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질 인(仁) 세 번이면
“이제 들어가도 돼?”
“잠깐만요! 거의 다 했어요!”
우당탕, 무언가가 대차게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 신발장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인준은 하늘을 바라본 채 숫자나 셌다. 두 번째 만남은 처음보다 수월했다. 약속 장소로 준혁이 차를 끌고 왔을 때는 사실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저번에 못 산 밥을 꼭 사 주고 싶다며 대낮부터 데려간 레스토랑에서 와인과 스테이크가 나올 때 결국 비명 아닌 비명을 질렀지만, 아무튼 수월했다. 포드 머스탱의 승차감은 편안했고, 한우 스테이크는 입 안에서 살살 녹았으니까. 여기서 돌아간다면 먹튀다. 인준은 끊임없이 되새겼다. 나는 지금 승차비와 고깃값을 인내로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비록 어젯밤 안부 전화를 드렸다가 이름의 인 자가 참을 인이 아니라 어질 인(仁)이라고 크게 깨졌지만, 그래도 인내는 시카고 플레티넘이 만들어 준 나의 특기니까.
“많이 기다렸죠? 미안해요. 환기를 시키고 나간다는 걸 깜빡해서.”
준혁은 옷소매를 팔까지 걷어붙인 채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웃는 낯짝에 침은 죽어도 못 뱉는 인준은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습관처럼 입에 붙어 버린 괜찮다는 말로 대충 넘기고, 방치된 지 10분 만에 드디어 그의 집으로 들어섰다. 경비 보안이 잘 갖춰져 있는 지하 주차장이 있을 때부터 느꼈지만 말이 오피스텔이지 사실상 아파트와 다를 게 없었다. 오피스텔 특유의 화이트와 베이지색으로 꾸며진 집에는 생활에 딱 필요한 정도의 가구만 있었다. 생활감이 그다지 느껴지진 않았지만, 10분 바짝 땀 흘려 치운다고 생기지 않는 깔끔함이 구석구석 배어 있었다. 수험생과 직장인 대신에 집안일을 모두 떠맡다 보면 알기 싫어도 보이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집 진짜 깨끗하게 쓰네.”
“시즌 오프 중에만 머물러서 좀 휑해요.”
“쉴 때는 주로 운동하나 봐.”
“게임도 오래 하려면 운동해야 하더라고요.”
인준은 거실에 놓여 있는 덤벨을 재빠르게 스캔했다. 적혀 있는 무게는 딱 근육이 다치지 않을 정도다. 그 옆에 정갈하게 말려서 세워져 있는 요가 매트까지 보건대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 하는 운동에서 되레 부상을 입는다든가 하는 주객전도는 없을 것이다. 그의 손가락이 무사함을 확인받았을 때와 비슷한 안도감이 차오른다. 그렇게 안심하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했다. 라이스의 운동 소식에 대해 보통의 팬들이 아는 건 럴러바이가 가끔 방송에서 꺼내 놓는 이야기가 전부였다. 라이스는 지금 운동 중이라고 짧게 대신 근황을 전하는 그 정도.
“아, 내가 좀 너무 살펴보나?”
별생각 없이 집 안 거실을 돌아다니던 발걸음을 멈춘 인준이 준혁을 돌아본다. 어딘가 멍하게 있던 준혁은 뒤늦게 허둥거리며 대답했다.
“아뇨! 괜찮아요. 형 보고 싶은 만큼 보세요.”
“네 집인데 편안하게 있어.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그래도 되는데.”
“그럼 잠깐 티비 보고 계실래요? 지금이면 메이킷보이즈 어제 했던 거 재방할 거예요. 저랑 경쟁전 돌린다고 못 봤으니까,”
“가서 옷이나 갈아입고 와.”
“넵.”
준혁이 군말 없이 방에 들어갔다. 냉큼 제안을 받는 걸 보니 역시 옷이 많이 불편했나 보다. 첫 오프 때같이 힘을 준 정장 차림은 아니었지만, 집 안에서 입고 있기에는 불편할 슬랙스 차림이었다. 시야에서 그가 사라지자 인준은 비로소 큰 한숨을 내쉬었다. 의식의 저편에서부터 한 달 뒤에 어떻게 손 털고 튀려고 이러냐는 영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계속 맴돌았다. 인정한다. 방금은 너무 거리낌이 없었다. 시즌 오프라는 짧은 기간 동안 혼자 산다고 해도 결국 집이다. 그 사람의 생활이 녹아 들어 있는 집. 몰랐던 라이스의 모습을 아는 것과 그가 어떻게 사는지 알게 되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소파에 쓰러지듯 앉은 인준은 자신의 눈가를 눌렀다. 들뜨지 말자. 제발.
