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3권) (22/37)

펜딩(Pending) 3

22.

평일 오후 4시임에도 매장 내부는 꽉 차 있었다. 안에 들어가지도 않을 거면서 입구 앞에서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있기에 뭔가 했는데, 배달 기사와 포장 손님이었다. 매장에서 나온 음식을 가져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시네요. 유명한 곳인가 봐요?”

대기 중인 배달 기사에게 넌지시 물었다. 배달 기사가 학을 뗐다.

“유명하긴 하죠. 내가 여기 때문에 아주 미쳐요. 기다리는데 시간 뺏기는 곳이라 가능한 한 여기 콜은 안 받으려 하는데, 끊임없이 들어오니 도무지 피할 수가 없어요.”

가게가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노려보는 기사를 살피며 문성하는 ‘그래요?’라고 적당히 응수해 줬다. 곧 안으로 발을 들이는 문성하의 곁으로 어린 여학생이 다가왔다. 가게 로고가 새겨진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지금 좀 대기하셔야 하는데. 괜찮으시겠…….”

“어어, 민아야. 그분 손님 아니야.”

서둘러 걸어온 안재림이 여학생을 저지했다. 미적거리던 여학생이 물러났다. 문성하에게 눈인사를 한 안재림이 안내하는 손짓을 했다. ‘예약석’ 푯말이 올라가 있는 테이블이 보였다.

“오후 4시면 그나마 사람 없을 줄 알았는데. 잘못 생각한 모양이네.”

안재림이 빼 준 의자에 앉으며 문성하가 말했다. 맞은편에 착석한 안재림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이 그나마 나은 거예요. 점심하고 저녁 식사 시간대에는 완전히 전쟁터예요.”

“다들 뭘 그렇게 먹으러 오는 거야?”

“지금 바로 내드릴게요. 창석이 형! 얘기한 메뉴 좀.”

안재림이 주방 쪽에 외쳤다. 조리하던 남성이 무심하게 손가락으로 ‘OK’ 사인을 만들었다. 문성하는 눈으로 주방과 홀을 훑었다. 주방에 조리사 셋, 홀에 서빙 직원 하나. 테이블은 총 8개. 이 좁은 매장을 돌리는 것만으로 월 9000만 원에 달하는 매출이 발생할 리 없다. 대부분이 포장과 배달 손님이라는 얘기다.

“서울 강남에서 3배 정도 큰 매장을 돌린다…….”

턱을 괸 문성하가 혼잣말을 했다. 테이블을 긁적이던 손가락이 숫자 계산을 하듯 빙글빙글 돌았다. 수원 역시 큰 상권이긴 하지만, 강남은 다른 얘기다. ‘강남에서 인기 있는 분식집’이라는 타이틀만으로 상당한 프리미엄이 붙는다. 무엇보다 교통의 요지다. 방문 손님, 포장 손님, 배달 손님이 두루 늘어날 거다.

다만 요식업의 매출 성장에는 한계가 있다. 가장 큰 문제가 낮은 단가다. 떡볶이, 순대, 튀김을 팔아 봐야 건당 1만 원에서 2만 원가량의 매출에 지나지 않는다. ‘줄 서서 먹는 맛집’이라는 메리트도 시간이 지나면 무색해지기 마련이다.

관건은 하나다. 다른 업장과 차별화되는 이곳만의 독보적인 아이덴티티를 찾는 것.

“나왔어요, 대표님.”

문성하의 앞에 접시 하나가 내려왔다. 눈이 돌아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볶이의 색은 흔한 빨간 색이 아니었다. 적갈색에 가까웠다.

“뭘 넣었기에 이 색이야?”

포크를 든 문성하가 물었다. 떡볶이를 가까이 밀어 준 안재림이 답했다.

“커리요.”

“카레?”

“그냥 카레 말고, 인도 커리요.”

안재림이 정정했다. 문성하는 떨떠름하게 떡 하나를 찍어 입에 넣었다. 질근질근 씹어 보는데 묘한 감칠맛이 느껴졌다. 맵거나 짜거나 달다는 식으로 규정할 수 있는 맛이 아니었다. 태어나 처음 접하는 완전히 생소한 맛. 한참이나 씹은 끝에 꿀꺽한 문성하가 고개를 젖혔다. 소리 없는 혼잣말이 혀를 타고 미끄러졌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존나게 맛있다는 건 알겠다.

“이 레시피는 네 거야?”

상체를 바로 한 문성하가 물었다. 안재림이 끄덕였다.

“네.”

“언제 개발했어.”

“2년 전에요.”

“너 18세 때네?”

“네.”

“어쩌다가.”

“좀……. 얘기하자면 긴데요.”

안재림이 제 머리를 긁적였다. 문성하는 들어 주겠다는 투로 기다렸다. 뜸을 들인 안재림이 얘기를 시작했다.

“중학생 때 가출하고 나서, 소위 ‘가출 팸’으로 불리는 곳에 반년 정도 있었어요. 막상 집 나오니 갈 데가 거기밖에 없더라고요.”

“어린애들끼리 합숙하면서 나쁜 짓 하고. 그런 곳 말하는 거지?”

“네.”

“너도 그런 짓 했어?”

“네…….”

안재림이 눈치를 봤다. 문성하가 또 물었다.

“뭐 했는데.”

“지하철에서 소매치기했어요. 스무 번 정도.”

안재림이 급하게 덧붙였다.

“돈 많아 보이는 남자 어른만 골라서 했어요. 지갑이랑 신분증, 카드는 나중에 우체통에 넣어서 돌려줬고요……. 저는 그냥 현금만.”

“그만해. 새끼야.”

문성하가 윽박질렀다. 안재림이 멋쩍게 입을 다셨다. 턱을 고쳐 괸 문성하가 쏘아붙였다.

“아무튼, 가출 팸에 있다가.”

“반년 정도 그러고 있다가 숙소 근처에서 떡볶이 팔던 형하고 친해졌어요. 트럭 몰고 다니면서 장사하는 형이었는데, 종종 저한테 공짜로 줬거든요. 제가 인사성도 밝고 착해 보인다면서. 갈 곳 없는 불쌍한 애라고 생각해 잘해 준 거겠죠.”

“그런데.”

“하루는 그 형 앞에서 한탄을 좀 했어요. 팸에 더 이상 못 있겠다고. 나랑 안 맞는다고. 그랬더니 형이 트럭에서 자도 상관없다면 자기하고 같이 다니자 하더라고요. 팸보다는 나을 것 같아 그러겠다 했죠. 그렇게 일 년 정도 지낸 것 같아요. 형이랑 같이 떡볶이 팔면서.”

