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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 : Ring My Bell (25/25)

외전 3 : Ring My Bell

뭘 해도 안 되는 날이 있다. 이제 보고서 마무리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사건이 예상치 못한 암초와 맞닥뜨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일이 되거나, 그 일을 쳐내던 중에 내가 절대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을 받았을 때, 일주일 전부터 세워두었던 계획이 어그러지고 금방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사소한 미스가 점점 불어나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질 때.

그래도 평소였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아무리 지치고 힘든 하루였대도 끝은 있으니까. 씻고 침대에 눕는 순간엔 잊어버릴 수 있는 일이다. 나 혼자 책임을 지면 되는 일이니까 그렇다.

문제는 그게 더는 나만의 일이 아닐 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 지금처럼.

이지훈

전화 왜 안 받지 걱정되게 오후 8:02

어디야? 오후 8:03

놈의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손끝부터 시작해 온몸이 싸늘하게 식는 듯했다.

메시지를 보기 전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늘은 놈이 장거리 비행을 끝내고 들어오는 날이고, 평일 저녁 스케줄이면 늘 배웅을 나가는 내가 이번에도 그러리라고 둘 다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특히 오늘은 같이 심야 영화를 보기로 계획까지 세워둔 날이었는데.

참담한 마음으로 일단 전화부터 걸었다. 이지훈의 도착 예정 시간이 6시 부근이었던 걸 떠올리면서.

-어. 어디야?

이지훈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적어도 두 시간은 내 연락조차 받지 못하고 기다렸을 텐데도 딱히 그런 티가 나지 않았다. 나는 이마를 짚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실망시킬 생각을 하니 입이 도저히 안 떨어졌지만 말해야 했다.

지금 출발한대도 놈을 한 시간 이상은 더 기다리게 해야 한다. 그럴 수는 없었다.

“미안해. 나 아직 경찰청이야.”

-…….

“일이 바빠서 핸드폰을 못 봤어, 이 시간까지. 미안. 지금이라도 데리러 가고 싶은데… 지금 출발하면 너 더 기다리게 할 것 같아서. 너 차 거기 주차되어 있지? 오늘은 좀 혼자 타고 올래? 택시 타도 되고. 내가 불러줄게. 어디에 있는지만 말해 봐. 우리 늘 만나는 거기야?”

전만큼은 아니지만 바뀐 부서도 일이 많았다. 그렇지만 이렇게 배웅조차 나가지 못할 정도로 바쁜 적은 없었다. 그걸 이미 알고 있을 이지훈에게 이번 주 내내 갑작스럽게 바빠진 이유를 말하지 않으려 애썼다. 굳이 말해 봤자 놈이 좋아하지 않을 게 뻔해서 그랬다. 이렇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진 걸 보니 차라리 처음부터 솔직히 말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지만.

-그런 것 같더라.

“어?”

-바쁜 것 같았다고, 너. 어제 통화할 때도 묘하게 집중 못 하는 눈치였고.

“…아.”

-됐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알아서 타고 갈게.

“…미안.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할게.”

-어. 밤에 영화는 볼 수 있을 것 같아? 무리일 것 같으면 취소해도 되고.

이지훈은 너그럽게도 날 봐줬다. 차라리 화라도 냈으면 마음이 더 편했을 것 같은데, 이후 일정까지 배려해주려는 놈의 목소리를 들으니 죄책감만 더욱 강해졌다. 시계를 흘끔 확인했다. 지금 시각은 8시. 영화는 11시 반. 살짝 빠듯하겠지만 저녁을 거르면 어떻게든 그때까지 해결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냐. 일도 어차피 마무리 단계고.”

-그래. 영화관에서 볼까?

“집에 있어. 데리러 갈게.”

-됐어. 일이나 잘 마무리하고 와. 영화관 입구에서 보자. 전화할게.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이미 내가 바쁜 걸 아는 것처럼 놈이 빠르게 전화를 끊었다. 화면을 보니 부재중 전화가 딱 두 건만 남아 있었다. 바빴다는 말에 그럴 줄 알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던 것까지 생각해보면, 일부러 전화조차 자제한 모양이었다.

머리를 쓸어 넘기며 깊은 한숨을 삼켰다. 이거 진짜 못 할 짓이네, 생각하면서.

수년 전부터 마장동 뒷골목에서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던 코카인 유통 건이 수면에 드러났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어 진전이 더디던 건이라 하 선배가 2년을 넘게 붙어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물꼬가 터졌다. 뺑소니 건으로 잡힌 놈의 트렁크에서 10kg가 넘는 코카인이 발견돼 유통책을 추궁하는 과정에서 마장동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사건이 예상치 못하게 커졌다. 줄줄이 불려 나온 유통책의 규모가 컸던 탓이다. 하나를 찌르면 두 개가 튀어나오는 식이었다. 하필 반장님이 십 년 만에 유럽으로 가족 여행을 갔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웬만해서는 자리를 비우지 않는 그가 떠난다는 이유로 팀의 고참 선배 몇몇도 함께 휴가계를 낸 상황이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부서가 발칵 뒤집어질 수밖에 없었다. 할 일은 태산인데, 손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박서빈은 셔츠 단추조차 채우지 못한 채로 날 찾아왔다. 선배,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면목 없는 얼굴로 묻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팀에 합류한 지 일 년도 안 된 신입이 쳐낼 수 없는 수준의 일이었다. 그러기가 무섭게 반장님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일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공항으로 갔다고 했다. 당장 한국행 티켓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일단 그곳에 머무르며 혹시 나올지 모를 취소 표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해외로 여행을 간 고참 선배들도 비슷한 상황일 거였다.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과장님에게 달려갔다. 반장님의 고향 후배인 그는 이미 상황을 아는 것처럼 어깨를 툭 치며 다녀오라고 말했다.

차출 허락을 받은 지 오늘로 딱 삼 일이 됐고, 그 시간 내내 거의 쉬지 못하고 뛰어다녔다. 부서가 바뀐 지는 어차피 두 달밖에 되지 않았고, 지난 4년간 몸에 익도록 해온 일이었다. 다만 수술 후 복귀했을 때처럼 배려를 받으며 일할 수는 없었다. 선배들이 중간중간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살피긴 했으나, 그 잠깐의 걱정마저 사치일 정도로 팀이 비상이었다. 모든 일이 초를 다투며 돌아갔다. 군산에서 선적 예상된 컨테이너 100개를 샅샅이 뒤지듯 살펴야 했고, 며칠 전부터 행방이 묘연해진 놈 하나를 잡아야 했고, 동시에 이미 잡은 마약상을 대상으로 심문하는 선배들을 보조해야 했다.

이럴 때 이지훈이 장거리 비행을 간 건 차라리 다행이었다. 옆에 있었다면 들키지 않을 자신이 없었으니. 하루에 한 끼도 먹지 못할 정도로 바쁜 와중에도 한국 시간에 맞춰 꼬박꼬박 걸려 오는 놈의 전화만은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전화를 받는 곳이 공사장 뒤편의 어둑한 곳이든, 차 안이든, 탈의실 안이든. 통화할 때면 어떻게든 조용한 곳을 아득바득 찾아 나선 탓인지 다행히 의심을 사진 않았다.

놈이 돌아오기 전까지 바쁜 일을 끝내는 게 목표였다. 그 덕분인지 급한 불은 껐다. 예정했던 검거도 모두 이뤄졌고, 남은 건 뒤처리뿐이었다. 특히 어제부터는 휴가를 갔던 고참 선배들도 긴급 복귀했고, 오늘 밤 비행기로 반장님이 도착하기까지 하면 이제 내가 더 할 일은 없을 것이다.

일단 들어가서 보고서 하나만 해치우고 바로 가야겠다. 영화관까지 얼마나 걸리지?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다 말고 붙잡혔다.

“선배님. 이거….”

박서빈이 뒤에 서 있었다. 콧구멍을 휴지로 틀어막은 채였다. 피곤함이 뚝뚝 드러나는 낯빛인데도,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웃음부터 지었다.

“피곤해 보이셔서 사 왔습니다. 드십시오.”

공손하게 두 손을 모은 채로 내민 손에 비타민 음료가 들려 있었다. 됐다고 하려다가, 그 비타민 음료가 사무실 안에 없었던 종류임을 깨닫고는 그냥 받았다. 밖에 나가서 사 오기까지 한 정성을 거절한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못 할 짓인 것 같아서.

“고마워요.”

“아, 아뇨. 무슨 말을… 제가 감사하죠. 선배 아니었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습니다. 진술 받아 적는데 순간 머리가 하얘지더라고요.”

“그래도 잘했어요. 덕분에 잘 마무리됐고. 오늘은 집에 들어가요. 또 숙직실 가지 말고.”

“예. 보고서 몇 개만 마무리하고요. 선배도….”

“네. 저도 갈 거예요. 약속이 있어서.”

비타민 음료를 받은 자리에서 바로 따 마셨다. 복도의 쓰레기통에 빈 음료병을 던지다 말고 옆을 돌아봤다. 한 걸음 뒤에서 쫓아오던 박서빈의 어리둥절한 시선이 꽂혔다. 일 이야기인가 싶어 긴장하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더 묻기가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입을 열었다.

“…그 영화 재밌다고 했죠?”

“네?”

“그때 차에서 추천했던 거요.”

“아아… 네. 지금 걸린 영화 중에는 가장 인기 좋은 영화라고 알고 있습니다. 여자친구가 보고 왔는데 기대만큼 재밌었다고 하더라고요.”

이틀 전 새벽, 잠복근무하던 중에 시간이 잠시 비기에 이지훈과 같이 볼 영화를 예매하려 했다. 자는 줄 알았던 박서빈이 뒷좌석에서 고개를 쑥 내밀며 말을 보탰다. 어, 그거 재밌다던데요. 화면에 떠 있는 포스터를 본 모양이었다. 사실 그게 그거같이 느껴지는 영화 중 어느 것을 골라야 하나 막막했던지라, 그 말을 듣자마자 더 보지도 않고 바로 예매했다.

“그래요. 고마워요.”

고개를 끄덕이며 목을 스트레칭 하듯 쭉 늘렸다. 그러고 보니 이지훈과 영화를 보러 가는 건 처음이었다. 이미 잘못한 일이 있는데, 영화까지 재미없다면 끔찍할 것 같았다. 영화관 애플리케이션 홈 화면에 대문짝만하게 떠 있던 영화이기도 했으니, 일정 수준 이상은 되겠지 뭐. 생각을 접고 보고서에 집중했다. 지금은 그게 더 급했다.

이지훈은 영화관 입구 근처의 계단에 앉아 있었다. 손에 든 핸드폰을 보고 있던 놈이 고개를 들어 꽉 찬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를 발견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인 것치고는 영화관에 사람이 많았다. 분주해 보이는 스낵 코너를 흘끔 확인하면서 바지 뒷주머니를 뒤적거려 지갑부터 꺼냈다.

“팝콘 먹을래?”

몸을 일으킨 이지훈이 대답 대신 옆을 눈짓했다. 방금까지 놈이 앉아 있던 자리 옆에 팝콘과 음료 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아….”

이지훈이 앞에 선 내 머리로 손을 뻗었다. 종일 이곳저곳 뛰어다니느라 거울 한번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뒤늦게나마 볼을 쓸며 이지훈의 눈치부터 봤는데, 가볍게 머리칼을 흩뜨리고는 손을 거둔 놈의 얼굴에서는 반가운 기색 말고는 딱히 찾아볼 게 없었다.

“안녕, 지선욱.”

아주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나 할 법한 간지러운 인사였다. 눈빛이며, 표정도 그랬다. 그러고 보니 일주일 동안 보지 못하긴 했다. 같이 산 지 거의 일 년이 되어가는데도, 돌아온 놈을 맞을 때마다 기분이 새롭다. 못 본 동안 쌓인 그리움을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하는 놈 때문일지도 몰랐다. 매번 아랫입술을 훑으며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하지만, 늘 어색하게나마 장단을 맞추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는 나도 여전하고.

“…어. 안녕.”

이지훈이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빙그레 웃었다.

“내가 들게.”

손을 뻗었지만 무시당했다. 팝콘이며 음료를 팔 하나에 몰아 든 놈이 영화관 쪽을 눈짓했다.

“열한 시 반이랬지?”

“어? 어.”

“가자. 곧 시작하겠다.”

“인기가 좋은 영화인가 봐?”

영화관 안을 둘러보던 이지훈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심야 영화치고 출석률이 심히 좋은 편이긴 했다. 당장 앞 좌석에도 사람이 꽉꽉 들어차 앉아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만 했지, 무슨 줄거리이고 누가 나오는지조차 몰랐다.

“어. 재밌다고 하더라.”

대답하며 입구에서 챙겨 온 포스터를 뒤늦게라도 들여다보려는데 포스터 위로 그림자가 졌다. 내게로 몸을 기울인 이지훈 때문이었다. 내 어깨에 턱을 얹다시피 한 이지훈이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심야 영화를 재미있으려고 봐?”

“…그러면?”

“재미 보려고 보는 거지.”

허벅지를 은근하게 누르는 손길이 느껴지더니, 이지훈이 내가 들고 있는 팝콘 통 아래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손도 잡고. 어?”

놈의 의도대로 손끝이 닿자 화들짝 놀라 손을 뒤로 뺐다. 누가 봤을까 봐 주변을 살피기부터 하는 나와 달리 이지훈은 태평했다. 팽개쳐진 손을 팝콘 통 안으로 쑥 집어넣어 팝콘을 집어 먹을 여유까지 챙기는 놈을 보니 기가 찼다. 다행히 맨 뒷자리에 앉아 있는 데다가 옆에도 사람이 없어 놈의 그런 행동을 눈치챈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이 마주친 이지훈에게 경고하듯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 마, 입 모양으로 말하면서.

장난을 치려면 더 칠 수 있는 놈이 웬일로 순순히 물러선다 했더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회사에서 온 전화라며 핸드폰 화면을 보여준 놈이 금방 돌아오겠다며 영화관을 빠져나갔다. 어차피 영화 시작 전 광고 시간까지 생각하면 10분 정도가 더 남아 있었다. 광고가 재생되는 순간 영화관이 어두워졌다. 거대한 화면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빛이 꽤 환한 탓에 포스터를 보기엔 별 무리가 없었다. 포스터 상단에 크게 박힌 로고 위주로 건성으로나마 읽어가다 보니 어떤 영화인지 대충 감이 잡혔다. 투자자가 돈이 많고, 유명 배우들이 나오고, 사건의 스케일이 큰 상업영화인 것 같았다. 개봉한 지 그리 오래된 영화가 아니란 것까지 알아낸 후 포스터를 내려놓으려던 찰나였다. 한 광고가 끝나고 다음 광고로 넘어가기 직전의 짧은 틈을 타서 앞 좌석에 앉은 여자 둘이 소곤대는 소리가 귀를 스쳤다.

“끝나고 무대인사인 거 맞지?”

“응. 아씨, 앞 좌석 꽉 찬 거 봐. 이따 계단에 앉으면 지랄하려나?”

