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37)

23.

「NGX ‘K-엔젤 벤처’ 1호 기업에 에센더…… ‘베이스터 신화’ 주혜성 전면에」

최재율이 팔락거리던 신문을 구석에 치웠다. 문성하는 보는 둥 마는 둥 손에 쥔 아메리카노 잔만 흔들었다. 창문에 눈을 둔 최재율이 다리를 꼬았다. 심드렁한 질문이 찾아들었다.

“신기하지 않냐.”

“뭐가.”

스트로를 쭈웁, 빨아들인 문성하가 되물었다. 여전히 창문을 본 최재율이 답했다.

“에센더 말이야. 우리가 올 초에 본 에센더는 널리고 널린 에듀테크 기업이었어. 경쟁사에 비해 특별할 게 없는 건 물론이고, 오히려 떨어진다면 떨어지는 곳이었지. 우리뿐 아니라 많은 투자업계 사람이 그렇게 생각했고.”

“그런데.”

“NGX가 에센더에 투자한다 하니 갑자기 뷰가 달라지는 거야. 하잘것없던 에듀 테크 기업이 금방이라도 실리콘 밸리에 상장할 회사로 포장돼 세간의 관심을 받아. 웃기지 않아?”

“원래 투자업계가 다 그런 거지.”

“세상에는 나와 차원이 다른 플레이어가 존재하는구나, 나는 감히 그걸 우러러볼 수조차 없겠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최재율이 다리를 풀었다. 내용물의 절반을 한꺼번에 비운 문성하가 잔을 밀었다. 곳곳에 더께가 묻은 테이블을 응시하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형. 세상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어. 타고나길 범인이 아닌 사람과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범인일 수밖에 없는 사람.”

시큰둥한 언어가 따라붙었다.

“형하고 나는 애초에 후자로 태어났어. 그걸 이제 와서 어떻게 고쳐?”

최재율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테이블 밑으로 바닥을 다듬이질하는 그의 구둣발이 보였다. 문성하는 그것을 무언의 수긍으로 읽었다.

“실례합니다.”

돌연 사무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내근하던 여직원이 외쳤다. 그냥 들어오시면 돼요. 바로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빠끔히 들이밀어졌다. 문성하의 몸이 절로 일어섰다.

“안재림 대표…….”

“안녕하세요? 문 대표님.”

해맑게 웃은 안재림이 들어섰다. 품에 둥그런 플라스틱 용기를 안고 있었다. 멀리서도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겼다. 한 시간 전부터 입이 심심하다며 하소연을 하던 여직원이 꼴깍거렸다.

“내가 내일 매장으로 간다 했잖아. 뭘 굳이 찾아오고 그래?”

“급하게 대표님께 보여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거 하나 들고 수원에서 강남까지 온 거야?”

“네.”

“얼마나 걸렸어.”

“한 시간은 안 걸렸어요. 오토바이 타고 왔거든요.”

안재림이 테이블에 용기를 내려놓았다. 뚜껑을 열자 반질반질 윤택을 품은 떡볶이가 드러났다. 살랑살랑 풍기던 냄새가 확연해졌다. 맡기만 해도 벌써 맛있었다. 최재율이 신통하다는 투로 떡볶이를 봤다.

“다음 주부터 판매할 신메뉴예요. 청신투자 시식 평이 듣고 싶어서요.”

“우리는 그런 거 몰라. 투자사가 무슨 요리 프로그램 심사단인 줄 알아?”

껄렁하게 따진 최재율은 그 와중에 일회용 젓가락을 챙기고 있었다. 포장을 벗긴 그가 눈짓으로 여직원을 불렀다. 기다렸다는 양 일어선 여직원이 다가왔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힐긋한 문성하가 물었다.

“어떤 메뉴야?”

“토마토소스를 베이스로 한 떡볶이예요. 조금은 서구적인 맛이 나는데, 그렇다고 느끼하지 않아요. 고추장 소스하고 비율 배합하는 걸 쉰 번 이상 반복했어요. 우리 직원하고 제 주변 사람은 다 만족했거든요. 대표님들도 드셔 보세요.”

안재림이 젓가락을 하나하나 쥐여 줬다. 문성하가 여직원에 얘기했다. 유정 씨 한번 먹어 봐. 여직원이 흔쾌히 용기에다 젓가락을 꽂았다. 뒤적인 끝에 빨간 떡 하나를 꺼내서는,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바로 낯빛이 황홀해졌다.

“진짜 맛있어요…….”

양손을 꼭 감싼 여직원이 반했다는 양 안재림을 봤다. 이어서 떡볶이를 시식한 최재율이 팔꿈치로 문성하를 건드렸다. 평소 분식을 즐기지 않는 사람치고는 썩 흡족한 표정이었다.

“야, 이거 괜찮다. 일반 떡볶이하고 많이 다르네.”

마지막으로 젓가락을 챙긴 문성하가 용기 안에서 떡 하나를 찾아 찍었다. 입에 넣고 씹으니, 달큼함과 매콤함을 기분 좋게 버무린 풍미가 느껴졌다. 오래 씹을 것도 없이 삼키고 난 문성하가 주억거렸다.

