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거짓과 거짓
14.
“이야, 김현재 대단한데.”
출근 직후 들른 휴게실에서는 세 명의 심사역이 테이크아웃 잔을 든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 명은 문성하로부터 베이스터 담당을 넘겨받은 김현재고, 나머지는 그보다 연차가 조금 높은 심사역들이었다.
가볍게 목례한 문성하가 커피 머신 쪽으로 걸어갔다. 김현재를 제외한 두 명이 눈인사를 해 줬다. 그 틈으로 김현재의 의미심장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문성하는 적당히 외면하며 머신의 버튼만 눌렀다.
김현재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문성하는 그의 전문인 블록체인 영역에서 의도치 않게 투자처를 뺏었다. 결국 제 주인을 찾아 돌아가긴 했지만.
“그래서 제가 누누이 말했잖아요. 블록체인 투자는 전문가가 해야 한다고. 베이스터처럼 콧대 높은 애들은 더 심해. 어중이떠중이는 거들떠도 안 본다니까.”
김현재의 목소리가 커졌다. 누가 봐도 문성하 들으라고 하는 얘기였다. 한 심사역이 김현재에게 눈치를 줬다. 야, 목소리 낮춰. 아랑곳하지 않은 김현재가 의기양양하게 떠벌거렸다.
“딱 전화해 갖고 ‘DF벤처스 김현재입니다’ 한 마디 하니까 즉각적으로 반응이 오는 거예요. 그 싸가지 없기로 소문난 COO 계집애가, 뭐라더라? 연락 잘 줬다고, 저하고 한번 만나 보고 싶다는 거예요. 일이 이렇게 쉬울 수가 있어? 이래서 전문 심사역이 필요한 거예요. 블록체인 업계에서 이제 김현재, 하면 누구나 아는 거지. 그 대단한 베이스터조차.”
문성하를 힐끔한 김현재가 비아냥거렸다.
“여느 허접한 심사역은 백날 노력해 봐야 베이스터 문턱도 못 밟아요. 나 정도의 전문가나 이게 가능한 거지.”
“그래, 너 잘난 것 충분히 알았다. 그만하자. 어?”
재차 문성하를 살핀 상대방이 엄포를 놓았다. 문성하는 무표정을 유지하며 커피 추출이 끝난 종이컵을 쥐었다. 슥 빼서 들고는,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나오는데 괜히 뒤통수가 따가웠다.
복도에 섰지만 사무실로는 가지 않았다. 사람 많은 곳이 꺼려졌다. 손목시계를 확인한 뒤 다리를 뻗었다. 십여 분 정도는 조용히 커피 마실 시간이 있었다.
두리번거린 끝에 빈 탕비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문을 닫고, 안에 비치된 소파에 앉았다. 후끈후끈한 컵을 입술 틈으로 밀어 넣었다. 종종 머리통이 기웃거렸다. 김현재가 한 말이 뒤늦게 귀를 밟아왔다.
-여느 허접한 심사역은 백날 노력해 봐야 베이스터 문턱도 못 밟아요.
“내가 문제였나.”
입 안에서 굴린 커피를 삼키며 뇌까렸다. 고요한 탕비실에서는 웅, 하는 냉장고 소음뿐이 들리지 않았다. 문성하는 씁쓸해졌다. 단지 자신이 얻지 못한 베이스터의 인정을 김현재는 얻어서가 아니었다. 이건 좌절이었다. 좀처럼 표출하지 못한 뿌리 깊은 열등감이었다.
아무리 노력해 봐야 문성하는 ‘현주원의 정부’ 이상이 될 수 없다. 막연한 명제가 떠오를 때마다 문성하는 불안에 시달렸다. 스스로를 의심하고 싶지 않아 가능한 한 억누르려 했지만, 무의식 속에서 자신이 추락하는 악몽을 적지 않게 꿨다.
자신이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상상을, 정말로 끊임없이 했다.
