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이거 봐라? 형. 나 다했다.”
17세의 겨울,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문성하를 반긴 건 옷장에 숨어 있던 주혜성이었다. 갇혀 있는 내내 산소가 부족했는지, 적잖게 허덕이는 꼴을 내려다보다 황급히 동생을 안았다. 걱정스러운 질문이 나왔다.
“설마 형 가고 나서 계속 옷장에만 있었어?”
“응.”
“나와도 되는데. 집에 아무도 없고.”
“내가 그러고 싶었어.”
주혜성이 해맑게 답했다. 말간 볼을 주시하던 문성하가 허탈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주혜성이 잽싸게 펼쳐진 노트를 내밀었다. 아침에 문성하가 내주고 간 영어 숙제였다.
「집에 언제 올 거야」는 「What time will you be home」, 「너한테 할 말 있어」는 「I wanna speak to you about something」…
빼곡하게 채워진 문장들을 내려다보던 문성하가 현기증이 인 것처럼 머리를 저었다. 주혜성이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형. 어디 아파?”
“안 아파. 혜성이 생각나서 그래. 계속 옷장에 있으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어서.”
“난 괜찮아. 하나도 안 힘들었어.”
주혜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로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그 천진한 낯에 인상을 푼 문성하가 눈을 깔았다. 시야에 담긴 동생이 물안개처럼 흩어졌다.
어쩔 수 없다. 동생은 특수반에 다니는 것 자체가 독인 아이다.
일주일 전, 아버지가 주혜성을 지적 장애 클래스가 있는 학교에 전학시켰다. ADHD는 지적 장애 대상이 아니지만, 아버지가 주혜성의 미약한 자폐 증세를 앞세워 지적 장애 증명서를 얻어 냈다. 문성하는 불안했다. 물론 상황에 따라 특수반에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주혜성은 일반 과정이 걸맞은 아이였다.
하고 싶은 게 명확했고, 그걸 충족하려면 일반 학교에 다녀도 부족한 수준이었다. 수학, 과학, 운동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고 그 부문에서만큼은 보통 아이보다 우수한 역량을 드러냈다. 영어가 어설픈 와중에도 숫자나 그림, 사람의 행동만으로 상황을 유추한 후 쉽게 답을 도출해 냈다.
특수반은 그런 주혜성과 맞지 않았다. 아이의 병세에 따라 맞춤 교육을 하는 것이 우선시되는 곳이고, 일반 학교에 비해 전반적인 수업 수준이 낮았다. 실제로 주혜성은 사흘 만에 심심해했다. 선생들은 주혜성이 궁금해하는 학문적 분야에 별 도움을 주지 않았고, 교실에서는 맞장구쳐 주는 친구도 없었다.
다만 고집 센 아버지가 이 결정을 번복할 리 만무했으므로, 문성하는 일단 주혜성을 집에다 숨겨 놓기로 했다. 밤을 새워 수학, 과학, 영어 문제를 노트에 적었다. 아침에 동생을 등교시키는 척하며 옷장에 노트와 함께 넣어 두었다. 학교에서는 오전 수업만 마치고 집으로 왔다. 그리고 오후 내내 주혜성과 있었다.
어디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불분명한 일탈이었으나, 지금 당장은 그게 맞았다.
쾅! 불현듯 현관문이 열렸다. 식탁에 앉아 노트 페이지를 넘기던 문성하의 얼굴이 돌아갔다. 맞은편의 주혜성도 같은 곳을 봤다. 활짝 열린 문 앞에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의 아버지가 있었다.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득달같이 달려온 아버지가 문성하를 잡아 일으켰다. 놀란 주혜성이 아버지를 막기 위해 팔을 뻗었다. 휘두른 아버지의 손이 주혜성의 머리를 쳤다. 제대로 맞은 동생이 바닥을 굴렀다. 문성하가 빠르게 소리쳤다.
“혜성이는 나가.”
“싫어!”
오뚝이처럼 일어선 주혜성이 고집을 부렸다. 증오에 사로잡힌 눈이 제 아버지를 담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들이받을 기세였다. 눈을 뻘겋게 뜬 아버지가 손을 올리며 주혜성을 마주 봤다. 문성하의 목을 타고 거칠한 침이 삼켜졌다. 절로 숨이 가빠졌다. 이대로는 안 된다.
“주혜성, 심부름.”
문성하가 부리나케 주혜성의 어깨를 잡았다. 동생의 눈이 흔들렸다. 문성하가 조곤조곤 말했다.
“혜성이가 좋아하는 벨지안 쿠키, 옆 블록 마트에서 얼마지?”
“3달러. 그런데 형, 아빠가…….”
“10달러 줄게. 3개 사와.”
“그럼 9달러. 근데 아빠…….”
