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IRR: 누적 내부수익률
6장. 완전한 타인
27.
“너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우리가 한가한 것도 아니고, 한창 바쁜 때에.”
뒤편에서 닦달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성하는 못 들은 척 짐 박스를 방구석에 내려 뒀다. 뒤따라온 안재림이 문성하를 잡았다. 제 쪽으로 몸을 틀어 온 그가 채근했다.
“대표님. 제가 다 할게요. 가만히 있으셔도 돼요.”
“내 짐을 왜 네가 날라?”
“무겁잖아요.”
“나도 무거운 거 나를 줄 알아. 누가 들으면 난 손도 발도 없는 줄 알겠다.”
“아니, 저는 그냥……. 아무튼 제가 다 할 테니까.”
졸지에 실랑이가 붙은 문성하와 안재림을 지켜보던 최재율의 이마에 금이 갔다. 다짜고짜 다가온 그가 문성하의 어깨를 챘다. 이번엔 최재율 쪽으로 몸이 돌아갔다. 씩씩거린 최재율이 소리를 쳤다.
“너 진심이야? 진짜로 회사 쉴 셈이야?”
“화내지 마. 다리 아파.”
문성하가 제 왼 다리를 주무르며 쏘아봤다. 하, 진짜. 최재율이 환장하겠다는 양 이마를 짚었다. 문성하의 불행은 종종 최재율의 아킬레스건이 됐다. 17세 문성하가 미국에서 갑자기 귀국한 후로 내내 그랬다.
문성하가 자신의 불우한 과거를 대놓고 내보이면, 최재율은 뭐라 반박도 못 하고 당황하기 일쑤였다. 굴곡이랄 게 없이 평탄한 인생만 살아온 그는 문성하의 불운을 아주 난해한 협박으로 받아들였다.
“3년 반 동안 소처럼 일만 했잖아. 신경 쇠약이 한계치를 넘어섰어.”
“투자업 종사자치고 신경 쇠약 아닌 사람이 어디에 있어? 넌 그게 말이 된다 생각…….”
“다리도 아프고.”
문성하가 재차 제 다리를 두드렸다. 교근을 불룩인 최재율이 쯧, 소리를 냈다. 생각에 잠긴 눈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문성하는 무시하고 짐이 쌓인 현관 쪽으로 갔다. 후다닥 달려온 안재림이 문성하를 밀치며 가장 큰 박스를 안았다.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사라지는 그를 보며 문성하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어리다 보니 체력이 남다르다.
“한 달.”
결심한 한 마디가 들렸다. 방 안의 최재율을 힐금한 문성하가 도리질을 쳤다. 심드렁한 대꾸가 흘러나왔다.
“세 달.”
“웃기지 마. 나 혼자 세 달 동안 사무실 지키라고?”
“완전히 놀겠다는 얘기 아니야. 회사로 출근하지만 않을 뿐, 필요한 업무는 빠짐없이 처리할 거야. 재택근무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돼.”
“투자하는 사람이 무슨 재택근무야? 하루에 열 개씩 미팅 잡아도 모자랄 판에.”
최재율이 으름장을 놓았다. 문성하는 못 들었다는 투로 나머지 짐 박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또 가로막은 안재림이 말했다. 대표님, 제가 한다니까요. 문성하가 그의 귀를 꼬집었다. 비켜, 거슬려. 아무렇지 않게 얼굴을 뺀 안재림이 짐 박스 두 개를 한꺼번에 들고 사라졌다. 문성하의 눈이 찌푸려졌다. 저렇게 들면 허리 안 아픈가.
“한 달 반.”
숨을 고른 최재율이 선전 포고처럼 말했다. 문성하는 또 고개를 저었다.
“무조건 세 달.”
“너 진짜 이럴래?”
“어차피 외부 미팅 거의 형이 하잖아. 투자 분석이나 자료 연구 같은 내부적인 일이 주된 내 소관이고. 기존 업무 분담 그대로 가져가는 거야. 근무 장소만 회사가 아닐 뿐이지.”
“그래도 얼굴을 봐야 뭐 제대로 된 게 나올 것 아니야.”
“됐고, 무조건 세 달이야.”
“하……. 문성하.”
최재율이 이를 갈았다. 문성하는 뻔뻔할 정도의 무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글거리던 최재율의 눈이 점점 식었다. 체념하듯 고개를 숙인 그가 최후의 협상을 시도했다.
“두 달로 하자.”
“콜.”
문성하가 가뿐히 등을 보였다. 그 짧은 새 짐 대부분이 안에 들어가 있었다. 왔다 갔다 하던 안재림이 웬만한 건 다 옮긴 모양이었다. 딱 봐도 가벼워 보이는 짐을 끌어안은 문성하의 곁으로 안재림이 다가왔다. 들고 있는 짐의 크기를 눈으로 가늠하더니 선심 쓰듯 말했다. 그건 대표님이 옮기셔도 돼요. 문성하가 허, 소리를 냈다. 참으로 고맙다, 야.
“그나저나 너 안 대표 집에는 얼마나 빌붙어 있으려고.”
방으로 들어온 문성하에게 최재율이 다른 걸 물었다. 짐을 내려 둔 문성하가 대꾸했다.
“뭐……. 새 거처 구할 때까지.”
“넓지도 않은 집에서 남자 둘이 어떻게 지내. 그냥 우리 집으로 오라니까.”
“형이 나한테 무슨 수작질을 할 줄 알고.”
“야, 다 지나간 일을. 그러면 안재림 대표는 뭐…….”
따져 대던 최재율이 멈칫했다. 거실에서 짐을 챙기는 안재림을 살피다, 심각한 낯빛을 드리웠다. 갑자기 침실 입구로 간 그가 둘만 남은 방의 문을 철컥 잠갔다. 문성하가 신경질을 냈다.
“아, 진짜! 문은 왜 잠그고 지랄…….”
“설마. 아니지? 너.”
난색이 형형한 어투였다. 문성하가 어이없어했다.
“뭐가 아니라는 거야?”
“너 정말로 쟤랑……. 하, 진짜. 너 생각 잘해라. 성인 된 지 1년도 안 된 애야. 미성년자하고 뭐가 달라?”
“그 얘기가 왜 나오는데?”
문성하가 언성을 높였다. 도통 최재율의 의중이 읽히지 않으니 짜증부터 나왔다. 최재율이 벙한 표정을 지었다. 바닥을 지르밟은 그가 허리를 젖히며 끙, 소리를 냈다. 곧 재차 문성하를 보며 몰아붙였다.
“누가 먼저 덤볐어. 저 새끼야?”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그저 피곤하다는 양 짐을 헤적거리던 문성하가 주춤했다. 미심쩍게 돌아간 시선이 최재율에 걸렸다. 헛헛한 외침이 터졌다.
“최재율. 너 미쳤어? 내가 정신 나갔다고 미성년자 갓 벗어난 애랑……!”
“너라면 이상할 것도 없지. 얼굴, 몸 반반하면 원체 안 가리잖아. 저 새끼 자세히 보니 전형적인 네 타입이야. 얼굴 곱상하지, 허우대 좋지.”
“되도 않는 얘기하지 마. 남자라면 지긋지긋해, 이제.”
“그럼 대체 왜 저 새끼하고 못 붙어 먹어 안달인 건데?”
문득 방문이 똑똑, 두드려졌다. 대표님. 무슨 일 있으세요? 안재림의 질문이 들렸다. 부리나케 걸어간 문성하가 최재율의 어깨를 밀쳤다. 곧이곧대로 밀려 준 최재율이 삐딱한 눈길을 건넸다. 째려본 문성하가 경고했다.
“쟤 가지고 다시는 그딴 얘기하지 마. 진짜로 그런 이유가 아니니까.”
***
“최 대표님하고 문 대표님, 꽤 오래된 사이시죠? 티격태격하는 것 같으면서도 잘 지내는 것 보면 유대가 굉장히 깊은 것 같아요.”
부엌 쪽에서 고소한 냄새가 났다. 프라이팬 안의 음식물을 뒤적이는 소리가 잇따랐다. 거실 TV장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던 문성하가 조금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하기야, 그렇다면 그런 사이다. 알고 지낸 지 15년이 넘은 데다가 문성하의 역사를 가장 일목요연하게 파악한 인물이다. 어린 시절에는 몸도 섞었다. 설명하기 복잡하지만 결코 얕은 인연이 아니다.
좀 구질구질해서 문제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대표님만큼 나이를 먹으면, 제게도 그렇게 지내는 사람이 생기겠죠.”
“너 친한 사람 많잖아. 같이 일하는 직원하고 엄청 잘 지내더만.”
