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왜 자꾸 뛰어다녀?”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아버지의 집에 간 첫날 밤, 문성하는 거실 식탁에 앉아 있었다. 마땅히 있을 곳이 없었다. 60평에 가까운 아버지의 집에는 총 5개의 방이 있었다. 하나는 아버지의 방, 하나는 이복동생 주혜성의 방, 하나는 일하는 아주머니의 방, 나머지 둘은 드레스룸과 창고였다.
아버지는 그중 더 작은 창고가 문성하의 방이라 했다. 다만 안의 물건이 워낙 많아 다 정리되려면 며칠 기다려야 한다 했다. 문성하는 딱히 개의치 않는다고 답했다. 아버지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처음으로 그 집에서 밤을 맞은 날, 자정이 가까워지자 아버지는 술 약속이 생겼다며 밖으로 나섰다. 일하는 아주머니는 진작 나간 터라 집에는 문성하와 주혜성뿐이었다.
방에만 있던 주혜성은 아버지가 나가는 소리를 듣고서야 슬금슬금 나왔다. 거실 한복판에 서서 한동안 주변을 두리번거렸는데, 식탁의 문성하를 못 본 것인지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것인지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문성하는 턱을 괸 채 기웃거리는 주혜성을 관찰했다. 높다란 콧대며 이들이들한 눈매를 보니 나중에 여학생들로부터 깨나 인기를 얻겠다 싶었다. 딱 외관만 따졌을 때 그랬다. 종합적으로 보면 애매했다. 주혜성은 정말로, 아주 많이.
일반적이지 않았다.
타닥, 타다닥 소리가 귀를 때렸다. 주혜성이 뛰어다니며 낸 소음이었다. 베란다 입구에서 문성하가 있는 식탁 앞까지, 다시 식탁 앞에서 베란다 입구까지. 주혜성은 무슨 달리기 선수처럼 반복해 내달렸다.
제법 시끄러워 밑층에서 한 소리 할 법도 한데 인터폰이며 현관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어쩌면 밑층도 질릴 만큼 질려 포기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탁 앞과 베란다 입구에다 정확한 안착 지점을 찍어 가며 달리는 게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왜 자꾸 뛰어다니냐고, 응? 혜성아.”
탁, 식탁을 두드리며 부드럽게 혼냈다. 주혜성은 들은 척 만 척 뛰기만 했다. 문성하의 입이 말아 물렸다. 식탁에 둔 핸드폰이 지잉, 회전했다. 갓 들어온 문자 메시지가 액정에 떴다. 문성하는 핸드폰을 가져와 화면을 확인했다. 학교 친구의 문자였다.
「야. 아버지 집 어때?」
문성하는 심드렁하게 답장을 적었다.
「별로.」
망설이던 손가락이 다음 문장을 덧붙였다.
「성인될 때까지만 버티고 잠수 탈까 생각 중.」
“거미, 거미!”
전송을 마치고 막 핸드폰을 내려 둔 문성하의 귀에 다급한 아이 외침이 스쳤다. 고개가 올라갔다. 허공에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치는 주혜성이 보였다. 문성하는 물끄러미 천장을 살폈다. 샹들리에 천장 등에 대롱대롱 매달린 먼지 뭉치가 보였다.
식탁에서 일어났다. 저벅저벅 걸어 등 밑에 섰다. 달려오던 주혜성이 문성하를 툭, 치고 마저 뛰었다. 문성하의 팔이 들렸다. 천장이 높아 손이 닿지 않았다. 포기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벽에 기대어 있는 골프채가 보였다.
발을 옮겨 벽 쪽으로 갔다. 골프채를 집어 든 뒤 천장 등 밑으로 돌아왔다. 곤두선 골프채의 헤드를 휘저으며 먼지 뭉치를 건드렸다. 두어 번 스친 끝에 뭉치가 툭, 떨어졌다. 주혜성의 발이 멎었다. 거실이 조용해졌다.
“거미 아니야.”
굴러다니는 먼지 뭉치를 밟으며 타일렀다. 경직돼 있던 주혜성이 대뜸 세찬 도리질을 쳤다. 또박또박한 언어가 나왔다.
“거미 있었어.”
“아니라니까?”
“거미야!”
주혜성이 성난 듯 발을 굴렀다. 골프채를 내려놓은 문성하가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씩씩거린 주혜성이 갑자기 문성하의 앞으로 다가왔다. 다짜고짜 손목을 채더니, 강제로 이끌기 시작했다. 문성하는 얼이 빠져 따라갔다.
