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정체 (4/5)

3. 정체

눈을 뜨기 무섭게 온몸의 근육들이 통증으로 울부짖었다. 포이베의 입에서는 절로 앓는 소리가 흘렀다.

“으…….”

뭐야, 나 어제 분명 거기서 기절했는데…….

일어나보니 정액으로 엉망이 되었던 몸은 깔끔하게 씻겨져 있었고, 몸은 얌전히 침대에 누워 이불까지 덮어져 있었다.

‘그 녀석들 짓인가.’

대체 어떻게 알고 집 문까지 연 건지. 제가 기절할 때마다 몇 번 있던 일이지만, 도통 적응이 되지 않는다.

문득 그들이 제 집까지 찾아오려 했던 걸 떠올리며 포이베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런데 대체 누구지……?’

마을에 이런 짓을 할 사람이…….

순간 포이베의 머릿속에서 저를 베베라 불렀던 사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목소리는 완전히 달랐지만 저를 베베라 부르는 데에 있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던 사내.

‘설마 라드고와 단테 중 한 명인 건 아니겠지……?’

아니, 아니야. 설마 그럴 리가 없잖아. 둘 다 오래전부터 이웃사촌처럼 자란 친구들인데.

그들과의 관계가 황홀할 정도로 좋다는 건 사실이었으나, 불안한 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당장 오늘처럼 제 몸이 침대 위에 뉘여진 것만 해도 그렇다.

‘영 찝찝한데…….’

뭣하면 에반이나 바라드 집에서 신세 좀 질까.

침대 옆 협탁에는 미지근한 물도 놓여져 있었다. 웃기지도 않는다. 겁탈범들 주제에 이런 걸 챙기는 꼴이라니.

‘물론 그놈들이랑 즐기고 있는 나도 분명 정상은 아니지만…….’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포이베가 작게 한숨을 뱉었다. 몸이 영 피곤했다. 오늘은 좀 쉬고 싶었다.

‘주말이니까…….’

조금 쉬자.

* * * ฅ^._.^ฅ **~ 유출 § 재업 금지 ~**

토요일 오후는 한가로웠다. 밤새 정체불명의 사내들에게 시달린 것 때문인지 포이베는 한참 집에 늘어져 낮잠을 자고 있었다.

“포이베!”

“베베!”

대문 너머로 저를 부르는 인기척과 노크소리가 들렸음에도, 포이베는 세상모르고 잠에 취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쓸 뿐이다.

그녀가 반응이 없자, 밖에서 문을 두들기던 손짓이 더욱 거세졌다.

“베베, 안에 없어?”

“이상하다. 없을 리 없는데…….”

한참 더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소란에 잠이 깬 포이베가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켰다.

“무슨 소리지…….”

아직 비몽사몽 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다시 한번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포이베, 안에 있어? 문 좀 열어봐.”

익숙한 목소리에 포이베가 허둥지둥 일어나 문을 열어 주었다.

“단테? 에반? 갑자기 무슨 일이야?”

포이베가 반쯤 감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그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안에서 뭐 하고 있었어.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잖아.”

“무슨 일은…… 그냥 피곤해서 낮잠 좀 잤어.”

피곤하다는 말에 에반의 눈에 미묘한 이채가 돌았다.

“피곤해?”

“응, 조금…… 피곤하네.”

“왜? 무슨 일 있어? 그러고 보니 안색이 조금 안 좋은 거 같기도 하다. 요즘 뭐 고민 있는 건 아니고?”

에반이 퍽 부드러운 목소리로 포이베의 뺨과 이마를 만지며 물었다. 익숙한 손길에 포이베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아니야…… 고민이라니. 그런 거 없어.”

에반이 고민 있는 것 아니냐 물었을 때, 토요일마다 저를 불러내는 정체불명의 사내들이 떠올라 마음이 불편해졌지만, 포이베는 애써 티 내지 않았다.

“그나저나 난데없이 웬일이야?”

“아, 오늘 라드고네서 바베큐 파티 하기로 했거든.”

“바베큐 파티?”

파티라는 말에 그녀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당연했지만, 바베큐 파티는 포이베처럼 평범한 소시민들이 쉽게 열 수 없는 것이었다.

