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딩(Pending) 2
12.
“혜성아.”
불안정한 손이 주혜성의 어깨를 덮었다. 주혜성이 안연히 답했다.
“응. 형.”
“잠깐 화장실 다녀와도 돼?”
“갑자기?”
“좀 어지러워서. 세수만 하고 금방 올게.”
“그래.”
주혜성이 흔쾌히 수긍했다. 몸을 일으킨 문성하가 욕실로 향했다. 돌아볼 새도 없이 문을 닫고는, 거울 앞으로 가 양손으로 세면대를 짚었다. 미적미적 올라간 시선이 거울을 확인했다. 눈시울을 붉힌 채 동공을 떨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해도 돼.”
중얼거리며 물을 틀었다. 쏴, 소리에 묻힌 혼잣말이 사멸했다. 양손으로 물을 받아 얼굴을 적셨다. 차디찬 물줄기가 볼을 타고 후드득 떨어졌다. 문성하는 두어 번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벌건 눈시울이 조금조금 사그라졌다.
“문제없어.”
끼익, 수도꼭지가 잠겼다. 무지근한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재차 거울을 봤다. 붉은 기가 싹 가신 얼굴은 이제 창백했다. 문성하는 스스로를 추궁하듯 눈을 감았다 떴다. 거울에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시선이 비껴 났다. 선반에 올라온 흰색 남성 셔츠가 보였다. 문성하의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입기엔 큰 사이즈였다. 다가간 문성하가 셔츠를 뒤집어 라벨에 찍힌 글자를 확인했다. XXL. 주혜성의 것이다. 평소 슈트를 입지 않는 동생에게 이런 것이 왜 필요할까 의문이긴 했지만, 다부진 칼라며 빳빳한 옷감이 꽤 그와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셔츠를 원위치한 문성하가 골똘히 그것을 주시했다. 우디 향을 머금은 고급스러운 천이 낯설었다. 주혜성이 어쩌다 저런 셔츠를 샀는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주혜성이 저런 것을 입어도 되는 나이가 됐다는 게 새삼 와닿지 않았다.
문성하에게 주혜성은 여전히 12세다. 22세다웠으면 좋겠다는 말을 몇 번이고 한 적이 있지만, 정작 문성하가 인식하는 주혜성은 사진으로 박제된 것처럼 영원한 12세다. 오히려 22세다운 주혜성에 막연히 주춤한 적도 있었다.
자신에게 동생을 돌볼 명분이 없어지는 것, 형 노릇을 할 수 없는 형이 되는 것. 문성하는 은연중에 그걸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 두려움에 맞서기 위해, 문성하는 방패처럼 믿음을 올려붙인다. 주혜성은 몸만 22세인 12세라고. 그러므로 앞으로 자신이 벌일 일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문제없어.”
허리를 곧추세운 문성하가 읊조렸다. 그래, 정말로 문제가 없다. 아직 미숙한 동생에게 연애 감정을 이해시켜 준다는 이유로 키스를 해 주는 건, 흔치는 않을지언정 도의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문제 될 일이 아니다. 상습적인 것도 아니고, 딱 한 번 하는 거다. 누구도 손가락질하지 못할 거다.
허공을 헤적거린 눈길이 세 번째로 거울에 걸렸다. 찬물 세수를 했음에도 그새 발그레한 낯이 보였다. 문성하의 아랫입술이 깨물렸다. 저 면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저 동생에게 형으로서의 의무를 치르는 것뿐인데, 진중한 것은 고사하고 상기되기까지 한 꼴이 보기가 싫다.
마치 뭔가를 기대하는 것처럼.
대여섯 번의 찬물 세수를 하고 욕실에서 나왔다. 거실에 발을 딛자마자 주혜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거기는 안 돼. 한나한테 이미 얘기 들었어. 순 투기꾼이야. 미팅하지 마. 미팅하는 것조차 여지를 줄 수 있어.”
입을 다문 주혜성이 머리를 쓸었다. 뭔가가 크게 거슬린 듯, 가슴을 부풀리고 난 끝에 얼굴을 돌렸다. 우두커니 서 있는 문성하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주혜성의 목을 타고 꿀꺽 침이 넘어갔다. 갑자기 표정을 푼 그가 고개를 숙였다.
“아무튼 난 어중이떠중이 부품에 관심 없으니까 믿고 쓸 만한 걸로 형이 알아서 찾아 달라고. 중요한 건 본체잖아. 본체가 잘 돌아가야지. 응? 끊는다.”
통화 종료 아이콘을 누른 주혜성이 바닥 구석으로 핸드폰을 밀어 버렸다.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손짓했다.
“사장 형이 너무 귀찮게 해. 사사로운 것 하나하나 다 물어보고. 신경 쓰이게.”
“친한 사이라고 막 굴리는 것 아니야?”
소파에 몸을 앉힌 문성하가 걱정했다. 주혜성이 키득거렸다.
“그런가 봐.”
“사장이 심하게 굴면 형한테 얘기해. 편한 직원이라고 함부로 대하면 안 되지.”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가끔 말을 안 듣긴 하지만.”
“네가?”
“어……. 내가.”