문득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늘어져 있던 손이 안으로 들어갔다. 핸드폰을 빼 액정을 확인했다. 바로 눈이 커졌다. 이동한 손가락이 ‘통화’ 아이콘을 눌렀다. 밝은 목소리가 실내를 메웠다.
[형, 출근 잘 했어?]
“그럼. 혜성이는?”
[나는 이제 회사 왔어.]
“아침은 먹었고?”
[아침?]
“형이 출근하면서 식탁 위에 두고 갔잖아. 주먹밥.”
[아, 먹었어. 그런데 형, 있잖아…….]
주혜성이 급하게 말을 돌렸다. 문성하는 속으로 웃었다. 자신이 주먹밥 해 둔 걸 못 봤구나 싶었다. 비일비재한 일이라 이해했다. 이쯤 되면 꼼꼼하며 철두철미한 주혜성이 서운할 지경이었다.
[형은 동해, 서해, 남해 중에서 어디가 좋아?]
뜬금없는 질문이 다가왔다. 문성하가 반문했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아는 형이 헬기 빌려준다 했거든. 그거 타고 형이랑 주말에 바다 한번 다녀올까 해서.]
“그렇다고 헬기를…… 그 형 무슨 재벌이야?”
[돈이 엄청나게 많은 형이긴 해. 일반인은 들으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뭐, 그런 경우 있잖아, 소리 소문 없이 몇천억 원대 부를 축적한 집안. 그 형 집안이 그래.]
“그런 사람을 어떻게 알았어.”
[우리 사장 형 친구고……. 어, 그러니까.]
주혜성이 뜸을 들였다. 핸드폰 너머에서 누군가가 뭐라고 말해 주는 게 들렸다. 주혜성이 바로 말을 이었다.
[저번에 매장 방문했을 때 내가 상담이며 서비스를 너무 잘해 줬다고, 특별히 1박 2일 쓸 수 있게 해 준댔어. 대신 장소를 미리 얘기해 달래. 지자체에다 사전에 허가받는 절차가 있나 봐.]
“고맙긴 한데…… 진짜 써도 될지 모르겠네.”
[어차피 어디가 됐든 헬기를 띄우긴 해야 한대. 필수 비행시간이라는 게 있어서, 주기적으로 헬기를 써야 하나 봐.]
주혜성이 오목조목 설명했다. 문성하는 멍하니 끄덕였다. 잘은 모르지만, 주혜성이 얘기한 그런 부류의 재력가가 있긴 했다. 단 한 번 만난 컴퓨터 부품 업체 직원에게 이 정도의 호의를 베푸는 건 다소 의아한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세상에는 상식만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 워낙 많았으므로, 수긍할 수 있는 범위에 있었다.
“그럼 형이 기름값 조금이라도 낼게. 백만 원이면 될까?”
그래도 양심이 있어 비용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혜성이 만류했다.
[아니,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됐어. 그건 형이 판단해. 그나저나 꼭 동해, 서해, 남해만 돼?”
주혜성의 말을 자른 문성하가 물었다. 주혜성이 빠르게 답했다.
[어디든 상관없어. 따로 가고 싶은 곳 있어?]
“섬인데…….”
[헬기가 착륙할 자리만 있다면 다 될 거야. 무슨 섬인데?]
“울릉도.”
[웬 울릉도?]
“형에게 거기가……. 좀.”
문성하가 말을 흐렸다. 혀끝까지 치밀었던 말이 곧 사그라졌다. 내심 도리질 친 문성하가 핸드폰을 거머쥐었다. 이유가 있긴 하지만, 직접 가서 확인시키는 쪽이 나을 듯싶었다. 미리 얘기해 봐야 괜한 불편함만 야기할 수 있다.
그곳이 문성하 친어머니의 고향이라는 건, 이복형제인 주혜성 입장에서 다소 껄끄러운 사실일 수 있었다.
“아무튼 울릉도로 하자. 형은 거기가 좋아.”
[알았어. 시간은 이번 주 주말 어때.]
“좋아.”
[응. 나도 좋아.]