뭐 작은 상단을 꾸리며 그런대로 돈을 벌고 있는 라드고는 예외였지만.

“수확제도 아닌데 벌써? 조금 이르지 않아?”

“응, 그렇기는 한데 요즘 베베 네 안색이 조금 안 좋아서…… 그래서 준비해봤어.”

이어진 말에 포이베가 짧게 감탄사를 흘렸다. 갑작스러운 바베큐 파티라니. 평소라면 분명 기뻐서 폴짝폴짝 뛰며 당장 라드고네를 향해 달려가야 할 텐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기묘한 불안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솜털들이 쭈뼛 일어서며 소름이 돋았다.

‘일교차가 커서 그런가…….’

으슬으슬하니 쎄하네.

싱글벙글 웃고 있는 에반과 단테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포이베의 대답만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

“갈 거지? 응? 이미 다 준비해놨단 말이야.”

단테가 보채듯 포이베의 옷자락을 잡고 살갑게 웃어 보였다. 해사한 그 미소에 못 이긴다는 듯 포이베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공짜 고기라니. 그건 언제나 환영이지.”

포이베는 애써 묘한 기분을 떨쳐내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옷만 갈아입고 나올게.”

* * *

“포이베, 왔어?”

마을에서 가장 크기로 유명한 라드고의 집으로 향하자, 마당에서 고기를 굽고 있던 바라드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뭐 그래봤자 시골 마을의 조금 큰 오두막집 정도였지만, 라드고네 마당은 포이베가 유독 좋아하는 장소였다.

“와, 벌써 굽고 있는 거야?”

노릇하게 익어 입맛을 동하게 하는 바베큐 냄새를 맡으니, 은근히 불안하던 마음은 싹 사라진 지 오래였다.

‘요즘 좀 예민했나.’

안 그래도 피곤했는데, 고기 먹고 힘내야지.

포이베가 자연스럽게 바라드의 곁에서 고기 굽는 것을 돕기 시작했다. 그러자 머지않아 안에서 채소를 다듬던 라드고도 나와 그녀를 반겼고 단테와 에반 또한 접시와 포크 등을 놓으며 식사 준비를 도왔다.

“술은 어느 거로 할까? 작년에 만든 포도주? 아니면 재작년에 만든 포도주?”

“작년!”

“좋아.”

살짝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었으나, 뜨거운 불 근처에서 알짱거리고 있으니 그다지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따 고구마도 구워 먹자.”

“그거 좋네. 이제 그만 가서 먹어봐. 고기는 내가 구울게.”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평화로우면서도 소란스러운 날이었다.

친한 친우들과 술잔을 맞부딪히며 작년에 함께 담갔던 포도주를 마시고, 조잘조잘 이야기꽃을 피우는, 그런 평범한 날.

아, 양껏 고기를 먹었으니 조금 특별한 날인 건가?

포이베가 부른 배를 문질거리며 알딸딸하게 술에 취해 해롱거렸다.

많이도 먹어댔으니 배가 부를 만도 하다.

고기에 이어 군고구마도 먹었고, 에반이 따온 물렁감도 먹었다.

‘좋다…….’

부산스럽게 뒷정리를 하는 그들을 보며 포이베가 작게 하품했다. 슬슬 잠이 오는 모양이었다.

“나 화장실 좀…….”

“응, 다녀와.”

포이베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능숙하게 라드고의 집 안으로 향했다.

‘화장실만 갔다가 치우는 거 도와줘야지.’

얻어먹기까지 해놓고 태평하게 누워만 있는 건 역시 미안한 일이었다. 그들이 아무리 됐다고 말한들, 포이베의 양심이 괜찮지 않았다.

집 안으로 들어오니 벽난로를 켜둔 건지 공기가 따뜻했다. 어릴 적부터 자주 들락거려 익숙한 라드고네 집의 거실을 지나 화장실로 향하려는 순간.

무언가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니, 이걸 사로잡았다고 해야 할까. 이상하게 그쪽으로 시선이 휙, 돌아갔다. 본능적인 촉이었다.

시선 끝에는 거실 장식장이 있었다. 그런데 장식장의 액자 중 하나가 유독 삐뚤하니 부자연스러웠다. 정갈하게 세워져 있는 조각품들 사이에서 홀로 삐딱한 액자라니. 묘하게 신경이 거슬렸던 포이베가 살며시 액자를 향해 다가간 순간.

