문난 맛집으로 자리 잡으며 월 1억 원에 가까운 매출을 내고 있음. 친부는 2년 전 사망. 수원역 인근 원룸에서 홀로 거주 중.」
“고작 이것 때문에 방한 일정 앞당긴 거야?”
세단 뒷좌석에서 다리를 꼰 제임스 임이 물었다. 주혜성은 묵묵히 들고 있던 페이퍼를 내려놓았다. 안재림의 사진이 붙은 종이가 팔랑거리며 밀려 났다. 목에 건 넥타이를 추스른 주혜성이 권태롭게 말했다.
“그것도 있고, 이것저것.”
“에센더 건까지?”
“일일이 따지지 마. 피곤해.”
“그나저나 저긴 손님이 왜 이렇게 많아? 맛집은 맛집인 모양이네.”
짜증 섞인 반응에 제임스 임이 차창 너머를 보며 말을 돌렸다. 주혜성은 말없이 그가 보는 곳을 힐긋했다. ‘SPOON G’라고 적힌 간판을 단 작은 매장. 점심시간임을 감안하더라도 제법 붐비는 모습이다. 줄 서서 기다리는 이가 10명은 훌쩍 넘어 보였다.
“형한테는 언제 얘기할 거야.”
주혜성 쪽으로 시선을 넘긴 제임스 임이 질문했다. 주혜성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직접은 안 해.”
“그러면. 내가 전달해 줘?”
“하지 마. 대놓고 얘기하면 역효과만 날 수 있어.”
주혜성이 손을 내저었다. 곧 시트를 툭,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안나 킴에게 연락해. 당분간 저 매장 방문하면서 안재림 동태 파악해 달라고. 구체적인 지시는 내가 추후에 할 거야.”
제임스 임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영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사장님! 저희 언제 들어갈 수 있어요? 열린 차창 너머로 깔깔거리는 여자 소리가 들렸다. 주혜성은 다시 스푼G 입구를 봤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 세 명이 한 남자를 둘러싼 채 칭얼거리고 있었다. 남자는 곤란한 표정으로 그들을 달랬다. 염색이라도 한 양 밝은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부딪혀 나부꼈다.
“10분만 기다려요. 오늘 너무 바쁘네. 미안해요. 주먹밥 서비스해 줄게.”
“진짜요? 사장님 너무 잘생겼어요!”
여학생들이 바로 자지러졌다. 남자가 천천히 자리에서 벗어났다. 기다리고 있어요, 금방 들어가게 해 줄게요. 매장으로 돌아가는 남자의 옆얼굴을 주혜성은 유심히 봤다. 곱게 휜 눈매에서 햇살이 비친다. 움푹 팬 왼쪽 눈꼬리 밑 보조개가 온기를 담은 우물 같다.
마치 자신이 잘 아는 인물처럼.
주혜성의 눈꺼풀이 흘러내렸다. 노곤한 등이 시트 등받이에 밀착했다. 길게 목을 젖히는 주혜성에 대고 운전기사가 물었다. 대표님, 슬슬 출발할까요? 주혜성은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거부의 의사로 받아들인 기사가 잠자코 대기했다. 컴컴한 시야 속에서 아까 전 남자의 잔상을 헤아렸다. 조금은 헛헛한 혼잣말이 나왔다.
막상 보니 짜증나네.
질투가 났다. 아주 많이. 예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5년 전부터.
「DNA paternity testing results.」
그날, 22세 주혜성은 해당 제목을 단 복잡한 문서 내용을 단숨에 이해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ADHD를 극복한다는 명목 아래 온갖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은 결과였다. 소설이나 IT전문지는 물론이고 과학 저널이며 의학책도 읽었다. 주혜성에게 있어 생소한 의학 문서를 낱낱이 머리에 담는 건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심지어 결론이 너무도 명료했다.
한마디로 문성하는, 주혜성의 친형이 아니었다.
