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37)

10.

「오전 11시 27분께 청담동에 위치한 위 아파트에 출입한 후 오후 4시 13분께 나왔습니다. 들어갈 때도 나올 때도 혼자였습니다.」

핸드폰에 찍힌 문자에는 한 고층 아파트를 들어갔다 나오는 문성하의 사진이 연달아 붙어 있었다. 말없이 보던 주혜성이 액정을 두드렸다.

「여기에 뭐가 있죠?」

답신은 일 분도 채 되지 않아 돌아왔다.

「문성하 씨가 근무하는 DF벤처스 현주원 대표의 자택이 해당 동에 있습니다.」

주혜성의 이마가 꿈틀거렸다. 또 현주원. 언젠가 문성하의 핸드폰에서 본 문자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

-「A/S 주문 왜 거부해? 나 만족시켜 줘야지.」

“A/S 해 주는 관계라.”

읊조리며 핸드폰을 껐다. 천천히 주머니에 넣는 주혜성을 근처의 권도재가 힐긋거렸다. 고개를 든 주혜성이 앞을 주시했다. 오도 가도 못한 채 눅눅한 침대에 걸터앉은 남자가 불안한 양 꼼짝달싹하고 있었다. 주혜성이 물었다.

“불편하신가요.”

“아니……. 아닙니다.”

주혜성의 양옆에 선 덩치들이 남자를 노려봤다. 사색이 된 남자가 발꿈치를 지르밟았다. 주혜성은 진품 여부를 감정하듯 남자를 살폈다. 잿빛 셔츠에 남색 면바지 차림. 남자는 구멍 난 양말을 신고 있었다. 은신하던 경기도 외곽의 모텔에서 막 공항으로 내빼려던 찰나 주혜성과 맞닥뜨린 상황이었다. 이전부터 주혜성이 써 오던 심부름 업체에서 그의 은신처를 찾아냈다.

“염지훈 대표님.”

주혜성이 불렀다. 염지훈이 반사적으로 등을 곧추세웠다.

“네……. 네.”

“그래서 손실을 얼마나 봤다고요?”

주혜성이 턱짓을 했다. 그가 아물거렸다.

“저기…… 그런데 제가 지금 그쪽 분이 누구신지를 잘 몰라서…….”

“지금 그런 게 중요합니까.”

주혜성이 인상을 썼다. 곁에 있던 덩치 하나가 늘어져 있던 몽둥이를 올려 세웠다. 깜짝한 염지훈이 자세를 고쳤다. 다급히 올라간 손이 아까 맞은 등짝을 주물렀다.

“30억 원…… 입니다.”

“보전한 금액이 하나도 없다고요.”

“네.”

“ICO7) 하나로 30억 원을 날립니까.”

“네…….”

염지훈의 풀이 죽었다. 주혜성이 기가 막히다는 양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푹 숙인 그의 정수리를 응시하며 제 머리를 쓸었다. 정말이지 지겹다. 자신만은 다를 것이라 믿어 가며 결말이 뻔한 ICO에 뛰어들어 주변까지 활활 타들어 가게 만드는 불나방들. 멍청하고 한심하다.

투자는 모래시계다. 시계 하단의 누군가가 부를 축적하는 동안 시계 상단의 누군가는 부를 잃는다. 시계가 뒤집히면, 상황은 전복된다. 그런 일의 반복이다. 주혜성은 블록체인을 만들어 그 기반으로 크립토 코인을 발행했다. 자신이 가상으로 만든 재화를 두고 시장에서 얼마나 많은 협잡질이 일어나고 있는지, 질릴 정도의 보고를 받아 왔다.

수시로 뒤집히는 모래시계를 갖고 노는 전문가는 너무나도 많았다. 전문가가 불을 지르면, 빛에 눈먼 곤충들이 날아들었고 그의 잔고를 채워 줄 자산을 재로 남긴 채 자멸했다. 염지훈은 타 버린 미물 중 하나였다.

