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37)

26.

다음 날 아침 집으로 찾아온 건 제임스 임이었다. 프랑스 명품 브랜드 로고가 들어간 파란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문구멍으로 그를 확인한 문성하는 수 초 고민한 끝에 문을 열어 줬다. 일찍부터 찾아온 이유가 짐작됐다.

“혜성이하고 싸웠어요?”

거실에 들어선 제임스 임은 냉장고부터 직행했다. 문을 열고 안의 음료들을 둘러보다, 마음에 드는 게 없었는지 싱크대 위 찬장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문성하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뻔뻔하다 생각하며 답을 했다.

“싸우고 자시고 할 게 어디에 있어요. 뭐 별 관계라고.”

“그런데 왜 갑자기……. 아, 이거 먹어도 됩니까.”

찬장에서 커피 티백을 찾은 그가 윗부분을 뜯으며 물었다. 문성하는 석연치 않게 식탁 의자에 앉았다. 어차피 먹을 거면서 물어보는 게 참으로 그다웠다.

“주혜성 대표가 뭐라고 합니까.”

“문 대표님으로부터 요청받은 사항이 있다고 하던데.”

커피포트 안에 물을 담은 제임스 임이 스위치를 올리며 뇌까렸다. 문성하가 혀를 찼다.

“요청이란 말은 적절하지 않은 듯하고, 요구한 게 있었던 건 맞습니다.”

“재고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없는 상황입니까.”

포트 물이 팔팔 끓어 갔다. 문성하가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럴 거면 애초에 얘기도 안 했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죠.”

“없다는데 왜 자꾸 물어보세요.”

“저야 그냥.”

탁. 물이 다 끓은 것을 알리며 포트의 록이 오픈됐다. 손잡이를 쥔 그가 티백 담은 컵에 뜨거운 물을 흘렸다. 조르르 떨어지는 물 위로 하얀 김이 훅 솟구었다.

“걱정이 돼서 그렇습니다.”

커피 잔을 든 그가 문성하의 맞은편에 앉았다. 고소한 원두 내음이 문성하의 면전을 적셨다. 문성하가 인상을 썼다.

“제가 그쪽과 혈연이나 학연, 지연을 갖고 있나요?”

“혈연, 학연은 모르겠고. 지연은 있죠.”

“이사님과 알게 된 지는 고작 보름이나 된 것 같은데요.”

“단 하루를 알아도 인연은 인연이죠. 불교에서 연분 함부로 하지 말라 누누이 얘기도 하잖습니까.”

“저 무교입니다.”

“전 기독교요.”

셔츠 안에 숨기고 있던 십자가 목걸이를 빼 보이며 제임스 임이 입가에 커피 잔을 가져갔다. 문성하는 찌뿌둥하게 턱을 괴었다. 회개할 게 많아 교회에 다니는 타입이구나 싶은 생각을 했다.

한 모금 마시고 난 제임스 임이 잔을 휘적거렸다. 동그란 원 안에서 까만 물이 찰랑였다. 그의 입이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이것 전달드리겠습니다. 한 번 더 재고 부탁드립니다.”

그의 재킷 주머니에서 봉투 하나가 나왔다. 슥 밀어진 겉봉이 문성하의 앞으로 왔다. 문성하는 묵묵히 안을 헤집었다. 길게 접힌 페이퍼가 빠져나왔다. 차곡차곡 펼쳐 내용을 확인했다.

주혜성을 통해 취한 금전적 이익에 대한 반환을 약속함. 위와 관련한 세부 사항 논의를 제임스 임에 위임. 끝.

“밑에 서명해야 하죠?”

문성하가 테이블 위에 굴러다니던 펜을 잡았다. 제임스 임이 허둥거렸다.

“좀 제대로 읽어 보고 하십시오.”

“어제 얘기 끝난 부분입니다. 그만 좀 하시죠.”

펜 뚜껑을 뺀 문성하가 일필휘지로 사인을 갈겼다. 제임스 임이 커다랗게 탄식했다.

“진짜 저 곤란하게 왜 이러십니까.”

“이사님이야말로 왜 이러세요.”

“서명을 받으면 제가 진행을 해야 하잖습니까.”

“하면 되잖아요. 대체 뭐가 문제예요?”

펜 뚜껑을 끼운 문성하가 짜증을 냈다. 끌끌거린 제임스 임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액정을 통해 몇몇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게 비쳤다. 종종 목을 젖힌 그가 하소연을 했다.

“하……. 저는 원래 이 업무 담당도 아닌데.”

“‘이 업무’가 정확히 뭘 지칭하는 겁니까. 제 뒤치다꺼리하는 담당자가 NGX에 따로 있어요?”

문성하가 이기죽거렸다. 당연히 아니라는 걸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그사이 메시지 전송을 마친 듯한 제임스 임이 고개를 들었다. 표정이 지극히 진중했다.

“네.”

또박또박한 한 마디가 따라붙었다.

“참고로 정직원이에요.”

문성하의 두 눈이 질끈 감겼다. 솔직한 말로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

「청구 내역 뽑는데 며칠 걸립니다. 그사이 외부에서 몇 가지 연락이 갈 텐데, 감당하지 못할 수준이면 얘기 주세요. 계약서는 언제든 파기할 수 있습니다.

제임스 임」

“뭐라는 거야.”

신경질을 낸 문성하가 핸드폰 액정을 껐다. 동시에 열린 사무실 문 너머로 익숙한 인물들이 나타났다. 최재율과 안재림이었다.

“어쩌다 둘이 같이 와?”

“이 앞에서 만났어.”

앞서 다가온 최재율이 골똘히 구둣발을 꺼떡거렸다. 곁눈질로 살핀 문성하가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사무실 임대인이 보자고 하네.”

“지금?”

“어. 이 밑 카페에 있대.”

“월세를 올리려 그러나.”

문성하가 개웃거렸다. 최재율이 심드렁하게 응수했다.

“우리가 많이 싸게 들어오긴 했지. 소유주가 급하게 임차인 구한다며 다른 사무실의 반도 안 되는 임대료를 받았잖아.”

“갑자기 올린다 하면 곤란한데.”

“일단 만나 보고 올게. 뭐라 얘기할지 아직 모르는 일이니.”

최재율이 몸을 틀었다. 대충 손 인사를 한 문성하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안재림이 어정쩡하게 허리를 굽혔다.

“오랜만입니다. 대표님.”

문성하는 속으로 고민했다. 오랜만인가.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스푼G 강남점의 오픈일 이후 사흘이 흘렀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안재림과 감감무소식으로 며칠을 보낸 게 알게 된 이래 처음이었다. 보통은 둘 중 하나가 먼저 연락해 하루에 한 번 이상 대면 혹은 통화를 했다.

스푼G 프로젝트는 최근 문성하가 가장 신경 쓰는 일이고, 안재림은 작은 결정이라도 문성하와 공유하고자 했다. 연락이 잦은 게 당연했다. 지난 사흘이 비정상적이라면 비정상이었다.

“앉아 봐.”

문성하가 자신의 옆 의자를 두드렸다. 구물거리던 안재림이 착석했다. 문성하가 관찰하듯 그를 봤다. 안재림은 마주하기 곤란한 사람을 앞에 둔 것처럼 얼굴을 푹 숙이고 있었다.

“저번 일 사과할게.”

단조로운 언어가 나왔다. 급하게 쳐다본 안재림이 양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요……. 대표님께서 사과하실 건.”

“한 가지 확실히 해 두고 싶은 게 있어. 내가 형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걸 꺼려 하는 건, 개인적인 트라우마가 있어서야. 네가 싫어서가 아니야.”

안재림의 손사래가 멎었다. 문성하가 보다 진중히 말했다.

“내 심적인 부분이 어느 정도 해소되면, 그땐 네가 원하는 대로 불러도 좋아.”

곧 종용하는 고갯짓을 했다.

“이해하지?”

안재림의 어깨가 옴씰거렸다. 더듬거리던 입이 열렸다.

“네…….”

“그러면 그때 일 가지고 다시는 어색하게 구는 일 없기야. 응?”

“네.”

“그래.”

대화가 끝나자마자 테이블에 둔 문성하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가 집주인이었다. 손을 내밀어 핸드폰을 쥐었다. 막 통화 아이콘을 누르기 직전, 작은 음성이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문성하가 재차 안재림을 응시했다. 헛헛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별게 감사하다. 너는.”

이윽고 핸드폰을 귓가에 댔다. 사뭇 사무적인 한 마디가 나왔다.

“네. 사장님.”

[성하 씨. 잠깐 통화될까?]

눈에 띄게 나긋한 목소리였다. 집주인과는 7년간 연을 이어 왔기에 어느 정도 안다면 아는 사이다. 그런 자신이 장담하자면 평소 그녀의 말투는 이렇지 않았다. 어조가 센 사투리를 구사해 평이하게 대화할 때에도 싸우는 듯한 인상을 줬다. 이렇게까지 부드러운 말투를 취하는 건 지극히 드문 일이다.

그러므로 문성하는 이 어투가 안 좋은 일의 징조로 여겨졌다.

“네. 말씀하세요.”

[아까 오전에 성하 씨 집 내놓았다는데……. 얘기 들었어?]

“네?”

황망한 반문이 나왔다. 집주인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양 설명에 나섰다.

[성하 씨 집주인 있잖아. 내가 아니야.]

“해일빌라는 전 호수를 사장님께서 보유하고 계신…….”

[원래 그랬지. 그런데 성하 씨 호수만 내 소유가 아니야. 5년 전에 그렇게 됐어. 시세보다 비싼 가격에 매입 요청이 들어와 거기만 팔았거든.]

“그런데 왜 지금까지 얘기 안 하셨어요. 그런 일이 있었으면 말을 하셨어야죠.”

[좀 복잡한 배경이 있어. 등기상으로는 여전히 나거든. 일종의 구두 계약이었고, 매입 후에도 이전처럼 관리 권한이 나에게 있었어. 뭐, 성하 씨 사는 데 문제 생긴 건 아니니 굳이 말할 이유도 없긴 했지.]

