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크립토 코인: 암호 화폐
3.
“내가 너 왜 좋아하는 줄 알아?”
슬금슬금 내려온 손가락이 발목을 간지럽혔다. 문성하는 반사적으로 발가락을 오므리며 신음을 참았다. 자신은 다리가 약했다. 가죽 곳곳이 성감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현주원은 그걸 너무나도 잘 알았다.
“넌 비싼 척 안 하잖아.”
미끄러진 손가락이 피아노를 치듯 발가락을 지분거렸다. 끝내 문성하의 입에서 아, 소리가 터졌다. 흡족하게 미소 띤 현주원이 고개를 숙였다.
“고결하지 않은 주제에 고결한 척 안 해서 좋아.”
활짝 열린 입이 엄지발가락을 물었다. 곧 활기차게 혀를 움직여 가며 쪽, 흡입했다. 엄지발가락이 뿌리까지 빨려 나갔다. 세포가 톡톡 터져 나가는 기분에 발등이 경련했다. 문성하의 목이 넘어갔다.
“아아…… 흐으…… 읏.”
“부족하지.”
“씨발. 그걸 말이라고…… 흐읍……!”
씩 웃은 현주원이 입을 풀었다. 허리를 바로 하고는, 협탁 위에서 반쯤 타들어 가던 담배를 집어 입에 가져갔다. 훅, 내뿜어진 연기가 문성하의 머리맡에 내려앉았다. 문성하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뭐 하려고.”
“그냥 즐겨.”
현주원의 손가락에 끼워진 담배가 곤두섰다. 빨갛게 익어 가는 끄트머리가 문성하의 다리로 향했다. 문성하의 눈이 뒤늦게 커졌다. 벌벌거리는 다리를 현주원이 거칠게 움켜잡았다. 제대로 고정시키고는, 손가락을 확 내리꽂았다.
“너 이런 거 좋아하잖아.”
내질러진 담배 끝이 종아리 한가운데 처박혔다. 치익, 살 타들어 가는 냄새가 났다. 문성하가 발버둥을 쳤다. 절박하게 짚어 댄 끝에 꽉 쥐어짠 침대 시트가 주름 하나 없이 빳빳해졌다.
“아흐…… 으읏, 아……!”
“더 깊이?”
“말 걸지…… 흐읍, 씹…….”
“하반신이 엄청 건강해졌어. 응?”
조롱한 현주원이 담배를 빙글 돌렸다. 벼락에 맞은 것처럼 무릎이 들썩였다. 문성하의 머리가 다급히 돌아갔다. 시트 끄트머리를 덮은 커버가 확 벗겨졌다.
“씨발…… 좀. 아아……!”
“좋으면 좋다고 해. 문 심사역.”
현주원의 손목에 힘이 실렸다. 파스스, 소리를 내며 재가 떨어졌다. 살 위에서 비비적거리던 담배 끝이 거칠게 회전했다. 문성하의 발이 탕, 시트를 걷어찼다. 자지러지는 비명이 나왔다.
“하아……. 이제 그만, 하으…… 그마안……!”
“좋아?”
무게감 있는 질문이 다가왔다. 가물거리던 문성하의 눈꺼풀이 들렸다. 천장에 붙은 조명이 희롱하듯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헐떡이던 문성하가 가까스로 눈초리를 가다듬었다. 희뿌옇기만 하던 시야가 점점 또렷해졌다. 본연의 모습을 찾아갔다.
“좋아…….”
“변태 새끼.”
피식거린 현주원이 담배를 뗐다. 선명하게 남은 붉은 자국이 얼핏 봐도 형형했다. 현주원이 담배를 까딱거렸다.
“더 해 줘?”
“이제 됐어.”
문성하가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가만히 내려다보던 현주원이 손을 옆으로 뺐다. 재떨이를 찾아간 담배 끝이 중심부에 처박혔다. 매캐한 냄새를 남기며 새빨간 불이 멸등했다.
“네 또라이 같은 성정 앞세워 남 이용해 먹을 생각 마.”
현주원이 훈계했다. 문성하가 헛웃음을 쳤다.
“내가 언제 그랬어.”
“사실이지. 우리 문성하가 남들 깔아 보는 데 도가 튼 건.”
“착각이 심하시네요. 현주원 대표님. 제가 얼마나 대표님을 존경하는데.”
“지랄 말고.”
이번엔 현주원이 웃었다. 한층 다가온 그의 입매에 기다란 냉소가 맺혔다.