주혜성이 향한 곳은 문성하의 것이 될 예정이라고 한 창고 방이었다. 문성하를 방 한가운데 내몬 주혜성이 구석의 책장으로 갔다. 양팔을 펼쳐 책장을 안고는 끙끙거리며 치웠다. 끼익, 하며 책장이 밀려 났다. 휑해진 곳에서 노트북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소 오래된 기종이었다.
언제 폐기돼도 이상하지 않은 노트북 앞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주혜성이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버벅이며 시동을 건 노트북이 한참 후에야 바탕 화면을 띄웠다. 주혜성은 익숙하게 마우스를 움직여 가며 아이콘 하나를 눌렀다. 돌연 화면이 새까매지는가 싶더니, ‘START’ 글자가 떴다. 주혜성이 엔터를 쳤다. 뜬금없이 게임이 시작됐다.
단순하지만 어지러운 게임이었다. 천장에서 불규칙하게 내려오는 거미를 주인공이 잽싸게 점프를 하며 없앤다. 레벨이 올라갈수록 난이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1초 만에 주혜성이 키보드 버튼을 스무 개 가까이 치는 것도 봤다.
언젠가부터 문성하는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다. 공격하는 거미가 너무도 빨랐고, 게임 속 주인공은 더 빨랐다. 눈동자가 핑글핑글 도는 상황에서도 주혜성은 태연하게 컨트롤을 이어 갔다. 아이는 십 분 넘게 게임을 하며 단 한 번도 거미에게 지지 않았다.
지켜만 보던 눈이 뒤늦게 가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아예 처음 보는 게임이 아니다. 언젠가 교내 전산실에서 몇몇 학생이 하는 걸 봤다. 미국의 인디 게임 회사가 만든 웹 게임인데, 온라인 커뮤니티 상에서 경쟁이 붙으며 소소한 인기를 얻고 있다 들었다.
멍하니 화면만 보는 새 죽은 거미 수가 5000개를 넘어섰다. 이어 5200개, 5400개를 돌파하더니 5658개에서 끝이 났다. ‘END’ 글자가 떴다 사라지고, 이 게임 고득점자 명단이 줄줄이 떴다. 문성하의 입이 떡 벌어졌다. 1위를 비롯해 2위, 3위, 7위, 8위, 10위가 전부 ‘H S JOO’였다.
“안 해, 이제.”
주혜성이 불퉁하게 게임을 껐다. 이내 돌아온 바탕 화면을 마우스 커서로 헤적거리다, 또 다른 아이콘을 클릭했다. 이번에 나타난 건 기상천외한 조각을 맞춰야 하는 변형 테트리스 게임이었다. 역시 낯이 익었다. 어느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머리 좋은 사람만 도전할 것’이라는 제목으로 추천 글이 올라온 걸 본 적이 있다. 문성하가 물었다.
“이것도 혜성이가 1등이야?”
“응. 1등하고 3등, 4등, 6등 했어.”
“혜성이는 다양한 게임을 좋아하나 보다.”
“용량이 크면 여기서 안 돌아가. 그래서 낮은 사양의 웹 게임을 해야 해. 그런데 하루 이틀이면 다 기록 세우니까, 금방금방 다른 걸 하는 거야.”
“이런 게임에 혜성이는 얼마나 이름을 올렸어?”
“83개.”
주혜성이 세지도 않고 답했다. 문성하가 헛웃음을 쳤다. 다시금 게임에 몰두한 옆통수를 살피다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그냥 샤양 좋은 걸 아버지께 사 달라고 하면 안 돼? 이 노트북은 너무 옛날 거잖아.”
“좋은 컴퓨터 있었는데, 지난달에 아빠가 부쉈어. 그래서 이것뿐이야, 이제.”
주혜성이 뇌까렸다. 문성하가 갸웃했다.
“왜 부쉈어?”
“만날 게임만 하고 학교 안 간다고.”
“이 노트북은 어디서 났고.”
“버려진 거 주워서 고쳤어.”
“누가 고쳤는데.”
“내가.”
노트북에서 둥, 소리가 났다. 게임이 끝났음을 알리는 화면이 사라지고, 역시 고득점자 리스트가 떴다. 주혜성의 말대로 1위부터 10위 중 5개가 ‘H S JOO’였다. 주혜성이 시큰둥하게 노트북을 덮었다.
“재미없어.”
주혜성의 눈이 우울하게 굴러갔다. 문성하는 침울해진 아이를 조용히 관찰했다. 바닥에 시선을 꽂은 주혜성이 옴씰거리다 양반다리를 풀었다. 슬금슬금 다가온 발이 문성하의 허벅지를 건드렸다. 문성하의 고개가 반듯해졌다.
“왜.”
“아빠한테 얘기할 거야?”
“뭐를.”