“일단 상황 보자. 잘하면 뒤에서 내려올 수도 있어. 여기 출입구 두 개잖아.”

몰랐는데 무대인사가 있는 영화인 모양이었다. 심야 영화인 것치고 사람이 많았던 게 비로소 이해가 갔다. 그러고 보니 보통 가장 먼저 차는 뒷좌석들이 이상할 정도로 비어 있고 대신 앞 좌석이 꽉 차 있었다. 카메라 가방으로 보이는 것을 메고 있는 사람도 꽤 많았다.

나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예매했구나, 포스터를 반으로 접으며 머쓱하게 생각했다.

“그나저나 무인 일정 넘 빡센 거 아냐? 우리 현우 피곤해서 어떡해.”

“야야. 프로 돌 때 끼워주는 게 어디냐, 이 소소하기 짝이 없는 분량으로.”

예상치 못한 이름이 들린 순간에는 귀를 의심했다. 아냐, 설마… 불안한 마음으로 포스터를 다시 펼쳤다. 줄거리가 적힌 부분부터 아래의 출연하는 배우 얼굴이 박힌 부분까지 다시 세세히 살폈다. 아무리 대충 훑었대도 현우의 이름이 있다면 보지 못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현우의 이름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났다.

특별출연: 민현우

[전 애인 역]

누가 볼세라 재빨리 포스터부터 접었다. 저 멀리서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이지훈이 보였다. 영화가 곧 시작하려는지 주변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이지훈이 옆에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결정하려면 지금 해야 했다. 나는 마음을 정하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야. 나가자.”

이지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지금?”

흘깃 앞을 본 놈의 표정이 한층 더 의아해졌다. 스크린에 배급사의 이름이 크게 떠 있었다. 영화가 곧 시작한다는 신호였다. 더 있으면 다른 관객들까지 방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나는 이지훈의 팔을 덥석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어. 포스터 살펴봤는데 재미없을 것 같아. 미안. 내가 잘못 예매했다. 그냥 나가자.”

다행히 뒤에도 출입구가 있으니 조용히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놈의 팔을 재촉하듯 한 번 더 당겼다.

“갑자기? 그래도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보고 가자, 왜.”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우김에 순순히 납득하고 따라올 놈이 아니긴 했지만, 이지훈은 생각보다도 굳건한 상대였다. 오히려 답지 않게 구는 날 의심스러워하는 듯한 눈빛을 보자 머리가 하얘졌다.

“뭐 어떻길래 그래. 포스터 줘 봐.”

“…아, 됐어. 뭘 봐.”

심지어 내가 든 포스터까지 가져가려는 놈 때문에 포스터를 사이에 둔 채 아웅다웅 다투는 꼴이 됐다. 놈을 일으키려 잡고 있던 팔을 놓고 몸을 뒤로 빼야만 했다. 나를 보는 이지훈의 표정이 이상했다. 뭔데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지?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처럼.

그사이 영화가 시작됐다. 까만 화면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방금 이지훈과 몸싸움 아닌 몸싸움을 하면서도 에이, 설마… 첫 장면부터 나오겠어? 생각하던 나를 비웃는 듯한 목소리였다. 이윽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화면 가득 떴다. 어떤 여자의 등을 정면에 배치한 카메라 구도 속에서 여자의 반대편에 앉은 젊은 남자의 얼굴은 마치 관객들을 마주 보고 있는 것처럼 선명히도 보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클로즈업.

[누나. 나는 누나가 차라리 뭐, 어느 이름도 모르는 나라에서 몰래 잠입한 스파이라고 하면 차라리 이해라도 하겠어. 근데 누나 그거 아니잖아. 평범한 직장 다니면서 그 누구보다 평범하게 사는 사람이 왜 자꾸 쓸데없는 것까지 숨기려 들어? 다른 것도 아니고, 성을 못 알려주겠다는 게 말이 돼? 이러니까 자꾸 의심하게 되잖아. 이름은 제대로 알려준 거 맞아? 맞냐고!]

뭘 해도 안 되는 날이 있다. 화면을 뚫어질 듯 바라보는 이지훈의 옆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라고.

이지훈은 현우가 화면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고개를 내게로 돌렸다.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가 있었다.

“누가 재미없대?”

“…….”

“벌써 졸라 재밌는데.”

비꼬듯이 말하면서도 놈은 웃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날 똑바로 응시하는 눈매는 다른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영화 중간에 나왔다. 그것도 내용상 현우가 더 등장하지 않을 것을 확신한 이지훈이 못 이기는 척 일어나줘서 가능한 일이었다. 매표소 쪽으로 걸어 나오는 길은 고요했다. 이지훈은 옆에서 말없이 걷고 있었다. 평소 같아 보이다가도, 아까 놈이 안에서 한 말을 떠올려 보면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했다.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옆 눈길로 이지훈을 훔쳐보다가 눈이 딱 마주쳤다.

제자리에서 멈춰 선 놈이 내게 돌아서더니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자는 뜻인가? 근데 왜 여기서….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기다리는 놈을 보니 등 뒤에서 땀이 흐르는 듯했다. 다행히 영화 중간에 나온 사람은 우리뿐이었기 때문에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주변을 돌아보며 아무도 없다는 걸 한 번 더 확인하고는 놈의 손바닥 위로 내 손을 조심스레 얹었다.

“…….”

“…….”

이지훈이 눈썹을 꿈틀댔다. 바라던 게 이게 아닌가? 혹시 손깍지가 하고 싶었나? 놈의 눈치를 살피며 손에 슬쩍 힘을 주려던 순간 작은 헛웃음 소리가 들렸다.

“팝콘 통 달라고. 버리게.”

“…아, 어.”

이번에는 헷갈리지 않게 도와주려는 것처럼 눈짓까지 해주는 놈에게 재빨리 팝콘 통을 건넸다. 민망해하는 나를 흘깃 본 이지훈이 피식대며 뒤돌았다. 팝콘이며 음료까지 분리수거를 끝낸 놈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까와 달리, 눈치를 살피는 내게 먼저 말을 걸기도 했다.

“차 몇 층에 대놨어?”

“안 가져왔는데.”

“…….”

“그… 네 차 타고 집에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서.”

날 빤히 바라보던 이지훈이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손을 들어 하관을 가린 탓에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머리를 살짝 저으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얼굴이 자세히 봐야만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묘하게 풀려 있었다.

“하여간 사람을 들었다 놨다….”

놈이 흘리듯 뱉은 말을 이해한 순간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예매했어. 재미있다는 말만 듣고.”

마지막 기회였다. 혹시라도 싸우기 전 미리 사과해서 잘 넘어갈 기회. 모른 척 뭉갤 수도 있지만, 그렇게 넘어간대도 찝찝할 걸 알아서 차라리 짚고 가고 싶었다.

“미안하다. 다음부터는 꼭 신경 쓸게.”

날 빤히 보던 이지훈이 마침내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뺐다. 내 손에 들린 포스터를 뺏어간 놈이 그걸 미련 없이 옆의 쓰레기통에 처박기까지는 5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걸어오는 내내 이렇게 하고 싶었던 걸까 생각해보게 될 정도로 신속하게 벌어진 일이었다. 순식간에 텅 빈 손을 어색하게 말아쥐는 나와 눈을 마주친 놈이 평이하게 답했다.

“알았어.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뭐.”

간결한 대답이었지만, 뒤끝을 부릴 거였다면 이런 말조차 허투루 뱉지 않을 놈을 알아 안심이 됐다. 마주친 눈빛도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그제야 영화관에서 내내 긴장해 있던 목이며 어깨가 조금이나마 이완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지훈의 곁으로 가 섰다. 엘리베이터에 우리의 모습이 비쳤다. 예상치 못한 일이 있긴 했지만, 이대로 집에 돌아가 잠드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지난 며칠간 정신없이 일을 해치운다고 미뤄뒀던 피로감이 몰려오는 듯했다. 하품을 삼키며 고개를 돌리다 말고 이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놈이 내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뭉쳐 있는 근육을 풀어주듯 꾹꾹 눌러주는 손길이 시원했다. 유독 뭉친 어깻죽지 부근을 꾹 누르던 이지훈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많이 피곤해?”

“…많이는 아니고.”

“일이 그렇게 많아? 거기 가서 야근은 잘 안 하는 것 같길래 안심했는데. 지금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네.”

이마까지 슬쩍 찡그린 놈은 내가 걱정되는 눈치였다. 내가 복직을 결정했을 때, 조금 더 쉬는 게 어떻겠냐고 권하기까지 했던 놈이니 이렇게 피곤해하는 모습이 달갑지 않을 터였다. 순간 피어나는 죄책감을 힘겹게 잠재웠다. 어차피 이번이 특수한 경우였고, 앞으로는 차출될 일도 없을 테니까.

“그냥. 아직 적응하는 단계라 그렇지, 뭐.”

핵심을 묘하게 피한 대답을 던져놓고 엘리베이터 계기판을 응시했다. 지하 주차장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다. 영화관부터 시작해서 식당, 쇼핑 시설이 모두 들어가 있는 복합 건물이긴 해도 지금이 자정인 걸 생각해보면 금방 도착할 것 같았다. 마찬가지의 생각을 하는지 어깨를 주무르던 이지훈의 손길도 떨어져 나갔다.

“저기….”

갑작스러운 말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내렸다. 우리 뒤에 누군가가 서 있는 걸 뒤늦게 발견했다. 아까 영화관을 가로질러 걸어올 때만 해도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급하게 따라온 걸 티 내듯 숨을 고르는 여자는 눈에 보일 정도로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용기를 쥐어짜는 사람처럼 손을 가만두지 못하고 이지훈을 힐끔대는 모습이 어딘가 익숙함을 깨달은 순간엔 입 안이 말랐다.

“저 아까 그 팝콘 추천한 직원인데요….”

여자가 손에 들고 있는 유니폼을 들어 올려 보여줬다. 신분이라도 증명하듯. 아, 이지훈이 여자를 알아본 듯한 신음을 흘렸다. 이지훈이 자신을 기억한다는 사실에 용기를 얻었는지 여자가 빠르게 말했다.

“혹시 괜찮으시면 번호 좀 주실 수 있을까 하고….”

겪어본 적 있는 상황이었다. 다만 그 상황에서 이렇게 둘만 있었던 적은 지금이 처음일 뿐.

잠깐 당황한 것처럼 보이던 이지훈은 이내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눈이 마주친 순간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일행이 아닌 것처럼 둘에게서 뒤돌아 엘리베이터 계기판에 시선을 박았다. 그편이 여자에게도 덜 민망한 상황일 것 같았고, 옆에서 듣고 있는 것부터가 예의가 아닌 것처럼 느껴져서.

그래도 기분은 이상했다. 나랑 사귀는 놈이 옆에서 번호를 따이고 있는데, 내가 딱히 끼어들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이지훈도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을까. 그러지 않으려 노력했음에도 자꾸만 등 뒤의 인기척에 신경이 쏠렸다.

어색하게 흐르는 침묵을 깬 건 이지훈의 옅은 한숨이었다.

“죄송합니다.”

“아… 여자친구 있으세요?”

“네. 애인 있어요.”

“아….”

“추천해주신 팝콘은 맛있게 잘 먹었어요. 감사해요.”

“아… 네. 다행… 그, 죄송합니다. 손에 반지가 없으시길래 혹시나 하고 여쭤본 거였어요.”

예의를 차리긴 했어도 분명한 거절이었다. 누가 들어도 어색한 대화가 마무리되자마자 떠나는 발소리가 들렸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것도 동시였다. 먼저 엘리베이터 안으로 걸어 들어갔고, 등 뒤에서 따라 타는 기척이 느껴졌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이지훈이 바로 옆에 서 있는데도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방금 있었던 일에 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만 같아서. 어느 모로 보나 유쾌한 주제는 아니었다.

엘리베이터라도 대신 움직여주면 좋을 텐데, 이지훈은 버튼을 누르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이지훈의 차가 주차된 층을 모르는 내가 아무 버튼이나 누를 수도 없었다. 나는 놈을 조금 더 기다리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몇 층이야?”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결국 이지훈을 돌아봐야 했다. 이지훈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놈이 대답 대신 움직였다. B3 버튼에 불이 들어왔다. 나는 이지훈이 서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말없이 엘리베이터에 비치는 우리를 바라보는 모습을 응시했다. 멈춰 세울 승객이 없는 탓에 엘리베이터가 쉬지 않고 내려갔다. 이지훈은 엘리베이터가 지층을 벗어난 순간에야 입을 열었다.

“네가 왜 그렇게 모르는 사람인 척,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인 척 물러선 건지는 알겠는데.”

방금 벌어진 일에 대한 말임을 모를 수가 없었다. 나는 망설이면서도 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상황 정리되고 둘만 남았는데도 방금 일 모르는 척하는 건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이지훈의 시선은 흔들림 없이 앞을 향하고 있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아까 내가 그랬듯. 나를 외면하면서.

“나는 너처럼 못 해.”

“…….”

“하다못해 이 새끼 애인 있어요, 그런 말이라도 하면서 훼방 놓거나 기분 안 좋은 티라도 낼 거야.”

그제야 놈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이지훈은 웃음기 없는 표정이었다.

“내가 이상한가?”

지하 3층에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들렸다. 시선을 거두고 먼저 내리는 놈의 뒷모습을 보며 차를 가져오지 않은 걸 잠깐 후회했다.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것도 힘들었는데, 집에 가는 내내 또 이런 어려운 침묵을 견뎌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숨부터 나왔다. 오늘은 정말 뭘 해도 안 되는 날이 맞았다.

이렇게 누구 하나 말을 걸지 않고 길게 침묵을 유지한 건 참 오랜만이었다. 그 흔한 라디오도 켜지 않은 탓에 차 안은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적막했다. 나는 불편한 속을 달래려는 것처럼 창밖을 봤다. 그조차 이지훈의 옆얼굴이 그대로 비치는 창 때문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정적을 깬 건 핸드폰 진동 소리였다. 세 번이 지나도 끊이지 않는 진동 소리가 전화임을 눈치챈 이지훈이 내 쪽을 흘깃 봤다. 나는 재킷 안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에 박서빈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화면을 가리듯 숨겼다. 이지훈이 보면 안 될 것 같았다. 거기다 어차피 차 안에서 받을 수 있는 전화도 아닐 터였다. 받아 봤자 영화관에 오기 전까지도 하다 온 일 이야기를 할 게 뻔한데, 이지훈에게 마약수사대로 차출 갔던 일을 말할 생각이 없는 내게는 리스크가 컸다.

받지 않으니 금방 끊길 줄 알았는데, 3초도 지나지 않아 핸드폰이 또 울렸다. 앞을 보던 이지훈이 불쑥 말을 걸었다.

“받아.”

“됐어. 나중에 전화하면 돼.”

“뭔 전화길래 내 앞에서는 못 받아?”

정색하는 놈을 보는데 마음 한편이 싸늘해졌다. 굳은 내 얼굴을 보고서도 이지훈은 물러서는 대신, 말끝에 힘을 줘 뱉었다.

“받으라고.”