“넌 그냥 너를 마구잡이로 박아 주며 창부처럼 대할 남자가 필요한 거야. 그게 아니면 자극받을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걸 아니까.”
문성하가 빈정거렸다.
“그래서, 역겨워? 싫으면 때려치워. 형이 사디스트 변태 새끼인 걸 어디 가서 소문은 안 낼 테니까.”
현주원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싫어. 너 같은 애를 또 어디서 구해?”
문성하는 그저 입매를 꼬고 말았다. 룸이 조용해진 가운데, 현주원이 상체를 낮춰 왔다. 화끈거리는 부위에 질척한 입술이 맞춰졌다. 숨 고를 틈도 없이 춥, 빨린 살이 부어올랐다. 문성하가 버둥거렸다.
“하으읏…….”
“이 마조히스트 변태 새끼야.”
“하아…….”
“더 빨아 달라 해.”
현주원이 그르렁거렸다.
“정신 나갈 정도로 망가뜨려 달라 애원해.”
문성하가 할딱였다. 망막에 걸린 현주원을 유령처럼 바라보다가, 대뜸 입을 열었다. 악에 받친 한 마디가 룸을 울렸다.
“빨아. 이 개새끼야.”
말이 끝나자마자 덴 부위가 덥석 물렸다. 맹목적으로 살을 덮친 입이 게걸스럽게 고통을 흡입했다. 엉덩이 골까지 빨려 나가는 기분에 문성하가 머리를 덜컥였다. 그 와중에 본능적으로 뻗어 나간 손이 현주원의 어깨를 긁어 가며 재촉했다.
“하아……. 빨리, 씹……. 으읏…… 더 빨, 흐읏…….”
“어. 해 준다니까.”
느물거린 현주원이 한껏 입을 모았다. 적나라한 소리를 내며 벌건 살이 빨렸다. 아픔을 동반한 쾌감에 문성하의 흰자위가 번뜩였다. 현주원이 이를 드러냈다.
“만족해? 이제 벌려.”
***
정신을 차렸을 때는 갓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던 문성하가 제 얼굴을 쓸었다. 또 이 모양이다. 네 시간 전, 처음 만나자마자 몸을 섞은 후 현주원이 문성하의 몸에 담뱃불을 지졌다. 거기에 문성하가 달아오른 꼴을 보이며 자연스럽게 두 번째 섹스가 이뤄졌다. 폭풍우 같은 시간을 보내고 나니 지금이다. 암묵적으로 합의된 계약의 결과다. 문성하가 속으로 치를 떨었다.
돌아 버리겠다. 왜 이러고 살지.
문성하는 그 어떤 것보다 자신을 몰아붙이고 압박하는 섹스에 흥분한다. 그리고 그런 섹스를 가장 많이 제공한 게 현주원이다. 대학 졸업 직후 최재율의 소개로 현주원을 만났고, 그와 세 번의 잠자리를 가진 후 물 흐르듯 DF벤처스의 심사역이 됐다. 벤처 쪽 경력이 전혀 없는 사회 초년생 입장에서 과분한 직함을 얻었다. 서로의 니즈가 너무나도 잘 맞아떨어진 결과다.
현주원은 예쁜 것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즐겼고, 문성하는 잔인한 자극에 종속되는 걸 즐겼다. 아주 저질스러운 섹스 파트너 관계였다.
“베이스터가? 하……. 재미있게 나오네. 알았어. 한번 보자고.”
뒤통수 너머에서 흥미에 젖은 통화 소리가 들렸다. 문성하의 고개가 돌아갔다. 통화를 끊은 현주원이 곁눈질을 보냈다.
“깼어?”
“베이스터? 그 블록체인 회사?”
“여기가 확실히 업계 이슈네. 국내 VC라면 개나 소나 거기다 지분 못 얹어 난리야.”
“베이스터 같은 곳이 투자 오픈을 하겠어? 거기 시가 총액만 200조 원 이상이야. 창립자 지분은 그중 7%고.”
“뭐, 그건 그거고. 한국에서 사업하려면 민낯 까야지. 베이스터 창립자 지분은 향후 5년간 매각을 못 하게 돼 있어. 베이스터 백서4)에 명시한 내용이야. 무엇보다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내 편’, ‘내 라인’ 만드는 것 이상으로 효과적인 사업 방안이 없지.”
“베이스터에서 한국인 자본을 받는다고?”