시작은 ‘친한 대학 선배의 제안’. 매우 흔한 레퍼토리다.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공과 대학을 나온 염지훈의 선배가 베트남에서 블록체인 금융 플랫폼을 만들어, 이를 토대로 한 ICO를 계획했다. 그러면서 ICO 개시 전 염지훈에게 헐값에 투자할 기회를 주겠다 유혹했다.

대학 때 명석하기로 유명한 선배였던 데다 워낙 친한 사이였기에 염지훈은 의심도 않고 가능한 자금을 전부 투입했다. 보름 안에 절반은 바로 회수할 수 있다 들어 마음의 부담이 없었다고 했다.

문제의 블록체인 플랫폼은 주혜성도 알고 있었다. 개발팀은 이 플랫폼이 꽤 유명한 블록체인 기업과 손을 잡고 만든 것이고, 동남아 일부 금융사에 탑재될 예정이라며 대대적인 온라인 홍보를 벌였다.

한나에게 사실 여부를 파악시켰는데, 전부 허위 사실이라는 보고가 돌아왔다. 손잡았다는 블록체인 기업에는 자문 정도를 구했을 뿐이고 동남아 금융사와의 협약 사실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한나는 말했다. 사기인 것 같아. 주혜성은 동의하지도 않았다. 통산 33번째로 접한 사기 케이스였다.

대학 선배는 염지훈으로부터 자금을 받은 후 일주일 만에 잠적했다. 애초에 베트남에 있었고, 거기서 또 다른 국가로 이동하는 통에 추적하는 일이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염지훈의 자금에는 DF벤처스의 투자금을 포함한 일리노이스 운영 자금 대부분이 포함돼 있었다. 당장 직원들에 월급 주는 일조차 어려워진 염지훈은 파산 신청을 택했다. 그리고 채권자를 피해 해외로 도주할 계획을 세웠다.

“회사를 운영해서 재기할 생각을 하지 그랬습니까.”

주혜성이 훈수를 뒀다. 염지훈이 꾸물거렸다.

“일리노이스의 현재 사업 모델에는 한계가 명백합니다. 보다 제대로 된 수익 구조를 갖추기 위해서는 새 플랫폼과 서비스가 필요한데, 그러려면 막대한 자금 투입이 불가피하죠.”

“그런데 그 자금이 이제는 없다?”

“네. 자금이……. 딱 이번 달 직원들에게 용돈 줄 것밖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게 왜 그런 투자를 했습니까. ICO가 위험하다는 것 뻔히 알면서.”

“대학 신입생 때부터 친했던 선배라…….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염지훈이 수그렸다. 금방이라도 쪼그라들 듯 처연한 모양새였다. 주혜성은 냉하게 그를 훑어봤다. 컴퓨터만 만지작거리느라 세상 물정도 모르고 융통성도 없는 공대생 출신 창업가.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나락으로 떨어지기 쉬운 유형이다.

그러니 이 꼴을 당하지.

“나는 염 대표님께 돈 떼인 게 없는 사람입니다.”

주혜성이 몸을 굽었다. 갑자기 다가온 주혜성에 겁을 먹은 염지훈이 물러섰다. 주혜성은 딱딱하게 말을 이었다.

“다만 내 형이 그쪽에게 피해를 입었습니다.”

“형이라는 게…….”

“DF벤처스의 문성하 심사역 말입니다.”

“문 심사역님……!”

염지훈의 낯이 흙빛이 됐다. 자책하듯 머리카락을 쥐어뜯은 그가 한탄했다.

“안 그래도 문 심사역님께 너무나도 죄송해서……. 절반만이라도 빼라고 사전에 말씀을 드렸었는데. 솔직히 실제 드릴 돈은 없었지만, 위험을 감지하고 그렇게라도 했다 회사에 보고하면 문 심사역님 책임을 조금이나마 면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임시방편이군요.”

주혜성이 싸늘하게 말했다. 염지훈이 숙연해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죽일 놈이죠.”

한참이나 벌벌거리던 염지훈이 불현듯 일어섰다. 덩치들이 일제히 경계 태세를 갖췄다. 개의치 않은 염지훈이 밑에 둔 가방을 열어 안을 헤적거렸다. 이내 봉투 하나를 꺼내 주혜성의 손에 쥐여 줬다. 얼떨결에 받은 주혜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쇠 냄새 물씬 나는 오만 원 권이 한가득이었다.