“확실히 안재림 대표가 미감이 좋네.”

“세 분 다 괜찮으신 거죠? 다행이다.”

안재림이 안도의 숨을 쏟았다. 그새 떡을 다섯 개 가까이 집어 먹은 여직원이 스마트폰을 꺼내 뭔가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곧 감탄하며 테이블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와, 여기 진짜 맛집인가 봐요. 인터넷에 인증 글이 진짜 많아요.”

“자진해서 소문내 주시는 분이 많더라고요. 고맙게도.”

여직원이 신나서 검색을 이어 갔다. 떡볶이 맛에 제대로 매료된 모양이었다. 곁눈으로 화면을 훑던 문성하가 움찔했다. 막 클릭해 들어간 어느 커뮤니티 페이지에서 지금까지 본 것과 다소 결 다른 글이 비쳤다.

[제목] 스푼G 사장 나 중딩 때 동창이었는데ㅋㅋㅋ 진짜 개병신이었음

학교 초반엔 평범했는데 중반 때부터 일진들한테 찍혀서 처맞고 다님. 생긴 거 반반해서 일진들도 첨에 잘해줬는데 갈수록 병신 같은 짓만 골라하니 걔네도 빡친 듯. 좀 눈치 없고 사차원임 아버지가 폭력적이라 들었는데 집에서 맞다가 맛탱이가 갔나? 아무튼 세상 좋아졌다 그 찐따가 유명 맛집 사장이 되다니 ㅋㅋㅋ

댓글(5)

-인증 없으면 뭐다?

-썰 더 풀어줘 나 지난주에 거기서 줄 서서 먹고 옴

-그 찐따가 월 매출 1억 찍을 때 너는….

-찐따 출신이라 글만 봐도 PTSD 오네

-ㅋㅋㅋ 이런 글 좋아 더 올려봐

“계약서 준비는 다 했고?”

문성하가 여직원의 핸드폰을 살그머니 뒤집으며 물었다. 큼, 소리 낸 여직원이 다시 떡볶이 먹는 데 집중했다. 자못 수그러든 안재림이 문성하의 눈치를 봤다. 그 짧은 새 핸드폰 속 글을 본 모양이었다.

“거의 다 했어요. 단골손님 중 변호사가 계신데, 그분께서 최대한 적은 수임료로 알아서 준비해 주겠다 했어요.”

“준비 끝나면 얘기해. 우린 언제든지 가능하니까.”

“네.”

고분고분 대꾸한 안재림이 벽시계를 확인했다. 곧 뒷걸음질 치며 인사했다.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내일 매장에서 뵙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 오토바이 탈 때 헬멧 꼭 쓰고.”

“네. 대표님!”

안재림이 후다닥 뛰어갔다. 떡볶이 잘 먹을게요. 여직원이 뒤늦게 외쳤다. 사라지는 머리통을 보며 문성하가 긴 숨을 내쉬었다. 괜히 흘겨본 최재율이 윽박질렀다.

“별걸 다 챙기고 앉아 있네. 누가 보면 네가 쟤 형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이름만 사장이지 스무 살짜리 어린애잖아.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

“적당히 해.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투자사와 투자처 관계야.”

최재율이 끌끌거렸다.

“네가 친동생에 목이 말라 있다는 건 잘 안다만…….”

나직한 말이 곧 멎었다. 문성하가 가는눈을 떴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최재율이 급히 자리를 떴다.

“담배 피우러 간다.”

도망치듯 사무실에서 벗어나는 그를 보며 문성하는 가만히 관자놀이를 눌렀다. 눈꺼풀이 자꾸만 가물거렸다.

최재율은 NGX의 ‘그 주혜성’이 과거에 봤던 ‘문성하의 동생 주혜성’과 동일 인물인 걸 모른다. 워낙 짧게 본 데다가, 문성하의 친동생이 설마 글로벌 벤처 투자 기업의 대표일까 싶은 생각이 큰 영향일 거다.

최재율은 문성하가 어린 시절 잠시 동생과 살았고, 그러다 아버지와 문제가 생겨 귀국했고, 5년 전 그 동생이 한국에 왔고, 잠깐 같이 산 끝에 어떤 연유로 미국에 돌아갔다고만 알고 있다. 그리고 다시 볼 일이 없을 것으로 안다. 문성하는 그렇게 믿게끔 내버려 뒀다. 자신 역시 그렇게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눈을 가려 봤자 진실은 지워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하잘것없는 객기를 부린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범인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

퇴근은 안재림이 두고 간 떡볶이와 함께 했다. 여직원이 먹는다고 먹었는데 입이 짧은 탓인지 많이 먹지 못했다. 양은 또 무식할 정도로 많아 버리기 아까울 정도의 떡볶이가 남았다.