“집주인은 누구인데요.”

[이름이……. 박인수? 20대 후반 정도 되는 청년인데. 나도 이름하고 생년월일 빼고 잘 몰라. 그 청년, 툭 하면 뉴욕이다 어디다 출장 다니기 바빠서. NGX 알지? 미국에 있는 커다란 투자 회사. 거기 직원이라던데.]

문성하의 입에서 허, 소리가 터졌다. 오전에 제임스 임이 지나가듯 한 얘기가 떠올랐다. 문성하 뒤치다꺼리하는 NGX 내 담당자가 따로 있다. 심지어 정직원이다. 이 사람 얘기인 모양이다.

“그래서. 혹시 나가 달라 하던가요?”

[그래 주면 좋겠다던데……. 아, 위약금은 시세 고려해 충분히 챙겨 주겠대.]

집주인은 제3자 얘기를 하듯 천연덕스러웠다. 듣는 문성하만 불편해 죽을 맛이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퇴근 후 다시 얘기하시죠.”

[그래. 빠른 시일 내로 연락 줘. 응?”]

집주인이 통화를 끊었다. 내팽개치듯 핸드폰을 내려놓은 문성하가 제 얼굴을 감쌌다. 머리맡에서 걱정스러운 안재림의 시선이 느껴졌다.

“괜찮으세요? 대표님.”

“어어, 괜찮아. 어느 정도 예상한…….”

“야. 문성하!”

억지로 한시름 놓자마자 사무실 문이 열렸다. 헉헉거리며 들어온 최재율은 잔뜩 상기돼 있었다. 손을 거둔 문성하의 낯이 찡그려졌다. 또 안 좋은 일이 생길 징조다.

“대화 나눴는데, 결론은 빠른 시일 안에 퇴거해 줬으면 좋겠다네. 오전에 사무실 내놓았다고. 그나저나 실질 소유주가 따로 있더라고. 우리가 임대 계약한 사람은 대리인이고, 실제 소유한 사람은…….”

“박인수?”

문성하가 고저 없이 물었다. 최재율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떻게 알았어? 그걸.”

“미치겠네. 진짜.”

제 얼굴을 쥐어짠 문성하가 실성한 것처럼 웃었다. 전혀 웃을 상황이 아닌데, 그만 폭소가 나왔다. 기가 막혀 웃는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여실히 체감했다. 울기도 어렵고, 화를 내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마냥 무표정으로만 있기도 어려울 때. 그럴 때 실소로 때우는 거다. 웃음은 종종 자기 보호의 수단으로 쓰인다.

“미치겠다. 주혜성.”

견고한 손가락이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문성하의 눈이 번뜩였다. 아까 본 제임스 임의 메시지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외부에서 몇 가지 연락이 갈 텐데, 감당하지 못할 수준이면 얘기 주세요. 계약서는 언제든 파기할 수 있습니다.

“아직은 아니야. 이 새끼야.”

바닥을 지르밟은 문성하가 몸을 일으켰다. 망연자실해 있는 최재율에 눈을 두고는, 입을 열었다. 하염없이 딱딱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지금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야? 형. 당장 다른 사무실 알아봐야지.”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틸 거다.

그동안 주혜성은 피가 마르겠지만.

***

스푼G 2호점은 점심시간을 조금 넘긴 시간에도 전쟁터였다. 단칸방 같은 사무실에 앉아 있다 보면 문 너머로 격양된 대화가 수시로 들렸다. 주방 직원과 홀 직원이 소통하며 나는 소리였다. 화가 나서가 아니라, 매장이 워낙 혼잡해 생긴 일이다. 시끄러운 매장에서 신속히 의사를 전달하려면 고성을 내는 게 불가피했다.

[꼭 강남역이나 삼성역 인근이어야 해? 네가 말한 가격에 나온 매물이 없을 텐데.]

핸드폰 너머로 한탄이 들렸다. 들고 있던 펜을 빙글 돌린 문성하가 말했다.

“역하고는 좀 떨어져도 돼. 핵심은 스타트업하고 투자사 밀집한 강남권 지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거야.”

[그 얘기가 그 얘기지. 강남, 삼성, 선릉, 역삼. 뭐 이쪽 얘기 아니야. 기본적으로 그 가격에 원래 청신투자 있던 사무실과 비슷한 평형대 오피스는 절대 못 얻어. 서초 좀 구석으로 가면 나올지 모르겠다. 연식 좀 되고 교통 불편한 곳.]

“서초는 그쪽 그라운드가 아닌데.”

[지금 네가 그라운드 따질 때야? 하여간 애초에 네가 제시한 가격이 너무 터무니없다고.]

상대방이 역정을 냈다. 액정을 흘겨본 문성하가 뇌까렸다.

“터무니없는 것 알아. 아니까 형한테 부탁한 거잖아. 형 하는 일이 뭐야? 사무실 임대 연결해 주는 거잖아.”

[직업이 그거라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가능하겠냐.]

상대방이 앓는 소리를 흘렸다. 뜸을 들인 그가 다른 걸 물어 왔다.

[그나저나 너 애초에 이전 사무실은 그 가격에 어떻게 들어갔냐. 거기 완전히 인기 매물인데. 위아래 층에 입주한 것도 잘 나가는 벤처들이고.]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문성하가 얼버무렸다. 습관처럼 돌린 펜으로 수첩을 쿡 찍고는,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아무튼 괜찮은 매물 있으면 연락 줘. 지금 우리 입장에선 이게 1순위 일이니까.”

[알았다. 재율이는 잘 있냐?]

“그 형도 바빠. 사무실 알아보고 다니느라.”

[둘 다 고생이네. 좀 찾아보고 내일쯤 연락 줄게.]

“고마워.”

통화가 끊겼다. 핸드폰을 내려 둔 문성하가 벽에다 이마를 기댔다. 미약한 현기증이 일었다. 게슴츠레하게 뜨인 눈에 테이블에 널브러진 물건들이 담겼다. 수첩, 명함집, 투자 분석 보고서, 기업 평가 보고서……. 실제 짐은 다섯 배 정도 많지만, 일단 필요한 것만 챙겼다. 전부 가져올 여유도 공간도 없었다.

사무실 실소유주 박인수로부터 퇴거 통보를 받고, 다음날 바로 짐을 뺐다. 당장 옮길 곳이 없었으므로 스푼G 강남점 창고에 물건을 넣어 뒀다. 이후 최재율과 문성하 둘 다 사무실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쉽지 않았다. 3년 전 계약한 청신투자 사무실의 임대료는 인근 시세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이후 한 번도 올리지 않았다. 임대인이라는 사람은 ‘이상하게 이 매물은 나가지 않아 빨리 치워 버릴 생각으로 금액을 대폭 낮췄다’라고 했다.

사무실은 사실상 새것이었고 특별히 보수할 구석도 없었다. 3년간 무탈하게 썼기에 임대인에 따로 연락한 일조차 없었다. 2년 만기 시점이 왔을 때 연장하기 위해 한 번 만난 게 전부다. 당시 2년 전 계약 조건을 고스란히 제시하는 걸 보며 워낙 여유 있는 자산가인가 보다, 했을 뿐이다.

께름칙한 구석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지만 대놓고 의심할 구석도 없었다. 그만큼 모든 환경은 평이하며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무실도, 집도, 재활 센터도, 병원도. 전부 다.

실은 주혜성이 세팅한 거대한 연극의 일부였는데도.

“대표님. 저 들어가도 돼요?”

소리도 없이 문을 연 안재림이 말을 걸었다. 수첩을 밀어 둔 문성하가 답했다.

“어. 어차피 네 사무실인데, 무슨 허락을 받고 있어.”

“그래도 바쁘신 것 방해하면 안 되잖아요.”

안재림이 성큼 다가왔다. 한 손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접시가 있었다. 문성하가 물었다.

“그거 먹으러 온 거야?”

“네. 대표님이랑 같이요. 아직 식사 안 하셨죠?”

마주 앉은 안재림이 테이블 한가운데 접시를 뒀다. 윤기가 잘잘 흐르는 볶음밥이었다. 문성하의 손에 포크를 쥐여 준 그가 설명했다.

“이거 다음 달 신메뉴로 올라갈 거예요. 보완을 스무 번 이상 거쳐서, 지금 아주 맛있어요.”

“딱 봐도 맛있어 보이네.”

문성하가 볶음밥에 포크를 꽂았다. 한 술 떠서는 입 안에 넣고 씹었다. 고슬고슬하게 볶아진 밥알은 달고 짭조름했다. 크림치즈 볶음밥이었다. 문성하가 칭찬했다.

“엄청 괜찮네. 네가 만든 메뉴야?”

“최근에 새로 영입한 분이 개발했어요. NZ푸드 계시던 분인데, 먼저 우리 쪽에서 일하고 싶다 하기에 면접 보고 채용했어요.”

“NZ푸드는 대기업이잖아.”

“네. 저도 신기해요. 그분 입장에서는 우리가 앞으로 꽤 클 것 같은 회사인가 봐요.”

안재림이 재잘거렸다. 문성하의 고개가 주억거렸다. 작은 읊조림이 나왔다.

“안목이 있으신 분이네.”

볶음밥에 묻힌 포크가 빙글 돌았다. 살펴보던 안재림이 질문했다.

“사무실은 쓸 만하세요? 원래 저 혼자 쓰던 공간이라, 두 대표님이 쓰시기에 불편할 텐데.”

“임시니까.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도 아니고.”

“집은 어떻게 됐어요? 거기도 빼야 한다 하셨잖아요.”

집 얘기가 나오자 바로 한숨이 나왔다. 포크를 치운 문성하가 답했다.

“일단은 이번 주말에 나오기로 했어. 새로 갈 곳 알아봐야 하는데, 사무실이 우선이라 그건 챙길 여유도 없다.”

“당분간 우리 집에서 지내시면 어때요?”

문성하가 흠칫했다. 눈동자를 끌어 올린 안재림이 말했다.

