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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 : 이 다시 오 (24/25)

외전 2 : 이 다시 오

강영수는 여행 전날 밤부터 집에 쳐들어왔다. 설레서 잠이 안 온다는 이유를 대고서. 아예 짐을 챙겨 출근해서 퇴근하자마자 바로 우리 집으로 왔다던 놈의 목에는 바람까지 빵빵하게 찬 튜브가 걸려 있었다. 아직도 놈의 목에 회사 출입증이 걸려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질적이기 짝이 없는 풍경이었다. 설마 회사에서 튜브에 바람을 넣진 않았겠지 하는 두려움이 들 정도로.

“잠자리채도 가져오지, 왜.”

문가에 선 이지훈이 비아냥대거나 말거나, 해맑은 표정의 강영수는 가볍게 튕겨냈다.

“아이, 잠자리채로는 물에 들어가도 입만 동동 뜰 지훈 씨를 구해주질 못 하잖아용.”

그런 시비에 대응하기에는 너무나 신난 것처럼 보였다.

며칠 전부터 단체채팅방을 갖가지의 이모티콘으로 도배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강영수는 이렇게 셋이 여행을 간다는 것 자체가 퍽 설레는 모양이었다. 셋이 마지막으로 여행을 갔었던 게 십 년 전이고, 그마저도 제대로 된 여행을 하지 못했던 걸 생각하면 그럴 법도 했다. 그에 대한 책임이 있는 나와 이지훈은 일단 놈이 하자는 대로 따르고 있었다. 최근 들어 부쩍 쳐들어오는 횟수가 잦은 강영수 때문에 이지훈의 인내심이 슬슬 한계치에 다다른 것 같긴 했지만.

“저, 씨발….”

나는 주머니에 양손을 넣은 껄렁한 자세 그대로 강영수의 등이라도 걷어차려는 듯이 발을 들어 올리는 놈의 팔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 표정을 본 이지훈이 이를 악물면서도 다리를 내렸다. 강영수는 이지훈이 제 등 뒤에서 뭘 하고 있는지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제가 가져온 짐을 하나둘 테이블 위로 풀어놓는 중이었다. 주의를 집중시키듯 짝! 소리 날 정도로 손뼉을 친 놈이 우리를 돌아봤다.

“준비물 다 챙겼는지 같이 확인하자. 자, 스킨로션이랑, 갈아입을 옷이랑, 일회용 카메라랑… 아, 맞다. 너네 수영복은 챙겼어?”

멈칫한 우리를 확인한 강영수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무언가를 허공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럴 줄 알고 내가 너네들 것도 사 왔지! 형이 최고지, 얘들아? 개짱이지?”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놈의 손에 들린 건 남성용 수영복이었다. 같은 모양에 색만 달라 보였다. 심하게 짧아 보이는 수영복 기장을 차치하고서라도, 저걸 셋이 똑같이 맞춰 입을 생각을 했다는 것부터가 강영수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짓이었다. 말문이 막힌 나와 달리, 이지훈은 단단히 끼고 있던 팔짱을 푼 채로 걸음을 옮겼다. 털썩 앉은 놈이 소파 아래에 앉아 있는 강영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야, 줘 봐.”

건네받은 수영복을 찬찬히 살펴보던 이지훈이 그중 하나를 들어 내게 흔들어 보였다. 형광으로 빛나는 노란색 수영복이 허공에서 팔랑댔다. 이래도 참을래? 하는 이지훈의 표정을 가까스로 무시한 나는 목부터 가다듬었다. 저 수영복을 입기 싫으면 물에 들어갈 일부터 없애면 된다. 다행히도 강영수를 구슬릴 시간은 충분했다.

“…수영할 시간이 있나? 너 그때 말했던 계획대로 움직이려면 바쁠 것 같은데.”

“어차피 여름이라 해 긴데, 뭐. 거기 앞에 바다 되게 예뻐. 안 가면 너무 아깝지. 왜? 욱이 너 아직 물에 들어가면 안 된대?”

“아니… 그건 아닌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놈 때문에 나도 모르게 솔직히 뱉었다. 반짝 밝아지는 강영수의 표정을 보자마자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지만.