이거 그 어린 친구가 문 대표님 드시라고 갖고 온 거잖아요. 대표님이 좀 갖고 가세요. 여직원이 남은 떡볶이를 자신과 최재율, 문성하 몫으로 배분해 플라스틱 팩에 넣으며 말했다. 문성하 몫이 제일 많았다. 낮에 본 안재림의 면상을 떠올리니 차마 거부하기 어려워 가지고 왔다. 반추하면 할수록 칭찬받고 싶어 안달 난 어린애를 연상케 하는 낯이었다.

빌라 앞 주차장에 주차를 마치고 나왔다. 저편에 눈에 띄는 차 한 대가 있었다. 이 주차장에서 본 적 없던 고급 외제 세단이었다.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고만고만한 차를 몰고 다니는 빌라인지라 단연 시선을 끌었다. 누구 애인인가. 속으로만 생각하며 발을 내밀었다. 떡볶이가 든 봉지를 휘적이며 빌라 안에 들어섰다.

익숙한 계단을 올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5층에 당도해 열린 문 너머에는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인물이 있었다. 봉지를 든 손이 그대로 늘어졌다. 계단에 앉아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문성하의 발이 무심결에 밀려 났다. 그대로 닫힐 뻔한 엘리베이터 문틈으로 남자가 구둣발을 집어넣었다. 스르륵 닫혀 가던 문이 도로 열렸다. 고개를 든 남자가 문성하를 주시했다. 문성하의 입이 바싹바싹 말라 갔다.

“나와. 얘기 좀 해.”

남자가 손가락을 까딱했다. 머무적거린 문성하가 일단 나왔다. 서늘한 복도 공기가 맨살의 솜털을 곤두세웠다. 허리를 짚은 남자가 턱짓을 했다. 오만한 지시가 흘러나왔다.

“현관 열어. 문성하.”

문성하가 도리질을 쳤다.

“여기서 하시죠.”

딱딱한 호칭이 덧붙었다.

“현주원 대표님.”

현주원의 윗눈썹이 꿈틀거렸다. 탐탁지 않게 선 그의 손가락이 제 재킷 자락을 두드렸다. 약간의 생각을 마친 그가 재차 문성하를 봤다. 차가운 언어가 건네졌다.

“그래. 본론부터 얘기하자. 피차 시간 없으니.”

문성하의 등이 곧추섰다. 다음 말을 기다리며 우두커니 선 문성하를 쏘아보며, 현주원이 이를 갈았다.

“너 미쳤어? 네 동생하고 짜고 나 엿 먹이는 건 뭐 하는 짓거리야.”

문성하의 눈매가 찌뿌둥해졌다. 멍하니 벌어진 입에서 소리 없는 혼잣말이 샜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황망한 말대꾸가 나왔다. 진심으로 어이가 없어 한 말이었다.

“넌 모르는 일이다?”

현주원이 저소했다. 문성하는 또박또박 설명했다.

“당연히 모르는 일이지. 애초에 형이 ‘동생’이라 부르는 사람은 실제 내 동생도…….”

“저기요.”

불현듯 옆집 문이 열렸다. 몸을 내민 20대 남자는 상체를 헐벗고 있었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본 그가 쏘아붙였다.

“싸우려면 어디에 좀 들어가서 싸워요. 지금 너무 시끄러운 것 아닙니까.”

문성하가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까딱한 현주원이 문성하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대로 현관 앞까지 이끌고는, 문성하에게만 들리는 소리로 지시했다. 열어. 문성하가 마지못해 도어 록에 손을 가져갔다.

느릿느릿 번호를 누르고 난 도어 록에서 삐리릭, 소리가 났다. 그제야 제집으로 돌아가는 남자 곁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하는 사람들이야? 남자가 답했다. 몰라, 동성 연인 치정 싸움인가 보지. 농담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내몰 듯 문성하를 안에 들인 현주원이 먼저 구두를 벗고 들어섰다. 못마땅하게 쳐다본 문성하가 뒤따라 거실에 발을 들였다. 현주원은 베란다를 향해 직진했다. 우중충한 창 너머의 하늘을 살피더니, 창문을 반쯤 열고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내 집에서 담배 피우지 마.”

한 대를 빼무는 현주원에게 문성하가 경고했다. 개의치 않고 불까지 붙인 현주원이 훅, 연기를 뿜으며 이기죽거렸다.

“여기가 왜 네 집이야? 그 보증금, 월세가 누구 지갑에서 나왔는데.”

씨발, 욕설을 한 문성하가 입고 있던 재킷 단추를 풀었다. 단숨에 벗어 던진 재킷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발끈한 발이 괜히 옷자락을 지르밟았다. 기껏 도망쳐 나왔는데, 그 지긋지긋한 올가미에 또 목이 걸린 기분이었다.

“최재율하고 장사하는 건 잘 되고?”

소파에 앉은 현주원이 제 바지 주름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문성하가 석연치 않게 받아쳤다.

“형이 알아서 뭐 하게.”

“여의도에서 악명이 자자하던데.”

“강남이 아니고?”

“강남에서는 좋은 소문만 돌지. 순수한 얼간이들뿐이니까. 여의도에서 도는 소문이 진짜야. 계산 제대로 할 줄 아는 새끼는 전부 여의도에 있는 거 알잖아.”