문성하의 앞에 선 주혜성이 애매하게 말을 흐렸다. 유심히 관찰하던 문성하가 들숨을 삼켰다. 곧 주혜성의 팔을 잡고는,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눈앞의 몸이 미끄러지듯 문성하 쪽으로 기울었다. 문성하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속눈썹이 서서히 곤두섰다. 망막에 걸린 피사체를 세심하게 관찰했다. 올곧고 짙은 윗눈썹, 완만하게 휜 기다란 눈, 청명한 눈동자, 상냥한 굴곡을 지닌 높다란 코, 양 꼬리가 올라간 입. 10년 만에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10점 만점에 9.5점. 나이가 자신보다 어리다는 걸 제외하면 완벽에 가까운 남자.
그때는 키스할 수 있을 줄 몰랐다.
“입.”
문성하가 턱짓을 했다. 주혜성은 따르는 대신 뚫어져라 문성하를 봤다. 뜬금없는 질문이 찾아들었다.
“내가 형한테 하면 안 돼?”
문성하의 머리통이 덜커덕거렸다. 가늘어진 시야가 주혜성을 담았다. 문성하가 말했다.
“한 적 없다면서. 혜성아.”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데…….”
주혜성이 은근히 물었다.
“하면 안 돼? 형.”
문성하의 입이 다물렸다. 어리광 부리는 주혜성에는 면역이 없다. 10년이 지나도 마찬가지다.
“그래. 하고 싶은 대로 해.”
문성하가 손을 놨다. 주혜성이 바로 팔을 내밀었다. 허리가 뒤에서 감겼다. 얼굴을 내린 주혜성이 뇌까렸다.
“형은 형하고 사귄 남자들하고 했던 방식으로 할 거잖아. 그게 싫어.”
문성하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는 말을 하기도 전에, 얼굴에 진 응달이 짙어졌다. 이내 뭔가에 덮쳐진 것처럼 입이 확 틀어막혔다. 문성하의 입에서 아, 소리가 났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주혜성이 더운 숨을 흘렸다. 턱밑을 애무하듯 에워싼 훈기에 오소소 소름이 일었다. 문성하가 애벌레처럼 수그렸다.
“잠깐, 잠깐만……. 혜성아…….”
반사적으로 내뻗은 팔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채였다. 시트에다 문성하의 손을 억누른 주혜성이 깊숙이 상체를 내렸다. 살갗을 축이는 열기가 한여름 같았다. 문성하의 무릎이 들썩였다. 옅은 애원이 나왔다.
“혜성아……. 형이 생각 좀 해야 할 것 같아. 응?”
“하면서 하면 안 돼? 생각은 아까 충분히 했잖아.”
느른하게 받아친 주혜성이 보다 녹진하게 문성하의 입에다 제 것을 붙였다. 이번에는 위아래 입술이 동시에 빨렸다. 아래턱이 자꾸만 간지러웠다. 부어오르는 입술을 주혜성이 핥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문성하의 손톱이 시트에 박혔다. 문드러진 호흡이 샜다.
“혜, 성아……. 그렇게 하는 것 아니…….”
“그러면?”
되물은 주혜성이 느릿느릿 혀를 움직였다. 입술 틈을 가르며 물컹거리는 살이 들어왔다. 입 안이 온통 동생의 누기로 물들었다. 문성하가 등줄기를 곰작거렸다.
“그러면……. 형이 숨을 못…… 흣, 쉬어…….”
“형은 키스하면 야해지는구나.”
중얼거린 주혜성이 팔에 가둔 몸을 완전히 소파 위에 눕혔다. 이내 올라탄 상체를 늘어뜨리고, 고개는 한계까지 끌어 내렸다. 입 안 빼곡히 후덥지근한 혀가 찼다. 굼틀거리는 살이 말랑한 표피와 접합하며 타액을 처발랐다. 어떻게든 가누려 했던 문성하의 목이 무너졌다. 밑에서 한 손으로 받친 주혜성이 말을 이었다.
“흐트러지고……. 열도 오르고.”
그 말에 목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색색거린 문성하가 허공에서 헤매던 손으로 주혜성의 어깨를 잡았다. 지탱할 것이 그것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혀는 목구멍까지 들어왔다. 식도 입구가 지그시 찍히는 느낌에 어깨가 소스라쳤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대는 걸 본 주혜성이 혀를 빼며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제대로 마주쳤다.
희한할 정도의 무표정이었다. 주혜성의 저런 낯을 종종 봤음에도 문성하는 그만 반 발자국 물러나고 말았다. 저 온도의 동생이 야릇하며 색정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평소에는 전혀 느낀 적 없던 사실을, 문성하는 이 순간 인지했다.
그래서 자신과 키스하는 이 남자와 섹스까지 간다 해도 기꺼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형, 울어.”
문득 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달달거리던 손이 주혜성의 어깨에서 떨어졌다. 곧 잡을 곳을 잃은 사람처럼 허둥거렸다. 주혜성이 느릿느릿 상체를 세웠다. 두 사람의 입술이 무더운 공기만 남긴 채 멀어졌다. 옴씰거린 문성하의 손이 제 눈가를 덮었다. 속눈썹이 정말로 축축했다.
“형 좀 쉴게.”
