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멍하던 정신이 확 들렸다. 허겁지겁 내뻗은 손이 눈앞의 손목을 잡았다. 순순히 내 준 주혜성이 물끄러미 문성하를 봤다. 문성하가 기함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물감을 들이부은 것처럼 시뻘건 손에 그만 기가 찼다. 주혜성이 갑자기 어깨를 움츠렸다. 굴러가는 눈동자가 묘하게 처량했다. 어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형이 싫다고만 하니까,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됐어. 넌 가만히 있어.”
으름장을 놓은 문성하가 무릎걸음으로 시트에서 벗어났다. 바닥에 발을 디디자마자 중심 잃은 몸이 휘청거렸다. 주혜성이 잽싸게 다른 손으로 문성하의 허리를 받쳤다. 돌아본 문성하가 경고했다.
“넌 가만히 있으라 했지.”
“뭐 하려고, 형.”
“정신 사납게 하면 화낼 거야. 하, 진짜…… 여긴 어디야.”
빙글빙글 돌아가는 머리를 억지로 가누며 협탁 위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호텔이라는 것도 알겠고, 심지어 매우 좋은 룸이라는 것도 알겠다. 그런데 어쩌다 자신이 여기에 있고, 주혜성은 왜 옆에 있는지를 떠올리려면 시간이 필요할 듯싶었다. 다만 지금 당장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동생이 다쳤다.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다.
[Good evening. This is Front desk. May I help you?]
“여기가……. 그.”
방황하던 눈길이 전화기 상단에 머물렀다. ‘2101’이라고 적힌 게 보였다. 문성하가 빠르게 말했다.
“2101호입니다. 손을 다쳐서 그런데, 간단히 응급 처치 할 용품 좀 부탁드릴게요.”
[많이 다치셨나요?]
“유리에 찔린 정도입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챙겨 올려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문성하가 몸을 틀었다. 침대 시트에 걸터앉은 주혜성이 피투성이 손을 팔랑이고 있었다. 아픔 때문인지 표정이 침울했다. 문성하가 훈계했다.
“엄살 부리지 마. 네가 자초한 거잖아.”
“너무해. 형.”
“손 흔들지 말고. 출혈 심해져.”
서벅서벅 걸어가 주혜성의 앞에 섰다. 주혜성의 발밑이며 협탁 위에 자잘한 유리 알갱이가 그득했다. 인상 쓴 문성하가 티슈 케이스에서 몇 장의 휴지를 뽑았다. 마냥 뒀다간 동생이 다칠 것 같았다.
“발 들어 봐.”
몸을 수그려 굽히고는 주혜성의 다리부터 치웠다. 주혜성의 발이 시트 위에 올라왔다. 바닥의 유리 조각을 삭삭 쓸어 모으는데, 괜한 욕설이 나왔다. 보드라운 카펫 사이사이 박혀 있는 것들이 쉬이 빠지지 않는다. 일단 눈에 띄는 것을 모아 휴지로 감쌌다. 절대 이쪽에는 주혜성의 발이 닿지 않도록 해야겠다. 산만하게 서성거리다 또 다친다.
얼추 유리를 치우고, 감싼 휴지를 휴지통에 처박았다. 이어 또 다른 휴지를 뽑아 협탁 위 유리 조각을 쓸어 모으기 시작했다. 바닥이 평편해 카펫에서 하는 것보다 수월했다. 어느 한 조각 이탈하지 않게끔 꽁꽁 휴지로 뭉쳐 가던 문성하가 젖힌 커튼 틈을 힐긋했다.
새까맣게 물든 하늘 밑으로 제각기 빛을 발하는 고층 빌딩과 대로 위 차들이 보였다. 중앙에는 널따란 광장이 있다. 너무나도 눈에 익은 풍경이었다. 문성하의 고개가 삐뚜름해졌다. 얼떨떨한 혼잣말이 나왔다.
“설마 베이스터 행사한 호텔이야? 여기.”
똑똑. 룸 문이 두드려졌다. 문성하와 주혜성이 동시에 입구를 봤다. 주혜성이 말했다. 들어와요. 문이 열리더니, 한 남자와 정장 차림 호텔 직원이 들어왔다. 직원의 손에서 구급함을 뺀 남자가 지시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만 가 보세요.”
직원이 상체를 숙였다.