“내가 몰래 노트북 갖고 있다고.”
“형 말 잘 들으면 안 할게.”
“난 말 듣기 싫은데.”
“그럼 어쩔 수 없지.”
문성하가 느물거렸다.
“아쉽네. 형은 혜성이가 게임을 너무 잘해서 감탄했는데. 그래서 앞으로 종종 구경해야겠다 생각했는데.”
문성하가 보란 듯 몸을 틀었다. 돌연 등 뒤에서 소스라치는 기척이 느껴졌다. 문성하의 팔이 덥석 잡혔다. 문성하가 못 이긴 척 곁눈질을 했다. 동그래진 주혜성의 눈망울이 반짝이고 있었다.
“내가 게임하는 것 봐 줄 거야?”
“혜성이 하는 거 봐서.”
“참고로 우리 아빠는 게임하면 싫어해.”
“그게 형하고 무슨 상관이야? 아버지는 아버지고, 형은 형이고, 혜성이는 혜성이지. 남한테 피해만 안 주면 뭘 하고 살든…….”
차근차근 설명하던 문성하가 멈칫했다. 자신의 팔에 걸린 아이의 손목에서 새빨간 자국이 비쳤다. 뭔가에 덴 듯한 흔적이었다. 작은 손을 빠르게 잡아 올린 문성하가 따졌다.
“이건 뭐야?”
“불에 데었어.”
“어쩌다.”
“아까 가스레인지 가지고 장난치다가?”
주혜성이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는 투로 대꾸했다. 문성하가 허, 소리를 냈다.
“아버지가 이거 봤어?”
“응.”
“뭐래.”
“아무 말 안 했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너 일단 이리 와 봐.”
벌떡 몸을 일으킨 문성하가 주혜성을 잡아끌었다. 주혜성이 영문도 모르고 질질 딸려 나왔다. 중간중간 칭얼대는 소리를 내긴 했지만, 딱히 반항하진 않았다.
주방으로 간 문성하가 수돗물을 틀었다. 가장 낮은 온도에 맞춰 놓고, 아이의 팔을 수도꼭지 밑에 갖다 댔다. 찬물이 닿자 주혜성이 뒤늦게 발작했다. 뭔가가 단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지 바닥을 부술 기세로 밟아 대며 소리를 질렀다.
“안 해!”
“해야 해. 이렇게 해서 차갑게 한 다음에 약 바르자.”
“안 발라!”
“왜 안 하는데. 어?”
문성하가 답답하다는 듯 허리를 짚었다. 재빨리 양손을 뒤로 숨긴 주혜성이 아물거렸다.
“안 아파.”
“아프잖아, 멍청아.”
“안 아프다고!”
“미치겠네.”
문성하가 목을 젖혔다. 골치가 아프다는 양 천장을 보다가, 휘 눈길을 돌렸다. 가스레인지 위에 놓인 빈 프라이팬이 눈에 띄었다. 골똘히 생각한 끝에 손을 내밀었다. 가스레인지 불을 올리고, 프라이팬을 달구기 시작했다. 주혜성은 불꽃에 홀린 것처럼 가스레인지를 봤다.
적잖은 시간이 흐르고, 프라이팬에서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큰 숨을 들이켠 문성하가 팔을 뻗었다. 주혜성이 다친 곳과 같은 왼쪽 손목이 프라이팬 표면에 닿았다. 치익, 소리가 부엌을 울렸다. 아. 문성하가 신음했다. 주혜성이 깜짝 했다.
“미쳤어?”
가쁜 손길이 문성하의 팔을 챘다. 확 자신의 가슴에 당겨 안은 주혜성이 벌벌거렸다. 문성하가 태연하게 주혜성을 힐끗했다. 마주친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일렁였다. 핀잔하는 한 마디가 나왔다.
“봐. 너도 남이 다치는 것 싫지?”
주혜성은 한층 어깨를 오들거릴 뿐이었다. 단단히 겁에 질려 있었다. 문성하가 태식했다.
“원래 그런 거야. 네가 다치면, 다른 사람은 걱정을 해. 그러니 형 말 듣고…….”
듣는 건지 마는 건지 눈만 깜박이던 주혜성이 돌연 얼굴을 숙였다. 옴짝거리는 입이 홧홧한 손목을 핥아 왔다. 순식간에 표피가 축축해지고, 미세한 간지러움이 혈류를 울렸다. 문성하의 턱이 흠칫거렸다. 반복해 같은 행위를 한 주혜성이 웅얼거렸다.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은 문성하가 쏘아붙였다. 주혜성이 수그러들었다.
“나 때문에 다쳐서.”
“잘못한 것 알아?”
“응.”
