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겨난 서브 딜러
새벽에 가까운 시간, 인준은 엘리베이터 벽에 기댄 채로 1층에 가까워지는 숫자를 보았다. 연지를 본가로 돌려보낸 것과 별개로 그의 체포 소식이 들리기 전까지는 어두운 밤중에 혼자 주변을 돌아다닐 생각은 없었다. 그런 인준이 1시에 가까워지는 시간에 밖으로 나가고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혼자 남은 집에서 방해될 만한 일들을 전부 끝내 놓은 채 본격적으로 시카고의 경기들을 돌려 보던 중 메시지 한 통이 도착한 것이다. 한국에 도착했으니 마중을 나와 달라는, 발렌타인의 터무니없는 연락이.
일하는 카페의 주소를 건넬 때까지도 바닥을 치던 현실감이 단번에 되살아났다가 그대로 바닥을 뚫고 들어갔다. 진짜로 한국에 온 건 알겠는데, 정말로 한국에 있는 게 맞나 싶었다.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지도 않고 딱 가운데 있는 현실감에 당장 뭘 해도 낮에 만나자고 만남을 피했다. 그러면 공항은 됐고 보내 준 주소에서 기다리겠다는 막무가내식 답이 돌아왔다.
라이스가 말을 듣는 것처럼 보여도 은근히 고집을 꺾지 않는 타입이라면 발렌타인은 그냥 대놓고 말을 안 들었다. 진짜 그때 연락해서 지금 한국에 들어온 거면 집에 가서 쉬라고 합리적인 답을 줘 봐도, 내일 아침에 진짜 먼저 연락하겠다고 달래 봐도 듣질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자신이 나오기 전까지 그 카페 앞에서 기다릴 발렌타인의 모습은 쉽게 상상이 됐다.
한국의 여름밤 더위를 넘어 발렌타인의 체력을 지나 카페 근처에 돌아다닐지도 모르는 리그 도박 중독자까지 생각이 닿다 보면 인준은 결국 옷을 갈아입을 수밖에 없었다. 진짜 올 거면 차라리 여기로 오라고 집 앞에 있는 편의점의 주소를 찍어 보내 준 건 덤이었다.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인준은 곧바로 익숙한 편의점으로 향했다. 이렇게까지 집과 가까운 곳에 리그에 관한 사람, 그것도 라이스가 아닌 발렌타인을 들이게 될 줄은 몰랐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아무리 경찰들이 순찰한다고 하더라도 퇴원한 지 이틀도 되지 않아서 그곳으로 다시 가고 싶진 않았다. 그것도 일이 터졌던 그때보다 더 어두운 지금 시간대라면 더더욱.
다행히 집 근처는 가로등으로 밝았다. 날이 풀려 가기 때문인지 늦은 밤 산책을 나온 사람들도 간간이 보였다. 인준은 괜히 쓰고 나온 모자챙을 잡아 눌렀다. 거즈를 떼고 병원에서 받아 온 밴드를 붙인 이마는 조금씩 건드리는 정도까진 괜찮았지만, 그와 별개로 봉합을 위해 한쪽만 짧아진 머리는 어떻게 해도 보기에 영 좋지 못했다.
차라리 자는 척을 할 걸 그랬나. 한국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확인조차 하지 않았으면 발렌타인도 고집을 꺾었을까.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SNS 알림이 울린 순간에 반사적으로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때로 돌아가면 그게, 라이스의 연락인 줄 알 테니까.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보냈던 메시지는 가는 것과 동시에 안 읽음 표시가 사라졌다. 건너편에 상대가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지고 나면, 하려던 말을 기껏 정리하고 보내기 시작한 연락이었음에도 횡설수설했다.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야만 하는 전화였다면 길이길이 남을 흑역사가 되었을 것이다. 기실 텍스트 형태로 남게 된 메시지라고 뭐가 더 나은 것 같진 않았다. 토너 진출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삐끗할 뻔한 이성을 부여잡은 뒤 답을 기다리면 어떤 것도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 삼 분은 그 나름대로 할 말을 고르는 중이라 생각했고, 그다음 삼십 분은 연락하기 마땅치 않은 상태인가 싶었으며, 그다음 한 시간에는 걱정이 됐다. 그가 답장할 생각이 없다는 걸 안 건 서울역에서 연지를 배웅 보낸 뒤였다. 그때까지 라이스로부터는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고, 그래서 하루가 지난 뒤에 울린 메시지 알림이 그라고 생각했다.
슬슬 액정의 금이 익숙해지기 시작한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을 넘기면 어렵지 않게 그의 메시지 창이 뜬다. 여전히 도착한 메시지는 없었다. 저절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간다.
“뭐가 그렇게 걱정인데요.”
화면에 그림자가 지는 것과 동시에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제법 익숙한 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인준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고개를 들면 그곳에는 마찬가지로 모자를 눌러쓴 발렌타인이 있었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엄밀히 따지면 예고가 없진 않았다─ 그의 실물에 인준이 상투적인 안부도 꺼내지 못하고 벙쪘다. 정말 한국에 왔구나. 널뛰던 현실감이 체념으로 받아들여진 건 그다음이다.
“너 경기는.”
“형은 이 와중에도 그런 게 궁금해요?”
“아니, 시즌 중이니까…….”
가장 먼저 의문스러운 점을 내뱉으면 발렌타인의 표정이 미묘해진다. 상대가 벌린 거리감을 눈치챈 듯 두어 걸음 물러서고 나면 그제야 그의 전체적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겉옷으로 입은 후드까지 모자 위로 착실하게 쓴 발렌타인은 새로운 상징이 되어 가는 백금발을 완벽하게 숨긴 채였다. 조형이 잘된 이목구비는 경기장 조명이 아닌 동네 편의점 밑에서도 멀끔했다.
“말했잖아요, 쫓겨났다고.”
발렌타인이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했다. 항상 은은하게 따라붙어 오던 미소 없이 무뚝뚝한 표정이었는데, 오히려 그게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야, 그만 떠봐. 상식적으로 뉴욕이 널 버리겠냐? 너네 이번 시즌에 칼 간 거 리그 보는 사람들 다 알아.”
어쩐지 쉽게 긴장이 풀린 인준이 말했다. 얼핏 들으면 짜증이 묻어 나온 것처럼 들리는 목소리는 가벼움으로 장난이라는 걸 알렸다. 그러면 발렌타인이 살짝 고개를 돌렸다.
