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37)

5) EECS: 전자컴퓨터공·과학

6) DID: 신원 인증 기술

5.

“왜 저한테 거짓말했습니까.”

싸늘한 질문이 사무실을 울렸다. 맞은편의 남자가 고개를 기울며 탄식했다. 근처의 직원들이 눈치를 보며 꾸물거렸다. 남자가 그들에게 손짓했다. 다들 나가 봐. 10여 명의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떴다. 문 닫히는 소리가 차디찬 바닥에 내려앉았다.

“문 심사역님께서 오해하시는 게 있는데.”

남자가 힘겹게 운을 뗐다. 도리질을 친 문성하가 쏘아붙였다.

“아니요. 이건 오해가 아닙니다.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한 사실입니다. 사실이 어떻게 오해가 됩니까.”

“너무 그러지 마시고…….”

“제가 물었잖습니까. 왜 체결하지 않은 계약을 체결한 척 보고했냐고!”

문성하가 버럭 했다. 남자의 목덜미가 움츠러들었다. 난처한 듯 문성하를 살피다가, 급하게 자세를 고쳤다. 웅얼거리는 소리가 찾아들었다.

“그야 문 심사역님이 너무 쪼니까……. 저도 겁이 나서.”

“제가 언제, 뭘 쫬는데요.”

문성하가 눈을 부릅떴다. 남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문성하의 언성이 높아졌다.

“이거 지난해 9월 일리노이스 투자 확정할 때 염지훈 대표님 당사자가 약속한 부분이에요. 일리노이스는 곧 국내 여행사 및 리조트 30곳과 계약을 체결한다, 그에 따라 내년 봄 고객 특가 이벤트 기능을 추가한다. 리스트에 올라온 여행사와 리조트 몇 곳을 접촉해 그런 논의가 오갔음을 제가 직접 확인했고, 그래서 투자 집행한 거잖아요. 이후 반년 지났고, 대표님께서 계약 다 체결했다며 저한테 보고하셨죠. 그런데…….”

문성하의 턱이 푸들거렸다. 남자가 안절부절못했다. 문성하가 시근거렸다.

“실제 계약 내용이 제가 알던 것과 달랐습니다. 대체 이거 뭡니까.”

남자는 그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싸락눈이 내린 양 고즈넉한 사무실 안에서 문성하는 열이 오른 사람처럼 머리를 감쌌다. 정처 없이 넘어간 눈길이 벽에 붙은 일리노이스 로고에 걸렸다. 문성하는 두통을 참듯 눈을 감았다.

일리노이스. DF벤처스에 공공연히 선포한 문성하의 야심작.

단 5명의 직원을 보유한 여행 정보 플랫폼에서 문성하는 가능성을 봤다. 유저들이 자신의 여행 위치와 정보를 실시간으로 플랫폼에 공유하고, SNS를 하듯 각자의 개인 페이지를 관리한다. 한 마디로 여행 특화 커뮤니티다. 이런 서비스는 반드시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보유한 투자 자금 상당수를 투입해 일리노이스 지분을 샀다.

실제로 일리노이스는 이후 순항했다. 5만 명도 안 되던 가입자가 반년 만에 50만 명이 됐고, 자체 평가액은 4배 이상 뛰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한 방이 부족했다. 일리노이스가 보다 성장하려면, 유저를 끌어들일 파격적인 유인 요소가 필요했다.

문성하도 이걸 알고 있었고, 투자 검토 당시 최대 걸림돌로 여겼다. 그때 대표인 염지훈이 호언장담했다. 내년 봄 중 국내 주요 리조트사 및 여행사와의 협약 아래 특가 이벤트 기능을 추가한다, 그게 일리노이스 성장세에 날개를 달아 줄 거다. 문성하는 아는 리조트업계 및 여행업계 지인을 동원해 사실 여부 파악에 나섰고, 상당수로부터 실제 논의를 진행 중이라는 답변을 얻었다. 그래서 투자를 집행했다.

하지만 절반짜리 확인이었다.

지난주 염지훈은 관련 계약이 전부 체결됐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문성하는 아는 업계 사람을 통해 크로스 체킹을 시도했다. 염지훈을 믿지 못해서라기보다는, 관례적인 일을 한 것이다. 업계는 ‘일리노이스와 계약을 체결했으나, 자세한 건 보안상 기밀’이라고 했다. 확인을 했음에도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친한 업계 후배를 불러 오목조목 따졌다. 일리노이스가 계약을 체결했다 한 리조트사의 경영팀 직원이었다. 적잖이 난감해하던 그가 말했다.

“계약 체결한 건 맞는데……. 공동 이벤트 추진, 뭐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일리노이스 플랫폼에 엄청나게 싼 가격으로 우리 쪽 광고 실어 주겠다 하기에 동의한 거예요. 완전히 헐값인데, 그 가격이라면 안 할 이유가 없잖아요.”

듣자마자 머리가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맞습니다. 내가 거짓말을 했어요. 죄송합니다.”

염지훈이 고개를 숙였다. 문성하의 낯이 냉해졌다. 한참 후에야 얼굴을 든 그가 애원했다.

“DF에 당장 보고할 것이 필요해 얕은수를 썼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계획이 변경된 건 아닙니다. 상반기 안에 말씀드린 리조트사 및 여행사와의 할인 이벤트를 추진할 수 있게끔 논의 진행하고 있습니다. 거짓말한 것은 한 번만 봐주십시오. 심려 끼친 부분에 대해 결과물로 보상하겠습니다.”

문성하의 입이 다물렸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올려다보는 염지훈을 보고 있자니, 차마 할 말이 없었다. 불쌍해서가 아니었다. 자신 역시 이 상황에서는 선택지가 딱히 없었다.

문성하는 일리노이스에 배팅을 했다. 이제 와 갑자기 지분을 뺀다 하면, VC업계에서는 내막을 둘러싼 부정적인 소문이 돌 것이고 자연히 일리노이스의 기업 가치가 떨어진다. 매각 과정에서 본전도 못 찾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지금으로선 염지훈을 믿는 수밖에 없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도, 믿어야 했다.

***

일리노이스가 있는 강남역 사거리의 공유 오피스 건물을 나와 대로변을 걸었다. 방향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걷기만 했다. 나아가는 내내 습도 높은 훈풍이 얼굴을 덮었다. 미지근하고 찝찝한 기류였다.

“쟤가 입은 거, 오빠가 저번에 사고 싶다고 한 그 점퍼 아니야?”

문득 앞서가던 커플 중 여자가 질문하는 게 들렸다. 가리키는 곳을 본 남자가 끄덕였다.

“어어, 맞네. 색상도 내가 얘기한 것하고 같아.”

“예쁘다. 사진으로 볼 때는 그냥 그랬는데, 누가 입은 것 보니 확 다르네.”

“그렇지? 나도 더 고민하지 말고 사는 게…….”

“근데 쟤가 입어서 그런 걸 수도 있어. 쟤 완전 모델인데? 키가 190은 되는 것 같아. 생긴 것도 그쪽 애 같고.”

달가워하는 남자에 대고 여자가 이성적인 말을 했다. 벙해진 남자가 갑자기 심술을 부렸다. 쟤가 나하고 뭐가 그렇게 다른데? 여자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들을 따라 응시하던 문성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 떨어지지 않은 언덕배기에서 걸어 내려오는 젊은 남녀가 보였다. 여자는 꽉 동여맨 포니테일이 당돌한 인상을 줬고, 남자는 카키색 점퍼를 입었는데 조금은 칙칙해 보이는 외투 색이 남자의 그림 같은 외모와 어우러져 세련된 분위기를 풍겼다. 옷이 사람을 입었다는 표현의 표본 같은 예였다.

뭔가 재미있는 얘기가 나온 듯, 여자가 깔깔거리며 남자의 어깨를 쳤다. 남자는 무표정으로 주억거리기만 했다. 미소가 만연한 여자의 얼굴을 문성하는 보다 면밀히 살폈다. 정석적인 미인은 아니지만 꽤 귀엽게 생겼다. 체구까지 작아 사랑스럽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남자. 문성하를 포함한 주변의 시선을 모조리 섭렵하는 매혹적인 형상이다. 청년과 소년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드는 용모에서 기품이 비친다. 접근할 만한 자격이 없다면 알아서 몸을 사려야 할 듯한, 오묘한 위축감을 부여한다. 타인을 무시하듯 입과 시야를 꼭 닫고 있어 더욱 그렇다.