그녀는 보고 말았다.

“……!”

시골 마을에 있을 법하지 않은, 웬 생소한 물약들이 액자 뒤에 주르륵 숨어 있는 것을.

게다가 물약병의 크기가 작기는 얼마나 작은지, 품에 넣고 다니거나 숨겨두기 용이해 보였다.

‘뭐야, 이거…… 마법 물약 아니야……?’

포이베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마법은 귀족들의 상징 같은 것이었다. 즉 이런 한적한 시골 마을과는 거리가 멀다는 말이다. 그녀 또한 실제로 마법 물약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책에서나 그림으로 볼 수 있었는데…….

게다가 급하게 액자 뒤에 숨겨둔 듯한 모양새도 수상스러웠다.

단순히 기분 탓일까?

포이베의 심장이 쿵, 쿵, 널뛰었다.

‘대체 무슨 물약이지……?’

불현듯, 어디선가 주워 들었던 마법 물약의 효과가 떠올랐다.

‘분명 마법 물약으로는 얼굴이나 목소리 등을 바꿀 수 있다고 들었어.’

투명한 유리병 안에 담긴 푸른 액체가 찰랑찰랑 흔들렸다. 액체가 흔들림과 동시에 포이베의 심장 또한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술에 취해서 이러는 걸까.

이상하게…… 이상하게 자꾸만 이 물약이 거슬린다.

‘아니야, 의심하지 말자.’

고가의 물약들은 다양한 용도로 쓰기도 한다잖아. 분명 그런 거일 거야. 비싼 거니까 혹시 도둑이 들어 훔쳐갈까 봐 이렇게 숨겨둔 거일 거고…….

뭐가 됐든 저와 같은 평민인 라드고가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라는 걸 알면서도 포이베는 애써 합리화를 하며 입술을 세게 씹었다.

출처 모를 촉은 여전히 포이베에게 경고음을 내보내고 있었다. 외면하고 싶은데, 외면이 되지 않는다.

그 물약을 허투루 넘기지 말라는 경고음이 머릿속에 웅웅 울린다.

-베베, 너만 보면 자꾸 좆이 서.

-좋아? 응? 박아주니까…… 씨발, 그냥 앙앙 울고 난리 났네. 암캐년.

왜일까. 왜 지금 하필 정체불명 사내들의 목소리가 떠오른 걸까.

분명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 그러면서도 애칭을 부르는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던…….

‘아니야…… 아닐 거야.’

라드고가 그럴 리 없잖아.

물약을 들고 있는 손이 덜덜 떨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술 덕분에 머리가 멍했는데, 지금은 순식간에 정신이 또렷해진다.

하지만 맑아진 정신과 달리 수전증처럼 떨리는 손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선, 우선 제자리에 두자.’

포이베가 천천히 심호흡하며 다시금 액자 뒤로 물약을 내려놓으려는 순간이었다.

“베베, 아직 멀었어?”

갑작스럽게 라드고가 들어오며 포이베를 불렀다. 놀란 나머지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물약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안 돼……!’

물약이 떨어지는 1초도 채 안 될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손에 들려 있던 물약병이 천천히 바닥으로 추락하다 결국 와장창, 큰 소리를 내며 깨져버린다.

포이베의 얼굴에 절망이 서렸다.

“아…… 그, 그게…….”

당황한 그녀가 입을 벙긋거리며 라드고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그곳엔, 포이베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싸늘하게 식은 얼굴의 라드고가 서 있었다.

물약병은 나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난 지 오래였고, 그 안에 담겨 있던 물약은 바닥으로 흡수되었다.

짧은 정적 끝에, 포이베가 가냘프게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라드고…….”

라드고는 부름에도 대답이 없었다. 그저 미간에 깊은 주름만 파일 뿐이다. 애써 굳은 표정으로 숨기려 하고 있었지만, 그는 당황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함께 지내온 포이베가 그걸 모를 리 없다.

“이거…… 뭐야?”

포이베가 깨지지 않은 물약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라드고가 성큼, 한 발자국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순간 제 오랜 친우로 가족이나 다름없던 그가 낯설게 보여서, 포이베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이거 뭐냐고 물었어.”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뾰족하게 뱉어졌다. 그러자 라드고가 주먹을 세게 움켜쥐며 태연한 척 표정을 풀었다.