“…토너먼트 전까지 휴가받았어요. 뭘 하든 좋으니까 그때까지 머리 좀 식히래요.”
슬쩍 그의 뒤를 훑으면 챙겨 온 짐이라고는 어깨에 메고 있는 크로스백 하나가 전부였다. 보아하니 시카고 전에서 흔들려도 제대로 흔들린 모양이다. 과거 경기부터 훑기 바빠 오늘, 정확히는 어제 있었던 시카고 Vs. 뉴욕전은 아직도 스코어만 아는 상태였다. 하기야 뉴욕에서 새로운 간판으로 내세우고 있는 발렌타인을 다른 누구도 아닌 라이스와 붙는 경기에서 교체시킬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니었겠구나 싶었다.
발렌타인이 빠진 뉴욕이 과연 이전만큼 뛰어난 경기력을 보여 줄지는 의문이었으나, 그들은 남은 경기를 다 져도 1등으로 시드를 받아 올라가는 게 확정이었다. 그러고 나면 뉴욕 감독이 무슨 생각으로 시즌 중에 발렌타인에게 휴가를 줬는지 알 것도 같았다. 어텀 시즌은 이제 4주차를 앞두고 있었고, 그 일주일이 지난 뒤에는 바로 토너먼트 시작이었다. 자고로 프로 선수란 모든 경기를 죽을 각오로 임해서 승점을 따야 한다는 지론을 품고 사는 인준이었으나, 경기의 경중을 따지는 이성은 별개였다.
오픈 시티 리그에서 가장 중요한 경기는 누가 뭐라 해도 윈터 시즌이 끝난 뒤에 있는 그랜드 파이널이다. 토너먼트 우승에 목숨을 거는 이유도 그랜드 파이널 직행 티켓을 따기 위해서다. 그렇게 세세하게 따져서 등급을 매기면 사실 시즌 경기는 토너 진출이 확정된 순간부터는 별로 큰 의미가 없긴 했다. 승점으로 계속 카운트될 수는 있겠지만, 그 승점도 토너먼트에서의 승점 가치가 더 높았다.
즉, 뉴욕 감독은 설령 4주차 경기를 모두 지고 동부 팀에게 승점을 퍼 주게 되는 한이 있어도 발렌타인의 컨디션을 회복시켜서 토너먼트에 쓰는 게 맞다고 판단한 것이다. 인준의 눈썹이 올라간다. 리그를 좀 보는 정도인 자신이 안 것을 직접 경기를 뛰는 그가, 특히 모든 판단에서 이성이 앞서 있는 발렌타인이라면 더더욱 모를 리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걸 쫓겨났다고 말해?”
“쫓겨난 거죠. 날 믿었다면 다음 경기까진 봤을 거예요.”
그러면 발렌타인은 직접 경기를 뛰는 것에 자부심을 갖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로 대꾸했다. 목소리는 덤덤했다. 인준은 뒤늦게 그가 웃지 않고 있던 이유를 깨닫는다. 그다음으로 밀려오는 머쓱함에 괜히 목뒤 어딘가를 쓸어내리면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하면 또 틀렸다고 하기도 뭐한데, 그냥 확실하게 하고 싶으셨던 거겠지. 어쨌든 크래프트원한테 수사받는 감독보단 낫잖아…….”
어쩐지 자연스럽게 그를 위로하게 된 인준의 목소리가 올라갔다가, 단번에 내려간다. 편의점 밖에 놓인 파라솔과 플라스틱 의자들을 보던 발렌타인은 눈만 굴려 인준을 흘겼다.
“…그래서 다친 곳은요?”
“어?”
“사고당했다면서요.”
“아, 그거… 그냥 이마가 조금 찢어졌어. 별거 아냐.”
“응급실 가는 사고 중에 별거 아닌 게 있어요?”
인준은 입을 다물었다. 그게 발렌타인의 말에 동의를 얹는 것처럼 보여도 상관없었다. 22살에 리그를 보다가 응급실에 실려 간 이야기만큼은 차마 꺼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있으면 하얀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인준이 그의 손을 본 게 아니라 그의 손이 인준의 눈앞까지 다가왔다. 더 자세하게는 손가락들이, 자신의 모자챙 끝을 향해 있었다.
반사적으로 쳐내기 위해 손을 들면 발렌타인이 먼저 뒤로 뺐다. 천천히 다가왔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빠른 속도였다. 그게 리그에서 탑 티어를 먹은 프로 선수의 반응 속도인 건지, 아니면 뒤늦게 정신 차린 건지는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냥, 이마 찢어졌으면, 모자도 불편한 거 아닌가 싶어서.”
그답지 않게 어정쩡한 목소리였다. 사과는 한 박자 뒤에 따라왔다. ……미안해요. 인준은 그를 쳐내기 위해 들었던 손으로 모자챙을 살짝 잡아 눌렀다.
“…딱히 건드리지만 않으면 괜찮아.”
“다짜고짜 만지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 정도는 나도 알지.”
“그래서 무슨 일이었는데요.”
묘한 어색함이 맴도는 것도 잠시, 본격적으로 사고의 경위에 대한 추궁이 시작된다. 이런 걸 물을 사이인가 싶으면서도 말을 돌리거나 넘길 수는 없었다. 협력을 구하고자 한다면 오히려 인준의 쪽에서 먼저 꺼내야 하는 이야기기도 했다. 슬슬 버릇처럼 입에 붙은 한숨을 쉬었다.
“이야기하자면 좀 긴데, 음료수라도 사서 어디 좀 앉자.”
“그러고 보니까 시간이 많이 늦긴 했네요.”
“너도 피곤하지? 그러니까 좀 쉬고 만나자니까.”
발렌타인은 대답하는 대신에 눈을 굴렸다. 슬슬 그가 고집을 부리는 방식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인준은 다른 말을 얹는 대신에 몸을 돌렸다. 편의점에 들어가기 위함이었다. 따라올 것처럼 걷던 발렌타인이 돌연 자리에서 멈췄다. 적당히 차가운 문손잡이를 잡은 인준은 고개만 뒤로 돌려 타협된 줄 알았던 의사를 다시 한번 살폈다. 일자로 맨 크로스백 끈을 만지던 발렌타인과 시선이 마주친다.
“저 그렇게 많이 피곤해 보여요?”
“응.”
인준은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그다음에 발렌타인이 그럴 리가 없다든가, 아무튼 자기 자신에 대한 걸 어필할 거라 생각했다. 발렌타인은 자기가 잘난 걸 알아도 너무 잘 아는 축에 끼었으니까. 허튼 문답에 힘을 빼고 싶지 않았던 인준이 이번에는 정말로 편의점으로 들어가기 위해 손에 힘을 준 그때였다.
