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4장. 재회) (21/37)

1) 아파시아: 실어증

4장. 재회

21.

“청신투자 얘기 들었어?”

대각선 테이블에서 남자 두 명이 숙덕거리고 있었다. 문성하는 쥐고 있던 커피 잔을 찰랑이며 다리를 뻗었다. 오른쪽 다리는 올곧게 나아가는데, 왼쪽 다리가 중간에서 버벅대다 멈춘다. 채 펼쳐지지 못한 무릎이 맥없이 늘어졌다.

아랫입술을 깨문 문성하가 오도 가도 못하는 왼쪽 다리를 노려봤다.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진 상황인데, 종종 이것이 제 몫이 아닌 것 같아 낯설다. 그래서 자꾸만 부정하게 된다.

오롯한 두 다리로 버티던 시절을, 꿈처럼 떠올리게 된다.

“청신투자 왜.”

둘 중 녹색 넥타이를 한 남자가 물었다. 입 안의 얼음을 와작, 씹은 파란색 넥타이의 남자가 말했다.

“작년에 잠깐 이슈 된 스타트업 ‘PTP라운지’ 기억나지? 슈퍼 모델 출신이 만든 펫 전문 스타트업.”

“어어. 비슷한 모델이 많아서 곧 문 닫을 거라고 했잖아, 우리끼리. 슈퍼 모델 출신 CEO 둔 것 말고는 볼 게 없는 회사라고.”

쭈웁, 스트로를 빤 녹색 넥타이가 수긍했다. 얼음을 질근거린 파란색 넥타이의 어조에 날이 섰다.

“작년 말에 청신투자가 PTP라운지 지분 30% 가져갔거든. 워낙 인기 없는 곳이니 싼값에 샀겠지. 그러고 나서 청신투자 주도로 PTP라운지가 펫 관리 플랫폼 사업 계획을 짠 모양이야. 한데 이 플랫폼 수준이 꽤 높다는 소문이 투자업계며 언론에 돌았고, 이게 알음알음 화제가 됐어. 관심 갖는 투자사가 늘면서 PTP라운지 기업 가치가 급증한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고.”

“얼핏 얘기 들은 것 같다. 그래서 어떻게 됐더라.”

“지난주에 BD캐피탈에서 청신투자의 PTP라운지 보유 지분 30% 가지고 명의 개서2)를 진행했어. 청신투자는 무려 500%를 먹고 엑시트 했대. 그쪽 입장에서는 대박을 터뜨린 거지. 문제는 그다음이야.”

남은 얼음이 바사삭, 깨졌다. 파란색 넥타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막상 BD캐피탈에서 그 말 많은 펫 관리 플랫폼을 까 봤거든? 완전히 기대 이하인 거야. 거의 기존 플랫폼 짜깁기 수준이었대.”

“그걸 실사 때 전혀 몰랐단 말이야?”

“낌새는 느꼈지만 지들도 긴가민가했던 거지.”

한숨 쉰 파란색 넥타이가 턱을 괴었다.

“청신투자 그 개새끼들이 얼마나 이빨을 잘 털던지, 이상한 걸 알면서도 저절로 계약서에 손이 가더란다. 거기 심사역 얘기가.”

“BD 이 머저리 새끼들.”

스트로를 휘적거린 녹색 넥타이가 낄낄거렸다. 파란색 넥타이가 혀를 내둘렀다.

“진짜 청신투자 거긴 뭐 하는 새끼들인지 몰라. 투자한 회사가 10곳이 넘어가는 걸로 아는데, 거기서 개입한 벤처치고 말 안 나오는 곳이 없어.”

“보면 몰라? 전형적인 투자 사기단이잖아. D급에서 F급 되는 벤처들 지분 헐값에 사들인 뒤 거기 CEO에 사탕발림해 업계가 주목할 만한 이슈 주구장창 만들어 놓고. 그걸로 기업 가치 높인 다음 먹잇감이 접근하면 지들은 깔끔하게 지분 털고 엑시트. 까놓고 말해 넘어가는 투자사가 멍청한 거야.”

시시덕거린 녹색 넥타이가 뭔가가 생각났다는 양 팔짱을 꼈다. 표정이 자못 골똘했다.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던 그가 턱짓을 했다.

“그러고 보니 청신투자 대표, 꽤 유명한 VC 출신 아니었던가.”

“어어. 공동 대표인데, 둘 다 메이저 VC 출신.”

“공동이었어? 하나는 확실히 알아. ST인베스트먼트에 있던 최재율. 또 하나는 누구인데.”

“그, 있잖아. 현주원이 DF벤처스 대표로 있었을 때 애지중지 싸고돌던 예쁘장한 새끼. 걔하고 떡 치고 다닌다고 소문 돈 투자업계 좆 달린 새끼만 한 다스였는데. 이름이 아마…….”

파란색 넥타이의 윗눈썹이 꿈지럭거렸다. 아리송한 한 마디가 덧붙었다.

“문성하였던가?”

드르륵. 문성하의 의자가 뒤로 밀려 났다. 그대로 일어선 뒤, 남자들 테이블 쪽으로부터 등을 보였다. 저벅저벅 입구로 향하던 중 떨떠름한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왜?”

“아니, 뭐…….”

뜸을 들인 한 명이 뇌까렸다.

“우리가 방금 얘기한 그 사람인가 해서.”

두고 갈게요. 카운터에 빈 커피 잔을 둔 문성하가 말했다. 받아 든 점원이 환하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선선한 봄바람이 앞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가볍게 정돈하고 허리를 바로 세웠다. 저 멀리 서강 대교를 낀 한강이 보였다. 멍하니 서 있자니, 먼 곳에서 또 바람이 찾아들었다. 기껏 다듬어 놓은 머리카락이 다시 흐트러졌다.

문득 주머니가 진동했다.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환해진 액정에서 익숙한 이름이 비쳤다.

「아직도 여의도야? 미팅 끝났으면 어서 강남으로 넘어와. 순 사기꾼밖에 없는 곳에서 뭐 하러 죽치고 있어.

최재율 청신투자 공동대표」

입 안에서 쯧, 혀가 채였다. 헛헛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누가 누구보고 사기꾼이래.”

물론 최재율도 알면서 한 얘기일 터다.

천연덕스러운 너스레는 최재율의 전매특허에 가까웠다. 본인은 깊숙한 구렁텅이에 빠져 있으면서 얕은 개울에 발목이 잠긴 사람을 비웃었고, 내일 당장 갈 곳이 없는 상황에서 오늘의 패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불평했고, 오늘내일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넌 다리가 예쁘다며 칭찬하는 식이었다.