현주원이 부유하는 연기를 휘파람으로 흐트러뜨리며 말했다. 문성하는 가만히 귀를 쫑긋거렸다. 의미는 알겠다. 강남에는 자본 시장의 순기능과 투자자의 의무 따위를 운운하는 고지식한 엘리트뿐이다. 의무나 양심은 개나 준 채 제대로 된 돈놀이를 하는 꾼들은 여의도에 몰려 있다.

DF벤처스는 본래 강남에 있었다. 현주원이 DF벤처스 대표로 있을 때의 일이다. 3년 넘게 평탄하던 그의 CEO 인생에 금이 간 건 베이스터 때문이었다. DF벤처스와 세명전자 자제가 각각 2대, 3대 주주로 올라갈 것이라는 소문에 휩싸인 베이스터 한국 법인이 뜬금없이 한 PE와 100% 지분 거래 계약을 체결했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시장은 난리가 났다.

여기까지만 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현주원이 업계의 비웃음을 조금 사고 끝날 일이었다. 그런데 이후 DF벤처스 펀드 고객 일부가 소송을 걸었다. “포트폴리오에 베이스터 한국 법인이 추가될 것이라는 안내를 받고 투자 자금을 늘렸는데, 실질적으로 포함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이들은 DF벤처스가 투자자 대상으로 사기를 벌였다 주장했다.

일이 복잡해졌다. DF그룹은 서둘러 고객과의 합의에 나섰다. 결과적으로 사태는 그럭저럭 마무리됐지만 현주원의 이미지 실추는 피할 수 없었다. 현주원은 이듬해 DF그룹 인사에서 DF화학 부사장 발령을 받았다. DF화학 자체가 주요 계열사가 아닐뿐더러, 사장이 아닌 부사장에 그친 건 현주원이 3세 간 경쟁에서 슬슬 밀리고 있는 방증이라고 언론에선 해석했다.

DF벤처스는 현주원의 후임으로 20년 경력의 베테랑 전문 투자자를 영입했다. 그는 DF벤처스 본사를 여의도로 옮겼다. 이후 회사는 소문난 벤처 사냥꾼이 됐다. 좋게 말하면 숨겨진 보석을 잘 발굴한다는 얘기고, 실상을 따지면 수익만 본 뒤 그 회사를 손절하는 걸 잘한다는 얘기다. 지극히 여의도스러운 방식이다.

“그래도 네가 내 밑에서 제대로 배우긴 한 거지. 여의도에서 소문날 줄도 알고.”

꽁초만 남은 담배를 만지작거리며 현주원이 뇌까렸다. 눈빛이 제법 이성적이었다. 용건이 이게 아닌 듯했다.

“아까 동생 얘긴 왜 한 거야.”

앉지도 않은 문성하가 불퉁한 말을 꺼냈다. 현주원은 잠자코 손을 옮겼다. 꽁초 버릴 곳을 찾는 것처럼 협탁을 헤매다, 덩그러니 놓인 빈 테이크아웃 잔을 집어 들며 입을 열었다.

“내가 DF벤처스 나오고 나서 아주 많이 성실하게 살았거든? 성하야.”

뜬금없는 말에 문성하의 눈살이 옴짝거렸다. 대충 아는 얘기다. 현주원은 DF화학 부사장으로 이동한 후 공격적인 성장 경영을 주도했다. 한동안 적자에 시달리던 회사가 3년 만에 흑자 전환을 했다. 언론에서는 ‘현주원의 저력’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기사를 앞다퉈 쏟아 냈다. 최근에는 조만간 DF화학 사장으로 승진할 것이라는 보도가 알음알음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꾸만 같은 인물이 발목을 잡네. DF벤처스 때도 그 새끼 때문에 불명예 전임했는데……. 같은 일이 또 반복되고 있어.”

현주원의 손에서 곤두박질친 꽁초가 컵 안에 쑤셔 박혔다. 파삭거리며 종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났다. 문성하의 뒷덜미에 한기가 스몄다. 서서히 드러나는 현주원의 낯에서 살기가 비쳤다.

“지난주에 NGX에서 과잉 부채에 시달리는 DF 계열사 두 곳을 대상으로 한 회생용 투자 계획안을 그룹사에 전달했어. 본래 벤처 전문 투자 회사지만, 꼭 대상이 벤처여야 한다는 법도 없으니 딱히 상관없지. DF 일가는 버선발로 환영 중이야. NGX는 대외적 이미지가 좋은 데다가, 기업 컨설팅 역량이 뛰어나 그쪽에서 투자를 받으면 무조건 이득이라 보는 거지.”

문성하의 표정이 벙벙해졌다. NGX가 국내 대기업에 투자를 한다. 꽤나 생소한 얘기다. 현주원 얘기처럼 NGX는 태생이 벤처 전문 투자 회사다. 웬만해서는 기존 기업을 건드리지 않는다. 포트폴리오 안정화 차원에서 미국 IT 기업 지분 일부를 보유 중이지만, 국내에서는 대기업에 투자한 사례가 없다.

