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시험하는 사람들
6.
“베이스터 만났다며?”
딱, 딱, 딱. 눈앞의 데스크에서 일정한 만년필 마찰음이 들렸다. 벌이라도 서는 것처럼 양손을 뒤로 한 채 있던 문성하가 답했다.
“예. 권도재 대표 만났습니다.”
“결과는 안 좋았던 것 같네.”
고개를 젖힌 현주원이 담배 끼운 손가락을 들었다. 입술 틈에 밀어 넣어 한 모금 삼키고는 자욱한 연기를 흩뿌렸다. 문성하는 기침할 뻔한 것을 익숙하게 참았다. 대신 희미하게 눈살을 일그러뜨렸다.
폐부 깊숙한 지점이 쓰라리게 울렁였다. 문성하는 바쁜 심호흡을 했다. 헐떡이던 숨이 가까스로 가라앉혀졌다. 안정한 문성하가 정자세를 유지했다. 군대에 있을 때 선임의 권유로 짧게 피운 적이 있지만, 역시 담배는 질색이었다.
아버지는 문성하와 ‘그 일’을 벌일 때마다 담배를 피웠다.
“한 번 만나서 바로 결과가 나올 정도로 이 바닥이 쉬우면, 제가 VC 차렸겠죠.”
문성하가 예사로이 말했다. 현주원이 저소했다.
“싸가지 없는 거 보니 오늘 컨디션은 아주 좋은 모양이네.”
“고작 그것 때문에 저 부르신 겁니까.”
“뭐, 겸사겸사.”
현주원이 데스크 위의 페이퍼 하나를 슥 밀었다. 문성하의 눈길이 내려갔다. 한 인터넷 기사를 인쇄한 것이었다. 상단에 ‘베이스터, 물류 트래킹 플랫폼 최초 공개한다’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문 심사역도 알지? 베이스터가 기업하고 언론 대상으로 플랫폼 시연회 하는 거.”
현주원이 턱짓을 했다. 문성하가 바로 대꾸했다.
“네. 오전에 김 상무님께 보고드린 내용입니다.”
“네가 가. 여기.”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한 지시였다. 움찔한 문성하가 입을 열었다.
“대표님. 저는 베이스터 이외에도 신경 쓸 일이 많은…….”
“우리 회사에서 베이스터 끌어올 사람, 너 아니면 블록체인 전공한 김현재인데. 내가 김현재를 별로 안 좋아해. 새끼가 겁이 너무 많더라고. 아는 것만 많지, 날뛸 줄을 몰라.”
문성하의 말을 자른 현주원이 시선을 끌어 올렸다. 마른침을 삼킨 문성하가 현주원을 마주 봤다. 현주원의 입에서 희뿌연 연기가 번졌다.
“도련님처럼 곱디고운 김현재보다 성질 더럽고 지랄맞은 네가 나아. 그러니 네가 총대 메고 시연회 참석해. 이번엔 뚫는다는 마음가짐으로.”
“대표님. 물론 전 최선을 다하겠지만, 그 정도로 베이스터가 중요하다면 제 2안이나 3안도 검토하셔야…….”
“난 복잡한 것 안 좋아해. 살면서 그럴 필요가 없었거든. DF벤처스 소속 심사역 전원은 내가 지시한 걸 98%의 성공률로 이행해 왔어. 예외에 해당하는 2%는 회사에 없지. 내가 전부 버렸으니까.”
현주원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문성하는 말없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재차 담배를 문 현주원이 큰 숨을 들이켰다. 곧 아지랑이 같은 걸 뿜으며 뇌까렸다.
“성하야. 내가 왜 너를 DF에 꽂아 줬다 생각해. 네가 섹스를 잘해서? 뭐, 틀린 말은 아니야. 하지만 그것만 놓고 보자면 굳이 너일 이유도 없었지. 내가 널 특별 취급한 건 네가 약간 돌아 있어서야.