“1달러 거슬러 오고.”
“음……. 응.”
좋아하는 간식 얘기에 주혜성은 한참을 헤맨 끝에 빠져들었다. 문성하는 속으로 안도했다. 됐다. 주혜성의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 이걸로 동생이 아버지와 충돌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성하로부터 10달러를 받은 주혜성이 머무적거렸다. 바닥에 널브러진 패딩을 집어 주혜성에게 입혀 준 문성하가 되물었다.
“그런데?”
“남은 1달러로 초콜릿 사도 돼?”
“그럼. 초콜릿 먹고 싶어?”
“형이 저번에 맛있게 먹은 것 사다 주고 싶어.”
주혜성의 낯에 화색이 돌았다. 문성하의 눈이 굴러갔다. 그게 뭐였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결국 포기했다. 주혜성에게는 이런 일이 잦았다. 문성하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의 정보를, 방금 본 것처럼 생생하게 얘기하곤 했다.
“그래. 초콜릿도 사 와.”
“금방 다녀올게.”
“응. 조심하고.”
주혜성의 등을 두드려 준 문성하가 몸을 일으켰다. 후다닥 달려간 주혜성이 문을 열고 나섰다. 탕, 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문성하가 노곤하게 머리를 쓸었다. 동생은 한동안 돌아오지 못할 거다.
문성하가 얘기한 마트는 문을 닫았고, 그 벨지안 쿠키를 파는 곳은 애초에 흔치 않아 구입하려면 여러 군데를 돌아다녀야 한다. 보통의 그 나이대 아이라면 몇 번 하다 포기하겠지만, 주혜성은 포기하지 않을 거다. ‘마트에서 벨지안 쿠키를 산다’가 머릿속에 확고히 입력된 상태다.
‘남은 1달러로 형에게 초콜릿을 사 준다’ 역시.
“왜 화가 나신 거예요.”
숨을 가다듬은 문성하가 쏘아붙였다. 아버지가 들끓는 숨을 삭였다.
“제니가 얘기했다. 어제 오후 잠깐 집에 들렀는데, 네가 멋대로 집에서 혜성이를 홈스쿨링 하는 것 같았다고.”
문성하가 아랫입술을 씹었다. 제니는 이곳에서 일하는 중국계 하우스키퍼였다. 어제 오후 그녀가 들어오는 기척이 나 주혜성을 데리고 황급히 숨었는데, 식탁에 둔 숙제 노트는 숨기지 못했다. 평소 무던한 성격의 그녀라 넘어갈 줄 알았는데, 용케도 상황을 알아채고 아버지에게 얘기한 모양이다.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아버지. 혜성이는 정신 지체아가 아니에요.”
문성하가 따졌다. 아버지가 이를 갈았다.
“저렇게 산만하고 제멋대로인 애가, 사실은 멀쩡하다?”
“약간의 문제가 있는 건 인정하지만, 특수반에 다닐 정도의 아이가 아니라는 거예요.”
아버지의 미간이 좁혀 들었다. 아랑곳하지 않은 문성하가 몰아붙였다.
“혜성이는 한국의 일반 학교생활에 잘 적응해 왔어요. 지금도 혜성이는 일반 학교에서 학습하는 걸 원해요. ADHD가 문제라면, 따로 받는 치료가 있잖아요. 그걸로 된 거예요. 이 이상 혜성이를 문제아 취급하면, 혜성이가 어긋날 수도 있어요.”
“너 말을 참 잘하는구나.”
아버지가 부쩍 누그러졌다. 문성하가 얼떨떨하게 입을 다셨다. 한동안 말이 없던 아버지의 입매가 비뚤었다. 조금은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내게 혜성이가 원하는 공부를 하는 건 중요치 않아.”
아버지가 상체를 굽혔다. 그의 얼굴과 문성하의 낯이 가까워졌다. 문성하가 뒷걸음질을 쳤다.
“어떻게 하면 저 새끼를 사람들 안 보이는 곳에 조용히 숨겨 놓을 수 있을까, 그게 중요한 거지.”
“아버지.”
“그런데 너는 꾸역꾸역 내가 싫어하는 짓거리만 골라 해. 혜성이를 축구부에 집어넣지 않나, 애한테 무쓸모 과학 사전 사 주면서 호기심을 부추기지 않나……. 이제는 기껏 집어넣은 특수반에서 빼돌리기까지 하고 말이야.”
그의 입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쩌면 그렇게 네 어머니하고 똑같을까. 제멋대로인 게.”
어머니 얘기에 문성하가 경직됐다. 입만 뻐끔거리는 얼굴 앞으로 그의 손이 찾아들었다. 사뭇 다정하게 볼을 쓸어 준 그가 물었다.
“내가 왜 그렇게 틈만 나면 너를 학대했는지 아니?”