“오래된 관계는 아니니까요. 전부 스푼G 창업하고 만난 멤버들이라, 인연이 길어 봐야 1년 정도예요. 그 멤버들 제외하면 딱히 친한 사람이 없고요.”
프라이팬 속 볶음밥을 뒤집은 안재림이 뇌까렸다. 문성하는 잠자코 생각했다. 하긴, 중학교는 중퇴했고 직후 들어간 가출 팸에서는 겉돌기만 했다. 이후 만난 분식 장수 형은 자살을 했으니. 안재림에게는 1년 이상 된 인연이 없는 셈이다.
무심코 흘러가던 눈길이 TV장에 올라온 한 액자에 머물렀다. 교복을 입은 안재림과 40대 남성의 사진이다. 중학교 입학식으로 보였다. 살펴보던 문성하의 눈이 깜빡였다. 단숨에 이목을 잡아끄는 점이 있었다.
이 남자도 왼쪽 눈꼬리 밑에 보조개가 있다.
“아버지지? 이 분.”
액자를 건드린 문성하가 물었다. 돌아본 안재림이 답했다.
“아……. 네.”
“지금은 어떻게 지내셔?”
“돌아가셨어요. 2년 전에.”
안재림이 담담하게 프라이팬 옆 냄비 뚜껑을 열었다. 팔팔 끓는 국을 한 스푼 떠 맛보고는, 안에다 소금을 치며 말했다.
“유품이라 하긴 뭐하지만, 그 액자가 아버지가 남긴 전부예요. 도박 빚에 시달리며 이 지역 저 지역 전전하다 모텔에서 자살했다 하더라고요.”
“안타까운 일이네.”
“전 별생각 없어요. 아버지와는 좋았던 기억이 없어서요.”
재차 국의 간을 본 안재림이 불을 줄였다. 고소한 소고기뭇국 냄새가 풍겼다. 프라이팬 불을 끄고, 볶음밥을 접시에 담기 시작한 안재림이 덧붙였다.
“물론 씁쓸하긴 해요. 이제 제가 가족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게 된 거니까.”
“가족이란 것도 다 말뿐이야. 살다 보면 가족보다 훨씬 더 가족 같은 사람을 만나기도 해.”
문성하가 조언했다. 두 개의 접시에 볶음밥을 나눠 담고 난 안재림이 빤히 문성하를 봤다. 문성하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나지막한 질문이 다가왔다.
“대표님은 만나셨어요? 그래서.”
눈길이 가만히 깔렸다. 반질반질한 마루가 보였다. 반사되는 빛을 무의미하게 매만진 문성하가 읊조렸다.
“모르겠네. 그건.”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못 하겠다.
만났다 헤어졌으니.
“실은 저 형이 있었대요.”
식탁으로 온 안재림이 두 개의 접시를 위에 올렸다. 몸을 일으킨 문성하가 물었다.
“친형?”
“완전히 친형은 아니고……. 아버지는 같은데 어머니가 다른 형제 있잖아요.”
“이복형제?”
“네, 이복형제. 저에게 이복형제가 있었대요.”
“아버지가 그래?”
“네. 제가 태어나기 한참 전에 아버지가 어떤 여자와 낳은 아들이 있었다고. 그런데 워낙 어릴 때 들은 얘기라 이해도 안 됐고 아버지도 딱히 중요치 않다는 식으로 말해서 그러려니 하고 잊었어요. 실제로 한동안 기억도 못 했어요. 별개로 그게 제 안에서는 상당한 무의식으로 남았던 모양이에요.”
다시 가스레인지로 간 안재림이 이번에는 소고기뭇국 냄비를 껐다. 문성하는 식탁 의자에 앉으며 그를 올려다봤다.
“저도 모르게 제 형을 찾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번에 대표님께 실수를 한 것도 같고.”
뚜껑 열린 냄비에서 하얀 김이 훅 치솟았다. 두 개의 그릇을 꺼낸 안재림이 맑은국을 차례로 떠 담았다. 말없이 보던 문성하의 목이 풀려 갔다. 양손에 그릇을 들고 다가오는 안재림을 관찰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해 줄까? 네 형.”
막 테이블에 그릇을 둔 안재림이 화들짝했다. 흔들린 테이블에 넘친 국물이 튀었다. 문성하는 구석의 냅킨을 집어 테이블을 닦았다. 떨리는 눈동자를 가다듬은 안재림이 맞은편에 앉았다. 문성하는 축축해진 냅킨을 동그랗게 뭉쳤다.
“너만 괜찮다면, 형이라 불러.”
“하지만 대표님께서 그 호칭으로 불리는 데 개인적 어려움이 있으시다고…….”
“이제 괜찮아.”
문성하의 입매에 엷은 호가 걸렸다. 안재림이 영문 모르는 눈을 끔뻑였다. 문성하의 어조가 나른해졌다.
“다 끝났거든. 끝나서 사라져 버렸어.”
문성하의 손이 테이블 위의 핸드폰을 짚었다. 새 기종으로 바꾼 핸드폰의 바탕 화면은 자신이 빌라 앞 화단에 심어 둔 대추나무의 사진이었다. 짐을 정리하고 나오며 찍었다. 처음 심은 5여 년 전 작은 묘목에 불과하던 것이 나올 때에는 제법 장대한 나무가 돼 있었다. 그 기록을 단 한 장의 사진에 담으며 문성하는 생각했다.
5년 전 여기서 담배를 피우던 청년은 이것의 주인이 결국 떠날 걸 알았을까.
***
“현주원 사임했네.”
“현주원?”
“DF 3세. 그 라인 서열상 5, 6번째쯤 되려나. 일단 현태성하고 현아람이 넘버 1, 2고. 다음이 둘째 회장 아들들이니.”
“왜 갑자기? DF화학 잘 굴러가고 있었잖아.”
“현 회장을 대노케 한 뭔가가 있었나 보지. 최근 DF그룹 차원에서 현주원 가지고 부정적인 언론 플레이를 엄청나게 하더라고. 가족끼리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끌끌거린 남자가 편의점 야외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켰다. 덩달아 일어선 또 다른 남자가 손목시계를 봤다. 슬슬 야근 시작이네, 담배나 한 대씩 하고 가자. 주억거린 상대방이 출발하자는 손짓을 했다. 방금 전의 가십은 금세 잊었다는 것처럼 정장 차림의 두 남자가 사라져 갔다.
“이것 좀 드시겠어요?”
편의점 문틈으로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얼굴을 내밀었다. 손에 콘 모양 아이스크림이 들려 있었다. 야외 의자에 앉아 왼 다리를 마사지하던 문성하가 고개를 들었다.
“이건 왜…….”
“1+1이거든요. 제가 먹고 싶어서 샀는데, 하나 남아서.”
“그래요. 고마워요.”
문성하가 선뜻 손을 펼쳤다. 아르바이트생이 아이스크림을 쥐여 줬다. 자연스럽게 옆에 앉으며 제 것을 뜯은 그녀가 물었다.
“매일 이 시간에 운동하시나 봐요.”
“운동까지는 아니고……. 그냥 산책합니다.”
“이쪽에서요? 어떤 코스인지 여쭤봐도 돼요?”
“이 앞 주택가에서 출발해 양재천 돌고, 다시 여기로 돌아오는 거예요.”
“꽤 걸리겠는데요.”
“2시간 정도 걸려요. 할 만해요.”
문성하가 아이스크림의 포장을 뜯으며 읊조렸다. 곧 가장 윗부분에 붙어 있는 초코 토핑을 깨물었다. 말없이 먹는 내내 옆얼굴을 힐끔대는 눈길이 느껴졌지만, 모른 척했다. 2시간을 쉬지 않고 걸으니 조금 피곤했다.
“스푼G 사장님하고 형제인가요?”
큰맘 먹고 건넨 듯한 질문이 다가왔다. 곁눈질을 한 문성하가 반문했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그냥, 뭐……. 같이 사시고, 같이 저 앞 가게에서 일하시고.”
“그렇다고 다 형제는 아니죠.”
“그리고, 좀 닮은 것 같아서요.”
아르바이트생이 아물거렸다. 문성하의 입 안에서 달콤한 고체가 녹아 갔다. 느릿느릿 물이 된 그것을 꿀꺽하고는, 예사롭게 말했다.
“형제처럼 지내는 사이입니다. 진짜 형제는 아니고.”
아르바이트생의 고개가 아래위로 길게 움직였다. 고심하듯 눈을 굴리다, 벌떡 일어나 뒷걸음질을 쳤다. 또 뵈어요. 인사한 그녀가 가게 안으로 사라졌다. 문성하는 가벼운 손 인사를 했다.