“일단은 가정.”
제 턱을 매만진 현주원이 덧붙였다.
“왜 베이스터가 굳이 한국에서 플랫폼 사업을 하겠다고 나섰는지는 몰라. 다만 일단 공표한 이상 한국 사회의 신뢰를 얻어야 해. 이때 가장 쉬운 방법? 한국인 투자자를 끌어들이는 거야. 이들이 엄청난 연줄이자 발판이 돼 줄 거거든. 국내 VC가 호시탐탐 베이스터에 숟가락 얻을 기회를 노리는 건 마냥 허황된 얘기가 아니야. 국내에서 투자를 오픈하는 건 베이스터 입장에서도, 투자사 입장에서도 윈윈이야. 막상 스타팅 시그널이 오지 않았을 뿐이지.”
“난 모르겠다. 형이 알아서 해.”
문성하가 귀찮다는 양 베개에 얼굴을 뉘었다. 진심이었다. 베이스터가 당장 자신에게 일확천금을 안겨 줄 회사라면 마음이 동하겠지만, 현재로서는 아지랑이처럼 기기묘묘한 신기루일 뿐이다. 대단한 곳이라는 걸 알지만, 이 회사는 공개된 실적이 없다. 상상력이 부족한 문성하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신봉했으며, 그 같은 기준 아래 베이스터는 화려하되 위험한 불꽃 축제에 불과했다.
“거기 공동 창립자 한국인이라며?”
베갯잇을 건드린 문성하가 물었다. 현주원이 날연히 답했다.
“어. 엊그제 법인 등록해서 실명 오픈됐어.”
“이름이 뭐야.”
“권도재.”
“홈페이지에 등록된 이름은 그거 아니었던 것 같은데.”
“블록체인 프로젝트 팀에서 대외적으로 내놓는 이름은 애초에 가명인 경우가 많지.”
“하긴, 그러네.”
“너 혹시 말 나온 김에 베이스터 파 볼 생각…….”
현주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트에서 진동음이 났다. 현주원이 먼저 팔을 뻗었다. 부들거리는 문성하의 핸드폰이 그의 손에 딸려 올라왔다. 뚫어져라 액정을 보던 현주원이 슬쩍 미소 지었다.
“‘동생’이 누구야? 문성하.”
문성하가 손을 내저었다.
“관심 갖지 마. 말 그대로 친동생…….”
“동생 맞긴 해? 프로필 사진 보니 하나도 안 닮았는데.”
현주원이 한쪽 입매를 비뚤었다.
“너하고 떡 치는 남자라는 쪽이 더 신빙성 있어 보이는데. 문성하.”
분연해진 문성하의 손이 빠졌다. 재떨이 위에서 타들어 가는 담배꽁초를 채, 현주원의 턱에 갖다 붙였다. 연기가 훅, 치솟는가 싶더니 반지레한 가죽이 지글거렸다. 턱을 떤 현주원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못지않게 눈을 치뜬 문성하가 시근덕거렸다.
“좆같은 소리 좀 하지 마. 어떤 정신 나간 새끼가 친동생하고 떡을 쳐?”
***
같이 산 지 반년이 된 어느 초여름, 동생이 멍투성이가 돼 귀가했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아버지에 반해 문성하는 가만히 있지 못했다. 바로 동생을 방으로 끌고 가 따졌다.
“꼴이 그게 뭐야.”
“그…….”
동생은 설명하기 귀찮다는 듯 딴청을 피웠다. 화가 난 문성하가 거실로 걸어갔다. 수화기를 들고 학교 전화번호를 누르려는 문성하를 동생이 저지했다. 겁에 질린 눈망울이 흔들리고 있었다. 문성하가 독촉했다.
“얘기 안 할 거야?”
“별것 아니야.”
“별것 아니면 형한테 얘기 안 해도 돼?”
윽박지르는 소리가 나왔다. 12세짜리 동생은 움츠러든 채 바닥만 봤다. 문성하는 부릅뜬 눈으로 동생을 살폈다. 자신도 많은 나이는 아니었다. 고작 17세였다. 그래도 동생보다 머리 몇 개는 큰 입장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는 동생에게 관심이 없었으므로, 자신이라도 그리 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축구 했어.”
“축구?”
“어. 학교 축구팀에 사람 모자라다고 임시로 나 끼워 넣었어.”
“오늘 처음 했어?”