“그래도 좋은 형이네.”

“그런데 그 형, 그러고 다니는 이유가 있었어요.”

안재림의 어조가 무지근해졌다. 곧 눈을 깔며 테이블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렸다. 우울한 한마디가 이어졌다.

“과거에 사업 하나를 잘못해서 엄청난 빚을 졌나 보더라고요. 빚쟁이 피하려고 일부러 거주지를 두지 않고 트럭에서 먹고 자며 지낸 거예요. 떡볶이 팔아 근근이 생활비 벌면서. 저도 나중에 알았어요.”

“그 형이 얘기해 줬어?”

“아니요. 형이 갑자기 자살하는 바람에 알았어요.”

목덜미가 싸해졌다. 문성하의 눈꺼풀이 빠르게 들렸다. 그새 안재림은 차분해진 낯이었다. 문성하는 턱에 괸 손을 풀었다. 담담한 질문이 건네졌다.

“그래서 넌. 다음에 어떻게 했는데.”

“형이 유서로 저한테 떡볶이 트럭을 넘겼어요. 애초에 버려진 걸 고친 거고, 주인이 딱히 없더라고요. 그런데 정작 저는 그 장사를 하기 싫었어요.”

“왜.”

“그 떡볶이 장사, 잘 된 적이 없거든요. 맛이 그냥 그랬으니까요. 실제로 딱 두 사람이 먹을 정도로만 매일 벌었던 것 같아요.”

“더 장사해 봐야 별 볼 일 없을 것 같았구나.”

“네. 그래서 트럭 자체를 어디다 넘길 요량으로 몰고 다니는데, 아무리 찾아도 마땅히 팔 곳이 안 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방황하다 배가 고파져서 보이는 식당 아무 곳에나 들어갔어요. 들어와 보니 인도 커리 집이더라고요. 거기서 커리라는 걸 태어나 처음 먹었어요. 엄청 맛있더라고요. 충격을 받았죠.”

문성하의 고개가 삐뚜름해졌다.

“그래서 지금 떡볶이가 나온 거야?”

안재림이 도리질을 쳤다.

“바로 나온 건 아니고요, 처음엔 그냥 호기심이었어요. 이렇게 맛있는 걸 떡볶이에 넣어 보면 어떨까, 싶어서 거기 주방장 졸라 레시피를 알아낸 다음 떡볶이에 접목했어요. 처음에 나온 건 괴작이었어요. 맛이 진짜 이상하더라고요. 그런데도 이왕 떠올린 시도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 실험을 계속했어요. 열 번가량 배합 방식을 바꿔 보니 그제야 먹을 만한 게 나오더라고요. 한번 팔아 봤고요.”

“반응 좋았어?”

“엄청 좋았어요. 첫날 매출이 평소 형 때 내던 것의 5배였으니까.”

“그게 시작이었구나.”

문성하가 주억거렸다. 안재림이 웅얼거렸다.

“처음엔…….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그냥 트럭 안에서 자지 않는 게 목표였어요. 그런데 매일 수십만 원씩 벌이가 들어오고, 유명해지기 시작하니 공무원이 찾아오더라고요. 불법 장사를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저는 이게 불법인 걸 처음 알았어요. 가르쳐 준 사람이 없었으니까. 어떻게 하면 제대로 된 장사를 할 수 있냐고 물었더니, 정식으로 가게를 내라 하더라고요. 그래서 낸 거예요. 수원에다 한 건, 거기가 한때 살았던 동네이기도 하고 마침 적당한 가격에 나온 매장이 있어서였어요. 제대로 가게 내고 나니, 더 잘 되기 시작했고요.”

“네가 요리에도 장사에도 소질이 있었나 보네.”

“요리는 모르겠지만 장사는 아닌 것 같은데요. 그냥 운이 좋았던 같…….”

부정하던 안재림의 말이 끊겼다. 소리도 없이 다가온 젊은 여성이 안재림을 향해 빤히 얼굴을 들이민 탓이었다.

“저기, 죄송한데요.”

“네.”

안재림이 순순히 눈을 맞춰 줬다. 그녀가 스마트폰을 내밀며 속삭였다.

“같이 사진 한 장 찍어 주실 수 있어요? SNS에 올릴 건데.”

“그러세요.”

안재림이 흔쾌히 얼굴을 내줬다. 포즈를 취한 여자가 셀프 카메라 모드로 사진을 찍었다. 두어 번 찰칵거리고 난 그녀가 흐뭇하게 액정을 확인했다. 안재림이 물었다.

“그런데 저하고 찍은 사진 올리면 좋은 것 있나요?”

“좋은 게 있다기 보다는……. 그냥 사장님, 좀 유명하시잖아요.”

“제가 유명해요?”

“네. 제 팔로워는 다 사장님 알아요.”

여자가 뭘 모르는 척하냐는 투로 말했다. 어리둥절하게 고갯짓한 안재림이 뇌까렸다.

“그렇군요. 신기하네요.”

지켜보던 문성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까닥거리던 손가락이 테이블을 쿡 찍었다. 내내 고민하던 이 매장의 아이덴티티에 윤곽이 잡힌 순간이었다.

CEO의 스타성이 상당하다.

“그럼 본격적으로 사업 얘기해 볼까?”

문성하가 부드럽게 질문했다. 안재림이 허리를 바짝 세웠다.

“네! 형.”

“형?”

“아니요, 대표님.”

스스로 더 놀란 안재림이 아물거렸다.

“실수했어요. 죄송해요.”

문성하가 멍해졌다. 일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듣는 ‘형’이 이렇게 어색할 줄 몰랐다.

***

집에 도착하자마자 냉동실 문을 열었다. 가져온 비닐 봉투 안에서 플라스틱 포장 용기를 꺼내 안에 넣었다. 막 문을 닫기 직전, 용기에 붙어 있는 메모지를 발견했다. 떼서 확인했다.

「냉동할 거면 드실 만큼 소분해 먹을 때마다 하나하나 해동하세요. 해동하고 나서 바로 드시지 않으면 맛이 떨어집니다. 안재림.」

“귀찮게.”

용기를 도로 꺼냈다. 식탁 위에 두고, 밀폐 용기들과 국자를 가져왔다. 제법 많은 양의 떡볶이를 나눠 담다가 아까 안재림이 무심코 꺼낸 호칭을 떠올렸다. 형.