“저 최근에 이 근처로 이사했잖아요. 당분간 강남점에 집중하려고. 방 두 개인데, 하나는 금방 비울 수 있어요. 아주 좁은 편이 아니라 괜찮으실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내가 어떻게…….”

“혹시 당장 갈 곳이 있으신 거예요?”

안재림이 갸웃거렸다. 문성하의 입이 다물렸다. 눈길이 갈피를 못 잡고 배회했다. 갈 곳. 솔직히 없다. 최재율의 집에 들어가는 걸 최후의 보루로 삼고 있지만, 아무래도 예전에 몇 번 잔 사이인지라 껄끄러운 감이 없지 않다. 가능하면 최재율과는 사적으로 엮이고 싶지 않았다.

“부담 갖지 말고 들어오세요. 저로서도 대표님과 함께 지내는 쪽이 도움 되니까 얘기 드리는 거예요. 스푼G 관련해 상담할 일이 많은데, 대표님은 여기 말고도 신경 쓸 게 많잖아요. 같이 지내면 아무래도 논의할 시간이 더…….”

“50이면 돼? 월세.”

침착한 물음이 건네졌다. 무춤한 안재림이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허둥거리는 한마디가 찾아들었다.

“월세는 괜찮아요. 대표님께서 저 상담해 주는 게 월세…….”

“남의 집에 어떻게 공짜로 들어가. 우리가 가족도 아니고. 오래 머물진 않겠지만, 지내는 동안 값은 치를게. 나도 뻔뻔한 성격이 못 돼서 그래. 그러려니 하고 받아.”

문성하가 타일렀다. 망설이던 안재림이 끝내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다시금 문성하를 보고는, 배시시 입꼬리를 올렸다.

“좋네요. 대표님과 함께 지내게 돼서.”

문성하는 그만 피식거렸다. 참 단순한 청년이다 싶었다. 쉽게 마음을 열고, 쉽게 고마워하고, 쉽게 기뻐한다. 사는 내내 그럴 기회를 그다지 접해 보지 못한 것처럼. 한편으로는 조금 안쓰러웠다. 많이도 허기졌구나 싶었다.

***

최재율이 찍어 준 주소지는 논현동의 후미진 골목에 있었다. 이런 곳에 회사가 있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외딴곳이었다. 건물은 4층짜리였는데,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문성하는 걸어서 4층까지 올라갔다.

“이 근방에서 이 정도 가격에 나온 매물이 없어요. 아주 땡잡으신 겁니다.”

먼저 도착한 중개인과 최재율은 빈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중개인은 ‘이 가격의 매물이 없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사무실 한가운데 선 문성하가 사위를 둘러봤다. 사이즈는 이전 사무실보다 조금 더 작고, 내관은 훨씬 더 낡았다. 창문 너머에는 바로 옆 건물이 붙어 있어 최악의 조망을 자랑한다.

“얼마야?”

문성하가 물었다. 최재율이 답했다.

“보증금은 이전 사무실보다 5000 더 비싸고, 월세는 40 더 비싸고.”

“강남역까지 한 15분 걸릴까?”

“차가 안 막힌다면.”

“나쁘지 않네. 뭐.”

문성하가 홀로 평가했다. 최재율이 비식거렸다.

“엄청 관대해졌다, 야. 예전 같으면 거들떠도 안 봤을 텐데.”

“이틀 내내 서울 시내 이 잡듯 뒤지고 다니며 현실을 알았잖아. 타협해야지.”

말라붙은 한 마디가 따라붙었다.

“이게 내 현실이야.”

최재율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문득 재킷 주머니가 울렸다. 핸드폰을 뺀 문성하가 액정을 봤다. 제임스 임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는 알림이 떠 있었다. 아이콘을 밀어 내용을 확인했다. 청구 내역서였다.

「박종현 재활 치료 센터 1,000,000x61=61,000,000.

해일빌라 500,000x61=30,500,000 및 보증금 50,000,000.

성강 오피스 800,000x36=28,800,000 및 보증금 150,000,000.」

도합 320,300,000.

“지금 당장 3억 2030만 원을 빌릴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영혼 없는 뇌까림이 나왔다. 힐긋한 최재율이 대꾸했다.

“글쎄. 대부? 너 1금융이랑 2금융은 이미 풀이잖아. 현찰은 전부 회사 투자금으로 잡혀 있고.”

“뺄 수 있는 것 없어?”

“빼긴 뭘 빼? 메꾸는 것만으로 죽을 맛인데. 재작년에 투자한 해시포스트 기업 가치가 지난달 박살 나는 바람에 에센더 수익금 전부 대체 투자처에 꼬라박혔잖아. 지금 너 개털이라니까?”

최재율이 상황도 모르고 낄낄거렸다. 잠잠하게 고갯짓한 문성하가 재차 핸드폰을 봤다. 왼편 상단의 디지털시계를 확인하고 있었다. 오후 6시 38분. 일전에 주혜성과 만나고 나서 얼마나 흐른 거지. 이동한 시선이 창밖에 걸렸다. 전망을 제대로 막아선 옆 건물의 더께투성이 외벽이 보였다.

총 58시간 12분.

주혜성의 무대에서 벗어나 흐른 시간.

최근 5년을 통틀어 주혜성이 처음으로 장님이 된 시간.

또 핸드폰이 진동했다. 느릿느릿 액정을 살핀 문성하의 낯이 싸늘해졌다. 이번엔 제임스 임이 아니었다.

“내역서 잘 받았어.”

통화 아이콘을 눌러 귀에 붙인 문성하가 운을 뗐다. 상대방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지근하게 숨 고르는 기척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문성하가 이죽거렸다.

“이자는 왜 뺐어?”

[그것까지 포함하면 진짜로 감당 안 될 테니까.]

“얼마인지 들어나 보자.”

[어제 기준 NGX net IRR3)이 80.81%야. 나에게 이자란 회사 수익률이야. 그것 이외의 숫자는 몰라.]

“원금 포함 약 5억 8000만 원이네. 응?”

문성하가 빙글거렸다. 건너편의 주혜성이 숨을 몰아쉬었다. 높낮이 없는 언어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재미있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넌 재미있었어? 동의도 없이 나한테 목줄 걸고 좌지우지하는 거.”

[전혀 재미있지 않았어. 애초에 재미있으려고 한 게 아니니까.]

냉한 언어가 덧붙었다.

[그런데 형은 재미있었던 것 같네.]

그의 호흡이 자못 거칠어졌다.

[일단 귀가해. 집에서 얘기해.]

“내 집에 들어와 있나 보네.”

[어차피 내 거니까. 형이 마음에 들어 할 멘트는 아니지만, 지금은 좀 해야겠어.]

가까스로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좀 화났거든.]

***

빌라 앞에서 한 남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다가오는 문성하를 발견한 그가 주춤했다. 곧 연기를 흐트러뜨리며 꾸벅했다.

“늦으셨네요.”

하루 새 부쩍 야윈 기색이었다. 문성하가 물었다.

“안에 들어가 계시지 그랬어요. 비밀번호 다 알면서.”

“안에 있기가 좀 그래서요.”

담배를 뒤로 숨긴 제임스 임이 말했다.

“혜성이가 아주 예민한 상태입니다. 이틀 전 문 대표님과 헤어진 직후부터 내내 그래요. 아주 중요한 보고가 아니면 전부 킬하고 있어서 회사 업무도 절반가량 스톱됐고요. 난리도 아닙니다.”

“헤어질 때 나쁘지 않아 보였는데.”

삐져나온 제임스 임의 손에서 담배를 거둬 간 문성하가 연기를 빨아들였다. 바로 쿨럭, 소리가 나왔다. 인상을 쓰면서도 마저 흡입한 뒤 도로 그에게 내줬다. 담배를 피운 건 군대에 있던 시절 딱 반년 정도다. 도무지 맞지 않아 더는 피울 수 없었다.

“겉보기엔 멀쩡해도 속은 그 시점부터 썩어 들어가고 있었을 겁니다. 문 대표님을 감시하지 못하는 상황 자체가 저놈에게는 지옥일 테니까요. 지금도 업화(業火)를 눈앞에 둔 새끼마냥 안절부절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독교시라면서요.”

“네. 맞습니다.”

“업화는 불교 용어예요.”

문성하가 정정해 줬다. 제임스 임의 윗눈썹이 삐딱해졌다. 그게 이 상황에서 뭐가 중요하냐는 투였다.

***

들어선 거실은 한겨울처럼 찼다. 문성하는 입은 재킷을 추스르며 고개를 들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주혜성이 곁눈질을 건네 왔다. 눈망울에 초점이 하나도 없었다.

“여기 이번 주말까지 내 거주지야. 내 물건으로 채워진 엄연한 내 공간이야. 허락 없이 들어오는 거, 무단 침입이라는 얘기야.”

문성하가 주혜성의 앞에 섰다. 메고 있는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는 주혜성을 노려보며, 으름장을 놓았다.

“이거 경찰에 신고하면 얼마든지…….”

“담배 냄새 나. 형.”

주혜성이 목을 늘어뜨렸다. 문성하는 찡그린 채 자신의 입가에 손을 가져갔다.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지만, 실제 냄새가 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한 번 빨았는데 냄새가 배나 싶었다.

“누구하고 있었어?”

“그야 이 밑에…….”

제임스 임을 얘기하려다, 그만뒀다. 주혜성이 말하는 ‘누구’의 범위가 생각보다 넓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늦게 귀가한 것도 따로 만날 사람이 있어서였다. 3억 2030만 원을 단번에 변제해 줄 현실적 가능성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었다.

“너에게 얘기할 건 아닌 것 같다.”

“앉아 봐.”

주혜성이 소파를 짚었다. 바로 옆에 앉힐 수 없다는 걸 알아서인지, 제법 떨어진 자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문성하가 마지못해 착석했다. 대여섯 뼘 떨어진 곳에서 익숙한 냄새가 났다. 몸 냄새와 향수 냄새가 어우러진, 감미롭고 불편한 향. 문성하의 입 안에서 혀가 굴러갔다. 혀 밑에 쓴 침이 고였다.