“제 도피 자금 1000만 원입니다. 문 심사역님께 전달해 회사 장부에 올리도록 하세요. 일리노이스 투자 성과가 0원인 것보다야 1000만 원이라도 있는 게 낫잖습니까.”

“그쪽은 어떻게 하려고요.”

“당장 필리핀으로 갈 비행기값 정도는 어떻게든 구할 수 있습니다.”

“필리핀이요?”

“네. 누나하고 매형이 그쪽에 있거든요.”

염지훈의 어깨가 축 처졌다. 눈 밑이 다크서클투성이었다. 지켜보던 주혜성의 주머니가 문득 진동했다. 안에서 핸드폰을 뺀 주혜성이 아, 소리를 냈다. 형이었다.

“잠시만.”

등을 보인 주혜성이 발을 옮겼다. 모텔 방의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퀴퀴한 냄새가 훅 풍겼다. 복도 막다른 곳의 창문에 눈을 뒀다. 추적하게 쏟아지는 빗줄기가 비쳤다. 무지근한 손이 관자놀이를 짚었다. 침침하며 허름한 곳은 취향이 아니었다. 형만 아니었다면 올 일도 없었다.

“응. 형.”

통화 아이콘을 누르고, 최대한 밝게 형을 불렀다. 건너편에서 조심스러운 사과가 찾아들었다.

[문자에 바로 답 안 해서 미안해, 자고 있었거든.]

“집에서?”

[응. 집에서.]

목소리가 꼭 말라 죽은 이파리 같았다. 주혜성은 말없이 갸웃했다. 왜 거짓말을 할까 싶었다. 그냥 얘기해도 되는데. 낮에 회사 대표의 집에 갔었다고, 워낙 논의할 게 많아 연락할 여유가 없었다고. 그렇게 말하면 되는데.

왜 속이는 말을 할까. 말하기 어려운 이유를 가진 것처럼.

“지금도 몸이 안 좋아?”

은은하게 물었다. 형이 한숨을 쉬었다.

[어……. 그런 것 같아.]

“일리노이스 때문에?”

[그것도 있고.]

또 뭐?

[그냥…… 그냥.]

형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개운치 않은 비 내음이 형제의 헤아릴 수 없는 공백을 메웠다. 짧지 않은 침묵을 삼키고 난 문성하가 입을 열었다.

[회사도 안 좋은 것 같아서.]

“회사가 왜?”

[일리노이스가 파산한 마당에, 베이스터 투자 건도 못 따 오면.]

“못 따 오면.”

[형이…….]

탄식한 형이 덧붙였다.

[정말로 이 회사는 못 다닐 것 같아.]

주혜성의 한쪽 눈썹이 삐딱해졌다. 못 다닐 것 같다, 이 회사는. 그 한마디가 신기루처럼 뇌리를 맴돌았다. 언뜻 본 하늘이 일순 파열했다. 새하얀 번개가 번쩍이며 시퍼런 도화지에 사선을 그었다. 그때, 머릿속을 부유하던 상념이 먹구름에 숨어 있던 햇살처럼 솟구었다. 찢어진 하늘을 띄엄띄엄 붙여 가며 오롯해졌다. 주혜성의 눈초리가 휘었다.

형이 결국 궁지에 몰렸구나. 사랑스럽게도.

“메이슨. 잠깐만.”

돌연 저편에서 권도재가 나타났다. 가까워지는 발걸음에 근심이 어려 있었다. 입가에 핸드폰을 붙인 주혜성이 말했다.

“형. 잠시만 스피커 끌게. 기다리고 있어.”

형은 알았다는 양 잠자코 있었다. 스피커를 끈 주혜성이 몸을 틀었다.

“왜.”

“이 생쇼 언제까지 할 거야? 야, 우리 바빠. 서울 올라가자마자 해야 할 회의가 세 개나 있어.”

주혜성은 가만히 마주 보기만 했다. 권도재가 섟을 냈다.