심호흡으로 스스로를 한 번 진정시키고 난 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경기가 시작하기까지 아직 3시간 가까이 남아 있었다. 경쟁 다섯 판은 충분히 돌릴 수 있는 시간이다. 이성이 차분하게 일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집에서 느껴지는 적막을 어쩐지 견딜 수가 없던 인준은 휴대폰의 홀드 키를 누르는 것도 잠시, 소파 팔걸이에 놓여 있던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까맸던 화면에 빛이 들어오자마자 켜지는 화면은 연하늘색 페인트칠이 되어 있는 배경 화면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었다. 좌측 상단에 피라미드 모양의 로고는 티비에 관심이 없는 인준이 거의 유일하게 알고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메이킷보이즈81.
기뻐하는 소년의 밑으로 자막이 깔린다. ‘저 미션 1등 했어요~~’ 곧장 전환되는 화면은 골방 연습실처럼 보이는 곳에서 후드티를 쓰고 있는 세 명의 연습생으로 바뀐다. 열중하는 그들의 얼굴 위로 동글동글한 자막이 덧씌워진다. 열심히 라방을 준비하는 02즈. 라방을 시작하자마자 올라가는 숫자에 당황. 무난한 소통 시간~ 어떤 채팅을 발견한 전주연 연습생. 거짓말! 삐ㅡ가 절 어떻게 알아요~ 다시 화면이 전환된다. 아까 보았던 인터뷰 장면이다. 피디의 질문이 자막으로 올라온다. 라이브 방송 중에 무엇을 보신 건지? 인준은 ‘개인 연습생 전주연’ 이름표를 붙인 채 수줍게 웃는 소년이 대답하기 전에 황급히 전원을 껐다.
그가 게시글을 올린 날 밤, 야자를 끝마치고 돌아온 연지가 자신을, 정확히는 라이스를 하늘 모시는 것처럼 감격해하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대중적으로는 오픈 시티계의 전설적인 존재처럼 이미지 메이킹 되어 있기 때문인지, 라이스의 파급력은 인준이 생각한 이상이었다. 거기다 스쳐 지나간 언급이어도 시청률 1위 프로그램답게 라이스 본인까지 ‘연습생이 되어도 이상할 것 없는 외모’라며 또 한 번 주목을 받았다고. 기어코 메신저로 연지에게 ‘성덕 전주연’이라는 제목으로 작성된 글을 받았을 때, 인준은 빌었다. 제발 대중은 평생 라이스의 최근 폼에는 관심이 없기를.
자연스럽게 찾아온 적막 속에서 차마 티비를 다시 켤 생각은 하지 못하고,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으면 그가 들어간 지 한참 지났음을 깨닫는다. 그의 집에서 재촉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은 아주 잠깐에 불과했다. 아직도 그의 셋업 수트가 가져다준 충격을 기억하고 있는 인준은 홀린 듯이 그가 들어간 방문 앞에 다가섰다.
똑똑똑, 노크와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갑작스럽게 코앞에서 마주하게 된 상대의 모습에 서로가 깜짝 놀라 할 말을 잃는다. 준혁은 다행히 위아래 모두 옷을 입고 있었다. 그의 체격에도 살짝 커 보이는 듯한 흰색 티셔츠에는 깔끔한 팀 로고가 박혀 있었고, 항상 드라이로 정돈되어 있던 머리는 자연스럽게 이마를 덮고 있었다. 그의 내린 머리는 공식 경기에서도 아주 드물게나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아니, 그냥 왜 이렇게 오래 걸리나 해서….”
저도 모르게 발뺌하는 듯한 말이 새어 나간다.
“경기 시작하기 전까지 할 것도 없는데 경쟁 뛸래?”
여전히 말이 없는 준혁보다 먼저 정신을 차린 인준은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끔 두어 걸음 물러나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아, 경쟁이요, 네, 저 경쟁 좋아해요, 경쟁 뛰어요. …근데 저 집에 컴퓨터가 한 대밖에 없는데.”