주혜성이 쓰는 향수와 동일한 제품을 백화점에서 본 일이 있다. 30만 원이 훌쩍 넘는 고가의 것이었다. 문성하가 빤히 보고만 있으니, 관심이 있다 생각했는지 직원이 요청하지도 않은 시향을 시켜 줬다. 맡자마자 바로 기침이 나왔다. 익숙함과 낯섦이 동시에 들이닥쳐 후각이 덩굴처럼 뒤엉킨 기분이었다.

익숙한 건 첫 향이었고, 낯선 건 잔향이었다. 같은 향수인데 왜 잔향이 그때와 다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백화점을 나와 걷다 보니 떠올랐다. 주혜성의 몸 냄새. 미명의 숲을 밝히는 푸르른 나무 향. 그것이 향수와 섞여 제3의 향이 만들어졌던 거다.

그 시점에 문성하는 새삼 생각했다. 후각이 참 무섭다는 걸. 예전과 사뭇 다른 향수 내음을 맡고, 그 원인을 떠올린 순간 수년 내내 잊었던 누군가의 기억이 또렷이 되살아나고 만다. 마치 언제라도 포획할 준비를 갖춘 채 망망대해를 누비는 어망 같다.

문성하는 이후 향수 매장이라면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나에게 갚을 거야? 그래서.”

주혜성이 눈을 맞춰 왔다. 피하지 않은 문성하가 대꾸했다.

“아마도.”

“난 안 했으면 좋겠어.”

“그래야 앞으로 같은 짓거리를 계속할 수 있을 테니까. 안 그래?”

문성하가 조롱했다. 주혜성은 가만히 앉은 자리를 짓눌렀다. 흔해 빠진 소가죽 시트에 또렷한 지문이 남았다.

“안 할게. 애초에 내가 그냥 필요해서 한 거야. 내 독단적 이기심이 낳은 결과야. 형이 원치 않는다는 걸 확실히 인지했으니, 이제 그런 일 없도록 할게.”

주혜성의 주먹이 웅크려졌다. 나직한 한 마디가 덧붙었다.

“그러니 제발 갚지 마.”

“그럼 나는 공짜로 너에게 3억 원이 넘는 돈을 받은 사람이 되는 거네.”

“그야 형은 나에게 그래도 되는 사람……!”

득달같이 벌어진 주혜성의 입이 멎었다. 싸늘해진 문성하의 낯을 일별한 그가 고개를 젖혔다. 들릴 듯 말 듯 탄식하고는, 착 깔린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내가 멋대로 벌인 일이야. 형에게 갚을 의무는 없어.”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게 그 큰돈을 받고 어떻게 가만히 있어. 넌 내가 병신으로 보여?”

문성하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장부라는 건 굳이 기록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남게 돼 있어. 이미 숫자가 내 머리에 들어와 있는데, 그 부채를 내가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갚지 않는다면 끊임없이 합리화를 하게 되겠지. 나는 주혜성과 그래도 되는 사이니까, 그러니 이 정도는 받아도 좋다. 네가 방금 말한 것처럼 말이야. 내가 필사적으로 피하려는 게 바로 그 부분이고.”

문성하의 눈이 부릅떠졌다.

“반대로 넌 그걸 원하고 있지. 안 그래?”

주혜성이 낮게 씨근덕거렸다. 그의 눈빛이 자못 허무해졌다.

“그럼 ‘고맙다’ 한 마디만 해 줘.”

그의 울대뼈를 타고 굵은 침이 넘어갔다.

“형에게 원하는 게 있다면 그거 하나야. 난 그거면 돼. 그 말 하나로 전부 갚는 셈 치자.”

거실이 호젓해졌다. 사위가 침묵에 잠식된 가운데 문성하의 재킷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뒤돌아선 문성하가 액정을 빼 확인했다. 새하얀 메시지 하단에서 익숙한 이름이 비쳤다.

「진짜 너는 끝까지 제멋대로다.

현주원」

이윽고 또 한 번의 진동이 찾아왔다. 이번엔 보다 장문이었다.

「1회 당 3203만원. 10회 총 3억 2030만원. 서비스 1회는 추가. 총 11회. 지금까지 문성하 산 것 중에서 제일 비싼 것 같네.

현주원」

이어서 세 번째 진동. 메시지에서 비린내가 났다.

「하여간 창부 같은 근성 참 못 버린다. 너도.

현주원」

“이 새끼도 쓰레기 같은 근성 참 못 버리네, 씨발. 그냥 좀 빌려 달라는데 이딴 조건을 달아?”

뇌까린 문성하가 휙 핸드폰을 던졌다. 자꾸만 험한 말이 나왔다. 씨발 새끼. 개 같은 새끼. 그럼에도 고작 욕을 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문성하의 세상에서 고리의 빚을 지지도, 투자금을 무리해 회수하지 않고도 3억 원이 넘는 부채를 탕감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숨을 고르고 난 문성하의 고개가 돌아갔다. 뒤늦게 주혜성을 발견한 문성하의 눈꺼풀이 달막였다. 주혜성은 시트에 널브러진 액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처 꺼지지 않은 화면이 고스란히 그의 눈에 담겼다. 모든 메시지를 읽고 난 주혜성의 시선이 깔렸다.

하, 진짜. 묵직한 숨을 뱉은 주혜성이 몸을 일으켰다. 등을 보인 그가 허리를 짚고 섰다. 성난 등짝이 거세게 울렁였다.

“3억 2030만 원 갚을게. 일시불로.”

문성하가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주혜성은 돌아보지 않았다.

“고맙다는 얘기 못 해 줘. 그런 건 고마울 게 있는 사이에서나 하는 일이야.”

문성하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생판 모르는 남끼리는 안 해. 보통.”

이윽고 시트 위의 핸드폰을 챙겼다. 답장을 보내기 위해 움직이던 손가락이 불현듯 덜컹거렸다. 다짜고짜 소매를 잡은 주혜성이 핸드폰을 채 바닥에 던졌다. 요란한 소음을 내며 박살 난 핸드폰이 바닥을 굴렀다. 주혜성이 버럭 했다.

“갚지 말라고 했잖아. 왜 말을 안 들어. 어?”

“뭐 하는 짓이야! 내 빚 내 뜻대로 갚겠다는데…….”

“나한테 고맙다는 얘기하는 게 그렇게 싫어?”

주혜성의 턱이 떨렸다. 그의 눈에 핏발이 섰다.

“나하고 고마울 게 있는 사이라도 되는 거. 그것도 싫어?”

미세하게 젖어 가는 눈시울이 보였다. 문성하의 혀가 눅눅해졌다. 잡힌 손목이 푹 기울었다. 차마 맨살을 만지지도 못한 채 소매만 지분대던 주혜성이 손을 놓았다. 그의 얼굴이 반쯤 돌아갔다. 분노, 혹은 고통을 삼키듯 숨만 몰아쉬는 그를 주시하다 문성하가 입을 열었다. 건조한 목소리가 나왔다.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것 아니야.”

흘러내린 눈길이 바닥에 닿았다. 축 늘어진 왼쪽 발이 옴짝거리고 있었다. 문성하는 경련을 다잡듯 제 다리를 쓸었다. 감각 없는 가죽에서는 천과 마찰하는 소리만이 미미하게 났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뿐이야.”

깔고 앉은 시트가 부스럭거렸다. 뻑적지근한 눈동자가 느릿느릿 끌어 올려졌다. 주혜성은 여전히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1회만으로 3억 2030만 원. 서비스 없이.”

문득 단호한 한 마디가 들렸다. 문성하의 귓바퀴가 바짝 섰다. 제 머리를 쓸어 올린 주혜성이 얼굴을 보였다. 할 말을 잃은 문성하가 멀거니 시트에 걸친 다리를 늘어뜨렸다.

“그것보다 조건은 훨씬 낫다고 봐.”

문성하의 앞에 선 그가 허리를 숙였다. 문성하의 낯에 음영이 졌다. 기침이 나올 것 같은 향이 물씬 코를 자극했다.

“모르는 남자에게 고맙다는 말은 못 해도, 이건 할 수 있겠지. 형에게 익숙한 거니까.”

어금니를 질근대고 난 그가 또 말했다.

“그러니 이걸로 끝내자. 전부 다.”

조금조금 달싹이던 문성하의 입에서 별안간 웃음이 터졌다. 제법 긴 폭소가 거실을 메웠다. 제 배를 감싼 문성하가 어깨를 들썩였다. 또 이렇다. 웃을 상황이 아닌데,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웃음이 몰아친다.

웃는 것 말고는 이 상황에서 만들 수 있는 표정이 없다.

“감사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

몸을 일으킨 문성하가 주혜성과 가까이 섰다. 반쯤 풀린 그의 넥타이를 어루만지고는, 조곤조곤 속삭였다.

“서비스는 봐서 해 줄게. 오늘 밤 한정으로.”

문성하의 속눈썹이 가지런해졌다. 비소를 머금은 입매가 비틀렸다.

“창부처럼 몸 대 주는 게 내 특기였다는 걸 상기시켜 줘서 참 고맙다. 응?”

넥타이를 잡은 손이 풀렸다. 몸을 튼 문성하가 먼저 발걸음을 뗐다. 서벅서벅 침실로 걸어가는 동안 주혜성은 움직이지 않았다.

괘념치 않고 침실로 간 문성하가 침대에 웅크리고 앉았다. 바깥쪽으로 귀를 틔우니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 먼저 귀가해. 내일 아침 회의는……. 제임스 임을 돌려보내는 듯했다.

통화를 마친 주혜성이 들어왔다.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내려 두며 문성하의 그림자가 미치는 곳까지 왔다. 불을 켜지 않아 컴컴한 침대를 내려다보다, 벽을 더듬으며 스위치를 찾기 시작했다. 문성하가 경고했다.

“켜지 마.”