누군가로부터 ‘형’ 소리를 들은 게 얼마 만이더라.

테이블 위에서 핸드폰이 진동했다. 국자를 내려놓은 문성하가 끌어와 액정을 확인했다. 최재율이었다.

“왜.”

통화 아이콘을 누른 문성하가 짜증을 냈다. 돌아온 건 못지않게 곤로하게 들리는 질문이었다.

[너 어디야?]

“집. 저번에 우리 사무실 왔던 꼬맹이 매장 들렀다가…….”

[아니, 그건 중요치 않고.]

말을 자른 최재율이 자못 진지하게 말했다.

[나 지금 NGX코리아 대표 만나러 간다.]

“그 사람은 왜?”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격양됐다. 소리 내 한탄한 최재율이 대꾸했다.

[몰라. 갑자기 연락 왔어. 만나재.]

“에센더는 안 판다고 했잖아. 돈 버는 것도 좋지만, 그런 허무맹랑한 매매 계약을 체결하고 싶지 않아. 나중에 뒤탈 나면 어떻게 수습하려 그래?”

[그래도…….]

“당장 돈이 급한 상황도 아니잖아. 얼마 전 PTP라운지 성공적으로 엑시트해서 여유 자금 충분해. 대체 왜 쓸데없는 모험을 감수하려는 거야?”

문성하가 악을 썼다. 최재율은 답을 하지 않았다. 한숨 쉰 문성하가 애꿎은 테이블을 움켜쥐었다. 덜컹대는 유리판 위에서 용기 속 검붉은 음식물이 출렁였다. 문성하는 화를 삭이듯 어금니를 씹었다.

그날, 문성하는 에센더를 팔지 않기로 했다. 복도를 걸어가는 안나 킴을 쫓아가 붙들고, ‘딜 제안은 못 들은 걸로 하겠다’고 밝혔다. 안나 킴의 미간에 금이 갔다. 처음으로 보인 동요였다.

“전 제가 매우 괜찮은 제안을 했다 생각했는데요.”

안나 킴이 딱딱하게 말했다. 문성하가 건조하게 받아쳤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안받은 입장에서 황송할 정도입니다.”

“대체 뭐가 문제죠?”

“너무 괜찮아서 문제입니다.”

안나 킴의 턱이 파들거렸다. 문성하가 덧붙였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투자업계를 떠나 성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입술을 살포시 무는 그녀를 보며, 문성하가 또 말했다.

“저는 이 딜에 따르는 추가적인 대가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대가는 당신이 제안한 높은 매입가에 비례할 거고요.”

대찬 못을 박는 한 마디가 나왔다.

“저는 예측 불가능한 리스크를 동반한 딜을 진행하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문성하의 허리가 깊숙이 숙여졌다. 곧 몸을 바로 하고 돌아섰다. 뒤편에서 안나 킴의 새된 숨소리가 들렸다. 문성하는 아무렇지 않게 긴 복도를 걸어 본래 있던 룸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성하야. 이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한참 후에야 돌아온 건, 전에 없이 이성적인 목소리였다. 문성하는 가만히 액정을 쏘아봤다. 숨을 가다듬은 최재율이 입을 열었다.

[상대가 NGX코리아야. 국내 벤처 투자업계 탑 플레이어야. 심지어 그 조직의 대표고. 이게 무슨 뜻인지 몰라?]

“몰라.”

문성하는 알면서 고집을 부렸다. 최재율이 경고했다.

[무턱대고 신경 거슬렀다 우리만 다쳐.]

문성하의 교근이 불룩거렸다. 짧지 않은 침묵이 이어졌다.

굳어 있던 시선이 비껴 났다. 테이블 구석에서 싸늘하게 식어 가는 떡볶이가 보였다. 한시라도 빨리 냉동실에 넣지 않으면 맛이 전부 달아날 거다. 입 안에 쓴 침이 고였다. 서서히 열린 입술 틈에서 매서운 음성이 튀어나왔다.

“미팅 장소 어디야? 나도 갈게.”

***

장소는 안나 킴을 만났던 그 프라이빗 라운지였다. 차이는 있었다. 그때는 적당한 크기의 룸이었는데, 이번 장소는 누가 봐도 VIP룸으로 보이는 넓은 공간이었다.

NGX코리아 대표는 40대 중반의 남성이었다. 홍콩의 대형 증권사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국내 최대 PE에서 임원을 지낸 등 이력이 화려했다. 국내 1위 벤처 투자 기업인 NGX코리아 대표를 맡기에 젊다는 평가가 있지만, 투자업계에서 40대 CEO를 보는 건 흔한 일인지라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본사인 NGX의 CEO는 27세에 불과했다.

“갑자기 미팅을 요청해 죄송합니다.”

대표가 예의 바르게 운을 뗐다. 사람 다루는 일에 익숙한 인물 특유의 능수능란함이 비쳤다. 최재율이 괜찮다는 양 손사래를 쳤다. 문성하는 물끄러미 그를 관찰하기만 했다.

“안나 킴은 NGX 본사의 핵심 인력입니다. 등기 임원은 아니지만, 웬만한 임원 이상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죠. 무엇보다 주혜성 대표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고요.”

대표가 뒤에 있는 비서에게 손짓했다. 다가온 비서가 테이블에 놓인 양주병을 집어 들었다. 500만 원이 훌쩍 넘는 것으로 알려진 맥켈란 30년산이었다.

“그런 이유로 안나 킴이 단독으로 나서서 청신투자와 딜을 진행하게 됐는데, 방식이 서툴러 대표분들의 심기를 거스른 것 같습니다. 제가 대신 사죄하겠습니다.”

대표가 상체를 굽혔다. 최재율이 소스라쳤다. 아닙니다, 대표님. 괜찮습니다. 문성하는 무표정을 유지했다. 한참이나 올라오지 않는 그의 머리통을 보고 있자니, 희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쉬울 것 없는 톱 투자 기업의 대표가 핫바지 투기 회사에 대고 저자세를 취하고 있다. 원하는 게 있다는 거다.

혹은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거나.

“순수한 의미로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곧 방한하는 주혜성 대표가 국내 초기 스타트업 여럿을 대상으로 엔젤 투자 프로젝트를 진행할 겁니다. 이미 뉴스를 통해 관련 내용을 어느 정도 접하셨을 걸로 압니다. 이건 그의 일환입니다. 작지만 성장 가능성이 높은 에센더를 인수해 NGX코리아 차원에서 엑셀러레이팅을 진행할 겁니다. 이를 통해 에센더가 보다 훌륭한 기업으로 성장하면, 많은 스타트업의 귀감이 되겠죠.”