이렇게 날을 세우고 이야기하는 놈은 오랜만에 봤다. 여기서 싫다고 버티면 어떻게 될까. 더 큰 의심을 사고, 어쩌면 싸울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일주일 만에 보는 놈과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불안함을 품고서도 결국 이지훈과 눈을 맞춘 채로 핸드폰을 들었다.

-선배님!

하필 차 안이 조용한 탓에 통화 상대방의 소리가 크게도 울렸다. 박서빈의 목소리임을 눈치챈 듯한 이지훈이 더 묻지 않고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고쳐 쥐었다.

“…네. 무슨 일이에요.”

-혹시 집이십니까?

음량 버튼을 최소한으로 줄이며, 박서빈이 일 이야기만은 안 하기를 바랐다.

“아뇨. 근데 곧 도착해요.”

-아, 다행입니다. 제가 선배님 드리려고 뭘 좀 갖고 왔는데, 시간 되시면 잠깐만 내려와 주실 수 있을까요? 금방 전해드리고 갈게요.

천만다행으로 박서빈이 꺼낸 건 일 이야기가 아니었다. 제주도에서 귤 농장을 운영하는 여자친구 부모님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지방에서 크게 농사를 짓는다던 손 큰 부모님에게서도 식재료를 가득 얻어오는 박서빈은 제가 느끼는 고마움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려 들었다. 이지훈과 친해진 후에는 더했다. 박서빈이 준 잣이 특히나 질이 좋다며 감탄하던 이지훈은 박서빈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농장으로부터 몇 상자를 직접 주문하기까지 했더랬다. 그에 감동받은 박서빈네 부모님께서 주문한 것보다 한 박스를 더 얹어주고, 그럼 이지훈은 또 주문하고. 선순환이라면 선순환이었다.

익숙한 일이긴 한데, 나는 평소처럼 그러라고 말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분위기가 이런데, 아무리 잠깐이라고 해도 괜히 왔다가 험한 꼴만 보일 것 같아서. 게다가 전화는 어떻게 넘겼다 해도, 와서 박서빈이 나를 보고 무슨 말을 할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이지훈이 고민을 대신 끝내주듯 말을 얹었다.

“오라고 해.”

단호한 놈의 옆모습으로부터 시선을 거뒀다. 내키지 않음에도 박서빈에게 알겠다고 했다. 곧 도착할 것 같으니, 앞에 오면 연락 달라고.

“두 분 같이 계셨네요.”

“영화 보고 오는 길이에요.”

“어, 설마 <스파이 우먼>이요? 재밌으셨어요? 제가 선욱 선배님께 추천드린 건데.”

“아… 서빈 씨가 추천한 거였구나?”

이지훈이 웃으며 더 말하지 않고 몸을 숙였다. 놈이 바닥에 내려둔 두 개의 상자를 들기 쉽게 포개는 것까지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피곤할 텐데 뭐 하러….”

“아닙니다. 오늘 아니면 또 뵙기도 힘들 것 같아서요.”

“…….”

“사실 처음에는 부서 바뀌어도 같은 청이니까 오며 가며 뵐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일에 대한 감사 인사도 드릴 겸 겸사겸사 들렀어요.”

상자를 들고 일어서던 이지훈이 멈칫하는 게 보였다. 박서빈의 입에서 나온 감사 인사라는 말 때문임을 눈치챈 나는 다급히 박서빈에게 다가가서 어깨를 두드렸다. 더 자세한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얼른 보내야 했다.

“어쨌든, 고마워요. 여자친구가 기다린다고 하지 않았어요? 얼른 가요. 기다리게 하지 말고.”

“괜찮습니다. 어차피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라… 제가 여기 온 것도 알고요.”

“그래도 너무 늦었으니까….”

“여자친구도 한번 고맙다고 인사드리고 싶어 하더라고요. 저 마약수사대 막 들어왔을 때부터 선배님이 엄청 많이 도와주셨지 않습니까. 이번 주에도 선배님 없었으면 정말 힘들었을 겁니다. 나름 선배님 밑에서 많이 배웠다고 생각했는데도, 일이 사방에서 쏟아지니까 또 다르더라고요. 다른 선배님들도 한결 마음 놓으신 눈치였고요. 감사합니다. 그래도 이번 기회에 많이 배웠으니까,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반장님도 아까 도착하시자마자 그 말씀부터 하셨고요. 딴 팀 간 사람 부려 먹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요.”

말릴 틈도 없이 쏟아지는 말에 결국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아, 씨발….

“…선욱이가 일 도와줬나 봐요?”

“예? 아, 예. 이번 주에 저희 팀에서 좀 큰 사건이 터졌거든요. 타 팀에서 인원 차출 받을 정도였는데 아무래도 선욱 선배님만큼 저희 팀 일을 잘 아시는 분이 없으니까요. 1순위로 달려갔습니다, 하하. 선배님이 흔쾌히 받아주셔서 다행이었죠.”

“아….”

“어쨌든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래도 이렇게 인사드리니까 마음이 좀 편하네요. 작은 마음이지만 받아주시고, 또 뵙겠습니다.”

표정을 관리하지도 못하고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박서빈의 차가 떠나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어렵게나마 옆을 돌아볼 용기를 냈다.

“이지훈. 그게….”

“선욱아. 날 잡았니?”

물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것처럼 헛웃음 치던 놈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웃지 않는 이지훈은 놀랍도록 무표정해진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까만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에는 올 게 왔다 싶었다.

“올라가서 이야기해.”

상자를 든 이지훈이 먼저 돌아섰다. 성큼성큼 멀어지는 놈을 허탈하게 보다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무리 되는 일이 없대도 이건 좀 심한 거 아닌가. 마치 하늘이 이지훈과 싸우라고 저주라도 퍼붓고 있는 기분이었다.

상자를 부엌에 내려둔 이지훈은 곧장 거실로 왔다.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두커니 서 있는 곳이었다. 나는 성큼 거리를 좁히는 놈을 무력하게 응시했다. 나라고 억울한 게 없는 건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지훈은 말이 없었다. 내가 먼저 말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놈 딴에는 기회를 주는 것이기도 했다. 차마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할 자신이 없어서, 이지훈의 발치에 시선을 둔 채로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냐.”

“뭐가.”

“마약수사대 도운 거… 일부러 숨기려 한 건 아니라고.”

“근데 왜 난 들은 기억이 없지?”

말 사이사이마다 날카로운 침묵이 파고들어 가위처럼 분위기를 동강 냈다. 그저 그런 변명으로는 이 상황을 넘길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할 수 있는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네가 알면 너무 걱정할 것 같아서.”

“이런 식으로 남의 입 빌려서 알게 됐을 때는 걱정 안 할 것 같았고?”

답답한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들었다. 상상한 것보다도 더 냉기가 도는 얼굴의 이지훈을 본 순간에는 혀가 입 안으로 말려드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히려 더 걱정하겠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이지훈이 손으로 거듭 얼굴을 쓸어내렸다.

“솔직히 말하면 아까도 기분은 안 좋았는데 네가 이해는 됐거든? 근데 이건 진짜 이해부터가 어렵다. 그냥 못 넘어가겠어.”

“…알아.”

“알면 뭐 해. 앞으로도 똑같이 할 거잖아.”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나도 사실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같은 상황이 오면 일단은 숨기려 들기부터 할 것 같았다. 침묵하는 나를 보던 이지훈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틀었다. 나로부터 뒤돌아선 놈이 걷다가 이내 우뚝 멈춰 서길 반복했다. 그렇게 거실을 맴도는 놈은 움직이는 그 잠깐만이라도 분노를 잠재우려는 것처럼 보였다. 쉽사리 분노가 가라앉지 않는지 다니는 반경이 점점 넓어졌다. 저러다 문으로 나가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이지훈이 현관으로 발을 틀었다. 생각도 하기 전에 놈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지난 일 년간 크고 작은 일로 다툰 적이야 있지만, 이렇게 같이 있는 것조차 버티지 못하고 자리를 뜨려는 놈은 처음 봐서 놀랐다. 일단은 잡아야 할 것 같았다. 그게 힘을 써서 놈을 붙잡는 행위든 뭐든.

그러나 나름의 비장한 각오를 지닌 채로 놈을 따라나서려던 행위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따지자면 타의였다. 이지훈이 긴 한숨과 함께 갑자기 제자리에 멈춰 섰기 때문이었다. 현관문 바로 앞이었다. 내게로 뒤돈 놈의 표정이 착잡했다. 허리에 손을 얹은 채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지훈은 한참이 지나서야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또 그럴 거야?”

“…….”

“거짓말이라도 아니라고 해. 모른 척해줄 테니까.”

답까지 정해주고 기다리는 놈을 향해 머뭇대며 입을 열었다.

“…안 그럴게.”

나를 잠깐 지켜보던 이지훈이 더 말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간 놈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얼굴을 거듭 쓸어내렸다. 그게 울분을 삭이려고 노력하는 행위임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는 내내 놈은 나를 외면하고 있었으니까. 마치 나를 보면 감정을 조절할 수 없으리라는 걸 너무나 잘 아는 사람처럼. 그런데도 그게 잘 되지 않는지, 다시 입을 연 놈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이번 주 내내 오늘 너 볼 생각만 하면서 버텼어.”

“…….”

“화나도 너 안 보면 내 손해라고. 다음 비행까지 시간도 얼마 없는데, 비행기 탄 뒤에 성질 조금만 죽일 걸 그랬다고 후회하기 싫어.”

“…….”

“그러니까 나 좀 진정될 때까지 그냥 가만히 있자. 오래 안 걸려. 잠깐만.”

이지훈은 말을 이어가며 감정을 정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행히 이번엔 효과가 있었는지, 한결 차분해진 놈이 얼굴을 벅벅 쓸어내리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다른 집중할 무언가가 필요한 것처럼 앞의 리모컨을 집어 드는 놈을 보다가 몸을 슬그머니 돌렸다.

“같이 있자는 말이었는데?”

한 발짝도 채 떼지 못하고, 고개를 뒤로 돌려야 했다. 이지훈은 여전히 소파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치고는 리모컨을 화풀이라도 하듯 꾹꾹 누르는 행동이 거칠었다. 나는 침을 삼키며 발을 슬쩍 끌었다.

“…아, 다시 올 거야. 잠깐만.”

“잠깐이라도 어디 가는 것 대신 내 옆에 앉아 있어 줬으면 좋겠는데?”

일부러 톤을 맞춘 듯한 물음을 얄밉게 뱉는 순간마저 놈은 날 보지 않고 있었다. 텔레비전 화면을 보고 있긴 한 건지 의심이 될 정도로 채널을 휙휙 돌려대는 놈을 보며 잠깐 고민했다. 화를 풀어주기 위해 하려는 행위인데, 오히려 화를 돋우는 것만 같기도 해서 망설여졌다. 그래도 마음은 원래 계획했던 걸 하는 쪽에 기운다. 나는 이지훈의 눈치를 보면서도 몸을 다시 돌렸다.

“오래 안 걸려. 금방 다녀올게.”

“어디를 갈 때면 목적지라도 고해줬으면 좋겠는데?”

“…방에.”

소파에 앉은 후 처음으로 놈의 시선이 내게로 돌아왔다. 나는 손을 들어 안방을 가리켰다.

“뭐 좀 가져올 게 있어서….”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인상을 슬쩍 찌푸리는 놈을 보고서도 설명하는 대신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곧 알게 될 테니까.

이지훈은 내가 돌아올 때까지도 가만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방에서 나오자마자 눈이 마주친 걸로 보아서는 내가 언제 나오나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놈은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재빠르게 다시 텔레비전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파가 꺼지는 감촉이 느껴질 텐데도 고집스레 앞만 보고 있는 놈의 눈치부터 살핀 나는 손에 있던 상자를 탁자 위로 밀어뒀다.

“…이지훈.”

머뭇대면서도 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지훈이 피하려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속도로.

다행히 이지훈은 피하지 않았다. 내가 볼을 슬쩍 만졌을 때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그래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물론 텔레비전을 향한 고개가 돌아오진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지금처럼 이지훈이 피하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드니 이상하게도 조금 용기가 났다. 싸운다고 해서 끝이 아닌데, 나는 싸우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큰일이 나는 것처럼 이지훈이 싫어할 만한 일은 일단 죄다 피하고 숨기려 들었다는 것도. 그것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많이 돌아왔는지 알면서도.

이지훈이 한 말이 떠올랐다. 이런 일이 생기면 나는 또 똑같이 행동할 거라는 말. 그 말을 하던 놈의 표정까지 떠올리니 마음이 쿡쿡 찔리듯 아팠다. 이지훈 말이 옳다. 내가 이 습관을 고치지 않는 한, 이런 일들이 반복되겠지.

반성할 점들을 곱씹으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안 할게.”

아까도 놈에게 같은 말을 했지만, 방금 뱉은 말이 월등히 더 무거웠다. 그만큼의 진심이 담겨서 그랬다.

“이번만 어떻게 넘어가 보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야.”

미안함을 손끝에 담았다. 이지훈의 볼을 서투르게나마 만지며, 나도 이번 주 내내 이지훈과 똑같은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텼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금요일에는 이지훈이 오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참고 견딘 순간들이 꽤 많았음을.

“나도 알아. 너한테 숨기면 안 된다는 거.”

“…….”

“그래서 안 그러려고 노력은 하는데… 솔직히 어려워.”

“…….”

“그새 버릇이 됐는지… 위험하거나 너 속상하게 할 일이면 차라리 숨기는 게 낫다는 생각부터 들어. 그게 내 딴에는 널 보호하는 방식이어서.”

음소거 버튼을 눌렀는지, 귓가를 따갑게 울리던 텔레비전 소리가 조용해졌다. 이지훈이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신호였다. 나는 아래를 보던 시선을 드는 대신 짧게 여러 번 호흡했다.

“미안해. 그래도 앞으로 계속 노력할 거니까…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긴 한데.”

그리고…

순간 이런 이야기까지 해야 하나 잠깐 고민했지만, 그런 생각이 든 것만으로도 말해야 할 것 같아 얼른 입을 뗐다.

“물론 전에 일하던 팀이어서 도우러 간 것도 있지만….”

“…….”

“반장님이 휴가 때문에 자리 비우신 게 컸어. 그 집 막내가 열 살인데, 태어난 후 처음으로 해외여행 데리고 가는 거라고 했거든.”

“…….”

“최혁준 일도 잘 끝나고 승진 축하 겸 가족들이랑 큰마음 먹고 가신 건데, 이렇게 일 터진 거고. 소식 듣자마자 가족들 두고 공항으로 가시기부터 한 모양이더라고.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한데, 마음이 좀… 그렇더라.”

솔직한 건 힘들다. 특히 늘 머리로만 생각하고, 혼자 책임지면 끝이라고 생각했던 일을 누군가에게 낱낱이 고하며 책임을 나누려는 건 더 힘들었다.

그래도 해야 하는 일임을 알았다. 듣고 나서도 이지훈이 이해 못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내가 직접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놈은 한결 기분이 나아질 테니까.