탁. 말이 끝나자마자 안이 환해졌다. 시트에 걸터앉은 주혜성이 넥타이를 푸르며 문성하를 관찰했다. 황야처럼 고적한 눈빛이었다. 눈을 비낀 문성하가 제 바지 버클을 잡았다. 찰칵, 망설임 없이 풀린 바지가 내려갔다.

“빨리 싸고 끝내.”

주혜성은 말이 없었다. 바지를 벗어 던지고 속옷을 움켜쥔 문성하가 눈을 끌어 올렸다. 미동도 하지 않는 주혜성을 쏘아보다, 언성을 높였다.

“뭐 하는 거야? 시간 끌지 말고…….”

“어디서부터 만져야 할지 생각 중이야.”

환자라도 다루는 듯한 한 마디였다. 문성하의 눈매가 언짢게 접혔다. 신경질적인 닦달이 나왔다.

“생각할 게 뭐 있어? 내 취향 알잖아. 그냥 쑤시고, 박고. 내키면 패. 이건 어차피 거래니까 구구절절하게 위선 떨 필요…….”

“일단.”

대뜸 주혜성의 손이 다가왔다. 문성하의 입가를 부드럽게 감싸고는, 귓속말을 하듯 말했다.

“입은 막는 걸로 하자.”

그의 손아귀가 견고해졌다. 졸지에 입이 막힌 문성하가 시트를 흐트러뜨리며 꼼짝달싹했다. 달래듯 입가를 주물러 준 주혜성이 얼굴을 기울여 왔다. 메마른 뺨에 훈기가 닿았다. 흠칫한 가죽 너머의 세포가 꿈틀거렸다. 문성하의 입이 반사적으로 말아 물렸다.

“아…….”

“형이 오해를 한 것 같아. 난 형을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 없어.”

미지근한 입술이 볼을 지분거렸다. 숨을 불어넣듯 누기를 남기고, 턱선을 훑으며 이동했다. 목까지 내려가는 걸 느끼며 문성하는 저도 모르게 솜털을 세웠다. 종종 춥, 소리가 났다. 야시시한 소리가 들릴 때마다 문성하는 습관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몽우리처럼 피어오르는 간지러움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런 식으로 가라앉혔다.

문성하의 셔츠 밑단을 더듬은 주혜성이 목까지 옷을 끌어 올렸다. 곧 드러난 쇄골에 입을 맞추고, 가슴을 혀로 길게 쓴 끝에 유륜을 씹었다. 딱 아프지 않을 정도로 잘근거리는 감각에 꼭지가 쭈뼛 섰다. 문성하의 오른쪽 무릎이 덜컥 들렸다. 손아귀에 갇혀 아물거리던 입이 기를 쓰고 열렸다.

“그렇게 좀 하지……!”

“형.”

섟을 내는 문성하를 힐금한 주혜성의 고개가 비뚜름해졌다. 다정한 목소리가 귓불을 적셨다.

“느껴?”

호흡이 조금 가빠 왔다. 빠르게 얼굴을 돌린 문성하가 따졌다.

“느끼면 뭐가 달라져?”

“그러게.”

주혜성이 예사로이 입을 풀었다. 빠져나온 혀를 아랫배까지 쭉 굴리고는, 배꼽에다 끄트머리를 박으며 뇌까렸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계속해 봐야지.”

배꼽을 문질거린 혀끝이 빙글 돌았다. 알싸함에 휩싸인 아랫배가 전율했다. 급하게 배를 감싼 문성하가 목을 떨었다.

“하으…….”

“일단 한 가지는 알았어.”

배꼽 안까지 마음껏 휘젓고 난 혀가 빠졌다. 곧 그 밑의 살에 표면을 붙이고는, 살살 문지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성하가 미처 벗지 못한 속옷을 지나친 혀가 왼쪽 허벅지에 다다랐다. 유독 축축한 물기를 남기고 난 그가 덧붙였다.

“형 왼 다리, 지금 꽤 잘 움직여.”

문성하의 동공이 확장됐다. 황급히 옮겨진 시선이 제 왼 다리를 쫓았다. 한껏 세워진 무릎 밑으로 시트를 짚은 왼발이 보였다. 문성하의 목이 꿀꺽거렸다. 언제 저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주혜성과 같이 있는데, 왜.

“형의 왼 다리는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닌지도 몰라.”

눈을 감은 주혜성이 입술을 끌어 내렸다. 오랜만에 재회한 연인을 애무하듯, 헐벗은 살을 마구 널름거린 그가 목소리를 깔았다.

“그냥 두려웠던 거야.”

쪽, 소리와 함께 무릎이 빨렸다. 입술이 종아리를 타고 내려갔다.

“지금의 이 상황이.”

달달거리는 왼쪽 발등에 당도한 입술이 지그시 자국을 냈다. 주혜성의 어조에 응달이 졌다.

“나와 닿아서 비로소 살아나는 게.”

전기라도 맞은 듯 펄떡 튕긴 발이 내려앉았다. 지난한 마취에서 깬 것처럼 옴짝거리는 그것을 바라보며 주혜성은 또 입을 맞췄다. 발목과 발등, 그리고 다섯 개의 발가락. 샅샅이 흡입을 마친 그가 마지막 새끼발가락을 입 안에서 굴렸다. 막 빙하기에서 벗어난 양 얼어 있던 발가락에 아찔한 훈기가 감겼다. 문성하는 사지를 결박당한 사람처럼 몸을 움츠렸다.

발가락에서 시작된 신열이 발등과 발목, 종아리, 허벅지를 타고 올라왔다. 주혜성의 혀가 굴러간 길을 고스란히 역류해 문성하의 얼굴에 도달했다. 불에 덴 것처럼 눈시울이 시큰했다. 주혜성의 손이 문성하의 입가에서 떨어졌다. 자유로워진 얼굴이 떨구어졌다. 시트에 그대로 파묻고는, 못 울어 지친 사람처럼 이를 갈았다.

“그냥 말하지 마…….”

주혜성이 이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바랐다. 진심으로.

이보다 잔인할 수 없었다. 왜 운명은 증오하고 싶은 걸 마음껏 증오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걸까. 제 사지를 꺾은 바람에 온기를 실려 돌려보내고, 그것으로 죽은 신체를 되살려 낸다. 이 바람이 문성하의 유일한 독이자 약이라 부추겨 온다.

더 서글픈 건 문성하 역시 한 번쯤 이 생각을 했었다는 사실이다. 웬만해선 남이 주는 걸 먹지 않는 자신이 택한 유일한 독을 삼켰을 때, 이미.

약도 이 사람의 몫임을 직감했다.

너무도 비참해, 가슴 깊숙이 숨겨 두기 급급했던 말로였다.

“고마워……. 흐읍, 혜성아.”

흐무러지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눈앞의 주혜성이 굳었다. 문성하는 젖은 눈으로 그를 마주 봤다. 볼을 타고 비처럼 눈물이 흘렀지만, 닦을 정신도 여력도 없었다. 그저 그에게 이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얘기했으니까…….”

더는 비참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만하자.”

문성하가 그렇게나 주혜성과의 사이에 벽을 두려 한 것이. 어떻게든 그와 ‘남’이 되고 싶어 발버둥 친 것이. 조금이라도 연결되는 순간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무서워서였다는 걸. 그 순간 과거의 일이 반복될 것이 두려워서였다는 걸.

그러므로 문성하는 마지막 경고를 했다.

주혜성은 당연히 듣지 않았다.

“형은 나하고 할 때마다 울어.”

문성하의 면전까지 얼굴을 끌어 올린 주혜성이 중얼거렸다. 이내 문성하의 볼에 입을 붙이고는 조금조금 물기를 빨아들였다. 문성하는 축 늘어진 손을 들어 주혜성의 어깨를 밀었다. 꿈쩍도 하지 않은 그가 읊조렸다.

“그리고 난 형하고 할 때마다 멈출 수가 없고.”

기척도 없이 다가온 손이 문성하의 속옷을 쥐어 잡았다. 단숨에 끌어 내려 발밑으로 빼내고는, 양 허벅지를 붙들었다. 안달이 난 것처럼 문성하의 다리를 젖힌 주혜성이 기탄없이 엉덩이 틈에 얼굴을 묻었다. 기겁한 문성하가 단말마를 닮은 소리를 냈다.

“아……!”

굶주린 뱀처럼 혀가 들이닥쳤다. 주름진 입구를 게걸스럽게 핥아 대다, 중심부에 끄트머리를 처넣으며 안을 비집었다. 벌름거리는 구멍이 주혜성의 타액에 마구 젖어 갔다. 아랫입술로 회음부를 비빈 그가 문성하의 성기에 코를 박고 음미했다. 사타구니의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문성하가 발가락을 옴씰거렸다. 시트에 묻힌 입에서 애원이 삐져나왔다.

“하아……. 아, 그만하자고 했잖…….”

“어떻게 그만해?”

돌아온 대꾸는 열화 그 자체였다. 문성하는 까물거리는 눈으로 밑을 확인했다. 이성을 놓은 채 문성하의 치부를 빨아 대는 주혜성이 보였다. 취한 것처럼 헉헉거린 그가 말했다.

“내가 이미 형하고 한 걸 다 기억하는데.”

그가 재차 혀를 찔러 넣었다. 불쑥 들어온 살덩이가 울렁이는 점막을 마구잡이로 찍어 댔다. 문성하의 목이 풀려 갔다. 워낙 오랜만에 들인 남자라 상황도 감각도 생경했다. 처음 하는 것처럼 모든 게 낯설었다. 녹은 성대를 품은 목울대가 덜덜거렸다.

주혜성은 지치지도 않고 밑을 흡입했다. 툭 튀어나온 그의 목젖이 자주 불끈거렸다. 주기적으로 소용돌이 같은 혀 놀림이 내벽을 휩쓸었다. 점액과 타액이 섞이는 질척한 소리가 구멍 틈으로 샜다. 버티는 일에 지친 문성하의 머리가 시트에 처박혔다. 버둥질하는 몸이 마지막 호소를 흘렸다.

“흐으, 아아……. 나, 난 못 해……!”

