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택시 문을 열고 나서자마자 뭔가가 뚝, 정수리에 떨어졌다. 문성하의 눈동자가 올라갔다. 노란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자잘한 물방울이 진눈깨비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아이고. 오늘부터 또 장마네.”
뒤편에서 툴툴거리는 택시 기사 소리가 들렸다. 결제가 끝났다는 기계음과 함께 뭔가가 문성하의 등을 건드렸다. 문성하의 고개가 돌아갔다. 신용 카드와 영수증을 끼운 택시 기사 손가락이 보였다.
“내가 깜빡하고 미터기를 늦게 켜서 요금이 덜 나왔어요. 그러려니 해요.”
“알겠습니다.”
“새벽에 갑자기 그 꼴을 하고 뒷좌석에 들어오니 나도 원 놀라 가지고…….”
하소연한 택시 기사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문성하는 잠자코 카드와 영수증을 주머니에 넣었다. 입을 다신 그가 손짓했다.
“아무튼 약이라도 어여 발라요. 무슨 일 있었던 게 아니라니 다행이다만, 서울 한복판에서 그러고 다니는 거 아니에요. 사람들이 놀란다고.”
“죄송합니다.”
꾸벅한 문성하가 뒷좌석 문을 닫았다. 택시는 약간의 뜸을 들인 끝에 출발했다. 문성하는 걸어가면서 버릇처럼 어깨를 주물렀다. 뼈 하나가 나간 것 같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빌라 입구에 다다라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익숙한 걸음으로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버튼을 눌렀다. 1층에 멈춰 있던 문이 바로 열렸다. 성큼 발을 집어넣고 5층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기를 기다리며 눈망울을 굴렸다. 벽에 붙어 있는 거울 속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굼틀거리던 입매가 일자로 다물렸다.
발갛게 부어오른 양쪽 뺨, 번진 물감처럼 혈관이 터진 왼쪽 눈, 곳곳에 피멍이 든 목. 누가 보면 정말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은 사람이었다. 문성하는 화풀이를 하듯 어깨를 쥐어짰다. 두둑, 뼈 어긋나는 소리가 났다. 아, 진짜. 문성하가 작게 악을 썼다.
정확히 세 번 기절했다. 다짜고짜 자신을 눕히며 올라탄 현주원에게 수십 회씩 뺨을 맞다 정신을 잃은 게 시작이었다. 눈을 떴을 때, 현주원은 시간(屍姦)을 하듯 자신을 범하고 있었다. 일어난 문성하를 일별한 현주원이 벗은 뱃가죽에 타들어 가는 담배를 꼬라박았다. 아악! 문성하가 신음했다. 현주원은 태연히도 허벅지와 가슴에 같은 짓거리를 했다.
뼛속까지 지져지는 고통에 자지러지다 또 기절을 했다. 사경을 헤맨 끝에 엉덩이를 찰싹이는 손길에 눈을 떴다. 못다 한 폭력이 이어졌다. 현주원은 갈증 난 것처럼 문성하를 강간하고, 폭행하고, 심심하면 담뱃불을 지지며 침을 뱉었다. 나중에는 목이 졸렸는데, 이때 눈의 실핏줄이 터졌다. 문성하는 미약한 숨통이나마 확보하기 위해 허우적거렸지만 결국 까무룩 했다. 이후 꽤 오랜 시간 혼절했다.
세 번째로 정신을 차렸을 때 발견한 벽시계는 새벽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현주원은 침대 시트에 걸터앉아 몇 대째인지도 모를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비척거리다 일어난 문성하가 그를 바라봤다. 현주원은 말없이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문성하는 피가 터져 쓰라린 눈으로 액정을 봤다. 희뿌연 시야에서 몇몇 글자가 두드러졌다.
「웬일로 현 사장이 ……한 결정을 ……했어? 아무튼 베이스터 메이슨 ……지만 ……는 걸로 하자고.」
내려가던 시선이 미동했다. 부쩍 선명한 글자가 비쳤다.
「메이슨은 살려. 썩 내키지 않지만.
김연종 세명전자 부사장」
“만족해?”
현주원이 물었다. 홱 눈을 거둔 문성하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막 밑을 밟은 발바닥이 살점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따끔했다. 아. 탄성을 뱉은 문성하가 발을 들어 확인했다. 중심부에 시뻘건 화상 자국이 있었다.