“지금까지 다섯 번 했어. 축구팀에 사람 빌 때마다.”
“포지션은 뭐 했어.”
“골키퍼.”
“잘했어?”
“전부 막았어.”
“엄청 잘했네.”
문성하가 칭찬했다. 기분이 나아진 동생이 배시시 입을 실룩거렸다. 곧 부쩍 침울해졌다.
“그런데 다음부터는 안 해도 된다고 했어.”
“누가.”
“감독이.”
“네가 정식 축구팀원이 아니라서?”
“나한테 축구팀 할 거냐고 물어는 봤어. 그런데 곧 아버지 따라 미국 간다고 했더니 그럼 됐다고 했어.”
“너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고, 됐다고 했어?”
문성하가 소리쳤다. 수그린 동생은 말이 없었다. 붉으락푸르락해진 문성하가 몸을 틀었다. 부리나케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어젖혔다. 죽기 살기로 뛰어온 주혜성이 문성하를 붙들었다.
“형! 왜…… 왜 그래. 화났어?”
“시끄러. 넌 여기에 있어.”
“어디 갈 건데. 어?”
들려오는 애원이 절박했다. 문성하는 대충 동생을 밀쳐 내고 현관문을 닫았다. 머리가 온통 끓어 한 가지 목적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바로 밑층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불러 올라타는 문성하의 귓가에 동생의 울부짖음이 사무쳤다. 형! 가지 마. 나 무서워.
환청 같은 소리를 털어 내고 택시를 불러 주혜성의 학교로 갔다. 운동장에서 한창 축구 중인 무리가 보였다. 스탠드 쪽에는 손으로 뭔가를 지시하는 성인 남자가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간 문성하가 그의 앞에 섰다. 남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혜성이 형입니다.”
상황을 알아챈 교사의 낯에 귀찮음이 드리웠다. 눈에 핏발을 세운 문성하가 언성을 높였다.
“애를 아주 멍투성이로 만들어 놓고 집으로 그냥 돌려보내요? 이거 명백한 아동 학대입니다. 이럴 거면 애초에 끌어들이지를 마셨어야죠. 이용할 것 다 이용해 놓고, 필요 없을 때는 나 몰라라 하는 게 교육자가 할 짓거리예요? 교육청에 건의할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한테 공받이 시켜 놓고, 멍투성이 만들어 놓고. 결국 방관했다고.”
야멸차게 등을 보였다. 아니, 잠깐만 학생. 그게 아니고…… 여긴 정식 축구팀이고, 학교 방침상……. 뒤편에서 주저리주저리 꺼내는 변명이 들렸다. 뒤를 힐금한 문성하가 악을 썼다.
“방침은 모르겠고, 팩트만 따집시다. 순진한 어린애 끌어들여서 땜빵 골키퍼 시켰으면 최소한의 책임을 지세요. 정식 팀원까진 바라지도 않아요. 후보 정도는 시켜 줄 수 있잖아요. 무슨 교사라는 분이 이렇게 무책임합니까.
제 동생 팔하고 목, 보긴 했어요? 시퍼런 멍이 대여섯 개는 들었는데. 이전에도 네 번이나 시켰다면서요. 제가 못 봐서 그렇지, 그런 상처가 서른 개는 족히 났을 겁니다. 12세짜리 어린애 몸에 말이죠.”
남자 쪽에서 말이 없어졌다. 인상 쓴 문성하가 다시 교문을 향했다. 걸어가는 문성하의 등에 대고 남자가 소리쳤다. 학생! 두 시간쯤 후에 통화될까? 내가 혜성이 집에다 전화할게. 어? 학생이 오해하는 게 있어……. 문성하는 일부러 못 들은 척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널브러진 책가방이 보였다. 주춤한 문성하가 거실을 훑어봤다. 책이며 화분, 액자 따위가 폭탄이라도 맞은 양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완전히 전쟁 통이었다.
“혜성아.”
가방을 치우며 동생을 불렀다. 안쪽에서 기척이 났다. 제 방에서 풀죽은 짐승이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습관적으로 손톱을 물어뜯다 난 생채기였다.
“집이 왜 이 모양이야.”
문성하가 다가갔다. 쪼그리고 앉은 주혜성이 울먹였다.
“형이 나 버렸잖아. 날 불안하게 했잖아.”
“그게 무슨 얘기야. 형이 왜 너를 버려?”
“아까 화내고 그냥 나간 게 버린 게 아니면 뭐야.”