“왜 못 해. 하면, 또 나에게 끌릴까 봐?”

주혜성의 상체가 들렸다. 분기 어린 손이 제 셔츠 단추를 풀어 헤쳤다. 빠르게 틈을 드러낸 셔츠가 뒤로 젖혀졌다. 거추장스러운 허물을 벗듯 바닥에 던진 그가 바지 윗단을 잡으며 말했다.

“난 그래서 하는 거야. 형.”

가차 없이 풀린 버클이 속옷과 함께 끌어 내려졌다. 몰린 피를 감당하기 버거워 아나콘다처럼 굼틀거리는 음경이 튀어 올랐다. 무릎까지 옷가지를 내리고 난 그가 눈에 띄게 시근덕거렸다. 더는 벗을 여유도 없다는 듯, 대뜸 팔을 내밀어 문성하의 양다리를 안았다. 기계처럼 자신의 어깨에 걸친 그가 물었다.

“비겁하다 생각해?”

가까스로 눈길을 준 문성하가 끄덕였다. 허망한 혼잣말이 따라붙었다.

“나도 비겁하고.”

주혜성의 어금니가 깨물렸다. 다리를 안은 팔뚝에 툭 핏줄이 섰다. 불현듯 내뻗은 하반신이 문성하의 엉덩이와 밀착했다. 회음부에 붙은 성기가 길을 들이듯 맨살을 아래위로 쓸었다. 흡, 소리를 낸 문성하가 발가락을 웅크렸다. 그 와중에 원활한 자신의 왼발이 원망스러웠다.

진득한 쿠퍼액이 구멍에 처발렸다. 아래가 척척할 정도로 제 체액을 바르고 난 주혜성이 한 손을 내려 문성하의 둥근 엉덩이를 쥐었다. 입구를 쪼개듯 벌리고는, 우악스러운 허리 짓을 했다. 철퍽, 소리를 내며 두꺼운 남근이 구멍에 쑤셔 박혔다. 마른 뱃가죽이 삽시간에 불룩해졌다. 문성하가 고개를 젖히며 몸부림쳤다.

“잠깐, 흐으……. 갑자기 큰 거 넣으면 안……!”

“정말 현주원하고 자려고 했어?”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까워진 주혜성의 눈망울에 흑단 같은 이채가 스쳤다. 그가 버럭 효후했다.

“말해 봐. 진짜 자려고 했는지.”

문성하의 입이 서슴거렸다. 머릿속이 먹구름이라도 낀 양 흐리멍덩했다. 끄무레한 뇌리에서 주혜성의 질문이 서풍처럼 떠다녔다. 현주원과 진짜 자려고 했냐고. 답문은 보내려 했지만, 그 내용은.

바람에 날려 먹구름이 흩어졌다.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머리가 텅 비었다. 문성하는 무중력에 갇혀 자문했다. 자신이 아까 보내려 했던 문자, 뭐였을까.

“아니잖아.”

주혜성의 고개가 기울었다. 갈구하듯 문성하의 목에 얼굴을 묻고는, 화풀이를 하는 것처럼 허리를 들썩였다. 훅 들어온 생식기가 빠듯한 배 안을 휘저었다. 망울진 소름이 폭죽처럼 터져 갔다. 혼절할 정도로 띵한 소양증이었다. 소스라진 문성하가 시트를 쥐어짰다. 앓아 대는 입에서 외마디 소리가 나왔다.

“흐……. 아아, 읏……!”

“현주원하고 자려고 한 거 아니잖아. 어?”

실팍한 귀두가 움찔거리는 내벽을 비비적거렸다. 배 안의 세포들이 요탕을 쳤다. 문성하는 제 얼굴에 쓸리는 사포 같은 시트를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볼이 뜨겁다 못해 아렸다.

또 정곡이다. 이젠 아프지도 않다. 괴로울 뿐이다.

“상관없잖아. 그만해.”

내내 침묵하던 입에서 악에 받친 한 마디가 터졌다. 시트를 배회하던 손이 눈가를 덮었다. 어둠 속에서 고요가 찾아오자, 텅 빈 머리가 대신 동요할 것을 찾듯 채워져 갔다. 문성하는 가지런한 서재처럼 정돈되는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아까 자신이 만들려 했던 핸드폰 속 답장을.

꺼져. 이 씨발 새끼야.

“제발 그냥 박아. 아무 말 하지 말고.”

얼굴에서 손을 내린 문성하가 읊조렸다. 그늘진 주혜성의 낯에서 미간이 꾸물거렸다. 크게 심호흡한 그가 분을 삭이듯 주억거렸다. 조금은 서글픈 대꾸가 찾아들었다.

“그래. 그러자.”

널따란 어깨에 걸린 양다리가 고쳐 잡혔다. 보다 몸을 낮춘 주혜성의 허리 놀림이 빨라졌다. 파도처럼 밀려든 치골이 엉덩이를 부술 기세로 철써덕거렸다. 배 속이 한계까지 꽉 찼다. 공기 통할 틈도 없이 뻑적지근해진 내벽이 성기의 주름과 맞물리며 요동을 쳤다. 그저 받아들이고 있을 뿐인데 숨이 찼다.

거칠어지는 파동과 비례해 배 안의 소양감이 짙어졌다. 몸서리치던 문성하가 양 눈을 꽉 감았다. 작정하고 달려드는 주혜성의 몸짓에 제 안의 음기가 반응하는 게 느껴졌다. 뇌의 거부를 가뿐히 무시하는, 이기적이며 독단적인 감응이었다. 문성하는 어둠 속에서 제 육신을 모욕했다.

참으로 쉽다. 쉬워서 우스울 지경이다.

이마에 뚝, 땀방울이 떨어졌다. 마찰이 반복되며 발개진 어느 점막을 머금고 귀두가 나사를 조이듯 돌아가기 시작했다. 제대로 짓눌린 점막이 터질 것처럼 팽창했다. 양발을 옴짝달싹한 문성하가 화들짝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열기를 뿜는 주혜성이 들어왔다. 급히 나아간 손이 주혜성의 팔뚝을 잡았다.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듯 흐늘거리는 저항을 꺼냈다.

“하아……. 거기, 거기 하지 마…….”

“여기잖아.”

“대충, 대충하고 싸……. 제발…….”

“싫어.”

단호하게 거절한 주혜성이 문성하의 머리를 손으로 감싸며 다른 손으로 침대 헤드를 잡았다. 어깨에 걸쳐진 다리가 몸 쪽으로 밀리고, 두 사람의 나신이 바듯하게 엉겼다. 시야가 온통 주혜성의 얼굴과 벗은 몸으로 찼다. 똑바로 마주 본 그가 말했다.

“가는 거 보여 줘.”

헤드를 쥔 손아귀에 핏대가 섰다. 한껏 힘이 들어간 하반신이 포효하듯 철썩였다. 사납게 틀어박히는 귀두에 짓무른 점막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언뜻언뜻 보이는 문성하의 배가 발버둥 치는 태아를 품은 양 솟구쳤다 가라앉았다. 문성하는 주혜성의 땀과 자신의 땀으로 젖은 얼굴을 훔치며 울컥거렸다. 그새 쉬어 버린 목에서는 새된 숨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짐승 같은 움직임을 견디지 못한 시트가 무시로 덜컹거렸다. 덩달아 밀린 문성하의 머리가 침대 헤드를 향해 삐걱거렸다. 닿지는 않았다. 머리를 잡은 주혜성의 손이 대신 충돌하며 쿵쿵거렸다. 지나칠 정도로 부딪치는 게 신경 쓰여 잠시 곁눈질을 했다. 손등에 맺힌 핏방울이 보였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착, 살 튕기는 소리가 시트를 울렸다. 빨갛게 부은 엉덩이가 화끈거렸다. 혹여나 피가 나나 싶어, 문성하는 불안정하게 제 하반신을 더듬었다. 그 손을 휘어잡은 주혜성이 문성하를 주시했다. 무지근한 질문이 다가왔다.

“형은 왜 생각해 보려는 노력도 안 해?”

문성하의 손을 거머쥔 채로 주혜성이 또 하반신을 뜰썩였다. 오도 가도 못한 문성하가 진저리를 치다 고개를 돌렸다. 무심코 본 헤드의 한 곳에 금이 가 있었다. 문성하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잠까…….”

콰직.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헤드 한 부분이 작살났다. 찌푸린 주혜성이 몸을 일으켰다. 멍하니 헤드를 본 문성하가 한탄하듯 옅은 숨을 내쉬었다. 뜯어진 부분을 대충 구겨 놓은 주혜성이 문성하의 등 뒤로 손을 집어넣었다. 맥 빠진 몸이 쉽게도 들렸다.

본래도 조금 가벼운 수준의 정상 체중이었지만 5년 새 다소 빠진 상태였다. 반대로 주혜성은 그사이 많이도 커지고 단단해져, 힘도 들이지 않고 문성하를 안아 다루는 게 자연스러울 지경이었다.

“얼마야?”

연결된 하반신을 다른 팔로 받친 주혜성이 물었다. 문성하가 무기력하게 답했다.

“120만 원.”

“갚을게.”

“필요 없어.”

굴러간 문성하의 눈이 주혜성을 담았다. 색색거리는 한 마디가 따라붙었다.

“한시 빨리 나 편해지게 해 주는 게 갚는 거야.”

주혜성이 무미건조하게 응수했다.

“그냥 갚을게.”

문성하의 몸이 번쩍 들렸다. 일어난 주혜성이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꼭 안긴 문성하가 쏘아붙였다.

“어디가.”

“침대에서 못해. 부서진 헤드에 형 머리라도 부딪치면 위험해.”

주혜성의 걸음이 멎었다. 훤하게 펼쳐진 침실 벽에 다다라 있었다. 매끈한 면에 문성하의 등을 붙인 그가 말했다.

“벽도 부서지면 갚을게.”