문성하가 뻣뻣한 도리질을 쳤다. 그가 이기죽거렸다.
“그렇게 하면 꼴 보기 싫은 네가 알아서 내 집에서 나갈 줄 알았지.”
곧 눈을 부라렸다.
“그런데 아니더라고. 너도, 나도. 이렇게나 서로가 증오스러운데 어떻게 한 집에서 일 년이나 살고 있는지 생각할수록 신기할 따름이야.”
문성하의 입이 달싹였다.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이 혀 위에서 바스러졌다. 먹먹한 찌꺼기가 입 안에서 부유했다.
그럼에도, 문성하에게는 최후의 보호자니까. 이 구질구질하며 기댈 곳 없는 자신을 붙들어 줄 유일한 어른이니까. 그러니까.
아버지는 여전히 아버지였다. 문성하는 아버지를 증오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방금 전 마음을 먹었다.”
타올처럼 부드러운 손길이 문성하의 목을 주물럭거렸다. 문성하는 멍하니 눈동자를 떨었다. 갑작스럽게 찾아든 온기가 낯설면서 좋았다. 그래서 불안했다.
“사실 너에게 하고 싶은 건 따로 있었어.”
문성하의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낯에 음영이 드리웠다. 너무도 어두워 표정이 비치지 않는 얼굴을, 문성하는 먹지를 마주하듯 응시했다. 하염없는 공동(空洞)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이미 그런지도 몰랐다. 조금 비틀거리는 문성하를 싸늘하게 쳐다보며, 그가 덧붙였다.
“그걸 지금 하는 거지. 나하고.”
곧 조롱하듯 말을 맺었다.
“성하 넌 아주 예쁘게 생겼잖니. 둘째가라면 서러운 네 어머니 미모를 닮아서.”
***
“형.”
젖은 머리카락을 가르며 손가락이 들어왔다. 헉, 소리를 낸 문성하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흠칫한 주혜성이 몸을 숙여 왔다.
“형. 괜찮아?”
“아니, 어……. 응.”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버벅거린 문성하가 무작정 주혜성의 목에 팔을 둘렀다. 다짜고짜 당겨 오는 힘에 자석처럼 주혜성이 이끌려 왔다. 척척한 이마가 그의 가슴팍에 묻혔다.
색색거리는 옆얼굴에 고즈넉한 시선이 내려앉았다. 문성하는 그것의 채도를 관음하며 주혜성의 체향을 맡았다. 인공호흡기를 단 환자처럼, 맹목적으로 동생의 냄새를 취하는 데 몰두했다.
이 지긋지긋한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물에 빠진 사람처럼 익숙한 산소를 갈구했다.
“형. 이제는 괜찮아?”
조금조금 잦아드는 문성하의 숨소리를 살피며, 주헤성이 등을 쓸어 줬다. 오감이 느슨해지는 손길에 척추의 전율이 멎어 갔다. 문성하가 간신히 끄덕였다.
“어…….”
“형, 어린애 같아.”
“응.”
평소 같으면 화를 낼 법한 얘기에 문성하는 쉽게도 수긍했다. 동조. 그것 말고는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이 몽마를 떨치기 위해서라면, 백 번도 같은 걸 할 수 있었다.
문성하는 오래전부터 집이 필요했다. 따스한 이글루처럼 안락하며 부드러운 외투가 필요했다. 그런 걸 얻을 만한 운도 자격도 없다는 걸 잘 알았지만, 내심 욕심을 버릴 순 없었다.
굳게 잠긴 욕망의 문을 여는 열쇠는 그리 대단한 형태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이 안온하며 나른한 손의 감촉에 잠식된 순간, 억눌린 욕망은 갓 불붙은 굴뚝처럼 폭발하고 만다. 곧 찰나의 행복을 향해 질주한 끝에 목적지에 다다른 전차처럼, 온 혈관을 하얗게 물들이며 녹아 간다.
“형은 내가 좋아?”
묵직한 음성이 귓가를 적셨다. 멀거니 있던 문성하가 기계적으로 고개를 움직였다. 워낙 무감각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명확히 몰랐으나, 아마도 위아래로 흔들며 긍정을 비쳤다 생각한다.
“그래. 편히 자.”
주혜성이 중얼거렸다. 문성하는 약에 취한 것처럼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푸른 숲을 닮은 향이 사지를 옭매 왔다. 무기력한 머리가 조리치듯 꺼떡거렸다. 풀어진 목을 타고 주혜성의 손이 미끄러졌다. 심연까지 스미는 향이 하나의 대지를 이루고, 무연한 벌판을 가로지르며 검은 바람 같은 한 마디가 찾아들었다.
“그런데 왜 좋아하고 그래. 곤란하게.”