빠르게 고개를 튼 문성하가 일어섰다. 바닥에 발을 딛고는, 지벅거리며 방으로 향했다. 주혜성은 잡지 않았다.
이후 내내 방에 있었다. 밥을 먹기 위해, 혹은 욕실을 쓰기 위해. 그런 이유들로 그 공간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저 침대에 모로 누워 숨만 삭였다. 딱 그 기능만 지닌 아메바처럼 일정한 호흡을 반복했다.
태초의 바닷말처럼 멋대로 엉겨 있던 뉴런이 각자의 역할을 찾아 풀어지고, 어스름이 깔리는 시간에 시작돼 새벽녘이 찾아오는 시간까지 지속된 상념이 마침표를 찾아갔다. 문성하는 마주한 하얀 벽이 답인 것처럼 짚었다. 지친 눈꺼풀이 흘러내렸다. 멍한 눈길이 이불 안에 숨은 앞섶에 걸렸다. 끝내 보고 만 문성하가 저주받은 사람처럼 눈을 감았다.
주혜성과 키스한 걸 떠올리며 세 번쯤 발정했고, 눈으로 확인한 건 처음이었다.
***
형, 형. 다독이는 손길에 눈을 떴다. 흐리멍덩한 눈이 돌아갔다. 침대에 걸터앉아 자신을 내려다보는 동생이 보였다. 문성하는 긴 수술을 마친 환자처럼 맥없이 올려다보기만 했다. 주혜성이 살며시 웃었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내가 아침 차렸어.”
“벌써 아침이야?”
“응. 9시가 다 돼 가.”
“형이 오래 잤구나.”
문성하가 제 머리를 털었다. 실은 그렇지도 않았다. 잠이 들기 전, 6시를 갓 지난 시계 침을 봤다.
“형 좋아하는 순두부찌개 했어.”
“집에 순두부가 없을 텐데.”
“내가 사 왔어. 집 근처 시장에서.”
주혜성이 샐샐거렸다. 그 산뜻한 표정에 습관처럼 미소 지은 문성하가 손을 내밀었다. 신선한 수풀 같은 주혜성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고는, 눈을 깔았다. 목울대가 무거웠다. 지난밤 내린 결론이 추처럼 달려 있었다.
“그래. 일어나서 혜성이가 만든 순두부찌개 먹고…….”
문성하가 다듬거렸다. 메마른 입을 한번 축이고, 한층 초연한 얼굴로 주혜성을 응시했다. 마주 본 주혜성이 영문도 모르고 입매에 호를 걸었다.
“내일부터 혜성이 따로 지낼 집, 같이 알아보자.”
주혜성의 동공이 커졌다. 일순 들먹거리는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문성하가 못을 박았다.
“혜성이 너 성인이야. 슬슬 자립해야지. 언제까지 형이 봐줄 수 없잖아.”
정말로, 반드시 그리해야 했다.
더 이상 동생을 남자로 보지 않고, 이성적인 형으로 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주혜성을 떨어뜨려야 했다.
***
「혜성아. 이따가 5시야. 시간 맞춰서 강남역에서 보는 거야. 응?」
성의껏 완성한 문자를 전송했다. 제대로 간 듯했지만, 읽었다는 표시는 뜨지 않았다. 찡그린 문성하가 재차 손을 움직였다. 또 하나의 문자가 보내졌다.
「혜성아. 형 메시지 봐야지.」
5초 만에 읽었다는 표시가 떴다. 다만 답은 역시나 오지 않았다. 인상 쓴 문성하가 경고의 문자를 보냈다.
「답 안 보내면 형 화낼 거야.」
이번엔 1초 만에 읽었다. 이윽고 답신 없는 시간이 흘렀다. 십 초에서 이십 초, 또 삼십 초, 그리고 일 분. 눈이 아파 올 때까지 액정만 보고 있을 때 지잉, 하며 글자가 떴다. 투박하며 무성의한 것이었다.
「몰라.
동생」
문성하의 눈이 찌푸려졌다. 화가 단단히 났구나 싶었다.
어제 아침, ‘따로 살자’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주혜성은 제 방에 들어가 나오질 않았다. 주혜성과 키스한 직후의 문성하 같았다. 동생의 방문을 반나절 내내 두드린 끝에 대면했다. 주혜성의 손을 잡고 그가 나가서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한국 생활에 적응하려면, 어엿한 성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려면 불가피한 일이라고 존조리 얘기했다.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이유를 알량한 필요에 의해 부단히 말했다.
당연히도 주혜성은 알아듣지 못했다. 자신은 싫다는 얘기만 반복하다가, 월요일 아침이 되자 문성하보다도 먼저 집에서 나가 버렸다. 또 따로 살자는 얘기를 들을까 무서웠던 모양이다.
그런다고 문성하의 의지가 변하는 것도 아닌데.
“대표님 출근했습니까.”
사무실 안에 들어서자마자 지나가는 서무직원을 붙들어 세웠다. 현주원의 재중을 묻자 그녀가 흔쾌히 답했다.
“네. 안 그래도 대표님이 성하 씨 찾았어요.”
“대표실에 누구 없고요?”