3년 전 재회한 날도 그랬다.

정확하게 1년 6개월. 문성하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기간이다. ‘그 일’이 있은 후 문성하는 한 달의 입원을 마치고 퇴원했다. 그 즉시 회사로 직행해 사표를 냈다.

현주원은 잡지 않았다. 대신 ‘그렇게나 네가 아끼는 동생과 함께 불구덩이에 빠져 죽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문성하가 병원에 있던 한 달 새 베이스터 한국 법인이 통째로 한 PE에 인수되며 현주원이 업계의 웃음거리로 전락했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현주원은 자신이 베이스터의 머리 위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베이스터가 현주원의 머리 위에 있었다.

DF벤처스에 사표가 수리되는 걸 보고 문성하는 집으로 왔다. 안에 주혜성의 짐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문성하는 장례를 치르듯 물건을 정리해 폐기 처분했다. 이후 침대에 올라 이불을 덮었다. 이틀을 내리 잤다.

이틀 만에 눈을 뜬 건 병원에서 걸려 온 전화 때문이었다. 내원일입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문성하는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갔다. 가서 진료를 받고, 의사를 통해 한 재활 치료 센터를 소개받았다. 매우 유명한 교수가 운영하는 곳인데, 문성하의 재활 데이터를 제공하면 무상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의사가 말했다. 문성하는 망설이지도 않고 데이터 제공 동의서에 사인을 했다. 수입이 끊긴 와중에 줄일 수 있는 비용은 최대한 줄여야 했다.

다시 집으로 와 이틀을 내리 자다, 또 전화벨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이번에는 재활 치료 센터였다. 오늘 방문하시기로 돼 있는데요. 상냥한 목소리에 문성하는 다시 택시를 잡았다. 센터로 가 두 시간에 걸친 치료를 마치고, 집으로 왔다. 또 잤다.

비슷한 일과가 반복됐다. 문성하는 잠을 잤고, 일어나면 침대나 소파에 앉아 책이나 TV를 봤고, 그러다 배가 고파지면 밥을 먹었고, 정해진 일시에 맞춰 재활 치료 센터나 병원에 갔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훌라후프처럼 제한된 반경을 순회했다. 지겹거나 고달플 건 없었다. 오히려 편안했다.

타인과 안 좋게 얽히고 싶지 않다면 그냥 타인을 만나지 않으면 된다. 사방과 아래가 꽉 막혀 있어 들어올 물도, 나갈 물도 없이 잔잔하게 흔들릴 뿐인 저수지와 같다. 때때로 고독과 허무의 폭풍우에 부딪혀 물이 불어나는 참사를 겪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원상태로 돌아왔으므로 문성하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이 평탄한 저수지에 구멍이 생기는 데에는 1년 6개월이 걸렸다.

“나 회사 때려쳤다.”

연락도 없이 찾아온 최재율은 다짜고짜 거실 바닥에 앉아 배달 앱을 켰다. 멋대로 주소 창에 문성하 집 주소를 넣고는 짜장면과 탕수육을 시켰다. 소파에 앉아 있던 문성하가 성질을 냈다.

“누구 마음대로 여기다 배달이야?”

“나 먹으려고 시킨 거야. 한 시간 전에 회사에서 짐 싸는 바람에 점심을 못 먹었거든.”

이윽고 도착한 음식은 최재율의 설명과 달리 이 인분이었다. 문성하의 앞에 짜장면 그릇을 놓아 준 최재율이 제 그릇에 덮인 랩을 깠다. 두 사람의 중간에는 수북이 쌓인 탕수육 접시가 있었다.

“나 기름진 것 안 먹어.”

문성하가 찌푸리며 그릇을 치웠다. 개의치 않고 짜장면을 후루룩, 흡입한 최재율이 고갯짓을 했다.

“그럼 탕수육 먹어.”

“누가 들으면 탕수육은 기름도 없이 튀긴 줄 알겠다.”

“쟨 적어도 하얗잖아. 그나마 좀 프레시해 보이지 않아?”

단숨에 반을 해치운 최재율이 키득거렸다. 탄식한 문성하가 소파에서 내려왔다. 탕수육 접시 앞에서 양반다리를 하고는, 덮인 랩을 뜯었다. 맨손으로 튀김 조각을 집어 두어 번 씹다 질문을 던졌다.

“회사는 왜 때려치웠어.”

“대표 새끼가 마음에 안 들어.”

“언제는 마음에 들었고?”

“올 초 성과급으로 고작 5000만 원 준 건 선 넘었지. 내가 작년에 회사에 벌어다 준 게 50억 원인데.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 놓고 사사건건 간섭은 어찌나 하는지. 3년 안에 이사 달게 해 준다고? 그 약속한 게 어언 5년 전이다. 하여간 사기꾼 새끼.”

남은 짜장면을 한입에 털어 넣은 최재율이 주변을 둘러봤다. 물을 찾고 있음을 안 문성하가 몸을 일으켜 걷기 시작했다. 최재율이 뒤에서 감탄했다.

“이야, 우리 문성하 다리 예쁘네.”

“죽고 싶지 않으면 다리 얘기하지 마.”

“정말로 예뻐서 한 얘기인데. 네가 예로부터 다리 하나는 끝내줬거든.”

대놓고 희롱한 최재율이 말을 이었다.

“오죽하면 너 17세 때 미국에서 도망쳐 와 갖고 시부렁거리며 아버지 욕할 때에도 난 네 다리만 보고 있었겠냐.”

문성하의 걸음이 멎었다. 머리가 천천히 돌아갔다. 착 깔린 목소리가 나왔다.

“대체 용건이 뭐야? 형.”

최재율은 가만히 문성하가 치운 짜장면의 랩을 뜯었다. 안에다 젓가락을 처박은 그가 느릿느릿 내용물을 휘저었다. 그새 분 짜장면에서는 서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 좀 도와줘라. 성하야.”

문성하의 속눈썹이 흠칫했다. 최재율이 고저 없이 말했다.

“너 17세 때 우리 집으로 와서 성인 될 때까지 산 것 기억나지? 우리 어머니 보살핌받으면서.”

문성하의 입이 말아 물렸다. 차마 무시하기 어려운 얘기다. 숨을 고른 최재율이 덧붙였다.

“그거 이제 와서 갚는 셈 치고 나하고 사업 하나 하자.”

문성하의 발 하나가 스르르 밀려 났다. 나직한 반문이 나왔다.