넌 나하고 처음 만난 날 ‘앞으로 세 번의 잠자리를 제공할 거고, 이후에도 나와 자고 싶다면 DF 심사역으로 채용해 달라’는 딜을 걸었어. 처음에는 어린놈이 웃기는 소리를 한다 생각했지만, 너하고 세 번 자고 났을 때 난 결국 너를 찾았어. 왜일 것 같아?”
“그야 저와 잔 게 아주 좋았기 때문이겠죠.”
문성하가 시큰둥하게 응수했다. 현주원이 피식거렸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려. 그 말도 안 되는 딜을 받아들여서라도 너와 엮이고 싶었어. 내가 아주 너한테 환장을 한 거지. 그런 의미에서 널 회사에 꽂아도 중간 이상은 할 거라 생각했어. 너는 기본적으로 잡초 같은 성정을 지녔고, 뽑힐 듯 뽑히지 않아 사람을 안달 나게 만들어.
한 마디로 매력이 있다는 얘기지. 투자를 주고받을 때도 매력이 작용해. 매력적인 회사를 매력적인 심사역이 물어서 가져오는 거야. 그게 바로 내가 발견한 네 가능성이고. 우리 회사의 평균 학벌이며 경력과 비교했을 때 훨씬 미달인 너를, 나는 가능성만으로 선택한 거야. 그러니 넌 내 기대치에 부합하는 결과를 보여야지. 안 그래?”
현주원의 손가락에 걸린 담배가 좌우로 까딱거렸다. 문성하는 잠자코 휘적거리는 불씨를 봤다. 날연한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만약 제가 베이스터를 감당하지 못하겠다 하면요.”
현주원이 팔짱을 꼈다.
“그럼 사표 내. 아쉽긴 하지만,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놈과 계속 가기엔 내 리스크가 너무 커. 난 최소한의 공과 사를 구분해. 일단은 CEO니까.”
문성하의 구둣발이 바닥을 지분거렸다. 곧 고개를 바로 하고는, 또박또박 말을 흘렸다.
“좆같아도 받아들여야 하겠네요.”
“처음 있는 일도 아닌데 뭘.”
현주원이 쥐고 있던 담배를 끌어 내렸다. 재떨이 위에서 붉은 끄트머리가 바스러졌다.
“베이스터 사무실에서 까였으면, 행사장에라도 가 만회해야지. 이런 일 한두 번 겪어? 없으면 없는 대로 날뛰어. 투자 심사역이라면 기본이잖아.”
“그 기본적인 걸 대표님은 얼마나 해 보셨습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난 심사역이 아닌데.”
현주원이 재떨이를 멀찍이 치웠다. 문성하가 그럴 줄 알았다는 양 비아냥거렸다.
“진짜 좆나게 재수 없네.”
현주원이 심상하게 받아쳤다.
“나한테 욕하는 건 하루에 한 번뿐이야.”
허리를 짚은 문성하가 탐탁지 않은 숨을 골랐다. 이내 간다는 얘기도 없이 몸을 틀었다. 저벅저벅 걸어가는 문성하의 뒤로 현주원의 질문이 찾아들었다.
“일리노이스 쪽은 별일 없고?”
문성하의 얼굴이 돌아갔다. 새 담배를 문 현주원이 빤히 시선을 건네 오고 있었다. 문성하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일단은.”
“별일 있다는 얘기로 들리네.”
“보고할 단계가 아니야.”
“왜 보고할 단계가 아니야. 사사로운 건이라도 나에게는 얘기를 해야지. CEO 입장에서 사전에 리스크 관리할 시간은 줘야 할 것 아니야.”
“보고하면, 지금 이 순간 잘릴지도 모르거든.”
문성하가 입을 다셨다.
“직원 입장에서 목숨 연장할 시간은 주지 그래.”
“일이 있긴 있나 보네.”
주억거린 현주원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하얀 연무를 곱씹고 난 그가 문득 손짓했다.
“와 봐.”