덕분에 문성하는 동생에게 알은체하는 게 어쩐지 꺼려졌다.

문성하의 발이 멎었다. 양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점점 가까워 오는 주혜성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동생이 자신을 알아보면 보는 거고, 몰라봐도 상관없다는 생각이었다. 그저 범상한 관객처럼 동생을 감상하는 게 목적이었다. 지금은 딱 그뿐이었다.

자신의 동생을 바깥에서 만났을 때 어떤 느낌인지를, 눈에다 가득 담아 두고 싶었다.

돌연 주머니 안이 진동했다. 고개 숙인 문성하가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일리노이스 염지훈 대표’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다. 한숨 쉰 끝에 통화 아이콘을 눌렀다. 동생이 있는 쪽에다 등을 보이고는 귀에다 핸드폰을 밀착했다. 동생을 더 못 보는 게 심히 아쉬웠으나, 지금은 이쪽 일이 더 신경을 써야 하는 상황이긴 했다.

“네. 대표님.”

[그…… 죄송합니다.]

“아까 사무실에서 스무 번 넘게 하신 말씀입니다.”

문성하가 지겹다는 양 대꾸했다. 염지훈이 자못 숙연해졌다.

[제가 살짝 조심스러운 말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뭡니까.”

[문 심사역님께서 워낙 우리 회사 상황에 대해 고민이 많으신 것 같아 드리는 얘기입니다.]

“뜸 들이지 말고 본론부터 얘기하세요.”

문성하가 쏘아붙였다. 결연한 숨을 들이켠 염지훈이 답을 꺼냈다.

[정 걱정되시면, 우리 지분을 절반만 엑시트하는 게…….]

“그걸 어디 말이 되는 소리라고 지금……!”

채 듣기도 전에 고함이 터졌다. 정말로 말이 안 되는 얘기를 하는 투자처 대표에, 흥분부터 폭발했다. 순간적으로 휘청거린 몸이 뒷걸음질을 쳤다. 동시에 위쪽에서 날쌘 발진음이 들렸다. 흠칫한 문성하의 고개가 돌아갔다. 언덕을 타고 쏜살같이 돌진해 오는 오토바이가 보였다. 문성하의 눈이 확 커졌다.

발을 움직이고자 했지만, 상황이 워낙 일촉즉발인 탓에 본의 아니게 운동 신경이 무뎌졌다. 미적거리던 문성하의 허리가 불현듯 가로채였다. 비틀거린 몸이 바닥을 향해 고꾸라졌다. 딱딱한 면에 부딪힐 뻔한 등을 누군가의 팔뚝이 둘러 받쳤다. 문성하의 손에서 핸드폰이 떨어졌다. 파삭, 액정이 깨졌다.

“아저씨. 사람 다니는 길에서 이렇게 속도를 내면 어떻게 해요!”

매서운 호통이 들렸다. 아까의 포니테일 여자였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멈춘 오토바이 운전자가 수그렸다. 죄송합니다, 저도 미처 못 봐서.

요동친 눈동자가 자신을 끌어안은 인물을 담았다. 새하얘진 면상으로 숨을 몰아쉬는 주혜성이 보였다. 급하게 문성하를 살핀 그가 물었다.

“형. 괜찮아?”

잔뜩 식은 동생의 낯이 낯설었다. 머뭇거린 문성하가 답했다.

“어, 어…….”

곧 여기저기 시선을 옮기다, 동생에게 물었다.

“너는 괜찮아?”

주혜성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살아 있음을 반추하듯 문성하의 모습을 눈으로 좇을 뿐이었다. 자신의 말이 전혀 안 들리나 싶어, 문성하가 또 물었다.

“혜성아. 형이 괜찮냐고 물었잖아.”

그제야 주혜성의 눈초리가 자리를 잡은 느낌이었다. 문성하를 똑바로 바라본 채 심호흡을 한 그가 갑자기 몸을 털썩 내려 앉혔다. 아스팔트 위에서 무릎 갈리는 소리가 났다. 기겁한 문성하가 벌떡 일어났다.

“혜성아!”

방금 전까지의 긴박한 상황과 대조될 정도로 느릿느릿 움직인 주혜성이 제 무릎을 쥐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문성하를 힐금하고는, 깜박이던 눈을 깔았다. 조금은 어리광 섞인 답이 돌아왔다.

“하아……. 너무 아파. 형.”

***

“형한테 말 안 할 거야?”

고압적인 외침이 나왔다. 동생은 푹 머리를 떨군 채 침묵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숨을 끌어 올린 문성하가 팔을 내밀었다. 작은 머리통 밑에 손을 집어넣고는, 강제로 턱을 올렸다. 드러난 어린아이 면상에 상처가 가득했다.

“주혜성!”

문성하가 더 크게 소리쳤다. 끙, 소리를 낸 주혜성이 재빠른 도리질을 쳤다. 하기 싫은 걸 강요받았을 때 표출하는 반항의 방식이었다. 고집스럽게 고개를 젓는 동생의 머리통에서 새까만 머리카락이 찰랑였다. 탄식한 문성하가 고심 끝에 무릎을 꿇었다. 곧 제 동생을 올려다보며 차분히 말했다.

“혜성아. 형 봐.”

주혜성은 연신 머리만 흔들었다. 홧김에 깨문 입술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문성하는 소리 내어 한탄했다. 이런 상황이면 원하는 답을 얻기 어렵다.

주혜성은 ADHD와 함께 약간의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갖고 있었다. 이런 식의 합병증이 흔하다고 들었다. 결과적으로 한없이 산만하다가도 종종 입이며 귀를 닫고 하고 싶은 일에만 몰두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럴 땐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고, 방해받고 있다는 걸 알아채면 크게 신경질을 냈다. 보통은 반복적으로 고개를 젓거나 주먹을 쥐었다 펴는 형태였다.

다소 복잡한 질환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호자의 관심과 노력이 절실하지만, 대학교수인 주혜성의 아버지는 학교에 머무르느라 바빠 그럴 시간이 없었다. 나름 유명한 국내의 아동 전문의에게 주혜성을 맡겨 놓기는 했지만,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다니는 학교에서 선생님이 신경 써 주는 것도 아니었다.

문성하가 함께 산 지 3개월 만에 주혜성의 마음을 얻은 것에는 그리 대단한 비결이 있지 않았다. 그저 관심을 줬고, 그것이 꾸준했을 뿐이다. 문성하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마당에 남은 가족이라곤 아버지와 주혜성뿐이다. 자신의 역량 안에서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 주고 싶었다.

그런 문성하의 마음을 알았는지, 주혜성도 문성하의 앞에서는 종종 보통의 동생이 됐다. 다른 사람의 말은 잡음처럼 흘리다가도 문성하의 말이라면 음악을 경청하는 것처럼 집중했다. 무엇보다 문성하가 주혜성을 그렇게 만드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혜성아. 이거 보자.”

하교하는 길에 뽑기 기계에서 건진 인형이 떠올랐다. 먼저 하던 반 친구가 문성하에게도 한번 해 보라고 해 시도했다 단번에 성공했다. 워낙 못생긴 인형이기에 가방에 넣고 잊었는데, 그것이 효과를 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방을 뒤져 초록색 봉제 인형을 찾은 뒤 주혜성에게 건넸다. 머리를 붕붕 젓던 주혜성의 눈이 조금조금 인형에 맞춰져 갔다. 문성하는 애완동물에게 맛있는 먹이를 주는 것처럼 주혜성의 면전에 인형을 가까이했다.

“티라노…….”

주혜성의 입에서 혼잣말이 나왔다. 문성하가 크게 주억거렸다.

“응. 이거 티라노사우루스야. 혜성이 공룡 중에서 티라노 제일 좋아하지.”

“요즘엔 별로 안 좋아해.”

“그럼 뭐 좋아해?”

“기가노토사우루스.”

“그게 뭐야?”

“기가노토가 티라노보다 조금 더 커. 속도도 빠르고.”

“그래? 기가노토사우루스가 더 대단한가 보다.”