개새끼가 발바닥까지 지졌구나. 이마를 짚고 난 문성하가 절룩거리며 걸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챙기고 속옷부터 입기 시작했다. 이따금 현주원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른 척 착의를 이어 갔다.
“고맙다는 말은 해야지. 응?”
막 셔츠 마지막 단추를 채웠을 때, 비위 상하는 비아냥거림이 귀를 스쳤다. 문성하의 얼굴이 돌아갔다. 현주원이 조롱하듯 기다란 연기를 뿜었다. 문성하가 으름장을 놓았다.
“너나 고마워해.”
“뭐.”
현주원이 실소를 터뜨렸다. 구겨진 셔츠를 털고 난 문성하가 뇌까렸다.
“너 같은 변태 새끼 맞춰 주느라 고생한 내 발에 입이나 맞춰. 씨발 놈아.”
분연한 몸이 돌아섰다. 가쁘게 걸어가 침실 문을 열고, 컴컴한 거실에 진입했다. 스산한 비소가 등을 간지럽혔다. 문성하는 애써 귀를 닫고 오로지 현관을 향해 발을 뻗었다. 웃음소리는 한동안 그치지 않았다.
“나쁘지 않아.”
퉁퉁 부은 볼을 만지작거리며 혼잣말을 했다. 짓눌린 살이 엔 것처럼 쓰라렸지만, 문성하는 그 어떤 아픔도 겪지 않은 것처럼 고집스러운 자기 암시를 했다. 지금의 자신은 나쁘지 않다고. 전혀, 변태적인 성행위를 한바탕하고 온 사람 같지 않다고.
그러므로 동생을 보는 걸 꺼릴 이유가 전혀 없다고.
띵. 엘리베이터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열린 문틈으로 발을 빼고, 익숙한 현관문 앞으로 갔다. 유난히 두터워 보이는 철문 앞에서 키패드에 비밀번호를 누르고 손잡이를 잡았다. 철컥, 문이 열렸다. 깜깜한 어둠이 얼굴을 덮쳤다.
“혜성아.”
신발을 벗어 던지며 동생을 불렀다. 응답은 없었다. 벽을 더듬거리다 스위치를 눌렀다. 밝아진 실내를 휘 둘러봤다. 소파 팔 받침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은 주혜성이 보였다.
절로 걸음이 빨라졌다. 소파에 비해 다소 기다란 몸 앞에 서서 기웃거렸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많이 피곤했던 듯, 코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데도 동생은 암연한 무의식 속이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눈에 주혜성이 꼭 붙든 핸드폰이 들어왔다.
내려간 손가락에 부딪힌 액정이 환해졌다. 미처 전송되지 못한 메시지 하나가 비쳤다. 문성하는 몸을 숙여 확인했다.
「형. 나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내일 여행 못 가도 되니까 별 일 없이 돌아오기만 해. 그리고 형…….」
문자는 거기서 끊겼다. 문성하는 작은 고갯짓을 했다. 그래, 여기까지 쓰고 잠들었구나. 아마도 이다음 붙일 말을 고민하다 정신을 잃은 거겠지. 최근 며칠간 밤마다 불면에 시달리며 뒤척인 걸 봤다. 본인은 제대로 잤다며 부정했지만, 형의 눈을 속이는 건 불가능했다. 그 속이 안타깝기도 해 어디까지 모른 척해야 할지를 고민하던 차였다.
“무슨 걱정이 그리도 많았기에.”
이동한 손이 주혜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단정한 머리카락이 편안하게 흐트러졌다. 주혜성이 고분고분한 날짐승처럼 이마의 힘을 풀었다. 양 눈초리가 나른해졌다. 비로소 숙면에 빠진 어린아이 같았다.
“더 자. 혜성아.”
손을 거두며 허리를 세웠다. 벽에 걸린 시계가 오전 2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주혜성이 말한 헬기 출발 시간이 6시니, 아직 여유가 있다. 한 시간 정도 재운 후 깨워도 괜찮을 듯싶었다.
“약이나 발라야겠다.”