“무슨 사업.”

“그냥, 뭐……. 아주 이 바닥스럽게 장사하는 사업?”

말을 마친 최재율이 면발을 빨아 들였다. 뭉텅이째 욱여넣고, 우물거린 끝에 꿀꺽한 그가 설명했다.

“투자업계 바닥, 순 사기꾼투성이인 거 잘 알잖아. 너나 나나. 뒤통수 맞아 본 적도 있고 때려 본 적도 있고. 그 경험 밑천으로 해서 장사 한번 해 보자고.”

문성하는 조용히 숨만 삭였다. 바람 한 점 없는 거실에서 자잘한 먼지가 나부꼈다. 좀처럼 입을 떼지 않는 문성하를 힐긋한 최재율이 헛웃음 쳤다.

“설마 너 죽을 때까지 이러고 살 생각이야?”

문성하는 침묵했다. 최재율의 미간을 좁혔다.

“네가 왜 이러고 사는지, 제대로 얘기한 적이 없어서 나는 몰라. 물어봐도 얘기 안 할 것 아니까 물어보지 않는 거고. 다만 한 가지는 알아. 넌 어떤 상황 속에서도 결국 네 길 찾아가는 애라는 거. 17세 때 이미 보여 준 적 있잖아. 한 번 했는데 두 번을 왜 못해?”

17세 때. 자신이 가장 질색하는 시절을 굳이 끄집어 언급하는 최재율의 교활함에 치가 떨렸다. 문성하는 이를 갈며 최재율을 봤다. 피하지 않고 마주 본 최재율이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했다. 폭주하기 직전처럼 씩씩거리던 가슴의 움직임이 잦아져 갔다. 짧은 순간 온탕과 냉탕을 오간 사람처럼 달았다 식은 몸의 온도에 의도치 않게 머리가 맑아져 버렸다.

자못 이성적인 시선이 최재율에 걸렸다. 최재율은 무표정으로 짜장면 그릇을 내려놓았다. 숨을 고른 문성하가 등을 죽 폈다. 느리게 벌어진 입에서 메마른 목소리가 샜다.

“형은 지금 나에게 도움을 받으러 온 게 아니네.”

최재율이 미소 지었다.

“뭐, 겸사겸사 온 셈 치자.”

입을 다신 문성하가 허리를 짚었다. 지난 1년 6개월을 곱씹듯 입 안의 점막을 지분거리다, 질문을 꺼냈다.

“진짜 사기 치는 회사 만들 거야?”

최재율이 피식거렸다.

“겸사겸사 사기도 치는, 그런 회사 어때.”

그의 고개가 날연히 젖혀졌다.

“우리가 지금까지 당한, 딱 그만큼만 해 먹자.”

***

오후 5시를 약간 넘긴 여의도 버스 정류장은 벌써 붐볐다. 5시에 퇴근하는 여의도 금융사가 많다 보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차를 가져오지 않아 버스를 택했지만 막상 사람이 많은 걸 보니 망설이게 됐다. 그냥 9호선 급행 지하철을 타고 강남까지 갈까, 싶었지만 곧 그만뒀다. 그쪽은 이미 지옥일 거다.

“팡팡이다!”

곁에서 한 어린아이가 소리를 쳤다. 정류장 부스의 신문 가판대를 보며 한 외침이었다. 다가간 어머니가 아이를 안았다. 옆구리에 증권사 리포트를 끼고 있었다.

“그러게. 우리 우진이가 제일 좋아하는 게임이지? 팡팡.”

“근데 팡팡이 뭐 한대?”

아이는 신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머니는 찬찬히 글자를 읽으려 했지만, 일부가 다른 신문에 가려 있어 보이지 않았다. 곁눈질을 한 문성하가 다가가 신문을 뺐다. 부스 주인에 돈을 건네고, 아이와 어머니 쪽을 향해 펼쳐 보였다. 어머니가 멋쩍어하며 마저 읽었다.

“음……. 팡팡을 만든 회사가 팔린다고 하네.”

“그럼 팡팡은 이제 안 나와?”

“아니야. 아주 잘된 거야. 팡팡을 만든 곳은 원래 아주 작은 게임 회사였어. 그런데 어떤 곳에서 팡팡을 좋게 보고 높은 가격에 사기로 한 거야. 이제 팡팡 회사는 팡팡 같은 게임을 훨씬 더 많이 만들게 될 거야. 돈이 많아졌으니까.”

“팡팡을 얼마 주고 샀어?”

“얼마에 샀는지는 여기에 안 나오는데……. 클로징이 아직 안 돼서 그런가.”

혼잣말을 한 어머니가 곧 방싯거렸다.

“아무튼 매입사는 팡팡 회사의 가치를 3조 원으로 책정했어. 팡팡 회사가 3조 원이나 된다는 얘기야.”

“그럼 팡팡 사는 사람은 3조 원씩이나 있는 거야?”

“가치가 3조 원이라 해서 3조 원에 사는 그런 개념은 아니야. 하지만 엄마가 알기로 저 사람은 100조 원도 있을걸?”

“누군데?”

아이의 눈이 반짝거렸다. 문성하는 넌지시 1면을 확인했다. 상단의 커다란 고딕체가 눈에 띄었다.

「[단독] 인기 게임 ‘팡팡’ 개발사 엠덱트 팔린다…… NGX, 기업 가치 3조 원 책정」

“NGX라는 큰 글로벌 투자회사의 대표야. 주혜성이라고, 아주 대단한 사람이야.”

아이의 입이 떡 벌어졌다.

“대단하다! 저 사람은 만날 팡팡 할 수 있겠다.”

어머니가 웃었다.

“글쎄. 저 사람은 너무 바빠서 팡팡은 못 할 것 같은데……. 아예 게임을 해 본 적도 없을걸?”

머리맡에서 치익, 소리가 났다. 버스 왔다, 가자. 아이를 내려놓은 어머니가 작은 손을 잡아끌며 뛰었다. 문성하는 묵묵하게 본문을 살폈다. 매각되는 엠덱트 대표의 사진은 작게 들어가 있고, 주혜성 사진이 압도적으로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NGX는 미국 회사이지만 대표가 한국인이다 보니 이곳에서 국내 기업을 사고팔 때마다 언론과 투자업계는 높은 관심을 보였다.

치익. 또 정차하는 소리가 들렸다. 버스 번호를 확인한 문성하가 신문을 접어 부스에 돌려줬다. 환불하는 거예요? 어리둥절해하는 부스 주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버스에 올라탔다. 벌써 사람으로 빼곡한 내부에서는 각양각색의 누기가 느껴졌다. 문성하는 현기증을 식히듯 눈앞의 봉에다 머리를 기댔다. 버스가 출발했다.