“없어요. 바로 들어가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바쁘게 걸어 대표실 앞에 섰다. 노크를 하자 누구냐는 질문 없이 들어오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문을 연 문성하가 발을 들였다. 데스크 의자에 앉아 연기를 뻐끔거리던 현주원이 재떨이에 담배를 떨었다. 심상한 물음이 다가왔다.
“주말은 잘 보냈고?”
“그럭저럭이었습니다. 대표님은요.”
“나는 아주 거지같이 보냈어.”
현주원이 뇌까렸다. 의중을 파악한 문성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재색 카펫이 깔린 바닥을 보며 호흡을 고르다, 다짜고짜 가방 안에 손을 넣으며 말했다.
“간단히 보고 좀 드리겠습니다.”
“지금 여기서?”
“네. 대표님께 바로 하겠습니다.”
문성하의 속눈썹이 가지런해졌다.
“대외비로 하고 싶어서요.”
현주원의 이에서 까드득, 소리가 났다. 담배를 비벼 끈 그가 손가락에 깍지를 꼈다. 노곤한 지시가 다가왔다.
“어디 한번 해 봐, 대외비로.”
다가간 문성하가 페이퍼 몇 장을 데스크에 올렸다. 현주원은 손도 대지 않고 한 장 한 장 늘어나는 종이를 눈으로 읽었다. 자세를 바로 한 문성하가 입을 열었다. 정돈된 언어가 흘러나왔다.
“차례대로 AI 스타트업 씨더존, 핀테크 스타트업 데일리캐시, 펫테크 스타트업 101캣츠입니다. 설립된 지는 각각 5년, 2년, 3년이고 공개적으로 투자 오픈된 바 없습니다. 자력으로 캐시 조달이 가능한 구조였기 때문입니다. 건전성이 보장된 곳이라는 얘기죠.”
“오픈되지 않은 곳을 무작정 뚫겠다는 얘기야?”
“씨더존은 제 고등학교 선배가 하는 곳이고, 데일리캐시는 일전에 제가 투자한 빗릿 대표의 친구가 하는 곳입니다. 101캣츠 대표와는 벤처 관련 모임에서 종종 만나며 쌓아 둔 친분이 있습니다. 셋 다 공식적으로 투자자를 모집하지 않지만, 제가 들어간다 하면 검토해 보겠다는 의사를 내놓았습니다. 대표님께서 컨펌만 해 주시면 씨더존부터 순차적으로…….”
“10억, 15억, 7억. 도합 22억.”
문성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현주원이 딱 떨어지는 숫자를 읊었다. 흠칫한 문성하가 정면을 봤다. 현주원이 한쪽 눈썹을 까딱거렸다.
“회사 별로 가능한 최대 투자 규모. 뭐, 나쁘지 않네. 장기적으로 할 만한 곳은 아니고, 2년에서 3년 잡고 적당히 먹고 빠지는 정도.”
“페이퍼 다 안 읽으셨잖습니까.”
“그걸 다 봐야 알아? 통상 보고서라는 건 다섯째 줄까지만 읽으면 각이 나와. 내가 대표 허투루 한 것도 아니고.”
현주원이 담뱃갑에서 새 담배를 꺼냈다. 문성하는 그저 뒤로 한 손을 꼼짝거렸다.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인 현주원이 페이퍼를 치웠다. 밀려난 페이퍼 중 하나가 데스크를 이탈해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것들은 갑자기 왜 갖고 온 건데? 문 심사역.”
“투자 가치가 있는 곳을 적기에 파악해 보고하는 건 심사역의 의무…….”
“그것 말고.”
훅, 연기를 뿜은 현주원이 담배를 고쳐 쥐었다. 곤두선 끝이 문성하를 가리켰다. 현주원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문 심사역은 분명히 내게 지시받은 롤이 있었을 텐데. 그것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왜 다른 건에 집적대고 있느냐, 이 얘기야.”
문성하의 목이 울렁였다. 숨을 죽인 문성하가 여짓거렸다. 현주원은 무표정으로 지켜보고만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말해.”
“베이스터를 가져올 자신이 없습니다.”
문성하의 어금니가 지그시 깨물렸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치기 어린 고집을 이어 가다 더한 구렁텅이로 곤두박질치고 싶지 않았다. 문성하는 제 깜냥을 잘 알았다. 모든 선택은 합리적으로, 또 현실적으로. 자신의 신조였다.
무엇보다, 문성하는 지금의 자리를 지켜야 할 확고한 이유가 있었다.
“일리노이스 건으로 회사에 누를 끼쳤습니다. 뼈저리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그걸 만회할 수단으로 제시한 베이스터 투자 건은 아무리 머리를 써 봐도…….”
“문성하 능력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니 베이스터 드롭하고 다른 걸 하게 해 달라. 이 얘기 아니야, 어?”
현주원이 꼬집었다. 입을 말아 문 문성하가 끄덕였다. 고요한 대표실을 공기 청정기 돌아가는 허무한 잡음이 메웠다. 휘적거린 현주원의 손이 재떨이를 찾았다. 담배를 두드리는 손가락 밑으로 재가 떨어졌다. 나풀거리는 알갱이가 풍성한 싸라기눈처럼 쌓였다.
“하지 마. 베이스터.”
단출한 경고가 귀를 옭맸다. 동그래진 문성하의 눈망울이 현주원을 담았다. 재차 담뱃재를 떤 그가 뇌까렸다.