양 허벅지를 밑에서 받친 팔뚝이 두꺼워졌다. 차가운 등 뒤가 불안해 문성하는 저도 모르게 주혜성의 등을 감은 다리를 교차로 모았다. 이런 체위를 과거에도 한 일이 있지만, 그때는 상대방의 키가 이 정도로 크지 않아 떨어지는 것에 대한 부담이 적었다. 지금은 좀 무섭다.

“다리로 잘 안고 있어. 떨어져도 내가 알아서 받치겠지만.”

내려간 팔이 문성하의 허리를 둘렀다. 굵은 밧줄처럼 견고하게 옥죈 주혜성이 뇌까렸다.

“침대에서 하는 것하고 똑같이 될지는 모르겠어. 이 자세가 처음이거든.”

하반신을 느릿느릿 올려붙인 그가 덧붙였다.

“형 말고는 해 본 적이 없으니까. 기본적으로 잘 몰라.”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밑에서 철썩, 소리가 났다. 헉, 한 문성하의 발가락이 옹송그려졌다. 단숨에 아까의 점막을 찾아 후비고 들어온 귀두가 부은 살을 밟아 대며 꿀렁였다. 손을 내민 문성하가 주혜성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배 안의 아릿함이 겹쳐져 달뜬 호흡이 새어 나왔다.

“하윽……. 사, 살살 해…….”

“살살하지 않으면.”

주혜성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이 공간에 와 처음 보인 미소였다. 문성하는 그만 어깨를 늘어뜨렸다. 말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성하에 눈을 둔 주혜성이 이악스레 허리를 튕겼다. 매라도 맞은 양 빨간 엉덩이와 딱딱한 치골이 교착하며 음란한 소음을 자아냈다. 소리가 터질 때마다 강고한 생식기가 간을 보듯 내밀한 부위를 건드렸다.

감질나는 자극에 하반신이 맥을 못 추고 동탕했다. 어느새 굳어 버린 문성하의 성기가 발갛게 달아 갔다. 문성하는 어떻게든 숨겨 보려 주혜성과 몸을 겹쳐 버렸다. 부들거리는 등줄기를 쓸어 준 주혜성이 눈을 깔았다. 담담한 언어가 귀를 스쳤다.

“숨겨도 다 알아.”

살짝 빠진 그의 허리가 힘 있게 튀어 올랐다. 착, 소리를 내며 음낭과 기둥 일부만 남긴 채 전부 처넣고는 붓다 지쳐 무르녹은 점막을 찾아 쑤석거렸다. 아. 문성하가 벼락 맞은 사람처럼 옴지락거렸다. 잘근잘근 점막을 애무한 귀두가 돌연 거친 삽입질을 시작했다. 더 팽창할 게 있을까 싶었던 살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풀었다. 버둥거린 문성하가 목을 놓았다.

“하, 아아……. 으응. 아, 제발……!”

“진짜 형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야.”

“흐읏…… 아. 하지 마, 그만 좀…… 흐윽.”

“그래서 벌 좀 주려고.”

쐐기를 박듯 솟구친 귀두가 부은 살을 정확히 찍어 눌렀다. 배 안에서 자르르 전류가 흘렀다. 주혜성이 헐떡였다.

“내가 5년 내내 원했던 거, 형도 똑같이 느껴.”

허우적거린 문성하가 주혜성의 등에 손톱을 꽂았다. 한계에 다다른 내벽에서 꿈적거림이 잦아들고, 조용해진 아랫배에서 폭발처럼 전격이 번졌다. 응고된 감응이 모조리 하반신에 쏠리며 시뻘게진 성기에서 세찬 물줄기가 터졌다. 사방팔방 튄 액이 주혜성의 얼굴을 스쳤다. 가만히 제 얼굴을 훔친 그가 묻은 걸 핥았다.

벌벌거리던 다리가 끝내 팍삭했다. 고개 숙인 문성하가 주혜성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누적된 사정감만큼 긴 사출이 이어졌다. 소변처럼 줄줄 흐르는 액을 차마 보지도 못한 문성하가 어깨를 경련했다. 흐느끼는 혼잣말이 나왔다.

“내가 이럴 것 같아서…….”

그렇게 피하고, 그렇게 도망쳤는데. 이 남자는 그간의 노력을 허술한 모래성처럼 쉽게도 함락시킨다. 성이 사라진 자리에 자신의 깃발을 꽂는다. 이딴 건 처음부터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는 것처럼.

“너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했는데.”

주혜성의 얼굴이 내려왔다. 간신히 눈물을 참는 문성하의 볼에 입을 맞추고는, 나긋나긋 말했다.

“난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 생각하는데.”

그의 눈이 흑염처럼 빛났다.

“날이 밝을 때까지 몇 번이고 알려 줄게. 형이 날 얼마나 좋아하는지.”

처져 있던 문성하의 속눈썹이 서서히 들렸다. 주혜성은 색채 없는 도파처럼 문성하를 마주 봤다. 치를 떤 문성하가 주혜성의 벗은 어깨를 붙들었다. 피라도 낼 기세로 손톱을 박고는, 거세게 그르렁거렸다.

“소파로 가서 누워. 지금 이 기분이 얼마나 좆같은지 몸으로 알려 줄게.”

어조에 미미한 울컥거림이 뱄다.

“어차피 오늘뿐이잖아.”

***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기진맥진해 혼절하기 직전의 일이다. 앞서 창 너머에서 번개가 번뜩이는 걸 봤는데, 물 떨어지는 소리가 밖에서 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눈앞에서 난 것인지 확실치 않았다. 어쨌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빗소리이거나, 주혜성이 흘린 땀방울의 마찰음이거나.

몇 시간을 했는지 명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끝나지 않는 곡예처럼 성교를 했다는 건 분명하다. 체위는 수시로 바뀌었다. 문성하가 주혜성의 위에 올라타기도 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다리를 교차로 엉기기도 하고, 또 언젠가는 문성하가 창문을 짚은 채 둘 다 서서 했다. 너무도 많은 체위를 거쳐 일일이 헤아리기도 어려웠다.

“형. 진심 아니지?”

세 번째인가 네 번째 사정을 마쳤을 때 주혜성이 물었다. 문성하는 반쯤 정신을 놓은 채 바닥에 흩뿌려진 자신의 체액을 더듬고 있었다. 잠잠하기만 한 문성하를 살피다, 주혜성이 손을 뻗었다. 강제로 잡힌 문성하의 고개가 돌아갔다. 코앞까지 가까워진 그의 몸에서 땀에 젖은 나무 내음이 풍겼다. 이번에는 기침이 나오지 않았다.

“오늘뿐이라고 한 거, 진심 아니잖아.”

간헐적으로 솟는 그의 울대뼈는 끓어오를 구석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휴화산 같았다. 문성하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숙였다. 반질거리는 체액을 길게 쓸고는, 밀린 숙제라도 마무리 짓는 학생처럼 말했다.

“마저 하자.”

문성하의 얼굴에서 손이 떨어졌다. 바닥을 짚은 주혜성의 손아귀가 뭉쳐졌다. 그뿐이었다. 바닥을 깨부수기라도 할 양 꾹 짓누르고 난 그가 몸을 일으켰다. 대뜸 문성하의 팔을 채 일으키고는, 체액이 묻지 않은 공간으로 이끌고 갔다. 또 섹스를 했다.

동이 틀 때까지 쉬지 않고 몸을 접합했지만, 그들이 주고받은 대화는 열 마디가 채 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번식을 갈구하는 짐승 같은 밤이었다.

***

뚝. 또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구물거리던 눈꺼풀이 들렸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맞은편에서 지난밤 지겹도록 맡은 향이 났다. 굳이 확인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문성하가 눈을 돌렸다. 젖혀진 커튼 너머로 바깥이 보였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장마래.”

뒤편에서 속삭임이 들렸다. 문성하는 여전히 창문을 본 채 말했다.

“그래.”

“형이 잠든 사이에 천둥이 많이 쳤어.”

“그래.”

“형이 잠든 사이에 쳐서 다행이야.”

여운이 형형한 목소리였다. 문성하는 힐긋 그를 봤다. 주혜성이 먹먹하게 중얼거렸다.

“형하고 같이 천둥소리 들으면, 좀 힘들 뻔했어.”

문성하가 높낮이 없이 대꾸했다.

“그날 천둥은 안 쳤어.”

“나도 알아.”

그가 들릴 듯 말 듯 덧붙였다.

“그냥, 천둥 닮은 소리를 들어서 그래. 그날.”

문성하는 답을 하지 않았다. 주혜성도 말을 하지 않았다. 문성하의 눈길이 흘러갔다. 불안정하게 시트를 갉작이는 주혜성의 손이 보였다. 손등에 피멍이 들어 있었다. 정확히 무엇이 원인이었을지, 문성하는 잠시 생각했다.

자신의 머리를 받치다 헤드에 부딪칠 때 생긴 걸까, 아니면 자신의 허리를 안고 벽에다 들이박을 때 생긴 걸까. 문성하는 특정한 사건의 경과를 따지는 일에 취약했다. 항상 결과를 생각했다. 경과를 따지다 보면 쓸데없는 것까지 상기하게 마련이다.

그날, 자신을 들이받은 차의 충돌음이 천둥소리를 닮았는지 어쨌는지도. 문성하는 기억하지 못한다.

빗줄기가 굵어졌다. 뚝, 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구조 신호를 보내듯 창문을 두드려 왔다. 문성하는 조금 긴장이 됐다. 절로 웅크리는 문성하를 알아챈 주혜성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살짝 열린 창문을 닫고, 커튼마저 통째로 드리웠다. 빗소리가 작아졌다.

“몇 시야?”

문성하가 물었다. 주혜성은 고개를 저었다.

“몰라.”

“핸드폰…….”

혼잣말을 하며 주변을 살폈다. 협탁에도 바닥에도 자신의 핸드폰은 없었다. 생각해 보니 지난밤 주혜성이 뺏어 바닥에 던져 버렸다. 액정이 박살이 났었다. 작동은 멀쩡히 되는 걸까. 핸드폰의 상태도 보고 시간을 확인할 겸 이불을 치우고 몸을 일으켰다. 가로막은 주혜성이 도로 문성하를 눕혔다.