“아냐. 싸움은 티라노가 더 잘하는데, 기가노토가 빠르니까 둘이 똑같이 먹이 두고 경쟁하면…….”

주저리주저리 말하는 사이 도리질이 멎어 갔다. 눈을 똑바로 뜬 주혜성이 좋아하는 공룡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문성하는 속으로 됐다, 싶었다. 주혜성을 자신의 페이스로 끌어오는 데 성공했다. 본론까지 이제 한 걸음 남았다.

“혜성아.”

“응.”

“형도 얘기해도 돼?”

“응.”

“얼굴에 상처가 왜 이렇게 많아?”

“애들이 때렸어.”

“애들이 왜?”

문성하가 언성을 높였다. 주혜성이 태연히 공룡을 주물럭거렸다.

“나 멍청하다고, 재수 없다고…….”

눈치를 본 주혜성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도 때렸어.”

문성하의 인상이 미세하게 풀렸다.

“얼마나?”

“엄청.”

“누가 더 많이 때렸어.”

“나.”

“잘했어.”

문성하가 공룡 인형을 주혜성의 품에 제대로 안겨 줬다. 주혜성은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공룡을 뺏길세라 꽉 잡았다. 곧 소심하게 물었다.

“화 안 내?”

“화? 형이 왜 화를 내.”

문성하가 기특하다는 양 주혜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주혜성이 웅얼거렸다.

“아빠하고 선생님은 내가 애들 때리면 화냈는데…….”

문성하가 단호하게 말했다.

“형은 화 안 내.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해.”

“애들 막 때려?”

“무조건 때리는 게 아니라, 애들이 너 괴롭히면 너도 똑같이 하라는 얘기야.”

“그래도 돼?”

“당연히 되지.”

“아빠하고 선생님이 뭐라고 하면?”

“혜성아.”

문성하가 주혜성에게 안긴 봉제 인형을 꾹 눌렀다. 어설프게 마감한 티라노의 입 부분이 움푹 팼다. 문성하가 눈을 치떴다.

“아빠하고, 선생님하고, 형하고. 셋 중에 혜성이는 누굴 제일 좋아해?”

“형.”

“그럼 셋 중에서 누가 정답이야?”

“형.”

군더더기 없되 즉각적인 답이었다. 문성하가 흐뭇하게 눈매를 접었다. 이어 의기양양하게 주혜성을 추켜세웠다.

“그러니까 형이 하는 말이 맞아. 혜성이 너 아주 잘했어.”

“진짜?”

“응. 진짜로. 갖고 싶은 것 또 있어? 형이 상 줄게.”

“상? 그럼…….”

고민하던 주혜성이 상처 난 볼을 만지작거렸다. 매우 신중히 한 마디가 다가왔다.

“나 얼굴에 약 발라 줘.”

“그게 혜성이 상이야?”

“응. 상이야.”

“그래서 지금까지 약 안 발랐어? 형한테 상 받으려고.”

구급함을 찾기 위해 몸을 일으킨 문성하가 물었다. 눈을 굴린 주혜성이 뇌까렸다.

“아니. 다른 사람이 만지는 거 싫어서…….”

곧 조금씩 목소리를 낮췄다.

“다른 사람 손은 더러워. 형 손만 깨끗해.”

***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구급함에서 약과 붕대를 꺼냈다. 소파에 걸터앉은 주혜성의 바지 한쪽을 올려붙인 문성하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문드러진 무릎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조심했어야지.”

깨끗한 물에 적신 천으로 무릎을 닦고, 위에다 연고를 덕지덕지 발랐다. 꽤 쓰릴 텐데 주혜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약을 바르는 문성하를 유심히 관찰할 뿐이었다.

“멀쩡히 오토바이 잘 피해 놓고는, 괜히 혼자서 정신 놓다 무릎 찧고. 이게 무슨 멍청한 경우야?”

“미안.”

“미안한 게 아니라…….”

속상함에 화내는 문성하에 대고 주혜성이 사과했다. 할 말이 없어진 문성하가 얼버무렸다. 책망할 의도가 아니었는데, 다친 걸 보니 괜히 열이 올라 성을 내고 말았다. 뜸을 들인 문성하가 주혜성을 힐긋거렸다. 화두가 어색하게 전환됐다.

“아까 강남에는 왜 있었어.”

“거기가 내가 일하는 회사 있는 곳이야.”

“친구가 운영한다는 컴퓨터 부품 업체?”

“응.”

“같이 있던 여자애는.”

“걔도 직원.”

“엄청 똘똘하게 생겼던데. 걔가 너 괴롭히는 것 아니야?”

경계하는 질문이 나왔다. 주혜성이 손을 내저었다.

“한나는 그런 애 아니야.”

“걔 이름이 한나야?”

“응.”

“그럼, 한나 말고라도 괴롭히는 애 혹시 없어? 편하게 얘기해 봐.”

문성하가 고개를 쳐올렸다. 주혜성이 비식거렸다.

“형은 아직도 내가 열두 살 같나 보다.”

“네가 왜 열두 살이야? 스…… 스물두 살이지.”

문성하의 혀가 삐걱거렸다. 저도 모르게 어조가 둔해졌다. 비껴 난 시선이 기울었다. 식은땀이 났다. 솔직히, 말하고도 난처하다.

가끔은 열두 살 같은 걸 어찌하란 말인가.

“형이 계속 이래야 할 텐데…… 내가 열두 살 같지 않아도.”

머뭇거리던 눈길이 다시금 주혜성을 머금었다. 웃음기 하나 없는 주혜성이 빤히 문성하를 응시하고 있었다. 붕대를 펼친 문성하가 눈을 찡그렸다.

“그게 무슨 얘기야.”

주혜성은 대답 대신 생각에 잠긴 듯 턱을 괴었다. 미심쩍게 보던 문성하가 연고가 덕지덕지한 무릎에 붕대를 덮었다. 저런 주혜성은 익숙하다. 멀쩡히 대화하다가도 홀연히 벙어리가 돼 저만의 세계에 빠지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 세계에서 주혜성을 건져 내는 유일한 열쇠는 문성하만이 갖고 있었고.

어떤 의미에선 고향 같은 상황이라, 문성하는 조금 안심이 됐다.

“형은.”

돌연 주혜성이 운을 뗐다. 보지도 않은 문성하가 응수했다.

“응.”

“형은 내가 형 동생이라 받아 준 거지.”

의중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문성하가 헛웃음을 쳤다.

“갑자기 그건 왜? 누가 들으면 네가 내 동생 아닌 줄 알겠다.”

장난스러운 언어에 주혜성이 고저 없이 답했다.

“사실은 아니야.”

거실이 순식간에 숙연해졌다. 막 붕대에 테이프를 붙이고 난 손이 떨어졌다. 문성하의 눈동자가 뭉그적뭉그적 올라갔다. 시야를 점한 동생의 얼굴이, 또 새삼 낯설다. 동생이 아닌 그 환영을 보는 느낌.

10년의 공백을 고스란히 담은 기류가 두 사람을 에워싼다.

“장난이야.”

주혜성이 뒤늦게 빙글거렸다. 긴장을 푼 문성하가 그의 허벅지를 때렸다. 억, 소리 낸 주혜성이 몸을 구부렸다. 벌떡 일어선 문성하가 훈계했다.

“한 번만 더 그런 농담해 봐.”

“형은 내가 형 동생인 게 마음에 드나 봐.”

주혜성이 눈웃음을 쳤다. 보기 좋게 휜 눈매가 묘하게 개운치 않았다. 무표정인 듯 웃는 얼굴이었다. 마주 본 문성하의 어깨가 늘어졌다. 곤로한 한 마디가 새어 나왔다.

“안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붕대에 감싸인 주혜성의 무릎이 들썩였다. 문성하가 덧붙였다.

“넌 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널 받아들였는지 몰라. 그러니 장난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

곧 몸을 틀며 손짓했다.

“좀 이르지만 저녁 먹자. 형이 맛있는 거 해 줄게.”

걸어가는 내내 주혜성에게서는 답이 없었다. 싱크대 앞에 다다른 문성하가 찬장을 짚었다. 반질거리는 표면을 긁으며 보이지 않는 등 너머를 반추했다. 동생은 여전히 조용했고, 그래서 방금 전의 일이 현실로 착각한 꿈처럼 여겨졌다.