***

“PTP라운지 건은 금일 오후에 정산 끝나. 2억 넣어서 10억 먹었으니 창립 이래 가장 성공한 투자야.”

담배 연기를 뿜은 최재율이 필터를 씹으며 중얼거렸다. 문성하가 물었다.

“우리 지분이 총 얼마였지?”

“투자금 2억 중 동연GI 박성호 사장 지분이 8000, 개인 투자하는 윤세경 사장이랑 김태천 사장이 각각 3500씩. 리딧펀드 오준현 2000. 위 지분 제외하고 우리 자금만 따지면 3000.”

“그럼 우리 수익금 1억 2000에…… 고객 수수료는 2억 2000, 맞나?”

“아. 김태천 수수료는 이번에 못 받을 것 같아. 지지난달 엑시트한 이림코퍼레이션 수익률이 당초 얘기 들은 것보다 마이너스라며 이번 건은 수고비로 퉁치자 버티더라고. 말다툼하기 싫어서 내버려 뒀어. 개인 투자자 사이에서 김태천이 스피커인 것 알잖아. 잘못 걸리면 소문 더럽게 나.”

“짜증 나는 인간.”

문성하는 심통 맞게 테이블에다 펜을 던졌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펜을 지켜보던 저편의 사무실 직원이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갓 대학을 졸업한 20대 중반의 여직원이었다. 벌떡 일어난 그녀가 꾸벅했다. 외근 다녀오겠습니다. 최재율이 손 인사를 했다. 어어, 고생해. 유정 씨. 여직원은 인사도 없이 나갔다.

“왜 삐져 있어?”

닫히는 문을 일별한 문성하가 물었다. 최재율이 제 볼을 긁적였다.

“오전에 나하고 상담했거든. 본인이 이쪽 일에 영 재능이 없는 것 같다고, 퇴사하고 싶다 하더라고.”

“고작 3개월 됐잖아. 뭘 해도 뜻대로 안 되는 게 당연하지.”

“실은 더 근본적인 문제일 거야. 투자업계 일이라는 게 워낙 험하기도 하고…….”

최재율의 눈이 돌아갔다. 천장을 본 그가 덧붙였다.

“우리 회사의 미래 자체가 불투명하기도 하고.”

문성하의 입이 다물렸다. 사무실에 정적이 깔렸다. 열린 창문 틈으로 크지도 작지도 않은 나방 한 마리가 들어왔다. 프로펠러처럼 허공을 빙글빙글 돌다가 곧 툭, 떨어졌다. 옴짝거리는 나방의 한쪽 날개가 찢겨 있었다. 문성하는 시름 하듯 발로 나방을 치웠다. 관자놀이가 무지근했다.

설립한 지 3년 된 청신투자는, 정식 투자회사가 아니다. 투자회사를 빙자한 투기조직에 가깝다.

운영 방식은 간단하다. VC 시절의 인맥을 동원해 투자자를 모집, ‘타깃 기업’에 대한 투자 계획 및 예상 수익률을 브리핑하고 시드 머니를 만든다. 이 자금으로 투자를 집행한 후 갖은 방식으로 기업 가치를 증식, 냄새를 맡은 ‘호구’가 접근하면 지분을 설거지한 뒤 빠져나온다. 투자자에는 일정 수수료를 제한 수익금을 분배하고, 이후 타깃을 바꿔 같은 짓거리를 반복한다.

이건 사기가 아니야. 희망을 사고파는 거지. 최재율은 종종 그런 말을 했다. 문성하는 동의하면서도 소리 내어 수긍하지는 않았다. 맞다. 이건 사기가 아니다. 그들의 투자에는 명확한 근거와 계획이 존재하며, 타깃 회사 CEO와 투자자는 이에 동의했다. 유일하게 손해를 보는 호구 역시 엄밀히 따지면 이 리스크에 동의했다. 위험성이 클수록 수익률이 높아지는 건 투자의 기본이다. 호구는 자신의 선택만은 다를 것이라는 희망에 배팅했다.

그럼에도 마음이 무거운 건 어쩔 수 없다. 문성하는 입사한 지 3개월 만에 퇴사를 고민하는 여직원의 심정을 이해한다. 자신이 그녀였어도 같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이 조직에는 오늘만 있다. 내일, 내달, 내년이 존재하지 않는다. 불나방처럼 지금 이 순간의 이익만 쫓을 뿐이다. 내일 당장 어떤 투자에 실패해 문을 닫는다 해도 놀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애초에 투기의 끝은 파멸이니까.

“저기…….”

불현듯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최재율과 문성하의 얼굴이 동시에 돌아갔다. 소리도 없이 문을 연 청년이 빠끔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생에서 3학년생 무렵으로 보였다. 키는 180센티가 조금 넘는 정도이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어느 아이돌과 닮은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어린 여학생이 좋아할 법한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재율이 턱짓을 했다.

“잘못 온 것 같은데. 입시 학원은 옆 건물이야.”

“아니요. 여기 찾아온 것 맞아요.”

도리질을 친 청년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꼬깃꼬깃 접은 메모지를 펼친 그가 질문했다.

“청신투자 맞죠? 문성하 대표님과 최재율 대표님을 찾고 있는데요.”

“우리 맞는데, 왜. 아버지가 우리한테 사기라도 당했대?”

최재율이 이기죽거렸다. 끔벅거린 청년이 대뜸 몸을 굽혔다.

“안녕하십니까. 안재림입니다. 수원에서 요식업을 하고 있습니다.”

숨도 고르지 않은 그가 몸을 세우며 외쳤다.

“청신투자로부터 투자를 받고 싶습니다.”

찬물이라도 끼얹은 양 실내가 고적해졌다. 최재율의 이마가 제대로 찌푸려 들었다. 허, 소리 낸 그가 담배꽁초를 빈 종이컵에 처박았다. 문성하는 묵묵하게 청년을 올려다봤다. 또렷하게 드러난 눈망울이 초봄의 개울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문성하는 직감했다. 저 애는 지금 진심이다.

“일단 들어와요.”

문성하가 손짓했다. 청년이 반색하며 발을 들였다. 최재율이 질색하며 문성하의 어깨를 잡았다.

“미쳤어? 우리가 무슨 구멍가게야?”

스스로 찔린 그가 곧 어물쩍거렸다.