“그럼 형네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가도 돼요?”
발렌타인이 미친 소리를 했다. 인준이 눈살을 찌푸리는 것도 잠깐이었다. 반쯤 열렸던 문을 마저 열고 들어갔다.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 반응에 결국 몸을 크게 움직이는 건 발렌타인 쪽이었다. 뒷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닫히는 편의점 문에 그 사이로 발을 집어넣어 마저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
“안 돼요?”
“뭘 물어.”
“저 많이 피곤해 보인다면서요.”
형도 단번에 응, 했잖아요. 저 원래 그런 거 보이는 사람 아니거든요. 어차피 해야 할 이야기도 많은 거 아니에요? 카운터를 지나 음료수 진열대로 직행하는 동안에도 발렌타인은 계속 뒤에 따라붙어서 재잘댔다. 한 번씩 이상한 부분에서 수다스러워지던 그를 기억하는 인준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진열대 앞에서 태연히 음료수를 골랐다.
“해야 할 말이 많으니까 더더욱 밖에서 해야 목소리 높이고 마음껏 떠들 수 있고, 많이 피곤하니까 남의 집에서 눈치 볼 게 아니라 니네 집 가서 편하게 쉬어야 할 거 아냐.”
텅 비어 있는 집의 진실을 알게 된다면 우스워질 말장난이었으나 발렌타인이 평생 알 리는 없었다. 거짓말을 한다는 죄책감도 없이 합리적인 거절의 이유를 읊으면 그제야 시끄러웠던 입이 닫혔다. 인준은 캔으로 되어 있는 이온 음료를 집어 든 뒤에 자리를 비키듯이 뒤로 물러섰다. 알아들었으면 이제 얌전히 음료나 고르라는 뜻이었다.
개방되어 있는 진열대에서 나오는 찬 공기가 몸에 붙어 온 바깥 열기를 식혔다. 그때까지도 인준을 보고 있던 발렌타인은 대충 진열대를 훑다가 인준이 고른 것과 맛만 다른 것을 집어 들었다. 웃는 법을 아예 잊어버린 것 같은 얼굴이었다.
“대신 음료수는 내가 사 줄게.”
팀에서 쫓겨난─물론 인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데다가 장시간 비행으로 지친 탓인지 평소에 보이던 마이페이스는 어디 가고 웃지 않는 얼굴로 고집부리는 발렌타인의 태도에 결국 인준이 먼저 목소리를 풀었다. 그런 와중에 머리로는 자기가 억지 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작정하고 우기지 못하는 건 또 발렌타인답긴 했다.
최악이었던 첫인상에, 엉망이던 첫 만남으로 시작된 것치고는 많이 편해졌다고 한들 집에 들일 사이까진 아니라는 생각으로 선 그었지만, 아직 경기가 남은 선수가 보다 제대로 된 환경에서 컨디션을 회복하길 바라는 마음에는 거짓이 없었다. 발렌타인 또한 인준의 뜻을 온전히 이해한 게 분명했다. 들리지 않는 척하면서도 자신과 똑같은 상표의 음료를 고른 게 그 증거였다. 인준이 발렌타인과의 대화를 편하게 여기는 이유이기도 했다.
“뭐 먹고 싶은 거나 필요한 거 있으면 더 고르든지.”
“그러면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상표별로 하나씩
전부 다요.”
설마하니 친동생도 아니고 리그 선수, 그것도 발렌타인에게 동네 편의점으로 생색내게 될 줄 몰랐던 인준이 최대한 가벼운 어투로 말하면 발렌타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음료수를 들고 있던 손의 검지로 진열대 끝에서 끝을 가리켰다.
“아예 편의점을 사 달라 하지 그러냐.”
“사 주실래요? 이 상가 건물까진 됐어요.”
“야, 됐어. 각자 계산해.”
그의 손에 들린 음료수를 빼앗듯이 채 가며 말했다. 그렇게 계산대로 앞장서면 말과 행동이 다르다든가, 포르쉐를 타는 사람에게 음료수를 사 준다는 사람은 또 처음 본다든가 하는 식으로 속을 긁을 줄 알았던 발렌타인은 편의점에 들어왔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태도로 제 뒤에 얌전히 붙어 있었다. 시끄럽게 떠들었던 입을 다문 채로. 발렌타인은 음료수를 돌려받고서도 쉽게 입을 열지 않았고, 인준은 비로소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에 괜한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나오면 멀리 나갈 것 없이 편의점 천막 밑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에 가 앉았다. 아무리 그래도 리그 탑 티어 선수를 데리고 이건 좀 너무한가 싶기도 했으나 발렌타인은 별 내색하지 않고 크로스백을 의자 옆 바닥에 내려 두며 자리에 앉았다.
“내 사고에 대해 말하기 전에 뭐 하나만 물을게.”
음료수의 캔을 따며 먼저 입을 열면 발렌타인은 고개만 살짝 들었다.
“원래는 너 좀 괜찮아지고 나중에 물어보려고 했던 건데…….”
“내가 전에 말했던 거 잊었어요?”
음료수를 다시 건네받고 밖으로 나와서 자리에 앉을 때까지 말이 없던 발렌타인이 입을 열었다. 인준이 멍청하게 눈만 깜빡였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말이 끊기기도 했거니와 그가 무엇을 특정하고 하는 말인지 감이 하나도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못하는 거 없다고 했잖아요.”
“…갑자기?”
“뭐든 나한텐 말하는 거 미루지 말라는 뜻이었어요. 못 할 말이면 차라리 거짓말을 해요.”
발렌타인은 여전히 웃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제대로 꽂힌 듯한 양치기 소년의 이미지를 반박하는 대신에 인준은 힘 빠지는 웃음을 흘렸다. 그다음에는 정적이 흘렀고, 테이블 아래에서 붙잡은 양손을 내려다보면 풀벌레 소리가 어색한 침묵을 메꿨다.
만났던 직후와 달리 어느 정도 자기 페이스를 되찾은 듯한 발렌타인은 재촉하지 않고 상대가 말하길 기다렸다. 입 밖으로 내뱉는 데 꽤 결심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채 준 것 같았다. 이윽고 인준이 결심을 마치고 입술을 뗐다.
“네가 전에 말한 리그에서 터졌다던 예민한 일이, 승부 조작 맞아?”