“포이베,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포이베는 경계심을 죽이지 않은 채 라드고를 째려봤다. 라드고는 방금까지만 해도 짓고 있던 서늘한 표정을 지우고 언제나처럼 환히 미소 지었다.

“그거 별거 아니야. 치료용으로 사뒀던 건데…….”

“거짓말.”

포이베가 라드고의 말을 잘라내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나 바보 아니야. 치료용 마법 물약이 우리 집값보다 비싸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황실에서 아무에게나 구입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도.”

“……하.”

표정 관리가 어려웠는지 결국 라드고가 마른세수하며 얼굴을 가렸다. 그런 그의 행동에 포이베의 마음은 와장창 무너져버리는 것만 같다.

이 침묵은 마치, 긍정처럼 들렸다.

제가 생각하고 있는 그 용도가 아니길 바랐다. 그것만큼은 아니길 바랐는데…….

“라드고 제발…….”

포이베의 목소리가 간절하게 떨렸다.

“내가 생각하는 그거 아니지……?”

상상도 해본 적 없다. 저와 20년이라는 세월을 이웃으로 함께 자라온 절친한 친우가, 이딴 마법 포션으로 목소리를 바꿔 저를 겁탈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

포이베가 울먹이며 입술을 짓씹자, 라드고의 표정이 한껏 구겨졌다. 그는 거칠게 머리칼을 한 번 쓸어 올리고는 체념하듯 길게 한숨을 뱉었다.

“베베, 잠시만 이야기 좀 해.”

“아니지? 응? 아니라고 말해. 라드고, 제발……!”

이미 그들이 겁탈범이라는 걸 기정사실화하고 있었음에도,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말했다.

“너희가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해, 얼른……!”

목소리에 울음기가 어려 애처롭게 떨렸다. 눈가에는 물기가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고, 가녀린 어깨는 주체할 수 없이 움츠러들었다.

라드고는 대답 대신 한 발자국 더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런 그의 모습에 포이베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버럭, 소리쳤다.

“오지 마! 오지 말고 제대로 설명해!”

그러자 그 소리에 놀란 건지, 밖에 있던 이들도 하나둘 집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베베! 무슨 일 있…….”

다급히 들어오며 포이베를 부르던 단테가 물약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보고는 말을 멈췄다. 그리고 그건 에반도, 바라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포이베에겐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제가 염려하던 게 현실이 되어 저를 덮쳐와서.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머리가 멍했다.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니길 바랐는데…… 아닐 거라 믿었는데……!’

시야가 핑핑 돌았고, 속이 울렁거렸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겁탈범들에 제 소꿉친구들을 대입하면 전부 납득이 갔다.

저를 베베라 부르던 말투라든가, 겁탈하면서도 아프게는 하지 않았던 것이라든가 혹은 능숙하게 제 집까지 데려다주었던 것 따위들.

포이베가 그동안 겁탈범들에게 당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혼란에 잠겨 있는 와중에도 그들은 누구도 변명하지 않았다.

그 사실에 포이베는 절망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화를 내고 싶은데, 말이 뱉어지지도 않는다. 그저 멍하다. 멍하고 너무…… 너무 충격적이어서…….

“흡…… 흐윽…….”

기어코 울음이 터져 나왔다.

당장 그들의 뺨이라도 갈기며 소리를 버럭버럭 치고 불알이라도 걷어 차주고 싶은데, 상상 속으로는 벌써 열댓 번도 더 좆을 뻥 후려 찼는데…… 이상하게 현실에서는 그게 되지 않았다.

“흑…… 미친 새끼들…….”

이가 갈렸다. 도저히…… 그들과 함께한 세월이 20년인데.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 미친놈들아!! 사람 농락하니까 좋아? 이 쓰레기 같은 새끼들…… 진짜, 진짜 너희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이 개자식들……!”

포이베가 알고 있는 욕을 모두 박박 긁어내 토하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단테가 제일 먼저 허겁지겁 포이베를 향해 달려갔다.

“베베, 잠시만…… 잠시만…… 울지 마. 응? 우리가 미안해. 우리가 잘못했어.”