얼마 안 있어 조금 열린 유리문 틈으로 누군가와 통화하는 아르바이트생 소리가 들렸다. 아, 언니! 형제 아니래. 난 그런 줄 알았지……. 에이, 엄청 닮았는데. 만 원 빵이었지? 이따 교대할 때 줄게. 근데 아깝다! 그냥 형제 하지, 둘 다 잘생겼는데. 소녀처럼 깔깔거리는 아르바이트생을 보며 문성하는 마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어린 학생들은 별걸 다 재미있어하는구나 싶은 생각을 했다.
***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냉장고 앞으로 직행했다. 문에 붙은 페이퍼를 살폈다. 청소 당번, 설거지 당번, 식사 당번……. 이 집에 거주한 첫날 문성하가 만든 당번표였다. 집안일은 무조건 자신이 하겠다는 안재림을 말려 가며 작성했다.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하면 된다 설명하자, 시무룩해하던 안재림이 물었다.
-보통의 형제는 이렇게 하나요?
문성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도.
안재림의 표정이 풀렸다. 답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다음날부터의 일상은 놀라울 정도로 단조롭고 평이했다. 문성하가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까맣게 잊을 정도로 순탄한 하루하루였다. 소행성과 충돌한 지구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 끝에 태초로 돌아가 자그마한 식물이 싹을 틔우고, 인류의 조상이 나타나 진화를 거듭하다 본연의 모습을 되찾은 것처럼. 문성하는 일상을 회복했다.
매일 업무 시간에 맞춰 집이나 카페, 그도 아니면 스푼G의 작은 사무실에 노트북을 놓고 앉았다. 기존의 투자를 분석하고 신규 투자 후보를 물색한 뒤 최재율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최재율은 자신의 의견과 최근의 미팅 결과를 붙여 답장을 보냈다. 초반에는 크고 작은 불통이 있었으나 곧 익숙해졌다. 그들은 쉽게 ‘따로 또 같이’ 근무에 적응했다. 회사는 잘 돌아갔다.
시간이 남으면 틈틈이 스푼G 매장을 둘러봤다. 고객층에 특별한 변화는 없는지, 직원들의 응대는 적절하며 고객 반응은 꾸준하게 준수한지 등을 눈으로 확인했다. 문제점을 발견하면 그날 저녁 페이퍼로 정리해 안재림에게 줬다. 안재림은 다음날 바로 시정했다.
업무가 끝나는 6시 무렵에는 산책에 나섰다. 재활 센터를 나가지 않는 대신 나름의 방식으로 다리를 혹사시켰다. 약 2시간 동안 정해진 코스를 걸어 다녔다. 쉬지 않고 걷는 게 처음에는 버거웠으나, 언젠가부터는 할 만해졌다. 일주일 넘게 반복하고 나니 재활 센터에는 굳이 다닐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보름이 흘렀고, 주혜성이 예고한 출국 시점이 다가왔다. 이상할 정도로 언론에서는 관련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들어올 때 호들갑을 떨었으면 나갈 때도 호들갑을 떨어야 하는데, 그런 뉴스가 전무하다. 문성하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굳이 알아보려 애쓰지 않았다. 주헤성에게 자신을 추적할 자격이 없듯, 자신에게도 주혜성을 궁금해할 자격이 없었다.
“형. 촬영 팀 잘 왔다 갔어요.”
안재림은 오후 9시를 넘겨 귀가했다. 낯이 잔뜩 상기돼 있었다. 저녁 준비를 하던 문성하가 돌아봤다. 식탁에 앉은 안재림이 처음 놀이동산에 다녀온 어린아이처럼 설명했다.
“생각보다 촬영 인원이 많았어요. 사람들이 드라마 찍는 줄 알고 엄청 구경하더라고요. 신기했어요.”
“영상은 잘 찍혔고?”
“모르겠어요. PD가 결과물이 잘 나올 것 같다 하긴 했는데.”
“역시 내가 갔어야 했나.”
“아니에요. 형이 왔으면 긴장해서 제대로 못 했을 거예요.”
안재림이 실실거렸다. 문성하는 소불고기 볶음을 담은 접시를 들고 다가갔다. 식탁 중앙에 내려놓고, 안재림을 보며 미소 지었다.
“고생했네.”
“형 덕분이죠. 형이 사전에 PD하고 얘기해 방향 확실히 잡아 줬다면서요. PD도 형이 짜 준 스토리 덕분에 편하게 제작했다 했어요.”
“뭐 어려운가. 애초에 네가 워낙 열심히 살았으니 가능했던 거지.”
“방송은 다음 달에 나갈 것 같아요. 그리고 또…….”
“일단 밥부터 먹자.”
문성하가 갓 채운 밥그릇을 안재림의 앞에 놓아 줬다. 장난스럽게 바람을 불어 김을 흐트러뜨린 안재림이 소불고기를 집어 그릇 위에 올렸다. 밥과 함께 떠 입에 넣고는, 우물거리다 말했다.
“엄청 맛있어요.”
“요식업체 대표에게 칭찬받아 봐야 기분 좋을 것 없어. 어차피 빈말일 테니까.”
“진심인데.”
안재림이 재차 소불고기를 한가득 집어 그릇에 쑤셔 넣었다. 꽤 배가 고팠는지, 허겁지겁 먹다 문득 거실에 틀어 둔 TV를 보고 휘둥그레졌다. 그릇과 젓가락을 든 그가 후다닥 TV 앞으로 갔다. 문성하가 꾸짖었다.
“재림아. TV 앞에서 먹고 그러는 거…….”
찌푸린 채 TV를 일별한 문성하가 굳었다. 화면에 나오는 인물이 너무나도 눈에 익었다.
“주혜성 대표는 또 회사를 사나 봐요. 그런데 아주 엄청난 회사인가 봐.”
밥 먹는 것도 잊은 안재림이 감탄했다. 식탁에서 일어난 문성하가 안재림의 곁으로 갔다. 화면 하단에 하얀 헤드라인이 띄워져 있었다.
「NGX, 아시아 1위 안면 인식 기업 페타이 인수…… 기업 가치 20조」
[페타이는 대만을 대표하는 벤처 기업이자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매출을 내는 안면 인식 전문 기업입니다. 정부 주도 성장 기업인만큼 이번 매각 건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큽니다. 주혜성 NGX 대표는 대만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국내에 머물며 구체적인 계약 조율을 마무리 짓겠다는 방침입니다. 일명 ‘페타이 딜’에 따라 벤처업계는 주 대표의 국내 체류가 보다 장기화될 것으로 전망…….]
“그래서 안 나갔구나.”
작은 혼잣말이 나왔다. 기자가 사라진 화면에 최신 영상으로 보이는 회의 장면이 송출됐다. 페타이 대표와 주혜성이 각자의 계약서에 서명을 마친 후 악수를 하고 있었다. 화면 속 모습이 너무나도 평온했다. 누가 봐도 안정적이며 무탈한 일상을 보내는 대기업 CEO였다. 정말로, 아무 일도 겪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재림아.”
뉴스에 몰입해 있는 안재림의 어깨를 잡았다. 안재림이 넌지시 이쪽을 봤다. 주혜성의 열렬한 팬인 그는 다른 뉴스는 몰라도 주혜성이 나오는 건 꼭 챙겨 봤다. 문성하는 안재림의 턱에 묻은 밥풀을 떼어 주며 말했다.
“혹시라도 누가 형 거처 물어보면, 절대 답해 주지 마.”
“왜요?”
“그냥. 이상한 사람이 꼬일지도 모르잖아.”
“알았어요. 그럴게요.”
주억거린 안재림이 잠시 망설였다. 초조한 질문이 찾아들었다.
“혹시 형 괴롭히는 사람 있는 것 아니죠?”
문성하가 헛헛하게 비식거렸다. 노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없지만, 혹시 모르니까.”
퍽이나 평화로워 보이는 화면 속 주혜성이 자신을 찾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혹시나 싶어서.
‘혹시나’가 습관이라서.
“그런데 형. NGX는 무슨 일이 있나 봐요.”
다시 화면을 본 안재림이 뇌까렸다. 문성하가 질문했다.
“왜?”
“넥타이를 안 맸어요. 임원진 전부. 원래는 항상 매거든요. 파란색에 로고 들어간 거.”