“형은 지금 여기서 리그가,”
“어, 어?”
인준이 멍청한 소리를 내면 의도적으로 말을 끊은 발렌타인이 보란 듯이 크게 숨을 쉬었다. 가까스로 할 말을 참는 것 같기도 했다. 인준의 이성이 그 반응의 의미를 헤아리는 것보다도 먼저 리미새의 감각이 외쳤다. 이거 또 ‘리미새’했다고.
“…그래서 그건 왜 물어보는 건데요.”
본능적으로 상황을 수습할 말들을 찾으면 발렌타인이 먼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한숨이 조금 섞인 것도 같았으나 리그로 급발진했음에도 상대가 휩쓸리지 않고, 자신과 정상적인 소통을 포기하지도 않은 것도 모자라 이성을 차린 상황에 인준이 살짝 벙쪘다. 그러고 나면, 수습을 위해 조급해졌던 머릿속이 덩달아 차분해진다. 자신이 질문하기에 앞서 중요한 말을 빼먹었다는 걸 깨달은 건 그 덕분이었다.
“내가…… 그 일 때문에 사고를 당했거든.”
살짝 구겨져 있던 발렌타인의 미간이 완전히 좁혀진다. 어떤 흐름으로 그렇게 이어지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인준은 직전보다 훨씬 차분하게 있었던 일을 읊었다. 형사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깊이 할 수 없던 이야기들이기도 했다.
카페에서 같이 일하던 형이 공식 승부 예측 시스템에 도전하는 줄 알고 경기 스코어를 짚어 줬다는 이야기의 첫 시작 부분부터 눈빛이 달라진 발렌타인은 그 형 때문에 응급실에 실려 갔다가 경찰까지 만난 새벽 아침의 일을 읊을 때쯤에는 얼굴에서 표정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승부 조작은 어디까지나 혼자만의 추론으로 내린 결론일 뿐, 더 확실한 근거가 필요했다는 말로 설명을 마무리 짓고 나면 그는 생각에 잠긴 것처럼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인준은 직전에 발렌타인이 그랬듯이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렇게 음료수를 반쯤 비웠을 때일까, 발렌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을 겪고도 리그의 문제를 알려고 하는 이유가 뭐예요.”
“그거야,”
“아니, 다시 물을게요. 어차피 형이 그럴 이유야 라이스 때문일 게 뻔한 거고.”
얼핏 듣기에 목소리에는 체념이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말하는 게 입 아프다는 듯한 태도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가, 결국 고개만 끄덕였다. 정확히는 라이스가 온전히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외부 방해 없이, 다른 선수들과 동등한 조건과 컨디션으로 게임을 하길 바라서였다. 그러나 라이스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일이라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형 계획이 뭐예요?”
“어?”
라이스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지, 이럴 거면 공항에서 친구에게 왜 그랬는지에 대한 정당한 지적이 나올 거라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태연한 목소리였다. 발렌타인은 어느새 턱을 괸 채로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리그 밖 외부인이 리그 내부 사정을 알고 싶어 하는 걸 굉장히 못마땅하게 여기던 그 언젠가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벙찌던 것도 잠시, 상황을 이해한 인준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일단 시카고 감독이 새로 부임한 뒤로 열린 경기들을 다 돌려봤어. 아니, 엄연하게 아직 다 본 건 아닌데, 내 재량껏 의심스러운 것들만 먼저 골랐거든. 가장 수상한 건 픽 고집이랑 교체 카드. 근데 이건 선수 증언이 있으면 더 확실할 것 같긴 하지만, 추려 내면 나름 정황 증거로는 쓸 만할 것 같아. 그렇게 준비가 좀 되면… 2부 감독이나 선수들을 찾아갈 생각이었어. 2부 경기는 자국 내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으니까 만나는 것 자체는 1부보다 어렵진 않을 거고. 어디까지나 감독이 2부와 만남이 잦다는 네 말에서 단편적으로 생각한 거긴 한데…….”
인준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웬만큼 랭킹 높은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잖아. 대리 뛰거나 계정 파는 최상위권 유저 중에 2부 리거들이 상당하다는 거. 그러니까 그런 사기 도박이나, 승부 조작에 관한 것도 어쩌면 2부 쪽에서 뭔가 더 활발하지 않을까… 해서.”
대리든 계정 팔이든 1부 선수가 했다면 당장 매장당할 짓이었지만, 2부 선수는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덕분인지 사람들이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한 번씩 보다 못한 랭커 유저가 나서서 커뮤니티에 폭로 글을 올리기도 했으나 관심도 못 받고 묻히는 게 부지기수였다. 이렇게 말하는 인준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대리와 계정 팔이로 망가진 수준 미달의 매칭은 그랜드마스터 구간에서부터 심심치 않게 겪을 수 있는 현상이기도 했고, 커뮤니티에는 2부의 일보다 화병 날 정도로 재밌는 1부 이야기들이 항상 차고 넘쳤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암암리에 존재하는 리그의 부정을 해당 스포츠를 뛰고 있는 선수 앞에서 장황하게 늘어놓을 정도로 눈치가 없지도 않았던 인준은 대충 말끝을 뭉갰다. 이렇게 말해도 말뜻을 알아들어 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좀 의외네요.”
“뭐가.”
“일단 리그에 터졌다던 그 문제 승부 조작 맞아요. 거기에 사기 도박까지 연루된 것도 확실하고요. 그런데 가장 핵심적인 인물로 시카고 감독이 꼽혔다는 거 형이 알면…… 엄청나게 화낼 줄 알았어요.”
발렌타인이 살짝 시선을 돌렸다.
“그때도 빠따를 친다든가 하지 않았나.”
곱상한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보아하니 발렌타인 역시 인준이 시카고 스크림에 관해 묻던 그날을 회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단순히 기억력이 좋거나. 어느 쪽이든 간에 싸가지없이 말해도 욕은 하지 않던 그에게 속된 말을 가르쳤다는 사실에 양심 찔린 인준은 어색하게 웃었다.
“에이, 그때도 농담이었지― 나 그렇게 막 화내고 그런 사람 아냐. 근데 감독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혹시 시즌 중에 갑자기 감독이 총 맞았다든가, 괴한에게 맞아 죽었다든가 그런 사고가 일어나면 어떻게 돼?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 나도 아는데, 그냥 궁금해서.”
“형이야말로 농담을 되게 진심같이 하는 거 알아요?”
“…….”
“…농담 맞죠?”