“친자 검사를 왜 한 거예요?”
냉한 어조로 아버지에게 따졌다. 살기에 젖은 주혜성을 일별한 아버지가 냉장고로 향했다. 문을 열고, 차가운 탄산수를 꺼내 뚜껑을 딴 그가 입을 열었다.
“그놈 얘기는 한 마디도 하고 싶지 않다.”
“이거 검사한 날짜, 형이 우리에게 온 지 8개월 된 시점이에요. 미국에 온 지는 한 달 된 시점이고요.”
주혜성이 테이블을 짚었다. 힘이 실린 손가락이 곤두섰다. 주혜성의 고개가 빳빳해졌다.
“8개월 동안 가만히 있다가, 왜 그제야 친자 검사를 한 거죠?”
“출국 직전 그 애 친아버지에게 연락을 받았다.”
탁, 소리 나게 탄산수병을 내려 둔 아버지가 눈을 맞춰 왔다. 주혜성의 이마가 구겨졌다. 그가 곤로하게 덧붙였다.
“지 새끼 데려간 대가로 2000만 원 달라더라.”
그가 헛웃음을 쳤다.
“애초에 나에게 2000만 원이 돈이었겠어? 주긴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한 거지. 문성하 그놈이 내 친아들이 아닐 수 있다는 건 어렴풋이 예상했다. 그놈 애미 하고 몇 번 만난 건 사실이다만 내 애라 하기엔 워낙 닮은 구석이 없었거든. 긴가민가하면서도 쓸모없는 놈은 아닌 것 같아 내리 데리고 있었던 거지. 그 와중에 친아버지라는 작자가 나타나 돈까지 요구해 오니, 확실히 하고 싶어진 거다. 그래서 검사를 했지. 결과는 생각한 대로였고.”
“형은 분명히 어머니가 유서에 적은 걸 보고 왔다고……. 아버지가 형의 친아버지라 한 내용의…….”
“그 애 애미 마음은 그랬겠지. 친아버지라는 놈이 비리 저지르다 퇴직한 경찰에, 지금은 노름이나 하며 여기저기서 돈 빌리고 다니는 난봉꾼인데. 그놈한테 보내고 싶었겠어? 번듯한 직장 가진 옛 남자 중 애를 보낼 곳이 어디 없을까 머리 굴리다 날 떠올렸겠지. 나는 계획대로 이용을 당해 줬고.”
아버지의 입에서 쯧, 소리가 났다. 재차 탄산수를 들이켜고 난 그가 뚜껑을 덮어 끼워 돌렸다. 그대로 냉장고 안에 처박고는, 싸늘하게 말했다.
“그러니 너도 더 이상 그놈에게 얽매이지 마라. 너하고는 처음부터 아무런 관계가 아니야. 나하고도 아무런 관계가 아니고. 그러니 놈에게 그 해코지를 하고도 내가 죄책감 따위를 느낀 적이 없지.”
불현듯 후들거린 발이 바닥을 으스러뜨릴 기세로 지르밟았다. 아득한 머릿속에서 지리멸렬한 분노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분노는 증오가 됐고, 증오는 들끓는 화염이 돼 끝내 폭발했다.
10년간 지탱해 온 인내가 단칼에 끊어진 순간이었다.
“다시 말해 봐요.”
주혜성의 발이 나아갔다. 의아한 표정으로 마주 보는 아버지를 쏘아보며, 또박또박 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
“그날 스푼G에서 내가 왜 컵을 깼는지 알아?”
소파에 앉아 팔꿈치로 무릎을 디딘 채 턱을 괸 주혜성이 물었다. 옆자리에 앉은 문성하가 무기력한 도리질을 쳤다.
“몰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안재림을 다치게 할 것 같아 두려웠어. 내가 내 손을 믿을 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그냥 내가 다치는 쪽을 택한 거야.”
주혜성이 피식거렸다.
“나 어린애 같지.”