“그럼 됐네! 야, 욱아, 이럴 때 좋은 몸 보여주지 언제 보여주냐? 내가 너면 출발할 때부터 벗고 있는다.”

나도 모르게 이지훈의 표정을 살폈다. 여전히 수영복을 쥔 놈은 내가 아닌 강영수를 보고 있었다. 불안함을 느끼기가 무섭게 이지훈이 강영수의 등을 쿡 찌르며 질문했다. 표정이 태연했다.

“지선욱 몸 좋아?”

“개좋지.”

“넌 그걸 어떻게 아는데?”

“왜 몰라? 옷 위로 대충 만져만 봐도 알겠구만.”

심드렁히 대꾸한 강영수가 앞의 카메라를 집더니 내 쪽으로 들이밀었다. 욱아, 브이 해, 브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는데도 플래시가 터졌다. 얼떨결에 감은 눈을 뜨다가, 나를 빤히 보고 있던 이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오묘한 표정으로, 놈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래? 옷 위로 안 만져 봐서 몰랐네.”

예전이었으면 그냥 넘겼을 말을 이젠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어떻게 보면 틀린 말도 아니고, 강영수가 등장하기 전까지 내 옷 안에 손을 넣고 주물럭대던 놈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기회만 있으면 강영수에게 커밍아웃하려 틈을 보는 놈이 저렇게 말하는 건 심사가 단단히 꼬였다는 뜻이었다. 나는 헛기침하며 놈의 시선을 피했다. 어째 시작부터 쉬운 여행이 될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맞긴 한가 봐. 느낌이 아예 다르다. 그치.”

마을 어귀에 들어서던 순간부터 쉴 새 없이 주변을 살피던 강영수가 가장 먼저 한 말이었다. 강영수의 말 그대로였다. 십 년 전에 분명 와보았던 곳인데, 길고 긴 숲을 지나자마자 보이는 거대한 꽃나무를 제외하고는 그때와 별로 겹쳐 보이는 곳들이 없었다. 몇 해 전부터 해수욕장이 개방되어 서핑이며 해상 스포츠를 즐기는 젊은 사람들이 늘었다는 강영수의 설명답게, 펜션들이 쭉 늘어선 입구부터 수영복만 걸친 젊은 남녀들이 오가는 게 보였다.

강영수가 이번에 잡은 숙소는 십 년 전 우리가 묵었던 숙소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가능하다면 추억도 살릴 겸 예전의 그 집으로 예약하겠다던 강영수는 동기와의 통화 후 동기의 할머님이 펜션 사업을 접어 그곳이 작은 마트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아쉬운 표정으로 전했다. 그 말을 듣던 이지훈의 표정을 생각했다. 음식 해 먹기 귀찮게 뭔 펜션이냐며, 여행 이야기가 나온 순간부터 호텔에서 묵길 주장하던 놈이 숙소 위치를 듣고서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던 것도.

‘욱이 너도 괜찮지?’

내가 그렇다고 말한 순간 당장 예약하려는 것처럼 핸드폰을 들고 묻는 강영수의 눈빛을 마주하면서도 건너편에 앉은 이지훈의 시선이 내 옆얼굴로 꽂히고 있다는 걸 느꼈다. 사실 구미가 당기는 일은 아니었다. 스무 살 강릉에서 있었던 일이 이후 우리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생각해보면.

그러나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훈이 괜찮으면, 나도 괜찮아야지 생각하면서. 상자 안의 물건을 하나둘 같이 들춰보며 추억을 내놓던 우리가 깨달은 게 있다면 모른 척 덮어둔다고 해서 저절로 해결되는 건 없다는 거니까. 때로는 같이 들여다보며 풀어야 하는 꾸러미가 있는 거고, 이지훈은 이 또한 그 꾸러미 중 하나라고 생각한 걸 테다.

상자 안에 있는 수많은 물건 중에, 강릉에서의 추억을 담은 물건은 없었다. 추억을 쌓을 시간조차 없었던 기억이어서 그랬다. 추억을 불어넣을 형체가 없어서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에야 그건 직접 부딪치지 않고 외면하기 위해서 댄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지만.

“지선욱, 자갈 안 밟게 조심해.”