특별한 사유가 있지 않은 한, NGX가 DF 계열사에 투자할 리 없다는 얘기다.

“결과적으로 아주 우스운 그림이 나왔어. DF 일가 상당수가 NGX 주혜성 대표 말이라면 껌뻑 죽어. 2세 라인은 사실상 주혜성이 꽉 잡았고, 3세 중에서도 장손인 현태성 DF전자 사장이며 현아람 DF유통 사장 등이 주혜성이라면 간 쓸개 다 빼 줄 것처럼 굴고 있어. DF그룹은 대대로 보수적인 조직이라 외부 세력에 마음을 주는 일이 없는데, 주혜성만 예외야. 아주 단순한 이유지.”

현주원의 입꼬리가 비뚤었다. 빈정거리는 한마디가 이어졌다.

“NGX는 일종의 보증 수표거든. 거기에서 투자받은 회사는 한두 단계나마 신용도가 격상된다는 얘기야. S&P1)나 무디스2)로부터 예쁨받는 기업이 높은 신용 등급을 받는 것과 같은 이치지. 어린 새끼가 아주 무서운 회사를 만들어 놨어.”

문성하의 입이 말아 물렸다. 잡음 하나 없는 거실에 찬기가 맴돌았다. 미적거린 문성하가 현주원을 외면했다. 담담한 질문이 나왔다.

“그래서. DF 일가에서 주혜성 의견에 따라 형을 호적에서 파 버리기라도 하겠대?”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지. 또 불명예 전임해 아예 해외로 내쫓기게 생겼으니. 그 정도면 아예 호적에서 파이는 게 낫지 않을까?”

현주원이 피식거렸다. 흘끔거린 문성하가 찬찬히 입을 뗐다. 온기라곤 하나도 없는 언어가 두 사람의 틈에 내려앉았다.

“난 모르는 일이야. 일단 주혜성과 인연 끊은 지가 너무도 오래됐어. 걔가 어디에서 뭘 하고 사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는 얘기야. DF 일가 대상으로 그런 짓을 했다는 것도 방금 처음 알았어.”

“그럴 수 있지. 주혜성이 너 모르게 그런 짓들을 할 수도 있지.”

현주원이 과장되게 끄덕였다. 기웃거리던 그의 손가락이 조여들었다. 커다란 손아귀 안에서 테이크아웃 잔이 구겨져 갔다. 목을 젖힌 현주원이 뇌까렸다.

“그런데 넌 그러면 안 돼.”

문성하의 무릎이 굼틀거렸다. 서슴거리던 망막에 무표정한 현주원의 면상이 걸렸다. 잠잠한 그의 눈 안에서 불길이 이글거렸다.

“내가 너 때문에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잘 알잖아. 그런 내 앞에서 네 책임이 전혀 없다는 식으로 나오면 안 되지. 성하야.”

현주원의 몸이 일으켜졌다. 저벅저벅 걸어온 그가 훅 팔을 내뻗었다. 문성하의 어깨가 덜컥 잡혔다. 제법 아파 절로 어깻죽지가 움츠러들었다.

다른 손이 문성하의 뒤통수를 잡았다.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고는, 거세게 꺾었다. 문성하의 얼굴이 강제로 들렸다. 후들거리는 뒤통수를 만지작거린 현주원이 읊조렸다.

“사실 지금 어떻게 해야 화가 풀릴지 잘 모르겠어.”

곧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일단 익숙한 걸 해 보자고.”

어조가 매우 달콤해졌다.

“너 맞는 것 좋아하잖아. 그 예쁜 얼굴에 피멍 들어서 벌벌거리는 걸 보는 게 얼마나 황홀했는데. 오랜만에 한번 보자. 응?”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어깨가 느슨해졌다. 다섯 손가락을 펼치며 허공에 들린 손이 다짜고짜 내리쳐졌다. 찰싹! 매서운 소리와 함께 얼굴이 돌아갔다. 이빨에 부딪힌 입 안의 점막에서 피가 터졌다. 하. 문성하가 신음했다.

등줄기에 전율이 일었다. 맞는 건 5년 만이다. 그때 체감한 것과 비교하면 역력한 차이가 있다. 한때 소름 끼치게 안락했던 이 고통이, 이제는 그저 아플 뿐이다. 그 감각에 꼬리처럼 수치가 따라붙고, 저변에는.

죽고 싶을 정도의 절망이 있다.

철썩! 날카로운 마찰이 또 뺨을 강타했다. 이번에는 정말이지 살이 에는 것만 같았다. 문성하가 악을 썼다.

“놔, 이 씹……!”

“네가 알아서 빠져나가야지. 근데 못 하지? 얻어맞는 게 워낙 익숙해서.”

비틀거리는 머리통을 다잡으며 현주원이 손목을 고쳐 가눴다. 이윽고 구타에 혈안이 된 사람처럼 얼굴에 매질을 했다. 철써덕거리는 소리가 수시로 귀를 때렸다. 혈관이 벌겋게 부어오른 뺨이 얼얼했다. 열기에 찬 머리가 어질해져 갔다.