“그래, 이제 됐어. 놔 봐. 형이 혜성이 봐 줄게.”
표정을 푼 문성하가 주혜성의 머리를 다독였다. 슬쩍 밀어 보는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찰싹 문성하의 손목에 입을 붙이고는 집요하게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젖 빠는 아이처럼 집착하는 모양새에 문성하만 난감해졌다. 몇 번이고 입 안에서 혀를 굴린 끝에, 다정하게 말했다.
“혜성아. 형은 이제 괜찮다고 했잖아.”
“안 괜찮은 것 같아.”
주혜성이 문성하의 손을 문 채 고개를 저었다. 마른침을 삼킨 문성하가 물었다.
“형이 그렇게 걱정돼?”
“응.”
“왜? 혜성이는 오늘 형을 처음 봤잖아. 형을 잘 모르잖아.”
“잘 모르지만, 형이 다쳐서 잘못되면…….”
주혜성의 눈꺼풀이 들렸다. 물기라곤 하나도 없는 눈시울이 젖은 것처럼 촉촉했다.
“나 게임하는 거 봐 줄 사람이 없다는 건 알아.”
주혜성이 흐끅, 딸꾹질을 했다. 같은 소리가 뻐꾸기처럼 연달아 내뱉어졌다. 우는 게 처음이라, 눈물 내는 법도 모르는 아이처럼 흐느끼고 있었다.
문성하의 낯이 공허해졌다. 이 외로움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이리 와 봐.”
멀거니 보던 문성하가 손짓을 했다. 고분고분 다가온 주혜성이 문성하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색색거리는 숨결에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형이 앞으로 만날 혜성이 게임하는 것 봐 줄게.”
“진짜?”
“응. 대신 혜성이는 무슨 일을 겪었고, 겪고 있는지 형한테 수시로 알려 줘야 해. 아까처럼 손목을 다치면 다쳤다고 형한테 얘기를 해 줘야 해. 그래야 혜성이가 언제, 어디서 게임하는지 알고 형이 보러 와 줄 것 아니야. 그렇지?”
“응…….”
사뭇 잠잠해진 주혜성이 끄덕였다. 매우 정직한 고갯짓이었다. 문성하의 입에서 픽, 웃음이 샜다. 영락없는 12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형.”
“응.”
주혜성이 묻는 것과 동시에 식탁 쪽에서 지잉, 소리가 났다. 문성하의 눈이 굴러갔다. 환해진 핸드폰 액정에서 학교 친구로부터 들어온 새 메시지가 비쳤다. 문성하는 먼 치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글자를 읽었다.
「그럼 너 스무 살 되자마자 그 집에서 탈출하는 것임?」
“나 언제까지 봐 줄 거야?”
바람처럼 다가온 언어가 귓불을 간질거렸다. 문성하의 눈길이 턱밑으로 내려갔다. 품 안에서 얼굴을 든 주혜성이 눈을 맞춰 오고 있었다. 문성하의 입이 더듬거렸다. 건조한 혀가 입 안에서 너울거렸다.
“그건…….”
“형, 잠시만.”
주헤성이 불현듯 몸을 뺐다. 바쁘게 달려 제 방에 들어가서는, 뭔가를 들고나왔다. 가까이 온 그가 손에 쥔 것을 내밀었다. 통장이었다.
“이거 형 병원비 해. 내 전 재산인데, 형 줄게.”
통장이 문성하의 손안에 꼭 들어왔다. 문성하는 그만 실소를 터뜨렸다. 나지막이 이어지는 웃음소리를 주혜성은 갸우뚱거리며 듣기만 했다.
한참이나 웃던 문성하가 그만 무릎을 꿇었다. 들려 있던 통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허전해진 손이 주혜성의 허리를 잡았다. 그대로 그의 배에 이마를 기대고 허덕이며 숨을 골랐다. 대소가 멎어 갔다. 이윽고 완연한 한숨이 되었다. 내내 매연에 휩싸여 있다 처음으로 맑은 공기를 마신 사람처럼, 문성하는 연이어 숨을 몰아쉬었다.
피가 절반 섞인 이 동생의 손길이 내내 비뚤어 있던 숨통을 올곧게 곧추세워 온다. 어디에서 숨을 쉬어야 할지 몰라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며 막연히 불룩거리던 문성하의 숨줄이 비로소 기능한다. 보통의 사람처럼.
“계속 혜성이 곁에 있을 거야. 형은.”
단단한 한 마디가 나왔다. 주혜성이 안도한 것처럼 입매에 웃음을 걸었다. 똑바로 마주 본 문성하가 덧붙였다.