“말씀 참 잘하시네요.”

높낮이 없는 한 마디가 떨어졌다. 막 양주병을 오픈한 대표가 멈칫했다. 문성하가 으름장을 놓았다.

“우리가 바보인 줄 아십니까.”

문성하의 뒤꿈치가 대리석 바닥을 짓밟았다. 대표의 손안에서 꺼떡거린 양주병이 내려왔다. 문성하가 몰아붙였다.

“내일 당장 부도가 나도 이상하지 않은 시한폭탄 회사를 엔젤 투자라는 이름으로 끌어안는 멍청한 투자사가 세상 어디에 있을까요. 자선 사업 단체가 아닌 이상 말입니다. NGX코리아가 언제부터 그렇게 호락호락했죠? 국내 1위 벤처 투자 회사라는 타이틀은 그런 식으로 운영해 얻을 수 있는 게 아닐 텐데요.”

차디찬 종지부가 찍혔다.

“안 통할 거짓말을 할 바에는 그냥 진실을 얘기하십시오.”

묵묵하던 대표의 입에서 실소가 터졌다. 자조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적잖게 웃고 난 그가 자세를 고쳤다. 양 무릎 위에 팔꿈치를 얹고는, 결연한 눈으로 문성하를 주시했다.

“그래요. 안나 킴으로부터 까다로운 분이라는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뭐, 알겠습니다. 허심탄회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허공을 바라보며 숨을 고른 그의 입이 재차 열렸다. 한층 낮아진 목소리가 찾아들었다.

“저도 일개 월급쟁이입니다. 문 대표님.”

그의 입꼬리가 내려왔다.

“지시받은 것에 따를 의무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부디 협조 부탁드립니다.”

들렸던 문성하의 뒤꿈치가 내려앉았다. 식은 눈매가 찡그려졌다. 지시받은 것에 따를 뿐. 안나 킴도 했던 얘기. 마치 교육받은 것처럼, NGX 고위직들은 동일한 얘기를 하고 있다.

이 지시에 생사라도 걸린 것처럼.

“전 할 말 없습니다. 일어나겠습니다.”

눈을 질끈 감고 난 문성하가 일어섰다. 빠르게 벗어나는 몸을 최재율이 어, 하며 잡았다. 뿌리친 뒤 마저 입구를 향해 갔다. 가차 없이 손잡이를 잡는 문성하의 등 뒤로 침착한 부름이 다가왔다.

“문 대표님.”

갓 문을 연 문성하가 마지못해 뒤를 봤다. 대표가 권태롭게 말했다.

“괜찮으시면 옆의 룸에 들렀다 가십시오. 오 분이면 됩니다.”

석연치 않게 응시하던 문성하가 몸을 뺐다. 탁. 문이 닫혔다. 어두컴컴한 복도를 헤매던 시선이 어느 지점에서 멎었다. 두어 보 떨어진 곳에 익숙한 남자가 있다. 일전에 만난 안나 킴의 곁을 지키던, 비서로 추정되는 남자였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목소리를 들은 건 처음. 상상한 것과 다르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말투에서 비치는 여유와 오만이 심상치 않다. 일개 비서의 배포가 아니었다.

“잠깐이면 되니까요.”

남자가 옆 룸 문손잡이를 잡았다.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여짓거리던 문성하가 발을 뻗었다. 아마도 안나 킴이 있는 방일 거다. NGX코리아 대표와 하등 다르지 않은 얘기를 꺼낼 건 불 보듯 뻔한 일이고.

대외적인 서열로 따지면 NGX코리아 대표가 안나 킴보다 높지만, CEO 입장에서는 반대일 거다. 그러니 확실한 의사 표현을 하려면 그녀를 찾는 게 맞다. 문성하의 속눈썹이 빳빳해졌다.

이번에야말로 NGX와의 지긋지긋한 인연을 끝낼 거다.

성큼 몸을 들인 내부는 복도보다도 깜깜했다. 뒤편에서 들어온 남자가 문을 닫았다. 안을 휘 둘러본 그가 대뜸 따졌다.

“왜 불을 끄고 있어?”

그가 스위치를 눌렀다. 실내가 바로 환해졌다. 개운해 하는 남자에 곁눈질을 하던 문성하의 눈이 점점 커졌다. 아, 알겠다. 저 남자. 처음 접했을 때도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스포트라이트처럼 밝은 조명 아래에서 보니 비로소 알 것 같다.

한낱 비서가 아니다. NGX 웹 사이트에서 본 적이 있는, 그곳 임원이다. 심지어 매우 요직의.

“표정이 왜 그래. 기분 안 좋아?”

남자가 룸 안쪽을 향해 외쳤다. 문성하의 눈이 돌아갔다. 은연한 광택을 머금은 와인색 소파 위에서 정장 차림 남자가 얼굴을 들었다. 타들어 가는 담배를 끼운 손이 굵다란 목을 주물렀다. 기지개를 켜듯 고개를 젖혔다 바로 한 남자가 문성하를 힐끔했다. 일자로 다물려 있던 입이 열리고, 연무 같은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아니. 아주 좋은데.”

송곳과 같은 통증이 발가락을 파고들었다. 참기 어려운 저릿함이 발바닥을 적신 뒤 발꿈치를 타고 올라와, 종아리와 무릎을 물들이며 하반신 세포를 곤두세웠다. 곧 백야와 같은 무감각이 무릎을 찍어 누르고, 다시 밑까지 흘러내렸다. 마른 장작처럼 왼쪽 다리가 삐걱거렸다.

비척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가눈 문성하가 인상을 썼다.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움직일 여력이 없다. 바닥에 발을 찰싹 붙인 왼 다리가 거대한 바위에 짓눌린 양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이도 저도 못 한 채 꼼짝거리는 문성하를 관찰하던 주혜성이 몸을 일으켰다. 무게감 있는 발걸음 소리가 귓불을 꽉 조여 왔다. 문성하의 호흡이 가빠졌다. 젖 먹던 힘을 내 뒷걸음질 치는 문성하 앞에서 주혜성이 우뚝 멈췄다. 낮은 음성이 룸을 울렸다.

“제이미.”

목소리를 듣자마자 총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이 고꾸라졌다. 뒤편의 남자가 타이밍 좋게 팔을 뻗었다. 곤두박질치기 직전 잡아채어진 몸이 휘청거리며 바로 섰다. 남자가 혀를 내둘렀다.