쿵. 끝내 몸이 무너졌다. 널브러진 채 색색거리는 문성하를 내려다본 현주원이 다리 하나를 올렸다. 슬금슬금 움직인 발이 문성하의 왼쪽 무릎을 덮었다. 문성하가 본능적으로 소스라쳤다.

“다리는 좀 나았어?”

무미건조한 질문이 뇌리를 울렸다. 흐린 눈을 끌어 올린 문성하가 경직된 채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이것만큼은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대답을 못 해.”

도리질만 반복하는 문성하를 보며 현주원이 웃었다. 발꿈치가 무릎을 지분거렸다. 뼈가 갈려 가는 기분에 머리카락이 쭈뼛거렸다. 문성하가 목구멍을 틔웠다. 뭐라 말을 하고 싶은데, 공황에 빠진 성대에서는 헉헉거리는 소리 밖에 나오지 않는다. 알아챈 현주원이 상냥한 조롱을 했다.

“대답 안 하는 것 보니 괜찮은가 보네.”

무릎을 디딘 발꿈치가 거세게 내리 찍혔다. 엉성하게 늘어진 무릎이 마구 짓눌렸다. 바닥을 짚은 문성하의 손이 허우적거렸다. 새된 소리가 거실을 메웠다.

“하지 마. 이 씨발 새……!”

쾅! 돌연 현관 쪽에서 문 걷어차이는 소리가 났다. 갓 들어온 남자가 제 뒤를 살피며 어물거렸다. 야, 상황 좀 안 좋은 같……. 남자의 말을 끊고 어깨를 홱 밀치며 들어선 또 다른 남자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부옇게 잠긴 눈망울이 남자를 곱씹으며 커졌다. 현주원이 실소했다.

“이야. 형제애 한번 대단하네.”

현주원의 앞에 선 남자가 어금니를 물었다. 문성하를 밟은 발을 힐긋하고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며 그르렁거렸다.

“형제가 아닌데 어떻게 형제애야. 씨발 새끼야.”

퍽! 나아간 주먹이 현주원의 명치에 꽂혔다. 제대로 급소를 맞은 현주원이 헉, 하며 상체를 굽혔다. 짙은 숨을 몰아쉰 주혜성이 시선을 내렸다. 일그러지는 현주원의 낯을 노려보다가, 냉랭하게 경고했다.

“삼십 초 안에 이 집에서 나가. 그 잘난 DF 일가 호적에서 파이는 거, 손수 보여 주기 전에.”

불끈대는 손이 현주원의 멱살을 잡았다. 강제로 상체가 세워진 현주원이 면상을 굳혔다.

“네 대가리 위에 누가 있는지 알았다면 이딴 실수를 하면 안 되지.”

주혜성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주제를 모르고 문성하 건드린 대가는 DF화학 주주 총회에서 알려 줄게.”

착 깔린 목소리가 거실에 쌓였다.

“NGX는 내 회사가 아니야.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 거지.”

허. 소리 낸 현주원이 주혜성을 뿌리쳤다. 한 치도 밀리지 않은 주혜성이 묵묵히 쏘아보다 멱살만 풀어 줬다. 현관 앞의 남자가 제 머리를 털며 투덜거렸다. 아이고, 하여간 주혜성 저 새끼 성깔머리. 문성하는 그제야 남자를 알아봤다. 주혜성의 곁에 붙어 다니던 제임스 임이었다.

“하나만 묻자.”

현주원이 허리를 짚었다. 주혜성은 가만히 노려봤다.

“너 문성하 때문에 이러는 거냐.”

현주원의 목이 들끓었다.

“내가 문성하의 가해자라도 된다고 생각해 이러는 거냐고.”

“문성하 가해자는 나야.”

주혜성이 딱 떨어지는 대꾸를 했다. 현주원이 이마를 구겼다. 주혜성이 고저 없이 말을 이었다.

“내가 있는 한 그 자리를 대체할 사람은 없어.”

“그럼 대체 뭐 때문에 이러는 거야.”

“내가 5년 전에 문성하가 투자했다 자금 회수에 실패한 회사 대표를 해외로 친절히 내보낸 일이 있거든? 회사 이름이 일리노이스였어.”

일리노이스. 오랜만에 듣는 아픈 이름에 문성하의 발목이 굼지럭거렸다.

“사실 일리노이스가 그렇게 된 데에는 내 책임도 있었어. 그런데 막상 그 새끼 면상을 보니 기분이 너무나 더러워 어디다 내보내지 않고는 못 견디겠더라고. 그 새끼 때문에 문성하가 쓰러졌었단 말이지. 그게 참 불쾌했어. 그래서 내 눈에도 문성하 눈에도 띄지 않는 곳으로 치워 버린 거야.”

“일리노이스 얘기는 내 알 바 아니고. 중요한 건 나는 문성하와 합의된 관계만 해 왔다는 거야. 나 때문에 문성하가 쓰러진 적? 없어. 다친 적은 있지만. 다만 그건 문성하가 선택한 부분이지.”