가볍게 웃고 넘겼던 발렌타인은 두 번째 질문에는 웃지 않았다. 뒤늦게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그때까지 은은하게 짓던 미소를 유지한 채 상대를 보던 인준은 앞으로 기울였던 상반신을 뒤로 뺐다. 그거야 당연히 농담이라는 듯 과장된 몸짓이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일이 해결된다면 벌써 하고도 남았지. 근데 그렇게 해결될 일 아니잖아.”
양손을 뒤로 뻗어 의자를 짚은 뒤에 힘을 싣던 인준은 고개를 위로 젖혔다. 하늘을 보고자 했으나 보이는 건 세월의 때가 묻은 초록색 천막이었다.
“이거 자칫하다가 감독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팀 하나 날아갈 문제라는 거 알아.”
“아무래도, 승부 조작이니까요.”
“사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거기서 라이스를 빼 오고 싶긴 해. 거기에 지금 라이스 편은 없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선수 하나 빼 오는 게 지금 내가 하려는 일보다는 쉬울 것 같기도 하고. 뭐하면 당장 악의적으로 스크림에서 제외했다는 일을 잡고 늘어질 수도 있겠지. 누가 뭐라 해도 걔는 리그 간판 딜러잖아.”
“그런데 왜 어려운 방법을 택해요.”
“라이스는 계속 경기를 뛰고 싶어 하니까.”
“…….”
“그때 럴러바이 일로 너랑 통화한 뒤로 계속 생각했어. 그냥 게임 좀 잘할 뿐인 내가 라이스의 뭘 해결해 줄 수 있을까 하고. 경기 나가지 말라는 말이야 손 다쳤을 때부터 많이 했지. 근데 도통 듣질 않더라. 경기에 집착하게 만든 원인 제공자가 하는 말이라서 그런가.”
자조하며 웃으면 아무런 대꾸도 돌아오지 않았다. 여전히 천막을 눈에 담은 채로 짧게나마 생각에 잠기던 인준이 고개를 바로 했다.
“뭐, 이런 일로 시카고가 해체하지 않기를 바라는 팬의 마음도 있고.”
“그래서 감독만 잘라 내겠다는 거예요?”
“일단 생각한 건 그래. 감독과 선수들이 무관하다는 걸 어떻게든 증명할 거야.”
“운 좋게 감독을 잘라 내도 컨트롤 타워가 무너지면 경기가 안 될 거예요.”
내내 턱을 괴고 있던 발렌타인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크래프트원 측에서 선수들이 사건과 무관한 것과 별개로 감독이 없는 팀이라고 안 받아 줄지도 모르고요. 크래프트원이 세계 리그를 만들 때, e스포츠가 정식 스포츠로 인정받지 못하는 데 한이 맺혀서 칼 갈고 만들었거든요. 그래서인지 리그 구성이나 팀적으로 엄청 따지는 버릇이 있어요.”
“그럼 새 감독도 구해야 한다는 거야?”
“…뭐, 그건 그때쯤에 구단주가 알아서 하겠죠. 지금 보아하니 중요한 건 선수들 고의성 파악인 것 같네요. 시카고 감독도 수사망이 자길 노리고 있는 걸 알았는지 몸을 사리는 추세예요. 성우 형도 주장이 되고 나서는 2부랑 그렇게까지 만나지 않고요. 시기적으로는 곧 있을 어텀 토너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다는 아니겠죠.”
어쩐지 급진전되는 이야기에 인준은 뒤로 기울였던 몸을 바르게 했다.
“아까 시카고 경기를 다 보셨다고요?”
“유력해 보이는 경기들만. 작년에 특히 어이없게 역스윕 당하는 경우가 많았거든.”
“어쩌면 시카고 감독은 이번이 처음이 아닐 수도 있어요.”
“그렇지 않아도 그 사람이 맡았던 다른 대회들을 찾아봤어. 생각보다 배틀스트라이커 쪽 커리어가 많더라고.”
“최소 2, 3년 전인 거죠? 그때는 아직 불법 도박이 그렇게까지 성행하진 않았을 때예요.”
“승부 조작까진 못 가더라도 선수를 학대하는 건 그때부터였을 수도 있어. 배틀스트라이커는 은퇴하고 일반인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많으니까 찾기만 한다면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몰라.”
“명단 있어요? 어차피 e스포츠 판은 좁으니까 아는 사람들한테 부탁하면 소재 찾는 게 그렇게 어렵진 않을 거예요.”
“컴퓨터에 정리해 놨어. 집에 가면 보내 줄게.”
“시간이 많은 건 아니니까 오픈 시티 리그로 넘어오기 2년 전쯤으로 추려서 부탁해요.”
필요한 것만 고르는 발렌타인의 브리핑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던 인준은 새삼스럽게 이것이 리그 1티어의 메인 오더인가 싶었다. 발렌타인의 영입과 함께 뉴욕 팀의 기량이 전체적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는 걸 직접 체감하게 된 건 덤이었다. 그러나 밀려드는 정보 속에서 빠르게 핵심만 짚는 오더는 게임 브리핑보다는 어디 대기업 회사에서 지시를 내리는 쪽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게임 브리핑으로 쓰이기에는 너무 아까운 재능이라 하는 게 맞겠다.
그 때문인지 덕분인지 아직 다녀 본 적도 없는 회사였으나 유능한 상사로 꼽히는 유형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발렌타인이 저보다 두 살 어리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실제로 대기업에 근무하는 연주에게 말했다간 직접 병원에 데려가서 입원시킬지도 모르는 소리였다.
“…근데 이렇게, 도와줘도 괜찮아?”
뻘쭘함에 슬쩍 말을 돌리면 발렌타인은 시선을 맞춰 왔다.
“아니, 네가 도와주는 건 정말 고마워, 싫다는 거 절대 아냐. 근데 시즌 중에 네 일만으로도 바쁜 것 같아서. 너 정도면 일반인이랑 이럴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수사 기관에 협력하는 게 더 낫지 않나 싶기도 하고. 그러니까, 그 한국에서 우리끼리 조건을 걸고 약속했던 건 뭔가 이렇게 좀, 흐지부지됐잖아.”
인준이 변명하듯 허겁지겁 내뱉었다.
“수사 기관이나 크래프트원에 협력한다고 해도 날 믿지 않을 거예요. 어쨌든 그들 눈에는 나도 리그 관계자니까요.”