“엄청나게 가벼우시네.”

문성하를 부축하듯 팔을 두른 그가 소파로 향했다. 입을 꾹 다문 문성하가 반강제로 착석했다. 파리한 손이 얼굴을 덮었다. 심히 원치 않는 상황이 됐지만, 지금은 차라리 이쪽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주혜성 앞에서 다리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걸 보여 주느니, 차라리 숨을 포기하고 그와 같은 공기를 공유하는 쪽이 낫다.

“이래저래 실례를 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주혜성이 예의 바르게 사과했다. 문성하는 답하지 않았다.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주혜성이 맞은편에 앉았다. 문성하를 부축해 준 남자가 그 옆에 착석했다. 문성하를 요리조리 살피던 남자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명함 지갑을 꺼냈다. 뒤적인 내부에서 종이 한 장이 빠져나왔다.

쭉 뻗은 손이 문성하의 앞으로 왔다. 살포시 놓이는 명함을 문성하는 건성으로 읽었다. James Lim, NGX COO. NGX 최고 경영 책임자 제임스 임. 이름과 직함까지 확인하니 확실히 알겠다. 신문에서 종종 본 사람이다. 재미 교포로, 젊은 나이에 홍콩 PE업계 스타 투자가가 된 인물이다. 현재는 주혜성의 오른팔로 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NGX 경영 책임 임원을 맡고 있는 제임스 임입니다. 편하게 제이미라 부르시면 됩니다. 이쪽은 잘 아시다시피…….”

“다리는 좀 괜찮으십니까. 많이 안 좋으면, 근처에서 대기 중인 우리 의사를 부를 수도 있습니다.”

제임스 임의 말을 자른 주혜성이 권유했다. 문성하는 그저 마른입만 오므렸다. 도무지 입을 열 기미가 없는 문성하를 일별한 주혜성이 물러났다. 헤매던 손으로 시트를 가볍게 두드리다, 다른 얘기를 꺼냈다.

“갑작스럽게 모신 건, 요청드릴 사항이 있어서입니다.”

“에센더는 팔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부연 설명을 하기도 전에 문성하가 선수를 쳤다. 이곳에 와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주혜성의 미간이 움찔했다. 사나워진 문성하의 눈길이 그에게 꽂혔다. 주혜성의 시선이 서서히 비껴 났다. 소파를 짓누른 그의 손목에서 간헐적으로 핏대가 불끈거렸다.

“제이미.”

“어?”

“통화 연결.”

돌연 주혜성이 지시했다. 바로 알아들은 제임스 임이 테이블 위에 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을 두드리며 번호 하나를 찾더니, 통화 아이콘과 스피커 아이콘을 연달아 눌렀다. 뚜우, 신호음을 흘리는 핸드폰이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핸드폰을 힐끔한 문성하의 입이 벌어졌다. 액정에 아주 잘 아는 이름이 찍혀 있다. 박재성 에센더 대표.

[네, 이사님. 안녕하십니까! 박재성입니다.]

신호음이 딱 세 번째에 접어들었을 때 통화가 연결됐다. 전화를 받은 박재성은 잔뜩 흥분해 있었다. 내내 이 전화만 기다려 온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네. 제임스 임입니다. 저녁 식사는 하셨고요?”

[덕분에 아주 잘했습니다.]

“제 덕분은 뭘.”

제임스 임이 피식거렸다. 주혜성은 말없이 눈을 깔았다. 문성하에 눈짓한 제임스 임이 핸드폰을 밀어 줬다. ‘박재성 에센더 대표’라는 글자가 가까워졌다.

“에센더 투자사인 청신투자의 문성하 대표님과 함께 있습니다.”

[아. 만나셨습니까!]

“네. 한 번쯤 뵙긴 해야 해서……. 통화 한번 해 보시겠습니까.”

[그럼요. 바꿔 주십시오.]

박재성이 다부지게 응했다. 문성하의 어금니가 꽉 깨물렸다. 힘 빠진 다리가 축 늘어졌다.

[문 대표님, 듣고 계십니까.]

문성하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머릿속에는 이제부터 나올 얘기가 자신이 예상한 그것이 아니길 바란다는 생각뿐이었다.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아주 간곡한 요청입니다.]

그렇게 될 가능성이 지극히 희박하다는 걸 알지만, 우매한 희망을 가져 봤다.

[청신투자에서 보유한 우리 지분, 좀 풀어 주면 안 되겠습니까. 대표님을 위해서도 우리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 아닙니까.]

늘 그렇듯 결과는 문성하의 편이 아니었지만.

[조그마한 벤처 회사 입장에서 NGX의 투자를 받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누구보다 대표님께서 잘 아시잖습니까.]

다소 비참해지는 그의 심경 고백은 덤으로 붙은 비수였다.

“끊어요.”

냉한 경고가 나왔다. 핸드폰 너머에서 주춤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문성하의 손이 나아갔다. 액정을 짚고는 가차 없이 ‘통화 종료’를 눌렀다. 박재성의 이름이 빠르게 점멸했다. 곧 사라졌다.

“아주 살벌하시네.”

제임스 임이 너스레를 떨었다. 문성하는 묵묵하게 펄이 들어간 아이보리색 대리석 벽을 응시했다. 점점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반짝이는 표면에서 끄무레한 자신의 인영이 볼품없이 너울거리고 있었다.

이대로 사라지는 게 나을 정도로 비참했다.

“정 원치 않으면 못 들은 걸로 하셔도 됩니다.”

문득 엄숙한 음성이 들렸다. 문성하와 제임스 임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주혜성이 문성하와 눈을 맞춰 왔다. 샹들리에 천장 등에서 떨어진 노란 빛이 그의 흑단 같은 재킷 칼라를 타고 미끄러졌다.

“청신투자는 에센더 지분 10%를 보유한 2대 주주입니다. 기존 주주 판단에 NGX에 지분을 넘기는 게 딱히 이득 되지 않는 일이라면, 이 제안 무시하셔도 됩니다. 우리는 투자자 하나하나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그 신념 아래에서 3년간 회사를 운영해 왔습니다.”

“훌륭한 회사네요.”

건조한 대꾸가 나왔다. 비아냥거리는 말은 아니었다. 일종의 체념이었다.

“에센더 지분 가져가십시오. 자세한 건 최재율 대표와 얘기하시고……. 저는 이와 관련해 이 이상 개입하지 않겠습니다.”