문성하는 부정하지 않았다. 느긋하게 입매를 꼰 이 잘생긴 남자는, 글로벌 투자 기업의 CEO이며 27세에 억만장자가 된 인물이지만.
문성하의 앞에서는 때때로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는 12세짜리 어린애일 뿐이다. 그날 스푼G에서도, 어쩌면 지금 이 순간도.
“속이 타들어 가더라고. 누구보다 형을 잘 아는 내 앞에서 형에 대한 얘기를 친근하게 떠벌리고 있잖아. 더 화가 나는 건, 안재림은 본인이 형의 친동생으로 태어나는 행운을 지녔다는 걸 알지도 못한 채 그러고 있다는 거였어.”
주혜성이 탄식했다.
“누구는 천만금을 줘도 못 얻는 자리를, 단순히 그럴 운명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가졌어. 정말이지 질투가 나서 돌겠더라.”
“그렇게 속이 썩어 들어갈 걸 알면서 왜 굳이 걔를 찾았어. 내가 부탁한 것도 아닌데.”
문성하가 시름 섞인 핀잔을 꺼냈다. 주혜성이 잠시 입을 다셨다. 자못 낮아진 목소리가 들렸다.
“형에게 알려 주고 싶었어. 형이 형이라는 이유로 사랑해 줄 사람은, 사실 다른 곳에 있었다고.”
그의 낯이 풀려 갔다. 번져 가는 물처럼 은은한 음성이 귀를 간지럽혔다.
“그러므로 형이 날 사랑한 건, 내가 단지 동생이어서가 아니라고.”
주혜성의 눈초리가 반듯해졌다. 확고한 시선이 문성하의 얼굴에 걸렸다.
“우리는 타인으로서 사랑한 거야. 형.”
그의 눈길이 미끄러졌다. 문성하의 턱을 훑었다가 목을 더듬고, 가슴을 어루만지며 복부를 쓸었다. 이어 왼쪽 허벅지를 배회하다 바위처럼 굳은 종아리에 머물렀다. 눈빛을 머금은 다리가 삐걱거리며 울렸다. 문성하의 속눈썹이 달달거렸다.
왼 다리가 너무도 뜨겁다. 혈관 하나하나를 타고 신선하며 후끈한 젖이 흐르는 것만 같다.
태어난 이래 가장 살아 있는 다리였다.
“고마워.”
축축한 언어가 흘러나왔다. 일순 멈칫한 주혜성이 굵은 침을 삼켰다. 시트를 덮은 그의 손이 눈에 띄게 꿈지럭거렸다. 곧 불안정한 손놀림을 거두고, 천천히 입매에 호를 걸었다. 따스하기 그지없는 한 마디가 찾아들었다.
“그러면 형도 나에게 고마운 것 하나 해 줘.”
문성하는 묵묵히 그를 마주 봤다. 저도 모르는 새 빨라진 심박수만큼 달막이는 어깨에 주혜성의 손이 올라왔다. 천천히 쓸어내린 그가 입을 뗐다. 은연한 목소리가 귀를 옭맸다.
“섬에 가자, 울릉도. 5년 전에 못 했던 거, 이번에는 하자.”
고개를 낮춘 그가 뇌까렸다.
“거기가 형네 어머니 고향이잖아.”
문성하는 그저 달뜬 입을 말아 물었다. 갈피를 못 잡고 들썩이던 머리통이 기울었다. 느릿느릿 열린 입에서 한층 젖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타고…….”
“헬기.”
“나 헬기 탈 돈 없어.”
“설마 배 타자고? 안 돼. 나 뱃멀미 있거든.”
씩 웃은 주혜성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뒤적인 끝에 하얀 봉투 하나를 꺼내 건넸다. 제 앞까지 다가온 봉투를 얼떨결에 받은 문성하가 눈을 깜빡였다. 주혜성이 빙글거렸다.
“저번에 부순 침대값. 이걸로 형이 내 줘.”