“솔직히 어이도 없고. 염지훈 저 꼴 난 거, 네 탓도 있잖아. 다 빤히 아는 와중에 이게 무슨 연극…… 하. 진짜.”

권도재가 시근거렸다. 주혜성은 못 들은 척 눈길을 비꼈다. 창문 너머가 한층 자욱했다. 거세진 빗발 때문에 바깥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 근방이 거대한 빙무에 집어삼켜진 것만 같았다.

문성하가 겪고 있을 절망의 크기만큼이나 광대한 폭우였다.

“김일영이 염지훈한테 메일 보냈어.”

베이스터 미디어 데이를 준비하기 위해 내내 회사에 머물던 어느 날, 대표실로 들어온 권도재가 말했다. 하던 일을 멈춘 주혜성이 정면을 봤다. 다가온 권도재가 데스크에 노트북을 올렸다. 하얀 화면 안에서 어떤 이메일 화면이 눈에 띄었다.

「제목: 마지막 메일

내용: 자세한 상황은 설명하기 어렵고, 그저 미안하다. 네 월렛8) 확인해 봐. 베이스터 코인으로 3억 원 넣었어. 나머지 27억 원은 기회 되면 갚을게. 나 찾지 말고. 잘 지내라.」

“크립토 아비트리지9) 잘못해서 죄 날려 먹었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보네.”

권도재가 끌끌거렸다. 주혜성이 물었다.

“염지훈 쪽에서 수신했어?”

“아직.”

“이거 바로 삭제해. 깔끔하게.”

“그러면 뭐 해? 월렛 보면 알 텐데.”

“그것도 해킹해. 안 어렵잖아?”

주혜성의 고개가 비스듬해졌다. 권도재가 실눈을 떴다.

“야. 이건 진짜 아니야.”

“왜 아니야? 형은 시키는 것에 따르기나 해. 염지훈이 3억 원 돌려받아서 뭐 할 것 같아. 사업? 뭐, 그럴 수 있겠지만 내가 볼 땐 아니야. 백 퍼센트 크립토 아비트리지를 해. 원금을 복원해야 하니까.”

주혜성이 읊조렸다. 키보드에 올라간 권도재의 손가락이 곰작거렸다. 꽤나 뜸을 들인 그가 말했다.

“염지훈이 이 돈으로 투자를 할지 사업을 할지는 모르지만, 넌 지금 일리노이스 투자자인 네 형의 마지막 보루를 빼앗는 거야.”

“알아. 나도.”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네 형 좆되게 해서 네가 뭘 얻을 수 있는데?”

권도재가 쏘아붙였다. 주혜성이 나른하게 답했다.

“형에게 나만 남는 거.”

-당분간 내가 벌게. 많진 않아도, 한동안 두 사람 살기에는 충분할 거야. 그러니 형은 쉬어. 응?

그 비 오던 날, 주혜성을 붙들고 쏟아 내던 문성하의 하소연을 주혜성은 진작 알고 있었다. 우연과 필연이 겹친 결과였다. 사람과 사람은 얼기설기 연결돼 있어, 마음만 먹으면 누구의 사정이든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김일영. 베트남에 블록체인 금융 플랫폼을 만든다는 명목 아래 200억 원 가량의 ICO 자금을 모집한 인물. 주혜성은 그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지극히 사무적인 이유였다. 해당 자금은 베이스터 코인으로 모여졌다. 그것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베이스터를 만든 사람으로서 알 필요가 있었다.

결과는 너무나도 시시했다. 자금은 또 다른 크립토 코인 투자에 쓰였다. 김일영은 급등하는 코인을 대거 샀다가 조금 오르면 팔았고, 그 돈으로 또 다른 코인을 사고팔며 같은 짓거리를 반복했다. 하지만 안목이 너무나도 빈약해 결과적으로 손실하는 결과를 낳았다. 200억 원은 한 달 만에 15억 원이 됐다. 크립토 코인으로 벌어 크립토 코인으로 잃었다.