주혜성이 배시시 웃었다.
[기대된다. 형.]
문성하는 함께 웃었다. 활기차지도, 거하지도 않지만 비 개인 후의 오후처럼 은은한 여운이 있는 웃음. 형제는 그런 미소를 공유했다. 흡족하게 흐무러진 눈초리가 문득 맞은편 거울에 걸렸다. 만면에 생기를 머금은 자신이 고스란히 비쳤다. 멋쩍게 올라간 손이 제 볼을 더듬었다. 그 와중에 미소가 녹지 않았다.
절망에서 행복으로 건너오는 길이 이리도 짧다.
***
“너 얼굴이 왜 이렇게 좋냐.”
외근 중 동선이 겹치는 김에 만난 최재율이 시비조로 말했다. 문성하는 무시하듯 테이크아웃 잔을 흔들었다. 시큰둥한 대꾸가 나왔다.
“형한테 보고해야 하나?”
“좋을 만한 일이 있긴 한가 보네.”
혀를 찬 최재율이 턱을 괴었다. 그의 손목에 붙은 반창고가 뒤늦게 눈에 띄었다. 문성하의 눈이 찌뿌둥해졌다.
“손목은 왜 그래.”
“사이코가 지졌어.”
“사이코?”
“현주원.”
최재율이 질렸다는 양 손을 털었다. 문성하의 입이 떡 벌어졌다. 격양된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그 새끼가 형한테도 담배빵 했어?”
“야, 좀.”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카페에 있던 사람 몇몇이 이쪽을 봤다. 최재율이 팍 인상을 썼다. 문성하의 입이 옹송그려졌다. 한숨 쉰 최재율이 고개를 젖혔다.
“엊그제 일 때문에 만났다 같이 술 마셨는데, 내가 뭔 신경을 그리 거슬렀다고 갑자기 담배를 냅다 찍어 버리더라.”
“뭐라고 했는데.”
“그냥 네 얘기했어. 잘 지내냐고.”
“단지 그 얘기만 했어?”
“단지 그 얘기만 했어.”
최재율이 머리를 까딱거렸다. 지극히 결백한 표정이었다. 문성하가 허탈하게 눈가를 짚었다. 대충 상황이 유추됐다.
현주원은 종종 예측 불가능한 짓거리를 하지만, 최소한의 이성을 지킬 줄 알았다. 일례로 가학 행위가 용인되는 파트너에 한해서만 즐겨하는 폭력적 행위를 했다. 그런 관계가 아닌 이에게 해를 가하는 건 아주 드물게 일어났는데, 이유는 하나였다.
현주원이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을 정도로 맛이 갔을 때였다.
“아무튼 주원이 형 요즘 이상해. 조심하는 게 좋겠어.”
반창고를 문지른 최재율이 간만에 정상인 같은 얘기를 했다. 스트로를 쭉, 빨아들인 문성하가 물었다.
“그 정도로 상태가 나빠?”
“예전에 파혼했을 때하고 비슷한 수준인 것 같은데.”
최재율이 제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문성하의 동공이 확장됐다.
“현주원 파혼했어?”
“새끼야, 좀!”
또 커지는 목소리에 최재율이 버럭 했다. 문성하가 헛헛하게 입매를 꼬았다.
“와, 이건 진짜로 처음 듣네.”
“처음 듣겠지. 주원이 형 입장에서 숨기고 싶은 얘기인데. 뭐 하러 너에게 말하겠어?”
“동성애자 주제에 뭔 결혼. 위장용?”
“원래 나처럼 양성애자야. 기본적으로 여자도 가능해. 파혼 이후론 아니지만.”
“파혼은 왜 했는데.”
“나도 잘은 모르는데……. 뭐.”
최재율의 시선이 먼 곳에 걸렸다. 잠시 테이블을 두드리고 난 그가 뇌까렸다.
“여자에게 다른 남자가 있었어. 결혼식 직전까지 숨기다 주원이 형한테 걸려서 파혼했고.”