“그건 그냥 나간 게…….”
부정하던 문성하의 턱이 멎었다. 물기는 미미하지만, 누가 봐도 슬픔에 젖은 눈망울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탄식한 문성하가 팔을 뻗었다. 덜덜거리는 동생을 품에 넣고는, 다독여 가며 달랬다.
“화는 났는데, 혜성이에게 난 게 아니야.”
“그럼?”
“축구 담당 선생한테 난 거지.”
“아까는 왜 그냥 나갔어?”
“선생 붙들고 따지려고.”
“선생님이 뭐래? 형한테 엄청 뭐라고 했지?”
주혜성이 훌쩍였다. 문성하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뭐라고 안 했어. 형이 먼저 선생 기 제대로 눌러놨거든.”
“진짜?”
“응. 선생은 찍소리도 못했어.”
“다행이다.”
주혜성이 안도한 듯 제 눈가를 훔쳤다. 어깨의 경련이 사그라져 갔다. 관찰하던 문성하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혜성아.”
“응. 형.”
“너 축구 계속하고 싶어?”
“응.”
“왜?”
“재밌으니까.”
“그러면 형이 혜성이 축구팀 들어가게 해 줄까?”
“정말?”
반색한 주혜성이 문성하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떻게? 형이 어떻게 나 축구팀 시켜 주는데? 문성하가 엄청난 것을 알려 주듯 속삭였다. 형이 아까 선생 기 제대로 눌러놨다고 했잖아. 선생이 먼저 찔리는 게 있으니 그런 거야. 그거 쥐고 흔들면, 선생은 알아서 따라와.
정말로, 바로 다음 날 주혜성은 정식 축구팀원이 됐다. 통화를 마친 후 정신 나간 문성하가 교육청 게시판에 도배라도 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선생이 주혜성을 서브 골키퍼로 채택했다. 주혜성은 신이 나 그라운드를 뛰어다녔고, 볼을 많이 막은 날에는 집에서 문성하를 끌어안으며 오늘의 실적을 자랑했다. 그러면서 말했다.
형이 내 형이라서 다행이야. 형 덕분에 축구도 하고, 공도 다섯 개나 막았고, 즐거워졌어.
형 없을 땐 즐거운 게 없었는데.
***
「형. 언재 와?
동생」
갓 들어온 메시지 밑에 손가락을 댔다. 답신이 하나하나 새겨져 갔다.
「혜성아. ‘언재’가 아니라 ‘언제’…….」
결국 그만뒀다. 주혜성은 같은 문자를 열 번 넘게 보냈다. 내내 무시하다 이제 와 답을 보내 봐야 의미가 없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집 호수가 찍힌 현관문이 보였다. 피곤한 눈싸움을 하다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빙글 돌아가며 문이 열렸다.
“혜성아. 형 왔어.”
열린 문틈으로 어두컴컴한 실내가 비쳤다. 문성하가 유심히 안을 살폈다. 곳곳에 널브러진 집기가 아찔하게 시야를 메웠다. 화들짝 놀라 벽을 짚었다. 더듬거린 끝에 스위치가 잡혔다. 누르자 번개가 친 것처럼 안이 환해졌다.
“혜성아.”
자못 커다란 부름이 나왔다. 등줄기가 바싹바싹 말라 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리모컨에서부터 쿠션, 냄비, 접시까지. 거실과 부엌의 눈에 띄는 사물들이 온통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문성하의 호흡이 거세졌다.
“주혜성!”
저편에서 움찔하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구석에 숨어 들어간 실루엣이 들썩이고 있었다. 문성하가 잽싸게 발을 내디뎠다. 걸어가는 동안 몇몇 물건이 발등에 채였다. 적막한 집 안을 스산한 마찰음이 가로질렀다.
“왜 그랬어. 어?”
앞에 선 문성하가 물었다. 주혜성은 말을 하지 않았다. 둥글게 만 팔에 얼굴을 묻은 채 파들거릴 뿐이었다. 문성하가 닦달했다.
“형한테 말 안 할 거야?”
“형이 나가라고 했잖아.”
희미한 한 마디가 들렸다. 문성하가 멈칫했다.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 주혜성이 흐느꼈다.
“한 달만 챙겨 주고, 다음부터는 나 혼자서 살라 했잖아.”
“그렇다고 집 안을 이 난장판으로 만드는 게 형에게 할 짓…….”