안재림이 화면을 가리켰다. 문성하의 눈이 천천히 굴러갔다. 클로즈업된 주혜성을 사뭇 면밀하게 살폈다. 화면은 계약을 마치고 나온 직후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질의응답을 하는 그를 내보내고 있었다. 말을 할 때마다 불끈대는 울대뼈 밑이 정말로 허전했다. 당연히 있어야 할 넥타이가 없다.
“질렸나 보지, 뭐.”
영혼 없는 웅얼거림이 나왔다. 안재림은 곰곰이 화면을 주시했다. 자신이 아는 주혜성으로부터 조금이나마 다른 점을 발견한 게 신기했던 모양이다.
[사소한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오늘 임원진 전원이 노타이(no-tie)로 참석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본사 복장 방침이 바뀌기라도 했는지요?]
돌연 한 기자가 물었다. 별것 아닌 질문이지만, 가십거리 삼기엔 좋은 것이라 그런지 주변 기자들이 일제히 귀를 모았다. 묵묵하게 기자를 본 주혜성이 입을 뗐다.
[원치 않는 분이 있어 그렇게 됐습니다.]
지극히 정중하며 예의 바른 답변이었다. 기자단이 일순 고요해졌다. 설렁해진 인파 속에서 또 다른 기자가 질문했다.
[혹시 이사회 방침입니까.]
고개를 저은 주혜성이 희미하게 웃었다. 부드러운 한 마디가 화면을 뚫고 귀를 간지럽혀 왔다.
[보다 높은 분입니다.]
말을 마친 그가 발을 옮겼다. 가드와 임원진이 기자단을 가로막으며 주혜성을 보좌했다. 카메라 화면이 전환됐다. 다시 등장한 스튜디오 아나운서가 새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보다 높은 분이 누굴까요?”
안재림이 꺄웃거렸다. 침묵을 지키던 문성하가 들릴 듯 말 듯 말했다.
“글쎄. 잘 모르겠네.”
어물거린 입이 다물렸다. 입 안에 고인 침이 죽어 가는 샘의 마지막 방울처럼 목을 타고 미끄러졌다. 먹먹한 목구멍이 한참 후에야 조금조금 틔워졌다. 체내 깊숙한 기억으로부터 밀려든 숨에서 익숙한 향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나무 향.
***
[잠깐이면 된다니까? 얼굴만 비추고 가. 사람들이 널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데.]
핸드폰 너머로 몰아붙이는 음성이 들려왔다. 문성하는 심드렁하게 카운터에서 건네 오는 테이크아웃 잔을 받았다. 아르바이트생이 물었다.
“포인트 적립해 드릴까요?”
문성하가 유리문 너머를 가리켰다.
“이 건너편에 있는 ‘스푼G’ 이름으로 해 주세요.”
포스기를 두드린 아르바이트생이 답했다. 네, 해 드렸습니다.
“누구누구 오는데.”
카페 문을 열고 나서며 물었다. 늦은 오후의 선선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지럽혀 왔다. 최재율이 대꾸했다.
[고철영 사장이 항상 모으는 멤버 있잖아. 개인 투자하는 큰손들.]
“거기 양아치 같은 사람 많아서 별로인데.”
[그 양아치 중 30%가 우리 고객이지.]
최재율이 목소리를 깔았다. 부정하지 않은 문성하가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가볍게 들이켜자, 뜨끈한 찻물이 혀를 적셔 왔다.
“난 별로야. 형 혼자 가.”
[그런 문제가 아니야. 사람들이 난리야. 요즘 문성하 대표는 뭘 하기에 코빼기도 안 비치냐고 계속 물어봐. 고객 관리 차원에서 이런 자리 났을 때 한번 가 주면 좋잖아.]
“정확히 누구야. 누가 그렇게 날 사랑하는데?”
문성하가 역정을 냈다. 갑자기 핸드폰이 조용했다. 조금 난처해하는 듯한 숨소리를 들으며 문성하는 입 안의 찻물을 굴렸다. 그새 조금 식어 있었다.
본래 살던 집과 사무실을 떠나 안재림의 집에 숨어든 지 한 달이 됐다. 처음엔 답답할까 걱정했지만, 상상 이상으로 안락한 환경에 쉽게 적응해 버렸다. 업무에도 지장이 없고, 심심할 때마다 안재림이 훌륭한 대화 상대가 되어 주니 부족할 게 없었다.
결국 도피라는 걸 알고 있지만, 문성하는 지금에 만족했다.
[실은 고철영 사장이 널 찾아. 데스원 운영하는.]
한참이나 뜸을 들인 최재율이 말했다. 문성하의 눈살이 옴씰거렸다. 흘러간 눈길이 드문드문 행인으로 채워진 강남 거리에 걸렸다. 불퉁한 대꾸가 튀어나왔다.
“고철영이 왜.”
[그 인간 예전부터 너 엄청나게 예뻐했잖아. 연락도 제대로 안 되고, 얼굴도 안 보이니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나 보지.]
“어차피 한 달 후면 복귀할 텐데, 굳이 오늘 저녁에 봐야 해?”
[난들 알아? 본인이 보고 싶다고 그 난리인데. 오늘 저녁 자리도 사실 너 때문에 만들어진 거야.]
한숨 쉰 최재율이 덧붙였다.
[고철영이 너 보겠다고 이 모임 메이드 했어. 데스원 VIP룸 비워 갖고.]
젠장. 문성하의 입 안으로 욕설이 삼켜졌다. 가늘어진 눈이 저편의 불 꺼진 네온사인을 담았다. ‘Death 1.’ 강남에서 가장 큰 클럽 겸 라운지 바. 조폭 출신 사업가 고철영의 대표 사업장이다. 고철영이 최대 주주로 있는 가운데 청신투자 등의 투자 회사 및 개인 투자자가 일부 지분을 나눠 보유했다.
고철영은 종종 주주들을 모아 데스원 VIP룸에서 모임을 열었다. ‘존경하는 주주님을 위한 자리’라는 명분을 붙이긴 했지만, 스무 명에 가까운 사람을 불러 놓고 황제 놀음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중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고철영은 자신보다 더 나은 출신에, 더 배운 사람 위에서 군림하는 걸 즐겼다.
그런 의미에서 청신투자의 두 대표는 고철영의 관심을 톡톡히 얻고 있었다. 둘 다 내로라하는 벤처 캐피털의 심사역 출신이라는 게 컸다. 고철영은 벤처업계에 대해 전혀 몰랐지만, 두 사람을 앉혀 놓고 어디서 주워들은 업계 얘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걸 좋아했다. 못 배운 것에 대한 콤플렉스를 타인을 통해 해소하고 있었다.
그리고 둘 중에서도, 문성하를 특별히 아꼈다.
“싫어. 또 무식한 얘기나 주저리주저리 할 텐데. 피곤해.”
[고 사장 알면서 왜 이래? 예전부터 너라면 죽고 못 사는 거…….]
쏘아 대는 소리를 대충 흘리며 얼굴을 들었다. 저편에서 정차하는 외제 세단이 보였다. 앞 좌석에서 남자 두 명이 일사불란하게 튀어나왔다. 뒷좌석 문을 열어 주고는, 밖으로 나오는 정장 차림의 중년 남자를 향해 구십도 각도로 몸을 굽혔다. 문성하의 눈매가 찌뿌듯해졌다. 양반은 못 되는구나 싶었다.
“끊어. 고 사장 만났어. 내가 직접 얘기할게.”
기탄없이 통화 종료 아이콘을 눌렀다. 이내 서벅서벅 세단 앞으로 걸어가 목례를 했다. 막 몸을 튼 고철영의 면상이 환해졌다. 껄껄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야, 문 대표. 안 그래도 방금 문 대표 생각하던 참인데. 여기서 이렇게 만나네.”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항상 잘 지내지. 아, 오늘 저녁에는 몇 시쯤 올 거야? 내가 문 대표 좋아하는 돔으로다가 쫙 깔아 놓을 거야. 문 대표 그거 좋아하잖아.”
“저 오늘 어렵습니다. 사장님.”
문성하가 정중히 거절했다. 고철영의 얼굴 근육이 일순 미동했다. 올라온 손이 문성하의 어깨를 잡았다. 으름장을 놓듯 주물럭거린 그가 몸을 낮췄다. 은근한 질문이 찾아들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일이 있다기보다는, 여러 사람 모아 놓고 술 마시는 자리가 개인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서운하네. 나는 문 대표 생각해 오늘 자리 마련한 건데.”
고철영이 문성하의 등을 짚었다. 등줄기를 타고 미끄러진 손이 허리를 감아 왔다. 문성하의 눈살이 탐탁지 않게 접혔다. 사뭇 딱딱한 언어가 흘러나왔다.