그 무렵 인터넷 커뮤니티는 ‘베트남 블록체인 금융 플랫폼 ICO는 사기다’라는 소식으로 들썩였다. 피해자가 너도나도 글을 올리며 김일영 추적에 나섰다. 주혜성은 김일영의 추후 행보가 궁금해 그의 이메일 계정을 해킹했다. 그리고 내역을 뒤지다 한 메일을 발견했다.

「제목: 형 잘 지내? 나 후배 (염)지훈이

내용: 생각나서 멜 보내. 반년 만에 연락하네. 베트남은 괜찮아? 크립토로 대박치면 천억 원씩 번다던데 여유 있으면 나도 끼워줘 ㅎㅎ 소액 아비트리지 하는데 수익이 걍 그러네.

일리노이스는 잘 돌아가고 있어. 여기 한국은 여행 플랫폼이 레드오션이야. 공급이 많지만 수요도 많아서 할 만해. 지난달에 DF벤처스에서 투자도 받았어. 담당 심사역이 착하고 잘생겼더라. 이름이 예전에 창업한다고 자퇴한 걔랑 이름이 같아 성하 ㅋㅋㅋ 성은 다르지만. 형도 걔 기억나? 지금은 뭐하고 사는지 모르겠네.

잡설만 한 것 같은데 결론은 연락 좀 하라구 ㅋㅋㅋ 크립토도 언제 나오는지 알려줘 나 투자에 관심 있음. 그럼 건강하길!」

언젠가 문성하가 여행 정보 플랫폼에 돈을 부었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 회사가 여기인가 보다. 속으로 생각한 주혜성이 다음 이메일 기록을 클릭했다. 김일영이 보낸 것이었다.

「제목: 지훈이 오랜만이다 ^^

내용: 회사 잘 된다니 기쁘다. 일리노이스가 잘 될 줄 알았어. DF벤처스면 아주 큰 곳인데~ 그런 데를 주주로 모시고 훌륭하다.

우리 플랫폼은 곧 나와. 막바지 작업 중이야. 베트남 은행 8곳하고 라오스, 미얀마 은행 등 20곳이 우리 파트너사가 될 거야. 현지 금융당국 고위직을 임원으로 모셨더니 협약 체결이 순조로워~ 천억 원은 말할 것도 없고 1조원도 금방일 것 같다. 농담 아니야.

바빠서 길게는 못 쓸 것 같아. 암튼 종종 연락하자 형도 간만에 네 소식 들어서 좋았다.

아, 그리고 우리 2분기에 ICO할 건데 프리세일 관심 있니? 5분의 1 가격으로 가능한데. 생각 있으면 답변 줘 ^^」

“사기꾼 새끼.”

픽, 웃은 주혜성이 나머지 메일을 둘러봤다. 이후의 상황은 예상대로였다. 염지훈은 3개월 후 김일영에게 베이스터 코인 30억 원어치를 보냈다. 자신의 전 재산이자 일리노이스의 전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김일영은 ICO만 하면 코인 가격은 5배 이상으로 치솟을 테니 걱정 말고 기다리라 했다. 그게 그의 마지막 메일이었다.

일말의 가책을 느껴 3억 원이나마 보내 주기 전까진 말이다.

“3억 원 없다고 염지훈이 죽진 않아. 일리노이스 망했다고 우리 형이 무너지는 것 아니고.”

주혜성이 중얼거렸다. 권도재가 미심쩍은 눈초리를 했다. 그를 힐끗한 주혜성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런 기회를 놓치면 나는 좀 죽고 싶겠지.”

주혜성이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

짙은 숨을 삼킨 권도재가 고개를 돌렸다. 노트북 위를 배회하던 손이 내려갔다. 이를 질근거린 그가 키보드를 두드렸다. 일 분 후 이메일이 삭제됐다. 십 분이 지나자 염지훈의 핫 월렛 속 3억 원도 사라졌다. 주혜성은 흡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비로소 퍼즐이 완성됐다.

형은 베이스터를 투자처로 잡지 못한다. 자신이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형의 족쇄인 일리노이스는 마지막 보루를 잃었다. 3억 원이면 소규모 여행 플랫폼이 새 출발을 하기에 충분한 비용이다. 이 기회마저 사라졌으니, 일리노이스는 이제 파산 말고 길이 없다.