문성하가 피로한 손으로 머리를 쓸었다. 제임스 임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지켜보던 주혜성이 질문했다.

“갑자기 그런 결정을 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시장 논리에 따라야죠. 투자사가 벤처에 돈을 붓는 이유가 뭡니까. 서로서로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아닙니까. 청신투자로서는 범접도 할 수 없는 곳에서 투자처 지분을 매입하겠다 의사 표시를 했으니, 최적의 결과를 위해 제가 승복해야죠.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흘러내린 손이 툭 떨어졌다. 맥이 빠져 가는 손가락을 옴짝거리다, 작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성하의 목울대가 섰다. 주혜성의 이마에 금이 갔다. 문성하의 어조에 힘이 실렸다.

“이걸 끝으로 주 대표님을 뵙는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합니다.”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룸이 고적해졌다. 고개를 튼 제임스 임이 휘파람을 불었다. 와, 쉽지 않네.

***

룸에서 나온 건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먼저 나오고 싶었지만, 마비된 다리의 신경이 영 되살지 않아 움직일 수 없었다. 그사이 양주를 마시기 시작한 제임스 임이 수차례 술을 권했지만 문성하는 마시지 않았다. 주혜성도 마시지 않았다. 호응이 없는 와중에도 제임스 임은 끈질기게 술 권유를 했다. 성품 자체가 워낙 호방해 침체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권유에 종지부를 찍은 건 주혜성이었다. 단 한 번도 입 대지 않은 문성하의 잔을 끌어 제 입에 쏟아붓고는, 몸을 일으켰다. 먼저 일어나겠다며 나아가던 그의 시선이 문성하의 다리에 걸렸다. 문성하는 반사적으로 얼어붙은 다리를 가렸다. 진땀이 났다.

설마 자신이 움직이지 못하는 걸 진작 알고 있었나 싶었다.

마침내 감각이 돌아온 다리를 가누며 라운지를 나왔을 때에는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먼 곳에서 불어닥친 바람에 목덜미가 싸늘해졌다. 뒤늦게 발견한 최재율의 문자에는 ‘NGX와의 딜은 자신이 알아서 진행할 테니,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고 귀가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주차장을 휘 둘러봤다. 구석에 주차된 자신의 차가 보였다. 차 빼 드려요? 발레파킹 직원이 다가오며 물었다. 문성하는 스스로 하겠다며 키만 받았다. 차를 향해 저벅저벅 걷는데 자꾸만 왼쪽 발이 끌렸다. 문성하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운전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차 앞에 서서 키를 만지작거렸다. 어차피 오른발만으로 하는 운전이기에 큰 지장은 없다. 다만 왼 다리의 마비도에 따라 오른 다리가 덩달아 버벅거리는 경우가 있다. 지금까지 운전하며 그런 적은 없지만, 오늘의 상황은 다소 특수하다.

마비의 근원을 직접 대면한 날이다. 자신조차 제 다리의 기능을 확신할 수 없다.

“운전하실 겁니까.”

나직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문성하의 얼굴이 돌아갔다.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위험해 보여서요.”

다가온 남자가 가로막듯 운전석 쪽 차창에 등을 붙였다. 문성하의 입이 달싹였다. 한 걸음의 틈을 두고 마주 선 남자의 체향에 머리가 우련해진다.

5년 새 특유의 우디 향이 짙어졌다. 오래된 고목나무를 갈라 그 뿌리에서 엑기스만 짜낸 듯한 내음은 정중하며 과묵하다. 5년에 걸쳐 매일 밤 숙성한 듯한 남자의 냄새다.

“또 뵙는 일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불과 한 시간 전에.”

문성하가 딱딱하게 말했다. 주혜성의 가슴이 잠시 부푼 끝에 가라앉았다. 입을 다신 그가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레 풍성해진 체향에 놀란 문성하가 물러났다. 개의치 않고 눈높이를 맞춘 주혜성이 깍듯하게 말했다.

“키 줘요.”

문성하는 잠자코 쏘아봤다. 그럴 줄 알았다는 양 한숨 쉰 주혜성이 팔을 뻗었다. 저도 모르게 풀린 문성하의 손에서 키가 떨어졌다. 주혜성은 몸을 숙여 굴러다니는 키를 주웠다.

“키는 제가 맡겠습니다. 제 차로 가십시오.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키를 주머니에 넣으며 몸을 세운 주혜성이 말했다. 문성하의 눈길이 넘어갔다. 저편에서 대기 중인 고급 외제 세단이 보였다. 운전석에 전용 기사로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이를 질근거린 문성하가 입을 열었다. 격양된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내가 분명히 다시 볼 일 만들지 말자고…….”

“문 대표님.”

허리를 짚은 주혜성이 짙은 숨을 몰아쉬었다. 문성하의 얼굴에 닿는 밤공기가 자못 뜨거웠다. 꼼짝달싹하던 손이 등 뒤로 숨었다. 갈수록 호흡이 달뜬다. 결이 다른 오싹함에 왼발이 간질거린다.

주혜성과 닿은 적이 없는데, 이미 닿은 것처럼 맥박이 벅차 온다.

“저와 살 맞대는 것 싫잖아요.”

주혜성이 재차 상체를 숙였다. 다가온 얼굴이 문성하의 옆얼굴에 겹쳐졌다. 곤두선 솜털이 그의 입술에 스쳤다. 문성하의 눈꺼풀이 파들거렸다. 주혜성이 묵직한 종용을 했다.

“안아서 옮겨 버리기 전에 알아서 차로 가 달란 얘기야. 응? 형.”

***

주소를 말하지 않았음에도 기사는 능숙하게 운전을 이어 갔다. 지나쳐 가는 족족 익숙한 길이었다. 문성하가 이사하지 않은 걸 주혜성이 아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알았느냐 물어보려다 그만뒀다. 말을 거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 발목의 힘이 픽픽 빠졌다. 실제로 걸었다간 집에 당도했을 때 걸어서 나가지 못할 것만 같았다.

이십여 분을 이동한 세단이 익숙한 입구 앞에 멈춰 섰다. 뒤를 돌아본 기사가 말했다. 도착했습니다. 끄덕인 주혜성이 먼저 뒷좌석 문을 열고 나섰다. 차 뒤편을 휘 돌아 문성하의 앞으로 와서는 문을 열어 줬다. 문성하는 잠연히 발을 뺐다.