온도를 가늠할 수 없는 혼잣말이었다. 그저 노래처럼 음미한 문성하가 정신을 놓았다. 중력을 이기지 못한 머리가 풀썩 꺾였다. 흘러내리는 머리를 주혜성이 받쳤다. 기억은 거기서 끊겼다.
***
“‘미르주’ 시리즈C 일정에는 차질 없겠어? 거기 CFO가 횡령 혐의로 구속됐다던데.”
회의실 상석의 현주원이 심사역 중 하나를 펜으로 가리켰다. 지목받은 심사역이 빠릿빠릿하게 답했다.
“문제없습니다. 미르주 건전성과 무관한 부분입니다. 철저하게 법적으로 처리하고 다음 주에 VIP유저 대상으로 반값 할인 마케팅 진행하며 신속하게 분위기 바꾸겠다는 입장입니다.”
“반값이라……. 이익에 영향 없겠어?”
“딱히 마이너스 나는 마케팅이 아닙니다. 애초에 대상이 되는 VIP 자체가 워낙 적습니다. 충성 고객 확보하고 회사 홍보하는 수단으로 쓰는 전략입니다.”
“오케이, 다음. 김주은 심사역.”
현주원이 바로 대상을 전환했다. 목을 세운 김주은이 입을 열었다. 오전에 문의 주신 P2P 기업 ‘SZ4’ 부실 사태에 대해 보고드립니다. SZ4 CEO 조예진에 확인한 결과, 우성일보에서 보도한 부실률 이슈는 최근 3달 치 수치를 단순 집계한 것으로…….
문성하의 손이 데스크 위 서류를 뒤적였다. 앉은 순서대로 보고하는 회의 관행상 김주은 다음이 자신이다. 분명히 투자 집행을 준비 중인 씨더존과 데일리캐시에 대해 물을 거다.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 했다.
“오케이. 김주은 씨 고생했습니다. 다음, 문성하 심사역.”
순조로운 보고를 마친 김주은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동한 펜 끝이 문성하를 가리켰다. 문성하가 반듯한 자세를 갖추며 그를 응시했다.
“네. 우선 씨더존 보고하겠습니다.”
“다음 주 주말 일정에는 차질 없고?”
뜬금없이 질문이 찾아들었다. 몇몇 심사역이 의아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다음 주 주말에 뭐 있어? 김주은이 다른 심사역과 숙덕거렸다. 문성하는 잠자코 현주원을 바라봤다. 현주원은 지극히 단조로운 표정이었다. 문성하가 숨을 골랐다. 자신이 알기로 그가 말하는 일정은 하나뿐이다. 자신과의 여행.
“없을…… 겁니다.”
자못 기어 들어가는 대꾸가 나왔다.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해 가며 한 답인데, 중간중간 호흡이 걸리고 말았다. 입을 다무는 문성하를 보며 현주원이 피식거렸다. 부드러운 가운데 냉기를 품은 웃음이었다.
“망설이네.”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문성하가 시선을 낮추며 뇌까렸다. 뒷덜미가 따끔거렸다. 이 장소에 없는 누군가에게 집요하게 감시당하는 기분이다. 그것이 불편하면서도 안락해, 마땅히 할 말을 사리게 된다.
정말이지 모를 일이다. 왜 이 상황에서 동생에게 죄의식을 느끼고 있는지. 그 죄의식이 못내 달콤한지. 단내에 취한 혀가 옴쭉거렸다.
“나는 계획한 일이 계획대로 처리되지 않는 걸 싫어해.”
현주원이 펜으로 테이블을 툭, 쳤다. 문성하가 불안정하게 그를 살폈다. 그새 미소를 거둔 그가 말을 이었다.
“다음에 물었을 땐 망설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의 눈매가 인자하게 접혔다.
“세상 돌아가는 게 그리 쉽지 않아. 문 심사역.”
문성하는 올가미에 걸린 양 숨을 삭였다. 회의실 안에서 무지근한 고요가 맴을 돌았다. 정적을 뚫듯 휘적인 그의 손이 문성하 옆으로 흘러갔다. 그새 정연해진 언어가 실내를 메웠다.
“다음, 최석진 심사역. 보고 시작합시다.”
***
집에 돌아왔을 때는 오후 8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예상대로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언젠가부터 주혜성의 귀가 시간이 문성하보다 훨씬 늦었다. 뭐가 그렇게 바쁘냐 하니, 패기 넘치는 사장이 일을 자꾸만 늘린다는 답이 돌아왔다.
월급이 많지도 않은 회사에서 말만 잘 듣는 애에게 업무를 떠넘기는 건 아닌가 싶어, 직접 찾아가겠다는 얘기를 몇 번 했다. 주혜성은 극구 만류했다. 회사가 작아 보여 주기 창피하다는 이유를 댔다. 그러면서 말했다. 다음에 번듯한 회사 들어가면, 그때 형한테 보여 줄게.