찝찝한 선잠을 잔 기분이었다.

***

“베이스터가 세긴 세. 세화창업투자에 이세린 이사 알지? 그 똑 부러지고 스마트한 여자 있잖아. 그 여자가 베이스터하고 미팅한 다음 울었대. 믿겨져?”

최재율이 테이크아웃 잔을 휘휘 저으며 시시덕거렸다. 문성하는 듣는 둥 마는 둥 테이블에 둔 핸드폰 액정만 봤다. 갓 뜬 일리노이스 임원의 메시지가 비쳤다.

「염 대표님 지방 출장 중이라 저도 연락이 안 되네요. 서울 올라오면 바로 전화드릴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문성하의 손이 내려갔다. 투박하게 두드린 끝에 짤막한 답신을 보냈다.

「서울 올라오지 않더라도 최대한 빨리 제 쪽에 연락 올 수 있도록 해주세요.」

상대방은 ‘네’라고만 했다. 어딘가 자신 없어 보이는 답변이었다.

“돌겠네.”

욕설을 뇌까리며 고개를 젖혔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누적된 스트레스에 며칠간 잠을 못 잔 피로감이 겹쳐 목덜미가 천근만근이었다. 문성하는 억지로나마 정신을 차리려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일리노이스 대표 염지훈이 사흘째 잠적 상태다. 문성하의 전화에도, 문자에도 묵묵부답이다. 임원들은 ‘지방 출장을 간다고 했을 뿐, 자세한 건 모른다’고만 했다. 말 그대로 행방불명이다.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일인가.

지방에 갈 수도 있고, 잠수를 탈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염지훈이 일반인일 때의 일이다. 이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DF벤처스로부터 거액을 투자받은 회사의 CEO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담당 심사역인 문성하의 연락만큼은 받아야 했다.

“문성하, 정신 좀 차려라.”

멍하니 앉아 있는 문성하의 면전에 대고 최재율이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 문성하의 고개가 영혼 없이 들렸다. 최재율이 허, 했다.

“이야. 완전히 맛이 갔네. 잠은 제대로 자고 있냐?”

“아니란 걸 알고 질문한 것이길 바랄게.”

“아무리 상황이 좆같아도 잠은 자고 다녀. 너 얼굴 빼면 볼 것 없는 거 알잖아. 최소한의 수분 보충은 해 줘야지.”

“농담을 참 좆같이 하네.”

“이게 농담으로 들려? 농담도 잘한다, 야.”

최재율이 스트로를 쭉, 빨았다. 찌푸린 문성하가 테이블 위의 아메리카노 잔을 챘다. 입술 틈에 밀어 넣고 꿀꺽거리자, 쌉싸름한 액체가 홍수처럼 목구멍을 휩쓸며 내려왔다. 한꺼번에 절반을 비운 문성하가 입을 훔치며 물었다.

“세화창업투자 이세린이 왜 울었다고?”

“내 말 허투루 들었냐? 베이스터 때문이라고 했잖아.”

“거길 어떻게 만났대. 컨택 포인트 꽉 닫힌 걸로 아는데.”

“컨택 포인트야 뚫으면 되지. 지금 VC들 불나방처럼 다 거기 문 두드리고 있잖아. 돈 한 푼이라도 얹어 보려고. 네 말대로 오픈된 창구가 없으니 물어물어 직접 회사로 찾아가고, 뭐 그런 식이지. 근데 정말로 만만치 않다네. 거기 어린 여자 임원 있거든. COO 역할 하는. 걔가 투자 쪽 상담을 전담해 진행하는데, 겁나게 까탈스럽대.

갑자기 심사역 앉혀 놓고 면접을 진행하는 거야. 현재 베이스터 코인 가치가 시장 적정 수준이라 생각하냐, 베이스터 화이트 페이퍼에 페이크가 있다면 뭔 것 같으냐, 베이스터 이상의 TPS를 가진 블록체인이 나오는 데 얼마나 걸릴 걸로 보느냐 등등. 뭐 대충 이빨 털면 답할 수 있는 질문이긴 한데, 엄청 기술적으로 파고들면서 캐묻나 봐. 암만 기고 나는 심사역이라 해도 그걸 다 어떻게 답해? 그 정도로 잘 알면 본인이 크립토 만들었지. 암튼 그렇게 몰아세우다가 ‘시장에 대해 잘 모르는 분의 투자는 받고 싶지 않습니다’라며 돌려보낸다는 거야.”

“그 COO 여자애 혼자서?”

“어. 혼자서. 그래서 이세린이 운 거야. 분해 갖고. 아이비리그 나와서 승승장구하던 여자가 20대 초반짜리 여자애한테 창피를 당한 거잖아.”

“COO가 누군데.”

“나도 잘 몰라. 베이스터 팀 개인적인 정보 별로 없는 거 알잖아. 얼핏 듣기론 창립자 애들이랑 같은 MIT 동문이라던데. 이름은 한나.”

“한나? 외자로 한나?”

“어. 특이하지.”

문성하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얼마 전 주혜성으로부터 들은 직장 동료 이름이 한나였던 게 기억났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곧 주억거렸다. 뭐, 그쪽은 아마도 성이 따로 있을 거다. 애초에 그렇게 특이한 이름을 며칠 간격으로 접하는 게 쉽지 않다.

“형은 베이스터 만났어?”

문성하가 물었다. 최재율이 손사래를 쳤다.

“그러고 싶은데,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것 같아서 대기 중이야. 스터디 좀 하고 만나려고.”

“어떻게 만날 건데.”

“이세린 통해 한나 연락처 받았거든.”

“그으래?”

말꼬리를 늘린 문성하가 손을 내밀었다. 최재율이 쥔 그의 핸드폰을 빼고는, 지문 인식 장치에 엄지손가락까지 올렸다. 지극히 자연스럽고 뻔뻔하게 이뤄진 상황 전개에 최재율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태연하게 핸드폰을 가져온 문성하가 연락처 목록을 뒤적였다. ‘한나’라는 이름을 치자 바로 번호 하나가 떴다. 속으로 외운 문성하가 핸드폰을 돌려줬다.

“얘 번호 좋네. 돈 주고 샀나?”

“아, 진짜. 이 여우 같은 새끼가…….”

“내가 뭘 했는데? 숫자 몇 개 본 것 갖고 유난이야.”

문성하가 과장되게 억울해했다. 최재율이 혀를 내둘렀다.

“때려치워. 너 이러는 거 한두 번이어야지.”

“내 얼굴 보니까 뭉쳤던 화도 풀리지 않아?”

“밟아서 뭉개 버리기 전에 그 입 닥쳐.”

최재율이 으름장을 놓았다. 문성하가 피식거리며 제 핸드폰에 한나의 연락처를 저장했다. 소리 내어 웃고 싶은데,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명쾌한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어중간하게 피어오른 미소를 곧 삭이는 문성하를 보며 최재율이 이맛살을 일그러뜨렸다. 자못 심각한 질문이 찾아들었다.

“너 근데 진짜로 무슨 일 있냐?”

문성하가 대충 대꾸했다.

“그냥 좀.”

최재율 정도면 다 터놓고 얘기해도 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었다. 최재율이 어디에다 입이라도 잘못 털면 업계에 큰 파장이 인다. 일리노이스가 투자사에 허위 보고를 했고, 대표는 사흘째 잠수 중이라는 사실은 말 옮기기 좋아하는 투자업계 사람 사이에서 꽤나 임팩트 있는 뉴스거리다.

“나중에 정리되면 얘기해 줄게.”

“엄청 심각한 일인가 보네.”

시큰둥한 문성하에 비해 최재율은 진지했다. 과연 눈치가 빨랐다. 이 이상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문성하는 적당히 눈을 피했다. 조용해진 문성하의 머리맡으로 최재율의 손이 다가왔다. 사뭇 다정하게 털어 준 그가 느물거렸다.

“많이 안 좋으면, 형이 좀 풀어 줘?”

“뭘 풀어.”

“오랜만에 샤워나 하자. 네가 좋아하는 체힐러스 호텔 스위트룸 지금 가능해. 형 멤버십 있거든.”

최재율이 주머니에서 뺀 지갑을 팔랑거렸다. 정색한 문성하가 일어났다.

“꺼져. 할 기분 아니야.”