지금은 다리 상태도 나쁘지 않고, 거동하는 데 큰 무리가 없다. 자신의 몸이니 자신이 잘 안다. 문제는 자꾸만 긴장이 되는 점이다. 주혜성의 앞에서 조금이라도 삐끗하는 걸 보여선 안 된다는 강박에 발목이 절로 수축된다. 평소와 다른 템포로 근육이 이완한다. 일단 바닥부터 디딘 문성하가 숨을 골랐다. 이대로 일어서면 되는데, 제대로 설 수 있을지가 판가름되지 않았다.

“기사님.”

문득 주혜성이 기사를 불렀다. 차에서 내린 기사가 다가왔다.

“예. 대표님.”

“문 대표님 부축 좀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문성하가 기겁했다.

“아니, 전 괜찮…….”

들은 척도 않고 몸을 구부린 기사가 문성하의 팔을 신중하게 잡아 줬다. 옴짝달싹하던 발이 슬그머니 바닥을 밟았다. 생각보다 멀쩡하게 설 수 있었다. 허청거려도 티 나지 않게 지탱할 곳이 생겼다는 위안 하나로 동작하는 게 수월해진 모양이었다. 오롯하게 선 문성하가 발을 내밀었다. 기사가 열심히 부축하며 따랐다.

앞서간 주혜성이 빌라 유리문을 열었다. 다섯 개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곧 열린 승강기 안에 몸을 들이고는 문성하의 집이 있는 5층을 눌렀다. 5년 만에 찾았으면서 마치 어제도 왔던 양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

문성하와 기사가 들어온 걸 확인한 주혜성이 ‘닫힘’ 버튼을 눌렀다. 묵직한 소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올라갔다. 문성하는 내내 밑을 내려다봤다. 바닥을 디딘 구둣발이 제 것인데도 꿔다 놓은 남의 것 같았다.

5층에 당도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먼저 나선 주혜성이 현관 앞에 섰다. 키패드에 비밀번호를 후루룩 누르는 걸 본 문성하가 소리 없이 경악했다. 5년 내내 곁에 있었던 양 구는 모습에 식은땀이 났다. 마음만 먹으면 다른 것도 얼마든지 하겠구나 싶은, 근거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건 일종의 열등감과 맞닿은 감정이었다. 주혜성이 삶의 십 할 가까이 이기는 일만 하며 살아왔다는 걸, 아주 뜬금없는 상황에서 깨닫는다. 그런 측면이 자신과 두드러지게 다르다는 것 역시.

그 자연스러운 승리의 옷가지는 문성하의 기를 죽이기에 충분했다.

“전 이만 내려가 보겠습니다.”

문성하를 집 안에 들인 기사가 말했다. 주혜성이 대꾸했다.

“네. 대기하고 있어요.”

꾸벅한 기사가 물러났다. 철문이 닫혔다. 어두침침한 거실에 불을 켠 문성하가 발을 뻗었다. 그대로 주혜성을 지나쳐 가며 손짓했다. 피로감이 역력한 목소리가 나왔다.

“너도 가 봐.”

“오늘이 마지막인데, 얼굴 보며 얘기할 시간 정도는 주면 안 될까.”

주혜성이 물었다. 마뜩지 않은 눈길이 그에게 쏠렸다. 높낮이 없는 한 마디가 덧붙었다.

“형이 말했잖아. 오늘을 끝으로 나와는 더 보는 일 없었으면 좋겠다고.”

문성하의 호흡이 조금씩 삭아 들었다. 단조로운 질문이 나왔다.

“진심이지?”

주혜성은 수긍의 고갯짓을 했다. 몸을 튼 문성하가 말했다.

“들어와. 십 분만이야.”

소파로 향하는 새 뒤편에서 구두를 벗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윽고 다가온 주혜성이 소파에 착석했다. 문성하와는 대여섯 뼘가량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남색 시트를 손으로 쓴 그가 뇌까렸다.

“소파 안 바꿨네. 색깔 마음에 안 든다고 스무 번은 불평했던 것 같은데.”

“뉴스에서는 네가 이번 주말에 방한한다던데.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외면한 문성하가 따졌다. 팔짱을 낀 주혜성이 답했다.

“일이 있어서 예정보다 먼저 왔어.”

“일?”

“이래저래. 뭐……. 자세히 얘기하긴 좀 그렇고.”

보이지 않는 선을 긋는 말투였다. 문성하는 더 캐묻고 싶지 않다는 양 등받이에 목을 붙였다. 깊숙한 부분까지 따져 들 마음은 없었다. 그럴 이유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는 사이다.

남이다.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에센더는 어쩌다 안 거야?”

문성하가 다른 걸 물었다. 주혜성이 낮게 대꾸했다.

“그것도 자세히 얘기하기 좀 그래.”

“설명 가능한 게 하나도 없네. 대체 여긴 뭐 하러 온 거야?”

문성하가 짜증을 냈다. 여전히 팔짱을 낀 주혜성이 눈을 굴렸다. 무채색을 머금은 시선이 문성하의 옆얼굴을 타고 미끄러졌다. 들릴 듯 말 듯한 언어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안 그래도 생각 중이야. 설명 가능한 것.”

문성하가 진이 빠진다는 투로 눈가를 짚었다. 호젓한 기류가 거실을 유영했다. 잠잠하던 주혜성이 문득 소파 뒤편을 짚었다. 깜깜한 구석을 관찰하다가, 아리송한 혼잣말을 했다.

“이게 왜 여기에 있어?”

문성하의 눈길이 넘어갔다. 소파 뒤에 팔을 넣은 주혜성이 뒤적인 끝에 뭔가를 건져 올리고 있었다. 드러난 것을 발견한 문성하가 얼어붙었다. 자신과 주혜성을 담은 폴라로이드 사진이었다.

“다 버렸는데. 망할.”

분연한 손이 사진에 대고 갈고리질을 했다. 피하듯 손을 뺀 주혜성이 등받이에 팔꿈치를 붙이며 턱을 괴었다. 진지한 질문이 찾아들었다.

“내 물건 다 버렸어?”

“버렸지. 당연히.”

“잘했어.”

기이할 정도로 다정한 칭찬이었다. 주혜성이 얼핏 미소 지었다. 문성하가 눈을 찡그렸다. 폴라로이드를 팔랑인 주혜성이 읊조렸다.

“남은 것 없애 줄게.”

파삭, 커다란 손안에서 폴라로이드가 일그러졌다. 단숨에 뭉뚱그려 휴지통에 던져 넣은 그가 손을 털었다. 문성하가 얼떨떨하게 입을 열었다. 허탈한 한 마디가 새어 나왔다.