문성하의 입에서 허탈한 숨이 샜다. 공허한 읊조림이 두 사람의 틈에 내려앉았다.
“형 앞에서 돈지랄하지 마. 건방지게.”
곧 불퉁하게 덧붙였다.
“물론 이건 받을 거야. 침대 박살 난 건 사실이니까.”
주혜성은 말없이 키득거렸다. 문성하는 찬찬히 그를 주시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밀려든 훈기에 얼굴이 달았다. 현기증이 인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럼에도 문성하는 계속해서 주혜성을 봤다.
비로소 익숙해진 이 낯선 남자를 빼곡하게 눈에 담았다.
***
“어서 오세요.”
문이 열리자마자 카운터 바 안쪽의 아르바이트생이 힘차게 인사했다. 눈인사를 한 문성하가 걸어갔다. 방싯거린 아르바이트생이 다시 핸드폰 게임에 집중했다. 매장을 슥 둘러본 문성하가 냉장고 진열대 앞으로 갔다. 안을 살피다가 가장 구석에 있는 진저 맛 탄산수 하나를 골랐다. 생소한 브랜드이지만, 진저 맛은 좋아하는 편인지라 자연스레 손이 갔다.
“이거 사는 분, 저 일하는 동안 두 번째로 봐요.”
탄산수를 받아 삑, 바코드를 찍은 아르바이트생이 말했다. 이어서 받은 신용 카드를 포스기에 그은 그녀가 덧붙였다.
“엊그제 스푼G 사장님이 사 가고 나서 처음이에요.”
아르바이트생이 탄산수와 신용 카드를 돌려줬다. 받아 든 문성하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요? 무심코 고른 건데. 입맛이 닮았나 봐요.”
“같이 생활하는 사이라 그런가 보네요.”
“같이 생활 안 했어도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봐요.”
탄산수병을 쥔 손이 내려갔다. 가볍게 찰랑인 문성하가 읊조렸다.
“친동생이거든요.”
몸을 튼 문성하가 입구를 향해 나아갔다. 카운터의 아르바이트생이 벙한 표정을 지었다. 얼어 있던 그녀가 급하게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을 두드려 가며 어딘가에 전화를 걸더니, 곧 부리나케 외쳤다. 언니, 나 만 원 돌려줘! 비식거린 문성하가 문을 열어젖혔다. 오전의 따사로운 햇살이 얼굴을 적셔 왔다.
익숙한 걸음걸이로 거리를 가로질렀다. 늦은 출근을 하는 사람과 산책을 하는 사람 등이 곁을 지나쳐 갔다. 이따금 훈훈한 공기가 목덜미를 감아 왔다. 밤 내내 한숨도 자지 못한 탓에 피곤할 법도 한데, 이상할 정도로 정신이 말짱했다. 명쾌한 개운함마저 느껴졌다.
아주 긴 취침을 마치고 나온 것만 같았다.
“어, 대표님. 오셨네요?”
스푼G 문은 열려 있었다. 오픈 전이라 그런지 매장 안에는 직원뿐이었다. 바닥을 쓸던 여직원이 문성하를 반겼다. 문성하는 그녀를 비롯한 직원들에 꾸벅이며 인사했다. 익숙하게 받은 직원들이 매장 정리에 몰두했다.
“형 왔다고?”
주방 쪽에서 안재림의 목소리가 들렸다. 막 접시를 내려 둔 그가 문성하에 눈을 뒀다. 마저 일하라는 양 손짓한 문성하가 사무실을 향했다. 등 너머로 말끄러미 응시하는 눈길이 느껴졌다. 문성하는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고민에 빠진 머리통을 까딱거렸다.
안재림에게는 어떻게 얘기하는 게 좋을까.
의자에 몸을 앉힌 채 등을 젖혔다. 새하얀 천장을 올려다보며 눈망울을 굴렸다. 머릿속에서 어슴푸레한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기분 좋게 축축하고, 한편으론 띵했다.