등을 보인 문성하의 뒤에서 최재율이 박장대소했다.

“너답지 않게 왜 이래? 누구 생겼어?”

무시한 문성하가 발을 뻗었다. 최재율의 웃음소리가 멎어 갔다.

***

베이스터 본사는 얼마 전 주혜성을 마주친 강남의 길목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일 층에 있는 카페를 기웃거리다 핸드폰을 꺼내 한나의 번호를 눌렀다. 아무리 원치 않는 투자 제안 미팅이라 해도, 회사 앞까지 온 사람을 그냥 돌려보낼 정도로 무례하진 않을 것이다. 바쁘다고 하면 시간이 날 때까지 카페에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이미 몇 번이나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한나입니다.]

꽤나 신호음이 간 끝에 낭랑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문성하가 입을 뗐다.

“안녕하세요. 투자 제안 미팅 건으로 연락드립니다.”

[아……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회의 때문에 바빠서. 나중에 다시 얘기…….]

“지금 회사 앞이거든요. 시간 날 때까지 일 층 카페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잠시라도 될 때 연락 주세요.”

들으라는 양 한나가 한숨을 쉬었다. 이미 지겹도록 유사한 상황을 겪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탐탁지 않게 물었다.

[회사가 어디시죠?]

“DF벤처스입니다. 문성하 심사역이라고 합니다.”

[DF, 문성하…….]

되뇌던 그녀가 돌연 조용해졌다. 이상할 정도로 삭막해진 분위기에 문성하가 액정을 살폈다. 갑자기 왜 이럴까 싶었다.

[그, 저기…….]

적잖은 공백 끝에 들려온 언어가 사뭇 조심스러웠다. 방금 전까지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연상되지 않을 정도로 긴장한 어투였다. 문성하가 의아해하며 답했다.

“네.”

[올라오세요. 저는 지금 시간이 없어 어려울 것 같고, 우리 회사의 다른 분과 미팅할 수 있도록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생각보다 협조적인 반응이었다. 최재율의 말만 듣고 아주 까칠한 회사를 상상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복도 안쪽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본 문성하가 질문했다.

“5층으로 올라가면 되나요?”

[네. 지금 올라오세요. 바로 앞에서 미팅할 분이 대기하고 있을 거예요.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통화가 끊겼다. 점멸하는 화면을 내려다보던 문성하가 발을 뻗었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걸어가 버튼을 누르고, 열린 문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새 건물 냄새가 물씬 나는 빌딩은 승강기 소음조차 깔끔했다. 딱 봐도 임대료가 비싸 보이는 곳이었다.

도착했다는 알림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셔츠와 면바지 차림의 남자가 점점 드러났다. 호쾌해 보이는 인상을 지닌 20대 중반 남성이었다. 꾸벅한 그가 안내하는 손짓을 했다.

“반갑습니다. 투자 제안 미팅 건으로 오셨다고요. 안으로 들어가시죠.”

“네. 일단 제 소개부터…….”

주머니에 손을 넣은 문성하가 명함 지갑을 꺼냈다. 하얀 명함 한 장을 빼 건넸지만, 그는 성의 없이 일별한 후 주머니에 넣을 뿐이었다. 벌써 텄나. 전전긍긍한 문성하가 서벅서벅 걸어가는 그의 뒤를 따랐다.

“어! 형. 잠시만요.”

회의실로 보이는 문 앞에 다다른 남자 쪽으로 또 다른 남자가 다가왔다. 꽤나 다급해 보였다.

“메이슨이 급하게 형 찾던데…….”

“걔 지금 어디야?”

“외근하다 지금 들어오는 중이라 했어요.”

“이쪽으로는 오지 않도록 해.”

경고한 그가 회의실 문을 열어젖혔다. 얼어붙은 남자가 어쩔 줄 몰라 했다. 메이슨 화 엄청 났는데요, PT 가안 마음에 안 든다고……. 외면한 그가 문성하 쪽으로 상냥한 언어를 건넸다.

“들어가시죠.”

엉거주춤한 문성하가 발을 내디뎠다. 뒤따라온 남자가 문을 닫았다. 널찍한 회의실 안이 잔잔한 풀 향에 잠겨 있었다. 곳곳에 나무와 풀이 있고, 길게 늘어진 책장은 천 권은 훌쩍 넘어 보이는 책으로 가득하며, 뒤편에는 10명은 족히 누워 쉴 수 있을 법한 고급스러운 시트가 깔려 있었다. 지금까지 본 벤처 회사 회의실을 통틀어 가장 아늑한 공간이었다. 멀거니 감상하던 문성하가 뒤늦게 물었다.

“저기, 그런데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권도재입니다.”

문성하가 흠칫했다. 똑바로 마주 본 그가 말을 이었다.

“베이스터 한국 법인 대표입니다. 반갑습니다. 문성하 심사역님.”

떨리던 눈살이 살포시 구겨졌다. 왜 갑자기 대표가 나왔는지 모르겠다는 생각 이전에, 제법 기이하다는 생각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아까 전 건넨 자신의 명함은 영어 버전이었다. ‘문성하’가 아니라 영어 이름인 ‘Jason Moon’이 적혀 있다. 외국계 회사에는 으레 그것을 줬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지가 그저 희한할 따름이었다.

한나에게 이름을 말하긴 했지만, 그녀 성격상 그런 것까지 친절하게 권도재에게 얘기했을 것 같지 않은데.

“일단.”

옴짝달싹한 문성하가 자리를 찾아 이동했다. 테이블에 몸을 붙이고 의자를 빼는 걸 본 권도재가 맞은편에 착석했다. 가져온 가방을 뒤적이며 문성하가 물었다.

“시간 많이 없으시죠?”

“잘 아시네요.”

권도재가 사람 좋게 웃었다. 앉지도 않은 문성하가 성급히 서류 하나를 꺼냈다. 그래. 시간이 없다. 별 중요치 않은 부분까지 신경 쓸 정도로 권도재도, 문성하도 여유롭지 않다. 그러니 속전속결로 본론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일리노이스가 내일 당장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문성하는 보험이 필요했다.

“DF벤처스 회사 소개서입니다.”

건네진 서류가 권도재의 앞에 놓였다. 서류를 든 권도재가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딱히 성의 있는 손길은 아니었다.

“네. 훌륭한 곳이네요.”

“DF벤처스는 투자 규모 기준으로 국내 VC업계 3위에 해당하는 회사입니다. 특히 기술 전문 투자사로 유명합니다. 투자금액의 70%가 기술 기업에 들어가 있고…….”

“알고 있습니다.”

손깍지를 낀 권도재가 말을 끊었다. 문성하가 경직돼 바라봤다. 권도재가 입매에 호를 머금었다.

“DF벤처스 정도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요. 유명한 곳이잖습니까.”

“그…….”

“일단 앉으세요. 마실 것 좀 드릴까요?”

권도재가 재킷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단축 번호를 누르고는, 이윽고 연결된 상대방에게 지시했다. 어, 마실 것 좀 가져와. 뭘 또 1층을 다녀와? 방금 전에 우리 먹으려고 테이크아웃 한 것 있잖아. 그거 가져오라고, 전부. 통화를 마친 그가 재차 문성하를 주시했다. 한결 사무적인 질문이 다가왔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문 심사역님은 블록체인 기업에 투자한 적이 있으십니까.”

문성하는 가만히 입을 축였다. 예상했던 질문이다. 동시에 다소 불리한 질문이었다. 문성하는 블록체인 기업에 투자한 적이 없다. 기술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다. 그러므로 정말로 말을 잘해야 했다.

“투자한 적은 없지만, 관심은 많습니다.”

“모든 투자자가 우리 앞에서 그런 얘기를 하죠.”

“네. 상투적인 얘기였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저는 베이스터가 아주 많이 필요합니다.”

“이유가 뭡니까.”

“여기 못 잡으면, 회사에서 나가야 할 판이라서요.”

권도재가 멈칫했다. 문성하는 침착하게 고개를 가눴다. 약간의 정적이 흐르고 난 뒤 회의실 문이 열렸다. 들어온 남자 직원의 손에 테이크아웃 잔 여섯 개가 들려 있었다. 권도재를 실눈으로 본 남자가 짜증을 냈다.

“이걸 왜 미팅할 사람한테 바쳐요? 평소처럼 생수나 주지.”