“형 핸드폰 고장 났어.”

협탁을 헤집은 그가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전원이 꺼져 있었다. 문성하가 눈을 찡그렸다.

“전원 나갔잖아.”

“나간 거 아니야. 끈 거야.”

설명한 주혜성이 억지로 핸드폰을 쥐여 줬다. 이내 문성하의 뒤통수를 안으며 자신 쪽으로 당겼다. 어지러운 체향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문성하는 취기가 오른 사람처럼 킁킁거렸다. 어지럽긴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정도는 참아 줄 용의가 있었다.

핸드폰의 전원을 눌렀다. 환한 빛이 번쩍이다 메인 화면이 나타났다. 통신이 잡히자마자 요란하게 본체가 진동했다. 부재중 전화 내역이며 메시지를 합쳐 백 개가 훌쩍 넘는 알람이 띄워졌다.

「오전 회의 제발! save me!!!

James Lim」

「전화 받아 부탁이다 1시간 12분 후에 결재야 어?

DZ」

「회사 뒤집힘 CEO가 오전 6시부터 8시간 넘게 잠수타면 어쩌란 거?????

Hanna」

대충 눈에 띄는 문자만 훑어본 문성하가 주혜성을 힐끔했다. 주혜성은 아무 일 없었다는 양 문성하의 옆얼굴에 이마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문성하는 액정 상단의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2시 53분이었다.

딩동. 현관 쪽에서 벨 소리가 났다. 탕, 탕! 문 두드리는 우렁찬 소리가 이어졌다. 주혜성! 나와, 제발! 나 죽는 꼴 보고 싶어? 익숙한 남자 목소리. 아마 제임스 임일 거다. 문성하가 주혜성을 흔들었다. 끄떡도 하지 않은 주혜성이 아이처럼 문성하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나가 보지 그래.”

핸드폰을 내려 둔 문성하가 말했다. 주혜성이 노곤하게 답했다.

“생각 없어.”

“회사 문 닫을 셈이야?”

“관심 없어.”

“주혜성.”

“여기서 벗어나지 않을 거야. 단 한 발자국도.”

주혜성이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그의 미간이 좁혀 들었다.

“형도 마찬가지로 못 벗어나고.”

문성하의 입매가 일자로 다물렸다. 재차 주혜성을 밀어 내기 위해 들린 손이 그대로 내려갔다. 털썩 시트에 두고는, 다른 손으로 이불을 잡았다. 훅 끌어 올려 주혜성의 어깨를 덮어 줬다. 군데군데 힘줄 잡힌 등짝이 사라졌다. 주혜성이 주춤거렸다. 문성하가 입을 열었다.

“지금이 오후 2시 53분이니, 앞으로 7분. 오후 3시까지.”

바싹 다가간 문성하가 눈을 부릅떴다. 흠칫한 주혜성의 어깨가 밀려 났다.

“이 공간에 날 붙잡아 둔다 해서 내가 널 떠나지 않는 건 아니야. 12세짜리처럼 굴지 마.”

문성하가 또박또박 쏘아붙였다.

“난 그때의 형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주혜성.”

주혜성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이불 밑에서 문성하보다 두 배는 굵어 보이는 팔뚝이 불끈거렸다. 문성하는 묵묵히 내려다봤다. 황망하게 움찔거리는 손등에서 핏자국이 두드러졌다. 거기에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여 주고 싶은 충동이 잠시 일었으나 곧 포기했다. 이유는 불과 몇 초 전 자신이 얘기했다.

그때의 동생이 아닌데, 다 무슨 소용인가.

“왜 이래야 하는데?”

공률하는 질문이 들렸다. 문성하의 어깨를 잡은 그의 손아귀가 뇌호해졌다. 벌벌거리는 진동이 고스란히 전이됐다. 문성하는 사막처럼 건조한 눈으로 그를 봤다. 주혜성의 목에 핏대가 돋았다.

“내가 형을 원하고, 형도 나를 원하잖아. 그런데 왜…….”

“찢어진 걸 붙인다고 처음으로 돌아가? 애 같은 고집 넣어 둬. 제발.”

소리친 문성하가 이불 밑에서 손을 옮겼다. 부들거리는 주혜성의 핏자국을 덮고는, 사뭇 차분하게 말했다.

“넌 습관처럼 나를 기만했고, 난 거기에 셀 수 없을 만큼 다쳤어. 왼 다리 부서진 거? 나한테 그건 다친 것도 아니야. 그보다 몇 배는 큰 상처가 안에 남았어. 이게 내가 겪은 진짜 사고야. 넌 내 후유증이고. 후유증하고 누가 연애를 하겠어. 안 그래?”

문성하의 눈이 비껴 났다. 시트에 둔 핸드폰을 살폈다. 오후 2시 58분. 기탄없이 일으켜진 알몸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잡기 위해 내뻗어진 주혜성의 손은 문성하에게 닿지 못했다.

“부서진 핸드폰 바꾸는 김에 번호 바꿀 거고, 집 비우는 김에 다른 곳으로 거처 옮길 거고, 재활 센터 끊겨서 몸 보전할 방도 찾는 김에 당분간 회사 쉴 거야. 네가 지금껏 파악한 내 모든 동선은 이제 무용지물이야.”

몸을 굽힌 문성하가 널브러진 옷가지를 챙겼다. 속옷과 바지를 차례로 입어 가며 말을 이었다.

“몇 번이고 경고했지만, 지금까지의 방식대로 사람 풀어 나 감시하고 추적할 생각하지 마. 네가 짠 연극판 위에서 더 이상 놀아나고 싶지 않으니까. 이건 부탁이자 경고야.”

바지 버클을 채운 문성하가 다음으로 셔츠를 건져 올렸다. 팔뚝을 집어넣고, 단추를 하나하나 잠그는 내내 침대 위의 주혜성은 잡을 수 없는 지평선을 앞에 둔 사람처럼 밭은 숨만 몰아쉬었다. 마지막 단추를 채우고, 마무리로 재킷을 챙긴 문성하가 주혜성을 바라봤다.

“내가 잔인하다 생각하지 마. 넌 나에게 더했으니까.”

말을 마친 문성하가 다리를 뻗었다. 막 내디뎌진 발에 천 하나가 걸렸다. 문성하의 시선이 내려갔다. 주혜성의 넥타이였다. 새삼 살피니 일전에 본 제임스 임의 것과 같은 디자인이다. 파란색 바탕에 프랑스 하이엔드 명품 브랜드 로고. 집어 들어 뒤편을 확인했다. ‘for NGX’라는 자수가 보였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 브랜드에서 특별 제작한 이 회사만의 넥타이다.

언젠가 신문에서 본 적이 있다. 소위 ‘NGX맨’으로 불리는 NGX 직원에게는 회사에 자부심을 가지지 않고 못 배길 정도의 파격 대우가 주어진다고. 명품 브랜드에서 NGX맨만을 위한 넥타이를 만들어 주는 건 서두에 불과하다.

또 다른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는 NGX맨만의 수트를 제작하고, 세계적인 호텔 체인은 NGX맨 전용 파티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며, 본사는 직원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요트와 경비행기를 제공한다. 명품 수준의 복지 제도는 NGX의 브랜드 가치를 격상시키는 한편 직원의 프라이드를 끌어 올리며 회사의 이익 창출에 일조한다. 신문은 이것이 ‘주혜성 리더십’의 일환이라 평가했다.

“넌 참 사는 게 쉽겠다. 마음만 먹으면 이런 넥타이 몇백 개는 손짓만으로 만들 수 있을 테니.”

문성하가 넥타이를 던졌다. 툭 떨어진 천이 바닥을 굴렀다.

“난 이게 꼴도 보기 싫어.”

다시금 발을 옮긴 문성하가 뇌까렸다.

“네 여유로 날 압박하는 게 지긋지긋해.”

나아간 발이 문지방 앞에서 멎었다. 막 문손잡이를 잡은 문성하의 등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지막한 부름이 들렸다.

“형.”

문성하의 얼굴이 돌아갔다. 몸을 일으킨 주혜성이 다가왔다. 문성하의 앞에 선 그가 벗은 상체를 숙였다. 버려진 넥타이를 줍고는, 천천히 허리를 세우며 말했다.

“가져가. 선물.”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문성하가 인상을 썼다. 주혜성이 고저 없이 덧붙였다.

“부탁할게.”

탐탁지 않은 손이 넥타이를 받았다. 손을 푼 주혜성이 물러났다. 미적거리는 손이 넥타이를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다시 손잡이를 잡는 문성하의 귓가에 무지근한 한 마디가 내려앉았다.

“기다릴게. 형.”

문성하는 보지도 않고 응수했다.

“그럴 필요 없어.”

철컥, 문이 열렸다. 벌어진 문틈으로 발을 내미는 문성하의 뒤통수로 조금은 눅눅한 목소리가 찾아들었다.

“기다리게라도 해 줘.”

어조에서 떨림이 짙어졌다.

“그래야 형 꿈이라도 꿀 것 아니야.”

입술을 질근 문 문성하가 가차 없이 문을 닫았다. 탕. 요란한 소음과 함께 주혜성이 사라졌다. 신속히 발을 뻗어 현관으로 직행했다. 자꾸만 눈시울이 시큰했다. 문성하는 눈물샘을 옥죄듯 주머니 속 넥타이를 움켜쥐었다. 매끈한 실크 원단이 물처럼 흐늘거렸다. 문성하는 입수를 준비하는 사람처럼 허덕였다.

넥타이 하나를 남기고 주혜성이 준 모든 것을 버렸다. 그가 지난 5년간 견고하게 세팅한 무대에서 퇴장했다. 이제 문성하는 그의 그리움조차 느낄 수 없게 됐다.

자초한 결과인데도 눈이 아렸다. 문성하는 눈가를 비벼 가며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다. 7년간 닳도록 쥐었던 것이 새삼 생소하게 비틀렸다. 그간 한 번도 들은 적 없던 갈이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꼭 천둥소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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