“네. 대표님.”
뒷걸음질 친 직원이 물러났다. 문을 닫은 남자가 문성하와 주혜성을 향해 바로 섰다. 문성하의 아랫입술이 절로 떨어졌다. 소스라치는 질문이 나왔다.
“권도재 대표님?”
겸연쩍게 웃은 권도재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예의 바른 언어가 찾아들었다.
“좀 괜찮아지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아까 행사장에서 쓰러지신 걸 보고, 우리도 놀라서…….”
“죄송합니다. 제가 심려를 끼쳤네요.”
“아닙니다. 아예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업계 지인 지간인데 이 정도는 해 드려야죠. 아, 비용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우리 쪽에서 알아서 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걸…….”
문성하가 난처해했다. 다소 부담되는 호의이긴 했다. 어떻게 봐도 여긴 스위트룸인데. 입을 다신 권도재의 시선이 흘러갔다. 따라서 눈길을 옮긴 문성하와 주혜성의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시트가 출렁였다. 전류라도 맞은 양 몸을 일으킨 주혜성이 신속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짜고짜 권도재의 손을 잡은 그가 눈매를 접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대표님. 우리 형 때문에 이렇게까지……. 베이스터가 이 정도로 훌륭한 회사인 줄 몰랐습니다.”
권도재의 입매가 꿈틀거렸다. 문성하가 잘못 본 것인지, 미미하게 이를 갈고 난 그가 심호흡을 했다. 곧 문성하를 보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는 마땅한 성의죠. 부담 갖지 말고 편히 쓰십시오. 요청하신 구급함은 여기에 두고 가겠습니다. 동생분 어서 치료해 드려야겠네요. 피를 워낙 흘려서.”
“혜성이를 아세요?”
문성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춤했던 권도재가 도리질을 쳤다.
“아뇨. 방금 전 이쪽 분께서 문 심사역님을 본인 형이라고 하기에 그런 줄 알고…….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혹 필요한 것 있으면 한나 이사 쪽으로 연락 주시고요.”
“아, 네……. 감사합니다.”
급하게 입구를 향하는 권도재를 향해 문성하가 공손히 인사했다.
“또 뵙겠습니다.”
문을 연 권도재가 부드럽게 응수했다.
“어서 쾌유하십시오.”
문이 닫혔다. 잠잠한 문을 살핀 문성하가 발을 뻗었다. 권도재가 두고 간 구급함을 챙겨 와, 주혜성의 앞에 섰다. 어깨를 밀자 움찔했던 주혜성이 침대 위에 머뭇머뭇 안착했다. 시트 위에 무릎을 디딘 문성하가 주혜성의 곁에 몸을 붙였다. 구급함 안에서 연고를 꺼내고, 뚜껑을 열어 하얀 점액을 쭉 짜내며 중얼거렸다.
“엄청 싸가지 없는 애들인 줄 알았는데, 아주 그렇지도 않네.”
약을 묻힌 검지를 얼추 피를 씻어 낸 주혜성의 손에 갖다 붙였다. 살살 약을 바르는 문성하를 보며 주혜성이 물었다.
“베이스터 싸가지 없대?”
“응.”
“누가.”
“업계에서.”
“그래?”
“어. 근데 혜성아.”
아직도 벌건 살에 치덕치덕 약을 묻히고 난 문성하가 고개를 들었다. 마주 본 주혜성이 갸웃했다.
“응. 형.”
“너 베이스터 알아?”
“저번에 형이 얘기했잖아.”
“그래서 베이스터에 관심이 생겼어?”
“뭐……. 조금?”
“오늘 행사장에는 왜 왔는데.”
“어……?”
주혜성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문성하의 어조가 심각해졌다.
“솔직하게 얘기해. 혜성아.”
주혜성은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주혜성을 보며 날숨을 내쉰 문성하가 구급함 안에서 거즈를 꺼냈다. 약과 피가 엉겨 있는 손에다 둘둘 천을 둘러 가며, 달래듯 읊조렸다.
“그냥 솔직히 얘기해. 화 안 낼 테니까.”
꼿꼿한 속눈썹이 주혜성 쪽으로 곤두섰다. 주혜성의 입이 더듬거렸다. 문성하는 섬세하게 거즈를 감으며 그를 관찰했다. 화를 안 낸다는 건 거짓말이다. 자신을 속였는데, 그냥 넘어갈 수야 없다. 아주 단단히 잘못된 걸 고쳐 줄 셈이었다.