“하기 싫다는 것 억지로 떠넘겨서 뭐 해? 베이스터에서 손 떼. 블록체인이라면 팬티라도 벗고 달려들 김현재에게 맡길 테니, 넌 더 이상 이쪽에 관여하지 마. 안 그래도 오늘 그 얘기하려 했어. 본의 아니게 선수를 빼앗겼지만.”
현주원이 혀를 찼다. 긴장한 문성하가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저에게 베이스터를 일임한 탓에 타이밍이 많이 지체됐는데.”
“신경 쓸 것 없어. 모든 VC가 똑같이 지체된 입장이야. 선수 친 세명전자 한 곳 빼고.”
“그건 그렇지만…….”
문성하가 뭉그적거렸다. 꽁초를 재떨이에 처박은 현주원이 곁눈질을 했다. 아물거리던 문성하가 말을 이었다.
“솔직히 혼란스럽습니다,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오시는 게. 진심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허, 참.”
현주원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황당하다는 양 이마를 짚고 난 그가 허리를 곧추세웠다. 오롯한 동공이 문성하를 머금었다. 현주원이 비아냥거렸다.
“내가 대단히 속 좁은 사람인 줄 아나 봐?”
문성하는 반박하지 못했다. 속내를 꿰뚫은 현주원이 피식거렸다. 곧 어조를 가라앉혔다.
“VC 관리자는 원론적으로 투자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아. 투자를 실패한 심사역에게 책임을 묻고 눈치를 주는 회사에서, 어떤 심사역이 하이 리스크 투자를 감행하겠어? 물론 생돈 날아간 CEO 입장에서 열이 받는 건 당연하지. 그럼에도 화는 일 절만 내고 넘어가야지. 이 절, 삼 절씩 해 봐야 얻는 것 없이 서로 피곤할 뿐이야.”
현주원의 손이 들렸다. 문성하를 향해 손가락질 한 그가 덧붙였다.
“나는 그저 효율성을 따진 거야. 위기에 내몰린 문성하가 젖 먹던 힘을 다해 베이스터를 가져와 주면 좋겠지만 그럼에도 결국 안 될 성싶다, 하면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게 맞는 거야. 문성하에게는 문성하에 맞는 다른 걸 맡기면 되는 거고. 사업가 입장에서 그거 판단하는 거 어려운 일 아니잖아. 안 그래?”
문성하가 마른침을 삼켰다. 전에 없이 이성적인 말을 하는 현주원이 낯설었다. 물론 그는 공적인 자리에서 늘 이 같은 태도를 견지했지만, 문성하와 단둘이 있을 때는 자주 예외였다. 변태적이고, 이기적이며, 상처 주는 말만을 골라서 했다. 문성하는 지금의 그가 대단히 난처했다. 꼭 예사로운 바위로 위장한 어뢰 같았다.
“물론 화가 풀리지 않은 건 맞지만.”
문득 심드렁한 혼잣말이 들렸다. 문성하가 주춤했다. 다시금 마주친 현주원의 눈이 냉했다. 그가 팔짱을 꼈다.
“다른 얘기 좀 할까?”
“좋을 대로.”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너 좋을 대로만 살 거야?”
“내가 언제 그랬다는 거야.”
“너 내키는 대로 선 없애고 싶을 때 없애고, 그러다 내키지 않으면 도로 긋고. 자격도 없으면서 습관적으로 남 위에 올라서려 발버둥을 치지. 처음엔 그러려니 했는데, 생각해 보니 이대로 두면 안 되겠더라고. 도무지 괘씸해서 참을 수가 없어.”
“무슨 얘기야, 그게.”
“지난 주말에 나하고 떡 안 친 걸 얘기하는 거야.”
현주원이 비소를 띠었다.
“나한테 처맞는 건 필요하니 하고 싶었지만, 나하고 섹스 하는 건 필요치 않으니 하기 싫었겠지. 응?”
문성하가 뒷걸음질 쳤다. 방황하던 시선이 먼 치에서 흐트러졌다. 진작 꺼진 담배꽁초에서 검은 안개 같은 잔향이 스멀스멀 밀려와 숨통을 옥죄어 왔다. 맥 빠진 몸이 간닥거렸다.
문성하는 지난 토요일 현주원과 자지 않았다. 주혜성에게 욕정한 자신을 질책하기 위해 살이 부르트도록 벨트로 학대당하고, 담배빵을 입고, 얼굴이며 가슴에 침을 맞는 수모를 겪었다. 딱 거기까지였다. 섹스는 하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했을 텐데, 어쩐 일인지 죽을 정도로 하기가 싫었다.
“이번 주말엔 내가 골프 약속 있어서 안 되고……. 다음 주 주말.”
핸드폰 화면을 켜고 캘린더를 뒤적이던 현주원이 중얼거렸다. 문성하가 미적미적 그를 확인했다. 핸드폰을 뒤집은 현주원이 의자 등받이에 목을 기댔다.
“시간 비워.”
“형. 그렇게 일방적으로 통보하면…….”
“비우라면 비워.”
칼 같은 으름장이었다. 문성하의 등줄기가 바싹바싹 말랐다. 현주원이 눈매가 찌그러들었다. 불쾌감이 형형한 투로, 그가 지적했다.
