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깎이 스크림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 드는 날이 있다. 모든 게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듯 평소보다 배는 상쾌한 날. 잠을 잘 잔 것 이상으로 좋은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실제로 사소한 일까지 잘 풀리는 날. 준혁에겐 그런 날이 오늘이었고, 스크림을 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날이 없었다.
스크림은 구단주에서 마련한 사옥 건물에서 다 같이 모여 진행됐다. 집합 시간보다 십 분 정도 일찍 도착한 뒤에 기다리고 있으면 얼마 가지 않아 한 달 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이 하나둘씩 모였다. 다행히도 한 달간 다치거나 아픈 곳 없어 보였다. 선수들이 모이고 코감독을 기다리는 동안 준혁은 슬그머니 성우의 옆에 가 앉았다. 그 옆에는 이미 지호가 앉아 있었다.
“진수 형은 좀 어때?”
준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춰 물었다.
“통화했을 때보단 많이 괜찮아졌어. 일단 팀이 계속 가는 것 같으니까 다음 시즌 준비 해야 한다고는 하는데, 억지로 몸 움직이는 것 같아.”
“누워 있는 것보단 어떻게든 움직이는 게 낫지.”
잠자코 말을 듣던 성우가 고개를 홱 돌렸다.
“너 운동 얼마나 했냐?”
“갑자기? 나 그냥 미국에 있을 때랑 똑같이 했는데….”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단 좀 붙은 것 같아서.”
“미국에 있을 때보다 훨씬 보기 좋다.”
잠자코 대화를 듣던 지호가 너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필리가 게임만 같이 해 준 게 아닌가 본데.”
“형은 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뭘 그렇게 당황해? 진짜 뭐 있어?”
“그, 그런 거 아냐.”
짚이는 게 있다는 듯이 놀리는 성우의 목소리에 준혁이 고개까지 저으며 부정했다. 인준에 관해 혼자 들떠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승현을 통해 배우기도 했을뿐더러, 정말로 혼자 들떠 있는 게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로 승현은 집에 놀러 오지 않았다. 감정의 문제라기보다는 팀 서포터의 공백을 메우기 바쁜 것 같았다. 연락하면 답장은 늦더라도 돌아왔다. 귀찮으면 초성으로 답을 대신하는 텐션도 그대로였다. 미묘했던 그 날의 분위기와 달리 예전과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더 이상 인준을 주제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만 빼면.
“오늘은 감독님이 말씀하시려나.”
필리에 대해 놀리는 것도 잠시, 성우는 주어 없는 비꼼을 던졌다. 시선은 재하의 쪽이었다. 단단히 벼르고 있는 것 같은 목소리였는데 진수의 일 때문인지 불법 도박에 연루된 건 없어도 쌓인 게 많은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까 오늘 스크림 상대가 어디라고 했지? 한 팀은 중국팀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러나 준혁이 먼저 나서기도 전에 지호가 먼저 성우의 말을 못 알아들은 척 주제를 바꿨다. 특유의 푸근한 인상 덕분에 지호가 작정하고 나서면 불같이 화를 내던 사람도 한 번은 주춤했다. 눈이 마주치면 지호가 한쪽 눈을 깜빡였다.
“…다른 두 팀도 동부 팀이겠지 뭐.”
성우는 결국 지호가 바꾼 주제로 이야기를 넘겼다. 그렇게 스크림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 가다 보면 한동안 열리지 않던 문을 열고 감독과 코치들이 들어왔다. 준혁을 필두로 선수들이 하나둘씩 일어나 감독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래, 비시즌 동안 다들 큰일 없어 보여 다행이고.”
선수들이 다시 자리에 앉는 건 코감독들이 의자를 끌어와 앉은 다음이다. 성우는 왜 선수 감독 사이에 이러한 군기가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제멋대로 굴면 곤란해지는 것은 결국 팀이고 주장이었으니까.
코치로부터 서류철을 받아 든 뒤에 턱을 긁적이는가 싶던 감독은 천천히 이번 메타에 대한 설명과 로스터를 어떻게 꾸려 나갈지 간단히 브리핑했다. 메타를 파악하는 안목이나 로스터를 굴리는 사고를 보면 절대 무능력한 감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성우는 그가 일을 대충 한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가위바위보처럼 꼬리 무는 카운터 픽은 흔했지만 대부분 정조합 내에서 이뤄지는 싸움이었다. 특정 조합이 다른 조합을 이렇게까지 카운터 치고 꼬리를 무는 이번 메타는 리그에서 흔한 일은 아니었다.
