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34)

스팸 전화

누군가는 무료하게, 또 누군가는 긴장하며 남은 차례를 기다리는 선수 대기실의 문이 벌컥 열린다. 각기 다른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던 이들의 시선이 모인다. 들어온 남자는 그들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으나, 얼굴은 빈말로라도 팀에 돌아왔다고 할 수 없었다.


“인터뷰하느라 수고했어. 좀 쉴래?”

화이트보드 앞에서 전략을 검토하던 검블은 그런 얼굴에도 개의치 않고 말을 건넸다. 뉴욕의 선수 대기실로 돌아온 승현은 그제야 손으로 눈가를 짚고 고개를 끄덕였다. 검블은 말없이 소파를 차지하고 있는 팀원에게 눈짓했다. 반쯤 누운 채로 소파를 차지하고 있던 호두는 검블의 신호를 눈치채지 못한 신속을 끌고 다른 소파에 가 앉았다.

양보받은 소파에 앉은 것도 잠시 승현은 곧 소파 팔걸이에 목을 기대고 몸을 폈다. 선수 사이에 직접적으로 차별을 느끼는 일을 결코 자신이 주도해서는 안 된다고 되새기면서도, 안 그래도 약한 아침에 몰아치는 일정으로 피로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데뷔한 이후로 뉴욕 스위프트와 관련된 스폰서 행사나 이벤트는 항상 빠지지 않고 참여한 승현이었으나 최근 관련 행사가 벌어지는 빈도가 과했다. 세상에서 라이스의 귀환을 가장 바라지 않을 사람 때문이었다. 뉴욕 구단주. 선수의 가치는 그런 데 있는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떻게든 백승현이라는 이름을 더 많은 미디어에 노출하길 원했다.

오늘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지역 시드 3위의 워싱턴과 붙기 전 소감 인터뷰, 워싱턴 선수에게 보내는 도발 인터뷰, 팬들에게 보내는 감사 인터뷰. 온갖 이유로 승현은 일어나기 힘든 아침부터 카메라 앞에 붙잡혀 있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승현이 카메라 앞에서 화사하게 웃을 때면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던 녹스마저도 최근에는 자리를 양보하는 식으로 배려를 해 왔다. 손등으로 눈가를 가려 형광등 빛을 차단한 승현은 잠들지 않도록 주변 소음에 귀 기울였다.

“아까 항저우전 PP 아니었으면 지금쯤 경기했겠다.”

녹스가 찌뿌둥한 몸을 펴며 말했다. 이어 검블이 달래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오늘 준비한 밴픽을 되짚는 호두와 다른 벤치 선수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익히 알았던 대기실의 일상에 스스로도 느껴지던 예민함이 한풀 꺾여 가던 그 순간이었다.

“아! 승현이 형!! 그거 들었어요? 라이스 님이랑 리그 스태프랑 싸웠대요.”

팀 막내인 신속이 큰 목소리를 냈고, 대기실의 공기가 싸하게 가라앉는다. 지나칠 수 없는 단어에 승현이 눈을 떠 대기실을 보았을 때는 모두가 대놓고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정정한다. 호두와 순신은 막내가 승현의 심기를 건들게끔 만든 녹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신속은 형들의 반응을 보고 나서야 자신이 무엇을 실수하였는지 깨달은 것 같았다.

“보니까 준혁이 손 다친 것 같더라. 근데 그냥 계속 경기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나 봐. 싸움까지는 우진이가 좀 과장한 거고… 작은 마찰이 있었던 것 같아.”

기어코 그 불편한 적막을 깬 건 검블이었다.

“누구한테 들은 건데?”

“우리도 리그 스태프끼리 떠든 거 주워들은 거야. 항저우전 끝난 뒤로도 계속 시끄럽게 떠들어서 당장 경기장에 있는 스태프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 시카고 관계자 말고 자세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호두가 검블의 말을 받았다.

“…이준혁 그렇게 된 거 생방송으로 나갔어?”

“생방에서는 장비 이슈라고만 하고 넘어갔어요. 방청객들도 잘 모를걸요? 워싱턴 경기장은 경기석이랑 관중석이 엄청 멀잖아요.”

쌩뚱맞은 승현의 질문에 재빠르게 대답한 건 실수를 만회하고자 한 신속이었다. 그는 승현이 묻지 않은 것까지 줄줄 늘어놓았다.

“나 성우 형이 그렇게 개빡친 거 처음 봤잖아.”

그렇게 자연스럽게 흘러가던 말을 녹스가 건네받고, 또 한 번 시선이 몰린다.

“너 뭐 봤어?”

“아까 화장실 가다가 성우 형 본 거 이야기 안 했, 나?”

직전까지 메인 딜러와 서포터에게 타박받은 걸 잊은 건지, 태평하게 워싱턴의 전 경기를 복기하던 녹스가 눈을 깜빡거렸다. 어느샌가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앉은 승현의 얼굴을 본 녹스는 그제야 손에 들린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아니, 아까 시카고 3경기 끝났을 때 화장실 가는데 성우 형이 있더라고. 근데 물을 존나 콸콸 틀어놓고 세면대만 짚은 채로 이렇게 고개 푹 숙이고 있는데, 씨발 이건 말로 설명이 안 돼. 직접 봐야 돼.”

“뭐 다른 이야기는 안 했고?”

“그 형이 안경 벗고 막 이렇게 머리카락 막 내려가지고, 세수한 건지 물 범벅 되어 있고 막 들으라고 한숨 푹푹 쉬는데 너라면 씨발 거기서 어우, 형! 오늘 경기도 이기겠네요~ 이러면서 인사하겠냐? 거울로 형 보자마자 4층 화장실로 존나 튀었지.”