“너 평소처럼 형한테 어퍼컷 맞고 싶냐.”

“아, 됐어요. 하여간 변덕이 하늘을 찌르지.”

툴툴거리는 남자에 대고 권도재가 말없이 문성하를 가리켰다. 억지로 표정을 푼 남자가 문성하의 곁으로 다가왔다. 다양한 색깔의 잔 여섯 개가 전면에 세팅됐다. 커피와 여러 종의 음료로 보였다.

“그건 좀 새로운 제안이네요.”

남자가 나간 후 권도재가 제 턱을 어루만졌다. 문성하는 무표정을 유지했다. 좀 과장된 얘기이긴 하나, 어느 정도 사실이다. 일리노이스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국면으로 접어들 경우 문성하는 이 회사에 발을 붙이고 있기 어려워진다. 애초에 현주원의 눈에 들어 입사한 곳이라지만, 그것만으로 살아남기에는 당연한 한계가 있다.

최소한의 능력을 입증해야 했다. 그간 문성하는 그럭저럭 잘해 왔다. 일리노이스는 매우 강력한 카드였다. 단기간에 그 정도의 수익률을 올린 심사역이 회사 내부적으로도 드물었다. 그런데 그 일리노이스에 발목이 잡힐 위기에 처했다. 문성하는 지금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2200개. 제가 갖고 있는 산업계, 벤처업계, VC, 언론사 네트워크 개수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 주는 건 제가 아주 잘합니다. 그것 하나로 살아남은 입장입니다.”

문성하의 목이 꼿꼿해졌다. 권도재는 잠자코 입만 다셨다. 문성하가 잽싸게 못을 박았다.

“베이스터는 지금 내부에 별다른 국내 네트워크 전문가가 없는 걸로 압니다. 그 역할을 제가 하고 싶습니다. 물론 무상은 아닙니다. 베이스터에 가능한 한 많은 자금을 투입하는 조건입니다.”

사무실이 또 적막해졌다. 침묵 속에서 권도재가 천천히 눈을 굴리는 게 보였다. 문성하는 신중하게 관찰했다. 자신의 말이 먹혔을까. 모르겠다. 평소 같았다면 바로바로 의중을 읽었을 텐데, 상황이 긴박하다 보니 알아챌 것도 알아채는 게 어렵다. 정말로 자신이 궁지에 몰린 게 맞긴 했다.

“DZ형, 진짜 미안한데.”

불현듯 회의실 문이 열렸다. 머리를 들이민 건 아까 권도재를 붙잡고 말을 걸었던 남자였다. 찡그린 권도재가 따졌다.

“뭐.”

“메이슨 왔어. 잠깐만 나오래.”

“걔는 대체 왜 그래?”

“형이 만든 PT 가안, 그거 말이야. 하나부터 열까지 무슨 디테일이 그렇게 덕지덕지하냐며 메이슨이 화가 단단히 났어. 그런 거 안 좋아하는 것 알잖아.”

“야, 그건 어쩔 수 없어. 여기 한국이야. 그 새끼가 원하는 것처럼 심플하게 가면 국내 반응이…….”

“아, 잠깐만. 잠깐만! 메이슨. 이쪽 오지…….”

복도 쪽을 힐금한 남자가 기겁했다. 덩달아 눈을 키운 권도재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야! 잠깐만 기다려. 십 분, 십 분만 있다가 얘기해. 지금 DF벤처스! 문성하! 심사역! 미팅 중이야. 어?”

문성하의 입이 오므라들었다. 자신의 이름에 잔뜩 힘을 줘 가며 말하는 모양새가 희한하기 짝이 없었다. 복도 쪽이 고적해졌다. 권도재가 휘휘 손을 내저었다. 끄덕인 남자가 쑥 빠져나갔다. 문이 닫혔다.

어리둥절해진 문성하가 다물린 문과 권도재를 번갈아 봤다. 권도재는 질렸다는 양 제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지켜보던 문성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메이슨. 그래, 메이슨. 베이스터의 한국인 공동 창립자 이름이 메이슨이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그 메이슨이 권도재라고 알려져 있다.

“회사에 메이슨이 또 있나 봐요?”

문성하가 물었다. 머리를 정돈한 권도재가 중얼거렸다.

“네, 뭐……. 흔한 이름이니까요.”

“보통 대표가 쓰는 이름이면, 직원 쪽에서 안 쓰지 않습니까.”

“저는 제가 양보했습니다.”

권도재가 어색하게 웃었다. 빤히 보던 문성하가 턱을 괴었다. 미끄러진 시선이 문득 저편의 화이트보드에 걸렸다. 상단에 적힌 ‘MASON, 1PM’이 눈에 띄었다. 문성하는 되새기듯 뇌까렸다. 메이슨.

최재율이 말한 것처럼 베이스터 멤버 대다수는 베일에 싸여 있다. 공동 창립자 중 하나인 알렉스만 주기적으로 언론에 노출돼 왔을 뿐이다. 특히 함께 베이스터를 만든 것으로 알려진 메이슨은 이름과 국적 정도만 공개됐을 뿐, 그 실체가 불투명하다.

베이스터에 오기 전 급하게 메이슨에 대한 정보를 찾았다. 한국 오피스 사장이니 최대한 알아 가는 게 예의라 생각했다. 포털 사이트에서는 아무리 검색해도 나오는 게 없어, MIT 홈페이지를 뒤졌다. 그러다 메이슨에 대한 짤막한 인터뷰 기사를 발견했다. MIT 학생 두 명이 만든 베이스터 블록체인이 갓 화제가 된 2년 전, 교내 언론사가 취재한 내용이었다.

컴퓨터에 흥미를 가진 건 형 때문이었다. 형은 집을 나가기 전 ‘컴퓨터를 하고 있으면 곧 돌아오겠다’고 했고, 그래서 그걸 열심히 했다. 다만 형은 돌아오지 않았다.

문성하로서는 꽤 인상 깊은 인터뷰였다. 자신이 주혜성을 두고 가기 전 했던 말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었기 때문이다. 메이슨의 사적 정보라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이외에는 현재 메이슨으로 알려진 권도재의 이력 정도나 찾을 수 있었다.

“혹시 형제 있으십니까.”

문성하가 질문했다. 권도재가 얼떨떨하게 대꾸했다.

“아니요. 외동입니다.”

문성하가 고갯짓을 했다.

“그래요.”

눈꺼풀이 흘러내렸다. 지리멸렬하던 의구심이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단순한 직감이 아니었다.

권도재는 ‘그 메이슨’이 아닐 수도 있다. 상당수 블록체인 팀처럼, 베이스터 역시 CEO 실체가 다소 복잡한 회사일지도 모른다는 거다.

“아무튼, 뭐……. 와 주신 것 감사하고, 이렇게까지 관심을 표해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권도재가 슬슬 마무리를 지으려 했다. 자세를 바로 한 그가 덧붙였다.

“다만 우리 내부적으로 투자 유치 기준이라는 게 있어서요. 말씀 주신 내용과, DF벤처스라는 회사의 성향 등을 폭넓게 검토한 후 한나를 통해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베이스터 못 잡으면 회사에서 나가야 할 판이다’라는 멘트가 흥미로웠어요. 그렇게까지 얘기하는 심사역은 처음 봤습니다.”

권도재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웃지도 않은 문성하가 받아쳤다.

“저에게는 그다지 재미있는 이슈가 아닙니다. 밥벌이는 원래도 중요했지만, 최근 더 중요해졌거든요.”

담담한 한 마디가 따라붙었다.

“부양해야 할 동생이 생겼습니다. 이래저래 고민이 많습니다.”

권도재의 웃음이 사그라졌다. 입을 꾹 다문 그가 문성하를 힐금거렸다. 이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이만 자리 정리하시죠. 고생 많으셨습니다.”

문성하도 따라서 일어났다. 그대로 몸을 틀다가, 무심코 사무실의 불투명한 유리 벽에 눈을 뒀다. 반대편에 기대어 있던 기다란 남자 실루엣이 서서히 몸을 바로 세웠다. 이어 소리도 없이 사라져 갔다.

“엘리베이터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가시죠.”