“세 조합을 다 잘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리 팀은 선택과 집중을 하려고 한다.”
감독은 무엇이 쓰여 있는지도 모르겠는 종이를 넘기며 말했다.
“우리 팀은 3딜 조합으로 가되 22비비에게도 뚫리지 않는 픽 조합을 찾는 게 이번 스크림 목표고. 자, 그럼 선발 부른다.”
“잠깐만요, 이번에는 내부 테스트 없이 뽑습니까?”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진행되는 이야기에 성우가 황급히 물었다. 감독의 표정이 구겨진다.
“나나 코치진들은 뭐 생각이 없어? 메타 준비하면서 어련히 알아서 할까.”
“여태까지 이런 적이,”
“여태까지 이런 메타가 온 적이 없잖아! 메타가!!! 테스트는 보지도 않는 새끼가 왜 이렇게 말이 많아!!!”
감독이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보면 성우가 참 불만이 많아. 응? 서포터 좀 잘하니까 감독이 만만해 보여? 그렇게 네가 잘났으면 네가 애들 데리고 스크림하든가.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끼어들기나 하고 말이야.”
“…죄송합니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을 예감한 성우가 물러섰다. 킥. 웃음을 참지 못한 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히 볼 것도 없이 너스콜과 잴러스였다. 그럼에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감독은 잔소리를 이어 갔다. 인신공격으로 넘어가는 호통에 대한 반발 심리가 들끓었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그럴수록 팀원들의 연습 시간을 빼앗게 될 뿐이었으니까. 결국, 성우가 고개를 숙였다. 기를 꺾고 나면 그제야 감독의 화가 풀렸다.
“팀의 맏형이 되어서 애들 손 풀 시간이나 뺏고 참 잘하는 짓이다. 어디까지 했는지 까먹었잖아!”
“이제 선발 발표하기 직전이셨습니다.”
잴러스가 준비하고 있던 사람인 양 답했다. 방향을 잃었던 본론으로 돌아가는 건 들으라는 듯 혀를 차는 걸로 짜증까지 부리고 난 다음이었다. 준혁과 지호는 일부러 성우의 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러면 스크림 선발 인원 다시 알려 준다.”
감독이 다시 서류철로 시선을 돌렸다.
“서재하.”
등 번호 42번 너스콜. 당연한 선택이었다. 어느 조합이든 핵심 포지션인 서브 딜러 중 가장 보여 준 게 많았기 때문이다. 표정을 보면 크게 기뻐하는 기색도 없이 잔잔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이런 결과를 미리 알고 있는 사람처럼.
“…한성우.”
뒤이어 불린 건 성우였다. 감독의 목소리는 탐탁지 않은 것처럼 들렸지만, 팀에 유일한 서포터인 성우가 빠질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성우 역시 불려 놓고도 불편한 얼굴이었다.
스크림에서 일부러 던지는 게 아닌 이상 경기 선발까지 확실한 두 사람이 불리고 나면 감독이 무언갈 고민하는 듯 종이를 팔락거렸다. 긴장감으로 아랫입술을 씹었다. 이윽고 감독이 입을 열었다.
“이준혁.”
준혁은 무심코 박차고 일어날 뻔한 것을 애써 참았다.
됐다. 드디어 감독으로부터 기회를 받았다! 스크림에 불과할 뿐이었지만 준혁에게 이건 정식 경기만큼이나 중요했고 의미 있었으며 가치 있었다. 현실감이 돌아오기도 전에 지호가 먼저 등짝을 치며 축하해 왔다. 성우는 대놓고 놀라워하던 주제에 눈이 마주치자 마치 이 결과를 예상했다는 사람처럼 뻔뻔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서로의 얼굴을 보고 있다 보면 감독의 시선이 이쪽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세 사람은 동시에 그 눈길에서 불길함을 읽는다.
“남은 두 사람은 김상범, 김지혁. 이상 끝이다.”