상자를 겹쳐 든 이지훈의 뒤를 따라 걷다 말고 멈췄다. 복층으로 된 숙소는 빛이 잘 들었다. 처음에는 바다를 향해 나 있는 커다란 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빛은 천장에서부터 흐르고 있었다. 더 정확히는 하늘을 향해 뚫려 있는 창으로부터였다.

“밤에 하늘 죽이겠다.”

고개를 돌렸다. 짐을 놓고 다가온 이지훈이 나처럼 천장을 보고 있었다. 놈의 말에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멈칫했다. 이지훈의 손이 내 허리 주변을 자연스럽게도 감싸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주변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강영수는 숙소 안에 없었다. 아까 온수 관련하여 집주인에게 물을 게 있다고 핸드폰을 찾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래 봐야 몇 분 뒤에는 돌아올 것이다. 판단을 끝낸 나는 이지훈의 손을 서둘러 밀어냈다.

“…아, 하지 마.”

밀어낸 보람도 없이 손이 또 한 번 철썩 허리에 붙었다. 이번에는 한술 더 떠 허리선을 따라 슬슬 문질러대기까지 했다. 손을 떼어내려고 힘을 줬더니 그 반동을 이용해 깍지까지 껴온다. 어이없는 시선을 받고서도 윙크를 돌려주는 걸 보니 점잖게 떼어내기는 글렀다. 나는 이지훈의 뒤로 보이는 현관문을 눈짓하며 소리를 죽여 경고했다.

“이러다 강영수 온다고.”

“오면 뭐. 그 새끼가 봐 봤자 오해나 하겠냐?”

“아니, 그래도….”

“‘선욱 씨, 저는 반대편에 서면 될까용?’ 이러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또 시작이었다. 나야 어떻게 우리의 관계에 대해 운을 떼어야 할지 몰라서 미루고 있다지만, 이지훈은 정반대의 이유로 강영수한테 커밍아웃을 못 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대놓고 사귄다는 티를 내는데 강영수가 알아채지 못해 커밍아웃이 지연되는 상황이었다.

가끔 보면 창과 방패의 대결 같다고 느껴졌다. 특히 근래의 이지훈은 제법 약이 오른 것 같았다. 집에 놀러 온 강영수가 안방의 침대 위에 왜 베개가 두 개나 있냐며 물었을 때, 왜일 것 같냐고 기회라도 주듯 말한 것이 시초였다. 방을 천천히 둘러보던 강영수는 에어컨을 가리키며 ‘아아… 에어컨이 이 방에만 있어서 같이 자는구나? 하긴 여름이니까. 어차피 침대도 넓네, 뭐.’라고 납득이 될 만한 이유를 기가 막히게 찾아냈다. 룰루랄라 방을 나가는 강영수를 끝까지 노려보던 이지훈이 내게 고개를 기울여 읊조리듯 말했다.

‘저 새끼 저 정도면 동성애에 편견 있는 거 아니냐?’

‘…쟤 내가 게이인 줄 안다니까.’

‘그럼 나한테 편견이 있는 거든가.’

‘…….’

‘나 이쯤 되니까 진짜 오기 생기는데.’

‘…오기가 생길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된 이상, 어디 한번 끝까지 가보자. 무슨 수를 써서든, 저 새끼 입으로 직접 인정하는 말 듣고 만다. 내가.’

이지훈이 고집부릴 때의 표정이었다. 오기가 생겼다는 말을 증명하듯 눈이 활활 불타오르는 걸 보니 말려 봤자 소용도 없을 거 같았다. 더 말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을 뿐인데, 그 후로 종종 오기와 무지가 격돌하는 꼴을 관람하게 됐다. 가끔은 이건 아니다 싶어 강영수를 붙잡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내 볼까 싶다가도, 이지훈이 던져대는 직구를 튕겨내다 못해 바닥으로 처박는 놈을 볼 때면 놈에겐 우리가 사귀리라는 가정이 고려할 가치조차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처럼 들리는 건가 싶어 입이 절로 다물렸다.

“너 선크림 발랐어?”