“그……. 실은.”
주혜성이 운을 뗐다. 피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즈를 감고 난 문성하가 유심히 그를 주시했다. 주혜성이 마지막까지 난색을 표했다.
“아니,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얘기하는 건 좀.”
“너 베이스터 코인 샀지?”
문성하가 쏘아붙였다. 주혜성의 이맛살이 찡그려졌다. 문성하에게 잡혀 있던 손이 툭, 떨어져 시트에 내려앉았다. 문성하가 채근했다.
“샀어, 안 샀어.”
“그게 갑자기 왜…….”
“형한테서 베이스터가 뜨는 회사라는 얘기를 듣고 거기 코인 산 것 아니냐고. 그래서 오늘 행사장에도 온 거잖아. 어?”
“그……. 뭐.”
주혜성의 입이 연신 달싹였다. 곧 체념한 듯 뇌까렸다.
“어. 맞아.”
“그런 걸 왜 사? 위험한 것 뻔히 알면서! 형은 크립토 코인 투자에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어. 펀더멘털도 실증도 없잖아. 그리고, 그런 걸 하고 싶으면 형한테 얘기를 했어야지. 왜 알지도 못하는 분야에 함부로 돈을 붓고…….”
“형.”
고개 숙인 주혜성이 얼핏 실소를 터뜨렸다. 어딘가 흡족한 웃음이었다. 기다랗고 수려한 눈매가 초승달을 그릴 정도로 키들거린 주혜성이 늘어져 있던 손을 올려 문성하의 볼을 눌렀다. 다정한 한 마디가 다가왔다.
“얼마 안 했어. 용돈벌이로 한 거야. 그러니까 화내지 마.”
“얼마나 했는데.”
“나중에 알려 줄게. 일단 나 이거 마저 해 줘. 아파 죽겠어.”
“아파?”
아프다는 말에 놀란 문성하가 거즈를 부여잡았다. 느슨해진 천을 꽉꽉 다잡으며 동생의 손 위에 견고한 매듭을 만들었다. 집중한 문성하를 보며 주혜성이 빙글거렸다.
“이제는 형이 좀 형 같다.”
“아까는 나 안 같았어?”
“응. 다른 사람 같았어. 막, 뭐더라. 염지훈? 그 사람 이름 말하면서 사경을 헤매듯 굴고…….”
“아직도 속은 그래. 염지훈 빨리 해결해야 하는데. 아예 밤 되기 전에 어서 움직여야지.”
“여기서 나가려고?”
“이거 다하면. 너는 남아서 쉬어. 비싼 곳인데, 아깝잖아. 형은 나가서 염지훈하고 연락할 방도 찾아야 해.”
“진짜……? 나는 싫은데.”
문성하에게서 벗어난 손이 시트를 짚었다. 하얀 이불을 만지작거린 주혜성이 울적해했다.
“나는 형하고 이렇게 좋은 데에서 둘이 있는 게 처음이라, 더 있고 싶은데.”
“혜성아. 투정 부리지 마.”
“우리 일주일 만에 만나는 거잖아. 형은 나 안 보고 싶었어?”
부쩍 진지해진 표정으로, 주혜성이 얼굴을 보였다. 문성하의 턱이 덜컥거렸다. 얼굴이 공연히 홧홧해 왔다. 일주일 내내 묵혀 둔 욕망이 강제로 끄집어내진 것만 같았다. 너무도 생소해 인정하기 싫고, 드러내는 건 더더욱 피하게 되는 그런 감정.
문성하는 일주일 동안 실낱같은 수면을 취할 때마다 주혜성의 꿈을 꿨다. 그렇게나마 보고 싶어, 무의식 속에서 그를 찾았다. 사람을 그렇게까지 그리워해 본 게 처음이었다.
그래서 실은 이 순간도 꿈같았다.
“혜성아.”
“자고 가자. 형.”
문성하의 팔이 당겨졌다. 자신의 코앞까지 얼굴을 끌어온 주혜성이 속삭였다.
“난 형하고 그러고 싶어.”
그가 낯을 굳혔다.
“형은?”
문성하의 입이 오므라들었다.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현실은 꿈보다 완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