“형이 혜성이의 집이 돼 줄게.”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 듯 힘 있게 읊조렸다. 동생의 볼에 폭죽 같은 홍조가 드리웠다. 그것이 마치 축제 같다 생각하며, 문성하는 또 입을 열었다. 마음속 깊은 샘에 넘치도록 고인 언어를 끌어 올려 나무를 심듯 못을 박았다.
“형이 항상 찾아온 걸, 혜성이에게 줄게.”
주혜성은 문성하의 첫 집이었다. 가족이었다.
사랑이었다.
***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헤맸을까. 무지근한 의식 속에서 문성하의 몸은 오히려 가벼웠다. 탐색하듯 주변을 둘러봤다. 깜깜한 어둠뿐이었다. 그나마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밝은 빛이었다. 한참이나 빛을 주시하자, 밑으로 줄줄이 계단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총 아홉 개. 문성하는 본능적으로 발을 올렸다. 계단을 밟았다.
어린 시절 읽은 책에서는 지구를 둘러싼 아홉 개의 구름의 있고, 그 위에 천국이 있다고 했다. 단테의 신곡이었다. 문성하는 종교도 없고 사후 세계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목에서 약간의 위안을 얻었다. 불신이 습관일 정도로 외로운 자신에게 그 정도의 선물을 주고 싶었다.
첫 번째 계단을 밟았을 때 나타난 건 어머니였다. 문성하는 그녀를 사랑했으나 따지고 보면 자신을 낳아 준 사람에 대한 예우에 가까웠다. 그녀가 훌륭한 어머니라 할 수 없다는 걸 진작 알았음에도 문성하는 사랑을 해야 했다. 그래야 자신의 탄생에 한 자락의 의미를 추가할 수 있었다.
유령을 스쳐 가듯 어머니를 지나쳐 두 번째 계단에 다다랐다. 보인 건 너무도 희미해 마치 김이 어린 유리창 너머의 풍경 같았다. 몇몇 사람이 자신을 보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불렀다. 문성하 씨, 괜찮으십니까. 문성하는 괜찮지도 않았고 미지의 존재에게 응답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외면하는 걸 택했다.
이어진 세 번째 계단, 아버지. 실질적으로는 가짜 아버지. 문성하를 내내 쓰레기 취급하다 결국 그 쓰레기를 범하며 쓰레기에게조차 경멸당하는 존재가 된 아버지. 문성하는 생각한다. 자신이 그의 입장이었다면 달랐을까. 그처럼 의붓자식을 범하는 잔악을 저지르진 않았겠지만, 단 한 번이라도 그처럼 증오의 눈으로 상대를 보지 않았다 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다. 경험하지 않은 것을 단언하기엔 자신은 너무도 얄팍하며 나약하다.
네 번째 계단. 또 끄무레한 공간. 아까보다 사람이 적다. 흐늘거리는 인영이 문성하에게 말을 건다. 눈 깜빡여 보세요. 문성하는 눈을 깜빡였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상대가 또 묻는다. 아, 소리 내 보세요. 이번에는 외면했다. 그것까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여덟 번째. 문성하는 내내 과거와 불상의 공간을 오갔다. 과거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현주원이나 최재율, 학창 시절 혹은 회사에서 접한 이들을 마주쳤고 불상의 공간에서는 사람인지 아닌지도 불분명한 실루엣으로부터 이런저런 지시를 받았다. 지시를 받을 때마다 문성하는 어떤 것에는 응했고 어떤 것에는 응하지 않았다. 응하지 않은 쪽이 더 많았다.
계단은 어느덧 아홉 번째였다. 저 위로 환하게 빛나는 문이 비친다. 정말로, 한 걸음만 내디디면 천국이구나. 문성하는 잉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숨 쉬는 게 지독하게 버거웠다. 목구멍에 뭔가가 쑤셔 박혀 있는 기분이다. 영 칼칼해 자꾸만 할딱이게 된다.
숨 고르는 일에 집중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 학교 운동장이었다. 텅 빈 벌판에서 홀로 공을 차는 소년이 보인다. 문성하는 멀찍이서 지켜봤다. 솔로 플레이지만 소년은 열심이다. 이 골대에서 저 골대까지 돌진하며 드리블을 하고, 혼자 골도 넣는다. 출렁이는 골대를 보며 껑충거리던 소년이 문득 어, 소리를 낸다. 돌부리에 걸린 듯 기다란 몸이 풀썩 넘어진다.
바닥을 데굴거리다 주저앉은 소년이 제 무릎을 확인한다. 피 칠갑을 한 걸 발견하자 질겁해 소리를 친다. 형! 혀엉!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문성하가 뒤꿈치를 달싹인다. 무릎이 덩달아 덜커덕거린다. 다만 그뿐이다. 몸이 좀처럼 움직이지를 않는다. 문성하의 눈시울이 찌푸려졌다.