“아니, 어느 정도 맞긴 하지만……. 어쨌거나 우린 분식집 같은 데에 투자 안 해. 뭣보다 저런 어린애에게 뭐 떼먹을 게 있다고….”

“앉아요.”

무시한 문성하가 빈 의자를 내줬다. 고분고분 몸을 앉힌 청년이 제 명함을 두 사람에게 차례차례 건넸다. 받아 든 문성하가 표면을 읽었다. ‘스푼G 대표 안재림’이라고 적혀 있었다.

“현재 ‘스푼G’라는 식당에서 떡볶이 위주의 분식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8평짜리 매장에 불과하지만, SNS 맛집으로 입소문을 타며 매일 300만 원 이상의 매출을 내는 중입니다. 월 순수입은 지난달 기준 2900만 원이었습니다. 아, 이것 확인 부탁드립니다.”

안재림이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놓았다. 잠시 생긴 공백에 두 사람이 질려 할까 두려웠는지, 원하는 페이지를 찾기 위해 손가락을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재율이 그저 귀찮다는 양 담뱃갑 안의 새 담배를 만지작거렸다.

여전히 페이지 찾기에 여념 없는 안재림을 찬찬히 살폈다. 딱 보니 투자 유치하는 법도 모르고, 기본적인 요령도 없다. 어쩌면 청신투자가 투자 유치에 도전한 첫 회사일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자신이니 사무실이라도 밟게 해 준 거지, 웬만한 투자사에서라면 이름 석 자 말하기도 전에 문전 박대당할 거다.

“영업한 지 갓 반년이 됐는데, ‘스푼G’ 태그가 붙은 인스타그램 게시 글만 1000개를 넘어섰습니다.”

떡볶이 사진으로 가득한 웹 페이지를 내보이는 안재림의 표정은 뿌듯함 그 자체였다. 화면을 본 최재율과 문성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둘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이 철없는 어린애를 울리지 않고 사무실에서 내보낼 수 있을까.

“몇 살이야?”

돌연 최재율이 물었다. 안재림이 또박또박 답했다.

“올해로 스물입니다.”

“대학은 안 다니고?”

“고등학교도 안 나왔습니다.”

“중학교만 나왔어?”

“중학교도 다니다 말았습니다.”

대답에는 거침이 없었다. 인상 쓴 최재율이 손을 올렸다. 노란빛이 도는 머리통을 탁, 치고는 훈수를 뒀다.

“도대체 학교 다닐 때 얼마나 놀고 다녔으면 중학교도 못 나와? 최소한 중졸은 해야지. 머리는 쓸데없이 노랗게 물들이고 말이야.”

“염색한 것 아닙니다. 원래 이 색입니다.”

안재림이 억울해했다. 이내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학교는 다니고 싶은데 못 다녔습니다.”

그의 입이 잠시 깨물린 끝에 열렸다.

“집에서 가출을 했습니다. 사정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말에서 묘한 여운이 비쳤다. 문성하의 눈초리가 꼿꼿해졌다. 스르르 올라간 눈동자가 안재림을 머금었다. 죄라도 지은 양 움츠리고 있었다. 긴 숨을 내쉰 문성하가 테이블을 두드렸다. 딱, 소리에 정적이 깨졌다.

“집에 문제가 있었어?”

잔잔한 물음이 건네졌다. 힐긋한 안재림이 어물거렸다.

“조금…….”

“구체적으로 뭐.”

안재림은 답을 하지 않았다. 사무실이 또 잠잠해졌다. 문성하가 경고했다.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우리는 네 투자 유치 제안에 협조할 수 없어. CEO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우리 돈을 어떻게 부어. 경영진 정보를 투명하게 오픈하는 건 기본이야.”

“그게요.”

칼같은 지적에 안재림의 얼굴이 번쩍 들렸다. 문성하는 가늘게 뜬 눈으로 마주 봤다. 숨을 몰아쉰 안재림이 입을 뗐다.

“집에서…… 아버지 폭행이 너무 심해서.”

그의 턱이 미동했다. 간헐적으로 찡긋거리는 한쪽 눈에 고초가 어려 있었다. 문성하의 손톱이 테이블을 찍었다. 손목이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욱신거렸다.

“경찰에 신고도 했는데……. 우리 아버지가 경찰 출신이거든요. 파출소 사람하고 다 아는 사이예요. 두 번을 불렀는데 두 번 다 조사받은 적이 없어요. 경찰들이 아버지하고 대충 대화 나누고 그냥 가더라고요. 어떤 경찰은 아버지한테 제게 망상 장애가 있는 것 같다고, 병원 보내 보라 하고…….”

안재림의 손이 꽉 움츠러들었다. 문성하는 잠자코 그의 팔뚝을 주시했다. 걷어 올린 소매 밑으로 기다란 흉터가 비쳤다. 칼로 벤 것도, 불에 덴 것도 아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문드러지고 벗겨진 끝에 완성된 상흔. 문성하는 그런 흉터를 안다. 지속적인 학대에 의한 상처였다.

“미칠 것 같더라고요. 가만히 있으면 또 맞을 거고, 그렇다고 경찰이나 어른을 부르자니 정신 병원 보내라는 말이나 들을 것 같고, 불안감이 쌓이면서 학교에서는 겉돌기만 하고. 결국 참다 참다…….”

“그만.”

들끓듯 이어지던 말이 멎었다. 심호흡한 문성하가 고개를 바로 했다. 두 사람의 눈길이 반듯하게 엉겼다. 문성하의 입이 열렸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뭡니까? 안 대표님.”

안재림의 목이 눈에 띄게 꿀꺽거렸다. 그의 어조가 사뭇 차분해졌다.

“사업 확장을 하고 싶습니다. 손님은 갈수록 늘어나는데, 한정된 공간에서 장사하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왕 하는 것 서울 강남처럼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서 해 보고 싶은 욕심도 있고요. 다만 그러려면 자본금이 많이 필요해서…….”

“지금 가게가 어디에 있다고?”

“수원역 근처에 있습니다.”

“수원역…….”

문성하가 제 핸드폰을 가져왔다. 스케줄러 어플을 켜 일정을 확인하는 내내 미심쩍은 최재율의 시선이 볼을 찔러 왔다. 문성하는 무시하며 안재림을 응시했다.

“이번 주 목요일 오후 4시. 괜찮아?”

“저는 언제든 좋습니다.”

“시간 맞춰 매장 한 번 방문할게. 실사 진행하고 자세한 얘기 나눠 보자고.”

“감사합니다.”