세 쌍의 눈을 피하지 않던 감독은 서류철을 닫는 것과 함께 말을 이었다. 잴러스와 플로이드의 이름이었다. 감독이 자리를 피하기 전에 성우가 먼저 목소리를 냈다.
“저희 메인 딜 두 명입니까?”
“준혁이 너 들어가서 재하 서포트 해 줘라.”
감독은 성우 쪽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러니까, 서브 딜러가 되란 소리였다.
준혁의 챔프 폭이라면 서브 딜러도 무리 없이 커버할 수 있겠지만 이런 식으로 통보에 가까운 포지션 변경은 사실상 모욕에 가까웠다. 메인 딜러 자리에 어떤 경쟁도 없었을뿐더러 지혁의 픽폭상 준혁이 서브 딜러를 맡을 수밖에 없었다고 해도 서재하를 서포트하라는 말은 그의 자존심을 모욕 주는 게 맞았다. 애초에 서재하를 위한 서브 딜러는 KSH로도 할 수 있지 않나? 지호야 서브 탱커라서 1탱에 제외되었다 쳐도 준혁과 KSH의 내부경쟁도 없이 이준혁을 선발로 세운다고? 이제 와서? 감독이 준혁을 챙길 리는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이준혁을 스크림에서 제외하던 당사자였으니까.
“할게요.”
그러나 말을 더 잇기도 전에 준혁이 대답했다. 그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성우는 머리를 짚었다. 눈동자를 위로 굴리면 감독 뒤에 서 있는 김지혁의 모습이 보였다. 감독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차치하고 나서, 저 씨발 새끼를 또 서포트해야 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절망스러웠다. 성우는 이준혁이 스크림을 복귀한다는 사실만큼 김지혁과 더는 같이 게임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기뻤다. 아니, 이준혁의 스크림 복귀보다 김지혁과 같은 게임을 하지 않는 게 더 기뻤다.
그런데 이준혁을 끼고도 여전히 메인 딜은 김지혁이라고? 또 저 새끼 기분과 컨디션에 맞춰서 게임을 하라고? 차라리 구멍이 뚫리길 바라는 심경으로 지혁을 노려보고 있으면 속을 뒤집는 면상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서재하였다.
“애 체하겠다. 팀끼리 그렇게 기죽여도 돼?”
“널 죽일 순 없잖아.”
뱉은 말에 아차 싶어 고개를 완전히 들면 감독은 이미 자리를 나서고 없었다. 잴러스가 자연스레 지호를 데려갔다. 탱커에 관해 물어볼 게 있다는 이유였지만 핑계에 불과할 게 뻔했다.
“그렇게 싸고도는 주장이랑 드디어 게임하는 건데 좀 웃지.”
“기분 좆같은 거 많이 티 나나 보네. 네가 말을 처걸길래 내가 웃고 있는 줄.”
“말싸가지 여전해.”
“알면 말 좀 걸지 마.”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는 분위기도 잠시였다. 뒤늦게 둘이 붙은 걸 알아챈 준혁이 나서기도 전에 재하가 먼저 물러섰다. 두 사람이 붙었을 때 이렇게 온건하게 끝나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매사에 무관심한 성우가 답지 않게 진심으로 날을 세우는 것도 있었지만, 아닌 척해도 매번 성우에게 말리는 재하가 끝을 볼 때까지 물러서지 않는 것도 한몫했다. 재하가 그러든지 말든지, 근처에서 멀어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성우는 준혁에게 몸을 붙였다.
“너 하다가 메인 딜러로 바꿔. 나 쟤랑 게임 못해.”
“그래도 재하 형이랑 합은 잘 맞잖아.”
“걔 말고! 아니 걔도 갈아치워 버리고 싶긴 한데, 아무튼. 서재하 말고 김지혁.”
“그 소리도 매번 하는 거 알지?”
자연스레 성우에게 시선을 돌리려던 것도 잠깐, 준혁은 감독이 사라진 쪽으로 걸어가던 재하와 지혁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가만히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제법 선한 인상에 속하는 재하의 얼굴은 완전히 굳어 있었다. 대화가 들릴 거리는 아니었음에도.
“이준혁! 듣고 있어?!”
성우는 다른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서 준혁을 불렀다.
“어, 어. 듣고 있어.”