코끝을 툭 건드리는 손길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이지훈이 눈으로 내 얼굴 곳곳을 살피고 있었다. 선크림을 발랐는지 눈으로라도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나는 턱을 긁으며 놈의 시선을 어물쩍 피했다.

“뭐….”

추궁하듯 묻는 말투를 보니 혼낼 것 같은데, 방어할 말이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이지훈은 이미 대답을 눈치챈 것처럼 한숨을 쉬더니, 소파에 던져둔 짐가방으로 몸을 숙였다. 돌아본 놈의 손에 선크림이 들려 있었다. 내가 가져온 것일 리는 없고, 따로 챙겨 온 모양이었다. 선크림 뚜껑을 여는 놈을 보다 주저하면서 입을 열었다.

“바다에 그렇게 오래 나가 있을 것도 아닌데 굳이 꼭….”

“어. 굳이 발라야 해. 오늘 햇빛 너무 세.”

“…찝찝할 것 같은데.”

“한 번 찝찝할래, 아니면 내내 후회할래.”

잠깐 대답을 망설인 새에 이지훈이 선크림 통을 쭉 짰다. 손가락 한 마디도 넘을 만큼 넉넉하게 짠 선크림 양을 본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엄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놈이 당장이라도 그걸 내 얼굴에 문질러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고개를 뒤로 빼며 손등을 내밀었다.

“아… 알았어. 손에 줘, 그럼. 내가 바를게.”

“뭐 하러? 발라준다니까.”

“누가 그래 달래? 오버하지 말고 그냥 줘, 빨리.”

“어허.”

“…….”

“남친의 특권이야.”

어떻게 저런 낯간지러운 소리를 안색 하나 안 바뀌고 하는지 봐도 봐도 신기했다. 동거하면서 내가 말문이 막혀 멈춘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이용하는 방법까지 깨닫게 된 놈을 이기는 건 어려웠다. 지금도 놈을 잠깐 멍하게 본 것뿐인데 정신을 차리니 양 볼이 잡혀 있었다. 선크림을 덜어뒀던 손가락 위가 어느새 휑했다. 양 볼에 크림을 치덕치덕 바르는 손길이 느껴졌다. 뒤늦게나마 탈출을 시도했지만, 놈의 단단한 손아귀에 목덜미까지 잡히게 되었을 뿐이다. 도리어 얼굴이 한층 더 가까워졌다. 처음에만 해도 장난을 치는 것처럼 실실 웃던 이지훈은 이제 꽤 집중한 얼굴로 내 얼굴에 선크림을 발라대고 있었다. 엄지가 내 볼 위를 둥글게 덧그리듯 매만졌다.

“얼굴도 하얀 놈이 겁도 없이… 밤새 화끈거려서 잠 못 자려고 작정했지.”

핀잔을 던진 이지훈이 나를 더 잘 보려는 것처럼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선크림을 피부에 흡수시키는 행위에 집중한 놈의 입술 새가 슬쩍 벌어졌다. 그 사이로 보이는 분홍색 혀를 본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볼부터 펴 바르기 시작하던 손길이 이마, 눈 위, 콧등까지 죽죽 나아갔다. 적당한 세기로 문지르는 손길은 세심했고 부드러웠다. 어느새 놈의 손은 턱 끝을 쥐고 있었다. 다음은 그 아래의 목이었다. 손에 남아 있는 잔량의 선크림으로 목을 가볍게 훑던 손이 별안간 멈췄다. 훔쳐보던 걸 들켰나 싶어서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어쩌면 놈을 지켜보며 끊임없이 목울대를 움직인 것을 눈치챈 걸 수도 있었다. 최대한 숨을 죽인 채로 눈을 들자마자 시선이 마주쳤다.

“…….”

“…….”

지척에서 이지훈의 속눈썹이 느리게 팔랑이는 게 보였다. 그 아래의 눈이 집중하고 있는 게 더는 선크림을 바를 곳이 아니라는 것도. 놈의 입술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익숙한 각도와 눈빛이었다. 밀어내야지 생각을 하면서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얘들아!”

정신이 확 드는 부름이었다. 나는 이지훈의 어깨부터 세게 밀쳤다. 그러기가 무섭게 현관문을 박차고 들어온 강영수와 눈이 마주쳤다. 놈은 손에 바비큐용 장비처럼 보이는 물건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나는 그 장비들을 눈짓하는 척 강영수에게 급히 다가갔다.