발길을 돌려 거실을 가로질렀다. 진작 엉망진창인 얼굴이지만, 조금이나마 멀쩡히 추스르고 싶었다. 상처를 본 주혜성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머리에 그려지지만, 문성하라면 그 격양된 심정을 쉽게도 가라앉힐 거다. 무엇보다 여행은 많은 걸 관대하게 만든다. 낙원처럼 염원하던 땅에서 문성하 역시 주혜성에게 많은 걸 말할 셈이었다.
단 한 가지만 빼고.
“자지는 않았어.”
희미한 읊조림이 나왔다. 지친 고개가 느릿느릿 끄덕여졌다. 자지 않았다, 현주원과. 눈의 실핏줄이 터질 정도로 맞았지만 자지는 않았다. 문성하가 원치 않았다. 엄연히 애인이 존재하는 몸이면서 어찌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가진단 말인가.
문성하는 그렇게 믿는다. 그러면 동생도 믿을 것이다. 자신의 말이라면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믿는 게 동생이다. 그러니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건 순탄하며 안정적으로 완결될 것이다.
문성하와 주혜성은, 그렇게 맺어질 것이다.
“연고.”
거실 한 가운데 서서 방황하던 몸이 멈칫했다. 연고는 주혜성이 머무는 방에 있다. 며칠 전 자신의 방에서 찾았을 때 없었으니, 그의 방에 있는 게 맞다.
서벅서벅 주혜성의 방으로 들어갔다. 호젓한 내부를 둘러보다 서랍 앞에 가서 섰다. 손을 내려 첫 번째 칸을 뺐다. 안을 확인했다. 없다. 두 번째 칸. 꽤나 뒤적였지만 역시나 없다. 이어서 세 번째 칸.
드르륵, 빠져나온 수납함 안에서 손바닥만 한 종이가 팔랑였다. 문성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익숙한 종이다 싶었는데, 며칠 전 배송 받은 주혜성의 짐 박스 안에서 발견한 엽서다. 한 면을 빼곡히 채운 나이아가라 폭포 사진이 눈에 익다.
홀린 것처럼 표면을 덮은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뒤집어 볼까, 싶은 욕구가 일었다. 주혜성이 왜 남의 것을 보냐며 화낸 걸 기억하지만. 그것을 일순 잊을 정도로.
유혹의 시간이었다. 문성하는 당장 엽서를 뒤집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휩싸여 있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이것을 앞에 두고 버럭 하던 주혜성의 낯에서 비친 고통을 기억한다. 그게 몹시도 신경 쓰였다. 내면의 깊숙한 수렁에서 터진 듯한 괴로움이었다.
어쩌다 동생이 그런 아픔을 겪고 있는지 모르지만 원인이 여기에 있는 건 명명백백하다. 이걸 발견한 동생의 표정은, 벼랑 끝에 몰린 사람의 그것이었다.
유혹은 곧 증오가 됐다. 이 엽서가 동생을 두렵게 만드는, 아주 나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자 절로 눈이 번뜩였다. 동생의 고통을 확인해 흡수하고 제 손으로 찢어 버리기로 했다. 이 사악한 지뢰를 제거하기로 했다.
엽서를 쥔 손이 뒤집혔다. 드러난 면의 중반부에 시선이 꽂혔다. 일전에 읽은 부분은 머릿속에 있다. 굴러가던 눈동자가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복수. 그래, 여기까지 읽었다. 눈초리에 힘이 들어갔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아. 네가 당한 건 나도 유감이지만, 네가 저지르지만 않는다면 그 다음 복수는 막을 수 있어. 형에게 똑같이 돌려줄 생각으로 접근한 것이나, 네 회사에 투자하는 걸 막아가며 형의 투자처에 장난질을 한 것은 이미 저지른 일이니 그렇다 쳐.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 봐.」
문성하의 목울대가 전율했다. 무슨 소리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갑자기 까막눈이 된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헛것을 본 것 같다. 괘념치 말자. 반쯤 풀린 눈으로 다음 문장을 머금었다. 저도 모르는 새 헐떡이는 가슴이 오로지 읽는 행위만을 부추기고 있었다.
「오해할까 하는 얘기지만, 난 네 형이 이 복수에 똑같이 응할 것이라 생각지 않아. 네게서 들은 네 형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 아주 맹목적이며 헌신적으로 너만 돌본 사람이야. 그 누구보다 네가 잘 아는 사실이지.