왜 다가갈 수가 없는 거지. 이렇게나 가까이 있는데. 달려서 삼십 초면 다다를 거리인데, 대체 왜. 자신의 발은 떨어지지 않는 걸까. 보이지 않게 옥죄고 있는 누군가가 있는 걸까.
혹은 더 이상 움직이기 싫은 걸까.
‘형!’
득달같은 외침이 귀를 때렸다. 문성하의 눈이 번쩍 뜨였다. 허둥거리는 실루엣을 달려온 누군가가 부여잡았다. 바이탈 이거 일시적인 거야, 오버하지 마. 혀를 찬 남자가 문성하를 향해 몸을 굽혔다. 입고 있는 하얀 가운의 가슴팍에서 자수 글자가 비친다. 이름 같은데, 아무리 눈길을 가다듬어도 읽히지가 않는다.
“저 잘 보이십니까.”
남자가 문성하의 머리맡에서 손가락으로 딱, 딱, 소리를 냈다. 멍하니 바라보던 문성하가 주억거렸다. 남자가 또 물었다.
“목소리 낼 수 있어요?”
문성하는 가만히 목울대에 힘을 줬다. 식식거리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는다. 결국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자가 예사롭게 차트에 뭔가를 적었다.
“사고 직후 아파시아1) 오는 건 종종 있는 경우예요. 안정하다 보면 자연히 치유됩니다.”
문성하가 실눈을 했다. 힐긋한 그가 설명했다.
“지금 환자분 정신 차릴 때마다 목소리를 못 내고 있어요. 성대가 부은 것도 아니고, 그쪽에 아무 문제가 없거든요. 단순히 심리적인 거예요. 푹 쉬다 보면 대개 나아집니다. 그러니 목소리 안 나오는 건 신경 쓰지 마시고.”
숨을 고른 그가 눈을 굴렸다. 문성하의 시선이 함께 이동했다. 부목과 붕대를 감은 채 위로 고정돼 있는 왼쪽 다리가 그제야 보였다. 문성하의 눈이 찡그려졌다. 입을 다신 남자가 덧붙였다.
“이쪽 다리는…… 좀 더 봅시다. 수술 경과가 나쁘지 않아요. 바퀴에 으스러지기 직전까지 깔린 것 모르시죠? 신경 손상이 적잖게 있었습니다. 추가 수술을 하겠지만, 중장기적인 재활 치료가 불가피합니다. 한동안 일반인처럼 이쪽 다리 쓰는 게 어렵다는 얘기예요.”
남자가 또박또박 말했다. 문성하는 알아들었다는 양 끄덕였다. 지극히 침착한 태도에 남자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문성하는 빤히 자신의 다리를 살폈다. 하얀 붕대 안에 꽁꽁 숨어 있으나 그 볼품없는 모양새가 훤히 비치는 것만 같고, 신경이 죽은 영향인지 감각이 하나도 없다. 몸에 붙은 거추장스러운 짐 같다. 언젠가였다면 오열하며 좌절했겠지만, 문성하는 지금 아무렇지 않다.
꿈속의 문성하는 다리뿐 아니라 온몸이 녹슬어 있었다.
“선생님, 잠시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을 충분히 알겠다 싶으면서도 문성하는 제 다리만 봤다. 이유는 단순했다. 저쪽을 보면, 잊었던 아픔이 되살아날 것만 같았다.
“네.”
귓속말을 듣고 난 의사가 꾸벅한 끝에 뒷걸음질을 쳤다. 곁에 있던 간호사가 함께 빠져나갔다. 탁.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사위가 조용해졌다. 문성하는 곁눈질로 주변을 봤다. 꽤 넓은 공간에 침대가 이것뿐이다. 일인실인 모양이다. 문성하 돈으로라면 엄두도 못 낼 곳이지만, 주혜성에게는 상관없을 것이다.
베이스터의 메이슨에게 있어 돈이 없어 뭔가를 못 한다는 건 웃기지도 않은 농담일 터다.
“나 때문에…… 형이 이렇게 돼서.”
옆에 의자가 있었지만, 주혜성은 앉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몸을 낮췄다. 언뜻 비치는 낯이 반야처럼 검었다. 어둑한 두 개의 우물 안에서 죽어 가는 이채가 너울거렸다.
“내가, 정말로…… 많은 고민을 했거든.”
주혜성의 아랫입술이 꽉 깨물렸다. 문성하는 침몰하는 배처럼 흉부의 높이를 낮춰 가며 숨을 삭였다. 눈은 허공을 향해 있었으나 이따금 자석에 이끌리듯 까만 머리통을 봤다. 푸석한 머리카락이 볼 때마다 전율했다.