“미안할 짓을 왜 해! 왜 하냐고!!”

포이베는 목 놓아 엉엉 울면서도 그들을 향해 빽빽 소리쳤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슴이 답답해서 터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울지 말라고? 흑, 나랑 장난해? 너희 같으면 눈물이 안 나겠어? 응?”

포이베가 옷소매로 눈가를 비비며 눈앞에 있는 단테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퍽, 소리와 함께 단테의 얼굴이 시원하게 돌아갔다.

“미안해…… 미안해, 베베. 베베야, 우리가 미안해…….”

그녀에게 얻어맞은 단테는 곧장 무릎 꿇으며 포이베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가 무릎 꿇기 무섭게 에반과 라드고 그리고 바라드 또한 어쩔 줄 몰라 하며 포이베의 앞에 무릎 꿇었다.

“미안해, 베베. 정말…… 정말 미안해…… 우리가 일부러 너를 농락하려고 그런 건 아니었어. 그냥…… 그냥 네가 너무 좋아서…… 그래서 우리는…….”

두서없는 변명들이 하나둘 쏟아져 나왔다.

“네가 그날 늦게까지 술 마시고 집에 들어가는 게 걱정돼서…… 그래서 조심히 가는 것까지만 보려고 따라간다는 게…….”

엉엉 우는 포이베를 달래며 그들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네가 우리를 부르면서 자위하는 걸 보고 참지 못했어. 미안해, 우리가 정말…… 정말 잘못했어…….”

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이마를 땅에 부딪치며 싹싹 빌어댔다. 하지만 고작 그런 것으로 용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베베…… 미안해…… 울지 마. 응? 미안해, 정말…… 네가 우는 거 보니까 미칠 거 같아. 이렇게 널 울리려는 생각은 없었어…….”

실컷 겁탈할 땐 언제고 울리려는 생각은 없었다니. 말인지 똥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미안해…… 우리가 잘못했어. 정말…… 정말 미안해, 포이베. 응?”

포이베에게 용서를 구하던 라드고가 벌벌 떠는 그녀의 몸을 품에 가두듯 그러안았다. 포이베는 밀어내고 싶었음에도, 밀어낼 기운이 없어서 원수 같은 라드고의 품에 안겨 한참을 더 울었다.

완전 최악이다. 끔찍하고 역겨운 최악의 날이다.

* * *

얼마나 울었는지 머리가 멍했다. 울다 지쳐 혼절했던 것 같은데…….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 시야에 담긴다. 이곳이 집이 아니라는 사실에 놀란 포이베가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여긴…….’

잠시 주변을 둘러보자, 라드고의 침실임을 알 수 있었다. 포이베는 쓰러지기 전 제게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고는 역겹다는 듯 몸을 잘게 떨었다.

‘이…… 이 미친 새끼들…….’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가 안 된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건지. 저를 보며 그동안 얼마나 우스웠을지.

포이베가 허탈하다는 듯 숨을 토했다. 그러다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침대에서 내려오려는 순간이었다.

무언가 철그럭, 하는 소리를 내며 포이베의 행동반경을 제한했다.

“……어?”

당황한 그녀 입에서는 얼빠진 소리가 새어 나왔다. 포이베가 눈을 끔뻑이며 제 손에 묶인 무언가를 바라봤다.

“……미친.”

손에는 개들에게나 사용할 법한 목줄이 손목과 침대헤드를 이어주며 꽉 졸라매져 있었다.

‘이게 지금 무슨…….’

포이베가 손을 풀기 위해 버둥거렸으나, 고작 그런 정도로 풀어질 리 없다. 게다가 꽤 질 좋은 가죽을 사용해 만든 목줄인지 질기기도 상당히 질겼다.

‘설마 지금 날 여기에 가둬두려는 거야?’

포이베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며 벌벌 떨렸다. 세상에, 어떻게 그리 자상하던 친구들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변한단 말인가.

기껏 그쳤던 눈물이 다시금 새어 나올 것만 같아서, 포이베가 애써 눈에 힘을 꽉 주고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라드고 미친놈.’

아니 비단 라드고만 미친놈이던가.

에반, 단테, 바라드 넷이 모두 하나같이 미친놈들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포이베의 어깨가 위아래로 들썩였다. 참으려던 눈물이 결국 비죽 흐른다.