문성하는 그래, 했다.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막연히 하면서.
딩동. 현관에서 벨 소리가 들렸다. 문성하가 다가갔다. 현관문의 구멍 틈으로 밖을 확인했다. 이 빌라 경비원이 보였다.
“무슨 일이세요?”
문을 연 문성하가 물었다. 경비원은 대답 대신 엘리베이터 안의 커다란 소포 박스를 끙끙거리며 끌어왔다. 문성하가 휘둥그레졌다.
“우리 거예요?”
“오전에 도착했어. 해외에서 왔더라고.”
“저한테 말씀하시지 그랬어요.”
“허이고, 비쩍 말라서 들 수나 있겠어? 여기 둘 테니 안까지는 학생이 밀어 가.”
“감사합니다. 그런데 전 학생이…….”
“아, 저번에 준 복숭아는 잘 먹었어. 우리 딸내미가 아주 좋아하더라고.”
손 인사를 한 경비원이 엘리베이터로 돌아갔다. 빠르게 닫힌 승강기 안에서 우웅, 하며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문성하는 가만히 볼을 긁적였다. 저번에 투자처에서 선물로 보내온 복숭아가 많아 경비원에게 일부 나눠 줬는데, 그게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잠잠한 눈길이 떨어졌다. 세탁기도 들어갈 크기의 박스가 문성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숨 쉰 문성하가 박스 뒤편으로 갔다. 경비원이 했던 것처럼 힘차게 밀며 안으로 들였다. 질질 밀린 박스가 간신히 현관 문턱을 넘어섰다.
양팔을 펼친 문성하가 끄응, 하며 박스를 안아 들었다. 지벅거리며 나아가다 거실 바닥에 내려놓았다. 쿵, 둔중한 소리가 났다. 바로 세운 몸이 저릿저릿했다.
식식거리며 표면을 확인했다. 발신자란에 매사추세츠주의 한 주소가 적혀 있었다. 발신자명은 「A」. 수신자란에는 영어로 된 문성하의 주소가 적혀 있고, 수신자명은 「Hye-sung, Joo」였다.
“혜성이 거구나.”
곰곰이 생각하던 문성하가 몸을 틀었다. 미국의 짐을 그쪽 친구가 보내온 듯한데, 미리 풀어 정리해 두는 게 낫겠다 싶었다. 거실 서랍에서 문구용 칼을 찾아 박스로 돌아왔다. 크기만큼이나 두꺼운 테이프를 지익, 긋고는 뚜껑을 열었다. 안에 이런저런 전자 기기며 옷가지가 그득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양반이지.”
너그러이 읊조린 문성하가 물건을 하나하나 뺐다. 비싸 보이는 점퍼며 코트가 가장 먼저 나왔다. 저 밑에 모니터나 키보드도 있었다. 가장 눈을 사로잡은 건 최신형 게임기였다. 게임에 관심이 없는 문성하도 알아볼 정도로 유명한 모델이었다. 반질반질한 본체를 내려다보던 문성하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게임 좋아하는구나. 우리 혜성이.”
게임기를 집어 이런저런 버튼을 의미 없이 누르던 문성하가 눈길을 뺐다. 아직 한참이나 남은 짐들을 훑어보다, 문득 한 서류 봉투를 발견했다. 워낙 깨끗해 눈에 띄었다. 쑥 들어간 손이 그것을 끄집어냈다. 부스럭거리며 올라온 봉투의 겉면에 빨간 영문 로고가 찍혀 있었다.
「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MIT 공과 대학.”
문성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봉투는 밀봉이 되어 있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손이 안으로 들어갔다. 뒤적인 끝에 나온 건 하얀 서류 뭉치였다. 페이지에 이런저런 표와 그래프가 들어가 있고, 문장들은 딱 봐도 어려워 보이는 영문투성이었다. 도무지 해석이 되지 않아 내려놓았다. 대신 뒤이어 나온 엽서를 확인했다.
앞면에 나이아가라 폭포 사진이 들어간 여행 엽서였다. 문성하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엽서의 뒷면을 읽었다. 「Dear, M」으로 시작하는 편지는 역시 영문이었지만 보다 알기 쉬운 단어로 구성돼 있었다. 해석하는 게 아주 어렵지 않았다.
「M에게.
네가 얘기한 미국의 짐을 부친다. 박스 공간이 남기에 비싸 보이는 몇 가지를 함께 넣었어. 필요 없으면 버려. 남은 짐은 네 말대로 기부할 예정이야. 꽤 훌륭한 기부가 되겠지. 애초에 넌 보장된 물건만 쓰잖아. 너 자신처럼.」
문성하가 갸우뚱했다. 그러고 보니 주혜성의 집이 썩 잘살긴 했다. 아버지가 잘나가는 대학 교수였으니. 그가 죽은 후에는 어찌 됐는지 모르지만.
