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일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세명그룹 산하에는 공식적인 벤처 투자 기업이 없습니다. 회장님께서 ‘그쪽은 우리가 건드릴 영역이 아니다’라고 누누이 얘기한 바 있어, 일부러 그쪽 시장에서 빠져 온 거죠.”
흐트러지는 연기 틈으로 손깍지를 낀 김연종 세명전자 부사장이 보였다. 그의 얘기는 정장 바지 밑단까지 계산해 입은 듯한 옷차림만큼이나 재미가 없었다. 고개를 튼 주혜성이 심드렁하게 연기를 삼켰다.
옆에 있던 한나가 테이블 밑에서 주혜성의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좀 집중하라는 뜻이었다. 찌푸리는 기색도 않은 주혜성이 빈 종이컵에다 재를 떨었다. 하얀 이물질이 눈처럼 흩날렸다. 보고 있자니 아까의 상황이 떠올랐다. 쨍한 조명 밑으로 눈발처럼 날리는 먼지가 형형하고, 그 아래에는. 주혜성의 손목에 문득 핏대가 섰다.
아무래도 이 이상 여기서 시간 낭비를 하면 안 될 듯하다.
“다만 제 사촌인 김인아 대표……. 즉, 세명그룹 2세 라인인 김태중 세명유통 회장의 막내딸이 벤처 캐피탈인 하이넥창업투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통상 세명그룹 쪽에서 투자 건이 발생했다 하면, 높은 확률로 하이넥에서 진행하는 겁니다.”
김연종이 등을 곧추세웠다. 손가락에 끼운 담배를 만지작거린 주혜성이 그를 마주 봤다. 국내 최대 기업 집단의 3세라기에 뭐 대단한 것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막상 만나 보니 심심하기만 하다. 무엇보다 그는 블록체인 기술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가 주혜성에게 하는 얘기는 모두 밑에서 요약해 보고받은 게 분명한, 교과서적인 것뿐이었다. 그저 그런 장사꾼. 주혜성이 가장 싫어하는 부류다.
“그런 이유로 제가 주 대표님……. 대표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죠? 실질적인 대표님이시니. 아무튼 주 대표님께 제안하고 싶은 건.”
“빨리 얘기하세요. 피차 시간 없잖습니까.”
주혜성이 딱딱하게 받아쳤다. 한나가 미미하게 인상을 썼다. 적당히 하라는 투였다. 개의치 않은 김연종이 입을 뗐다.
“베이스터 코리아 지분 20%가 국내 캐시로 채워진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해당 지분 전체를 하이넥에서 운용하게끔…….”
“하이넥을 이끄는 김인아 CEO는 어떤 분입니까.”
말을 끊은 주혜성이 질문했다. 김연종이 애매하게 웃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아주 훌륭한 CEO입니다. 아이비리그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기술 얘기가 먼저 나오지 않는 걸 보니, 이쪽 산업 커리어가 딱히 없는 모양이네요.”
“주 대표님. 그 말은 맞습니다만, 김인아 대표는 국내 투자업계에서 누구보다 이해가 빠른…….”
“베이스터와 세명전자의 인연을 고려해 5% 드리겠습니다. 그 이상은 어렵습니다.”
주혜성이 종이컵 안에 꽁초를 처박았다. 치익, 불씨가 꺼졌다. 차갑게 못 박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미 세명전자는 베이스터 플랫폼을 1차적으로 독점한 기업입니다. 협약에 따라 세명전자의 많은 B2B, B2C 영역에 베이스터가 맞춤형 플랫폼을 제공할 거고, 이건 세계 어디에서도 접하지 못한 유일무이한 혁신이 될 겁니다. 이것만으로 세명은 향후 5년간 1조 원이 넘는 시장 이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욕심은 여기까지만 부리는 걸로 하시죠.”
“주 대표님.”
“베이스터 못 잡으면 난처해진다며 먼저 읍소한 건 부사장님이십니다. 우리에게는 글로벌 1위 IT 기업이나 해운기업과 협업할 기회도 충분히 있었습니다. 부사장님께서 잘 아시다시피요. 그럼에도 우리는 세명을 택했습니다. 이게 얼마나 큰 기회를 드린 것인지, 부사장님도 모르지 않을 겁니다.”