베이스터도, 일리노이스도 얻지 못한 문성하는 DF벤처스에서 도태된다. 유일한 아이덴티티이자 밥벌이 수단이 증발하고, 이제 문성하에겐 주혜성만 남는다.

그러므로 주혜성만이 문성하의 안식처가 된다.

“그냥 하는 연극 아니야. 일단 들어가. 금방 따라갈게.”

주혜성이 손사래를 쳤다. 찌푸린 권도재가 돌아섰다. 다시 룸으로 향하는 그를 지켜보다, 손안의 핸드폰을 끌어 올렸다. 스피커 아이콘을 누른 주헤성이 입을 뗐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형.”

[아니야. 급한 일이었어?]

“조금. 이제 해결됐어.”

[다행이네.]

“계속 집에 있을 거지? 이따가 맛있는 것 사 갈까?”

주혜성이 다정하게 질문했다. 형이 바람 빠진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혜성이가 좋아하는 것 사 와.]

“아이스크림?”

[아직도 아이스크림이 좋아?]

“응.”

[사 와. 형이랑 먹자.]

“알았어. 금방 갈게. 집에서 봐, 형.”

통화는 주혜성이 먼저 끊었다. 점멸하는 액정을 주시하다가, 주머니에 넣고 발을 뻗었다. 저벅거리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문을 열고 룸으로 들어섰다. 염지훈은 여전히 침대 시트에 앉아 있었고, 두 심부름꾼이 그를 둘러싸며 감시하고 있었다. 보다 먼 치에 선 권도재는 이 상황이 그저 골치 아프다는 양 벽에다 옆머리를 비벼 대는 중이었다.

“1000만 원이라고 하셨죠.”

염지훈에게 다가간 주혜성이 옆에 놓인 봉투를 집어 들었다. 염지훈이 순순히 답했다.

“네.”

“이건 제가 받겠습니다.”

“그래요. 형님께 전달 부탁드립니다.”

“이제 염 대표님 수중에는 도피 자금이 없는 거네요.”

“네……? 네.”

부쩍 진지한 물음에 염지훈이 얼빠진 대꾸를 했다. 주혜성이 시선을 넘겼다.

“DZ.”

눈이 마주친 권도재가 퉁명스레 답했다.

“뭐.”

“내 월렛에서 베이스터 30억 원어치 보낼 준비해.”

권도재가 휘둥그레졌다.

“너 지금 뭐라고……!”

“염 대표님은 본인 월렛 준비하시고요.”

무시한 주혜성이 염지훈을 향해 손을 까딱했다. 어안이 벙벙해진 염지훈이 그 와중에 ‘월렛’ 소리는 알아들었는지 삐걱거리며 제 주머니를 뒤적였다. 안에서 핸드폰이 빠져나왔다. 덜덜거리는 손이 액정을 더듬거렸다. 반면 권도재는 우뚝 멈춰 있었다. 주혜성이 독촉했다.

“DZ. 빨리! 어차피 내 거잖아.”

“야. 난 도무지 이 상황에 대한 이해가…….”

“형. 모든 일에 반드시 이해가 필요해? 아닌 적이 훨씬 더 많았잖아. 우리는.”

주혜성이 미간을 구겼다. 하, 소리를 낸 권도재가 마지못해 구석으로 걸어갔다. 내려 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낸 후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 주혜성은 핫 월렛이 켜진 염지훈의 스마트폰을 가져왔다. 권도재의 무릎에 내려놓자, 한숨 쉰 그가 전송 작업에 들어갔다.

코인이 이동하는 걸 확인한 주혜성이 다시 염지훈의 앞으로 왔다. 염지훈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주혜성이 말했다.

“필리핀까지 가는 비용, 그곳에서의 체류 자금. 전부 이걸로 해결하세요.”

“이렇게 큰돈을……. 갑자기 왜.”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주혜성이 눈을 치떴다. 염지훈이 어깻죽지를 움츠렸다. 경직된 그의 등을 두드린 주혜성이 목소리를 깔았다.