「한국 생활은 괜찮은 걸로 보여. 너와 굳이 화상통화를 하지 않아도, D와 H에게 수시로 얘기 듣고 있어. 다행이야. 솔직히 한국에 간다 했을 때 내심 걱정했거든. 네 의도가 그리 건강치 않은 것 같아서.」
다음 문장을 읽던 문성하가 눈을 찌그렸다. 다소 아리송한 내용이었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아. 네가 당한 건 나도 유감이지만, 네가 저지르지만 않는다면 다음 복수는 막을 수 있어. 네가 이걸 꼭 알아뒀으면 해…….」
탕. 불현듯 뒤편에서 문이 열렸다. 문성하의 얼굴이 돌아갔다. 막 들어온 주혜성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곧 문성하에게 들린 엽서를 보며 눈을 키웠다. 신발을 바쁘게 벗어 던진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곧 손안의 엽서를 채며 소리쳤다.
“남의 걸 왜 보는 거야. 어?”
분연한 외침이 거실을 울렸다. 벙한 문성하가 움츠렸다. 작은 사과가 나왔다.
“미안. 그냥 눈에 띄기에.”
거대한 덫을 닮은 정적이 사위를 덮쳤다. 바닥에 붙은 문성하의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주혜성이 굵직한 침을 삼켰다. 문성하가 황급히 설명했다.
“딱히 본 것도 없어. A라는 애가 무슨, 복수……. 이상한 얘기하는 것까지만.”
본의 아니게 더듬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어차피 이게 진실인데, 더 진실 같은 얘기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목을 울렸다. 이렇게 격양된 동생이 처음이라, 어떻게든 되돌려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복수?”
주혜성의 윗눈썹이 비뚤었다. 문성하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직 반도 못 읽었어. 어려운 영어도 있고 해서. 네 것 함부로 본 건 미안해. 아무튼…… 네가 걱정할 만한 내용은 안 봤어.”
문성하가 눈을 깔았다. 바닥을 짚은 손이 벌벌거리는 걸 뒤늦게 알았다. 돌연 심장이 뻐근해 왔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를 궁금해하기도 전에, 가슴 깊숙한 곳에서 뼈저린 인정이 선수 치듯 차올랐다.
마음으로 두려워하는 사람이 생겼다. 자신도 모르는 새 생겼고, 그걸 방금 전 알았다.
그렇게나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만들고야 말았다.
“서류는.”
건조한 질문이 다가왔다. 문성하의 눈이 돌아갔다. 한구석에 밀린 서류 뭉치가 보였다. 딱 봐도 어려워 보이는 영어투성이 종이. 문성하가 도리질을 쳤다.
“저건 안 봤어.”
“진짜?”
“봐도 몰라. 의학 용어 같은 것 있어서, 형은…….”
문성하가 얼굴을 짚었다. 슬슬 진이 빠졌다. 동생에게 이렇게까지 해명하는 자신이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면서도, 그 어쩔 수 없음이 고통스럽다.
자신은 본래 남의 인정이나 이해를 갈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친아버지로부터 ‘그 일’을 겪은 이후 내내. 그 정도의 가치를 지닌 사람이 문성하에게 없었다.
그런데 사고처럼, 자신에게 독이 되는 사람이 생겼다는 걸 알았다. 지금 이 순간.
“형.”
커다란 손이 문성하의 어깨를 덮었다. 소스라친 문성하가 몸을 뺐다. 떨리는 망막에 못지않게 당황한 동생의 낯이 걸렸다. 문성하의 발끝이 쉼 없이 옴지락거렸다. 조금 패닉에 빠진 문성하를 관찰하다, 주혜성이 팔을 뻗었다. 느른한 감각이 등을 휘감고, 반사적으로 맥을 잃은 상체가 주혜성의 품에 안겼다.
“미안.”
주혜성의 얼굴이 문성하의 목덜미에 묻혔다. 높다란 콧대를 타고 미미한 전율이 느껴졌다. 넋 놓고 지켜보던 문성하의 면상이 굳었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눈시울을 달막이며 흐느끼는 주혜성이 보였다.
“정말로 미안해…….”
문성하의 눈이 촛불처럼 흔들렸다. 방금 전 자신에게 화를 낸 게 미안하단 걸까. 단지 그뿐이라면 저 통곡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문성하는 저것을 이해할 것 같으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저 실체 없는 눈물은 보다 깊숙한 곳에서 찾아온 것이다. 문성하는 알 수 있었다. 이제 자신의 일부가 된 그의 고통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슬펐다.