현주원이 비아냥거렸다. 주혜성은 딱히 동요하지 않았다. 느릿느릿 고갯짓한 그가 차분하게 현주원을 봤다.

“내 말의 포인트를 잘 모르나 본데.”

주혜성의 손이 제 넥타이 매듭을 쥐었다.

“내 모든 행위의 핵심은 ‘내 기분이 더럽다’는 거야. 문성하와 관련한 일에 내 기분이 더러우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해. 알아 처들었어?”

주혜성의 가슴팍에서 넥타이가 풀어 헤쳐졌다. 현주원의 이가 지그시 씹혔다. 낮은 욕설이 문성하의 귀를 스쳤다.

저 또라이 새끼.

넥타이를 감아쥔 손이 현주원에 손가락질을 했다. 한층 서늘한 언어가 건네졌다.

“네가 모르는 한 가지 더. DF 계열사 두 곳을 대상으로 투자에 나선 계기는 문성하지만, 자체 사업성 검토를 바탕으로 투자 가치가 있다고 봤기 때문에 지분 인수를 계획한 거야. 나는 사업가고, 돈 안 되는 일은 하지 않아.”

“그 훌륭한 사업가께서 왜 나를 DF에서 쫓아내려는 구상까지 하셨는지, 나는 그게 궁금한데.”

“제안은 내가 했지만 결정한 건 내가 아니야. 네 경쟁 상대인 3세 라인들, 그리고 평소 널 탐탁지 않아 하던 2세 라인들이지. 똑같이 사업하는 입장이라면 너도 좀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그래.”

주혜성의 고개가 삐뚜름해졌다. 의미심장한 질문이 사위를 울렸다.

“DF그룹이 병신도 아니고 내 말 하나에 부화뇌동하겠어? 결정권자가 되는 DF 일가 내부에 적을 만든 건 너야. 너는 네가 한 짓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거고.”

“이 개새끼야.”

현주원이 버럭 했다. 그사이 저편의 제임스 임이 다가왔다. 아랑곳하지 않은 주혜성이 뒤쪽으로 손을 뺐다. 제임스 임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넘겼다. 훤히 불이 들어온 액정이 보였다.

“네, 주혜성입니다. 전화 받았습니다. 네, 네……. 바꾸겠습니다.”

핸드폰이 현주원 쪽에 건네졌다. 받지 않은 현주원이 시근덕거렸다.

“뭐야.”

“너하고 통화하고 싶어 하는 DF 사람.”

“뻔하지, 현태성 DF전자 사장이잖아. 너라면 죽고 못 사는.”

“받기나 해. 팔 아프다.”

주혜성이 심드렁한 턱짓을 했다. 마지못해 받은 현주원이 귀에 핸드폰을 댔다.

“네. 현주원입니다.”

[지금 당장 본가로 들어와.]

밑에 있던 문성하마저 얼게 할 정도의 위엄 어린 지시였다. 상대방은 익숙한 듯 딱 할 말만 하고 통화를 끊었다. 문성하의 등줄기가 오싹거렸다. 상대방을 유추하는 게 전혀 어렵지 않았다. 워낙 유명한 인물이고, 창립 기념행사에서 실제 본 일도 있었다. DF그룹 창업주이자 최대 주주인 현일원 회장. 현 DF 일가 일인자였다.

“슬슬 가지? 내가 얘기한 삼십 초는 한참이나 지난 것 같은데.”

현주원에게서 핸드폰을 뺏은 주혜성이 뇌까렸다. 현주원은 말없이 제 낯을 짚었다. 힐끔거리던 문성하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손가락 틈으로 비치는 현주원의 표정은 그를 알게 된 이래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처럼 깊은 절망을, 지금껏 본 일이 없다.

“내가 5년 전에 한 말 기억해? 문성하.”

한참 후에야 손을 거둔 현주원이 발을 뻗었다. 주혜성을 지나쳐, 저벅저벅 현관을 향했다. 멀어져 가는 그의 등이 이따금 쿨렁거렸다. 포효하는 듯한 한 마디가 문성하의 귀를 옭맸다.

“제발 저 새끼 끌어안고 반드시 불구덩이에 빠져 죽길 바란다. 응?”

철컥, 현관문이 열어젖혔다. 이윽고 몸을 뺀 현주원이 탕, 소리 나게 문을 닫았다. 실내가 고적해졌다. 스르르 흘러간 문성하의 눈이 주혜성을 머금었다. 낯빛 하나 바꾸지 않은 주혜성이 문성하를 마주 봤다. 문성하의 목을 타고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현주원은 모르는 모양이다.

자신은 이미 5년 전 이 사람으로 인해 거길 한 번 다녀왔다는 걸.

“확실히 회장님 카드가 세긴 세. 어?”

야유하듯 박수를 친 제임스 임이 가까이 왔다. 파리한 왼 다리를 살핀 그가 물었다.

“좀 괜찮아요? 의사를 불러야 하나.”