손을 감싸 내리는 손길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이지훈이 날 말끄러미 보고 있었다. 다행히 아까와 같은 표정은 아니었다.

“…반장님이면 너 부서 옮기는 데 도움 주신 분?”

“어.”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듯 말이 없던 이지훈이 내게 손을 뻗었다. 뭘 하려는지를 깨달은 나는 놈이 내 셔츠를 들어 올리게 내버려 뒀다. 옷을 내린 놈에게 손바닥도 깨끗하다는 걸 증명하듯 먼저 내밀기도 했다. 다친 곳이 없음을 말해주듯.

청진기를 든 의사처럼 내 몸 이곳저곳을 점검하던 이지훈의 표정이 그제야 조금 풀렸다.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옆에 있던 상자를 끌어왔다. 그러고는 내 손바닥을 한 번 더 꼼꼼히 살피는 놈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이거….”

“뭔데?”

“핸드폰.”

듣고서도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이지훈이 상자를 들어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사용설명서까지 들어 있는 신형 핸드폰은 이지훈이 쓰는 기종과 같은 거였다. 지난주에 미리 사둔 것이기도 했다.

물론 그때만 해도 이런 상황보다는 조금 더 부드럽고 좋은 분위기에서 보여줄 거라고 예상했었지만.

똑똑한 놈도 멀쩡히 잘 쓰고 있는 핸드폰을 두고 굳이 새것을 산 이유까지는 추측하지 못하는 눈치라 입을 뗐다.

“나 일 다시 시작하고… 가끔 네 전화도 놓치고, 메시지도 늦게 봐서 네가 섭섭해하는 거 알아. 그런 부분 나한테 티 내지 않으려고 애써 참아주고 있다는 것도.”

“…….”

“일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해도, 할 수 있는 노력은 해야 할 것 같아서.”

샀을 때 딱 한 번 켜 봤던 핸드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까맣던 화면에 불이 들어오며 밝아졌다. 기본적인 애플리케이션 외에는 아무것도 깔려 있지 않은 새 핸드폰이었다. 내가 적용한 변경사항은 딱 하나뿐이었다.

내가 내민 핸드폰 화면을 확인한 이지훈의 시선이 곧장 내게로 돌아왔다. 방금 본 화면 속 숫자가 내가 일부러 띄워둔 것이 맞는지 확인하는 듯한 눈동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네 번호만 저장해놨어.”

“…….”

“이 핸드폰으로는 너랑만 연락하려고.”

말하면서도 입 안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제정신이라면 하지 못할 소리를 내가 직접 내 입으로 하고 있으니 그랬다. 이지훈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나 뭐 하나만 물어보자.”

“…어.”

“너 이거 나랑 커플로 맞추려고 일부러 같은 기종으로 산 거야?”

이지훈과 사귄 후에 접하는 세상은 여태까지 내가 살아온 세상과 참 다르다는 걸 느낀다. 커플이라는 말도 아직은 어색한데, 나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른 커플조차 유치하고 소름 돋는다는 이유로 시도하지 않을 일을 하고 있었다. 그게 이지훈이라는 이유로.

“…어.”

이렇게 좋아하는 얼굴 한 번 더 보고, 속상해하는 얼굴 볼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아서.

이지훈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게 보였다. 제 딴에는 웃음을 참는 것 같은데, 잘 되지는 않는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일부러 더 오버하듯 인상을 찡그리는 것처럼 보였다. 뒤죽박죽 섞이는 감정 중 어느 것을 먼저 보여야 할지를 고민하듯 혼란의 시간을 거치던 이지훈이 이내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야. 나 아까 너무 성질내 가지고 이거 보고 갑자기 미친놈처럼 좋아하는 거 좀 쪽팔리니까.”

“…….”

“네가 나 한 번만 더 풀어주는 척해. 홀라당 넘어가 줄게.”

핸드폰을 아주 조심스럽게 들어 상자 안에 다시 넣고 테이블 위로 내려놓은 이지훈이 몸을 내 쪽으로 돌렸다.

“자, 힌트.”

눈이 마주친 놈이 씩 웃었다.

“니 남친 스킨십에 존나 약해.”

피식 웃는 나를 본 이지훈이 장난치듯 어허, 훈장님 같은 소리를 냈다. 힌트까지 줬는데 얼른 하지 않고 뭐 하냐는 듯이. 몰입에 도움을 주려는 것처럼 팔짱까지 낀 채로, 딴청을 피우듯 고개를 옆으로 살짝 비튼 놈에게 다가갔다. 우선은 놈의 볼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며, 턱을 잡아 앞으로 돌렸다. 반항하는 척 튕기던 이지훈은 두 번째 뽀뽀에 순순히 앞을 봤다. 앞을 보게 했으니, 다음은 입술에 뽀뽀할 차례였다. 그러나 놈의 목뒤를 잡으려던 행위는 이지훈에 의해 저지됐다. 내 양팔을 잡아 내린 놈이 장난스럽게 눈썹을 휙 들어 올렸다.

“스킨십에 약하댔지, 약한 스킨십을 좋아한다고 한 건 아닌데.”

시범이라도 보이듯 이지훈이 깊게 입을 맞췄다. 순간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혀를 격하게 비비는 키스였다. 참을성이라고는 없는 듯한 키스에 입술이 얼얼하게 아팠다. 깔아뭉개듯 뒤로 미는 놈 때문에 몸이 뒤로 완전히 넘어갔다. 그 와중에 내가 머리를 다치기라도 할까 봐 머리 뒤를 받치듯 손을 대고 있던 놈이 날 똑바로 눕힌 걸 확인하고서야 입술을 뗐다. 날 빤히 내려다보는 표정이 이상하다 싶더니, 이윽고 놈이 들으란 듯 한숨을 쉬었다.

“나한테 불리한 싸움이야. 얼굴 보면 화가 풀려.”

“…그런 것치고는 화 되게 잘 내던데.”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린 이지훈이 대답 대신 내 입술을 물었다. 둘 다 저녁 내내 가라앉은 기분을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각자의 입술을 얼마나 씹어댔는지, 맞댄 입술이 유달리 꺼끌꺼끌했다. 그걸 눈치챈 건 나뿐만이 아닌지, 이지훈이 키스를 하다가도 자꾸 혀로 내 입술을 핥았다.

“아, 팝콘 냄새….”

킥킥대며 웃는 얼굴이 꼭 개구쟁이 아이 같았다. 네가 더하다고 말하려다가 그냥 마음을 바꿔 놈의 볼을 감싸 깊게 키스했다. 서로의 달뜬 호흡을 느끼고, 몸에서 가장 부드러운 부분을 쉴 틈 없이 문대는 이 모든 과정이 겪어도 겪어도 좋았다. 이지훈의 입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니트를 벗기려던 놈이 돌연 마음을 바꿔 짧게 명령했다.

“물어.”

갖다 대는 대로 순순히 물고는 이미 반쯤 벗겨둔 이지훈의 니트를 당겼다. 내가 시키는 대로 머리를 쑥 빼낸 이지훈이 그러기가 무섭게 내 목에 고개를 처박았다. 둘 다 이미 바지가 절반은 벗겨진 상태였다. 나는 이지훈의 좆을 만지며 허벅지까지 내려온 바지를 마저 벗어 던졌다. 손에 쥔 좆은 이미 반쯤 발기해 있었다. 강직도를 보니 키스하기 전부터 그랬던 것 같은데, 화를 내면서도 이랬을까 새삼스레 궁금할 정도였다.

이지훈의 콧대가 가슴팍을 뭉근하게 건드려댔다. 살에 코를 박고 호흡하는 놈이 내 냄새면 뭐든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도, 매번 씻었나 생각부터 하는 나도 참 나라는 생각을 했다. 하도 물고 빨아서인지, 이제는 이지훈의 숨결만 닿아도 유두가 파르르 떨리는 기분이 들었다. 간지러움에 손을 움직이지도 못했는데, 이지훈의 좆이 그새 더 커졌다.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될 거라는 걸 너무 잘 아는 것처럼.

예고 없이 돌기를 강하게 문 놈 때문에 결국 신음이 샜다.

“흣.”

이지훈이 고개도 들지 않고, 제 손가락 하나를 내 입술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나는 이견 없이 이지훈이 준 손가락을 빨았다. 충분히 축축해진 손가락이 연구개를 부드럽게 긁으며 빠져나갔다. 그 손가락이 앞으로 할 일을 이미 눈치챈 것처럼, 허리가 움찔 떨렸다.

드로즈를 벗기는 것 대신 옆으로 젖힌 손가락이 구멍 안으로 슬금슬금 들어왔다. 이지훈은 이상하게도 아예 드로즈까지 벗기며 시작하는 것보다는, 꼭 이렇게 천이 거슬린다는 것처럼 젖혀가며 드로즈가 흥건히 젖을 때까지 아래를 끈덕지게 애무하는 걸 좋아했다. 이유는 몰라도 취향인 듯싶었다. 오늘도 천의 방해를 꿋꿋이 이겨낸 이지훈은 구멍 사이로 손을 부드럽게 밀어 넣었다. 침을 묻혀둔 덕에 어려운 진입은 아니었으나, 젤을 발랐을 때처럼 부드럽다고 보긴 힘들었다. 이지훈도 그걸 눈치챈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두리번대던 놈이 이내 소파 옆에 둔 로션을 집었다. 텔레비전을 보며 같이 소파에 누워 있을 때마다 내 몸을 마사지해줄 용도로 둔 것이었다.

“몸에 안 좋으려나?”

좆이 복근에 딱 달라붙을 정도로 세워두고, 로션 뒤의 성분을 심각한 표정으로 읽는 놈을 어이없이 보다가 발로 놈의 허리를 툭 쳤다.

“그냥 해.”

“아, 잠깐만. 읽고 있잖아.”

“…내놔.”

상체를 일으켜 놈의 손에서 로션을 뺏어왔다. 뚜껑을 열고 로션을 손 위에 쭉 짠 뒤 바로 아래로 가져갔다. 당황한 듯한 이지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구멍 안으로 로션을 듬뿍 바른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젤보다는 점성이 강했지만, 그 덕분인지 한 번 밀어 넣으면 안에서 더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손가락을 세 개 넣을 때까지 굳어 있던 이지훈은 욕을 중얼대면서 내 위로 몸을 숙였다.

“혼자 섹스하지 말라니까 말 안 듣지, 또.”

이를 악문 이지훈의 잘 빠진 손가락 네 개가 한 번에 아래를 뚫었다. 배에 힘이 절로 들어갔지만, 다음 순간에는 호흡과 함께 몸을 이완하려 애썼다. 거칠게 들어간 것치고 손가락은 안에서 부드럽게 움직였다. 질척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안을 헤집는 손가락은 구멍이 녹아내릴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안이 눅진할 정도로 풀려갔다.

“흐… 으, 읏.”

나중에는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였다. 갈고리처럼 만든 손가락이 깊은 곳을 스칠 때마다 복근이 움칠 긴장하듯 조여들었다. 자꾸만 아래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면 삽입 시에 이로울 게 없는데도.

“아… 좀, 그냥… 그냥 해.”

지칠 대로 지친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 순간에야 이지훈은 손을 뺐다. 구멍에 들어가 있지 않은 손으로 이미 내 좆을 잡고 세 번의 사정을 유도한 뒤였다. 그 와중에도 이지훈의 좆이 죽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오히려 더 커진 것 같기도 했다. 내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놈이 움직일 때마다 가죽 소파에 살이 쩍쩍 달라붙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놈이 어깨 위로 덜렁 올린 허벅지 때문에 딸려 올라간 내 엉덩이가 낸 소리라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이지훈의 좆이 구멍을 짓누르듯 진입한 뒤였다. 드로즈는 언제 벗겼는지, 정액에 젖은 음모까지 훤히 드러나 있었다.

“으윽, 아…!”

풀 만큼 풀었는데도 늘 처음엔 아팠다. 고통을 참으려 이를 악문 것과 동시에 이지훈이 몸을 숙이며 깊게 키스했다. 놈의 어깨에 다리가 얹힌 탓인지 삽입이 한층 더 깊어진 기분이었다. 이지훈의 좆이 안을 찔러대고 있었다. 몇 번의 섹스 후 감을 잡은 이지훈은 이제 내가 느끼는 곳만 집중 공략했다. 굳이 둘러 가지도, 애먼 데를 찔러보지도 않았다. 놈이 엇박으로 짓찧듯이 좆을 쑤셔 넣을 때마다, 내장이 한계까지 밀려 올라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흐윽, 읏, 으읏… 흐!”

거의 입이 틀어막힌 채 키스를 당하는 중인데도, 입술 사이로 자꾸 신음이 흘렀다. 손에 잡힌 이지훈의 머리카락을 헤집는 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키스를 하면서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이지훈은 그 와중에도 가슴팍을 더듬는 중이었다. 유두를 손가락으로 비틀다 못해, 가슴살을 세게 그러쥐는 놈 때문에 복근이 파르르 떨렸다. 아래를 치받는 속도에 탄력이 붙었다. 가죽 소파에서 나는 소리인지, 이지훈의 고간과 부딪친 엉덩이에서 나는 건지 알 수 없는 소리가 거듭 울렸다. 이지훈이 괴로울 정도로 물고 있던 입술을 놓고 내 볼을 길게 핥아 내렸다.

“아, 아… 읏, 이지훈, 아!”

이지훈이 말없이 박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사정이 다가온다는 말이었다. 팽팽하게 부푼 놈의 좆이 안을 뭉근하게 짓누를 때마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게 될 정도의 강한 쾌감에 잡아먹혔다. 뇌가 통째로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쾌감을 제외한 감각들이 죄다 잡아먹히는 느낌. 발이라도 디뎌야 현실인 걸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지훈은 내가 그럴 수 있게 두지 않았다. 허공에서 발을 허우적대 봐야 좆이 더 깊이 들어올 뿐이었다.

“하, 윽, 그만… 응으….”

신음을 참으려고 해 봤자 더는 의미가 없었다. 아무리 참아 봐야 어떻게든 입술을 뚫고 흘러나가고 말았으니까.

“허윽, 끄-”

“…….”

“하아, 아! 아….”

전율 같은 쾌감에 이제는 상체까지도 덜덜 떨렸다.

“아… 아, 씨발….”

나오는 대로 지껄이며 이지훈의 목을 꽉 껴안았다. 배에서 꺼덕이던 성기의 끝에서 정액이 분출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지훈이 좆을 급히 구멍 밖으로 뺀 것도 동시였다. 놈의 정액이 흩뿌려졌다. 꽤 양이 많아서, 배 위의 골을 타고 흐를 정도였다.

“하… 하아….”

숨을 고르며 아래를 내려다보는 내게 이지훈이 몸을 숙였다. 한 손으로는 내 등을 껴안은 놈이 다리로 제 허리를 감싸게 한 뒤 몸을 일으켰다.

“아!”

꼭 어미한테 매달리는 동물의 새끼나 할 법한 자세였다. 마주 안은 자세라 서로의 얼굴을 볼 수밖에 없다는 점이 더 수치스러웠다. 사정 후에 늘어진 좆이 이지훈의 배 근처에서 덜렁대는 게 섬뜩하리만치 잘 느껴졌다.