안재림의 표정이 밝아졌다. 최재율의 면상에 경악이 스쳤다. 바로 한마디 들을 것을 예감한 문성하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안재림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는, 입구 쪽으로 밀며 말했다.

“그럼 목요일에 봅시다.”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절도 있게 몸을 숙이고 난 안재림이 사무실을 나섰다. 탁.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한기가 번졌다. 멀거니 앉아 있던 최재율이 벌떡 일어났다. 쩌렁쩌렁한 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너 미쳤어? 무슨 떡볶이집 투자야. 정신 나갔어?”

“나쁘지 않잖아. SNS에서 입소문 타며 대박 난 자수성가 분식집, 창업자는 가정 학대에 시달리던 가출 청소년. 스토리텔링 잘 짜면 꽤 주목받을 거야. 운 좋으면 언론에서 알아서 기사도 내 줄 거고. 애 비주얼 출중하니 스타 만들기 딱이네. VC 때 비슷한 것 몇 번 해 봤잖아. 안 그래?”

“아무리 그래도……. 야, 너하고 내가 배운 VC 짬밥이 있는데 격 떨어지게 떡볶이집 같은걸.”

“그동안 우리가 한 짓거리는 격이 높았고?”

문성하가 심드렁히 꼬집었다. 최재율이 움찔했다. 그의 어깨를 두드린 문성하가 말했다.

“형이 정 께름칙하면 이번에 PTP라운지로 먹은 내 몫 수익금 위주로 해서 회사에 최대한 손해 안 가게 진행할게. 나도 한 번쯤은 순수한 의미의 엔젤 투자가 하고 싶어. 그래서 그래.”

“그래, 좋을 대로 해라. 네 고집을 내가 어떻게 꺾냐.”

못 당할 것을 직감한 최재율이 한탄했다. 곧 손가락질을 하며 으름장을 놓았다.

“어느 정도는 장단 맞춰 주겠지만, 이왕 결정한 거 제대로 책임져. 그놈의 떡볶이집 때문에 회삿돈 일 푼이라도 날리면 내가 야밤에 너 기절시킨 다음 어디에 팔아넘기는 수가 있어.”

“어디에 팔아넘길 건데.”

문성하가 무미건조하게 받아쳤다. 최재율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어디 돈 많은 변태 새끼 찾아서 넘길 거야. 문성하 정도면 못해도 10억은 받겠지.”

“내가 10억밖에 안 해?”

“넌 낯짝만 예쁘잖아. 성질머리 좀 죽였으면 20억이었는데.”

“지랄하고 있네.”

문성하가 일갈했다. 키들거린 최재율이 도로 의자에 몸을 앉혔다. 안재림이 닫고 나간 문과 문성하를 번갈아 보던 그의 눈이 골똘해졌다. 아리송한 언어가 찾아들었다.

“그나저나 희한하다.”

“뭐가.”

“저 새끼 머리 색 말이야. 염색도 안 했는데 저렇게 샛노랄 수가 있나? 무슨 서양 놈처럼.”

“충분히 가능하지. 나도 원체 하도 밝아서 염색하고 다니잖아.”

문성하가 미처 염색물이 들지 않은 제 머리카락을 세워 보였다. 안재림처럼 노란빛이 도는 밝은 갈색이었다. 끄덕인 최재율이 손가락을 꺼떡거렸다. 그의 미간이 살포시 구겨졌다.

“그러니까 희한하단 얘기야.”

“뭐가 그렇게 희한한데?”

“난 한국인이 염색도 안 하고 저런 머리 색인 걸 태어나 두 번째로 보거든.”

그의 손끝이 문성하를 향했다.

“네가 첫 번째고.”

문성하의 눈이 찌뿌둥해졌다. 입 안에서 굴러가던 혀가 서서히 자리를 잡았다. 지극히 단조로운 대꾸가 흘러나왔다.

“뭐. 세상은 넓으니까.”

***

TV에서는 저녁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주황색 재킷을 입은 여자 아나운서가 입을 뗐다.

[다음 소식입니다. 한국은행이 기준 금리 인상을 발표했습니다. 기준 금리가 변동한 건 1년 6개월 만입니다…….]

아, 주가 또 떨어지겠네. 문성하의 등 뒤에서 물리 치료사가 탄식했다. 한참이나 끌끌거리다, 문성하의 허벅지를 두드리며 질문했다.

“자. 좀 괜찮아요?”

“아직은요.”

“속도 좀 올려 볼까요?”

“네.”

물리 치료사가 자전거 패널에 손을 가져갔다. 삑, 삑, 소리와 함께 숫자가 바뀌었다. 페달의 속도가 빨라졌다. 덩달아 문성하의 발이 급해졌다. 휙휙 돌아가는 페달에 맞춰 다리를 움직였다. 점점 땀이 났다.

[이어서 산업계 소식입니다. 글로벌 투자 기업 NGX의 주혜성 대표가 이번 주말 방한합니다.]

군더더기 없는 목소리에 문성하의 어깨가 곤두섰다. 흔들리던 눈이 이동했다. 맞은편의 벽에 달린 TV 모니터가 익숙한 인영을 내보내고 있었다. 미국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는 고급스럽고 훤칠한 인상의 청년. 아나운서로부터 멘트 권한을 넘겨받은 남자 기자가 착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주 대표가 공식 방한하는 건 NGX 설립 이래 처음입니다. 그간 두 차례의 비공식 방한이 있었지만, NGX 국내 지사인 NGX코리아 내부 회의를 위한 것으로 개방된 일정이 아니었습니다. 이번 방한은 국내 인기 게임 ‘팡팡’의 개발사 엠덱트에 대한 투자 계약을 마무리 짓는 동시에 다음 주 예정된 대통령 주재 IT업계 간담회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라고 NGX코리아 고위 관계자는 전했습니다. 한편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 활성화를 위한 ‘K-엔젤 벤처 프로젝트’ 조성을 선포하는 일정도…….]

“아.”

문성하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허우적거리던 허벅지가 벌벌대며 발작하기 시작했다. 깜짝한 물리 치료사가 서둘러 전원을 껐다. 페달이 멈췄다.

“갑자기 무리했나 봅니다.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문성하의 머리가 기울었다. 전원이 꺼진 패널에 이마를 박고는, 사경을 헤매는 사람처럼 할딱였다. 그사이 화면에서 주혜성의 모습은 사라졌다. NGX코리아 앞에서 마이크를 든 남자 기자가 먼 메아리 같은 말들을 쏟아 냈다. 중간중간 ‘주혜성’이라는 이름이 들렸지만, 그것이 진짜 ‘그 이름’인지를 듣고도 확신할 수 없었다.