내가 말한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는 건…. 그 복수로 인해 너 스스로를 자해할까 한 얘기야. 네가 너에게 하는 복수를 얘기한 거야.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궁금해? 왜겠어. 형에 대한 네 애정은 정말로, 단순한 형제애가 아니야. 넌 이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른다 했지만 난 알아. 형제애가 생길 수 없는 관계에서 그걸 넘어서는 애정이 생겼어. 그러면 뭐겠어?」
호흡이 턱 막혀 왔다. 멈춰 있던 눈동자가 일렁였다. 바뀐 문단에서 시작된 문장이 갈고리처럼 시계를 꿰뚫어왔다.
「너하고 형은 형제가 아니야. 남이지. 남끼리 사랑을 느끼는 이유는, 하나야.」
동공이 터질 듯 확장됐다.
「너는 형을 연인으로서 사랑하는 거야.」
쥐고 있던 엽서가 툭, 떨어졌다. 수납함으로 돌아간 엽서 옆에서 또 다른 익숙한 종이가 비쳤다. 읽기 어려워 밀어 뒀던 영문투성이 페이퍼. 문성하는 시체를 살피듯 표면을 봤다. 여전히 알 수 없는 영단어로 그득한 페이퍼 밑단에서 어떤 단락이 두드러졌다. 그건 알아봤다. 아주 신기하게도, 그것만큼은 명확하게 인지가 됐다.
「DNA paternity testing results
parent In-tae, Joo
child Sung-ha, Moon
paternity index 0.0002%
DNA 친자검사 결과
부 주인태
자 문성하
부친지수 0.0002%」
“형. 이제 들어왔……!”
돌연 뒤에서 바람이 불었다. 방에 들어선 주혜성의 낯이 빠르게 굳었다. 문성하의 얼굴이 돌아갔다. 손안의 종이가 찢어질 기세로 움켜잡혔다. 빳빳한 종이가 타들어 가듯 쪼그라졌다.
“주혜성.”
차디찬 부름이 나왔다. 주혜성은 반쯤 넋이 나간 면상으로 바라봤다. 문성하의 어금니가 조금조금 씹혔다. 예상외로 호흡은 차분했다. 마구 떨리거나 불안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딘가 편안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 기이한 현상의 원인을 찾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숨을 쉬고 있다 생각했지만, 실은 쉬고 있지 않았다.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목이 막혀 오는데 심장은 마치 다른 사람의 것처럼 평온하다. 문성하는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조금 더 있으면 주마등도 보일 것 같았다.
“너 뭐야, 진짜.”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이렇게 되는 모양이다.
“일단 형…….”
두서없이 떨어진 주혜성의 입이 더듬거렸다. 흔들리는 동공 안에서 문성하의 낯이 부서져 갔다. 숨을 몰아쉰 주혜성이 팔을 내밀었다. 먼 치에서 내뻗은 손은 문성하에 닿기엔 한참이나 멀었다.
“병원부터 가자.”
“병원.”
들은 말을 곱씹던 문성하가 실소를 터뜨렸다. 그 진지하며 긴박한 말이 너무도 우스워, 정말 웃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주혜성은 부르튼 이 얼굴이 잘도 눈에 뵈는 모양이다.
자신은 지금 눈이 멀기 직전인데.
“언제부터 알았어?”
냉한 질문이 나왔다. 주혜성이 차마 힘들다는 양 바닥을 봤다. 공허에 사로잡힌 숨이 두 사람의 틈을 메웠다. 문성하는 보다 똑바로 주혜성을 봤고, 주혜성은 완전히 눈을 비껴 버렸다.
“형, 제발……. 병원부터 간 다음에 얘기하자.”
정적을 억지로 헤쳐 가며, 주혜성이 애원처럼 말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문성하가 머리를 저었다. 병원에 갈 생각은 없다. 아니, 애초에 병원에 가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문성하는 지금 제 낯짝이 어떤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당장 면상이 톱에 갈려 갈기갈기 찢어발겨진다 해도, 직후의 감상은 같을 것이다.
이 순간 문성하에게 중요한 건 제 얼굴이 아니다. 호흡하며 몸을 지탱하는 일도 아니다. 소용돌이처럼 몰아치며 온몸을 감아 오는 진실. 오직 그뿐이다. 진실의 덩굴은 곳곳에 날을 세운 철조망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문성하는 운명처럼 알았다. 자신은 이제 여기에 이끌려 곤두박질치고 말 것이라고.