문을 연 권도재가 말했다. 안내에 따라 복도로 나선 문성하가 좌우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길을 잃은 양 배회하던 시선이 어느 한구석에서 멎었다. 들어오며 지나친 간이 테이블 위에 초록색 인형 십여 개가 수북한 게 보였다.

“뭡니까. 이건.”

다가간 문성하가 인형 하나를 집어 들었다. 권도재가 뒤에서 한탄했다.

“아, 그거……. 한국 진출한 김에 캐릭터 하나 만들어 볼까 해서 한 건데요. 영 별로인 것 같아 샘플만 뽑고 때려치우기로 했습니다.”

“하나 가져가도 되나요?”

“얼마든지요. 여자 친구 주시려고요?”

권도재가 흥미를 보였다. 도리질을 친 문성하가 살짝 미소 지었다.

“동생 주려고요. 이거 티라노사우루스죠?”

권도재가 어물거렸다.

“아……. 네.”

***

건물을 나와 길목의 가장자리에 섰다. 수시로 지나쳐 가는 차들을 보고 있자니, 다리에서 힘이 빠져 갔다. 염지훈의 연락을 사흘 내내 기다리며 불면증으로 밤을 지새운 것에 방금 전까지의 긴장이 풀린 것이 겹쳐 온몸이 녹아 가는 기분이었다. 후들거리는 하체를 추슬러 가며 시들시들한 화단에 앉았다. 양어깨가 축 늘어졌다.

“혜성이는 뭐 하려나.”

이 근방에 있을 동생이 떠올랐다.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냈다. 단축 번호 1번을 누른 후 귀에 댔다. 일정한 신호음이 머리를 울렸다. 그사이 세 대의 차가 지나갔고, 어깨를 짓누르는 공기가 무거워졌다. 문성하의 손에서 진이 빠졌다.

“바쁘구나.”

스무 번 가까운 신호음이 갔음에도 받지 않는 핸드폰을 보며 탄식 비슷한 혼잣말을 했다. 통화 종료 아이콘을 누르고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었다. 텅 빈 손을 일별하자마자 뭔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허리가 풀썩 꺾였다. 완전히 고꾸라질 뻔한 몸이 뒤에서 잡아채어졌다. 문성하의 얼굴이 돌아갔다. 급하게 뛰어온 듯한 남자가 헐떡이고 있었다. 아까 사무실을 들락거리며 메이슨의 얘기를 전하던 남자였다.

“집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문성하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렇게까지는…….”

“부탁드립니다. 가시죠.”

남자가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냈다. 주차된 차를 향해 발을 뺀 그가 말을 이었다.

“우리 CEO가 성격이 아주 나쁜데, 문 심사역님을 꼭 집까지 모셔다드리라 해서요. 지금은 이게 제 업무입니다.”

문성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권도재가 그런 성격이었나. 전혀 상상도 못했는데. 뚜벅뚜벅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위쪽을 확인했다. 베이스터가 있는 층에서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던 남자가 안쪽으로 사라졌다. 문성하의 눈살이 구겨졌다.

동생을 본 줄 알았다.

***

그네에 앉아 있었다. 문성하가 사는 빌라 단지 내 공터에 설치된 조그마한 것이었다. 본래 두 개의 그네가 나란히 있었지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탓에 하나는 줄이 끊어져 떨어져 버렸다. 남은 하나마저도 녹이 슬만큼 슬어 그네보다는 허접하게 엮은 쇠사슬을 연상케 했다.

끼익, 끽. 소름 끼치는 사슬의 마찰음을 들으며 정면을 봤다. 얇은 모래 위에 얌전하게 앉아 있는 초록색 티라노사우루스가 보였다. 문성하는 묵묵히 그네에 앉힌 몸을 앞뒤로 기웃거렸다. 그네가 나아가면 티라노가 가까워졌고, 뒤로 빠지면 티라노가 멀어졌다.

“비 오는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폭풍우가 치던 날, 문성하는 그네에 앉아 있는 12세 주혜성에게 화를 냈다. 그 무렵의 주혜성은 학교를 마친 후 아동 심리 센터나 학원을 들르고 나서 꼭 단지 놀이터의 그네에 앉아 있었다. 거기에 박제된 것처럼 머물며 하염없이 문성하를 기다렸다. 문성하는 대체로 학원에 갔다가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귀가했으므로, 주혜성은 길게는 8시간 가까이 기다리기도 했다.

“여기가 제일 빨라.”

머리가 흠뻑 젖은 동생은 아무렇지 않게 문성하를 반겼다. 문성하는 들고 있던 우산으로 동생의 머리를 받쳐 줬다. 의미 없는 차양이었다. 이미 젖을 대로 젖은 동생은 우산 밑에서도 비를 흘렸다.

“뭐가 빠르다는 거야?”

동생의 어깨를 집 쪽으로 밀며 문성하가 물었다. 주혜성이 해맑게 답했다.

“형 보려면 여기가 제일 빨라.”

“비도 오는데 왜 이런 걸 해? 형이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

“내가 잘못했어?”

돌아오는 질문이 다소 울적했다. 멈칫한 문성하가 주혜성을 내려다봤다. 둥그런 동생의 눈동자에 빗물이 스미고 있었다. 멀거니 있던 문성하가 타일렀다.

“혜성이가 잘못한 건 아니야. 하지만 이러면 형이 걱정이 되잖아.”

“잘못한 것 아니면 괜찮은 거잖아.”

“혜성아. 이건 그렇게 단순히 따질 수 있는 문제가…….”

“형 말 안 들을래.”

주혜성이 갑자기 제 양 귀를 틀어막았다. 이어 바닥의 진창에다 심통 난 발을 굴렀다. 철퍽거리며 젖은 모래가 사방팔방 튀었다. 주혜성의 손아귀가 귀를 잡아 뜯을 기세로 쥐어짰다. 분연한 외침이 쏟아졌다.

“형은 너무 복잡해. 형은 너무 생각이 많아. 형은 너무 설명이 많아. 형은…….”

“혜성아. 그러지 마!”

“나는 형을 모르겠어. 형은 왜 이렇게 어려워?”

문성하의 턱이 멎었다.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힐금한 주혜성의 눈꼬리를 타고 빗물이 흐르고 있었다. 난처해진 문성하가 뒤꿈치를 곰작거렸다. 쿠르릉, 천둥이 쳤다. 매서운 번개가 두 사람의 틈을 갈랐다. 형제는 아무것도 본 적 없고, 아무것도 들은 적 없는 것처럼 서로만 주시했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의 세상에 몇 번의 균탁이 드리웠다.

“형.”

뚝. 이마에 뭔가가 떨어졌다. 차갑고 축축했다. 문성하의 고개가 들렸다. 머리를 받친 까만색 우산이 보였다. 흘러간 시선이 우산의 주인을 확인했다. 걱정스러운 주혜성의 낯이 시야를 메웠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주혜성이 물었다. 문성하는 나지막이 답했다.

“그냥.”

“혹시 나 기다렸어?”

“그랬……던 것 같아.”

문성하가 아물거렸다. 속눈썹이 연신 하느작거렸다. 보슬보슬 흩어지는 빗방울 틈에서 동생의 실루엣이 흐릿해져 갔다.

“무슨 일 있구나. 형.”

주혜성이 상체를 낮췄다. 비로소 제대로 비치는 얼굴이 따스했다. 문성하는 가만히 사슬 쥔 손을 달싹였다. 무슨 일은 확실히 있다. 다만 그건 동생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걸 알지만, 너무도 잘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슬을 타고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문성하의 목이 기울었다. 어깨를 때려 오는 빗물이 너무도 굵어, 조금 아팠다. 비틀거리는 몸이 잡을 것을 원하고 있었다.

보이는 건 동생뿐이었다.

“형이……. 회사 돈으로 투자를 했거든.”

무기력한 서두가 나왔다. 주혜성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문성하는 고해를 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일리노이스라고……. 여행 플랫폼 회사인데, 거기가 심상치 않아.”

“안 좋은 쪽으로?”

“응.”

“그럼 형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나도 모르겠어. 이런 적이 처음이야. 최근 몇 년 사이 벤처 시장이 너무나도 좋아서, 돈을 땄으면 땄지 잃는 경우가 없었거든.”

문성하가 이마를 짚었다. 함빡 젖어 있었다. 지친 목소리가 덧붙었다.