준혁은 조금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선만 슬쩍 돌려 다시 앞을 보았을 때는 두 사람 모두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이번엔 진짜, 진짜 못 한다고. 내 말 이해했어?”
마침내 고개를 돌려 집중해서 본 성우의 얼굴은 초조해 보였다. 안경테로 가리고 있던 날카로운 눈매는 불안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준혁은 성우가 제게 보여 주는 혼란의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에임이 흔들리는 백승현. 성우가 기복이 심한 딜러를 싫어하는 이유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불안해하는 건 처음이었다. 불현듯 진짜 잘하는 사람만 데리고 게임하고 싶다던 그 언젠가 성우의 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적당히 헤일리 같은 거 하다가 메인 딜러로 바꿔.”
“…정말 답 없이 게임이 말리면 그때 바꿀게.”
성우가 미간을 찌푸리고 노려보았다. 이해할 수 없다는 의사가 잔뜩 담긴 눈빛에 준혁은 괜히 침을 삼켰다.
“형이 뭘 걱정하는지 알아, 아는데.”
“진짜 아는 거 맞아?”
“…다시 감독님 눈 밖으로 튀는 건 최대한 피하고 싶어.”
미안해, 형. 사과로 말을 마무리한 준혁이 시선을 떨궜다. 성우는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어떻게든 설득을 시켜서 메인 딜러를 시킨다면 자신이야 편하겠지만, 그는 다시 스크림에 나오지 못할 게 분명했다. 몇 개월 만에 준혁에게 온 기회였다. 그걸 이렇게 걷어찰 수는 없다. 준혁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게임에서 이기고, 자신이 선수답게 게임하기 위해서는 지혁이 메인 딜이어서는 안 된다. 개개인의 재량이 특히 중요한 이 메타에서, 서포터가 대거 하향 당해 챔프의 성능에 크게 기댈 수 없는 지금 같을 때 지혁에게 묶이고 끌려다니는 플레이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하지만….
머리가 차갑게 식었지만 이성이 돌아온다는 느낌은 없었다. 손안에는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괜찮아. 나 이번에 서브 딜러 연습 많이 했거든.”
태평하다고 착각될 만큼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우는 멍하게 뜬 눈을 몇 번 깜빡이는 것으로 아득해져 가는 정신을 붙잡았다.
“형 알잖아. 나 라이스인 거.”
그제야 성우는 답지 않게 그가 자신을 위로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네가 서브 딜러를 할 일이 뭐가 있어.”
“내 픽폭이 어디서 나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무지성.”
“형은 진짜.”
준혁이 노려보았지만, 성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안경을 벗어 알에 묻은 게 없는지 살폈다. 버릇 중 하나였다.
“경쟁 애들이 너한테 픽 양보를 안 했다고?”
“부계로 게임했잖아.”
“지우개 그거 다 털리지 않았냐.”
“안 털렸어.”
“아무리 그래도. 너 백승현이랑 게임 했다면서.”
안경을 도로 쓴 뒤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확신에 차서 대답하던 직전과 달리 더 이상 말을 이어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준혁을 의아하게 보던 성우는 한 박자 늦게 이유를 깨닫는다. 필리 때문이구만.
“걔도 참 독하다. 사십센트도 있는데 굳이 너까지?”
그 티어에서 모스트에 알렉 같은 챔프를 밀어 넣은 것부터가 보통 고집과 독기가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설마하니 라이스에게 서브 딜러를 시켰을 줄이야. 그렇다면 1서폿을 주로 쓰는 것 같은데 실력에 대한 자신이 엄청났다. 패치가 적용된 뒤, 2서폿 조합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며 사기 조합이 만들어지고 있는 지금 1서폿을 고집하는 건 보통 자신이 있지 않은 이상 못 할 선택이었다. 한 손에는 사십센트, 다른 한 손에는 라이스를 들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으면 준혁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성우는 한 번 본 적 있었다. 필리의 디톡 메시지에 너무 어리게 답하고 싶지 않다던 그 때.
“…설마 네가 나서서 서브 딜러 하겠다고 했냐?”