문성하가 기계적으로 발을 뻗었다. 뚜벅뚜벅 나아가 현주원이 앉아 있는 데스크 앞에 섰다. 다시 뒷짐을 지고, 그를 내려다봤다. 펜을 돌리듯 손가락 사이의 담배를 흐느적거린 현주원이 질문했다.
“정신 좀 차릴래?”
문성하는 말없이 데스크에 손을 얹었다. 피할 생각은 없었다.
“어.”
말이 끝나자마자 손등에서 치익, 소리가 났다. 살 타들어 가는 냄새에 오감이 사시나무처럼 전율했다. 홧홧한 불덩이가 새긴 잔흔에 취해 다섯 개의 손가락이 꾸물거렸다. 어깨를 떤 문성하가 신음했다.
“하아…….”
“네 예쁘장한 얼굴이 내 좆을 흔들 순 있어도, 내 회사는 못 흔들어.”
마무리를 짓듯 꾹, 담배 끄트머리를 거죽에 찍고 난 현주원이 얼굴을 들었다. 탁한 경고가 사무실을 메웠다.
“나를 자극한 대가를 치러. 문성하.”
***
대표실을 나오자마자 무작정 사무실을 가로질렀다. 성하 씨. 물어볼 것 있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선배 심사역의 말을 무시한 채 벌컥 문을 열고 나섰다. 짧지 않은 복도를 걸어, 구석에 있는 문을 열고 계단으로 빠졌다. 한참이나 정처 없이 내려가다가 문득 멈췄다. 저 밑으로 불 꺼진 표지판이 보였다. 비상구.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불현듯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이 잔혹한 미로 속, 유일한 탈출구. 그는 완전하지 않지만 최소한 안전했다.
동생인데, 그렇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뚜우, 뚜우, 뚜우. 신호음이 열 번을 넘어섰다. 문성하는 오금이 저린 사람처럼 벽에 기댄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좀처럼 끝나지 않은 신호음에 지쳐 눈꺼풀이 흘러내렸다. 전에 없던 절실함이 고개를 들었다. 부디 받기를. 동생이 자신의 전화를 받아, 목소리를 들려주기를.
그 사소한 숨결로 자신을 불안에서 구해 주기를.
자신이 그를 구원했듯이.
[형. 왜?]
스무 번 가까운 신호음이 간 끝에 동생의 음성이 들렸다. 안도한 문성하의 입술이 벌어졌다. 문드러지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냥……. 했어.”
[안 좋아 보여. 형.]
“몸살이 있나 봐. 조금.”
[약은 먹었어?]
“먹을게.”
정말로 걱정이 되는 듯, 동생이 꼬치꼬치 캐물어 왔다. 문성하의 목덜미가 느슨해졌다. 얼기설기 엉겨 있던 초조함이 물에 녹아 가듯 흐무러진다. 문성하는 세수를 하듯 제 얼굴을 감쌌다.
비로소 조금 편안하다.
“혜성이 너는. 별일 없고?”
부쩍 안정된 질문이 나왔다. 동시에 반대쪽이 고요해졌다. 뭔가를 고민하는 것처럼, 뜸을 들인 동생이 말을 꺼냈다. 지극히 신중한 어투였다.
[형. 진짜 미안한데…….]
“응. 얘기해.”
[나 외박해도 돼? 한 일주일 정도.]
문성하의 면상이 멍해졌다. 동생은 묵묵히 답을 기다렸다. 잠시 축이고 난 문성하의 입이 떨어졌다. 본의 아니게 석연치 않은 물음이 튀어나왔다.
“누구랑?”
[회사 사람들이랑…….]
“왜.”
[회사에 불이 났었어.]
“뭐?”
문성하가 화들짝했다. 주혜성이 서둘러 설명했다.
[사람 없을 때, 밤에 난 거야. 다친 사람은 없어.]
“다행이네.”
[아무튼 그래서 가게를 대대적으로 재정비해야 해. 인테리어도 하고, 물건도 들여놓고. 시간은 없는데 할 일만 많아. 그래서 직원 전부가 회사에서 합숙하며 다 같이 일하기로 했어.]