“아이씨, 이런 거 하지 말라고 내가 분명… 내려, 빨리.”

섹스할 때마다 자꾸 나를 들어 올리려는 이지훈에게 내 키와 덩치가 그리 작지 않음을 짚어준 지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이러는 걸 보니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급히 말하며 팔을 아래로 뻗었지만 그러기가 무섭게 허벅지가 더 단단히 고정되어 놈에게 딱 달라붙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손바닥으로 내 머리 뒤를 받친 놈이 고개를 꺾어 입 안 깊숙이 혀를 집어넣었다.

“…으읍-”

눈조차 감지 못한 채로 입을 틀어막히고 엉덩이를 토닥이는 손길을 느껴야만 했다. 이지훈은 키스가 끝나고서야 눈을 떴다. 놈이 내 입술에 대고 밀어라도 속삭이듯 말했다.

“선욱아, 이제 시작인데….”

“…….”

“너 자꾸 쓸데없는 데서 힘 뺄래?”

그러다 후회할 텐데.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입술이 물렸다. 이지훈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구멍에 언뜻 스치는 좆의 크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순간에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놈의 말이 맞았다. 조금이라도 힘을 아껴야 했다.

사정을 너무 많이 하면, 좆에서 흘러나오는 정액조차 투명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물처럼 주르륵 흐르는 액체는 몸에서 그만하라고 주는 신호 같은데, 아무래도 이지훈은 나와 해석을 다르게 한 모양이었다.

“야, 좀 그만… 그만하라고.”

배에 간신히 힘을 줘 몸을 일으켜 봐도, 더 나올 것도 없어 보이는 좆을 열성적으로 빨아대는 놈에게는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내가 놈을 밀어낼수록 빠는 세기만 더 강해지는 것 같아서, 머리를 뒤로 눕히며 욕을 중얼대는 게 최선이었다.

시간을 재보진 않았지만, 적어도 세 시간 이상은 침대에서 구른 게 분명했다. 온몸에 힘이란 힘은 죄다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힘이 그대로 이지훈에게 흡수된 것 같았다. 아니면 이지훈 혼자 저토록 지치지 않을 리 없다.

지겹도록 빨아대면서도 나와 눈을 간간이 마주치던 이지훈이 이내 물고 있던 좆을 입 안에서 빼냈다. 이지훈에게 혹사당한 좆 끝에서 정액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액체가 찔끔대며 흘러나왔다. 이지훈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물 먹이면 더 나오나?”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물을 힘조차 없었다. 간신히 낸 힘으로는 놈이 좆을 더 빨지 못하도록 몸을 비트는 게 최선이었다. 그러나 내 의도를 눈치챘는지 고개를 든 놈이 몸을 돌린 내 뒤로 바짝 붙어왔다. 그새 다시 꼿꼿이 선 놈의 좆이 등을 쿡쿡 찌르는 게 느껴졌다. 이지훈과 시선을 마주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제 그만하고 잠들고 싶은데, 이지훈이 협조해줄지가 의문이었다.

역시나 이지훈은 날 가만두지 않고 말을 걸었다. 등을 쿡쿡 찌르는 장난스러운 손길은 덤이었다.

“선욱아. 힘들어?”

몰라서 묻는 건가. 고개만 아래로 내려도 세 시간 동안 공들여 만들어 놓은 제 흔적들이 가득한데. 놈과 하고 난 뒤 일주일간은 샤워할 때마다 마주해야 할 모습이기도 했다. 특히나 오늘 밤에 공들여 빨린 허벅지 안쪽은 아마 일주일이 넘도록 원래의 색을 회복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지금도 이렇게 쓰린 걸 보면, 고간에 얼굴을 파묻다시피 한 이지훈 때문에 확인하지는 못했어도 아마 볼만한 꼴일 것이다.

나는 최대한 짧게 요약해 뱉었다.

“…어.”

“1부터 10까지 중에 얼마만큼?”

또 시작이었다. 범위를 주고 숫자를 고르게 하는 일. 행위 중에 딱히 아프다거나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는 나 때문에 고안한 방법이라고는 하는데, 사실 딱히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나마 있는 효과라면 어떤 숫자에 더 가까운 고통인가를 생각하느라 잠깐 정신이 팔리는 것 정도. 방금도 습관처럼 지금 느끼는 근육통이 8에 가까운 힘듦인지 9에 가까운 힘듦인지 고민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러느라 놈의 좆이 젤을 바를 필요도 없이 풀어진 구멍을 다시 짓누르고 있다는 걸 한 박자 늦게 알아챘다. 혹사당한 가슴을 달래듯 만지작거리는 손은 덤이었다. 놈의 긴 손가락에 퉁퉁 부은 유두가 스칠 때마다 뒷목이 당길 정도로 따끔했다. 나는 숨을 가다듬고서야 답했다.

“…9.”

이지훈이 귀를 깨물며 응수했다.

“아직 1이나 남았네?”

순간 흠칫했는데, 다행히 이지훈이 구멍에서 좆을 뺐다. 좆을 뱉어낸 구멍이 오므려지자 미약한 안도감마저 들었다. 이지훈이 가슴을 만지던 손가락을 구멍으로 가져간 순간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아….”

나도 모르게 몸을 둥글게 말았다. 이지훈의 손가락이 주름을 하나하나 만져대는 느낌이 소름 끼치도록 생경했다.

“그래도 존나 붓긴 했다. 더하면 아프겠어.”

차라리 손가락을 넣으면 모르겠는데, 넣기는커녕 겉만 만져대니 기분이 또 이상했다. 숨이 자꾸 거칠어졌다. 나는 급히 손을 뒤로 빼 구멍을 만지작대는 이지훈의 손목을 붙잡았다.

“야, 좀.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이지훈이 내 등 뒤로 더욱 바짝 붙었다. 귀에 더운 숨이 닿았다.

“빨아줄까?”

“…뭐?”

여태까지 실컷 빨아놓고 그게 또 뭔 소리냐고 물을 겨를도 없었다. 순식간에 아래로 내려간 이지훈이 내 허벅지를 좌우로 잡아 벌리자마자, 놈이 빨겠다고 한 게 좆이 아님을 눈치채서였다. 방금까지 누워 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손끝 하나 움직일 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놀라니까 이럴 힘이 생긴다. 엉덩이를 뒤로 빼며 침대 헤드로 도망치듯 물러서는 날 보는 이지훈의 표정이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라 더 황당했다. 나는 다가오려는 놈을 막으며 베개를 던졌다.

“야, 씨발, 뭘 빨아. 하지 마.”

“왜. 힘들다며.”

“힘든 거랑 거길 빠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됐어. 하지 마. 아무것도 하지 마, 제발.”

“아무것도 안 하고 빨기만 할게.”

“빠는 것 자체가 싫다는데 뭔 개소리야.”

“왜 싫어?”

“…아니, 애초에 넌 그게 왜 하고 싶은데.”

“거기서도 네 냄새 나는지 궁금해서.”

멍한 나를 두고 이지훈이 오히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처럼 이마를 구겼다.

“좆도 들어가는 곳에 혀가 못 들어갈 이유가 뭔데?”

이지훈이 고집부릴 때의 표정이다. 저걸 보니 오늘 싫다고 해도 언젠가는 꼭 하고 말 것 같았다. 순간 소름이 돋았지만, 애써 숨을 가다듬었다.

“…나중에 해, 나중에.”

언젠가는 이지훈의 고집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그게 오늘은 아니었다. 다행히 이지훈은 더 조르지 않았다. 놈이 생각하는 나중이 부디 멀고 먼 훗날이길 바라며 침대 헤드에 기댔다. 이지훈이 옆으로 다가왔다. 나보다 조금 더 허리를 세워 앉은 놈이 내 머리를 제 품에 기대게 했다. 하나도 편하지 않은 자세였지만, 원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으니 그냥 따라가 줬다.

나란히 앉아서는, 구분 없이 엉켜 있는 다리를 내려다보다 슬쩍 옆을 봤다. 이지훈은 섹스가 끝나면 늘 그러듯이 내 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내 오른손을 가져가 손가락 하나하나를 핥거나, 혹은 깍지를 껴서 허공에 살랑대며 흔드는 식이었다. 스킨십을 좋아하는 놈이 섹스 후 지친 나를 배려한답시고 대신 하는 행위였다. 아무리 살끼리 비비고 깍지를 껴도 뭐 하나 걸리는 거 없는 미끈한 손가락들을 보다가 입을 뗐다.

“이지훈.”

눈을 마주치고 이 말을 꺼낼 용기까지는 나지 않아, 엉킨 발에 시선을 둔 채로 입을 뗐다.

“우리… 반지 하나 맞출까.”

애초에 액세서리를 끼고 다니는 스타일도 아니고, 관계의 지속성에 초점을 맞춘 커플 액세서리 같은 건 내 인생에 절대 없을 거라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 쪽으로는 아예 사고 회로 자체가 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아까 영화관에서의 일이 아니었다면 계속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혀 있던 회로는 의외로 아주 작은 곳에서 뚫린다. 영화관에서 현우의 이름만으로 질투하는 놈을 본 순간. 그리고 사면서도 고민했던 핸드폰을 보자마자 커플 핸드폰이냐며 기뻐하는 놈을 본 순간.

어쩌면 이지훈은 좋아할지도 모르겠다고. 누군가 미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음을 티 내는 방법으로는 약지에 단단히 박힌 반지만 한 게 없을 테니까. 사회적으로 공유된 약속이기도 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저 사람과 똑같은 반지를 낀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 있겠구나 생각하게 되는 것.

“…….”

이지훈은 대답 없이 내 손등을 문질렀다. 듣기나 한 건지, 아니면 내키지 않는 건지 알 수가 없어 고개를 슬쩍 들었다. 그리고 그러자마자 콧등에 놈의 입술이 닿았다. 볼에도, 눈에도, 이마에도.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알 수 없는 놈의 행위를 받다가 멈칫했다. 이지훈이 내 옆으로 몸을 숙이고 있었다. 젤이며 콘돔을 넣어두는 침대 왼쪽의 베드 테이블과 달리 그냥 램프만 놓아둘 요량으로 들인 작은 협탁이었다. 협탁 아래에 달린 장식용 고리를 잡아당기자 놀랍게도 그 안에 감춰진 물건이 드러났다.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커플 핸드폰을 확인한 이지훈이 그랬듯, 나도 이지훈의 눈부터 봤다. 그 안에 내가 찾는 답이 있으리라는 걸 아는 것처럼. 어리둥절한 나를 눈에 가득 담은 채로, 이지훈이 환하게 웃었다.

“언제 그 말 해 주나 했다, 내가.”

이지훈이 반지 케이스를 열었다. 크기가 비슷한 반지 두 개가 나란히 꽂혀 있었다. 눈으로 보는데도 믿기지가 않았다. 놈이 이걸 준비했고, 이 집에서 같이 산 10개월 동안 언급 한 번 하지 않았다는 게 신기해서. 머릿속을 헤매는 수많은 질문 중 하나가 겨우 튀어나갔다.

“언제 이걸….”

“좀 됐어.”

“샀으면 바로 말하지 왜….”

“억지로 줘 봤자 넌 어차피 네가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한 안 끼고 다닐 거잖아.”

맞지? 하고 묻는 듯한 표정에 허탈한 웃음이 흘렀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놈을 이기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면서.

“손 줘 봐.”

이지훈의 요청에 따라 왼손을 들었다. 반지는 마디에서조차 멈추지 않고 끝까지 쑥 들어갔다. 미리 사이즈라도 몰래 재서 만든 것처럼 잘 맞았다. 바로 제 손을 덜렁 내미는 놈의 손에도 똑같이 반지를 끼워줬다. 손을 괜히 쥐었다 펴 보는데, 아직 감촉이 손에 익지 않은 탓인지 한없이 어색했다. 어떤 방향으로 비추어 봐도 반짝이는 모습을 홀린 듯 한참을 보고만 있다가 시선을 느끼고는 눈을 들었다. 코앞에서 나를 고요히 관찰하는 놈을 보고서야 긴 기다림에 대해 인사해야 하는 순간임을 알았다. 나는 이지훈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입술만 조용히 달싹였다.

“고마워.”

빙그레 웃는 놈의 볼로 다가가 짧게 키스했다. 요청하지 않아도 내가 먼저 뽀뽀하는 흔치 않은 순간임을 깨달은 이지훈이 와르르 웃었다. 날 뒤에서 고쳐 안는 놈에게 조금 더 편하게 기댔다. 어깨선을 따라 입술을 붙이던 놈이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반지 사며 상상했던 것보다는 조금 더 벗고 있는 상황이긴 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마자 장난스러운 얼굴과 마주쳤다. 나는 이지훈의 볼을 잡고 입술을 포갰다. 섹스는 더 못할 것 같아도, 벗고 있는 두 사람이 섹스 대신 할 수 있는 가장 로맨틱한 키스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선욱아. 나 차 키 좀!”

현관문 소리에 의아해할 겨를도 없이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이지훈이 간단히 장을 봐 오겠다며 집을 나선 후 5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차 키를 놓고 갈 놈이 아닌데 싶어서 이상했다.

이지훈의 차 키는 정말 텔레비전 앞 서랍장 위에 놓여 있었다. 차 키를 집어 들고는 몸을 돌렸다. 이지훈은 신발조차 벗지 않은 채로 현관문에 서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문고리를 잡은 손을 보니 받자마자 바로 다시 나갈 요량인 듯했다. 차 키를 건네자 이지훈이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미안. 주차장 내려가서야 생각났어.”

이지훈답지 않은 행위긴 하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별것 아니란 듯 고개를 끄덕이는 날 본 놈이 허리에 손을 둘러 끌어당겼다. 균형이 무너지며 순간 신음이 새어 나올 뻔했지만, 간신히 삼켰다. 애초에 이지훈이 혼자 장을 보러 가게 둔 이유도 이래서였다. 밤새 시달린 몸이 근육통을 호소한 탓에 따라나설 수가 없었다.

“잘 다녀오라고 뽀뽀해줘야지?”

당연하다는 듯 볼부터 내미는 놈을 밀어내려다가도, 허리를 꽉 붙잡고 있는 손길을 느낀 순간에는 의미가 있나 싶어졌다. 어떤 방식으로든 뽀뽀를 받아낼 놈인데, 버텨 봤자 실랑이만 길어질 터였다. 더 지치는 것도 나일 테고.

쪽. 이지훈이 고개를 바꿔 들이미는 다른 쪽 뺨에도 고분고분 뽀뽀했다. 얼른 방으로 돌아가서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이지훈은 오늘부터 삼 일간 오프였다. 주말 내내 붙어 있을 텐데, 틈날 때마다 덤벼드는 놈에게 장단을 맞추려면 에너지를 회복해야 했다.

“됐지? 가, 얼른.”