“오늘 저와 만났다는 얘기, 어디에서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네……. 네.”

“사업도 하지 마시고요. 자격 없습니다.”

“네.”

“무엇보다, 향후 5년간 한국에 발도 붙이지 마십시오.”

주혜성의 어조가 냉랭해졌다. 마른침을 삼킨 염지훈이 눈동자를 끌어 올렸다. 멍청하기 그지없는 면상을 깔아 보며, 주혜성이 쐐기를 박았다.

“그쪽 낯짝 보면 우리 형 뒷목 잡고 쓰러질지도 모르니까, 한국에서 한동안 볼 일 없도록 알아서 잘하라고요. 씨발, 알았어요?”

염지훈의 얼굴에서 온갖 색이 달아났다. 돌처럼 굳은 턱을 꼼짝달싹한 그가 답했다.

“네. 알겠…… 알겠습니다.”

***

모텔 건물에서 나왔을 때 비는 그쳐 있었다. 주머니 안에서 담뱃갑을 찾았다. 한 대 꺼내 무는 주혜성을 살피다 권도재가 못 당하겠다는 투로 땅을 봤다. 잔뜩 앓는 목소리가 다가왔다.

“돌겠다, 야. 아무리 미안해도 그렇지 무슨 30억 원을 줘? 네 말대로 그때 3억 원 돌려받아 봤자 또 잃었을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돈지랄도 정도껏이지.”

“미안해서 준 것 아니야. 애초에 미안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어. 회사 자금을 사적으로 유용한 놈이야. 횡령 사범을 동정해야 할 이유가 없지. 30억은 순전히 형 때문에 나온 돈이야. 형하고 저 새끼가 서울에서 마주칠 일 만들고 싶지 않아. 내가 그 꼴을 보고 싶지 않다는 얘기야.”

“어차피 저 새끼 최소 십 년은 한국에 발 못 붙여. 채권자들이 가만히 있겠어? 지도 무서운 게 있으면 한국 못 들어온다고.”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

“난 진짜 이해가 안 간다. 뭐, 너라는 인간 자체가 자주 이해가 안 가긴 하지만. 형하고 관련해 저지르는 일들은 유독 이해가 안 가.”

권도재가 분연한 손가락질을 했다. 주혜성은 외면한 채 입에 고인 연기를 내뿜었다. 휘파람을 타고 흐른 연무가 젖은 수풀에 베일을 드리웠다. 권도재가 연신 지적했다.

“형에 대한 애착이 심해 그런 거라고 이해하는 것도 정도껏이야. 내가 지금 네 형 문제로 얼마나 많은 초과 근무를 하고 있는지 알아? 별 쓸데없는 연극 때문에 경기도까지 오고 말이야. 이 정도면 솔직히 정신병 의심해야 돼, 새끼야.”

“조금 관계가 질긴 형제 정도라고 생각하는데.”

“이게 어딜 봐서 형제야? 너 하는 짓거리 보면 형 가지고 딸을 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권도재가 포효했다. 곧 억지로 화를 삭이듯 식식거렸다. 묵묵하게 연기를 삼키고 난 주혜성이 허리를 짚었다. 방금 전 들은 얘기를 찬찬히 곱씹다, 권도재에 곁눈질을 했다. 심통 난 권도재가 노려봤다. 주혜성이 물었다.

“궁금한 것 있어.”

“뭐.”

“형 가지고 딸 치면 안 돼?”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짜증에 물들어 있던 권도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황망한 혼잣말이 들렸다.

“씨발……. 너 진짜 미쳤어?”

주혜성은 그저 낯을 찌푸렸다. 그게 저렇게까지 질색할 일인가,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주혜성은 살면서 타인과 성적인 행위를 한 일이 없다. 타인을 떠올리며 성적인 욕구를 가진 일 역시 없다.

형은 유일한 예외였다. 태어나 지금까지, 주혜성으로 하여금 색욕 비슷한 걸 부추긴 건 오로지 형뿐이었다. 주혜성은 그게 전혀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애초에 형 말고는 감정을 느낀 사람이 없었다. 애정도, 증오도. 슬픔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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