“그게 그렇게 충격받을 일인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잖아.”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 주원이 형에게는 아니지만.”
긴 숨을 내쉰 최재율이 팔짱을 꼈다. 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태어난 이래 제 입맛대로 사람 쥐락펴락하는 일에만 익숙하던 인간이야. 뒤통수를 때려는 봤어도 맞아 본 적은 없던 인간이 처음으로 역으로 당했는데, 속이 멀쩡하겠어? 심지어 상대는 결혼을 약속했던 여자고.”
문성하의 잇새에서 스트로가 질근거렸다. 자못 힘 빠진 입이 거둬졌다. 허탈한 음성이 나왔다.
“현주원도 사람이긴 했네.”
“그래서 너 조심하라는 거야.”
“내가 뭐.”
“너 지금 남자 있잖아.”
꼿꼿한 손가락이 문성하를 가리켰다. 문성하가 무춤했다. 최재율이 혀를 내둘렀다.
“주원이 형이 상상 이상으로 너를 신경 쓰는 모양이야. 그냥저냥 만나는 애 정도가 아니란 건 익히 알았지만, 엊그제 확실히 느꼈다.”
문성하가 쏘아붙였다.
“남자 없어. 현주원 혼자 소설 쓰는 거야.”
“근데 왜 형을 거부했어, 갑자기 순결주의자라도 되셨나?”
“그야 하기 싫었으니까.”
“싫어도 필요하면 하는 게 너잖아.”
“내가 무슨 창부야?”
“거참 희한한 반응이네. 문성하가 언제부터 창부 되는 걸 두려워했다고. 애초에 몸 주는 일에 의미 부여한 적 없잖아. 네 입에서 나온 말치고 참으로 너답지 않은 멘트지. 안 그래?”
최재율이 제 어깨를 주물렀다. 문성하의 목이 꿀꺽거렸다. 다른 건 몰라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건 알겠다.
“어떤 새끼인지 모르겠지만, 잘 봐 가면서 발 담가라. 무작정 좇다가 또 폐인 되지 말고.”
최재율이 빈정거렸다. 문성하가 눈을 치떴다. 최재율이 태연하게 덧붙였다.
“또 뒤통수 맞고 주변에 피해 주지 말라는 얘기야.”
“형이 뭘 알아.”
“아는 거 없어. 문성하가 멍청할 정도로 사람에 대한 면역이 없다는 것 하나 빼고.”
“야.”
“오랜만에 구구절절하게 설명해 줘?”
“최재율.”
문성하의 외침이 공명했다. 머릿속에서 전류가 튀었다.
안 된다. 그 얘기는.
하지만 잔인하게도 최재율은 못을 박았다.
“넌 친아버지를 믿었지만, 친아버지는 널 끝까지 아들로 봐 주지 않았어. 같이 지내는 일 년 동안 상처만 입은 너는 폐인이 돼 한국에 돌아왔고. 당시 미성년자였던 너를 돌봐 줄 어른은 아무도 없었지. 예전에 과외를 해 준 내가 그나마 가장 가까운 어른이라는 이유로 너를 거뒀고. 뭐, 실질적으로 먹고 입힌 건 우리 어머니지만. 아무튼 이제 와 말하지만 솔직히 죽을 맛이었다. 무슨 정신병자하고 같이 사는 줄…….”
탕. 테이블이 덜컹였다. 최재율이 예사롭게 고개를 가눴다. 몸을 일으킨 문성하가 헐떡였다. 곤두선 어깨가 경련했다. 덜덜거리는 입술 틈에서 분연한 경고가 샜다.
“함부로 얘기하지 마. 최재율.”
최재율은 가벼운 턱짓으로 받아쳤다.
“떨지나 말고 얘기해. 문성하.”
숨을 몰아쉰 문성하가 몸을 틀었다. 나아가는 발이 자꾸만 지뻑거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몸을 지탱해 가며, 문성하는 혼신을 다해 걸었다. 일렁이는 망막이 물기 없이 젖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