아무리 반가운 소식도 뜬금없이 찾아오면 독이 되는 법이다. 심지어 안재림은 아직 스무 살이었다. 갑작스러운 진실을 마주하기엔 턱없이 어린 나이다. 그러므로 문성하는 방도를 찾아야 했다. 충격을 최소화하면서, 안재림을 쉬이 납득시킬 만한 방안을 강구해야 했다.
어떻게 연결된 인연인데, 매듭을 잘못 지어 그르치면 곤란하다.
“형. 아침 먹어요.”
사무실 문이 열렸다. 잠겨 있던 눈동자가 서서히 드러났다. 다가온 안재림이 테이블에 트레이 하나를 올렸다. 위에 모락모락 김을 풍기는 그릇이 놓여 있었다. 뽀얀 국물을 뒤집어쓴 탐스러운 닭 한 마리가 보였다.
“뭐야? 이게.”
“삼계탕이요.”
“갑자기?”
“싫으세요?”
안재림이 머뭇머뭇 되물었다. 문성하는 그저 얼떨떨한 눈길을 건넸다. 사무실 내부가 자못 한적했다. 허공을 배회하던 손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접시 옆에 놓인 스푼을 쥐고는, 그릇 안에 집어넣으며 입을 열었다.
“싫은 건 아니고.”
“그거 만들려고 일부러 아침에 정육점 장 봤어요. 마침 새벽에 엄청 신선한 닭이 들어왔다 하더라고요.”
긴장을 푼 안재림이 재잘거렸다. 문성하는 스푼을 기울여 오목한 부분에 국물을 담았다. 천천히 입가로 가져가, 호록 맛보았다. 딱 맛있게 기름진 국물에 혀가 달았다. 꿀꺽한 문성하가 칭찬했다.
“맛있네.”
“고기도 같이 먹어요.”
안재림이 부추겼다. 문성하는 순순히 젓가락을 들었다. 매끈한 닭의 몸통에 끄트머리를 꽂고는, 뒤적이다 살점을 떼어 올렸다. 입 안에 구겨 넣고 오물거리다 삼켰다. 안재림이 조급하게 물었다.
“맛있어요?”
“응.”
“많이 먹어요. 두 개나 했어요.”
“그렇게 많이는 못 먹을 것 같은데.”
“그래도 최대한 많이 먹어 줘요. 형.”
말을 마친 안재림이 숨을 죽였다. 마른침을 삼킨 그가 눈에 띄게 서슴거렸다. 문성하를 머금은 눈망울이 도르르 굴렀다. 방금 전의 호칭이 반복됐다.
“형.”
소리를 담은 귀가 바로 알싸해졌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눈꺼풀이 들렸다. 고개 숙인 안재림이 아랫입술을 깨물어 대고 있었다. 울걱거리는 목을 타고, 되새김질하듯 동일한 호칭이 번졌다.
“형…….”
풀어진 문성하의 손에서 젓가락이 떨어졌다. 거세게 어깨를 들썩이며 안재림을 주시했다. 쉼 없이 울렁이는 그의 울대뼈가 보였다. 연신 달달거리는 마른입도 보였다. 푹 기운 그의 볼이 젖어 갔다. 미끈한 턱을 타고 흐른 눈물이 뚝, 낙하했다. 울먹이는 목소리가 실내를 메웠다.
“죄송해요. 못 알아봐서…….”
먹먹한 눈이 확 커졌다. 테이블을 짚은 손아귀에 힘이 실렸다. 벌떡 일으켜진 몸이 비틀거렸다. 맥없는 발을 내디뎌 가며 안재림의 앞에 섰다. 새까만 동생의 머리통이 겁먹은 아이처럼 후들거렸다. 문성하의 입에서 새된 소리가 터졌다.
“너 어떻게 알았어?”