찰나의 단꿈을 벗어던지고 눈을 뜨면, 오랜 고향인 황량의 심해만이 있을 것이다.
“나는 있잖아.”
운을 뗀 문성하가 발을 내밀었다. 주혜성이 크게 주춤했다. 꼿꼿이 마주 본 문성하가 걸음을 이어 갔다. 담배빵으로 얼룩덜룩한 다리가 이따금 절뚝거렸다. 암담한 바닥에서 질질 발 끌리는 소리가 났다.
“다 괜찮았어.”
한 걸음, 두 걸음 나아갈 때마다 고장 난 무릎이 삐걱거렸다. 주혜성의 눈망울이 진동했다. 문성하의 호흡이 식어 갔다. 걸음 수는 갈수록 늘어나는데, 눈앞의 주혜성은 갈수록 멀어진다. 그와 자신의 명확한 거리가 가늠되지 않는다.
“네가 베이스터의 메이슨인 걸 숨긴 것도, 그 정도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ADHD를 극복했음에도 여전히 어린아이인 양 속인 것도, 나에게 보복하려는 마음으로 접근해 실제로 그런 짓거리를 한 것도.”
문성하의 입술 틈에서 탄식이 샜다. 주혜성의 교근이 불끈해졌다. 문성하가 비식거렸다.
“나는 다 용서할 수 있었어.”
주혜성의 턱이 덜덜거렸다. 문성하의 눈동자가 오롯하게 뭉쳤다.
“주혜성은 내가 죄악을 저질러 가며 선택한 내 연인이니, 그 어떤 고통을 감수한다 해도 상관없었어.”
바닥을 디딘 발꿈치가 멎었다. 헉헉거리던 주혜성이 불렀다.
“형.”
“그런 나에게 돌아온 게 고작 이거야?”
날 선 외침이 튀어나왔다. 두 사람의 간격은 손 한 뼘 정도로 짧았다. 문성하의 입매가 길어졌다. 또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가까운데, 왜 이렇게 멀어졌을까.
문성하와 주혜성이라는 사람 간의 거리가.
“너 나를 사랑한 적이 없구나.”
주혜성의 낯이 박제된 것처럼 굳었다. 문성하가 연이어 웃었다. 자신을 향해서인지, 주혜성을 향해서인지 모를 웃음. 조롱을 닮다 못해 입어 버린 폭소였다.
“혹은 사랑하는 법을 모르거나.”
주혜성의 목에 핏대가 섰다. 문성하는 가만히 그를 감상하며 눈초리를 접었다. 정말로, 웃음이 멈추지를 않는다. 하나도 즐거운 일이 없는데. 오히려 뼈를 가는 듯한 고통뿐인데. 그런데도.
마치 숨쉬기 위한 발악처럼 저소가 나온다.
“나에게 지옥을 선물해 줘서 고마워. 혜성아.”
그 말을 끝으로 입꼬리를 내렸다.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등을 보이고, 걷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발을 뻗으며 현관을 향해 나아갔다. 잠잠하던 뒤편에서 득달같은 기척이 느껴졌다. 문성하는 청각을 빼앗긴 사람처럼 무작정 직진했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결국 자신은 시들겠지만, 여기만 벗어난다면 하루쯤은 더 살 수 있을 거다.
주혜성의 앞은 이미 무덤이었다.
“형. 제발.”
현관 앞에서 문성하의 어깨가 부여 잡혔다. 강제로 몸을 비틀린 문성하가 흐리멍덩한 눈을 끌어 올렸다. 목을 뻘겋게 붉힌 주혜성이 허덕이고 있었다. 가까스로 걸린 낚싯줄을 당기듯 절절매다가, 몸을 낮췄다.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는 제 얼굴을 감쌌다. 쇳소리 섞인 사과가 찾아들었다.
“미안해, 형. 나는, 나는…….”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은 그는 문성하에 있어 너무도 낯선 타인이었다. 동생도 아니고, 아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완전히 새로운 얼굴, 새로운 목소리, 새로운 인영을 지니고서 그는.
마치 아는 사람처럼 문성하에게 매달렸다.
