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34)

결승전의 조건



“오빠.”

소파에 앉아 있던 연지가 말했다.

“왜.”

마룻바닥에 앉아 있던 인준이 대답했다.

“우리 어제도 이러고 있지 않았어?”

노트북이 연결된 TV 화면에는 크게 뜬 숫자 카운트다운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어두운 창밖을 한 번, 벽면에 걸려 있는 시계를 한 번 본 연지는 마치 토일을 하나로 합쳐 놓은 듯한 주말의 악랄함에 치를 떨어야 할지, 소름 끼치도록 어제와 똑같은 상황에 데자뷔를 느껴야 하는 건지 조금 헷갈린다고 생각했다.

“그럼 지금이라도 리그 끌까?”

“뭔 소리야, 어제랑 오늘은 초성부터가 존나 다른데. 오빠 자꾸 나약한 소리 할래?”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화면 속 카운트다운이 끝난다. 슬슬 귀에 익기 시작한 오픈 시티 리그 전용 배경 음악이 깔리면서 보여지는 화면은 시카고와 뉴욕의 결승전 인터뷰였다. 소파 팔걸이에 기댄 채 녹아내리던 연지가 재빨리 자세를 바로 했다. 그렇다. 어제와 똑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왜냐면 어제는 시카고와 뉴욕이 각각 경기했고, 오늘은 시카고와 뉴욕이 경기를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하마터면 연지의 발에 차일 뻔한 인준은 금방 태세를 바꾼 동생에게 주의 주는 대신에 좀 더 옆으로 떨어져서 몸을 구겼다. 지금이 전부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사실 꿈일 확률이 굉장히 높았다. 토너먼트 1일 차 경기를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인준은 목 끝까지 이불을 끌어 올린 뒤 가까스로 돌린 수면 패턴을 그대로 걷어찼다. 혹시라도 미국에 있는 누구에게든 연락이 올까 해서였다. 누군가 우승하기 전까지는 답장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다렸다.

준혁의 경기에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뉴욕의 경기는 걱정하는 게 손해라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그것들이 팔을 다친 발렌타인과 이준혁이기를 거부하는 라이스의 경기를 보기 편안하게 만들어 주진 않았다. 막상 보면 괜찮을 거라고, 오늘 경기도 연지를 앞에 두고 흥분하지 않고 잘 보지 않았느냐고 스스로를 달래면서 잠을 청하면 감독에게 고맙다고 말했던 럴러바이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재생되었다.

그렇게 잠들었나 싶다가도 금방 정신을 차리기를 반복하며 밤을 지새웠으니 이건 꿈일 가능성이 컸다. 아무튼 높았다. 왜냐면 내가 높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생각하다 지친 머리가 저도 모르게 잠자리에 들고 현실과 굉장히 유사한 꿈을 꿀 확률을 계산하기 위해 자신이 아는 모든 확률과 통계를 끌어오던 인준은 손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이 자신의 꿈이라면 공개된 시카고 선발 라인업에 라이스가 있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먼저 시카고의 선발 라인업입니다! 오늘도 어제와 크게 다른 건 없군요. 탱커에 잴러스 선수, 메인 딜러에 라이스, 플로이드 선수, 서브 딜러에 너스콜 선수, 그리고 서포터에 럴러바이 선수! 여태까지 시카고에게 가장 많은 승리를 안겨다 준 조합이죠!>

“시카고는 그냥 라이스가 잘해서 올라온 거 아냐?”

아주 예리한 지적이었다. 살짝 고개를 들어서 본 화면에서는 시카고의 선수들이 경기장에 입장하고 있었다. 순서는 어제와 똑같았다. 주장인 럴러바이가 맨 앞에 서 있었다. 연둣빛으로 물들었던 어제의 경기장과는 다르게 오늘의 경기장은 딱 네 가지 색깔밖에 없었다. 검은색과 파란색. 하얀색과 빨간색. 시카고와 뉴욕의 색깔이었다. 경기장에 입장한 선수들은 곧바로 자신의 자리로 들어갔던 이제까지와 다르게 경기석 앞에 일렬로 선다. 처음 보는 연지가 뭐 하는 거냐고 묻고, 18년도에 질리도록 봐 왔던 인준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어서 공개되는 뉴욕의 선발 라인업인데요! 메인 탱커에 검블 선수, 서브 탱커에 녹스 선수, 메인 힐러에 순신 선수, 그리고 서브 힐러에 신속, 블리츠 선수입니다. 오늘도! 오늘도!! 뉴욕의 라인업에 발렌타인이 없어요!!>

“오늘도 안 나와?”

“그러게…….”

연지의 목소리가 크게 실망한다. 힘없이 대답하는 그 순간에 피어오르는 건 안도감이었다. 뉴욕은 발렌타인을 낼 생각이 없다. 그 사실 하나가 유일한 위안이 되었다.