“오늘 성우 형 컨디션이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순신이 이야기를 거들었다. 그 말을 시작으로 저마다 성우에 대한 한마디를 얹는다. 뭘 몰라서 그렇지 그 형은 원래 얼굴이 그렇게 생겼다, 성우 형이 이런 걸로 힘들다 티를 낼 사람이냐, 그 형은 프로다, 우리는 프로가 아니냐, 럴러바이 은퇴설이 또 돌아다니게 생겼구나, 이리저리 대화가 튀었지만 걱정하는 기색이 대부분이었다.

리그에 몸담고 있는 시간 때문인지 성우는 다른 팀임에도 불구하고 아는 선수들이 많았다. 그와 리그에서 같은 시간을 보냈음에도 낯가리기 바쁜 누군가와는 대조적이었다. 유독 럴러바이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흥분하는 막내를 놀리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접어들 때쯤에는 승현은 다시 소파에 누워 눈을 감았다.

준혁이 이름 듣자마자 뛰어나갈 줄 알았는데. 틈바구니 속에서 조용히 있던 순신은 속으로 생각을 삼켰다. 예민한 아침부터 몰아친 일정의 피로가 그의 의지를 이긴 건가 싶었다. 제삼자가 봐도 최근 발렌타인의 스케줄은 단순히 프로게이머의 일정이라고 하기에는 과했기 때문이다. 기실 그의 과로는 온갖 인터뷰와 스폰서 주최 행사에 불려 나가는 와중에 고집을 꺾지 않은 게 컸다.

승현은 참여할 수 있는 연습 경기에 절대 빠지지 않았다. 신속이 연습 경기 선발 서포터로 뽑히는 날이면 행사를 취소하고 경기에 참여하려다 행사에 불려 나가기 부지기수였다. 꼭 주전 서포터가 바뀔 걸 아는 사람처럼. 녹스는 카메라가 켜질 때와 꺼질 때가 다른 싸가지 정도로 취급하고 말았지만, 가끔씩 순신은 숙소에서 유달리 조용하게 있는 승현을 볼 때면 속한 세계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분명 같은 유니폼을 입은 선수일 텐데도 그랬다.

모든 걸 아는 것 같기도 했다. 막내의 라이스 발언에 무슨 일이 있었냐 물은 걸 똑똑히 들었음에도, 순신은 승현이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진 않을 것 같았다. 괜히 멀게 있는 존재라 생각하고 싶지 않음에도 그에게는 사람으로 하여금 거리감이 느껴지게끔 만드는 분위기가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흐르다 보면 승현이 단순히 피로 때문에 친구를 찾아가지 않은 건지, 알기 때문에 찾아가지 않는 건지 헷갈렸다.

누워 있던 승현으로부터 미약한 진동이 울린다. 아까처럼 손등으로 빛을 가리고 있던 그는 다른 손으로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의 취미가 웹서핑이라는 걸 아는 순신이 눈을 돌리려던 때였다. 손 틈새로 화면을 보나 싶던 승현이 부산스럽게 상반신을 세웠다. 누운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운 뒤에도 허둥거리는 모습은 마치 만화에나 나올 것 같은 모습이었다.

“깜짝이야, 뭐 잘못 처먹었냐?”

“무슨 일이야?”

녹스와 검블이 동시에 물었다.

“아니, 별 건 아닌데…….”

중얼거림에 가까운 대답이었다. 답지 않게 말을 흐리던 승현이 완전히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나 싶더니, 곧장 대기실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까지 그의 시선은 휴대폰 액정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디 가?”

“경기 시작하기 전에는 올게.”

당황한 호두의 물음을 한 번에 넘긴 승현이 순식간에 문 너머로 사라진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선수들은 승현이 나가고 닫힌 문을 보았다. ……별거 아닌 게 아닌데? 녹스가 나지막이 말을 흘렸다. 누구도 대꾸하지 않았으나, 그가 틀리거나 허튼 말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저렇게 당황한 듯이 여유 없게 구는 백승현을 보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복도에는 스태프 옷을 입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매 경기를 생방송으로 송출하는 만큼 무대 뒤의 리그 관계자들은 언제나 바빴다. 그중에 얼굴이 익은 몇몇이 건네오는 인사를 웃음으로 넘긴 승현은 재빨리 코너를 돌아 사람이 없는 복도를 찾아 뛰었다. 귀 옆에 갖다 댄 휴대폰으로는 연결음이 이어진다.

드디어 연락이 왔다.

인준으로부터.

어텀 시즌이 시작되면 다시는 이준혁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말했던 그때, 별로 어렵지도 않다며 명쾌하게 말하는 인준의 대답을 듣는 순간 승현은 그가 처음부터 준혁이 미국으로 돌아가는 순간 연을 끊을 생각이었다는 걸 눈치챘다. 승현의 기억에 특히 남은 인준의 모습 중 하나였다.

그뿐일까, 그는 준혁과 연을 끊는 순간 자연스럽게 자신과도 선을 그으려고 했다. 대신 말 좀 전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던 날, 승현은 다신 연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구는 인준에게 다음 약속을 받아 내는 대신 그가 떠나가도록 두었다. 승현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이다음 연락은 인준에게서 먼저 올 것이라는 확신이.

그리고 마침내 연락이 온 것이다. 시카고가 4연승을 하고 라이스가 5연속 BPOG를 받으며 팬을 위한다는 핑계로 고백할 때까지 잠적 탄 인준에게,

돕겠다고 했잖아


도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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