“그럼 너 하는 거 구경하지 뭐.”
인준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컴퓨터를 찾았다. 아, 혹시 게임 하는 방이 따로 있나? 대강 거실의 구조를 파악한 듯한 그가 닫힌 방문들을 훑어본다. 준혁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방문을 소리 나게 닫았다. 갑작스러운 쾅 소리에 깜짝 놀란 인준이 자신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준혁은 변명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컴퓨터는 자신의 등 뒤, 즉 자신이 잠드는 침실에 놓여 있다. 그러니까, 지금 이대로라면 그가 자신의 침대가 있는 방 안으로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것만은 안 된다고, 머리보다 손이 먼저 반응했다.
여태까지 했던 긴장은 모두 낯가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은 대개 상대가 먼저 다가오는 쪽이었다. 입학식 날부터 소문에 시달리던 백승현이 그런 거에는 전혀 관심 없던 제게 먼저 이름을 물어왔고, 진짜 잘하는 사람만 데리고 게임하고 싶다던 한성우가 당시 아시아섭 1위였던 자신에게 먼저 차비를 쥐여 주며 이름도 짓지 않은 팀에 들어올 것을 권유했다. 그런 걸 차치하고서도 저가 어린 나이부터 게임만을 바라보며 돈을 벌고 라이스로 살아가며 어리숙하게 남은 부분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단지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 미숙한 부분을 몰랐으면 하는 줄 알았다. 친해지고 싶어서 잘 보이고 싶은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시작은 분명히 그랬다.
자신의 집을 구경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무언가가 잘못됐음을 알았다. 화이트가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건 첫 만남 때부터 알고 있었는데, 다른 오피스텔과 다를 게 없는 색으로 꾸며진 무미건조한 공간에 서 있는 그를 눈에 담으며 처음으로 복도 벽을 채운 베이지색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문득 아무런 위화감 없이 이 집에 녹아드는 그가 이곳에 계속 머무른다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했고, 그다음에는 목 뒷덜미부터 화끈 열이 올랐다. 때마침 받은 환복 권유에 방으로 도망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도망친 자신의 방에서 책상 위에 잘 보이게끔 놓아둔 그의 모자와 마주친 준혁은 그를 집으로 부른 게 자신의 실수였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자를 좋아한다는 말은 진심이었는데. 몰래 다시 떠올린 회상에서는 그의 등 뒤로 하얀 커튼까지 펄럭이고 있었다. 서둘러 그가 서 있던 곳에 한성우를 세워 본다. 그러나 머리가 상상을 거부한다. 억지로 이미지를 그럴수록 팔에는 소름이 돋았다. 이건 인준이 형이라서 괜찮은 거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단지 지금의 자신은, 그러니까, 너무 들떴을 뿐이다. 세계 최고 서포터의 도움으로 조금이나마 돌아온 제정신으로 천천히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돌이켜 보았다.
생각해 보면 누군가를 집에 들인 일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게 하필 처음으로 먼저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어서, 그래서 앞서가 버리다 못해 경로를 이탈했을 뿐이다. 그는 초대했기에 별다른 생각 없이 놀러 왔을 뿐이고, 애초에 이 집에서 누가 머무르고 간 적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의식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정리를 마친 다음에도 어쩐지 몸에 오른 열은 쉽게 식질 않아서, 문에 기대앉아 평소처럼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기다림에 지친 그가 문을 두드렸고 그 뒤에 이어진 게 바로 지금이었다.
이 상태로 그가 자신의 방에 들어오는 건 안 된다. 들뜨지 않기로 다짐했고 쓸데없이 의식하는 게 웃긴다는 걸 아는데, 정신 차리려고 정말 노력하고 있는데, 근데 일단 방은 안 된다.
“컴퓨터 어디 있냐니까.”
“컴퓨터가… 그러니까… 고장 났어요. 네. 갑자기 부팅이 안 되더라고요.”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경쟁 잘 뛰었잖아.”
“네… 그러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잘됐는데… 갑자기 오늘 아침부터… 이게… 안 켜지던데요?”
준혁은 필사적으로 방 문고리를 등으로 가리며 말했다. 대수롭지 않게 손목시계로 시간을 살피던 인준의 미간이 좁혀진다.