김연종이 목을 꿀꺽였다. 주혜성이 김연종을 노려봤다.
“저는 소위 재벌가로 불리는 국내 대기업 집단의 복잡한 후계 구도를 잘 모릅니다. 관심도 없고요. 다만 세명그룹 안에 부사장님을 포함해 17명의 3세들이 있고, 이들이 조금이라도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과 로비를 일삼고 있다는 건 대충이나마 압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이스터는 김 부사장님께 굉장히 중요한 발판을 마련해 드린 겁니다. ‘베이스터 플랫폼을 발굴한 최초의 기업인’이라는 타이틀은, 수조 원을 사도 얻을 수 없는 이름이거든요.”
주혜성이 고개를 까딱했다.
“그러니 여기까지만 하는 게 서로에게 좋겠습니다.”
주혜성이 몸을 일으켰다. 김연종의 뒤에 있던 비서가 대놓고 낯을 찌푸렸다. 무시하고 걸어가는 주혜성의 곁에서 한나가 억지웃음을 지었다. 죄송해요, 메이슨이 지금 컨디션이 안 좋아서……. 제가 조금 이따 연락드릴게요. 정말로 죄송해요. 부사장님!
주혜성이 신경질적으로 룸 문을 열어젖혔다. 고급스러운 호텔 복도가 훤히 드러났다. 이 층 전부가 로열 스위트룸이었다.
“너 진짜 죽고 싶어?”
문을 닫고 다가온 한나가 으름장을 놓았다. 주혜성은 들은 적도 없다는 양손부터 뻗었다.
“나 향수.”
이를 간 한나가 마지못해 제 파우치를 열었다. 안에서 작은 병 하나가 나왔다. 주혜성이 항시 뿌리는 향수였다. 목과 소매에 액을 뿌려 준 한나가 일갈했다.
“김연종 대표한테 이따가 전화라도 해. 너보다 열 살은 많은 사람이야. 세명그룹 3세 중에서 넘버 1, 2를 다투는 주요 인물이고.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야 할 것 아니야. 어?”
“일리노이스 알아봤어?”
재차 묵살한 주혜성이 물었다. 바닥에 발을 탕, 구른 한나가 졌다는 양 답했다.
“사람 섭외해 알아보는 중이야. 일단 역삼동 본사 사무실은 빼고 있대.”
“유지할 돈이 없으면 알아서 나가야지. 회사는 됐고, 거기 대표 염지훈만 찾아. 아직 해외로 안 나간 것 맞지?”
“알아본 바로는 그래.”
“최대한 빨리 찾아. 그쪽에서 내빼기 전에.”
주혜성이 확고히 지시했다. 한나는 더 이상 화도 내지 않았다.
“확실한 업체야. 적어도 사흘 안에 결과 나와. 너무 조급해하지 마.”
“사흘 안에 안 나오면 다른 곳 불러서 그 업체 통째로 갈아 버릴 거라고 얘기해 둬. 이건 진심이야.”
주혜성이 성큼성큼 걸었다. 뒤따라오던 한나가 볼멘소리를 했다.
“너 진짜 한가하다. 지금이 이럴 때야?”
“왜 이럴 때가 아니야? 그 새끼 때문에 지금 내 형이 앓아누웠는데.”
가장 구석에 있는 스위트룸 문 앞에 선 주혜성이 문득 한나를 돌아봤다. 착 가라앉힌 질문이 나왔다.
“나 담배 냄새 나?”
한나가 혀를 찼다.
“세 시간 단위로 향수 뿌리는 애한테서 무슨 냄새가 나겠어? 안 나. 미친놈아.”
주혜성이 주억거렸다.
“다행이네.”
문을 두드렸다. 약간의 시간을 두고 철컥, 소리가 났다. 빠끔히 얼굴을 내민 건 권도재였다.
“아직 자고 있어.”
한나를 대기시킨 주혜성이 안으로 몸을 들였다. 함께 걸어간 권도재가 안쪽을 가리켰다. 커다란 침대 위에서 이불에 파묻힌 형이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아까 의사 왔다 갔는데, 영양실조에 과로가 겹쳤대. 수액 맞혀 놓고 갔어.”