“난 너 만족시켜 주려고 고용된 사디스트가 아니야. 어디서 그런 취급 받아 본 적도 없고.”
“형. 나는…….”
“성하야, 주제를 모르면 처음부터 배워. 내가 친히 가르쳐 줄 테니까. 다음 주말에 같이 여행이나 하자. 맛있는 것 먹고, 문성하 좋아하는 것 하고……. 나 좋아하는 것도 좀 하고.”
현주원의 표정이 풀렸다. 이어지는 목소리가 자못 다정했다.
“나 지금 너한테 데이트 신청하는 거야. 웬만하면 받지 그래? 네 이름 달린 사무실 자리 보전하고 싶으면.”
문성하는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카펫에 붙은 발바닥이 오한이 인 것처럼 옹송그려졌다.
잘못 걸렸다 싶었다.
***
“여기는 진짜 우리 단골한테만 소개해 주려고 내가 빼놓은 곳인데, 학생들이 너무 잘생겨서 보여 주는 거야. 강남에서 이 가격에 이런 곳 없어. 신축에다, 인테리어 세련됐고. 역하고도 가깝고, 둘이서 지내기 충분할 정도로 사이즈 좋고. 안 그래?”
부동산 아주머니가 호들갑을 떨며 거실을 돌아다녔다. 둘 다 학생으로 본 건 그렇다 치고, 별 부연 설명 없이 남자 둘이 찾아왔더니 당연히 같이 살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문성하는 오해하게 내버려 뒀다. 둘이서 산다고 해야 넓은 집을 소개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새집 냄새 물씬 나는 내부를 속속들이 탐색했다. 안에다 방 하나를 둔 분리형 원룸. 완공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지 모델 하우스처럼 깔끔하다. 거실 바닥에 고품질의 강마루 타일이 깔려 있고, 주방 기구와 세탁기와 같은 옵션은 전부 최신형이었다. 내외관 통틀어 문성하가 사는 구축 빌라보다 훨씬 더 나아 보였다. 사이즈는 절반 수준이었지만.
“여기가 얼마라고요?”
문성하가 질문했다. 아주머니가 빠르게 답했다.
“5000에 70. 집주인하고 얘기 좀 잘하면 5500에 65도 가능하고.”
“보증금 더 높이고 월세 낮추는 건 안 돼요?”
“글쎄다, 그건 좀.”
뜸을 들인 아주머니가 걱정했다.
“왜. 마음에 안 들어?”
“생각 좀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문성하가 괜히 발을 끌며 주혜성 쪽으로 다가갔다. 사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싶지만, 보증금을 보다 높일 수 있다면 그쪽이 좋았다. 안 그래도 빠듯한데 한 달에 70만 원에 달하는 월세를 감당하는 건 부담이다. 그렇다고 저렴한 대신 숨 막힐 정도로 좁은 곳에 동생을 둘 수도 없었다. 계산에 계산을 거듭하는 게 당연했다.
“혜성이 넌 어때?”
주혜성의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입을 꾹 다문 주혜성은 말이 없었다. 이 화제에 대해 전혀 말하고 싶지 않다는 투였다.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 아주머니가 고민에 잠겼다. 곧 문성하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6000에 60도 될 거야, 아마. 집주인한테 얘기 잘해 볼게. 친하거든.”
“혹시 7000에 50 되나요?”
“어머, 그건 안 되지.”
아주머니가 손으로 엑스 자를 만들었다. 문성하가 창문을 일별했다.
“여기 다 좋은데 조망권이 좀……. 옆 건물하고 너무 붙어 있는 것 아니에요? 그래서 물건이 안 나가는 것 같은데.”
“학생, 붙긴 뭘 붙어? 정원 하나도 들어가겠구만.”
“아무튼 생각 좀 해 볼게요. 혹시 집주인 분한테 7000에 50 되는지 물어봐 주시고요.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혜성을 끌어당긴 문성하가 현관으로 향했다. 열렸다 닫히는 문틈으로 골이 아픈 양 머리를 긁적이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
“어디가 제일 좋아?”
인근 햄버거 매장에서 저녁을 먹었다. 얼마 전 주혜성이 지나가는 말로 ‘미국식 패스트푸드가 먹고 싶다’고 한 걸 기억하고 데려온 것이었다.
주혜성은 커다란 햄버거를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빵 사이에 끼워진 파랗고 빨간 내용물을 씹는 입이 그저 무료했다. 문성하가 햄버거 쥔 그의 손을 잡아 입 가까이 올려붙였다. 강제로 한 입 한 주혜성이 문성하를 힐금했다. 문성하가 역정했다.
“제대로 먹어. 음식 갖고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먹고 있어.”
“그리고 형이 물었잖아. 어디가 제일 좋냐고. 왜 답을 안 해?”
문성하가 감자튀김을 쿡 부러뜨렸다. 주혜성은 말없이 햄버거를 베어 물었다. 우물거리는 시간이 꽤나 길었다. 대놓고 하는 묵언 시위였다. 끙, 소리 낸 문성하가 공연히 스마트폰을 봤다. 액정에 오늘 들른 일곱 곳의 리스트가 떠 있었다. 문성하는 도무지 아닌 것으로 보이는 네 곳을 속으로 탈락시켰다. 이내 나머지 세 곳을 면밀히 살폈다.