“이씨…….”

그렇게 얼마나 더 홀로 훌쩍였을까. 침실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씩 들어왔다.

“베베, 깼어?”

포이베는 발갛게 팅팅 부어오른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이게…… 흑, 이게 무슨 짓이야.”

손에 묶인 줄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라드고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미안해.”

“미안하다면서 사람을 이렇게 묶어놔?”

“하지만 풀어주면 도망갈 거잖아.”

어처구니없는 말에 포이베가 몸을 움츠렸다. 정말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다.

“……도망 안 가.”

“거짓말. 포이베, 우리가 너를 모를까…….”

정곡을 콕 찌르는 말에 포이베가 입을 꾹 다물었다.

“미안해…… 우리도 너를 이렇게 묶어두고 싶지 않았어.”

“자고 일어났는데 네가 없을까 봐…… 그래서 그런 거야.”

이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고 있는 건가?

포이베가 얼빠진 얼굴로 그들을 훑었다. 그들은 꽤 진지한 얼굴이었다. 농담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너희……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니야?”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파인다. 저를 향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그들을 보며, 포이베가 본능적으로 몸을 굳혔다.

-뭐긴 뭐야. 네 보지도 쑤시고 입도 쑤셔줄 좆이지.

-포이베는 보지 뻐끔거리는 것도 귀엽네.

-하, 씹…… 너는 왜 빌어먹게 보지도 이렇게 귀엽고 예쁘냐.

-좋아? 우리가 어디서 굴러 처먹던 개새끼들인지도 모르면서 좆만 박아주면 마냥 좋아서 보지 조이는 거야? 응?

그들의 얼굴을 보니 불현듯, 겁탈범들이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제게 이런 질 낮은 말을 뱉어댄 자들이 믿었던 소꿉친구들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다.

“개자식들…….”

포이베가 눈을 매섭게 뜨고 그들을 마주했다. 당장 몇 대 후려쳐도 시원찮았다. 살며시 다가온 라드고가 손목에 있던 줄을 풀어주었다.

자신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도망치지 못할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포이베는 손이 자유로워지기 무섭게 곧장 라드고의 뺨을 후려쳤다.

찰싹, 매서운 소리와 함께 그의 뺨이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그거로도 모자랐는지 포이베는 멱살을 잡고 가슴팍을 퍽, 퍽, 후려치며 개새끼라는 말만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렸다.

라드고는 별 다른 말 없이 가만히 얻어맞으며 포이베의 앞에 고개 숙였다.

“미안해…….”

“개새끼…… 한스네 집 말보다 못한 놈이야 넌.”

말하면서도 한스네 집 말에게 미안한 기분이 든다.

“아니, 한스네 집 말이랑 비교하는 것조차 말한테 미안해.”

그래서 뒷말을 덧붙였다. 그제야 조금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다.

시원하게 얻어맞은 라드고의 뺨은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단정하게 여몄던 셔츠는 너덜너덜해졌고, 입술은 찢어진 건지 피가 살짝 맺혀 있었다.

“베베…….”

“…….”

“이제 나랑 안 놀 거야? 예전처럼 안 지내줄 거야?”

절박한 목소리와 달리 포이베를 바라보는 눈동자엔 소름 돋을 정도로 이질적인 욕정이 번들거렸다.

여기서 그렇다고 대답하면 안 될 거 같은 기분이 들어서, 포이베는 말없이 그를 째려보기만 했다.

“미안해.”

“…….”

“미안해, 베베…….”

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차례로 포이베에게 사죄했다.

빌어먹게도 포이베는 그동안 지내온 세월이 뭐라고, 정이 뭐라고, 울먹이며 제게 머리를 조아리는 친우들을 보니 마냥 매몰차게 굴지도 못할 것만 같았다.

‘……짜증나.’

그녀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눈가의 물기를 닦아냈다.

“나쁜 놈들.”

“미안해, 뭐라고 변명할 생각도 없어. 정말…… 정말 미안해.”

반복적으로 미안하다는 말만 뱉는 그들을 보며, 포이베가 뾰족하게 물었다.

“뭐가 미안한지는 제대로 알아?”