준혁의 얼굴이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양팔에 소름이 돋았다. 본능적인 거부감이었다. 그가 서브 딜러를 한다는 사실 때문인지 수줍은 얼굴 때문인지, 둘 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준혁이 메인 딜러에 대한 어떤 고집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깊게 박힌 의식이라고 해야 할까. 라이즈 시절부터 지금까지 팀 내에 가장 넓은 챔프 폭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포지션은 메인 딜러로 굳어 있었고 게임을 하거나 무슨 일이 있으면 자연스레 히트 스캔 챔프를 들게끔 키웠다. 서포터를 편하게 하는 길은 헤드샷으로 적 서폿의 대가리를 따 오는 일이라 가르친 성우에게 있어 필리를 위해 서브 딜러를 자처한 준혁의 태도는 신기했다.
필리가 의도한 건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이준혁을 다루는 데 꽤 재능이 있는 게 분명했다. 성우는 안경을 고쳐 썼다.
“이거 내 백업 서폿으로 필리 데려와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어?”
“어?”
농담으로 뱉은 말에 준혁이 눈을 크게 떴다. 거기에 덩달아 놀란 성우가 눈을 깜빡였다.
“…왜 한 번도 그런 생각을 못 했지?”
준혁이 목소리에 어딘가 영혼이 없었다. 진심이 담겨 있지 않는다기보다는 정신이 빠져 있는 것같이 멍한 목소리였다.
“야, 농담이니까 정신 차려.”
“아니, 나도 알긴 아는데….”
전혀 아는 게 아닌 목소리였다. 그렇게까지 마음에 들었다고? 얼이 빠진 듯, 상당히 진지한 얼굴에 성우는 덩달아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경쟁전에서 잘하는 일반인들을 볼 때면 프로 안 하고 뭐 하나, 생각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2부 리그를 염두하고 하는 말이었다. 경쟁과 경기는 다르다. 뉴욕에서 발렌타인이라는 로또가 나와 몇몇 감독이나 스카우터들이 경쟁으로 다시 눈을 돌리고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성우는 2부에서 검증이 되지 않은 사람들을 바로 스카우트하는 행위가 무모하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만약 말 꺼내 봤다가 인, 필리 형이 오기 싫어하면 어떡하지.”
“실력이 되는지는 미뤄 두고, 그걸 거절하는 사람이 있어?”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던 것과 달리 준혁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는 듯이 성우를 가만히 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시나리오는 럴러바이를 응원하는 것을 넘어 신격화하는 인준이 진지하게 럴러바이에게는 백업 선수가 필요 없다고 거절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인준의 마음보다도 눈앞에 있는 한성우였는데, 정확히는 성우 덕분에 생긴 팀의 별명 때문이었다.
“…뭐, 왜?”
서포터의 무덤.
정작 삽을 들고 묘비를 세운 당사자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후보 선수들이 경기에 나갈 기회조차 없는 건 사실 성우가 아닌 감독이 택한 문제였지만, 팀을 들어올 때만 해도 럴러바이에 대한 동경을 안고 온 선수들이 럴러바이 때문에 나간다고 말을 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저 직업인 일을 열심히 잘했을 뿐인 한성우. 잘하는 선수를 뽑아 경기에서 이겨야 하는 감독. 긴 벤치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나가는 선수들. 모두가 이해됐기 때문에 누구 하나 콕 짚어서 탓할 수 없었지만, 준혁은 인준이 그 굴레에 빠지도록 두고 싶지는 않았다.
같은 팀 유니폼을 입고, 승리라는 공통된 목표를 향하며, 자신의 옆에서 웃고 있는 인준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지만, 만약 인준이 팀을 나가게 된다면.
“됐어, 농담 길게 생각하는 거 아냐. 당장 우리 앞길도 막막한데 뭔 남을 챙겨.”
생각의 결론이 나오는 것도 잠시, 성우가 준혁의 어깨를 치며 억지로 몸을 움직이게끔 앞으로 밀었다. 하기야 이제 고작 스크림 인원에 끼었을 뿐인데 누구의 앞일을 생각하고 있는 건지. 무심코 성우가 던진 말에 너무 앞서서 생각한 게 맞았다. 별개로 시카고의 유니폼을 입은 인준의 모습은 한동안 자신을 여러 의미로 괴롭힐 것 같았지만, 뒤이어 따라오는 행복함으로 불안을 뭉갠 준혁은 앞으로 걸어 나갔다.
* * *
[전체] LEEWAY: oh
[전체] LEEWAY: REAL RI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