“계속 잤어?”
“중간에 아주 잠깐 깼었어. 알아들을 수 없는 헛소리만 하다 금방 정신 잃었지만. 아무튼 심각한 상황은 아니야. 걱정할 것 없어.”
“그래. 이제 조용히.”
문성하의 근처까지 와 주저리주저리 말하는 권도재의 입을 막았다. 혹여나 형이 깰까 싶어, 조심조심 발을 옮기며 침대맡에 섰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권도재를 힐끔한 주혜성이 지극히 낮은 톤으로 말했다.
“밖에 있는 한나하고 같이 남은 일 좀 처리해 줘. 김연종 부사장이 아직 자리를 안 떴어.”
“거기서 얼마 달래?”
“그건 중요치 않아. 거기서 뭐라 하든, 우리는 무조건 5%만 주는 거야.”
“김연종이 그걸로 만족하겠어? 거기서도 큰맘 먹고 우리하고 손잡은 거…….”
“목소리 좀 낮춰. 형 깨겠다.”
주혜성이 입에 손가락을 댔다. 권도재가 학을 뗐다.
“야, 진짜……. 누가 보면 너희 형 죽을병 걸린 줄 알겠다. 아까 못 들었어? 과로라고. 과로 몰라? 오버워크!”
“그것도 그거고, 형이 우리가 하는 얘기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진짜 놀고 있다. 이게 뭐 하는 짓거리야? 그냥 너희 형 깨우고 얘기하지 그래. 네가 메이슨이라고.”
“DZ. 이럴 거야?”
주혜성이 정색했다. 허리를 짚은 권도재가 들숨을 삼켰다.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됐다. 솔직히 보는 입장에서 되게 웃긴 상황인 건 알지? 나로서는 왜 이래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가. 심지어 네 형 이렇게 된 것에는 네 책임도…….”
“형. 나가.”
주혜성이 경고하듯 등을 보였다. 권도재가 개운치 않은 호흡을 흘렸다. 휙 돌아선 그가 투덜거렸다.
“다아 내가 잘못했다, 씨발……. 좆같은 CEO 모시는 내 잘못이다. 어?”
입구 앞에 선 그가 문을 열어젖혔다. 거칠게 닫으려다가, 주혜성의 눈치를 보고는 말미에서야 소심해졌다. 아주 작은 마찰음만 남기며 문이 닫혔다. 주혜성은 시트에 몸을 앉힌 채 색색거리는 형을 내려다봤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은 생각보다 초췌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묘한 청초함이 비쳤다.
손을 내밀어 볼을 만졌다. 말랑한 살을 타고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구름을 만져 본 적은 없지만, 막연히 상상되는 그 경험을 닮은 듯한 감촉이었다. 주혜성은 되새김질하듯 이 감각을 음미했다. 곤두서 있던 신경이 스멀스멀 가라앉아 갔다.
“정말로 피곤한 사람이네.”
얼굴에서 거둔 손을 올렸다. 침대 헤드에 팔꿈치를 붙인 채 턱을 괴었다. 형을 감상하기 편한 자세가 됐다. 뒤척이던 형이 아이처럼 시트를 긁었다. 받치고 있던 머리가 무거워졌다. 주혜성의 혀가 꺼부러졌다.
“일주일 집 비웠다고, 그 새에 이 사달을 내면 어떻게 해.”
언짢은 혼잣말을 하며 눈을 깔았다. 비좁아진 시야에서 형은 잔물진 연못이 됐다. 턱을 괸 손아귀가 굼틀거렸다. 까물거리는 피사체를 곱씹으며, 주혜성은 생각했다. 정말이지 피곤하다. 어려워서 피곤하다.
이 사람은 도무지 예측이 안 된다.