마무리하듯 입술을 맞댄 후 얼른 가라고 손을 휘휘 내젓다 말고 열린 문틈 사이에 시선이 멎었다. 현관문 앞에서 입을 맞추면서도 지나가며 누가 볼 걱정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아주 작은 틈이었다. 어차피 이웃이라고 해 봐야 스무 걸음은 걸어야 문 앞에 설 수 있는 건너편 집밖에 없기도 했고. 그러나 문틈 사이로 보인 인물은 내 안일한 생각을 비웃었다.

쿵.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지훈의 고개 또한 둔탁한 소리가 들린 곳으로 돌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처럼 문틈을 확인한 이지훈이 멈칫했다. 이로써 우리 둘 다 그 사람과 눈을 맞춘 셈이었다.

정확히는 입을 떡 벌린 채로, 나와 이지훈을 번갈아 보고 있는 강영수와 말이다. 강영수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뜨린 종이봉투 사이로 락앤락 통이 보였다.

“…….”

“…….”

“…….”

가장 먼저 움직인 건 이지훈이었다. 띠릭- 소리와 함께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멍한 강영수의 얼굴이 깔끔히 사라지고, 내게로 뒤돈 이지훈의 얼굴만이 보였다.

“우리 어디까지 했더라?”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천연덕스럽게 묻는 이지훈을 본 순간에야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나는 이지훈을 밀쳐내고는 문고리부터 잡았다.

강영수는 문이 닫히기 전에 본 자세 그대로 멈춰 있었다.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커진 동공 또한 그대로였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겨우 놈을 불렀다.

“…영수야.”

내가 이름을 부르고서야 강영수가 눈을 깜빡였다. 뒤늦게나마 현실 감각을 찾은 듯한 표정이었다. 놈이 가장 먼저 한 짓은 손을 들어 눈을 마구 비비는 거였다. 마치 방금 제 눈으로 본 풍경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것처럼.

“아… 나 눈이… 눈이… 잘못됐나? 아니, 나 방금 진짜 이상한 걸 봤어. 그니까….”

“…….”

“…….”

“선욱이 네가 이지훈한테 먼저 뽀뽀를….”

“…….”

“…….”

“뽀…뽀…를?!”

문장 속의 오류를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것처럼 거듭 같은 단어를 되풀이하던 강영수가 다급히 고개를 쳐들었다. 눈을 얼마나 세게 비벼댔는지 흰자위까지 충혈되어 있었다. 금붕어처럼 입술을 뻐끔대던 놈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인공호흡… 그런 거야?”

어떻게든 설명을 해보려고 뗀 입마저 다물리게 하는 말이었다. 나는 대답 없이 이지훈부터 확인했다. 팔짱을 낀 채로 문에 기댄 이지훈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강영수가 현실 인식 오류를 겪든 말든 자신과는 딱히 상관없는 것처럼.

“이지훈이 감전됐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순간 정신을 잃어서… 뭐, 어쨌든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던… 그런 거지? 그치?”

그사이 강영수의 질문은 점차 광기를 담은 재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다가온 놈에게 팔을 덥석 잡힌 순간엔 나도 모르게 내려간 옷부터 끌어 올렸다.

“…야, 야. 알겠어. 알겠으니까 이것 좀 놔 봐.”

힘을 과하게 준 놈 때문에 티셔츠 소매가 아래로 쭉 당겨졌다. 이러다 이지훈이 지난밤 남긴 흔적이 옷 사이로 드러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우리가 뽀뽀하는 것만 보고도 경기하는 놈에게 그런 걸 들켜 봐야 좋을 리 없었다. 반쯤은 넋이 나간 것처럼 보이는 강영수를 달래듯 입을 열려던 때였다.

“야. 강영수.”

내게서 돌려지지 않을 것 같던 강영수의 시선이 처음으로 옆을 향했다. 다가온 이지훈이 날 잡고 있던 강영수의 팔을 떨쳐낸 것도 동시였다. 나는 내 앞을 막아선 이지훈의 등을 초조하게 응시했다. 아까 쳐다본 건 놈이 강영수를 어떻게든 진정시켜주길 바라서이긴 했지만, 막상 이렇게 보고 있으니 놈이 무슨 말을 할지 걱정도 됐다.

이지훈은 양손으로 강영수의 어깨를 짚었다. 마치 권투 시합 전에 코치가 선수에게 충고할 때나 쓸 법한 자세였다.

“딱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잘 들어.”

강영수의 벙한 시선이 이지훈에게로 고정됐다.

“지선욱이랑 나는….”

“…….”

“…….”

“사랑에 감전됐다. 일렉트릭 쇼크 말고 러브 쇼크. 오케이?”

강영수의 입이 헤 벌어졌다. 반쯤 정신을 놓은 제 소꿉친구를 보고서도 이지훈은 쓸데없이 단호했다. 잡은 어깨를 단단히 고쳐 쥐며, 만만치 않게 심각한 얼굴로 힘을 줘 말했다.

“네가 본 건 존나 일부야. 우린 하루에 백 번씩 뽀뽀해. 지선욱 몰래 하는 것까지 포함하면 백오십 번. 네가 어쩌다 한 번 지선욱 뺨에 비비적대는 것과는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달라. 이해가 돼? 어? 대가리 돌아가고 있어, 지금?”

하….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이마를 짚었다. 강영수가 결혼하기 전까지는 우리가 사귄다는 사실을 말하자고 이야기했을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을 상상하진 못했다. 아니, 사실 이런 엉망진창의 풍경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황금 같은 오프를 겨우 이딴 일에….”

“조용히 해라.”

한 번 더 뒤돌아 경고하고서야 이지훈이 입을 다물었다. 강영수 집까지 오는 내내 이어온 짓이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이지훈과 그럼 이대로 넘어갈 거냐는 나의 충돌이 빚어낸 말씨름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이지훈이 해주는 밥이나 먹고 같이 뒹굴다가 끝날 줄 알았던 하루가 완벽히도 예상을 빗나간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짧은 한숨과 함께 상념을 털어낸 나는 키패드 위의 숫자를 뚫어질 듯 응시했다. 그러니까… 얘 집이 708호였나?

“709호.”

뒤돌자마자 바지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넣은 채로 서 있는 이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놈이 확인해주듯 키패드를 눈짓했다.

“709호 맞아. 눌러.”

태도야 어쨌든 이지훈을 끌고 온 게 다행이긴 했다. 기억력 좋은 놈이 잘못 기억하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까. 나는 키패드 위로 709를 입력하고는 호출 버튼을 눌렀다. 달칵, 호출받은 세대원이 반응했다는 기계음이 들린 순간 송화구에 대고 재빨리 말했다.

“강영수? 너 거기 있지.”

범인이라도 잡으려는 사람처럼 급히 말한 이유는 아까 강영수가 뛰쳐나간 것과도 연관이 있었다. 강영수는 말 그대로 뛰쳐나갔다. 설명보다는 헛소리에 가까운 이지훈의 말을 듣던 도중이었다.

‘그러니까… 둘이 사귄다고?’

‘어.’

‘둘이…?’

‘어.’

‘너랑… 너랑…?’

‘그래, 이 새꺄.’

‘…정말이야? 나 놀리는 거 아니고?’

마지막으로 묻던 놈의 시선은 이지훈이 아닌 내게 박혀 있었다. 내가 머뭇대면서도 부정하지 못하자 강영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입까지 벌린 채로 우리를 번갈아 보던 강영수가 멍청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나는?’

나는 침묵했고.

‘…미친 새끼야. 그럼 셋이 뽀뽀하리?’

이지훈은 쌍욕을 했다.

그조차 잠시였다. 양손을 허공으로 쳐든 강영수가 주먹으로 제 머리를 퍽퍽 내리치며 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사오정 같은 소리를 내며 뛰어가던 놈은 엘리베이터를 탈 정신도 없는지 계단을 택했다. 급한 발소리와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우리 둘 다 황당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느라 따라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주차장에 내려갔을 때는 이미 강영수의 차가 사라진 뒤였고, 바로 전화를 걸었지만 거는 족족 거절당했다. 강영수는 한 시간이 지나고서야 메시지를 보냈다.

강영수

나...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좀 필요해... 오후 3:05

내가 연락할 때까지 먼저 연락하지 말아죠... 오후 3:07

놈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도저히 가만히 집에 앉아서 연락을 기다리고만 있을 자신이 없었다. 특히나 놈이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들은 설명이라곤 뽀뽀의 질적 차이를 논하는 이지훈의 헛소리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나는 지끈대는 머리를 짚으면서도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려 애썼다.

“아까 네가 본… 그거… 제대로 설명해주려고 왔어. 이지훈도 더는 장난 안 칠 테니까 잠깐이라도 내려와서….”

-알았어.

놈이 전화도 안 받고, 문자에도 답장하지 않길래 한참을 더 설득해야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흔쾌히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이지훈과 시선을 교환했다. 강영수의 목소리는 침착해 보였다. 적어도 또 한 번 뛰쳐나갈 일은 없겠다고 안심할 정도로.

-나 준비하고 내려갈 테니까, 요 앞 술집에 먼저 가 있어. 나도 거기로 바로 갈게.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지직대는 잡음이 뚝 끊겼다. 강영수가 연결을 종료한 듯했다. 이지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앞장섰다. 강영수의 집 호수를 알던 것처럼, 강영수가 말한 술집이 어디 있는지 또한 아는 것처럼.

11월이긴 해도 아직은 가을에 가까운 날씨였다. 강영수가 말한 술집은 오피스텔 밑 아파트 상가 맨 끝자락에 있는 곳이었다. 동네 술집이라서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익숙하게 주문하는 이지훈을 보니 강영수와 와본 적 있는 것 같았다. 이지훈과 나는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가끔 볼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 때문인지 술집 밖에 있는 야외 테이블은 인기가 없었다. 그나마 볼 거라고는 가게 주인이 야외 테이블에 앉은 손님을 위해 내놓은 듯한 모니터 하나뿐이었다. 모니터 안에 이름 모를 사람들이 어지러이 스쳐 지나갔다. 가끔 영상이 시작하기 전 광고가 뜨는 걸 보니 비디오 플랫폼의 영상을 마구잡이로 틀어놓은 모양이었다.

“어우, 추워… 씨.”

이지훈이 어깨를 떨며 후드 집업 모자를 뒤집어썼다. 덩치가 큰 놈이 추위를 타는 걸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닌데, 오늘은 특히나 미안했다. 바로 겉옷을 벗어 내밀었지만 거절당하고, 안으로 들어가자고 말하며 일어서자마자 붙잡혔다. 앉지도 서지도 않은 자세로 어정쩡하게 멈춘 나를 앞에 둔 채로 오징어 다리를 질겅질겅 씹던 이지훈이 고집을 부리는 이유를 간단히 정리했다.

“됐어. 너 안에 들어가면 이야기 제대로 못 할 거 아냐. 사람들 신경 쓰여서.”

왜 밖에 앉나 했더니 속으로 그런 셈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강영수 집까지 오는 내내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던 놈이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나를 배려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어딘가 멋쩍었다. 나를 슬쩍 본 이지훈이 오징어 다리를 들어서 내 입에 가져다 댔다. 나도 모르게 턱을 움직여 받아먹었다. 오징어는 질겼다. 이지훈이 왜 그렇게 여러 번 씹어야 했는지 알게 될 정도로.

나란히 앉아서 한참 오징어만 씹었다. 모니터 화면에 시선을 둔 채로, 이지훈이 가볍게 툭 던졌다.

“너무 걱정하지 마.”

“어떻게 걱정을 안 하냐.”

“뭐가 그렇게 걱정되는데.”

“뭐… 오늘 본 게 너무 충격적이라 다신 우리 안 보겠다고 할 수도 있고.”

“누가. 강영수가?”

별 우스운 이야기를 다 듣는다는 표정이었다. 한 번 더 헛웃음 친 이지훈이 깔끔히 일갈했다.

“퍽이나 그러겠다. 누구 만나든 우리 이야기부터 하는 새끼인데.”

말이야 그렇게 했어도, 사실 나도 강영수가 우리를 안 보리라고 생각하는 것까지는 아니었다. 강영수와 함께한 햇수가 어느덧 15년이었다. 놈이 나와 이지훈에게 가진 애정이 이런 일에 흔들릴 수는 없다는 것 정도야 안다. 태어나면서부터 강영수를 보아왔던 이지훈은 나보다 그 사실을 더 잘 아니 저런 반응일 것이다.

“네가 고민해야 할 거는 걔가 우리를 안 보겠다고 하는 게 아니라, 나중에 더블데이트하자고 앵기는 걸 어떻게 쳐내야 할지라고 본다.”

심드렁히 말하는 이지훈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시계를 내려다봤다. 이곳에 앉아 강영수를 기다린 지도 어느덧 30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 애초에 안 볼 거였으면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지도 않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비로소 마음이 좀 편해졌다. 손가락으로 이마를 툭툭 치던 걸 멈추고는 이지훈이 보고 있던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화면에는 식기 세척기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리모컨조차 없기에 재생되는 광고를 스킵하지 못하고 봐야만 했다. 하얀 셔츠를 입은 남자 연예인이 이가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부엌으로 들어가는 걸 보다가 그 얼굴이 익숙함을 깨닫고 슬쩍 옆을 확인했다. 미간을 찌푸린 이지훈의 시선이 화면의 남자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집중했는지 턱이 움직이는 속도 또한 느려졌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 이지훈의 팔을 툭 쳤다.

“야.”

어제만 해도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따져 보면 당연한 일이다. 특히 전 애인이 누구인지를 이미 들켰으며, 그 전 애인이 갈수록 텔레비전이며 영화관 스크린에 등장하는 빈도가 늘어나는 인기 연예인이기까지 하다면.

“이지훈.”

한 번 더 부르고서야 이지훈의 고개가 돌아왔다. 나는 크게 심호흡한 뒤 빠르게 뱉었다.

“헤어지고 나서 현우랑 한 번도 연락한 적 없어.”

내가 이지훈 앞에서 현우의 이름을 대놓고 꺼낸 건 처음이었다. 그걸 아는 것처럼 눈썹을 꿈틀댄 놈이 팔짱을 꼈다. 일단은 들어보겠다는 태도였다.

나는 놈과 눈을 맞춘 채로 말을 이었다. 말하기까지가 어려웠지, 의외로 시작하니 술술 말할 수 있었다.

“그때 마트에서 나 붙잡은 건 연예계 마약 스캔들 들은 거 귀띔해주려고 그런 거였고.”

“…….”

“걔도 걔 인생 잘 사는 중이고, 나한테 더는 관심 없어. 나도 그렇고.”

“…….”

“질투야 할 수 있다고 쳐도, 볼 때마다 그런 식으로 경계할 필요 없다고. 난 다 지난 이야기 갖고 너랑 싸우기 싫어. 의미도 없고. 그래서 너한테도 굳이 안 물어보는 거야.”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솔직한 마음으로는 이지훈이 왜 이러는지 이해는 한다. 당장 나조차 지금까지도 떡볶이집에서 건너편에 앉은 이지훈이 아무렇지 않게 여자친구의 이름을 툭 꺼내던 순간 느꼈던 감정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물론 그때의 나는 그걸 질투라고 부르기조차 꺼렸지만, 조금 더 크고 나서야 그때 느낀 상실감도 질투의 한 종류일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됐다. 그렇지만 그때 이지훈이 만났던 사람들을 부러워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이미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고, 서로 다시 보지 않기로 결정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서로의 인생을 지나쳐 걸음을 옮긴 이들을 이렇게 계속해서 이야기로 끌고 들어오는 것부터가 그들을 존중하지 않는 행위다. 막말로, 현우는 우리가 저를 두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 모를 텐데.