잠시 무언갈 고민하는 것 같았던 발렌타인은 곧 별일 아니라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히려 형이 일반인이라 소문날 일 없이 조사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이러나저러나 이준혁 일이면 나도 돕고 싶고, 여태까지 찍은 인터뷰 생각하면 이 정도는 별로 바쁜 것도 아니죠.”
인준의 의문을 말끔하게 해소하는 대답들은 미리 준비해 온 것처럼 깔끔했다. 상대가 자신의 말에 집중하고 있는 것을 눈치챈 발렌타인은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해야 말을 강조하는지 아는 사람의 태도였다. 인준은 그때까지도 입을 다물고 건너편에 앉아 있는 그를 조용히 보았다. 그제야 그의 윗입술에 찍힌 점이 보인 탓이었다.
“그리고 아까도 말했잖아요. 형이 자꾸 잊는 것 같은데,”
“너 못하는 거 없다고?”
“…….”
“그러게, 도움받는 주제에 자꾸 잊어버리네.”
“…지금은 기억한 거잖아요. 아무튼 됐어요. 정 뭐하면 내기 소원이라고 생각하시든가요. 어쨌든 그거 내가 진 거니까. 그것보다도 아까 명단 추려 달라고 했던 거 말인데, 감독과 한 팀이 된 이후로 은퇴한 선수는 기간 불문하고 꼭 넣어서 줄 수 있어요?”
“아, 그건 나도 눈여겨봤던 부분이라 닉네임 몇 개 외워 놨거든, 일단 그거라도 알려 줄까?”
발렌타인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을 더듬기 위해 눈을 감은 인준은 손가락으로 하나씩 세어 가면서 익숙한 닉네임들을 읊었고, 받아 적기 위해 휴대폰을 꺼냈던 발렌타인은 손가락을 움직이는 대신에 조용히 인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여태까지 이런 얼굴로, 그런 말들을 내뱉었구나. 떠오른 생각을 말할 타이밍을 재는 대신에 그대로 속에 묻었다. 짧은 복기를 마친 인준이 눈을 떴을 때는 발렌타인은 태연하게 휴대폰을 품속에 집어넣고 있었다.
그 뒤에도 누구부터라고 할 것 없이 진지해지기 시작하는 이야기는 쉽게 속도가 붙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더 효율적이고 확실하게 해결할 수 있는지 토론하는 것에 가깝기도 했다. 발렌타인은 불법 토토를 하는 리그 관계자가 적발된 게 2부 리그였다는 사실을 시작으로 크래프트원이 각 팀에게 공문을 보내온 일이라든지, 각 팀 감독과 선수들이 대부분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 등등 보다 자세한 사건의 배경을 설명했다. 그러다 보면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처음 적발됐다던 2부로 흘러갔다.
“2부 리그에서는 선수들끼리 감독 몰래 일을 벌였다가 아니다 싶으니까 감독이 시켰다고 덮어씌웠다던 소문도 있어요. 형은 감독만 잘라 내고 싶다고 했죠. 그러기 위해서는 더더욱 내부 고발이 필요할지도 몰라요.”
“그러고 보니까 코치들은?”
“보통 코치들은 감독과 한 몸으로 쳐야죠. 사람들끼리도 코감독 이렇게 붙여서 부르잖아요.”
인준은 쉽게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하다 못해 시원한 납득에 발렌타인은 웃으라고 해 봤던 헛소리라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당장 라이스가 스크림에서 제외당했던 사실이 1년 넘게 비밀 유지되고 있던 걸 보면 이미 시카고 선수들은 감독에게 반항하길 포기했을지도 몰라. 내부 고발자를 찾는다면 감독이 만나고 다녔다던 2부 리그 쪽에서 기대해야 할 것 같은데…, 애초에 시카고 감독은 왜 2부에 그렇게 신경을 쓴 거지?”
“미리 짜 놓은 경기 스코어 전달책으로 그들을 이용하는 걸지도 모르고, 모든 사정을 이해하고 입맛대로 굴리기 쉬운 선수를 데려오려고 하는 걸지도 모르죠. 어디까지나 시카고 선수들이 감독에 동조하고 있지 않다는 가정하에서요.”
“만약 스카우트를 조건으로 내걸었다면 그쪽에서도 내부 고발은 기대하기 힘들 것 같은데…….”
“스카우트가 아니어도 기대하긴 힘들걸요. 썩어도 준치라고, 결국 시카고 감독도 1부 감독이에요. 옳은 일이었다고 해도 1부 감독을 내부 고발했다는 사실 자체가 선수 생활에 타격이 될 수도 있어요. 이럴 게 아니라 아예 타깃을 정하죠. 1부 승격에 관심이 없거나, 혹은 포기했거나, 아니면 정의감이 투철하거나, 하다못해 프로 선수가 아니어도 앞길 창창한 사람으로 추려 보면 한 명쯤은 나올 거예요.”
미간을 찌푸린 채로 고민하던 인준이 무언갈 깨달은 사람처럼 고개를 들어 올린 건 그때였다. 상대방의 반응을 끌어 보려는 것 같으면서도, 정말로 기발한 생각이 났다는 것 같은 모습에 발렌타인이 눈만 두어 번 깜빡이던 그때.
“내가 하면 되잖아.”
“네?”
“복잡하게 사람 추릴 필요 없이, 내가 2부 선수가 되면 되는 거잖아.”
박인준이 미친 소리를 했다.
“2부 리그는 1부 비시즌에 경기하니까 아직 새로운 선수 구할지도 몰라. 2부는 시즌 중 영입에 그렇게 빡빡하지도 않고, 지금 메타가 2서폿인 거 생각해 보면 서포터 자원을 더 구하려는 팀이 반드시 있을 거야.”
“형, 잠깐만,”
“선수 지원하려면 아무래도 시즌 전적이나 스탯 같은 게 필요하겠지. …나 지금 몇 등이더라? 큰일 났네, 이래서 평소에 미리미리 게임을 하고 점수를 올려놨어야 했는데. 아, 서포터 직군이라서 아예 외면받을 수도 있겠구나. 그럼 메인 딜러를…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싫은데. 그럼 지금이라도 서브 딜러를 배워야 하나.”
“잠깐만요.”
“아, 나이. 나 스물셋이지, 참. 이거 속일 수 있나?”
“형.”
“…지금 편의점 가서 실험해 보고 올게. 나 민증 검사받는지 어떤지.”