“사장님. 저는 안 되는 건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 얘기가 갑자기 왜 나오지. 내가 불편하게 했나? 문 대표.”
“조금 그렇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답변에 고철영의 낯이 일그러졌다. 허리를 두른 손아귀에 한껏 힘이 실렸다. 문성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를 봤다. 고철영의 입매가 과장될 정도로 길어졌다.
“문 대표. 방금 그건 예의가 아니라고 봐.”
“예의요? 진작 예의가 없었던 건 사장님이십니다.”
등 뒤로 넘어간 손이 고철영의 손목을 쥐었다. 흉터 그득한 팔뚝을 억지로 끌어 내리고는, 최대한 멀찍이 밀어 냈다. 고철영의 주변을 지키던 남자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문성하를 머금은 고철영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내가 문 대표에게 뭐 실수한 게 있나.”
“없다 할 수 없죠.”
문성하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날연한 언어가 이어졌다.
“사장님께서 뭔가 착각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사장님 소유물에 투자를 해 이익을 얻고 있다 해서, 사장님께서 아무렇지 않게 저를 추행하거나 애인 취급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내가 문 대표에게 언제 그랬어. 어?”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일을 두고 모른 척하는 건 양아치나 하는 짓거리입니다. 사장님, 그런 분 아니시잖습니까.”
문성하가 예의 바르게 종용했다. 고철영의 정수리가 뜰썩거렸다. 문성하는 태연히 그의 팔뚝을 두드렸다. 이내 그대로 지나쳐 가며 조곤조곤 경고했다.
“이 업계 소문 무섭습니다. 사장님 오피스가 조폭 회사로 취급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시다면, 항시 행동 조심하십시오.”
문성하가 성큼 발을 내뻗었다. 등 뒤로 씨근덕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형님, 잡아 올까요? 남자들의 질문에 고철영이 부들거리며 답했다. 됐어, 내버려 둬. 문성하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진작 이렇게 할 걸 싶었다. 마음의 여유가 생겨 비로소 할 수 있었던 일이다.
한 블록을 지나 다음 골목에 진입했다. 눈에 익은 간판이 나타났다. 스푼G. 앞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번쩍거리는 외제 세단이 있었다. 고철영이 그새 여기로 왔나, 싶었다가 곧 긴장을 풀었다. 가까이서 보니 완전히 다른 차다. 이쪽이 훨씬 더 고가의 모델이었다.
“형! 왔어요?”
매장 안에 들어서는 문성하를 보며 안재림이 반색했다. 오픈 초기에 비해 질서정연해진 홀을 가로지르며 안쪽 사무실을 향했다. 약간 비뚠 문의 손잡이를 잡고, 카운터를 정리하는 안재림에게 말했다.
“안에 있을게. 신경 쓰지 말고 일해.”
끄덕인 안재림이 물었다.
“업무 하실 거죠? 형.”
“어. 오전에 노트북 갖다 뒀잖아.”
“먹을 것 드릴까요? 직원들 간식하려고 만든 튀김 있는데.”
“괜찮아. 시원한 음료수 있으면 그거나 줘.”
“알겠어요.”
대화를 마치고 사무실 안에 발을 들였다. 잘 닫히지 않는 문을 대충 구겨 놓고, 비좁은 자리에 착석했다. 노트북을 열다 문을 힐끗했다. 얼마 전 물건을 나르다 부딪친 여파로 형태가 일그러졌다. 덕분에 아무리 용을 써도 꽉 다물리지 않는다. 일을 하다 무심코 얼굴을 들면, 벌어진 틈으로 드러난 홀 풍경과 고스란히 마주 보기 일쑤였다.
“문 수리비가 얼마더라.”
혼잣말을 하며 인터넷 창을 열었다.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문 수리비’를 치고 뜨는 정보들을 살폈다. 대략 70에서 100……. 보이는 숫자들을 읊조리던 문성하의 귓바퀴가 굼틀거렸다. 바깥쪽에서 커다랗게 술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 있나 싶어 몸을 일으킨 문성하가 귓가에 경악에 찬 직원 목소리가 스쳤다.
“주혜성이 여기를 왜 와?”
걸음이 절로 밀려 났다. 쓰러지듯 의자에 착석하고는, 떨리는 눈으로 문틈을 주시했다. 못지않게 얼어붙은 채 입구를 보는 안재림이 비쳤다. 천천히 다가온 두 개의 그림자가 그의 앞에서 멈췄다. 그중 하나가 안재림에게 악수를 청했다. 제임스 임이었다.
“처음 인사드리겠습니다. NGX COO 제임스 임입니다. 우리 CEO가 이쪽 식당에서 식사를 해 보고 싶다 해 찾아오게 됐습니다. 가능할까요?”
“네…… 네. 가능합니다.”
사색이 된 안재림이 눈에 띄게 허둥거렸다. 마침 비어 있는 4인 좌석 쪽을 가리키고는, 서둘러 안내했다.
“이쪽에 앉으십시오. 식사는 제가 직접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가 주방으로 뛰어갔다. 그사이 제임스 임이 자리에 앉았다. 그 옆에 착석한 남자가 길게 다리를 늘어뜨렸다. 문성하의 속눈썹이 곤두섰다.
정말로 주혜성이다.
옆에서 제임스 임이 뭐라 말하는 게 보였지만, 주혜성은 듣는 둥 마는 둥 턱만 괴었다. 심상한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순간 눈이 마주친 기분에 문성하는 잽싸게 몸을 숨겼다. 저쪽에서 여기가 보이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혹시나 싶어서. 진땀이 났다.
“민아야, 우리 형한테 음료수 갖다 줘. 나 요리해야 하니까.”
주방 쪽에서 지시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갯짓을 한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음료 기기 쪽으로 갔다. 듣고만 있던 주혜성이 얼굴을 들었다. 부드러운 한 마디가 건네졌다.
“형이 있으시군요.”
주방에서 튀어나온 안재림이 주혜성의 앞에 섰다. 간단한 질문이라도 멀리서 대답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상대가 늘 동경하던 주혜성이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네. 있습니다.”
“친형?”
“저는 친형이라 생각…….”
머뭇거린 안재림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가다듬은 한 마디가 홀을 울렸다.
“친형 그 이상입니다.”
주혜성의 입매에 의미심장한 호가 걸렸다. 두어 번 주억거린 그가 도로 턱을 괴었다. 나직한 혼잣말이 문성하의 귀에 내려앉았다.
“그리 듣기 좋은 말은 아니네요.”
안재림의 눈이 깜빡였다. 자신이 뭔가 실수했나 싶었는지, 어찌할 바 모르고 입을 달싹였다. 바라본 주혜성이 눈웃음을 쳤다.
“다른 얘기 한 겁니다. 그냥 흘리세요.”
아, 한 안재림이 그제야 주방으로 돌아갔다. 테이블에 올라온 주혜성의 손이 까딱거렸다. 제임스 임이 물끄러미 그의 옆얼굴을 봤다. 아까처럼 말은 걸지는 않았다.
똑똑. 사무실 문이 두드려졌다. 문 대표님. 열린 문틈으로 아르바이트생이 빠끔히 얼굴을 들이밀었다. 한 손에 사이다가 담긴 컵을 들고 있었다. 놀라 일어난 문성하가 달려갔다. 문에다 찰싹 등을 붙인 채, 손만 내밀어 컵을 받았다.
“바깥에 별일 없죠?”
문성하가 속삭였다. 아르바이트생이 얼떨떨하게 끄덕였다.
“네.”
“음료 잘 마실게요. 고생해요.”
“네. 고생하세요.”
아르바이트생이 물러났다. 문성하는 문을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그럼에도 완전히 닫히지가 않았다. 석연치 않은 눈동자를 끌어 올려 문틈을 응시했다. 생각에 잠겨 테이블을 내려다보는 주혜성이 너무나도 잘 보였다.
“대표 메뉴들로 가져왔습니다. 입에 맞으시면 좋겠네요.”
주방에서 나온 안재림이 두 개의 접시를 들고 테이블로 왔다. 제임스 임이 과장된 손짓을 했다.
“엄청나게 맛있어 보이는데요. 항상 직접 만드시나 봐요?”
“주방장이 따로 있습니다. 주 대표님이 오셨기에 제가 직접 한 겁니다.”
접시를 내려 둔 안재림이 또박또박 말했다.
“팬입니다. 예전부터.”
숙여져 있던 주혜성의 고개가 들렸다. 화색이 만연한 안재림을 살피다, 심상한 제안을 건넸다.
“시간 괜찮으면 잠시 앉아요.”