“형 물건 막 던진 건 미안해. 나도 모르는 새 이렇게 됐어. 내 의지가 아니었어.”
주혜성이 자책하듯 제 머리를 벽에다 박았다. 문성하의 눈이 까물거렸다. 부쩍 흐무러진 시야에서 전율하는 동생의 몸만이 선명했다. 문성하의 팔이 내려갔다. 발작하는 어깨를 두르고, 짙은 숨을 골랐다. 동생의 떨림이 여진처럼 남아 머리를 뒤흔들었다. 참기 어려운 현기증에 심장까지 욱신거렸다.
스스로가 싫어진다.
지난 10년 동안 꾸준하게 붙들어 온 신념이 있었다. 그 어떤 열기에도 녹아내리지 않는 빙하처럼 굳건한 의지였다. 그렇게나 끄떡없던 얼음에 균열이 생겼다. 10년 만에 동생이 나타난 그 시점에. 그건 사고와도 같은 지진이었다.
분명히 치명적인 실수가 될 것이다. 문성하는 직감했다. 알면서도 동생을 자신의 거실에 들였다. 도저히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밀어 내는 순간 그 불완전한 존재가 중심을 잃은 젠가처럼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동생은 결핍과 훼손으로 점철된 열등의 결정체다. 보기엔 좋으나 그뿐이다. 타고나길 부족해 속이 휑하고, 거기에 멸시와 경멸이 스며 곪기까지 했다. 동생을 처음 만난 10년 전, 문성하는 바로 알아봤다. 그래서 더 맹렬하게 끌어안았다.
너무도 익숙해, 품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미안.”
작은 사과가 나왔다. 주혜성의 눈초리가 옴씰거렸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난 문성하가 쓰라린 목소리를 꺼냈다.
“불안하게 해서 미안해. 어쩔 수 없었어. 형은…… 두려운 게 아주 많거든.”
입술이 말아 물렸다. 문성하의 눈이 감겼다. 조금 허무해졌다. 구구절절 설명해 봤자 동생이 다 알아들을 턱이 없는데. 어둠 속에서 괜한 책망을 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곧 눈을 뜨고 다른 말을 했다.
“아무튼……. 형이 생각을 잘못했어. 혜성이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 같아.”
문성하의 몸이 흘러내렸다. 무릎을 꿇은 채, 동생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더 있어도 돼. 혜성아.”
흑석 같은 주혜성의 눈동자가 미동했다. 기다란 목을 타고 굵은 침이 넘어가는 게 보였다. 그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대략 얼마나?”
문성하가 아물거렸다.
“한…… 반년이나 일 년 정도.”
차마 무기한 그래도 된다는 얘기는 할 수 없었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진심은 확고히 표출했다.
“혜성이가 여기 있는 동안, 형은 최선을 다해 혜성이가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줄게.”
주혜성의 입매가 일자로 다물렸다. 문성하를 담은 눈이 허물어져 갔다. 보일 듯 말 듯 비치는 입술 틈에서 혼잣말이 샜다.
“다행이다, 형……. 이걸로 끝이 아니라서.”
한층 낮아진 한 마디가 따라붙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끝나면 안 되잖아.”
***
“대표님께서 차가 많이 밀려 늦으신답니다. 우리끼리 먼저 시작합시다.”
통화를 마친 상무가 운을 뗐다. 회의실에 모인 심사역 전원이 자세를 바로 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정기 회의였다. 가져온 서류를 뒤적이는 심사역 사이에서 문성하도 발표 준비를 했다. 뚜벅뚜벅 걸어간 상무가 스크린 앞에 섰다.
“일단 공지 사항 하나.”
스크린을 짚은 상무가 턱짓을 했다. 눈이 마주친 사무직원이 화면 하나를 띄웠다. 새하얀 스크린에 한 IB매체 뉴스 기사가 나타났다.
「베이스터, 초대형 물류 추적 플랫폼 내놓는다」
심사역들은 놀라지 않았다. 기사는 오전에 떴고, 심사역들은 관련 기사를 검색하며 충분한 스터디를 마친 입장이었다. 현재 VC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벤처가 새 사업 계획을 공포했다. 돈을 좇는 투자자로서 놓치기 힘든 이벤트다.
“김현재 팀장.”
상무가 호명했다. 김현재가 벌떡 일어섰다. 명문 공과 대학을 나와 동대 대학원에서 블록체인 및 AI를 공부한 해당 업계 전문가다. 포트폴리오에는 항시 블록체인 기업이 껴 있었고, 적지 않은 수익률을 냈다. DF벤처스에서 블록체인 전문가라고 하면 언제나 그가 꼽혔다.