이런 식이면 계획은 제자리걸음일 뿐이라고, 일주일 전 주혜성은 생각했다. 그네에 앉아 있는 형은 모순덩어리였다. 자신을 12세로 취급하면서 정작 12세처럼 굴면 그래선 안 된다며 부르댄다. 그렇다고 22세처럼 굴면 처음 보는 남자를 접한 표정을 하며 낯설어한다. 주혜성을 형제로 생각하면서 한편으론 거리를 둔다. 그의 그네는 가까워졌다가도 금세 멀어졌다. 두 사람을 잇는 인력은 흐물흐물한 노끈 같았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시간을 갖기로 했다. 마침 베이스터 미디어 데이 준비 기간이라 핑계는 충분했다. 일주일간 형에게서 떨어져 일에 집중했다. 가장 큰 고민거리가 보이지 않으니 속은 편했다. 그러면서도 불안했다. 무려 일주일이었다. 만난 지 두 달인데, 그중 8분의 1이 공백이 됐다. 형이 자신을 잊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래, 처음부터 또 시작하자. 어차피 뚜렷한 성과도 없었다. 형제 말고 다른 이름을 준비해. 0에서 다시 출발하자.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형과의 재회를 준비했다. 그것이 행사장이 될 줄은 몰랐지만. 주혜성의 계획대로라면 본래 재회 시점은 오늘 저녁이었다. 미약하게나마 틀어진 일정, 그 각도만큼이나 재회한 형에게선 예상치 못한 반응이 나왔다.
-혜성아.
기절해 가던 그가 손을 뻗었다. 주혜성의 얼굴을 무작정을 덮은 그가 미소를 지었다. 우련한 속삭임이 귀를 옭맸다.
-보고 싶었어.
0은 0이 아니었다.
재차 내려간 손이 문성하의 이마를 짚었다. 으음. 속눈썹을 달막인 문성하가 우물거렸다. 이내 투정하는 것처럼 시트에다 얼굴을 비볐다. 물결처럼 풀어지는 낯이 평온해 보였다. 이 손길이 주혜성의 것임을 아는 것 같았다.
“내가 좀 익숙해졌나.”
주혜성이 읊조렸다. 손가락이 문성하의 눈꼬리를 길게 쓸었다. 생각에 잠긴 머리가 갸우뚱거렸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익숙해하는 거지. 형제? 타인?
형의 감정은 정확히 어떤 형태지.
“염지훈……!”
불현듯 시트가 덜컹였다. 번쩍 눈을 뜬 문성하가 부리나케 몸을 일으켰다. 덩달아 놀란 주혜성이 문성하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이윽고 급하게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형. 괜찮아?”
“여기가 어디……. 아니, 됐고. 나 핸드폰, 핸드폰 좀……. 염, 염지훈 통화해야 해…….”
잠에서 갓 깬 문성하는 완전한 패닉 상태였다. 자신이 왜 처음 보는 공간에 있는지, 왜 제 앞에 주혜성이 있는지는 중요치도 않아 보였다. 문제의 일리노이스, 그리고 염지훈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는 모양이었다. 잠자코 응시하던 주혜성이 문성하의 팔뚝을 잡아끌었다. 넋 놓은 문성하가 이끌려 왔다. 자신의 가슴팍에 얼굴을 붙여 등을 다독인 주혜성이 타일렀다.
“형. 일단 안정부터 취하자. 상태가 안 좋아.”
“혜성아, 형 핸드폰 줘! 어디에 있어. 응?”
이리저리 살피던 문성하가 기어코 발견했는지 협탁 쪽으로 팔을 뻗었다. 보다 빠른 속도로 나아간 주혜성의 손이 먼저 핸드폰을 챘다. 곧 문성하가 잡을 수 없도록 높이 쳐올렸다. 문성하가 악을 썼다.
“주혜성! 뭐 하는 짓이야.”
“누워. 형. 지금 핸드폰 신경 쓸 때가 아니야.”
“혜성아. 너 진짜 이럴……!”
득달같이 쏟아 대던 문성하의 말이 멎었다. 자못 쌀쌀하게 내려다보던 주혜성이 핸드폰 쥔 손을 내리찍은 탓이었다. 협탁에 올라와 있던 물컵이 엎어지며 쨍그랑, 소리를 냈다. 산산이 박살 난 유리 파편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문성하의 동공이 확장됐다. 피가 철철 흐르는 제 손과 깨진 핸드폰 액정을 번갈아 본 주혜성이 문성하를 힐끔했다. 조금조금 정신을 차려 가는 형을 눈에 담은 채, 또박또박 말했다.
“나 다쳤어, 형. 좀 봐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