안재림이 바로 맞은편에 착석했다. 그사이 제임스 임은 새빨간 떡볶이 하나를 맛보고 있었다. 우물거리며 씹던 그가 황급히 물컵을 집었다. 벌컥거리는 그를 보며 안재림이 걱정했다.
“괜찮으세요?”
한 컵을 전부 비운 제임스 임이 쿨럭거렸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 있었다.
“엄청 맵네요.”
“맵다고요?”
안재림이 벙한 표정을 지었다. 신경도 쓰지 않은 주혜성이 포크를 집어 들었다. 제임스 임이 건드렸던 떡볶이 접시를 뒤적이다, 하나를 찍어 입에 가져가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30년 가까이 해외에서만 산 친구입니다. 매운 조미료 들어간 국내 음식에 내성이 없어요. 라면도 제대로 못 먹거든요.”
입을 다문 주혜성이 내용물을 씹었다. 안재림은 중대한 심사 결과를 코앞에 둔 사람처럼 그를 관찰했다. 한참 후에야 꿀꺽한 주혜성이 말했다.
“분식을 잘 모르지만, 맛있다는 감상이 드네요.”
“감사합니다.”
“함께 일하는 우리 프런트 직원이 이 가게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본인이 먹은 떡볶이 중에서 가장 맛있었다며 극찬을 하더라고요. 워낙 칭찬이 자자해 궁금해서 와 봤습니다.”
“영광입니다.”
안재림의 눈이 반짝거렸다. 포크를 내려 둔 주혜성이 팔짱을 꼈다. 다소 사무적인 음성이 건네졌다.
“우리 COO 말로는 이 식당이 최근 온라인상에서 상당한 유명세를 탔다던데요.”
“좋게 봐 준 손님 몇몇이 손수 SNS에 가게 홍보 글을 올려 줬습니다. 의도한 건 아닌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습니다.”
“혹시 투자 유치에 관심 있으십니까.”
지극히 예사로운 어조이지만, 내용은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 안재림의 낯이 경직됐다. 넋이 나간 그를 힐금한 주혜성이 말을 이었다.
“뉴스를 통해 얘기 접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제 주도로 한 달 전부터 NGX코리아가 ‘K-엔젤 벤처’라는 초기 벤처 육성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가능성 높은 초기 기업을 발굴해 NGX코리아 자금으로 성장을 지원하는 내용입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확정된 기업 전부 기술 벤처입니다. NGX 자체가 기술 기업 투자를 주로 하는 회사다 보니 필연적으로 그렇게 됐습니다만, 포트폴리오 다각화 차원에서 성격이 다른 회사도 일부 포함할 예정입니다. 스푼G라는 회사를 저는 잘 모릅니다만, 임 COO의 구두 보고로만 따졌을 때 매우 좋은 선례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그러니까, 그게……. 그 말이.”
안재림이 갈피를 못 잡고 방황했다. 이 상황에서 현실감을 하나도 찾지 못한 표정이었다. 지켜보던 문성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곤두선 손톱이 문을 갉작거렸다.
대체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다.
“NGX가 스푼G에 투, 투자…….”
“네. 투자입니다.”
주혜성이 못을 박았다. 안재림의 어깨가 거세게 들썩였다. 테이블을 짚은 손이 연신 달달거렸다. 어떻게든 추슬러 보려는 듯, 제 허벅지를 쥐었다 놓은 안재림의 얼굴이 한참이나 흐른 끝에 들렸다. 그새 진땀이 났는지 이마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주혜성은 말없이 안재림을 마주 봤다.
“죄송합니다.”
작지만 또렷한 언어였다. 제임스 임이 미세하게 소스라쳤다. 주혜성의 미간에 금이 갔다. 조금씩 울대뼈에 힘을 준 안재림이 덧붙였다.
“너무도 감사한 제안이지만, 스푼G는 투자를 받은 지가 얼마 안 됐습니다. 2대 주주가 된 분은 제게 있어서나 이 회사에 있어서나 매우 귀중한 분인데, 이분께서 한동안 무리해 추가 투자를 받지 말자고 신신당부한 일이 있습니다.”
“2대 주주가요.”
“네. 그리고 저는 그 분과의 약속을 가능한 한 지키고 싶은 입장이고요.”
안재림이 숨을 골랐다. 곧 깊숙이 머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신경 써서 제안 주셨는데, 죄송합니다.”
“보통 이렇게까지 투자자와의 의리를 지키지 않는데. 대표님께 아주 큰 의미가 있는 분인가 봅니다.”
주혜성이 고저 없이 말했다. 안재림이 슬며시 미소 지었다. 부쩍 상냥한 언어가 건네졌다.
“아까 말씀드린 형입니다. 그분이.”
“친형 그 이상이라는.”
“네.”
주혜성의 입꼬리가 내려왔다. 묵묵하게 안재림을 보다가, 낮게 중얼거렸다.
“신기한 일이네요.”
“어떤 것 말씀이신지…….”
안재림이 갸우뚱했다. 웃음기를 싹 거둔 주혜성이 답했다.
“친형제가 아닌데 친형제처럼 느끼는 것 말입니다.”
“그건 저도 꽤 신기하다 생각합니다.”
안재림이 밝게 응수했다. 아주 즐거운 것이 떠오른 듯, 은은하게 덧붙였다.
“인연이라는 게 존재하는 모양입니다. 이런 것 보면.”
주혜성 쪽이 홀연히 조용해졌다. 제임스 임이 조심스레 그를 힐긋거렸다. 덩달아 눈치를 본 안재림이 아물거렸다.
“대표님. 제가 뭔가 말실수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돌연 주혜성이 운을 뗐다. 안재림이 영문도 모르고 움츠렸다. 날숨을 내쉰 주혜성이 손을 옮겼다.
“웬만하면 공과 사를 구분하는데.”
손아귀에 반쯤 채워진 물컵이 담겼다. 그대로 끌어당긴 그가 뇌까렸다.
“때때로 그게 뜻대로 안 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주혜성이 건조한 눈짓을 보냈다.
“그게 제 인연의 대가입니다.”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들고 있던 컵이 미끄러졌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난 컵의 파편이 이리저리 튀었다. 깜짝한 안재림과 제임스 임이 일어섰다. 주혜성만 일어나지 않았다.
“혜성아! 너 손…….”
경악한 제임스 임이 소리쳤다. 주혜성의 시선이 무심하게 내려갔다. 컵이 사라진 자리에서 시뻘건 핏물이 샘솟고 있었다. 안재림이 바로 주방으로 뛰어갔다. 거즈하고 약 가져와, 유리 치울 빗자루도! 쩌렁쩌렁한 외침을 들으며 문성하는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에서 오랜 기간 고였다 낙하하는 물과 같은 점성이 느껴졌다.
뭉쳐진 타액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렸다. 가슴께가 가쁘게 두근거렸다. 뭉그적거린 손이 현기증을 억누르듯 머리를 짚었다. 아까의 잔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뇌리를 흐트러뜨렸다. 한번 올라간 심박수는 쉬이 내려앉지 않았다.
컵은 주혜성의 손안에서 깨졌다. 추락한 건 그 이후다. 다른 사람은 미처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문성하는 확실하게 봤다. 왜 그런 걸 했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다. 다만 컵을 깨뜨리기 직전 주혜성이 한 말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인연의 대가.
“사장님! 거즈 없어요. 지난주에 재훈 오빠 치료할 때 다 썼나 봐요.”
여직원이 울상을 지었다. 안재림이 적잖게 당황했다. 주혜성의 팔을 잡은 제임스 임이 호들갑을 떨었다.
“야, 손수건. 너 손수건 없지? 정 비서! 혹시 손수건…….”
“됐어. 넥타이로 대충 해.”
탄식한 주혜성이 제 셔츠 칼라로 손을 가져갔다. 두어 번 더듬다, 곧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고 손을 내렸다. 테이블을 짚은 다른 손이 구석의 냅킨 통을 향했다. 대충 뺀 몇 장이 핏물을 훔쳤다. 새빨개진 냅킨을 내려 둔 주혜성이 안재림에게 사과했다.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나저나 손이……. 재훈이 형! 혹시 깨끗한 타월 같은 것 있으면.”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손을 내저은 주혜성이 몸을 틀었다. 핏물이 철철 흐르는 손을 털고는, 가슴을 부풀리며 짙은 숨을 내뱉었다. 그의 눈동자가 느릿느릿 굴러갔다.
“넥타이가 있으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이제는 없네요.”
흘러가던 시선이 서서히 멎었다. 문성하의 솜털이 쭈뼛 섰다. 가늘게 벌어진 문틈으로, 주혜성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선물했거든요. 필요한 분께.”