사내들의 큼직한 손이 포이베의 발등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사죄의 의미를 담기라도 하는 것처럼.

“뭐가 미안하냐고.”

한 번 더 포이베가 입을 열자, 그들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쁘게 굴어서 미안해.”

알긴 아는 게 불행 중 다행인 건지. 포이베가 떨떠름한 얼굴로 침대보를 세게 움켜쥐었다.

“협박하고 겁탈해서 미안해.”

탁하게 갈라진 사내의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오며 포이베를 향했다.

“……속여서 미안해.”

그늘진 그들의 얼굴에 포이베는 쌤통이라는 생각을 하며, 지난날 마음고생했던 자신을 동정했다.

잔뜩 화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던 것도 잠시.

“이런 상황에서도 네가 좋아서…… 미안해.”

이어진 말에 포이베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흘렀다.

“……뭐?”

“베베, 너한테 미쳐도 완전히 미쳤나 봐. 네가 우는 걸 보니까 자꾸 아래가 뻐근하고 좆질 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

뭐 이런 미친놈들이…….

포이베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들은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쓰레기라서 미안해.”

이제는 말도 뱉어지지 않았다. 포이베는 당혹감에 입만 벙긋거렸다.

“좋아해. 아니 사랑해.”

미친 건가. 지금 상황에 사랑 고백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건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확실한 건, 절대 정상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미안한 만큼 더 노력하고 잘해줄게.”

“하…….”

반미치광이나 다름없는 눈빛이 포이베를 향했다. 포이베는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는 그런 불쾌함을 느꼈다.

몸이 점점 아래로 끌어당겨지는 기분이다.

“너희 지금 이게 상황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

목소리가 겁에 질려 벌벌 떨렸다. 애써 티 내지 않으려 했는데, 이런 상황이 되니 티 내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왜 지금 이런 말을 하는지 알아?”

낮게 깔린 목소리가 나긋나긋하게 흘러나왔다. 포이베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몸을 바짝 굳혔다.

“뭐가 됐든 놓아줄 생각은 없거든.”

미안하다며 머리를 조아릴 땐 언제고,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올곧게 포이베를 향했다.

“너희…… 완전 미친 거 알지?”

“알아.”

짧은 대답 끝에 다정한 중저음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미쳐서 미안해. 개새끼라서 미안해.”

“…….”

“이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네가 도망갈까 봐 어디 가둬둘 생각이나 하고 있어서 미안해.”

부드러운 목소리와 달리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결코 부드럽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포이베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가 결혼할 마을 남자는 한정적이다. 굳이 이런 짓을 하지 않아도 저들 중 한 명과 혼인했을 텐데…… 그런데 대체 왜.

게다가 포이베도 그들을 싫어하지 않았다. 아니, 싫어하긴커녕 오히려 호감 있는 쪽에 가까웠다. 물론 친구처럼 생각하려 하기는 했지만, 여느 대부분의 이성 친구가 그렇듯 종종 설레기도 하고 가슴 콩닥거리는 일들도 있었다.

“이런 짓 안 해도 됐잖아.”

포이베가 울먹이며 힘겹게 말했다.

“굳이 나한테 이러지 않았어도…… 그래도 나는 너희를 좋아했을 텐데…….”

“거짓말.”

“거짓말이 아니야.”

단호하게 부정하는 목소리에 억울하다는 듯 반문했다.

“나는 정말…… 당연히 너희와 앞으로도 계속 함께할 생각이었고, 배우자를 만난다면 너희 중 한 명일 거라고 생각했어.”

“우리가 모를 줄 알았어?”

포이베의 말에도 그들은 믿지 않는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너 요즘 다른 마을에 선 자리 알아본다며.”

이어진 말에 순간 포이베는 바보처럼 되물었다.

“……뭐?”

“상단 일 때문에 옆 마을에 갔다가 알게 됐어. 아주 소문이 파다하더라. 네가 선 자리 알아본다고.”

당황한 그녀가 입을 벙긋거리자, 그들은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했는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렇게 뒤로 결혼할 남자를 찾아봤으면서, 우리 중 한 명과 혼인하려 했다고? 거짓말 마.”

“아니…… 아니 나는…….”

황당한 나머지 말문이 꽉 막혔다. 포이베가 입을 벙긋거리며 말을 골랐다.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하…….”