다급하게 앉았던 의자에서 일어나 몸을 돌리면 오른쪽 손목이 붙잡혔다. 치고 나가려던 몸에 갑작스럽게 제동이 걸린 인준은 제 뒤에 서 있을 발렌타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역시 급하게 일어난 탓인지 쓰고 있던 후드가 살짝 뒤로 벗겨졌는데, 그렇다고 해도 표정이 온전하게 보이진 않았다. 일부러 고개를 숙여 모자의 그늘을 만든 탓이었다. 체온이 낮아 보이게 생겼던 것과 달리 손은 짐작보다도 훨씬 뜨거웠다. 뿌리치기에는 별 무리가 없는 힘이었으나 인준은 잠자코 서 있었다.
“지금 마음이… 많이 앞선 것 같아요.”
고개를 든 발렌타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왜 사람들이 미소를 짓는다고 할 때마다 빙긋 웃었다고 표현하는지 알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발렌타인이 웃을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알아 가던 인준은 다른 말을 하는 대신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 자리에 다시 앉았다.
쉽게 수긍의 뜻을 내비치면 발렌타인 역시 잡았던 손을 놓고 반쯤 일으켜 세웠던 몸을 의자에 돌려놓았다. 뒤로 넘어간 후드 모자를 다시 쓸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짧은 침묵도 잠깐이었다. 먼저 입을 연 건 발렌타인이었다.
“2부 팀에 들어간다고 그대로 끝이 아닌 거, 형도 알잖아요. 지금 2부 팀에 들어가서 진짜 경기라도 뛰겠다는 거예요? 그러다 자칫하면 같이 수사받게 될 수도 있어요. 거기까지 다 생각하고 하는 말이에요?”
“일단 들어가야 알겠지만 바로 경기에 투입되진 않을 거야.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여서 일 벌일 바에야 그냥 내가 하는 게 나아. 2부 선수 중에서 1부로 올라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나야 처음부터 뜻이 없는 사람이고.”
발렌타인이 현실적인 문제를 짚으면 인준도 지지 않고 대답했다.
“어떤 식으로든 2부 선수가 되면 형 신상도 공개될 거예요.”
“1부 진출도 못 한 선수를 오래 기억할 사람은 없을걸.”
“만약에 1부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오면요.”
“끽해야 한두 달 있을 것 같은데 그거 보고 제안하는 팀은 없지.”
“시카고 감독을 만나려면 그것보다 더 오래 거기에 있어야 할지도 모르잖아요.”
“감독을 만나는 데 오래 걸리면 그냥 다른 선수들에게 듣는 것도 괜찮을 거라 생각하고 있어.”
“형 계획 짤 때 은근히 내지르고 생각하는 타입인 거 내가 모를 것 같아요?”
팽팽하게 오가던 문답에서 막힌 건 인준이었다. 손목을 잡혔을 때부터 태연한 척, 철저하게 이성과 논리로 만들어진 계획인 척했으나 이미 내지르고 난 뒤에 생각한 일이라는 게 들통난 것 같았다. 아직 반쯤 남은 음료수로 잠겨 가기 시작하는 목을 축였다. 까다로운 그를 설득하는 일은 웬만큼 그럴듯한 말이 아니고서야 안 될 걸 알았지만, 조급함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발렌타인이 당장 자신의 마음이 한참 앞서갔다는 걸 알았다면, 인준은 발렌타인이 얼마 못 가서 이 방법을 찬성하게 될 걸 알았다.
“제대로 준비하면 이것보다 좋은 수가 없다는 거 너도 알잖아.”
결국 그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으니까.
발렌타인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자신의 앞에 놓인 음료수에만 손을 댈 뿐이었다. 거의 다 비운 인준의 음료에 비해 그의 것은 아직 뚜껑조차 따지 않은 채였다.
“여러 의미로 팀을 잘 골라서 가야겠다고는 생각해. 내가 골라갈 수 있는진 모르겠지만…….”
“형이 왜 팀을 못 골라요.”
자연스럽게 밑밥을 까는데 발렌타인이 말을 끊었다. 그는 자신의 일을 꼭 돕고 싶은 것처럼 보였으니, 이 계획을 성공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네 도움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려고 했던 인준이 눈을 깜빡였다.
“이건 그냥 만약이라고 가정하고 묻는 건데요.”
후드 집업이 뒤로 넘어간 덕분에 얼핏 보이게 된 백금발이 반짝였다. 주변에 있는 빛이라고는 편의점의 조명과 거리의 가로등뿐인데도 그랬다. 발렌타인은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불쾌한 기분을 감추기 위해 꾸며 냈을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그의 얼굴은 정말로 행복한 무언가가 생각나서 웃는 것처럼 보였다. 살짝 눈을 내리깔면 속눈썹 밑으로 그림자가 졌다. 그 찰나의 순간, 인준은 발렌타인의 부모가 프로게이머의 길을 반대했던 건 순전히 외관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연예계 쪽으로 데뷔했다면 지금쯤 음악 방송 트로피를 세워 놓고 볼링을 쳤을 것이다. 스크린 쪽으로 데뷔했다면 온갖 청춘 로맨스 남자 배역을 전부 맡은 뒤에 연말 시상식에서 받은 상으로 집을 만들었을 것이고. 그쪽이라고 얼굴 하나로 다 되는 곳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어느 쪽이든 지금처럼 무관이라 놀림받을 일은 없었을 게 분명했다. 언젠가 발렌타인의 인터뷰를 보던 연지의 호들갑이 떠오른다.
연지는 발렌타인의 얼굴은 객관적으로 빛나는 것들과 있어야 하는 게 맞다면서 리그 차원에서 그에게 트로피를 줘야 한다는 것으로도 모자라, 지금 얼굴만으로도 외모 평균을 높이는 데다가 실력적으로도 리그에 큰 공헌을 하고 있으니, 그 공로를 치하하므로 이에 우승 트로피를 주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프로게이머의 얼굴 조형은 이목구비가 아닌 wasd키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는 인준에게는 지구가 평평하다는 것과 같은 수준의 논리였는데, 이렇게 보니 완전히 근거가 없지도 않은 것 같았다. 많이는 말고, 그의 얼굴이 객관적으로 빛나는 것들과 있어야 한다던 그 부분만.
“……어차피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묻는 건 의미 없겠죠. 그냥 다른 이야기 해요.”
발렌타인이 고개 드는 것과 동시에 인준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바로 근처에 있는 도로를 쳐다보았다. 그곳에 있는 거라곤 불법 주차 되어 있는 차 하나가 전부였다. 그럼에도 인준은 그게 뭐라도 된 것처럼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척했다. 뜸 들인 말이 무엇일지 궁금했지만, 무의식적으로 그의 얼굴을 봤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형 졸려요?”