말을 마친 그가 발을 뻗었다. 제임스 임이 헐레벌떡 그를 쫓았다. 야, 너 진짜 괜찮아? 지금 병원 가자. 너 손이 그러면 안 돼. 내일 참석할 중요한 자리도 있는데……. 득달같이 이어지던 호통이 끊겼다. 주혜성이 말을 자른 모양이었다.
***
매장 내 소요는 한동안 이어졌다. 뉴스에 연일 등장하는 대형 투자 기업 CEO가 이 가게에 방문했다는 것, 식사를 하던 중 손을 다쳐 나갔다는 것 등을 얘기하며 직원들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충격적인 공연을 관람한 후 감상평을 공유하는 관객무리 같았다.
“신기하지 않아요? 꼭 꿈꾸는 것 같아요. 주혜성 대표가 직접 내가 만든 음식을 먹고, 투자하겠다는 말까지 하고…….”
흥분에 차 있는 안재림의 말을 그래, 그래, 하며 듣던 문성하가 문득 핸드폰을 더듬어 쥐었다. 소리 없이 진동하는 액정에 최재율의 이름이 떠 있었다. 통화 아이콘을 누른 문성하가 무성의하게 입을 열었다.
“어, 형.”
[오늘 저녁 모임 취소됐다.]
“어차피 갈 생각도 없었어.”
[나도 알아. 그냥 얘기하는 거야.]
“무슨 일인데. 고철영이 갑자기 내가 꼴도 보기 싫어졌대?”
문성하가 비아냥거렸다. 충분한 일리를 염두에 두고 한 얘기였다. 최재율은 대답 대신 긴 숨을 내뿜었다. 조금은 허탈한 대꾸가 들려왔다.
[고 사장이 탄 차가 사고를 당했어. 전치 3주래.]
문성하의 턱이 얼었다. 핸드폰 쥔 손아귀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말이 없어진 문성하와 함께 정적을 지키던 최재율이 또 말했다.
[그런데 사고 낸 차가 NGX 법인 차야. 거기 직원이 서툴게 운전하다 사고를 냈나 봐. 뭐, NGX에서 거액의 합의금을 제시해 어떻게든 될 것 같다는데……. 그건 그거고 어떻게 회사 차를 몰면서 그런 사고를 내냐. 아주 미친놈 아니야?]
최재율이 학을 뗐다. 문성하는 가만히 쥐고 있던 핸드폰을 지분거렸다. 물기 하나 없이 메마른 음성이 나왔다.
“끊자. 형.”
통화 종료 아이콘을 누르고, 핸드폰을 뒤집었다. 그 사이 안재림은 홀로 돌아가 있었다. 잠자코 넘어간 시선이 매장 내부를 훑었다. 한참 후에야 눈길이 멈춘 곳은 주혜성이 앉아 있다 간 그 자리였다. 바닥에서 미처 닦지 못한 핏방울 하나가 보였다.
눈빛이 점점 무거워졌다. 조금은 숙연해진 눈초리로 테이블을 읽었다. 주혜성이 아직 남아 있는 것처럼. 머릿속 그득한 이 의문에 답을 줄 사람이, 거기에 있는 것처럼.
문성하는 궁금했다. 그가 지금 어떤 소설을 쓰고 있는지.
그 결말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
[금일 오전 대통령 주재로 열린 ‘벤처·투자업계 2030과의 대화’ 간담회는 주목받는 벤처·투자 기업 소속 젊은 CEO 11명이 모인 가운데 허심탄회하게 각종 규제 문제를 논의하고 미래 방향성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간담회에는 미국 투자 기업 NGX의 한국인 CEO 주혜성 대표도 참석했습니다. 김 대통령은 주 대표 등에 사적인 농담을 건네는 등 편안한 분위기를 이끌었습니다.]
기자의 멘트와 함께 타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은 대통령 및 CEO 11명의 모습이 차례로 클로즈업됐다. 주혜성은 대통령 기준으로 가장 눈에 띄는 오른쪽 자리에 앉아 있었다. 화면 속 대통령이 주혜성 쪽에 인자한 손짓을 건넸다.
[주 대표는 어때요. 저쪽 강 대표처럼 주 대표도 연애를 좀 열심히 하는 편입니까.]
하단에 하얀색 헤드라인이 떴다. 「대통령, 주혜성 등 CEO에 농담…… 편안한 담소 주도」
손을 내저은 주혜성이 답했다.
[저는 애인이 없습니다.]
[왜 없을까? 이렇게 젊고 잘 생기고. 돈도 아주 많은데 말이야.]
대통령이 껄껄거렸다. 테이블의 CEO들이 일제히 폭소했다. 문성하의 옆에서 지켜보던 안재림이 질색했다.
“와, 저 숨 막히는 분위기에서 웃음이 나올까요? 따지고 보면 다 연기 아니에요?”
문성하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누가 봐도 연기하는 분위기이긴 했다. CEO들의 낯빛에서 미세한 불편함이 비친다. 간담회 특성상 참석한 이가 20대와 30대뿐이었다. 어리다면 어린 나이에 대통령을 앞에 둔 공식 석상이 부담되지 않을 턱이 없다.
[내가 하나 소개를 해 줘야겠어.]
[저는 괜찮습니다.]
너스레를 떠는 대통령에 대고 주혜성이 정중히 사양했다. 대통령이 움찔했다. 주혜성이 또박또박 덧붙였다.
[따로 누군가를 만날 생각이 없습니다.]
잠시 멈춰 있던 대통령이 곧 커다랗게 웃었다.
[일하고 결혼했다 이거구먼! 응?]
동석한 CEO들이 박수까지 치며 대소했다. 주혜성만 웃지 않았다. 테이블에 올라간 그의 손이 지루한 듯 꺼떡거렸다. 손등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주 대표는 무서운 것도 없나 봐요.”
안재림이 작게 감탄했다. 호쾌하게 방소하는 대통령과 무표정한 주혜성을 동시에 담은 간담회장 풍경이 사라졌다. 전환된 화면에 뉴스 스튜디오가 들어왔다. 문성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재림의 어깨를 가볍게 치고는, 식탁을 가리켰다.
“TV 그만 보고 일어나. 밥 먹어야지.”
“네.”
안재림이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먼저 부엌으로 간 문성하가 커다란 냄비 뚜껑을 열었다. 바글거리는 하얀 국물에서 고소한 기름기가 들끓었다. 식탁 앞에 앉은 안재림이 신이 나 말했다.
“저 삼계탕 처음 먹어 봐요. 엄청 기대돼요.”
“이걸 한 번도 안 먹어 봤다고?”
문성하가 황당해했다. 눈을 둥그렇게 뜬 안재림이 답했다.
“네. 먹을 기회가 없었거든요.”
떨떠름하게 등을 보인 문성하가 기계적으로 찬장을 뒤적였다. 대접 두 개를 꺼내 냄비 옆에 뒀다. 제법 큰 닭 다리 두 개를 전부 안재림의 접시에 담으며 속으로 욕을 했다. 대체 안재림의 아버지는 뭐 하는 작자이기에 애한테 삼계탕 하나 안 사 줬을까 싶었다. 문성하도 사랑받으며 컸다고 하기 어려운 입장이지만, 최소한 삼계탕은 먹었다.
“먹어. 부족하면 얼마든지 얘기하고. 많이 했으니까.”
안재림의 앞에 대접을 놓아 준 문성하가 맞은편에 앉았다. 젓가락을 든 안재림이 닭 다리부터 꺼내 들었다. 김이 풀풀 나는 고기를 크게 베어 물고 우물거리는 걸 문성하는 말없이 관찰했다. 음식에서 솟군 열기 때문인지 볼이 발그레했다.
“아, 형. 저 얘기할 거 있어요.”
닭 다리 하나를 순식간에 해치운 안재림이 입을 뗐다. 문성하가 끄덕였다.
“어. 해.”
“좀 그런 얘기인데…… 일단 들어봐요.”
“뭔데 그래?”
대접에 들어간 숟가락을 휘 저은 문성하가 눈을 치떴다. 안재림이 양 팔꿈치를 테이블에 올리며 얼굴을 가까이 해 왔다. 저건 밥상머리 예절이 아닌데, 하면서도 문성하는 내버려 뒀다. 그런 걸 따지기엔 안재림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했다.
“제가 형 회사에 투자받으러 온 계기 얘기한 적 있어요?”
“없지. 인터넷 검색하다 온 것 아니었어?”
문성하가 갸웃했다. 당연히 그렇게 왔다 생각했다. 비슷한 케이스가 몇 번 있어서였다.