“인생에 형밖에 없어서 몰랐어. 증오한 사람도, 사랑한 사람도 형밖에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 내가 어떤 말을 해도 형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할게. 나에게 있어 형은…….”
주혜성의 숨이 거칠어졌다. 맹목적인 빛을 갈구하듯 문성하에게 눈을 건 그가 바닥에 손톱을 꽂았다. 포효에 가까운 한마디가 사위를 울렸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야. 아무리 증오하려 해도, 아무리 멀어지려 해도. 결국 찾을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 형이야.”
주혜성의 눈이 젖어 갔다. 그의 어조가 흐무러졌다.
“나 좀 살려 줘. 그간 잘못한 건 목숨을 팔아서라도 갚을 테니까, 제발.”
그가 울음을 터뜨렸다.
“형이 떠나면 난 죽어…….”
문성하는 묵묵하게 눈앞의 남자를 내려다봤다. 생소한 석상을 관조하듯, 마냥 살펴만 봤다. 한참이나 관찰하자 형체나마 각인이 됐다. 사람이 맞긴 하구나, 싶은 정도의 인지였다.
희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남자는 한때 자신의 동생이었고, 그걸 알면서도 사랑했고, 그토록 원했기에 삶과 죽음을 동시에 바쳐야겠다 결심한 남자였다. 그런데 왜 지금 자신은 아무렇지 않을까. 저렇게나 괴로워하며 갈망해 오는데, 왜 자신의 심장은 미약한 울렁임조차 없을까.
아마도, 가슴에 담았던 그 사람이 이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리라.
“넌 진짜 10년 전과 비교해 변한 게 없구나.”
짧지만 무연한 상념을 마친 문성하가 미소를 지었다. 주혜성은 멍하니 젖은 눈시울을 경련했다. 문성하가 허리를 굽혔다. 두 사람의 틈이 좁혀 들었다. 문성하가 나긋나긋 말했다.
“저지르고 나서 고치는 건 열두 살짜리 동생이나 하는 일이야. 혜성아.”
한결 상냥해진 어조로, 문성하가 그를 가르쳤다.
“네가 형이라 부르는 사람은 저지르기 전에 진작 고쳤어. 또 실수하고 싶지 않았거든.”
문성하의 상체가 반듯해졌다. 동아줄처럼 잡아 오던 주혜성의 시선에 지진이 일었다. 문성하의 눈이 깔렸다. 저 밑으로 한때의 족쇄였던 검은 구렁이 보였다. 매일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게 만든 몽마. 문성하를 잡아먹다 못해 뼛속까지 삼켜 버린 죄악.
친동생을 사랑했다.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도망치다, 끝내 붙잡히고, 숨이 넘어갈 듯한 악몽을 반복하고 나서야 받아들였다. 동생을 연인으로 삼기 위해서는 증인이 필요했다. 이 선택이 그릇되지 않았음을 심판해 줄 존재가 필요했다.
죽은 어머니는 문성하가 고해한 뿌리였다. 자신의 근원까지 동원해 가며 이 연대를 매듭지은 이유는 하나였다. 문성하는 정말로 주혜성을 사랑했다. 거기에 자신을 구성한 전부를 투자했다.
“넌 나와 다른 길을 걸어왔구나.”
뇌까린 문성하가 얼굴을 내밀었다. 입술 표피에 주혜성의 입이 닿았다. 문성하는 무미건조하게 그것을 핥았다. 메마른 살에서 사포 쓸리는 소리가 났다. 문성하가 조곤조곤 속삭였다.
“이제 보지 말자. 혜성아.”
입을 다문 문성하가 돌아섰다. 그대로 나아가 현관 손잡이를 잡았다. 끼익, 문이 열렸다. 기탄없이 몸을 빼며 손을 놓았다. 곧 엘리베이터를 타지도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타닥, 타닥, 발 구르는 소리가 파란처럼 번졌다.
“형!”
줄줄이 계단을 밟은 끝에 빌라의 중간층에 당도했을 때, 위편에서 황급한 외침이 들렸다. 문성하는 모른 척 마저 내려갔다. 에스컬레이터를 타듯 쉼 없이 밑으로만 향했다.
주혜성의 그림자가 미치지 않는 샘을 찾아, 맹목적으로 표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