“너무 고생하는 것 아니야? 사장이 추가 수당은 주겠대?”
[응. 초과 근무한 시간 따져서 다음 달 월급 주겠다 했어.]
“그래…… 어쩔 수 없지.”
마지막 말이 불안정한 나뭇가지처럼 뚝, 떨어졌다. 핸드폰 쥔 손이 괜히 저려 왔다. 서운하지만, 드러내는 건 망설여져 애꿎은 발 장난을 두어 번 했다. 자신은 형이었고, 스물일곱짜리 성인이었다. 사회생활을 사회인답게 하겠다는 동생에게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고생해. 혜성아.”
[고마워. 형.]
“일주일이면 된대?”
[어. 오래는 안 걸려.]
“힘들겠다. 형이 도와줄 건 없고?”
[일단은 괜찮아. 필요하면 얘기할게.]
“그래.”
[응. 형……. 저기, 나 이제 끊어도 돼?]
“바쁘구나.”
[좀 그래.]
“알았어. 끊자. 일 열심히 하고.”
[연락할게. 형.]
더 인사할 새도 없이 통화가 끝났다. 깜빡이는 액정을 바라보던 문성하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곧 지탱할 것을 잃은 사람처럼 벽에 붙인 등을 늘어뜨렸다. 침침한 비상계단을 타고 낙엽 흩어지는 소리와 같은 기척이 울려 퍼졌다. 돌아오느니 자신의 잔상뿐인 공간 안에서, 문성하는 아주 생소한 감각을 체험했다.
“일주일 동안 심심하겠네.”
그 집을 나온 지 10년 만에 느껴 보는 감정. 그건 그리움이었다.
***
“이 새끼들 아주 돈이 넘쳐 나는구만.”
최재율이 빈정거렸다. 도통 가라앉지 않는 현기증을 삭여 가던 문성하가 정면을 봤다. 거대한 단상 위 스크린에 ‘BASETER MEDIA DAY’라는 글자가 띄워져 있었다. 베이스터의 첫 한국 기업 및 언론 대상 공개 행사였다.
참석한 이들만 500여 명. 얼굴만 봐도 알 법한 기업 대표가 다수 참석했고, 주요 방송사며 신문사도 모조리 왔다. VC와 엑셀러레이터 쪽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업계 큰손부터 자잘한 곳까지 빠짐없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확실히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이벤트였다.
현재 시장에서 가장 핫한 기업이다. 산업계 입장에서는 빠지는 것 자체가 직무 유기다.
“하여간 팔자 좋아. 이 호텔 그랜드볼룸 대여 비용이 국내에서 가장 비쌀 텐데.”
혼잣말을 한 최재율이 문성하를 힐긋했다. 열이 난 사람처럼 머리를 쥐어짜던 문성하가 무기력하게 끄덕였다.
“그러게.”
“야. 너 무슨 죽을병 걸렸냐?”
“지랄 좀 하지 마…….”
“이게 왜 지랄이야. 비주얼이 딱 그쪽인데. 병원은 가 봤어?”
“죽을병 아니야. 오버하지 마, 좀.”
문성하가 신경질을 냈다. 최재율이 떨떠름하게 옆얼굴을 긁적였다.
“아니면 말고.”
식식거린 문성하가 좌우를 살폈다. 저편의 의자가 비어 있었다. 서둘러 걸어가 의자 등받이에 손을 올렸다. 바로 여자 목소리가 찾아들었다.
“어머. 거기 자리 있는데.”
문성하의 고개가 돌아갔다. 문성하와 같은 곳을 본 최재율이 사색이 됐다. 또각또각 걸어온 여자가 빙그레 웃었다. 세일핀랩 감혜연 대표. 최재율과 얼마 전까지 만나던 사이다. 최재율이 세일핀랩에 투자를 하며 시작된 관계다. 뭔가 문제가 있었는지, 결과적으로 안 좋게 끝났지만.
“미안합니다.”