다행히 발렌타인은 수상했던 고갯짓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눈치 빠른 놈이 어쩐 일인가 싶으면서도, 다른 이야기를 하자는 결론이 나올 때까지 은근히 길었던 시간을 생각해 보면 여러모로 발렌타인도 생각이 많은 것 같았다.
“아니면 그냥 눈 풀린 거예요?”
그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손끝으로 자신의 눈 밑을 더듬던 인준은 아차 싶었다. 충동과 무의식이 합쳐진 행동이었다. 아마도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았다고 추측되는 반 뜬 눈은 종종 힘이 풀리면 제 의사와 상관없이 무기력하게 보이게끔 했고, 위로 형제가 있는 게 또 다른 자랑거리던 초등학생 시절을 지나, 멋에 가장 민감할 그 시절 중학생 1학년 동생은 인준이 눈에 힘을 풀고 다닐 때마다 치를 떨면서 싫어했다.
새 오빠들을 심장 속에 몇 명이나 들이면서 인준이 무얼 하든 신경 쓰지 않는 지금에서도 연지는 눈에 힘을 풀고 멍청하게 있는 것만큼은 용납하지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나름대로 타인에게 보이는 모습을 신경 쓰고 살아가는 인준이 여러모로 신경 쓰며 살아가게 된 부분이기도 했다. 모자챙을 잡아 눌러 황급하게 얼굴을 가리려 들면 상처에 붙였던 밴드까지 눌리면서 찌릿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그러게, 나 진짜 졸린가 보다.”
모자를 잡던 손등으로 급히 이마 근처를 꾹 눌렀다. 통증이 가라앉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모자를 쓴 이유도 잊은 것을 보아 아무래도 진짜 피곤한 게 맞는 것 같았다. 어수선한 상대의 모습에 벙쪄 있던 것도 잠시, 발렌타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단순히 미소를 짓는 게 아니라 눈을 접고,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인준은 뭐가 그렇게 웃긴 건지 굳이 물어서 무덤을 파는 대신에 웃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그럼 이제 가는 거예요?”
“졸린 거 알면 더 이상 일에 집중이 안 되는 타입이라.”
“이렇게 늦어도 집에서 안 재워 줄 거죠.”
“음료수 하나 더 사 달라고?”
슬슬 만남을 파할 목적으로 먼저 일어날 채비를 마치면 발렌타인이 물었다. 인준은 아직 남은 음료수 캔을 집어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상대를 만나면서 집어 넣어둔 휴대폰을 꺼냈다. 시간은 벌써 3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마찬가지로 자기 옷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발렌타인은 쉽게 그곳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시간이 너무 늦은 것에 충격을 받았나 싶던 것도 잠시, 그가 대화하던 중에 휴대폰을 꺼내 들었던 게 한 번뿐이었다는 게 떠오른다. 평소 SNS 중독자처럼 굴었던 그의 이미지를 생각했을 때 확인할 알림들이 보통 쌓인 게 아니겠구나 싶었다.
“…형, 내일은 뭐 해요?”
남은 음료수에 입을 대면 발렌타인이 물었다. 어느새 많이 나긋해진 목소리는 간단한 안부를 묻는 것도 같았다.
“일단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서 내일 2부에 대한 거 너랑 더 자세하게 이야기할 생각이었는데.”
인준이 몸을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휴대폰에 처박혀 있던 발렌타인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우리 내일도 만나요?”
“너 일주일 뒤에 다시 출국한다며. 그전까지 할 수 있는 건 빨리 끝내 놔야지.”
아예 고개를 하늘로 꺾은 채로 음료를 털던 인준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머리가 뒤로 완전히 젖혀진 탓에 모자가 아슬하게 떨어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붙잡고 나면 뒤늦게 발렌타인이 반문하는 의미를 깨닫는다.
“아, 너 내일 만날 사람 있으면 다음에,”
“없어요.”
말을 마치는 것보다 더 빠른 대답이 돌아온다. 인준이 고개를 바로 돌리면 발렌타인은 어느샌가 크로스백을 어깨에 메는 등 돌아갈 준비를 끝마치고 앞에 서 있었다. 인준은 갑작스럽게 올라간 눈높이에 다른 말을 얹는 대신에 완전히 비워진 음료수 캔을 근처에 있던 분리수거 통에 밀어 넣었다. 발렌타인의 음료수는 그의 손안에 들려 있었다. 집에 가서 시원하게 해 놓고 마실 생각인 것 같았다.
“앞장서요. 집 앞까지 데려다줄게요.”
“그런 건 연인한테나 해 줘, 인마.”
“범인 못 잡았다면서요.”
발렌타인이 말하며 자연스럽게 옆에 붙어 왔다. 편의점과 집 사이에, 그렇게 멀지 않은 거리를 알고 있는 인준이 걸음을 멈추면 발렌타인도 덩달아 걸음을 멈췄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너 혹시 나 무시하냐?”
어이없어하는 감상이 그대로 목소리에 묻어 나왔다. 아무리 그 형이 잡히지 않았고, 이 새벽에 또 어디서 노리고 있을지 모른다고 한들 키만 멀대같이 큰 그가 도움이 되진 않을 것 같았다. 손목이 잡혔을 때 신장은 차이가 나도 힘으로는 지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 인준이 한쪽 눈가를 찌푸렸다. 발렌타인이 살짝 모자챙을 잡아 눌렀다.
“그때도 편의점 앞이었다면서요.”
“거긴 카페 앞 편의점이었다니까.”
“그래도요.”
“됐어, 어차피 바로 이 앞이야.”
“그렇게 방심하니까 형이 자꾸 생각지도 못한 일에 휘말리는 거예요.”
“덕분에 너 같은 협력자를 얻었지.”
대충 웃으면서 대꾸하면 발렌타인이 입을 다물었다. 찡그려진 눈썹은 두고 가지 말라고 호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거의 비 맞은 강아지 꼴이었다. 그럼에도 인준은 내일 보자, 같은 단순한 말만 남기고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편의점 앞에 서서 미련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도 없이 멀어지는 등을 조용히 바라보던 발렌타인 앞으로 검은색 세단이 미끄러지듯 섰다. 어두운 도로에서 한참 서 있던 차량이었다. 발렌타인은 운전자를 확인하는 대신 익숙하게 뒷좌석 문 앞에 서 놓고서도 쉽게 올라타지 못했다.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아직도 인준이 보이는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