“저 소개받아 온 거예요.”
안재림이 착 깔린 답을 꺼냈다. 문성하의 눈이 찡그려졌다. 이건 또 무슨 얘기인가 싶었다.
“한 달 반 전쯤인가. 일주일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원 매장에 온 여자분이 있었어요. 화려한 생김새라 속으로 기억하고 있었죠. 우리 음식이 정말 입에 맞았나 보다 하면서. 그런데 어느 날 그분이 명함 한 장을 주더라고요. 본인은 사실 투자업계 종사자인데, 이 가게에 며칠 방문하며 지켜보니 상당한 성장 가능성을 보유한 것 같다, 생각 있으면 투자 회사에서 자금 받아 본격적으로 키워 봐라. 그런 말을 했어요. 전 그때까지 투자 유치가 뭔지도 몰랐고 그런 걸 전문적으로 하는 회사가 있다는 것도 몰랐어요. 그런데 그분 얘기를 듣고 나니 정말 그런 걸 해 보고 싶다는 욕심이 나는 거예요. 그분 말솜씨가 워낙 유려하긴 했어요.”
“그 여자가 청신투자를 소개했어?”
“네. 본인과 인연이 있는 회사인데, 여기로 가면 가장 적합한 솔루션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다만 본인으로부터 소개받았다는 얘기는 하지 말라 했어요. 투자업계에는 암묵적인 룰이 있어, 자신이 타 투자 회사에 투자처를 연결시켜 준 게 발각되면 곤란해진다 하더라고요. 그분께 폐를 끼치면 안 되니까 지금까지 말씀드리지 않은 거예요.”
뒤늦은 자백을 한 안재림이 수그렸다. 심각해진 문성하가 대접 안의 숟가락을 빙글 돌렸다. 부딪친 그릇에서 딱, 소리가 났다. 문성하의 아랫입술이 깨물렸다.
투자업계에 그런 룰은 없다. 순박한 안재림이 속아 넘어간 거다.
“그럼. 지금은 왜 얘기하는데.”
“어제 주 대표가 우리 가게에 왔을 때, 그 여자분을 본 것 같다 생각했거든요. 입구 쪽에서 대기하고 있었어요.”
“‘본 것 같다’고?”
“제대로 본 게 아니라서 확신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아까 TV 뉴스에서 또 그분을 봤어요. 주 대표가 청와대 들어가는 장면 나올 때 차 앞에서 배웅하더라고요. 두 번째로 보니 확신이 들었어요. 그분이 맞아요. 그렇게 생각하니 아무래도 뭔가가 이상해서……. 형께 말씀을 드려야겠다 싶었어요.”
“그 여자 명함 있어?”
문성하가 물었다. 벌떡 일어난 안재림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찾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나온 그가 문성하의 앞에 뭔가를 내려놓았다. 하얗고 네모난 명함이었다.
“이거예요. 참고로 여기에 적힌 번호로 전화하면 없는 번호라고 나와요. 연락처를 바꾼 것 같아요.”
문성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명함을 머금은 동공을 키울 뿐이었다. 벌어진 입에서 허망한 숨이 번졌다. 서울 여의도에 있는 ‘프라이빗HJ’ 투자 회사.
대표 김희정.
주혜성의 전담 로비스트 안나 킴의 본명이었다.
***
잠이 오지 않았다. 안재림을 통해 안 사실이 쉼 없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온 신경이 뜬구름에 속수무책으로 이끌려 가는 기분이었다. 문성하는 허공을 헤엄치는 것처럼 이불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보이지 않는 물살을 가르며 막연한 목적지를 향해 갔다. 아무리 나아가도 ‘어딘가’가 나오지 않았다. 사위가 온통 뿌연 운무 속이었다. 그런 와중에 하나의 진실이 점점 형형했다.
주혜성이 안재림을 문성하에게 데려다 놓았다. 왜.
희미하게 동이 트는 걸 보며 몸을 일으켰다. 한숨도 자지 못해 비척거리는 걸 가누며 침대에서 벗어났다. 방을 나와서 보니 안재림의 방이 조용했다. 곤히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거실로 갔다. TV장 앞에서 몸을 내리고, 위에 올라와 있는 액자를 찾아 쥐었다.
눈앞까지 가져왔지만 유리 면이 더께투성이라 새삼 흐릿했다. 문성하는 액자 뒤를 분리해 사진을 건졌다. 쑥 빠진 종이 밑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흠칫한 문성하가 바닥을 더듬거렸다. 막 짚은 자리에는 처음 보는 사진이 있었다.
생소한 사진을 집어 들고 망막에 담았다. 사진 뒤에 숨은 또 다른 사진. 역시 사람은 두 명이다. 다만 보다 이전의 것으로 추정됐다. 다소 젊어진 남자가 아주 작은 아이를 품에 안고 있다. 30대 중반쯤 됐을 법한 남자, 그리고 서너 살 무렵으로 추정되는 아이. 아이의 기다랗고 포근한 눈매는 누가 봐도 안재림의 것이다.
한참이나 주시하던 문성하의 눈망울이 미동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쿵쿵거리는 박동이 느껴졌다. 간헐적으로 후들거리던 손이 풀리며 툭, 사진이 떨어졌다. 질겁하며 물러난 문성하가 얼굴을 짚었다. 이마에서 땀이 나고 있었다.
사진이 찍힌 장소가 너무도 익숙하다. 어머니가 운영하던 라이브 바의 입구다.
“왜 여기에 있었던 거지.”
중얼거린 문성하가 재차 사진을 집어 올렸다. 침묵하는 종이를 추궁하듯 네모난 표면을 찬찬히 쓸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 보니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문성하의 목을 타고 꿀꺽, 침이 넘어갔다. 미끈한 촉감이 송곳처럼 손가락을 파고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사진, 일반적인 사진의 절반 크기다. 하나를 반으로 잘랐다. 이게 전부가 아니란 얘기다.
그리고 나머지는.
잠잠하던 문성하가 뒤늦게 퍼덕거렸다. 손에서 벗어난 사진이 저 멀리 날아갔다. 고적한 거실 한가운데 웅크린 문성하가 식은땀을 훔쳤다. 펄떡거리는 심장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예감이 든다. 감당하기 힘든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그런.
다리를 쥐어짜며 숨만 몰아쉬던 문성하가 벌떡 일어났다. 뇌리를 스치는 한 가지 존재가 있었다. 넥타이. 주혜성이 헤어지기 직전 줬고, 자신의 짐 박스에 처박아 뒀다. 그때는 문성하에게 뭐라도 남기기 위해 준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주혜성은 어제 말했다. 문틈의 문성하를 주시하며, 또렷하게 뇌까렸다. 선물했거든요. 필요한 분께.
선물.
콰당, 엎어진 짐 박스를 헤집었다. 한참이나 뒤적거린 끝에 파란색 넥타이를 찾았다. 매끈한 천을 만지작거리며 촉감을 읽었다. 널찍한 밑 부분에서 뭔가가 잡혔다. 손가락이 바로 천 안을 파고들었다. 작은 종이쪽지가 나왔다.
손가락 한 마디만큼 접힌 걸 차곡차곡 펼쳤다. 이윽고 드러난 글자가 문성하의 시야를 그득히 메웠다. 호흡이 조금조금 가빠 왔다.
「선물 잘 받았어? 그런데 형,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문성하의 턱이 덜덜거렸다.
「그 선물하고 너무 많이 가까워지지는 마.」
힘 빠진 손에서 떨어진 종이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사실 조금 질투 나. 나는 그 선물처럼 ‘진짜’가 아니니까.」
탁. 뒤편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눈을 비비며 들어온 안재림이 졸린 목소리를 꺼냈다.
“형. 안 자고 뭐 해요?”
“잠깐 형 좀 나갔다 올게.”
문성하가 허겁지겁 외투를 챙겼다. 그대로 방을 나서는 문성하의 등 뒤로 걱정 어린 외침이 닥쳤다.
“형! 무슨 일 있어요?”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현관 앞까지 내달렸다. 빠르게 문을 열어젖히고는, 뒤를 보지도 않고 소리쳤다.
“자고 있어. 형 금방 올게.”
탕, 문 닫히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문성하가 버튼을 두 번 세 번 내리눌렀다. 1층에서부터 서서히 바뀌어 가는 숫자를 보고 있자니, 심장이 으스러질 것처럼 뛰어 왔다. 문성하는 할딱이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스푼G로 가야 해.”
넋 나간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거기에 문성하의 남은 짐이 있다. 마지막 조각은 그 안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