“그냥 나를 버려서 해결하는…… 그런 생각도 조금 하고.”
주혜성의 목이 쿨렁였다. 바닥을 짚은 손이 굼지럭거린 끝에 뒤로 숨었다. 찰나였지만 확실히 봤다. 손목에 감겨 있는 하얀 붕대. 상흔이 채 여물지 않았는지, 희미하게 배어 있는 핏물도.
“그런데, 형. 결국 나는 형의 그림자라도 입어야 하는 사람이더라. 지금 입을 수 없다면, 입는 걸 기다리기라도 해야 하는 사람이더라.”
주혜성의 얼굴이 들렸다. 절반만 그에게 시선을 내준 문성하의 입에서 긴 호흡이 샜다. 한동안 침묵을 삼킨 주혜성이 말을 이었다.
“기다릴 생각이야. 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변하기도 하니까…… 10년 동안 형이 변하고, 내가 변한 것처럼. 그렇게 무작정 기다리다 보면 나와 형이 제대로 마주 볼 날이 한 번쯤은 오겠지.”
주혜성의 입이 다물렸다. 문성하의 눈꺼풀이 흘러내렸다. 잠이 왔다. 이대로 눈을 감고, 가능한 한 오래 자고 싶어졌다.
그러면 둘 다 고통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당분간 형 곁에 없을게. 형이 다치기만 할 걸 아니까.”
주혜성이 느릿느릿 눈을 치떴다. 짧게 일별한 문성하가 도로 허공을 봤다. 주혜성이 침대 시트를 짚었다. 그의 호흡에 따라 시트가 덜컹거렸다. 제 성대를 갉아 먹듯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 형이 언제쯤이면 괜찮아질지, 막연하게라도 좋으니 말해 주면 안 될까. 나 형 다시 만날 때까지 살아 있고는 싶거든. 그러니 제발 나에게…… 형 없는 시간을 버틸 의지를 줘.”
문성하의 고개가 비스듬해졌다. 흘러간 시선이 주혜성과 맞물렸다. 비로소 마주 본 두 사람이 각기 다른 온도의 숨을 내쉬었다. 주혜성은 뜨거웠고, 문성하는 차가웠다.
내뻗은 손이 침대 옆 협탁을 더듬었다. 메모지와 펜이 잡혔다. 문성하는 일필휘지로 종이에 글자를 적어 나갔다. 삽시간에 문장이 완성됐다. 피로한 손이 주혜성 쪽으로 메모지를 밀었다. 주혜성은 충혈된 눈으로 종이를 봤다.
「형은 지금 말을 할 수 없어.」
문성하의 손이 북, 메모지를 찢었다. 새 종이가 나타났다. 거기에 새 문장을 적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너에게 할 말은 없어.」
주혜성이 짙은 신음을 내뿜었다. 문성하는 묵묵하게 목을 늘어뜨렸다. 누기 어린 정적이 두 사람을 휘감았다. 주혜성의 손톱이 메모지에 박혔다. 곤두선 수조가 부러질 듯 파들거렸다.
한참이나 헉헉거리고 난 주혜성이 눈동자를 끌어 올렸다. 오아시스 없는 사막처럼 건조한 눈에서 자살하기 직전의 태양이 번쩍였다.
“그래도 형, 나 사랑했잖아.”
고요하게 식은 입이 달막였다. 말라붙은 성대가 움찔거렸다. 금방이라도 말이 나올 듯한 걸 억눌러 가며 고개를 돌렸다. 창문 너머로 저물어 가는 해가 보였다. 울창한 빌딩 숲에 새빨간 그림자가 드리웠다. 엊그제만 해도 저걸 아름답다 생각했지만, 오늘은 아니다. 피를 뒤집어쓴 하루의 사체일 뿐이다. 어제와 오늘이 이토록 다르다.
문성하는 이기적이다. 평생을 지켜줄 것이라 다짐한 동생을 배신했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단지 그걸 위해서. 그러므로 자신에게는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도, 사랑받을 자격도 없다 생각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10년의 다짐을 무너뜨린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 계기가 된 동생이다. 그것만큼은 안 된다고, 다른 사람은 다 돼도 동생만큼은 안 된다고 스스로를 무던히도 몰아붙였다. 결국엔 졌다. 문성하는 동생의 연인이 되기로 했다. 자신을 포기하는 대신 동생을 사랑하기로 했다.