서슴거리던 손이 얼굴을 덮었다. 가죽을 꽉꽉 짓눌러 대는 새 뒤편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문성하는 색색거리며 오감을 옥죈 악몽을 지우는 데 몰두했다. 볼에 시뻘건 자국이 남을 정도로 긁어 댄 끝에 얼굴을 들었을 때, 남자 기자는 사라져 있었다. 주황색 재킷을 입은 여자 아나운서는 이제 음료 회사의 법정 관리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주혜성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힘들죠?”

인자한 목소리가 들렸다. 문성하의 고개가 돌아갔다. 다가온 중년 남자가 웃어 보였다. 이곳 센터장이었다.

“네……. 좀 그러네요.”

페달에서 발을 뺀 문성하가 답했다. 센터장이 등을 다독여 왔다.

“그래도 전과 비교하면 많이 좋아진 겁니다. 얼마 전에는 등산도 하셨다고요.”

“그건 등산이라고 하기가 좀……. 사실상 동네 뒷산이라.”

문성하가 난처해했다. 센터장이 빙긋거렸다.

“조금이라도 발전하는 게 좋은 겁니다. 머지않아 제대로 된 산을 타는 날도 오고, 뛰는 날도 올 겁니다.”

“죄송합니다. 항상 신경 써 주시는데, 제가 회복이 더뎌서.”

“전혀요. 저야말로 항상 도움받고 있습니다.”

손사래를 친 센터장이 뒷짐을 졌다. 문성하는 공연히 제 허벅지를 주물렀다. 5년 전부터 이곳에 재활 관련 데이터를 제공하는 대가로 무상 치료를 받고 있다. 비용이 적지 않다는 걸 알기에 가능한 한 빠르게 회복하는 걸 보이려 노력해 왔다. 그러나 언제나 결과는 생각처럼 나오지 않는다.

가장 골치 아픈 것이 예고 없이 찾아오는 근육 마비다. 멀쩡히 운동하는 것 같다가도 특정한 뭔가를 보거나 떠올리면 고장이 난다. 그 상태로 짧게는 몇 분, 길게는 두어 시간씩 얼어 버리는 일이 다반사다.

“사고 트라우마 때문입니다. 마음 편히 가지세요. 지나간 일은 가능한 한 잊으시고요.”

센터장이 조언했다. 문성하는 조용히 동의했다. 자신도 안다. 회복을 방해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마음 깊이 인지하고 있다. 문제는 ‘그것’을 완전히 지워 버리는 게 아직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문성하의 다리는 현재에 있지만 발목은 아직도 그날, 그 시에 사로잡혀 있다.

핸드폰 진동음이 들렸다. 주머니에 들어간 손이 안을 뒤적였다. 빠져나온 액정에는 최재율의 이름이 떠 있었다. ‘통화’를 누르고 귀에 댄 문성하가 입을 열었다.

“어, 형.”

[너 어디야?]

“재활 치료 센터. 퇴근하면 항상 들르는 것 알잖아. 왜?”

[야. 진짜로 대박 났다. 우리.]

최재율은 잔뜩 들떠 있었다. 찡그린 문성하가 물었다.

“뭐가 대박이 나.”

[우리 올 초에 투자한 에센더 있잖아. 밑져야 본전인 셈 치자면서 너 1000, 나 1000 해서 총 2000으로 소액 투자한 곳.]

“어.”

[그 지분 팔렸다. 방금 나한테 연락 왔어.]

“잘됐네.”

[더 대박인 건 따로 있어.]

“뭔데.”

[거기서 30배 불렀어. 우리 각각 2억 9000씩 먹는 거야. 씨발.]

“어떤 미친놈이 실체도 없는 에듀테크 회사 지분을 30배 주고 사?”

문성하가 저도 모르게 버럭 했다. 잠시 떨떠름하던 최재율이 대꾸했다.

[살 만하니까 샀겠지. 투자하다 보면 종종 로또 터지잖아. 직접 겪은 건 처음이지만.]

[뭐 하는 사람이야?]

[이름은 처음 듣고…… 안나 킴? 외국에서 공부한 여자 같던데. 좀 이따 잠깐 보기로 했어. 너도 올래?]

“장소 찍어. 바로 갈게.”

문성하가 분연히 통화를 끊었다. 깜박이는 액정을 보고 있자니, 절로 숨이 가빠 왔다. 바닥을 디딘 발이 중심을 못 잡고 휘청거렸다. 괜찮아요? 센터장이 서둘러 잡아 줬다. 가까스로 선 문성하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예감이 좋지 않다.

***

“두 분 다 뵙게 될 줄은 몰랐는데요.”

여자는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다. 연기를 내뿜는 그녀의 곁에서 정장 차림의 남자가 재떨이를 밀어 줬다. 비서로 보였다. 기시감이 있는 낯이지만, 정확히 어디서 봤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 친구가 워낙 의심이 많아서요. 30배 부른 투자자가 있다니까 직접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며 굳이 오겠다 하더라고요.”

최재율이 문성하와 어깨동무를 했다. 주억거린 여자가 손가락에 끼운 담배를 흔들거렸다. 등 뒤로 고급스러운 윤기를 머금은 대리석 벽이 보였다. 바닥도 색만 다른 대리석이었다. 천장에는 화려한 샹들리에 등이 달려 있다. 문성하로서는 이름만 들어 본 청담동의 회원제 고급 라운지였다. 여자가 지정한 장소였다.

담배를 물었다 놓은 여자가 입을 열었다. 연기가 이쪽까지 오지 않게끔 손을 내젓는 한편, 다리는 딱 건방지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꼬았다. 하나하나 계산된 행동. 여자는 타인에게 보이는 일에 익숙해 보였다.

“조건은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두 분이 보유한 에센더 지분 10%를 제가 총 6억 원에 매입할 겁니다. 그게 전부예요. 오늘은 급히 만난 것이니 안면 정도만 트고, 다음 미팅 때 각자 변호사 대동해 명의 개서 진행하시죠.”

“에센더의 뭘 보고 지분 매입을 한다는 겁니까. 심지어 30배나 주고.”

문성하의 입에서 딱딱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답을 생략한 여자가 혼연히 담배의 재를 떨었다. 최재율이 급하게 억지웃음을 터뜨렸다.

“좋은 회사니까 매입하는 거지. 에센더 훌륭한 곳이잖아. 어? 국내 에듀 O2O 플랫폼 중에서 거기만큼 성장 가능성 높은 곳이 어디에 있다고 그래?”