“아뇨. 전 괜찮습니다.”

문성하가 거부했다. 제임스 임이 갸웃했다.

“다리가 엄청 새파란데. 괜찮은 것 맞아요?”

“네. 이 정도면 괜찮은 것 맞아요.”

문성하가 또박또박 덧붙였다.

“원래 자주 이래요.”

제임스 임이 움찔했다. 주혜성이 차분히 그의 어깨를 잡았다. 제임스 임이 돌아봤다. 주혜성이 현관을 가리켰다.

“형은 들어가 봐. 난 좀 더 있다 갈게.”

“의사 안 불러도 되겠어?”

“내가 보고 필요하면 부를게. 아, 이따가 오후 10시에 뉴욕 본사하고 신규 투자 건 관련 화상 회의 있어. 형이 대신 참석해 줘.”

주혜성이 그의 등을 두드렸다. 주억거린 제임스 임이 물러났다. 뚜벅뚜벅 걸어간 그가 현관 앞에 섰다. 손잡이를 잡고는, 문성하에게 인사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쾌차하십시오.”

열린 문틈으로 제임스 임이 빠졌다. 탁,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또 한 번의 고요가 찾아왔다. 조용한 현관을 일별한 주혜성이 몸을 숙였다. 문성하의 얼굴에 응달이 앉았다. 그대로 안아 들기 위해 양팔을 펼친 그가 문득 멈췄다. 면상에 난색이 어려 있었다. 문성하는 잠자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얼마 전 주혜성이 한 말이 떠올랐다.

-저와 살 맞대는 것 싫잖아요.

“약 찾아올게.”

허리를 바로 한 주혜성이 몸을 틀었다. 거침없이 나아가, 작은 방에 들어섰다. 예전에 주혜성이 쓰던 방이었다. 문성하는 잠잠히 그의 자취를 관찰했다.

안에서 뭔가를 뒤적이는 소리가 들렸다. 곧 나온 주혜성의 손에는 구급상자가 들려 있었다. 문성하의 곁에 내려 둔 그가 이번에는 부엌에 붙은 다용도실로 갔다. 익숙하게 수납함을 뒤져 새 타월을 찾고는, 싱크대로 가 더운물을 틀고 적시기 시작했다. 문성하의 눈꺼풀이 간헐적으로 오르내렸다.

물건이 어디어디에 위치하는지, 아직도 다 기억하는구나 싶었다.

“현주원이 내 집에 온 건 어떻게 알았어.”

젖은 타월의 물기를 짜는 주혜성에 대고 물었다. 등을 보인 주혜성이 답했다.

“형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 달라 했거든.”

“누구한테.”

주혜성은 말하지 않았다. 날숨을 뱉은 문성하가 중얼거렸다.

“그래. 또 설명 못 하지.”

“궁금한 것 있으면 또 물어봐. 말할 수 있는 건 다 할게.”

물기 빠진 타월을 털며 주혜성이 읊조렸다. 문성하의 입이 뭉그적뭉그적 열렸다. 자못 진중한 음성이 나왔다.

“넌 기분 나쁘면 다른 사람에게 아무 짓이나 다 해? 원래.”

막 돌아선 주혜성이 주춤했다. 문성하는 보다 똑바로 주혜성을 주시했다. 그의 손안에서 타월이 팔락거렸다. 다른 곳을 보며 입을 다신 주혜성이 고개를 저었다. 나직한 언어가 찾아들었다.

“항상 그런 건 아니야.”

“현주원에게는 왜 그랬어.”

“답해야 하는 거지?”

“하기 싫으면 하지 마. 말할 수 있는 것만 하겠다며.”

“질투 나서 그랬어.”

타월이 축 늘어졌다. 문성하의 속눈썹이 달막였다. 여전히 먼 곳을 본 채로, 주혜성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까 그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았어.”

그의 손안에서 타월이 차곡차곡 접혔다.

“그럴 자격이 없는 입장이라는 걸 알아. 내가.”

그의 발이 내디뎌졌다.

“자격이 없는 것 같다고 판단한 얘기는 형 앞에서 삼가게 돼. 말을 다 못하는 게 그런 이유야.”

문성하의 앞에 선 주혜성이 무릎을 꿇었다. 새파란 다리를 살피며, 쥐고 있던 타월을 만지작거렸다. 문성하는 곁눈으로 그를 봤다. 어딘가 익숙한 감이 있다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종종 본 얼굴이었다.

혼날 짓을 한 걸 알고 문성하의 눈치를 보던 12세 주혜성.

“역시 자격이 없는 걸 알지만……. 이건 묻고 싶어.”

한참의 공백을 삼킨 끝에 주혜성이 운을 뗐다. 문성하는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응시했다. 그가 비스듬히 눈을 맞춰 왔다.

“내 손으로 형 치료해도 돼?”

그의 손에서 흐른 타월이 무릎을 스쳤다. 발가락이 가쁘게 옹송그려졌다. 혈관이 또 자글자글 끓어 왔다. 익숙한 열기를 입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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