왜 자신은 아직도 동생을 모르는 걸까.
***
다 끓여 건진 마카로니를 마늘과 함께 버터에 볶는다. 적당히 익으면 우유와 생크림, 체다치즈를 넣어 끓인다. 마무리로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다. 노랗게 완성한 맥앤치즈를 접시에 담는다. 미국에 있던 시절, 주혜성이 가장 좋아한 간식이었다. 문성하가 해 준 걸 일주일 내내 먹은 적도 있었다.
접시를 들고 주혜성의 방으로 갔다. 주혜성은 침대 시트에 걸터앉은 채 상체를 숙이고 있었다. 아까의 일이 있은 후 세 시간 넘게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다가간 문성하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접시를 앞에다 들이밀었다. 주혜성은 반응하지 않았다. 문성하가 어르듯 말했다.
“먹자, 혜성아. 좋아하는 거잖아.”
주혜성의 눈이 마지못해 돌아갔다. 맥앤치즈를 담은 망막에 윤기가 하나도 없었다. 문성하는 갖고 온 포크를 안에다 찔러 넣었다. 커다란 덩어리가 포크 위에 올라왔다.
“아, 해 봐.”
주혜성의 입가로 가져가며 종용했다. 한숨 쉰 주혜성이 입을 열었다. 안으로 큼직한 음식물이 들어갔다. 입을 다문 주혜성이 몇 번 씹지도 않고 넘겼다.
“더 먹어. 필요하면 얼마든지 해 줄게.”
심통 난 아이를 달래듯, 나긋나긋 말했다. 이내 들고 있던 포크를 주혜성에게 쥐여 줬다. 내키지 않는 양 멈춰 있던 주혜성이 문성하를 힐끔했다. 문성하가 어서 들라는 눈짓을 했다. 가슴을 부풀리고 난 주혜성이 포크를 움직였다. 빛나는 쇠붙이가 기계처럼 맥앤치즈를 뜨기 시작했다.
프라이팬 바닥이 꽉 찰 정도로 한 것이라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양인데, 주혜성은 삼 분도 안 돼 모조리 먹어 치웠다. 키도 덩치도 크니 필요로 하는 음식의 양이 많은 모양이다. 어리니 소화 속도도 빠르고. 싹 비운 접시를 챙겨 온 문성하가 기특하다는 양 주혜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주혜성은 말없이 입을 훔쳤다.
“빨리도 먹었네. 더 해 줄까? 형이 다른 건 몰라도 이건 꽤 맛있게 하는…….”
“나 이제 맥앤치즈 안 좋아해.”
말을 끊은 주혜성이 팔을 뻗었다. 텅 빈 접시를 만지작거린 그가 덧붙였다.
“형이 떠나고 난 다음부터, 가장 싫어하는 음식이 됐어.”
접시와 포크를 한꺼번에 쥔 그의 손이 내려갔다. 짤랑, 바닥에서 식기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주혜성이 읊조렸다.
“그런데 형이 해 주면 또 먹어. 내가.”
그의 눈동자가 올라갔다. 먹물 같은 눈망울에 문성하가 스몄다. 그가 탄식했다.
“나는 왜 이럴까. 형을 못 이겨.”
낯선 고뇌를 머금은 눈빛이 문성하의 안면에 내려앉았다. 단단해 보이는 쇄골 사이에 깊은 골이 파여 있었다. 오랜 기간 참은 숨을 터뜨리듯 호흡한 그가 제 이마를 쓸었다. 잠잠하던 눈이 돌연 번뜩였다.
“어차피 또 형한테 버림받을 텐데. 왜 이렇게…….”
“혜성아.”
허겁지겁 나아간 손이 주혜성의 팔뚝을 잡았다. 문성하의 눈이 부릅떠졌다. 대체 저게 무슨 소리인가 싶다. 어떻게 동생이 저런 생각을 할까 싶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어쩌다 동생에게 저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을까 싶다. 자신이.
“형은 혜성이 안 버려.”
강고한 가죽을 쓸며 문성하의 손이 내려왔다. 뜀박질하는 그의 혈관을 위로하듯 지분거리면서, 문성하가 울걱거렸다.
“그러니 그런 얘기하지 마.”
10년 전, 그 철없던 시절. 자신은 분명히 주혜성을 버렸다. 그땐 어쩔 수 없었다. 다른 누구보다 자신이 먼저였다. 자신부터 살아야 했다. 동생을 사랑했지만, 애정은 처절한 생존 욕구를 이기지 못했다.
“형은 혜성이가 없으면 안 돼.”
그리고, 두 번째. 이제는 알았다. 자신이 내내 찾아 헤매던 안식처가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걸. 너무도 가깝고, 너무도 익숙해 몰랐다는 걸. 문성하는 이제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런 얘기를 하면, 형이 너무나도 슬퍼.”