문성하가 빠르게 사과했다. 감혜연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그냥 문 심사역 앉아요. 상태 보니, 내가 양보해야겠네.”
“저는 괜찮…….”
“최 팀장은 잘 지내고?”
갑자기 감혜연이 최재율을 찾았다. 최재율이 짐짓 딴청을 피워 가며 답했다.
“네……. 뭐. 그럭저럭.”
“요즘도 섹스 많이 해?”
“감 대표. 무슨 말을 그렇게……!”
“아니면 말고.”
감혜연이 깔깔거렸다. 이마를 짚은 최재율이 끙, 소리를 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단상에 눈을 두는 그녀를 살피며 문성하가 물었다.
“감 대표님은 어쩐 일로 오셨어요.”
“여러 가지로 재미있는 회사잖아. 안 오면 손해지.”
“어떤 의미에서요.”
문성하가 눈을 키웠다. 감혜연이 업계 정보통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문성하의 어깨를 쳤다. 의도를 알아챈 문성하가 고분고분 의자에 몸을 앉혔다. 평소라면 거절했겠지만, 지금은 예외다. 열흘 동안 제대로 잠을 잔 기억이 없다. 가장 많이 취침한 게 고작 두 시간이었다.
“지금 베이스터 코리아 대표라고 나와 있는 권도재, 사실 진짜 대표가 아닐 수도 있어.”
“어디서 나온 얘기입니까.”
“그냥, 업계에서 알음알음. 베이스터 한국인 공동 창립자가 메이슨이잖아. 그 메이슨이 권도재라면서 베이스터 코리아 대표가 된 거고.”
“그런데 권도재가 메이슨이 아니라는 건가요?”
“어.”
“근거는요.”
“베이스터 초창기에 거기에 투자하려고 컨택한 해외 펀드가 몇 곳 있어. 그 사람들은 실제 메이슨을 봤거든. 그런데 권도재가 자신들이 아는 메이슨과 다르다고 얘기한 모양이야.”
“실제 메이슨은 어떤데요.”
“좀, 뭐랄까…….”
감혜연이 생각에 잠긴 듯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곧 권태롭게 뇌까렸다.
“권도재도 빠지는 얼굴은 아니지만, 그때 봤던 메이슨 외양이 무슨 연예인 수준이었다나 봐. 캐릭터도 아주 다르대. 메이슨 쪽 싸가지가 엄청나게 없었다던데. 홍콩에서 내로라하는 펀드 대표가 직접 미팅했을 때조차 거의 무시하듯 나왔다고.”
“그 성격으로 어떻게 회사를 운영할까요.”
“운영이야 가능하지.”
네일에 붙은 큐빅을 톡, 뗀 감혜연이 덧붙였다.
“본인이 워낙 천재인데 뭐가 문제야. 안 그래?”
문성하의 입이 다물렸다. 말이 안 되는 얘기면서 말이 되는 얘기다. IT 벤처기업 CEO가 부족한 사회성이나 인성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한 사례는 많다. 그의 언사나 태도와 무관하게, 실력 있는 CEO의 회사는 아주 잘 돌아간다. 기술에는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안녕하십니까. 베이스터 코리아 CEO 권도재입니다.]
행사의 시작을 예고하듯 베이스터의 다양한 커리어 영상을 띄우던 스크린이 암전되고, 단상이 환해져 갔다. 중앙에 선 세미 정장 차림의 젊은 남자가 보였다. 객석을 채운 청중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문성하는 가만히 테이블에 둔 손을 웅크렸다. 남자는 일전에 한번 본 권도재가 맞았다.
[우선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를 표합니다. 사실 이번 시연회는 아주 원대하며 특별한 계획을 소개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저 하나의 일상을 제안하는 자리입니다.]
권도재가 반 발짝 물러났다. 올라간 손이 사인을 보냈다. 바로 스크린이 까매지는가 싶더니, 영상 하나가 떴다. 어느 공장에서 동남아 사람들이 보석을 세공하는 장면이었다. 화면을 가리킨 권도재가 말했다.