“너 진짜 뭐 하러 온…….”

“우선 귀국은 일주일 전에 했어. 언론에는 이번 주말에 입국한다 했지만, 지난주에 한국 들어와 이것저것 일 처리 중이야. 그중 가장 중요한 게.”

주혜성이 조곤조곤 설명을 시작했다. 뜸을 들인 그가 쐐기를 박았다.

“에센더 건이었고.”

“고작?”

문성하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운용 자금만 100조 원이 넘는 글로벌 벤처 투자 기업 CEO가 연 매출 3000만 원짜리 회사 때문에 입국을 열흘 가까이 앞당겼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게 당연하다. 어이없어하는 문성하를 일별한 주혜성이 눈을 깔았다.

“투자 기업이 원활하게 돌아가려면 지속적인 자금 수혈이 필요해. 자금 흐름이 경색되면 아무리 펀더멘털이 탄탄한 회사라도 무너지기 마련이니까.”

“그야 당연한 거잖아. 갑자기 그 얘기를 왜 하는데?”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얘기가 하고 싶었어.”

주혜성의 눈꺼풀이 느릿느릿 들렸다. 새로이 드러난 눈망울은 방금 전 접한 것과 사뭇 달랐다. 황량한 사막 같던 눈에서 물기가 비쳤다.

오아시스 비슷한 것이, 망막에 드리운다.

“5년이나 됐잖아.”

이윽고 하나의 강이 된다.

“살기 위해 필요한 걸 수혈해야 했어. 나는.”

곧 바다가 된다.

“그래서 에센더를 이용한 거야. 살기 위해서.”

오래가지 않았다. 끝내 말라붙었다. 처음의 형태로.

“다만 언제까지고 내 뜻대로 할 수는 없는 일이지. 장본인이 나를 원치 않으니까.”

입을 다문 주혜성이 몸을 일으켰다. 옆자리가 갑자기 허전했다. 문성하의 눈동자가 스르르 올라갔다. 문성하로부터 등을 보인 주혜성에게서는 그 어떤 표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저 폴라로이드 사진 있잖아.”

불현듯 운이 떨어졌다. 문성하가 휴지 조각이 된 휴지통 속 폴라로이드 사진을 봤다. 주혜성이 질문했다.

“언제 어디서 찍은 건지 기억나?”

문성하의 눈이 깜빡였다. 머리가 굴러갔다. 폴라로이드 사진, 언제, 어디서 찍었더라. 얼핏 본 배경이 어느 낯익은 거리였는데. 그것 말고는 썩 와닿는 게 없다.

아. 입이 벌어진 건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기억을 찾는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분명히 머릿속에 존재하는 과거다.

역삼동이었다. 막 퇴근한 주혜성과 만나 외식을 하기 위해 길을 걷는데, 한 남자가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테스트 중이라며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 물었다. 문성하는 사진이 남는 걸 싫어하는 쪽이지만, 주혜성이 원하는 듯했으므로 그리하라 했다. 남자는 찍은 사진을 문성하에게 줬다.

인화된 형태로 남은 둘의 사진은 그게 유일했다.

“그거 역삼동에. 네 사무실 있는 곳 근처에서…….”

“그때 찍어 준 사람, 우리 직원이야.”

주혜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조 섞인 읊조림이 이어졌다.

“내가 부탁했어. 소장할 수 있는 형과의 사진이 갖고 싶어서,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항상 갖고 다니는 직원에게 연기 좀 해 달라 했어. 형은 사진 찍는 것 자체가 민망하다면서 핸드폰 사진도 잘 안 찍잖아. 그래서 그렇게라도 해 본 거야.”

문성하의 입에서 하, 소리가 나왔다. 덜컥 화내는 말이 터졌다.

“너 진짜 하나부터 열까지 날 속이지 않은 게 없구나.”

“그때는 그런 방법밖에 몰랐어. 그렇게 해서라도 형과의 추억이 남으면 된 거고, 수많은 거짓말을 동원해서라도 형의 곁에 남을 수 있으면 된 거고……. 방법이야 어찌 됐든 형과 영영 연결되기만 하면, 나는 그걸로 됐으니까. 그러니 그런 방식이어도 상관없다 생각했어. 많이 어렸지.”

주혜성이 꼬여 있던 입매를 풀었다. 그의 입 안에서 식은 혀가 굴러갔다.

“앞으로는 거짓말 안 하려고. 그런 걸로 형을 얻을 수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이악한 시선이 문성하를 쓸었다. 주혜성의 울대뼈가 딱딱해졌다.

“형과 보는 게 오늘이 마지막일 일은 없을 거야. 그게 오늘의 진실이야. 형이 원치 않아도, 앞으로 우리는 종종 보게 될 거야.”

주혜성이 몸을 낮췄다. 묵직한 눈빛이 가까워졌다.

“향후 한 달간 한국에 있어. NGX코리아 전면 재정비할 거야. 본사에서 OK 받았어. 내 휴가 써 가며 진행하는 내 프로젝트니 그쪽에서 뭐라 할 이유가 없지.”

곧 몸을 세운 주혜성이 덧붙였다.

“한 달 동안 형에게 몇 가지 진실을 알려 줄 생각이야. 그러고 나서 본사로 돌아가려고.”

주혜성이 몸을 틀었다. 거친 심호흡과 함께 널따란 등이 울렁거렸다. 차마 이것만큼은 얼굴을 보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처럼, 가까스로 끌어 올린 언어가 문성하의 귀를 울렸다.

“잘 자, 형. 내 생각하지 말고. 그러면 불안해서 못 잘 것 아니야.”

뚜벅뚜벅 걸어간 주혜성이 현관 앞에 섰다. 이내 휙 문을 열어젖히고는 단숨에 바깥으로 나섰다. 철컥. 이 밤을 매듭짓듯 들려온 소리에 문성하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허공을 헤매던 손이 내려갔다. 축 처진 왼쪽 다리를 잡고는, 가만가만 쓸어내렸다. 문성하의 속눈썹이 철 지난 낙엽처럼 하느작거렸다.

또 감각이 없다. 그것이 더 이상 슬프지도 않은 게 이제 더 슬프다.

“왜 그래. 진짜.”

책망하는 혼잣말이 나왔다. 나풀거리던 속눈썹이 끝내 가라앉았다. 시야가 캄캄해졌다.

“네가 이러면 안 되지…….”

진정 자신을 생각했다면, 돌아와선 안 됐다.

문성하는 더 이상 신기루를 쫓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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