<뉴욕은 쟁탈전 조합을 2탱 3서폿으로 고정한 것 같습니다. 4강전까지 올라오면서 실수가 가장 적었던 조합이긴 하지만, 이 안정적인 3서폿이 어쩌면 오늘은 뷔페에 불과할 수도 있어요. 지금 시카고에 서포터 학살자가 한 명 있거든요?>

<장지원 해설도 어제 사람들 반응을 봤군요?>

<원래도 라이스 선수가 별명이 많았는데, 어제는 정말 쏟아지더라고요. 저는 작명 대회 연 줄 알았습니다. 너무 웃겨서 보다가 잘 시간 넘기고, 네, 그랬습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뉴욕 선수들이 입장합니다!>

다시 한번 화면이 전환되고 하얀색과 빨간색으로 꾸며진 유니폼을 입은 뉴욕 선수들이 경기장으로 들어온다. 경기장 중앙 복도를 지나서 들어온 그들은 시카고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경기석으로 곧바로 들어가는 대신에 상대 팀을 마주 보고 섰다.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던 것도 잠시, 뉴욕의 검블이 시카고에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맞잡은 건 럴러바이였다.

“뭐, 주장끼리 하는 건가 보네.”

눈치껏 맥락을 이해한 연지의 말대로였다. 10초 남짓한 그 행위는 출범 시즌부터 이어진 오픈 시티 결승전 의례였다. 경기에 임하기 전, 홈 유니폼─원래는 홈 경기장 기준 더 멀리 있는 지역팀이 어웨이 유니폼을 입어 팀 구분을 쉽게 했다─을 입은 두 팀이 마주 보고 서서 각 팀 주장이 악수하는 것. 상대 팀을 존중하는 경기를, 자기 자신에게 후회가 남지 않을 경기를, 팬에게 부끄럽지 않은 경기를 할 것을 팀 대표로서 약속하는 것이다.

관중석 쪽에서부터 들어온 카메라가 각 팀 선수들의 얼굴을 훑는다. 럴러바이의 바로 옆에 선 준혁은 뒷짐을 진 채로 가만히 상대 팀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어 럴러바이와 검블의 악수가 끝나면 선수들은 그제야 자신의 경기석으로 들어간다.

그다음부터는 여태까지 경기를 진행하던 방식과 같았다. 랜덤으로 고른 첫 맵이 공개되고, 번갈아 가면서 각각 5개씩 챔프를 밴한 뒤에 게임이 시작됐다. 다른 건 딱 하나, 지금까지 진행되던 5판 3선이 아닌 7판 4선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1세트 시카고의 밴은 녹스의 주챔 두 개와 서브 힐러로 구분되는 서포터 셋을 밴하는 데 쓰였고, 뉴욕은 럴러바이의 주챔 다섯 가지를 밴했다. 그러니까 서포터라고는 럴러바이 하나뿐인 팀한테 5서폿 밴을 했다. 양팔, 양다리를 잘라간 것으로도 모자라 목까지 잘라간 것이다. 어떻게든 준혁을 억제하기 위해 밴 카드를 써 오던 샌프란시스코나 워싱턴과는 확연히 다른 전략이긴 했는데, 인준에게 그게 어쩐지 좀, 불법처럼 느껴졌다.

물론 유일한 럴러바이를 저격한 5서폿 밴은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게 제대로 먹힌 적은 없었는데, 럴러바이는 더 이상 1서폿으로는 쓸 수 없다고 판명 난 칸나 같은 챔프로도 솔힐을 봤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뉴욕의 밴이 부당하다고 느낀 건 당연히 칸나같이 성능이 되지 않는 챔프로 보는 솔힐이 안정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탱커와 딜러들이 자생하면서 서포터의 힐 부담을 줄인다고 해도 기본 힐량이 낮아진 서포터는 필연적인 손해를 감수하면서 팀을 살려야만 했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죽게 둬야만 했다. 사거리가 난도질당해서 힐이 닿지 않거나, 힐량이 되지 않았다. 팀의 사고를 수복해야 하는 서포터가 매 한타에서 포기해야 하는 게 있었다.

전투에서 져도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줄 건 줘야 한다고는 하지만 서포터는 그렇게 주다가 내주는 게 팀원들이고 경기 승패였다. 그럼에도 럴러바이가 1서폿으로 경기를 끌어갈 수 있었던 건 라이스 덕분이었다.

상대가 더 들어올 수 없게끔 탱커의 피를 깎고, 재정비 턴을 벌 수 있도록 상대의 딜러를 따고, 상대는 아예 케어받을 수 없도록 서포터를 잡았다. 럴러바이가 자기 자신을 갈아서 본대를 버텨 놓으면 라이스가 혼자서 적팀을 정리했다. 토너먼트 경기를 복기하려던 인준은 급하게 그것을 머릿속에서 쫓아낸다. 그렇지 않으면 럴러바이를 또 믿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거두절미하고 그간 봐 온 게 있었음에도 5서폿 밴이 불법처럼 느껴진 건 단순했다. 그들이 뉴욕이어서였다. 뉴욕의 밴이라면 다 생각이 있을 것 같았다.

그 기우는 첫 한타에서 바로 현실이 되었다.

BLITZ ▷ FLOY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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