“포이베, 미안하지만 우리는 네가 다른 새끼랑 혼인하는 꼴 두고 볼 생각 없어.”

포이베의 귀에는 그들의 말이 담기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에 저와 절친한 친구, 젤라의 얼굴만이 둥둥 떠다녔다.

“……그거 내 선 자리 아니야.”

“뭐?”

“내 선 자리 아니라고.”

포이베가 마른세수하며 착잡함을 숨기지 못했다.

“……내가 아니라 젤라 소개시켜줄 남자를 찾는 거였어.”

젤라라는 말에 그들의 머릿속에는 몇 년 전 인근 마을에서 이사 온 주근깨 소녀가 떠올랐다. 포이베와 친하게 지내는 또래 여자아이 중 한 명이었다.

“나도…… 나도 너희 말고 다른 남자랑 그럴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었단 말이야.”

포이베가 울먹이며 눈앞의 제 친구들에게 막무가내로 주먹을 휘둘렀다.

“이, 이…… 이 나쁜 놈들…… 쓰레기 같은 놈들.”

그들과의 관계에서 제가 즐긴 건 즐긴 거고, 저들이 협박하며 겁탈한 건 겁탈한 거였다.

“너희가 어떻게 나한테 그래…… 너희가 어떻게 나한테…….”

한참 사내들의 가슴팍을 퍽, 퍽, 후려치던 주먹이 힘없이 떨어졌다. 훌쩍이는 그녀의 울음소리와 거칠어진 숨소리가 방 안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들은 선 자리가 젤라의 선 자리였다는 것에 당황한 듯 다들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다 망했어…….”

포이베가 훌쩍이며 말했다.

“이제 정말 나도 선 자리 알아보게 생겼다고…….”

이어진 포이베의 말을 들은 그들이 화들짝 놀라며 곧장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포이베. 미안해. 우리가 잘못했어. 응?”

“맞아, 베베야. 미안해…… 절대, 절대 두 번 다시 안 그럴게. 정말 미안해…… 그렇게 하면 네가 다른 마을 남자와 결혼 못 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랬어.”

“이 쓰레기들…….”

위아래로 들썩이는 포이베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달래기 위해 열심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 달래질 리가 없다.

“맞아, 우리가 쓰레기야. 정말…… 정말 미안해. 그러니까 선 자리 알아본다는 말만은 하지 마. 응?”

애절하게 저를 붙잡는 목소리에 포이베가 눈가를 닦다 말고 물었다.

“흑…… 만약…… 만약 내가 선 자리 알아보면 어쩔 건데.”

“그럼 묶어둘 거야. 묶어서 여기 가둬버릴 거야. 평생.”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이어진 뒷말에 참다못한 포이베는 결국 다시금 목 놓아 엉엉 울고 말았다.

“이거 봐, 이게 뭐냐고! 이 미친놈들아!”

방 안은 그녀의 울음소리로 가득해졌다. 포이베가 눈물 콧물 가릴 것 없이 줄줄 흘리며 오만상을 쓴 채 그들의 멱살을 쥐고, 뺨을 때리고, 주먹질을 했다.

한참 난동부리던 그녀가 콧물도 제대로 닦지 않은 채 엉망이 된 얼굴로 말했다.

“씨…… 나 야반도주할 거야.”

“그럼 잡아올 거야.”

“상관없어. 잡히면 또 도망갈 거야.”

“정말?”

“……응.”

“그럼 우리는 네가 도망치지 못하게 다리를 자를 거야. 미안해, 포이베.”

“미친…… 이 미친 새끼들…….”

“미친 새끼라 미안해.”

사실 큰 소리로 야반도주하겠다 말했지만 그런 게 가능할 리 없다. 당장 먼 거리를 이동할 마차 삯조차 빠듯했으니까.

그리고 아마 그들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분함에 포이베가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게다가 어디 어린 여자가 새 마을에 정착하는 게 쉬운 일이던가. 포이베는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너네 진짜 싫어. 배신자들. 개새끼들. 쓰레기 새끼들.”

“괜찮아, 싫어해도 괜찮아. 그러니까 우리랑 살자. 응? 베베야.”

그 물음에 포이베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애당초 그들은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게 아니었다.

포이베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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