“아무튼 그래서……. 어떻게든 만회하려고.”

“만회하려고.”

“베이스터란 곳을 갔어.”

“베이스터?”

“블록체인 하는 회사야. 혜성이는 알지 모르겠는데……. 최근 벤처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곳이야. 돈을 넣으면 무조건 수익을 내. 기술력이 아주 뛰어난 회사거든.”

“거기 직원을 만났어?”

“어.”

“그런데.”

주혜성은 꼬박꼬박 말을 들어 줬다. 문성하의 고개가 설렁설렁 저어졌다. 풀죽은 한 마디가 나왔다.

“거기도 잘 안될 것 같아.”

“왜?”

“아까 만난 대표 반응이 좀……. 형도 베테랑은 아니지만, 이 바닥에 있다 보면 촉이란 게 생기거든.”

“베이스터는 아니야?”

“응. 확실히.”

문성하가 사슬 한쪽에 머리를 기댔다. 어느덧 줄기가 된 빗물이 죽죽 주혜성의 얼굴에 금을 긋고 있었다. 물에 빠진 것처럼 변해 가는 그의 셔츠가 보였다. 문성하는 그제야 알았다. 동생이 우산을 전부 자신에게 내줬다는 걸. 문성하가 다급히 입을 뗐다.

“혜성아. 거기서 그러지 말고, 너도 이쪽에…….”

“그럼 형은 회사에서 잘려?”

이상하리만치 다정한 질문이었다. 문성하의 동공이 확장됐다. 보송보송한 실내에 머무는 것처럼 태연자약한 태도로, 질척한 빗물 속 동생이 갸웃했다. 문성하가 웅얼거렸다.

“그럴……수도 있지만, 그러면 안 되니까…….”

“아쉽다.”

주혜성이 고저 없이 뇌까렸다. 쿠르릉. 먼 치에서 천둥이 쳤다. 문성하의 낯이 미미하게 어둑해졌다. 눈앞의 동생은 꽤나 진지하다. 전혀 장난하는 태도가 아니다. 그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보고 있자니, 숨이 가빠져 왔다. 할딱인 문성하가 쏘아붙였다.

“혜성아.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아쉬우니까 아쉽다고 하는 거야. 형이 일 그만두고 나하고 있어 주면 좋은데, 그게 아니니까.”

“너는 진짜, 어떻게…….”

바들거리던 문성하가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손가락 틈으로 뒤늦게 눈을 키우는 동생이 보였다. 문성하는 척척한 목으로 탄식했다.

“혜성아. 그런 식으로 얘기하면 안 돼.”

“형. 나는…….”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괜찮다고, 다 해결될 거라고. 그렇게 얘기하는 거야. 보통은 그래. 그런데 너는 어떻게 형한테 농담이라도 그런걸…….”

덜커덕거리던 머리가 푹 숙여졌다. 쿠릉! 고막을 찢을 듯한 천둥소리에 귀가 얼어붙었다. 문성하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 억지로 얼굴을 훔쳤다. 혀를 타고 허망한 언어가 줄줄 흘러내렸다.

“형은 가끔 모르겠어. 혜성이 너를 잘 모르겠어. 12세의 너는 알기 쉬웠어. 적어도 12세다웠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22세인데, 아직도 12세처럼 굴면 어떻게 해. 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는 정말…….”

문성하의 면상에서 손이 떨어졌다. 울컥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네가 어려워.”

옮겨진 눈망울이 두어 갈래로 쪼개지는 하늘을 머금었다. 그 섬뜩한 하늘 밑에서, 단 한 방울도 맞지 않은 것처럼 동생의 낯이 굳어 갔다. 일자를 유지하던 그의 입에서 차디찬 한 마디가 샜다.

“미안해. 형.”

전혀 미안하지 않은 태도로 미안함을 표출한 주혜성이 제대로 몸을 굽었다. 빗물투성이 머리카락을 타고 물방울이 떨어져, 문성하의 얼굴에 기다란 자취를 남겼다. 전율하던 눈동자가 동생을 쫓았다. 형제의 눈이 꽁꽁 얽매인 매듭처럼 마주쳤다. 문성하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다.

지잉.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바지를 더듬는 문성하의 손을 불현듯 주혜성이 챘다. 그대로 끌어 내리고는, 옴짝달싹 못하게 제압했다. 문성하가 소리를 쳤다.

“혜성아. 뭐 하는 거야!”

“나하고 얘기하고 있잖아.”

“너 혼날 거야? 진짜로.”

“받지 마. 어차피 잘릴 직장, 뭘 또 신경을 쓰고 있어.”

강고한 팔뚝이 뒷덜미를 둘러 왔다. 힘 있게 끌어안은 주혜성이 자신의 품 안에 문성하를 가뒀다. 주혜성의 손에서 떨어진 우산이 바닥을 굴렀다. 우악스럽게 쏟아지는 빗방울에 정수리가 아렸다. 우박처럼 낙하하던 빗줄기가 돌연 사그라졌다. 문성하가 곁눈질로 위를 봤다. 초록색 인형이 주혜성의 손에 들려, 문성하의 머리를 받치고 있었다.

“제발 편하게 살아. 형.”

긴 숨을 삼킨 주혜성이 또 말했다.

“형이라서 동생을 부양해야 하고. 가장 노릇 해야 하고. 이런 굴레에서 벗어날 때도 됐잖아.”

이어지는 음성이 딱딱했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우리가 살아남을 방법은 많아. 그러니 멍청한 고집 좀 넣어 둬.”

지이잉. 유독 커다란 진동음이 귀를 때렸다. 주머니 안에서 삐져나온 핸드폰 화면이 눈에 띄었다. 아주 잘 아는 이름이 보였다. DF벤처스 현주원 대표. 흠칫한 문성하의 턱이 갑자기 쥐어 잡혔다. 고개가 강제로 들렸다. 마주 본 주혜성이 목소리를 깔았다.

“받지 말라고 했잖아.”

곧 상냥하게 뇌까렸다.

“당분간 내가 벌게. 많진 않아도, 한동안 두 사람 살기에는 충분할 거야. 그러니 형은 쉬어. 응?”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새하얀 섬광이 그의 머리 위에 드리웠다. 넋을 잃고 바라보던 문성하의 눈꺼풀이 곰지락거렸다. 지잉, 지잉. 끊길 기미 없이 울려 대는 핸드폰 소리에 간헐적으로 솜털이 섰다.

뒤늦게 정신이 든 문성하가 팔을 뻗었다. 주혜성의 어깨를 쥐고는, 다급히 밀어 냈다. 주혜성은 물러나지 않았다. 꿋꿋이 선 고목처럼 버틸 뿐이었다. 애초에 힘으로 상대할 수 있는 체급이 아니었다. 한숨을 쉬고 난 문성하가 애써 달래기 시작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형은 계속 이 일을 하고 싶어. 그러니 놔. 형 일 좀 하자.”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주혜성이 반항하듯 문성하를 꽉 부여안았다. 숨이 막혀 왔다. 질려 오는 목을 떤 문성하가 호소했다.

“혜성아. 형 말 들어. 제발.”

이동한 손이 이번에는 주혜성의 볼을 덮었다. 사분사분 쓸어 주자 피부가 두드러지게 경련했다. 드러난 그의 어금니가 보일 듯 말 듯 씹혔다. 가슴을 크게 부풀리고 난 끝에, 마지못해 팔을 풀었다. 문성하의 턱을 옥죈 손아귀도 함께 떨어져 나갔다. 시선을 내린 문성하가 액정을 살폈다. 현주원의 이름은 여전히 떠 있었다.

“혜성이 너, 또 그러면 안 돼. 알았어?”

통화 아이콘을 누르기 전, 문성하가 무섭지 않게 다그쳤다. 석연치 않게 응시하던 동생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응어리가 남은 투였다.

“글쎄. 봐서.”

입을 다무는 동생의 등 너머로 또 하나의 균열이 번졌다. 갈가리 찢기는 하늘이 적잖게 오싹했지만, 문성하는 모른 척 통화 아이콘을 눌렀다. 또 변덕이구나 싶었다. 어릴 때부터 종종 겪은 고집이 크게 낯설지 않았다. ‘통화 중’이 뜬 핸드폰을 들어 올리는 손에 자갈돌 같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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