“아까 집에서 형이 보다 나간 쪽지랑 사진 보고, 이상한 생각에 스푼G 창고로 왔다가 형이 찾아낸 사진 발견하고……. 그러고 나니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 들어서.”
등을 떤 안재림이 얼굴을 보였다. 물기 어린 속눈썹을 하늘거리다, 뜬금없는 말을 했다.
“삼계탕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문성하의 눈이 찡그려졌다. 망연한 질문이 나왔다.
“그거랑 삼계탕이 무슨 상관이야?”
“제가 먹은 음식 중에 제일 맛있는 거예요. 그게.”
올각거린 안재림이 버겁게 어깨를 가라앉혔다. 사뭇 침착해진 한 마디가 따라붙었다.
“그래서 형한테 해 주고 싶어졌어요.”
멍하니 내려다보던 문성하가 문득 실소했다. 젖은 눈을 홈착거리는 안재림을 살피다, 몸을 낮춰 등을 안아 줬다. 미처 삭이지 못한 그의 진동이 손을 울려 왔다.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뭉친 근심이 무력하게 풀려, 줄줄이 흩어져 갔다. 입매에 자꾸만 쓴웃음이 고였다.
자신은 대체 뭘 걱정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동생이 자신을 알아채지 못했을 턱이 없는데.
“형은 예전에 동생이 있었어.”
희미한 혼잣말이 나왔다. 흔들린 안재림의 눈망울이 자리를 잡았다. 차분하게 마주 본 문성하가 말을 이었다. 석양을 등진 강처럼 잔물진 언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생이라고 생각한 남자가 있었어.”
“알고 보니 아니었어요?”
“응.”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버렸어. 나에게 거짓을 말한 대가로.”
문성하의 고개가 돌아갔다. 텅 빈 벽 한가운데에서 가느다란 금이 비쳤다. 불안정한 사선을 따라 눈길이 미끄러졌다. 시큰해진 성대를 타고 착잡한 한 마디가 끌어 올려졌다.
“버린 줄 알았어. 그런데 정신을 차려 보니 또 엮여 있더라고.”
“그 사람은 형에게서 버려지기 싫었나 봐요.”
“실은 나도 마찬가지였고.”
흘러간 시선이 다시 안재림을 머금었다. 문성하가 한탄처럼 말했다.
“버리기 싫었나 봐.”
안재림의 눈이 깜박였다. 자못 진중하게 문성하를 살핀 그가 입을 뗐다.
“그러면 이제 형은 동생이 두 명이에요?”
“한 명이지. 동생은 너뿐이야.”
“다른 분은요? 서운해할 텐데.”
“다른 사람은…….”
문성하의 눈길이 넘어갔다. 아까의 벽을 시야에 담고는 서서히 눈시울을 좁혔다. 분명히 존재했던 벽면의 상흔이 어쩐지 보이지 않는다. 갓 펼쳐진 도화지처럼 매끈하기만 한 벽이 문성하를 마주 봤다.
“서운할 일 없을 거야.”
문성하의 눈초리가 풀렸다. 새로운 도화지에 글자를 새기듯, 조금조금 시선을 박아 넣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이어진 언어가 나풀거리며 번졌다. 아주 오랜 시간을 헤매다 돌아온 메아리 같았다.
“이걸로 정말 남이 됐으니까.”
그렇게나 갈구했음에도 빙글빙글 도는 유빙 같아 쉽게 잡히지 않던 이름. 습관이 돼 버린 형제라는 굴레 때문에 알면서도 받아들일 수 없던 이름. 밤 내내 되새기다가도 날이 밝으면 신기루처럼 흩어지곤 하던 그 이름.
“이제야 다시 만날 수 있어.”
타인. 주혜성의 새로운 이름. 문성하는 허허벌판이 된 연결 고리에 올라 그를 만난다. 완전한 남이 된 그를 처음 마주한 것처럼 연습한다.
이 인연의 첫 단추를 꿰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