[이건 현재 시간 미얀마의 한 함침 루비 공장을 촬영한 것입니다. 제가 이걸 왜 보여 드리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베이스터는 이번 행사에 앞서 참석자 10명을 무작위로 선정, 각자의 정보를 공개한다는 동의 아래 여기서 생산하는 최고급 함침 루비 1캐럿을 선물하기로 했습니다. 국내 가격으로 약 100만 원입니다.]
어, 그거 난데. 한 남자가 반색했다. 몇몇 사람들이 부러운 눈길을 보냈다. 권도재가 또박또박 발표를 이어 갔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고민이 발생합니다. 미얀마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질 좋은 루비를 생산하는 국가입니다. 다만 받는 사람 입장에서 그것이 실제 미얀마 산인지, 혹은 미얀마에서 만든 가짜는 아닌지 여부를 판가름할 수단이 제한돼 있습니다. 직접 보석상에 가서 확인하면 되지만, 그건 다소 번거로운 일이죠. 결국 많은 물건은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됩니다. 확인하기 전까지는 가짜일 수도 있고, 진짜일 수도 있죠. 참 희한한 일입니다.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물건을 샀는데, 거기에 의심까지 해야 하다니 말입니다. 이건 비단 1캐럿짜리 루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구입한 고기, 채소에서부터 각종 명품과 전자 기기를 아우르는 심각한 이슈입니다.]
권도재가 뜸을 들였다. 좌중이 조용해졌다. 그가 재차 스크린을 가리켰다.
[그래서 베이스터는 준비했습니다. 그 같은 고민을 단숨에 해소해 줄 수단을요.]
영상이 사라졌다. 곧 나타난 것은 10명의 한국인 명단이었다. 각자의 이름 옆에는 실시간으로 바뀌어 가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7일 오전 10시 39분 미얀마 원석 출고, 8일 오전 6시 30분 미얀마 세공 공장 도착, 15일 오후 11시 9분 가공 완료, 16일 오전 9시 56분 공장 출고, 16일 오후 1시 27분 한국 배송 시작…….」
[지금 보시는 이것이 베이스터가 바꿀 미래입니다. 여러분이 접하는 모든 상품이 언제 어디서 나와 어디로 향하는지,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쳐 언제 여러분께 닿는지. 베이스터 플랫폼은 이 모든 과정을 낱낱이 공개할 겁니다.]
권도재의 표정이 결연해졌다. 토끼 눈을 한 사람들이 단상에 집중했다. 권도재가 느슨한 손짓을 했다.
[그럼 이 혁신적인 플랫폼의 첫 파트너를 소개합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IT기업, 세명전자입니다.]
권도재 쪽 조명이 어두워지고, 구석에 있던 한 남자의 실루엣이 밝아졌다. 세명그룹 3세이자 세명전자 부사장을 맡고 있는 김연종이었다. 뚜벅뚜벅 권도재를 향하는 그를 보며 기자석이 들썩였다. 세명전자하고 베이스터 협약 체결 끝났어? 시끄러운 건 기자석뿐만이 아니었다. 행사장 곳곳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술렁이고 있었다.
넋이 나가 지켜보던 문성하의 다리가 풀렸다. 죽 미끄러진 구둣발이 거칠한 카펫에 비벼졌다. 무지근한 머리를 가누며 고뇌했다. 이건 자신의 능력치를 벗어났다. 아무리 DF벤처스가 국내 3대 VC라지만, 이 스케일은 일개 투자사 심사역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듣도 보도 못한 플랫폼의 등장. 첫 파트너사는 국내 1위 전자 제품 기업인 세명전자. 그걸 공개하는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건 그간 베일에 싸여 있던 세명그룹 3세. 냉철하게 따졌을 때 베이스터는 외부 투자사가 필요치 않다. 완성도 높은 플랫폼에, 국내 최대 기업 집단이 개입했다. 이 조건이면 10원 한 장 없이도 알아서 큰다.