이지훈은 내 말을 곱씹어보는 것처럼 한동안 말이 없었다. 생각이 끝났는지 들고만 있던 오징어를 쟁반 위로 툭 내려놓는 놈을 가만히 응시했다. 눈이 마주친 놈이 흐음, 하고 말끝을 늘였다.

“그러니까 네 말은… 시답잖은 질투는 넣어두고 앞으로 존나게 나아가자?”

“…존나게일 것까지는.”

“어쨌든 요지는 그거 아냐.”

“그래. 이 김에 확실히 하고 넘어가고 싶어서 말하는 거야.”

“하아….”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에 철푸덕 등을 기댄 이지훈이 머리를 뒤로 젖혔다. 쓰고 있던 후드 모자가 조금 흘러내리며 결 좋은 머리카락을 노출했다. 하늘을 바라보던 놈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존나게 쿨해서 좋겠다, 지선욱….”

“무슨….”

“나는 속이 밴댕이 소갈딱지라 로딩이 좀 걸리니까 네가 이해해라.”

“…….”

“아니다. 그냥 견뎌. 네 애인 네가 안 견디면 누가 견디냐.”

말투는 푸념 같은데, 내용은 뻔뻔한 요구였다. 내 반응을 살피듯 고개를 돌린 놈과 눈이 마주쳤다. 얼핏 복잡하게까지 보이던 이지훈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몸을 일으켜 앉은 놈이 내게 상체를 기울였다.

“야, 그럼 이렇게 하자.”

뒷말은 아직 듣지도 않았는데 순간 불안함부터 들었다. 저런 표정을 지은 놈에게 넘어가서 내가 내 무덤을 판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놈이 붙잡은 팔을 슬쩍 빼며, 최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물었다.

“…뭔데.”

“다른 건 다 괜찮으니까.”

“…….”

“우리 와인 셀러만 좀 바꾸자.”

뜬금없는 말이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본 이지훈이 간단명료하게도 설명했다.

“그것도 네 전남친이 광고하더라. 하필 같은 모델이기까지 해서 거슬려.”

입이 절로 다물렸다. 웬만하면 그러자고 해주고 싶은데, 하필 그게 놈이 뭘 사든 신경 쓰지 않던 나조차 기억하는 가구라는 점에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거 산 지 한 달 되지 않았냐?”

이지훈이 눈썹을 휙 들어 올렸다.

“그래서 뭐.”

띠꺼운 말투였다. 불량한 시선을 직선으로 마주한 순간 반박하려는 의지마저 사라졌다. 난 한숨을 쉬며 이마를 긁었다.

“…그래. 그럼 지금 건 강영수 주든지.”

그러고 보니 강영수가 집에 올 때마다 탐냈던 것 같기도 하고. 강영수네 회사에서 초기 제품이 리콜을 당한 후 유일하게 취급하지 않는 가전제품이라고 들었다.

이지훈도 이견 없다는 듯 더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강영수의 의사도 묻지 않고 얼렁뚱땅 그렇게 정해졌다. 한결 후련해진 표정으로 땅콩을 까는 이지훈을 보다가 문득 불안해져서 물었다.

“너 혹시….”

내가 집에 들어온 이후, 가구를 새걸로 바꾸는 것에 재미라도 붙인 것같이 굴던 행동의 기저에 혹시 이런 터무니없는 유치한 질투가 깔려 있었는지를 돌아보게 됐다. 그러고 보니 텔레비전도, 공기청정기도, 심지어 에어컨까지도 차근차근 바뀌었었지. 그중 현우가 방금 광고했던 전자제품 브랜드는 하나도 없음을 떠올린 순간 제발 아니길 바라는 가정이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지훈의 입으로 확인받으면 한층 더 머리가 아플 것 같았기에 그냥 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아니다.”

이지훈은 더 묻지 않고 방금 깐 땅콩을 내 입으로 들이밀었다. 싫은 티를 냈지만, 오늘 치 견과류를 챙겨 먹었냐며 진지하게 묻는 놈 때문에 입을 벌려야만 했다. 그렇게 땅콩을 세 개쯤 더 씹었을 때 강영수가 나타났다.

하필 이지훈이 내가 베어 물다 만 땅콩을 제 입으로 자연스레 가져간 순간이었다. 강영수를 보자마자 황급히 붙은 몸부터 떨어뜨렸지만 나와 이지훈을 번갈아 살피는 강영수는 이미 모든 걸 본 눈치였다. 놈이 음산하게 중얼댔다.

“…콩 한 쪽도 나눠 먹으니까 맛있니?”

“아… 왔냐? 못 봤다. 미안.”

“웅!”

어떻게 이렇게 손발이 안 맞을 수가. 눈치라고는 갖다 판 것처럼 외치는 이지훈을 막막하게 응시한 것과 동시에, 강영수가 플라스틱 의자 위에 푹 주저앉았다. 복도를 뛰어갈 때부터 쥐어뜯던 머리칼이 삐죽삐죽 서 있긴 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는 멀쩡한 꼴이었다. 물론 표정은 본 적 없이 심각했지만.

나는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이지훈에게서 아예 등을 돌려 강영수를 봤다. 솔직히 자신은 없지만, 어떻게든 설명해볼 요량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잠깐만.”

강영수가 말을 끊은 건 의외였다. 더 말하지 말라는 듯 내게 손바닥을 들어 보인 놈의 시선은 이지훈에게 박혀 있었다.

“나 선욱이 네 이야기 듣기 전에 이 새끼한테 뭐 좀 물어보고.”

결연하게까지 느껴지는 태도였다.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둘을 번갈아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시선이 몰린 걸 눈치챘는지 땅콩 까기에 한창이던 이지훈이 고개를 들었다. 어딘가 비장한 표정의 강영수를 확인하고서도 놈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랄 게 없었다. 마치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이. 도발을 받아들이듯 강영수가 입을 열었다.

“나 지금 진짜 진심으로 묻는 거다. 너 혹시 장난친 거면 지금이 만회할 마지막 기회라고.”

“…….”

“…….”

“진짜 선욱이랑 사귀는 거야? 정말 진지하게?”

이렇게 웃음기 쫙 뺀 얼굴의 강영수를 보는 일은 드물었다. 놈이 거듭 강조하며 꺼내는 말이 아니라도 이 순간 누구보다 진지하게 묻고 있는 것임을 모를 수 없었다.

그걸 아는 것처럼 잠깐 침묵하던 이지훈이 접시 위로 손을 털었다. 손에 묻은 땅콩 껍질이 나풀나풀 떨어졌다. 이지훈이 쓰고 있던 후드 모자를 벗고는 의자를 테이블로 조금 더 당겼다. 반대편에 앉은 강영수와 대화할 의지가 있음을 보여주는 동작이었다. 강영수와 눈을 맞춘 이지훈이 덤덤하게 뱉었다.

“어. 진지해.”

강영수는 잠깐 움찔했지만, 금세 표정을 정돈했다. 미리 준비라도 해둔 것 같은 질문이 곧바로 이어졌다.

“너 남자 만난 적 없잖아. 관심도 없고.”

“어.”

“…선욱이도 남자잖아.”

“어. 근데 얜 지선욱이잖아.”

“…….”

“내 인생에 남자라곤 얘가 처음이자 끝이야.”

이지훈과 대화를 시작한 후 처음으로 강영수의 시선이 내게로 돌아왔다. 꼭 아까 집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얘 말이 맞아? 물으며 확인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번에는 아까처럼 망설이지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훈이 방금 뱉어낸 말에 볼이 화끈대는 듯했지만, 그럼에도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건 알고 있으니까.

“허….”

허탈한 신음을 뱉은 강영수가 어깨를 아래로 툭 내렸다. 탈진한 것처럼 의자에 늘어진 놈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해 보였다. 방금 이지훈과 나에게 직접 우리가 사귄다는 사실을 확인받았음에도, 눈으로 보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아니, 무슨… 정말… 무슨 예고도 없이.”

“…….”

“…….”

“물론 예고가 있었어도 이상했겠지만. 야, 드라마면 이렇게 예고 주고 본편 방영해도 욕 처먹어. 알아? 어? 냅다 키스 신부터 던지는 게 어딨어.”

“…….”

“…….”

“아, 나 골 울려. 막 눈 감을 때마다 너네가 뽀… 아오, 씨. 월요일에 회사 못 갈 것 같은데 어떡해? 책임져, 니네가. 어? 책임지라고오. 나의 이 정신적… 어? 배상하라고.”

“…와인 셀러 줄게.”

“그래. 니 그거에 환장하잖아.”

의자에 누운 채로 떼라도 쓰듯 온몸을 마구 흔들던 강영수가 고개를 슬그머니 들었다. 눈을 가늘게 좁힌 놈이 미심쩍게 물었다.

“…진짜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인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실눈을 뜨고 나와 이지훈을 한참 더 살피던 강영수가 느적느적 몸을 일으켜 앉았다.

“뭐 준다니 받기야 하겠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미안한데, 보면서도 안 믿겨. 너네가 미리 말해줬어도 아까 본 거 아니었으면 못 믿었을 거야. 이게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 맞긴 하냐? 꿈이 아니고?”

“…….”

“…….”

“대체 언제부터 사귄 건데? 아니, 언제부터 서로 좋아했냐고. 난 왜 하나도 몰랐어? 어?”

어디서부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나를 보고 있던 이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이지훈이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입술을 움직였다.

“그것까지는 네가 알 거 없고.”

놈의 검지가 입술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자마자 무언가가 툭 떨어지는 느낌이 드는 걸 보니 입술에 뭐가 묻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둘만 있을 때 해도 가끔은 어색한 행위인데, 강영수 앞이기까지 하니 배로 민망했다. 입술을 더듬으며 몸을 뒤로 물리고는 강영수를 힐끔 확인했다. 강영수는 역시나 입까지 헤 벌린 채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나보다는 이지훈을 보고 있다고 해야 옳겠지만. 이지훈 또한 강영수를 보고 있었다. 팔짱을 낀 놈은 더는 이렇게 두고 볼 수 없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 작년에 집 산 거 알지.”

그건 나도 알고 있었다. 이지훈과 말이 꽤 잘 통하던 까다로운 집주인이 매매를 내놓기 전 슬쩍 먼저 이지훈에게 살 의사가 있냐고 물어본 것으로 순조롭게 성사된 거래였다. 알기야 알지만, 여기서 갑자기 그 이야기가 왜 나오지?

의아한 건 강영수도 마찬가지인지 놈이 테이블에 엎드려 있던 걸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이지훈을 경계하듯 미심쩍은 표정으로 대꾸하는 놈을 지켜봤다. 나 또한 마찬가지의 표정을 하고서는.

“…그게 뭐.”

“그거 지선욱이랑 공동명의로 돌리려고.”

“뭐?”

“…뭐?”

강영수보다 내가 더 놀라서 대꾸했다. 태연한 건 이지훈뿐이었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놈은 흔들림이 없었다. 대체 언제부터 이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생각하고 있었을까를 그려보게 될 정도로.

“동성 혼인이 안 되는 나라에서 공동 재산을 소유하는 것만큼 확실한 게 어딨냐.”

모르는 것을 일러주듯 강영수에게 말한 놈이 다음으로는 내게 고개를 돌렸다.

“안 그래도 너한테 말하려고 했어. 조만간 부동산이랑 약속 잡을 거야. 인감도장 준비해놔.”

…제정신인가? 상의조차 해본 적 없던 일을 무슨 껍질 깐 땅콩 먹여주듯이 이렇게 덜렁 통보하다니.

“와… 저 새끼 진짜 진심인가 봐….”

그 말에 드디어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강영수가 더 황당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강영수가 퀭한 눈으로 중얼댔다.

“저 새끼 돈으로 절대 장난 안 치잖아….”

경악한 내 표정도, 허망한 강영수의 표정도 무시한 이지훈은 어깨를 으쓱했다. 빈 맥주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퍽 챙겨주는 척 강영수에게 묻기도 했다.

“맥주 먹을 거?”

“…오백 하나만.”

“어.”

“잠깐. 네가 쏨?”

“그래, 이 새끼야.”

“그럼 과일 화채 추가해주라. 김치 우동도! 치즈 계란말이도!”

등에다 대고 줄지어 외치는 강영수를 무시하며 이지훈이 가게 안으로 사라졌다. 볼로 따끔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강영수가 날 보며 입술만 달싹대고 있었다. 놈의 눈빛을 보니 이미 두 번이나 한 질문을 또 하고 싶은 것 같았다. ‘정말 이지훈이랑 사귀는 게 맞아?’라고.

어쩌면 강영수가 이 상황에서 이지훈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이 나일지도 몰랐다. 나는 놈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스무 살 때 네 앞에서 운 거….”

그 좁은 패스트푸드점의 풍경이 다시 한번 눈 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내가 자신의 입에서 나온 이지훈의 이름을 견디지 못하고 울었다는 것을 모른 채 단지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털어놓는 게 힘들었으리라고 추측했던 강영수. 놈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에 오히려 안심했던 나.

오는 내내 고민했던 것이 우스울 정도로, 강영수에게 이지훈과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가 명료해졌다. 첫 단추부터 새로 끼워야 한다. 그걸 내가 일부러 잘못 끼웠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이지훈 때문이었어.”

강영수는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말이 없다가, 이내 머뭇대며 물었다.

“…강릉 때도 그러면….”

놈에게도 내가 울었던 그 스무 살은 꽤 깊이 기억에 남았던 모양이다. 어렵지 않게 연결고리를 찾은 듯한 놈에게 확인해주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

“…….”

“그 후로도 계속 좋아했어, 내가.”

놀란 눈빛을 보면서 쐐기를 박듯 말했다.

“이지훈을.”

강영수의 표정이 느리게 변해갔다. 혼란스러움이 걷히고, 터질 듯 커졌던 눈이 제 크기로 돌아오고, 입꼬리의 방향이 바뀌는 모습을 빠지지 않고 응시했다. 목울대를 크게 넘긴 강영수가 물었다.

“나중에 자세히 말해줄 거지? 하이라이트 장면만 모아놓은 버전 말고, 본 방송 수준으로 길게.”

그건 어떤 방식으로든 나와 이지훈의 사랑을 이해해보겠다는 놈만의 표현이기도 했다. 나는 피식대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강영수는 그 말을 듣고서야 안심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근심 가득한 사람처럼 보였다.

“욱아.”

이상할 정도로 아련하게 부른다 싶더니, 역시나 강영수는 마치 무언가를 떠나보낼 때나 지을 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술 더 떠, 내 손까지 가져가 잡았다.

“난 네가 얼굴을 보는 건 알았지만….”

“…….”