“USB 꽂아 둔 건 없고? 본체 청소 언제 마지막으로 했어? 그래픽카드나 메모리카드, 메인보드에 문제 생긴 거면 A/S 맡겨야 할 텐데 근처에 수리점은 있어?”
“아주 멀리 있어서 형 가면 따로 A/S 맡기려고요.”
눈을 내리깔고 뭔가 고심하는 듯싶던 인준이 곧 손목에 찬 시계를 풀었다.
“어디 있어, 내가 지금 봐줄게.”
“네?”
“수리 견적 내 준다고. 그냥 RAM 접촉 불량일 수도 있잖아. 그런 건 다시 청소하고 끼우면 금방이거든.”
“저 다른 사람이 제 컴퓨터 만지는 거 안 좋아해요!!”
뱉어 놓고 아차 싶었다. 타인의 손길이 싫다면 A/S는 어떻게 맡길 것인가. 아니나 다를까 그 역시 황당한 표정이었다. 솔직히 장소만 제집이 아니었다면 거짓말을 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컴퓨터를 갖다 바쳤을 것이다. 당장 컴퓨터에 대해 잘 아는 듯한 그 모습에 또 한 번 설레고 있는 게 제 현실이었으니까. 그러기를 잠깐, 인준이 코웃음 치며 고개를 돌렸다. 무언갈 중얼거렸지만 잘 들리지는 않았다. 문고리를 잡은 손에 여전히 힘을 주고 있으면 그가 다시 시선을 마주해 왔다.
“그래, 그럼 남은 시간 동안 티비나 보자.”
“…영화나 드라마 보고 싶은 거 있어요? VOD 막 사서 봐도 괜찮은데.”
“근데 경기는 이따가 어떻게 봐?”
“티비랑 유큐브랑 연결돼서 괜찮아요. 팀 생활하면서 경기 화면 크게 보는 게 습관이 돼서….”
“영화 보는 느낌이고 좋겠다.”
“…불 끄고 팝콘이랑 볼까요?”
“하나뿐인 친구 경기라며.”
“승현이도 한 번은 이해할걸요.”
물러서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인준은 순순히 티비 맞은 편에 있는 소파로 걸어갔다. 낌새를 살피듯 그를 바라보던 준혁은 그제야 문에 붙였던 등을 떼고, 천천히 그를 뒤따랐다. 아무거나 상관없다는 말로 대충 리모컨을 준혁에게 밀어 둔 채, 손목시계를 다시 차는 인준은 그가 아주 가소롭다고 생각했다.
라이스의 컴퓨터가 고장 났다는 말에 잠깐 이성을 잃고 달려들 뻔한 것도 잠시, 어딘가 찝찝한 것이 수상하다 싶더라니, 아니나 다를까 거짓말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자신의 컴퓨터를 만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말은 라이스를 모르는 사람에게나 먹힐 말이다. 애초에 장비를 빌려줘 놓고서 인제 와서 본체를 내줄 수 없다는 건 앞뒤가 맞질 않았다. 그에게서 처음으로 거절당한, 그것도 거짓말로 거부된 사실에 혼란스러움을 느끼기는커녕 리그라는 독을 해독하고 굳건해진 이성이 빠릿빠릿하게 정보를 처리했다.
그 방문 앞을 지키듯 막아서는 것을 보면 컴퓨터는 분명 저곳에 있다. 그러나 그가 들어가서 옷을 만들어 입고 나온 것을 보면 최소 드레스룸, 내지는 침실의 가능성이 있다. 보통 드레스룸에 컴퓨터를 두지는 않을 테니 아마도 후자. 그렇다면 컴퓨터가 고장 났다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출입을 막는 그의 태도가 이해됐다. 단번에 간파한 거짓을 찌를까 고민하는 건 아주 잠깐이었다. 라이스에게도 보호받아야 할 사생활이 있을뿐더러, 들뜨지 않기로 다짐한 게 불과 5분 전이였기 때문이다.
그가 어떻게 게임을 하는지, 피시방에서는 듀오를 하느라 보지 못했던 부분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아쉬움이 밀려들었으나 적당히 뺄 줄도 알아야 큰 것을 움켜쥐는 법이다. 이제 어떻게 비어 있는 3시간을 보다 알차고 효율적으로 보낼 수 있을까. 혼자만의 고민으로 빠져드는 순간이었다.