“네. 상무님.”
“베이스터 플랫폼과 기존 물류 트래킹(Tracking) 플랫폼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간략하게 설명 부탁드립니다.”
“예. 일단.”
뒷짐을 진 김현재가 입을 다셨다. 곧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자세한 형태는 추후 공개된 후 알 수 있겠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번 베이스터 플랫폼은 ‘가장 완전한 맞춤형’입니다. 100% 주문 제작 형태로 베이스터와 계약을 체결하면 거기서 기업의 성격에 맞게 커스터마이징한 플랫폼을 가져다줍니다. 일개 쇼핑몰에서부터 농수축산물 업체, 대형 물류 기업까지. 모두가 각자의 회사에 걸맞은 형태로 베이스터 트래킹 시스템을 쓸 수 있습니다.
베이스터는 현존 블록체인 중 가장 빠른 TPS와 높은 보안성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소비자의 신뢰를 얻고 싶은 기업이라면 누구나 이걸 쓰고 싶어 할 겁니다. 더 중요한 건 이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베이스터 얼라이언스’에 있습니다.”
“베이스터 얼라이언스.”
상무가 주억거렸다. 김현재가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한 마디로 ‘베이스터 트래킹 플랫폼을 쓰는 기업들의 연합’입니다. 이 플랫폼이 도입되면 소비자는 내가 어제 주문한 생수, 저녁에 먹을 소고기, 내일 배송 받을 의류가 어디서 왔고, 어떻게 흘러 다녔으며, 어떻게 도착했는지를 상세히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엔 다소 귀찮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확인한 바에 따르면 QR 코드를 인식시키는 것만으로 추적이 되는 단순한 형태에, 보석이나 명품 같은 고가의 물품이라면 필수처럼 인식될 테니 국내에서 자리 잡는 게 아주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런 식으로 국민을 하나둘 이 플랫폼에 적응시키고 나면, 결과적으로 여기에 등록되지 않은 물품을 불신하게 되는 양상으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베이스터 얼라이언스에 가입하지 않은 기업의 물품은 ‘인증되지 않은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지.”
“맞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플랫폼에는 위험한 구석이 있습니다. 시장 내 카르텔이 될 여지가 있으니까요. 가입하지 않으면 도태되기 때문에, 필요하지 않은 기업도 억지로 가입하는 그림이 나올 수 있습니다.”
김현재가 망설인 끝에 덧붙였다.
“물론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둔 가정이지만요.”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문성하는 가만히 손톱을 물어뜯었다. 일리가 있는 얘기지만, 너무 나간 것 아닌가. 아무리 베이스터의 트래킹 플랫폼이 훌륭하다 해도, 대한민국 시장을 저 수준으로 잠식하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그러려면 선발 주자로 채택된 기업이 엄청난 대어(大魚)여야 했다.
“세명그룹 등 일부 기업이 베이스터하고 얘기 중이야.”
회의실 문이 열렸다. 현주원이 탐탁지 않게 몸을 들였다. 심사역들이 일제히 그를 봤다. 일부는 긴장해 있었다. 세명그룹은 국내에서 가장 시가 총액이 높은 기업 집단이었다. 재킷을 벗은 현주원이 심사역 하나하나에 눈을 맞췄다.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해. 세 명까지는 아니어도, 국내 톱5 기업 집단 중 하나는 반드시 베이스터와 파트너십을 맺을 거야. 거기를 시작으로 도미노처럼 계약 체결하는 회사가 늘어날 거고.”
“DF그룹도 움직이고 있습니까.”
한 심사역이 손을 들었다. 현주원이 끄덕였다.
“DF전자에서 나서고 있어.”
“그러면 우리 쪽에도 기회가 있는 것 아닌가요?”
그 심사역이 눈을 빛냈다. 대기업과 벤처 기업이 파트너십을 체결한 경우, 해당 대기업 산하 VC의 벤처 대상 투자가 이뤄지는 건 흔한 일이다. 한 마디로 ‘주워 먹기’를 하겠다는 얘기다. 현주원은 속내를 알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그건 현재로서 모르는 일이야.”
“그러면 DF전자 측에 얘기해 베이스터 관련 정보를 얻는 건…….”