“에센더는 설립한 지 이제 2년 된 회사입니다. 첫해 매출은 800만 원이었고, 지난해 매출은 3100만 원이었죠. 대표는 국내 명문 대학 국어 교육학과를 나왔다며 홍보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 대학 분교 출신이며, 교육 사업은 물론 사업 경험 자체가 전무합니다. 직원은 대표 포함해 총 3명인데, 2명은 대표의 친척입니다. 사실상 가족 회사죠. 가족 회사 리스크는 잘 아실 겁니다. 본인들끼리 싸고돌며 운영하다 파산하면 끝입니다. 책임 소재지가 불분명하죠. 이성적인 운영이 불가능한 구조라는 얘기입니다.”

문성하가 눈을 치떴다. 최재율이 끙, 소리를 내며 뒤통수를 잡았다. 천연덕스럽게 손톱을 매만진 여자가 문성하를 쳐다봤다. 문성하는 계속해서 말했다.

“가장 중요한 에센더의 플랫폼. 한 마디로 엉망입니다. UI가 국내 1위 에듀 O2O 플랫폼을 그대로 모방한 수준인데, 그보다 빠르거나 편의성이 높지 않습니다. 회원 수는 대외적으로 3만 5000명이나, 실제 이용자는 1000명도 안 되는 걸 제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그런 곳 지분을 뭐 하러 사셨죠?”

여자가 개웃거렸다. 문성하가 싸늘하게 답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언젠가 나올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한 마디로 우린 그냥 낚시를 한 겁니다.”

룸이 고요해졌다. 여자가 잠연히 몽글몽글한 연기를 뱉었다. 문성하는 눈싸움을 하듯 그녀를 주시했다. 정적이 짙어졌다. 여자의 곁에 있던 비서가 귓속말을 했다. 슬슬 일어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끄덕인 여자가 입을 열었다.

“그럼 됐네요. 문성하 대표님은 에센더가 형편없는 곳이라는 걸 알면서도 매입할 누군가를 기다리며 지분을 샀고, 결국 그 ‘누군가’가 나타난 거잖아요. 얘기 끝났어요. 빠른 시일 안에 명의 개서 일자 잡고, 진행합시다.”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또각거리는 구두 굽 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최재율이 들릴 듯 말듯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문성하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말없이 봤다.

여자의 손이 금색 손잡이에 걸렸다. 찰칵, 손잡이가 돌아갔다. 막 젖혀지기 직전, 문성하가 입을 뗐다.

“본명이 김희정 씨죠.”

여자의 움직임이 멈췄다. 곁에 선 비서가 흠칫했다. 흘러간 그녀의 눈길이 문성하에 걸렸다. 침착하기 그지없는 반문이 다가왔다.

“그런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가 이상해 오는 길에 검색을 했습니다. ‘안나 킴’ 자체는 흔한 이름이라 어려움이 있었지만, 최재율 대표로부터 받은 그쪽 사무실 번호로 포털 사이트 검색을 해 보니 부티끄3) 웹 페이지 하나가 뜨더군요. 웹 페이지 상 대표가 김희정 씨였습니다.”

문성하가 고개를 가눴다. 여자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문성하를 응시했다. 문성하가 말을 이었다.

“해당 부티끄 사무실에 전화해 김희정 대표를 찾았습니다. 받은 직원은 ‘본사’에서 귀국한 후 아직 이쪽 사무실에 오지 않아 일정을 잘 모른다고만 하더군요. 그래서 본사가 어디냐 물었더니…….”

문성하의 목울대에 힘이 실렸다. 여자의 머리통이 끼웃거렸다. 타들어 가는 담배 끝에서 재가 떨어졌다.

“미국 뉴욕에 있는 NGX를 얘기했습니다.”

문성하가 일어섰다. 저벅저벅 걸어가, 그녀의 앞에 섰다. 여자가 사실상 꽁초만 남은 담배를 물었다. 빨간 입술 사이에서 연기가 흩어졌다. 문성하의 어조가 엄해졌다.

“NGX 사이트의 임원진 목록에는 안나 킴이라는 이름이 없습니다. 다만 해외 웹 사이트에 안나 킴과 NGX를 나란히 검색하면 당신이 실질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유추할 수 있죠. 정식 임원도 아니면서, 백악관이나 의회가 끼어 있는 사안에 종종 NGX의 대변인으로 등장하더군요.”

문성하의 눈이 부릅떠졌다.

“당신은 NGX와 백악관을 연결하는 전담 로비스트입니다. 소속은 분명히…….”

호흡을 삭이고 난 입이 움직였다.

“NGX CEO인 주혜성 직속이고요.”

여자의 입이 미미하게 말아 물렸다. 찰나의 동요가 스치긴 했지만, 그녀의 면상은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다 태운 여자의 꽁초가 옆으로 넘어갔다. 받아 든 비서가 테이블로 돌아가 대신 재떨이에 꽂았다. 손을 턴 여자가 고개를 바로 했다. 눈빛이 지극히 심상했다.

“맞아요. 잘 아시네요.”

“대체 나에게 왜 이러는 겁니까.”

“그걸 나에게 물으면 안 돼요.”

여자가 뒤로 동그랗게 말린 머리카락을 추슬렀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마치 입력된 정보에 응답하는 기계처럼, 단조롭게 덧붙이기까지 했다.

“난 지시받은 것에 따를 뿐이에요.”

입을 다문 여자가 등을 보였다. 끼익, 문이 열렸다. 성큼 발을 내딛는 그녀를 따라 비서가 나섰다. 둔탁한 소음과 함께 문이 닫혔다. 제법 두께가 되는 문 너머로 또각거리는 구두 굽 소리가 작아져 갔다.

우뚝 서 있던 문성하의 다리가 뒤늦게 풀렸다. 맥 빠진 손이 허벅지를 짚었다. 어떻게든 지탱하려 했지만,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문성하! 뒤에서 최재율의 외침이 들렸다. 주저앉은 문성하가 제 다리를 더듬었다. 연료가 다해 진작 멈춰 버린 신체를, 죽은 아이 쓰다듬듯 만지고 또 만졌다. 입 안에서 차디찬 숨이 맴을 돌았다. 절망적인 혼잣말이 곱씹혔다.

“이 개새끼…….”

날 선 손톱이 허벅지를 찍었다. 감각이 사라진 다리에선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2) 명의 개서: 주주 변경 장부를 작성하는 일

3) 부티끄: 프라이빗 투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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