“성우 형이 방송 켰다는데, 그거 볼래요? 티비로 연결해서 볼 수 있는데.”
갑작스럽게 껴든 목소리에 놀라 준혁을 보니 그의 한 손에는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그 액정에는 럴러바이의 개인 방송 시작 알림이 와 있었다. 같은 팀 선수끼리 방송 구독을 하는 건 흔한 일이다. 그 위로 잴러스의 방송 알림이 도착한다. 선택지는 정해져 있었다. 인준은 선수들의 개인 방송은 그렇게 찾아보지 않는 주의였지만 럴러바이의 방송은 달랐다. 그의 방송을 통해 보이는 플레이는 언제봐도 배울 게 많았으니까. 거기다 럴러바이의 플레이를 통해 라이스에게서 평소 합을 맞출 때라든지, 유용한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빠른 계산을 끝낸 인준이 순순히 동의의 답을 던지려던 때였다.
“어… 상범이 형이 지금 전화해도 되냐는데요?”
이쪽의 답을 기다리는 동안 휴대폰을 조작하던 그가 허락을 구하듯 물었다.
라이스를 적당히 사랑하지 못해 이러고 있지만, 럴러바이를 대신해서 군대를 두 번 갈 생각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인준은 시카고 플레티넘의 승리를 이끌어 내는 모든 선수를 지지하고 좋아했다. 어느 때든 기복 없이 안정적인 경기력을 뽐내는 이프리트와 잴러스 탱 듀오는 말할 것도 없었다. 물론 방금은 럴러바이를 선택하려고 했지만, 하여튼. 라이스와 첫 디톡을 하던 그 순간, 듣는 것과 동시에 사라졌던 환상과 설렘과 어색함이 합쳐진 무언가가 성큼 제 앞으로 다가왔다.
방송 알림 다음에 전화가 도착한 것을 보면 듀오를 하자는 거거나, 채팅에서 팬들이 요청했을 가능성이 컸다. 의외로 개인 방송에서 라이스에게 가장 전화를 자주 거는 건 잴러스였다. 간신히 이성을 붙잡은 인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오프 약속을 잡은 뒤, 어느 정도 리그에 미친 놈처럼 보이지 않기 위한 특훈을 해 온 덕분이다.
곧이어 준혁의 전화벨이 울렸다. 그가 멋쩍게 웃는 것도 잠시, 휴대폰을 귀에 가까이 댔다.
“지금 집에 친구랑 같이 있어요. 아, 저 승현이 말고도 친구 많아요!”
애써 관심 없는 척,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들어 패턴 잠금을 푼 인준은 그대로 멈췄다. 마지막 동작 그대로 굳어 버렸다는 표현이 더 옳을지도 모르겠다. 라이스를 직접 만나면서 처음 듣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그러나 귀에 들리기에는 지나치게 익숙한, 쇼맨십을 위해 한차례 텐션을 높일 때의 그 목소리. 웃음을 섞어 가며 소리를 내는 준혁은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으나 표정은 미묘했다. 이러는 게 익숙하다 못해 닳고 닳아 버린 듯한, 설명하기 어려운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형 시청자들이 자꾸 저 찾아요? 아, 이거 형 시청자 뺏을까 봐 방송을 못 켜겠네―”
그는 마치 어제도 안부를 주고받은 것처럼 친근하게 잴러스와 웃고 떠들었다. 시카고 선수에 대한 설렘은 한순간 날아가 버리고, 남은 것은 보면 안 될 것을 봐 버린 듯한 미묘한 기분뿐이다. 인준은 서둘러 자신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닥치는 대로 앱을 눌렀다. 깔아 둔 상태로 오랫동안 방치한 모바일 게임이라든지, 대신 찍어 준 연지의 사진으로 가득한 갤러리라든지, 확인하지 않은 메신저라든지.
“커뮤요? 저 그런 거 잘 모르는데… 계삭빵이요?”
그리고 언제 읽음 처리가 되었는지 모르겠는 영이의 메신저를 확인하는 그 순간, 인준은 두어 걸음 떨어져서 앉은 준혁에게 팔을 뻗었다. 몸을 던졌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당연하게도 그의 전화를 뺏기 위함이다. 그와 동시에 인준의 손에서 떨어진 휴대폰 화면에는 영에게서 도착한 메신저 화면이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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