대가로 원한 건 아주 대단한 게 아니었다. 그저 약간의 애정, 믿음, 그리고. 자신이 솔직해진 만큼의 결백. 그것이면 충분했다. 정말로 많은 걸 바란 적이 없는데, 그는 절묘하게도 그것을 골라 상처를 냈다.
기만당하면 아픈 사람에게 기만당했다. 아버지에 이어 두 번째였고, 그 대상이 연인인 건 처음이었다.
문성하가 그에게 진실을 말해야 할 이유가 없음을 증명하기에, 그 정도면 충분했다.
나아간 손이 다시금 펜을 쥐었다.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종이가 채워져 갔다. 주혜성은 불안정한 낯으로 페이퍼를 응시했다. 텅 빈 문성하의 시야에 하나하나 완성돼 가는 문장이 들어왔다.
「그렇게까지 사랑하지 않았어.」
찌익. 메모를 찢었다.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네가 나에 대해 모르는 게 하나 있어.」
또 찢고, 다음 장을 채웠다.
「현주원하고 잤어. 사고 나기 직전.」
주혜성의 입에서 밭은 숨이 터졌다. 일순 동요한 그가 곧 가붓한 도리질을 쳤다. 미미한 울림을 머금을 혼잣말이 들렸다.
“형에게 사정이 있었겠지.”
픽. 문성하의 입에서 조소가 샜다. 죽 찢은 메모지 뒤에서 새것이 나타났다. 곤두선 펜이 위에서 사각거렸다. 유독 올곧은 문장이 새겨졌다.
「아니. 그냥 내가 좋아서 한 거야.」
주혜성의 손등에서 핏줄이 불끈거렸다. 문성하는 태연히 다음 글귀를 적었다.
「난 원래 아무하고나 쉽게 자고, 쉽게 사랑해.」
메모지는 이제 마지막 장이었다. 문성하는 담담한 글씨체로 쐐기를 박았다.
「너도 마찬가지였어.」
주혜성의 손이 시트에서 떨어졌다. 무채색에 물든 눈길이 하얀 벽을 배회했다. 곧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문성하의 마른 얼굴에 음영이 졌다.
그대로 돌아설 거라 생각한 몸이 불쑥 가까워졌다. 다가온 팔뚝이 어깨를 감아 왔다. 서서히 당겨 오는 완력에 문성하는 마지막으로 져 줬다. 기운 머리통이 주혜성의 가슴팍에 기대졌다. 시근덕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농익어 가는 성인 남자의 체향이 짙어졌다. 한껏 가라앉힌 음성이 귓바퀴를 타고 흘러내렸다.
“내가 아무하고나 자고, 아무하고나 사랑하지 않아. 그러니 괜찮아. 형.”
최후의 각인을 새기듯, 어깨를 주물럭거리고 난 주혜성이 팔을 풀었다. 문성하의 속눈썹이 가지런해졌다. 내려다보던 주혜성이 조금조금 미소 지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차분한 목소리가 병실을 메웠다.
“오늘은 가고, 내일은 안 올 거고. 다음 달에도, 내년에도 아마 안 올 것 같고……. 좀 더 시간이 흘러서, 형이 조금이라도 날 덜 증오하게 될 때 찾아올게.”
곧 조금은 무겁게 뇌까렸다.
“형이 싫다 해도 찾아올 거야.”
그의 눈이 가물거렸다.
“일단은 살아야 하니까. 살기 위해 형 보러 올 거야.”
말을 마친 주혜성이 등을 보였다. 뚜벅뚜벅 걸어가는 소리가 서풍처럼 흩어졌다. 이내 문이 열리고, 약간의 간격을 둔 끝에 닫혔다. 탁. 실내가 고요에 잠겼다.
“우리 혜성이는 항상 12세구나.”
희미하게 트인 목구멍에서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문성하의 머리가 시계 침처럼 기울었다. 베개에 옆통수를 누이고, 창밖을 봤다. 몸집을 키워 가는 땅거미가 남은 낙조를 스멀스멀 삼켜 가고 있었다. 문성하는 넋을 놓고 바라봤다.
“혜성아. 우린 다시 보면 안 돼.”
주름진 시트를 만지작거리며 읊조렸다. 미적이던 동공에 어스레한 대지가 걸렸다. 이제 남은 붉은 빛은 지평선 너머, 오로지 한 줄기뿐이었다. 문성하는 하루의 종말을 고하듯 말했다.
“다시 시작해 봤자 둘 중 하나는 또 다칠 거야.”
마지막 빛이 꺼졌다. 문성하는 눈을 감았다. 아홉 개의 계단이 사라진 세상에는 암암한 혼야뿐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천국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과거의 수많은 사람들도.
목숨처럼 사랑한 자신의 연인도.
문성하는 또다시 혼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