“가능은 하겠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아. 기본적으로 대외비이기도 하고.”
현주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로 그런 건 하고 싶지 않다는 투였다. 아까의 심사역이 입을 오므렸다. 현주원이 대놓고 선을 그어 민망해진 듯했다.
“문성하 심사역.”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문성하의 고개가 들렸다.
“네. 대표님.”
“문 심사역이 책임지고 베이스터 작업해. 투자받을 의사는 있는지, 있다면 지분은 얼마나 내줄 수 있는지……. 총알은 걱정하지 마. 내가 얼마든지 채워 줄 거야. 할 수 있는 최대한 알 박기 들어가. 베이스터는 무조건 될 회사니까.”
문성하의 눈망울이 떨렸다. 현주원이 갸웃했다.
“왜. 싫어?”
“아닙니다. 다만 저는 블록체인 기업을 맡아본 적이…….”
문성하가 넌지시 김현재를 살폈다. 미미하게 분을 삭이는 그가 보였다. 문성하가 목을 가다듬었다.
“더 적합한 심사역이 있습니다. 담당 심사역이 제가 될 이유가 없다고 판단됩니다.”
“그 이유를 모르겠어?”
현주원이 발을 뻗었다. 상석으로 향하는 그의 걸음에 따라 뚜벅거리는 구둣발 소리가 번졌다. 미적거리던 문성하의 시선이 흠칫했다. 아주 짧은 순간, 현주원의 볼 밑으로 내려간 손가락이 두드려지는 걸 봤다. 불그스름한 상흔이 문질렸다. 지난 주말 문성하가 남긴 것이었다. 현주원이 입꼬리를 비뚤었다.
이래도 몰라? 문성하.
테이블을 덮은 손이 달싹였다. 입술 틈으로 밭은 숨이 샜다. 괜히 머리를 쥐어짜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다른 건 몰라도, 현주원 기분이 아주 좆같다는 건 알았다.
현주원이 상석에 몸을 앉혔다. 심사역들을 일별하고는, 양손을 맞잡으며 손가락 깍지를 꼈다. 여유로운 한 마디가 나왔다.
“그럼 시작할까요? 왼쪽의 홍진아 심사역부터.”
여자 심사역이 빠릿빠릿하게 일어섰다. 시작합니다. 지난 주말 기준 제 포트폴리오 상황은……. 또박또박 이어지는 보고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문성하가 핸드폰을 잡았다. 테이블 밑에다 숨기고는, 최재율의 연락처를 찾아 메시지를 보냈다.
「현주원이 혹시 형한테도 지랄했어?」
얼마 지나지 않아 답신이 왔다.
「아니. 엊그제 너 지랄맞다고 하긴 했어.
ST인베스트먼트 최재율 팀장」
씨발. 문성하가 테이블에 이마를 찧었다. 등을 들썩이다 현주원의 욕을 적어 보내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이는데, 요란한 벨 소리가 터졌다. 화들짝한 문성하가 허리를 세웠다. 엄한 목소리가 들렸다.
“회의 시간에 누가 벨이 울리게 둡니까.”
현주원이 문성하를 쏘아봤다. 뭉그적거리던 문성하가 액정을 살폈다. ‘동생’이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끊어 버리고 말 텐데, 차마 이건 무시하기 힘들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겨 전화한 것이라면 어쩌란 말인가. 망설이던 문성하가 통화 아이콘을 눌렀다. 급하게 귀에 가져가 속삭였다.
“혜성아. 미안한데 형이 지금 회의 중…….”
[그거 달라고, 빨리!]
쾅. 뭔가가 엎어지는 소리가 났다. ‘와, 진짜. 새끼…….’ 생소한 남자 목소리가 귀를 스치고, 곧 핸드폰 잡아채는 기척이 느껴졌다. 가까워진 주혜성의 숨결이 거칠었다.
[미안해, 형. 같이 일하는 형이 자꾸 내 전화로 장난쳐서.]
“깜짝 놀랐잖아. 그 형한테 하지 말라고 해.”
타이른 문성하가 눈치를 봤다. 여전히 자신을 주시하는 현주원과 눈이 딱 마주쳤다. 문성하가 목소리를 낮췄다.
“끊을게. 일 열심히 하고. 혜성아.”
[응. 형도.]
통화가 끝났다. 번쩍이는 액정을 밀어 둔 문성하가 뻔뻔하게 회의에 집중하는 척했다. 현주원의 눈길은 애써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