문성하는 주혜성을 사랑한다.
형태는 중요치 않았다. 사랑인 것이 중요했다.
“내가 형 동생이니까, 그래서…….”
헛헛한 혼잣말이 날아들었다. 문성하의 속눈썹이 움칠했다. 언젠가 들었던 것과 비슷한 질문. 답변을 독촉하듯 심장이 뛰어 온다. 동생이니까 사랑한다. 단지, 그 이유로.
아니. 이 애정은 그 정도로 알량하지 않았다.
“형은 혜성이가 동생이라 사랑하는 게 아니야.”
올라간 문성하의 손이 주혜성의 볼을 덮었다. 어루만지는 내내 동생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확고한 시야 속에서 가물거리는 동생의 눈매가 보였다. 적지 않은 시간, 혼자만의 방황을 마친 그가 입을 뗐다.
“키스 다음이 뭐야?”
너무나도 갑작스러워, 오히려 이성을 찾게 되는 질문이었다. 문성하가 부쩍 여짓여짓했다. 흐무러지는 대꾸가 나왔다.
“글쎄. 그건 사람마다 달라서…….”
“보통은 섹스지.”
들려오는 한 마디가 사뭇 뇌호했다. 바닥을 짚은 문성하의 손이 꼼짝거렸다. 응달에 물들며 주혜성의 눈매가 식어 갔다. 굳게 다물린 그의 입술 틈에서 짙은 숨이 샜다.
“자자. 형.”
그의 울대뼈가 높이 솟은 끝에 가라앉았다.
“안심시켜 줘. 나를.”
제대로 치뜬 눈초리가 문성하를 쫓았다. 문성하의 입이 달막였다.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우선 이런 건 매뉴얼에 없었다.
10년 전과 지금에 걸쳐 공고하게 다져 온 문성하만의 매뉴얼이 있다. 형으로서 주혜성을 보듬기 위한 수많은 철칙. 거기에 이런 상황은 존재하지 않았다. 없는 게 당연했다. 일반적인 형제지간이라면 없을 상황이다.
“혜성아. 그런 얘기는…….”
“왜 망설이는데.”
들이닥친 손아귀가 문성하의 팔뚝을 감았다. 꽉 옥죄는 고통에 신음한 문성하가 가까스로 고개를 쳐들었다. 이를 짓씹던 주혜성이 턱을 덜덜거렸다.
“어차피 또 나를 떠날 거니까?”
그 한마디가 쿵, 뇌리를 찍었다. 벙어리가 된 양 서슴거리던 입에서 힘이 빠졌다. 문성하의 어깨가 축 처졌다. 곧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깨뿐 아니라, 전신이 그랬다.
오감의 스위치가 나간 기분이었다.
하릴없이 흘러간 시선이 드문드문 채워진 방을 배회했다. 한참이나 유영한 끝에 머문 건, 맥앤치즈가 담겨 있던 빈 접시였다. 메마른 입이 달싹였다. 내가 저걸 왜 했었나 싶은 의구심이 뒤늦게 치밀어 올랐다. 어린 주혜성이 좋아한 것이라서. 단지 그 이유로. 두어 번 상념의 굴레를 오르내린 끝에 내린 결론은, ‘아니다’였다.
문성하는 주혜성을 잡고 싶었다. 어린 시절의 향수를 자극해서라도. 그런 얄팍한 수를 써서라도. 덫에 걸린 쥐처럼 그를 묶어 두고 싶었다.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궤도에 둘러싸인 행성으로 영영 남겨 두고 싶었다.
그건 문성하의 욕심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가진, 추잡하고 완전한 욕망이었다.
“벗어, 혜성아.”
주혜성을 바라본 문성하가 입을 열었다. 주혜성의 윗눈썹이 미동했다. 시트 위의 팔뚝이 불끈거렸다. 똑바로 마주 본 문성하가 덧붙였다.
“안심하게 해 줄게. 평생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문성하의 손이 자신의 목을 더듬었다. 입고 있던 셔츠의 위 단추를 잡고는, 하나하나 풀어 내렸다. 지켜보던 주혜성의 입에서 더운 숨이 번졌다. 문성하의 눈길이 내려갔다. 말라 가는 빈 접시가 거울처럼 자신을 비춰 오고 있었다. 문성하는 소리 없이 읊조렸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동생이기에 주혜성을 품고, 동생이기에 주혜성은 안 된다던 의지는 결국 자신과 주혜성에 대한 기만일 뿐이다. 기만은 얇은 유리 벽과 같아 있다는 것 자체로 안심할 수 있지만, 너무도 하잘것없어 끝내는 쉽게도 깨지고 만다.
지금 문성하는 주혜성과 자고 싶었다. 그 어떤 기만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