아무리 봐도 마지막 물건이 가장 괜찮다. 조망권이 아쉽긴 하지만, 나머지는 흠잡을 데 없다. 무엇보다 주혜성의 회사와 매우 가깝다. 7000에 50으로 맞출 수만 있으면 딱인데. 웅얼거리는 문성하의 뒤에서 기겁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주혜성이 퍼뜩 얼굴을 들었다.
“야! 너 왜 여기에 있어? 지금 안에서 너 찾는다고 난리가…….”
따발총처럼 쏘아 대던 말이 멎었다. 뒤늦게 문성하를 발견한 포니테일 여자가 아, 하며 입을 가렸다. 어색하게 웃은 그녀가 인사했다.
“어……. 혜성이 형님분 맞으시죠?”
“네. 안녕하세요.”
여자가 어정쩡하게 운동화 앞코로 바닥을 문질렀다. 그새 햄버거를 해치운 주혜성이 일어섰다. 어디가? 부르는 문성하에게 주혜성이 답했다. 다 먹었어, 물 사 올게. 카운터 앞에 늘어진 줄로 향하는 그를 보며 여자가 낯설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문성하는 그런 그녀의 옆얼굴을 관찰했다. 확실히 아는 얼굴이다. 언젠가 이 근방에서 주혜성과 함께 있는 걸 봤다. 지금처럼 포니테일을 하고 있었다.
“한나 씨.”
차분한 호명이 나왔다. 여자가 깜짝했다.
“저를 아세요?”
“혜성이가 얘기했어요.”
“어…… 어디까지요?”
여자가 우물쭈물했다. 문성하가 대꾸했다.
“같이 컴퓨터 부품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이고, 이름이 한나라고…….”
“또 없었어요?”
“네.”
“그렇구나.”
한나가 어쩐지 안도했다. 가라앉은 양 볼이 말갰다. 얘도 혜성이 나이쯤 됐겠구나. 속으로 가늠한 문성하의 눈길이 문득 테이블 위에 둔 새 햄버거에 걸렸다. 양이 적지 않은 주혜성을 고려해 두 개를 샀는데, 결국 하나가 남게 생겼다.
“식사하러 온 거예요?”
문성하가 물었다. 한나가 주억거렸다.
“네. 다른 회사에서 일하는 친구하고 만날 겸 해서.”
“친구는 어디에 있어요?”
“갔어요. 방금 다 먹고 헤어졌거든요.”
“이거 먹을래요? 새 건데.”
“그래도 돼요? 감사합니다.”
사양하지 않은 한나가 덜컥 맞은편에 앉았다. 포장지를 사르륵 벗기고는, 오물오물 깨물어 먹기 시작했다. 방금 전 식사를 했다는 게 무색할 정도로 먹성이 좋았다. 저렇게 말랐는데, 확실히 20대 초반은 다르구나. 문성하는 감탄했다.
“집 보시는 거예요?”
삼 분만에 대부분을 해치운 한나가 질문했다. 별생각 없이 액정을 두드리던 문성하가 흠칫했다. 화면의 부동산 매물 사진들을 그녀가 봤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음……. 네.”
“이사 가세요?”
“저는 아니고, 혜성이 독립시키려고요.”
“혜성이를요?”
한나가 휘둥그레졌다. 남은 햄버거를 모조리 입에 넣은 그녀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꼬물거리는 손이 포장지를 휴지 조각처럼 쪼그렸다.
“혜성이도 그러겠대요?”
“싫대요. 그래도 해야 한다고 설득 중이에요.”
“설득이 안 될 텐데.”
한나가 테이블에 대고 농구공처럼 종이 뭉치를 튕겼다. 통통 굴러가는 쪼가리를 빤히 응시하다가, 대뜸 고개를 들었다. 결연한 시선이 문성하에 고정됐다.
“그냥 혜성이하고 계속 같이 지내 주시면 안 돼요?”
문성하가 의아해했다.
“그렇게 얘기하시는 이유가 있어요?”
“그게 좀…….”
한나가 제 머리카락을 배배 꼬았다. 헤매던 시선이 저편에서 다가오는 주혜성에 꽂혔다. 한나의 얼굴이 다급히 들이밀어졌다. 초조함에 젖은 언어가 들렸다.
“쟤가 성격이 좀 까탈스러워서, 기분 안 좋으면 옆 사람 힘들게 하는 타입이거든요.”
“그거하고 무슨 상관인지…….”
“우리에게 상관있어요.”
한나가 한탄했다.
“자기 형하고 같이 못 지내게 되면, 직장 사람들이 엄청나게 피곤해질 거예요. 제가 장담할 수 있어요.”
부릅뜬 눈은 진심이었다. 문성하가 쥐고 있던 콜라 컵 안에서 얼음이 파사삭, 깨졌다. 듣고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동생은 산만하긴 해도, 성격이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
***
한나가 간 후 주혜성과 이십 분가량 더 매장에 있었다. 연이어 부동산 매물을 들이미는 문성하에 못 이겨 주혜성은 마지막 방문한 곳을 찍었다. 여기가 가장 낫다고 했다. 문성하는 고심에 잠겼다. 여기가 가장 낫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다만 그만큼 가격적 부담이 큰 곳이었다.