그럼에도 기업과 투자사를 초청해 사업 모델을 내보인 데에는 이유가 있을 터다. 이 프로젝트에 앞서 최소한의 보험을 둬야 한다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국내에서 빠르게 자리를 잡으려면,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파트너가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베이스터는 혹시 모를 1%의 리스크조차 선제적으로 차단하고 있었다.
“천재들은 다르네.”
문성하와 같은 생각을 한 듯, 감혜연이 혀를 내둘렀다. 묵묵히 동의한 문성하의 머리통이 움칠했다. 막 메시지가 들어온 핸드폰 액정이 번쩍이고 있었다.
「행사 잘 참석하고 있어? 오늘은 보다 영양가 있는 보고 기대할게.
현주원 DF벤처스 대표」
진짜 지랄하고 있네. 아랫입술을 짓씹고 난 문성하가 목을 젖혔다. 허망함에 젖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발끝까지 얼얼할 지경이었다.
***
행사는 예정된 한 시간을 채워 끝났다. 마지막 10분 동안 언론 대상으로 질의응답이 진행됐다. 한 기자가 예민한 질문을 던졌다. 베이스터의 공동 창립자로 알려진 ‘메이슨’이 사실 권도재 대표님이 아니라는 얘기가 있던데요. 권도재는 무시에 가까운 웃음으로 갈음했다.
“생산적이지 않은 질문에는 답하지 않겠습니다.”
행사가 끝나자 사람들이 썰물처럼 객석을 빠져나갔다. 전지가 닳은 인형처럼 앉아 있는 문성하의 곁으로 최재율이 다가왔다. 곧 아프지 않게 어깨를 주물럭거렸다.
“야. 정신 차려라.”
“어…….”
힘없이 대꾸한 문성하가 목을 꺼떡거렸다. 등줄기가 자꾸만 맥을 잃는다. 지난 열흘간 어떻게든 버텨 왔지만, 슬슬 한계다.
일리노이스 염지훈 대표의 잠수가 열흘을 넘어섰다. 그와 관련한 새 소식도 전무하다. 그러는 동안 문성하는 꾸준히 일을 하고, 늦은 시간에 퇴근해 홀로 외로운 집을 지켰다. 짧게나마 누군가가 있던 공간을 혼자만의 숨으로 채우고 있다. 그러면서 알았다. 있던 사람이 없다는 게, 제법 쓸쓸한 일이라는 걸.
“야? 너 코피 나는…….”
최재율이 돌연 손가락질을 했다. 멀거니 올려다보던 문성하의 손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흐느적거리는 눈으로 액정을 확인했다. 몇 번인가 연락한 일리노이스 임원의 이름이 떠 있었다.
“네. 문성하입니다.”
통화 아이콘을 누른 후 귀에 가져갔다. 상대방이 뭐라 뭐라 말을 했다. 워낙 빠른 데다가, 현실감이 없어 일일이 인지하기 어려웠다. 그런 가운데 딱 하나는 알아들었다.
염지훈이 파산 신청을 했다.
“아…….”
손에서 핸드폰이 떨어졌다. 인중을 타고 죽 핏물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저 밑으로 비치는 베이지색 면바지에 점점이 핏방울이 새겨지고 있었다. 마치 남의 것처럼 주시하던 문성하의 상체가 덜컥 기울었다. 이어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최재율이 기겁했다.
“야, 성하야. 문성하!”
웅웅 울리던 외침이 곧 사그라졌다. 문성하는 꿈과 현실의 경계에 선 사람처럼 눈만 끔뻑거렸다. 사방팔방 깨져 나가는 사위가 이 빠진 바둑판 같았다. 하. 문성하는 마지막 절규처럼 숨을 뱉었다. 목이 턱 막혀 왔다.
“형!”
감감해져 가는 시야의 먼 치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확인하고 싶지만 그럴 기력이 없었으므로, 문성하는 그저 귓바퀴를 굼틀거리며 잔음을 음미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환청이긴 하나 동생의 목소리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