“얼굴만 보는지는 몰랐다.”

남매는 남매인지, 영은이가 그때 레스토랑에서 날 보며 짓던 표정과 똑같았다. 세상에서 제일 고생하는 사람을 보는 듯한, 안쓰러움이 짙게 묻어나는 얼굴이 나를 이리저리 훑었다.

“어떡하려고 그러냐. 저 새끼는 친구로도 감당하기 힘든 성격인데….”

“…….”

“진짜 이런 말 너한테는 좀 너무할 수 있는데….”

“…….”

“너 좀 좆된 것 같다, 욱아… 어쩌다 저런 지독한 놈한테 꿰여서는….”

함께한 세월은 강영수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를 깨닫게 한다. 딱히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없는 게 머쓱할 뿐. 슬쩍 시선을 피하는 나를 본 강영수가 어흐흑 거짓 울음을 뱉으며 내 무릎에 엎드렸다.

“고작 저런 놈한테 주려고 곱게 키운 선욱 씨가 아닌데!”

그래도 선욱 씨니 뭐니, 하는 걸 보니 얼추 상태가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긴 했다. 무릎 위의 동그란 머리통을 바라보다 한숨을 쉬고는 앞에 놓인 유리 접시나 끌어왔다. 아까 이지훈이 내게 그랬듯, 땅콩이라도 까서 강영수한테 먹여줄 셈이었다. 그러나 땅콩은 강영수가 아닌 돌아온 이지훈의 입으로 들어갔다.

“일어나, 새꺄.”

한술 더 떠, 놈은 굳이 강영수와 내 사이로 플라스틱 의자를 끌고 와 앉기까지 했다. 이지훈이 넓은 맞은편 자리를 두고 굳이 좁은 공간을 파고드는 이유를 한 박자 늦게 눈치챈 강영수가 입을 떡 벌렸다.

“와… 님 설마 지금 애인 관리하겠다고 이 지랄 하는 거?”

“불만?”

“당연히 불만이지! 개어이없네. 선욱 씨가 네 거야?”

“어, 내 거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거니까, 만지려면 내 허락받아.”

“무슨…! 아니…!”

“그리고 말 잘했다. 너 이제 선욱 씨라고 부르는 것도 금지야.”

“뭐? 그건 왜!”

“애초에 선욱 씨라고 왜 부르기 시작했는데.”

“야이 씨. 그걸 어떻게 기억해! 그거 중딩 때 그냥….”

“지선욱 사위 취급하겠다고 부르기 시작했지?”

“…….”

“그걸 지선욱의 현 애인이자 미래 남편인 내가 들으면 기분이 나쁘겠지?”

이렇게 말할 기회만을 기다린 것 같은 말투였다. 말문이 막힌 표정의 강영수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나도 비슷한 상태였기에 도움은 안 됐다. 아주 오래된 호칭을 갖고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몰랐어서. 강영수는 한참 입을 뻐끔대더니, 이내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이지훈을 마구 손가락질하며 고함쳤다.

“…와, 욱아. 이 새끼 진짜 미쳤나 봐!”

동조를 바라는 듯한 놈의 시선에 나도 모르게 이지훈의 눈치부터 힐끔 확인했다. 타이밍 좋게 안주가 줄줄이 나왔다. 동그란 테이블 위가 강영수가 시켜달라고 주문한 메뉴들로 가득 찼다.

“한 번 익혀서 나온 거니까 조금만 더 끓이다가 드시면 돼요.”

“네, 감사합니다.”

휴대용 가스버너를 켜는 이지훈을 보고는 슬쩍 몸을 뒤로 빼서 강영수의 어깨를 툭 쳤다. 오래된 친구라도 뺏긴 얼굴로 눈물을 글썽대는 놈을 달래줄 셈이었다. 일단 이 상황을 넘긴 후 나중에 얘기하자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어차피 선욱 씨라고 부르는 거든 뭐든 장난은 둘만 있을 때도 충분히 칠 수 있으니까.

내 의도를 알아챈 것처럼 희망찬 표정을 짓는 강영수와 눈을 맞출 수 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래. 둘이 그렇게 내 뒤에서 작당해 봐, 한번.”

뜨끔해서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럽게 말을 걸어 심장을 철렁하게 한 이지훈은 여전히 가스버너의 스위치 레버를 조작하듯 돌리고 있었다. 그 행위에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오히려 더 섬뜩했다. 그러면서도 등 뒤로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거니까.

“선욱이 넌 누구랑 시간을 더 많이 보내는지도 잘 생각해보고. 다 놀고 쟤는 집에 가지만, 나는 집에 안 가.”

나는 뒤로 빼고 있던 몸부터 제자리로 했다. 선욱아… 애타게 부르는 강영수의 시선은 애써 무시했다. 일단 나부터 살아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구해줄 수도 있는 거고.

김치 우동, 치즈 계란말이, 심지어 과일 화채까지 깔끔히 해치웠다. 심란해서 저녁을 걸렀다던 강영수가 특히나 잘 먹었다.

“아… 맛있었다.”

젓가락을 내려놓자마자 의자에 등을 기대는 놈의 얼굴은 만족스럽다 못해 편해 보이기까지 했다. 옆의 편의점에서 사 온 쭈쭈바를 빨던 놈이 급작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빈 막대를 테이블 위로 툭 던지던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잠깐 갈등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지훈이 있는 쪽이었다. 핸드폰으로 야구 경기를 보고 있던 이지훈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 때까지 집요한 시선이 이어졌다. 이지훈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툭 던졌다.

“뭐.”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도 될지 모르겠어서.”

“그럼 묻지 마.”

“아아! 근데 진짜 안 물으면 계속 생각날 것 같다고.”

“그건 네 사정이고.”

“아이 씨….”

강영수가 투덜대면서도 말을 어물어물 삼켰다. 그러면서도 우물쭈물 계속해서 우리의 눈치를 살피는 걸 보니, 포기하기 힘들 정도로 궁금한 게 있긴 한 모양이었다. 슬쩍 이지훈을 봤지만 놈은 이미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린 후였다. 관심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이지훈 대신 물잔을 끌어오던 내가 물꼬를 트듯 물었다.

“뭔데.”

기회를 얻고서도 밍기적대던 강영수가, 머뭇대며 물었다.

“너네 정말 사귀는 거면… 그… 섹… 섹스도 하는 거야?”

“푸흡-”

순간 사레가 들릴 뻔했다. 겨우 고개를 돌려 강영수의 얼굴에 물을 뿜는 참사는 피했지만, 그러고서도 잠깐은 바닥에 시선을 둔 채로 멈춰 있어야 했다. 이지훈도 나만큼이나 당황했는지 조그맣게 들려오던 야구 중계 소리마저 뚝 멈췄다.

누구 하나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정적을 뚫은 건 이지훈의 말소리였다.

“예, 이모.”

더 정확히는 누군가와 통화하는 듯한 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건너편에 앉은 강영수 또한 이지훈을 보고 있었다. 우리는 잠깐 시선을 교환했다. 설마, 하는 표정으로. 그러나 핸드폰을 쥔 이지훈이 말을 이어가는 모습은 연기라기에는 지나치게 매끄러웠다.

“저녁 드셨어요? 알죠, 이모 오늘 저녁 쉬는 거. 알고 전화했지. 네. 저도 먹었어요. 네, 영수랑 같이요. 영수한테 아까 전화했는데 안 받았다고요? 그니까, 맞아요. 아들 새끼 키워 봤자 소용없어.”

애초에 이지훈이 이모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그녀밖에 없긴 했지만, 그럼에도 놈이 정말 강영수의 어머니와 통화 중임을 눈치채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하필 강영수가 그런 질문을 한 뒤에. 불안한 건 나뿐만이 아닌지 강영수가 이지훈에게 팔을 뻗었다.

“뭐야, 너 진짜 우리 엄마한테 전화했어? 이 미친 새끼가! 또 뭘 이르려고!”

핸드폰을 뺏으려는 것처럼 달려드는 강영수를 한 손으로 가볍게 제압한 이지훈은 계속해서 통화를 이어갔다. 오히려 갈수록 목소리가 커지는 것 같기도 했다.

“안 그래도 영수 이야기하려 전화했는데. 예. 딴 건 아니고, 영수가 저한테 갑자기 애인이랑 성생활에 관해서 묻더라고요.”

이지훈의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던 것조차 멈춘 강영수가 입을 떡 벌렸다.

“모르겠어요. 왜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 건지. 여태까지는 그런 적 없었으면서.”

“…….”

“…….”

“그니까요. 이모가 아들을 그렇게 키우지 않았는데. 아무리 친해도 그렇지. 할 질문이 있고, 안 할 질문이 있는데. 그렇죠?”

이지훈이 강영수를 똑바로 올려보면서 또박또박 뱉는 말들에는 가시가 있었다.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공격당한 강영수는 멍해 보였다.

“아, 바꿔 달라고요? 영수한테 직접 한 소리 하시겠다고요? 아니에요. 저희 지금 밖이라서 막 소리 지르셔도 돼요. 네, 이모. 그래도 너무 혼내지는 마시고요. 저도 잘 타이를게요.”

핸드폰을 귀에서 뗀 이지훈이 빙긋 웃었다. 강영수에게 통화를 넘겨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여간, 저 또라이 새끼….”

아랫입술을 물며 이지훈을 잠깐 노려보던 강영수가 핸드폰을 낚아채듯이 쥐었다. 귀에 핸드폰을 가져다 대는 얼굴이 벌써 쫄아 있었다.

“아… 아니, 엄마, 내가 그러려고 한 게 아니고….”

강영수의 어머님이 진짜 혼이라도 내기 시작하신 건지 핸드폰 밖으로까지 쩌렁쩌렁 소리가 흘러나왔다. 잔뜩 기죽은 강영수가 테이블에서는 조금 떨어진 전봇대로 걸어가 쪼그려 앉는 것까지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우리도 전화 한 통 때릴까?”

핸드폰도 강영수한테 줘 놓고는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이지훈의 손에 또 다른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그게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내 핸드폰임을 안 순간에는 헛웃음부터 튀어나갔다. 놈이 키패드를 누른 것과 동시에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둔 새 핸드폰이 진동했다. 테이블에 한쪽 팔을 올린 채로 턱을 괸 이지훈이 능글맞게 눈짓했다. 받으라는 듯이.

나는 강영수가 여전히 통화 중임을 한 번 더 확인하고서야 핸드폰을 쥐었다. 혹시 몰라서 갖고 나온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며.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이지훈이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이 핸드폰으로 통화하는 건 처음이었다. 통화하는 상대방의 얼굴을 실시간으로 바라보는 것 또한.

-이지훈 애인 핸드폰 맞아요?

나랑 통화할 때 이지훈은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보조개가 보일 정도로 환히 웃으며, 핸드폰을 꼭 쥐고서는.

이지훈과의 연애는 겪어도 겪어도 도통 익숙해질 수가 없다. 매 순간 색다른 방식으로 생소한 감정을 느끼곤 하니까. 내가 이지훈의 목소리 하나에, 표정 하나에 순식간에 찬물과 더운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가는 기분이다.

어쩌면 이지훈도 그럴까.

‘어. 근데 얜 지선욱이잖아.’

‘…….’

‘내 인생에 남자라곤 얘가 처음이자 끝이야.’

이지훈이 꺼낸 그 말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하겠지. 확신이 없으면 뱉지도 않는 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정의 내린 관계 안에서 영영 그 말을 곱씹을 것이다.

나는 이지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핸드폰을 쥔 놈의 표정을 따라 하듯이 웃는 순간조차도.

“…네. 맞아요.”

어쩌다 보니 반지는 선수를 뺏겼지만, 다음 기회는 놓치지 않을 것이다. 핸드폰을 내밀었을 때 보았던 이지훈의 표정을 더 자주 보고 싶었다. 앞으로도 내게 그럴 기회와 시간이 충분하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너 근데 아파트 그건 그냥 영수 설득하려고 한 얘기지?”

-분위기 깨는 거 보니 제 애인 맞네요.

“장난치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

-경찰처럼 구는 걸 보니 제 애인이 확실합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우리 아파트 주차장 들어오려면 세대원이 문 열어줘야 하지 않냐? 너 아까 강영수 올라오는 거 진짜 못 봤어?”

이지훈이 말없이 귀에서 핸드폰을 뗐다. 전화가 뚝 끊겼다. 슬쩍 내 눈치를 보기도 잠시, 이지훈이 몸을 가까이했다. 핸드폰을 든 내 손을 감싸 아래로 잡아 내리더니, 볼에 짧게 입술을 붙였다. 몸을 돌리다 엉겁결에 이 꼴을 보게 된 강영수가 입을 멍하니 벌리는 게 보였다. 눈이 터질 듯이 커진 놈이 우리를 삿대질했다. 그래 봤자 이를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도.

“와, 진짜 미친 거 아냐?! 아, 아니… 엄마한테 한 말이 아니구우… 아악! 엄마는 진짜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한테만 그래!”

머리를 쥐어뜯는 놈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자기야, 나 사랑하지?”

은근하게 속삭인 이지훈이 내 입술에 검지를 붙였다. 멈칫한 내게서 답을 읽은 것처럼 놈이 눈을 휘어 웃었다. 마치 애교라도 부리는 듯한 말투와는 달리 태도가 뻔뻔했다.

“그럼 모른 척해.”

어이없는 웃음이 터졌다. 아주 지독한 놈에게 걸린 거 아니냐는 강영수의 걱정 어린 말을 떠올리면서도, 동시에 그 지독함마저 알고 사랑하지 않았나 사실관계부터 확인하는 내가 우스워서. 그러니까, 아주 지독한 놈한테 제대로 걸렸음을 깨닫는 순간마저 괜찮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오토바이 한 대가 우리가 앉은 야외 테이블 옆의 도로를 쌩하니 지나갔다. 그 요란한 소리를 듣다 보니 일 년 전, 비슷한 배경 속에서 서로를 보고 있던 우리가 떠올랐다. 거실의 창을 통해 들어온 바람이 이지훈의 머리를 헤집는 걸 보며, 이렇게 놈을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감하던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로부터 고작 일 년이 지났을 뿐인데, 나는 가을바람이 이지훈의 머리를 헝크는 걸 보며 정반대의 생각을 한다. 앞으로도 이렇게 놈이 내 앞에서 맨살을 드러내는 순간을 마음껏 지켜볼 수 있을 거라고. 이런 당연한 일상을 사랑하게 되는 건, 이지훈과 함께 있기 때문일 거라고. 지금 내가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놈을 응시하는 건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며 아무것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라고.

손을 들어 보조개가 드러난 이지훈의 볼을 쥐었다. 이지훈의 머리 위로 후드 모자를 씌워 끌어당기며, 내가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사랑한다고 말했다.

“모른 척해줄 수 있을 정도로만 까불어. 알았냐.”

파란 플라스틱 의자 밑에서 달랑대는 손 두 개가 붙어 있었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듯 손을 꽉 쥘 때마다 걸리는 건 반지가 아닌 사랑임을 깨달으면서.

<5x5(파이브 바이 파이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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