“보증금 조율이 순탄할지 모르겠는데…….”
매장 문을 열고 나서며 문성하가 중얼거렸다. 나란히 걷던 주혜성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되잖아.”
“너 일부러 여기 골랐지.”
문성하가 주혜성의 팔을 거머쥐었다. 외면한 주혜성이 뇌까렸다.
“백날 알아봐, 난 안 나갈 거니까.”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문성하가 팔뚝을 쿡 찔렀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주혜성이 쏘아붙였다.
“난 싫어. 분명히 싫다고 했어. 돈 나가는 문제 때문에 형도 지금 골치 아프잖아. 그렇다고 내가 원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소모적인 계획을 왜 짜? 진짜 피곤하게 군다, 너.”
문성하의 어깨가 굳었다. 마주쳐진 주혜성의 눈이 성난 우물 같았다. 입을 다신 문성하가 발을 뺐다. 주혜성의 팔에 걸려 있던 손이 풀렸다.
솔직히 맞는 말이라, 반박할 길이 없다.
“아무튼, 형이 독립하라 했으니 넌 그리하는 거야.”
수준 낮은 훈계를 던진 문성하가 등을 보였다. 저벅저벅 걸어가며 괜히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정확히 왜 이상한지는 알 수 없었다. 생각에 잠긴 발걸음이 점점 무뎌졌다. 아까 전 들은 말이 뒤늦게 번개처럼 뇌리를 후렸다. 솜털이 쭈뼛 섰다.
-진짜 피곤하게 군다, 너.
처음으로 반말을 들었는데, 미처 인지하지 못해 그냥 넘어가 버렸다.
“혜성아, 너.”
문성하의 몸이 돌아갔다. 동시에 뒤통수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쪽 오시면 안 돼요! 말을 알아듣기도 전에 길 잃은 발이 허공을 내리찍으며 푹, 빠졌다. 휘청거린 하체가 고꾸라졌다. 중심 잃은 몸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형!”
머리가 울릴 정도로 큰 외침이었다. 껌껌한 굴속으로 빠져들던 몸이 일순 멈췄다. 훅 들어온 팔뚝이 가슴을 꽉 조이고 있었다. 싸늘한 공중에 뜬 몸이 덜렁거렸다. 야, 이 새끼야! 라인 설치 안 하고 뭐 했어! 득달같은 남자 호통이 들렸다.
“씨발…….”
허덕이는 욕설과 함께 몸이 당겨졌다. 늘어진 몸이 질질 끌려 빠져나왔다. 주저앉은 문성하가 무감각한 손으로 바닥을 더듬었다. 깜빡이던 눈이 바로 옆에 뻥 뚫린 홀을 응시했다.
환풍구 철망에 문제가 생겼는지, 몇 개를 빼 교체 작업을 하고 있었다. 문성하가 무사한 걸 확인한 인부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문성하는 곁눈질로 까만 홀 안을 봤다. 휘잉, 바람 소리만 들릴 뿐 보이는 게 없었다. 그야말로 추락하면 끝인 구렁이었다.
“잘 좀 보고 다녀, 형.”
메마른 한 마디가 들렸다. 문성하의 얼굴이 돌아갔다. 바닥을 짚은 채 고개를 내린 주혜성이 보였다. 서슴거리던 문성하의 손이 올라갔다. 널따란 어깨를 쥐자 미동이 느껴졌다. 문성하가 말했다.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형은 괜찮아, 혜성아.”
주혜성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식은땀을 흘릴 뿐이었다. 조심조심 이동한 손이 주혜성의 턱을 잡았다. 성급하지 않게 끌어 올리며 낯을 살폈다. 미미하게 젖어 든 눈시울이 보였다. 문성하가 경악했다.
“혜성아! 뭐 이런 것 갖고 울어.”
“놔.”
분연한 손이 문성하의 손을 치웠다. 주춤한 문성하가 난색을 표했다. 걱정하게 한 건 물론 잘못이지만,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굴 일인가 싶었다.
마치 건드려선 안 되는 스위치를 눌린 사람 같았다.
“있잖아.”
한참 후에야 움직인 주혜성이 문성하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으스러뜨릴 기세로 끌어안고는, 문성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지나가던 사람 몇몇이 흠칫거렸다. 뭐야, 무슨 일 있어? 영화 찍어? 간헐적으로 떨리는 머리통이 어린아이 것처럼 작아 보였다. 문성하는 이끌리듯 그것을 어루만졌다. 진동이 거세져 갔다.
“난 형이…… 또 죽는 줄 알았어.”
타들어 가는 실낱처럼 나지막한 소리였다. 문성하의 속눈썹이 곤두섰다. 주혜성의 머리에 걸린 손이 주르르 미끄러졌다. 곧 툭 떨어졌다. 문성하를 안은 주혜성의 손아귀가 절박하게 웅크려졌다. 지켜보던 문성하의 눈이 먹빛으로 물들었다.
자신은 생각한 적도, 상상한 적도 없던 일이 주혜성에겐 있었다.
문성하는 언젠가, 죽은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