“어, 어… 그 집주인이 뭐래?”

“어엉, 온수 틀 때 처음에 녹물 좀 나올 수 있는데 잘못된 거 아니니까 써도 된다고. 바비큐용 장비 어딨는지도 알려줘서 같이 찾아왔지. 뭐, 선크림 바르고 있었나 보네?”

밀쳐낸 보람도 없이, 강영수는 우리가 뭘 하고 있었는지 본 것 같았다. 그런데도 아무런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태연했다. 마치 남자들끼리 선크림을 발라주는 것도 친구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하기야 강영수는 중학생 때부터 나한테 마스크팩을 직접 붙여주지 못해 안달이던 놈이었다.

허무한 기분은 잠시, 나는 이지훈을 힐끔 확인했다. 힘 조절조차 하지 못하고 냅다 민 나 때문에 소파로 던져진 이지훈은 좀 황당해 보이긴 했지만, 이윽고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손에는 여전히 선크림이 들려 있었다.

“야, 나도, 나도. 나도 발라줭!”

그러기가 무섭게 달려온 강영수에게 붙잡혔지만. 앞머리까지 휙 들어 올린 채로 뻔뻔히 얼굴을 들이미는 강영수를 본 이지훈이 잠깐 침묵했다. 나는 이지훈 쪽을 보지 않으려 애쓰며 걸음을 옮겼다.

“…나 차에 좀 다녀올게. 갖고 올 게 있어서.”

대답을 듣기도 전에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등 뒤로 뺨을 착착 내리치는 소리와 함께 악! 악! 하는 비명이 번갈아 울렸다.

“지훈아. 내가 선크림을 발라달랬지, 경락을 해달랬니?”

반쯤 해탈한 듯한 강영수의 말소리를 들으며 나는 문을 닫았다. 유분기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선크림이 완벽하게 흡수된 볼을 긁으며 차로 걸어갔다. 제발 그곳에 핑곗거리가 될 만한 물건이 있길 바라며.

주변 맛집과 명소를 대상으로 짰다던 강영수의 계획은 알찼지만, 이 주변으로 여름휴가를 온 사람들이 대부분 생각할 만한 계획이기도 했다. 오래된 소나무 숲길을 따라 트레킹한 뒤 유명하다는 짬뽕 순두부를 먹고, 멋있다는 폭포에 가서 사진을 찍고, 아인슈페너가 맛있다는 카페에 가서 커피를 한 잔 마셨을 뿐인데 오후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지치는 기분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둘러 차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기본 한 시간씩은 웨이팅을 한 데다가 어딜 가도 지나치게 많은 인파에 치인 탓인 것 같았다. 그래도 평소라면 이 정도로 지치지는 않았을 텐데, 수술 후에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을 오래 돌아다닌 건 처음이라 그런 건가 싶었다. 다행히 나만 그렇게 지친 건 아닌 듯했다. 말조차 잃은 강영수와 운전하기 바쁜 이지훈 사이에 끼어,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거실에 이불을 펴고 드러누웠다. 유달리 해가 긴 여름이라 그런지, 거실의 통창을 통해 햇빛이 들어오는데도 누구 하나 커튼을 칠 생각도 못 하고 쓰러지듯 눈을 감았다.

분명 잘 때는 셋이 나란히 누워 있었던 것 같은데, 일어나니 나 혼자만 덩그러니 거실에 남아 있었다. 바다 너머로 붉게 지는 노을이 보였다. 나는 머리를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도 한숨 자고 일어나니 한결 몸이 가벼웠다.

집 곳곳을 둘러봐도 강영수와 이지훈이 없었다. 전화라도 해보려다가, 거실 위 테이블에 올라가 있는 주인 잃은 핸드폰 두 개를 보고 그만두었다. 핸드폰을 두고 간 걸 보면 멀리 가진 않은 것 같았다. 찾아보러 나가야 하나 싶어 쪼리를 신던 순간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품에 무언가를 그득 안은 채로 들어서던 강영수가 날 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욱아. 왜 벌써 일어났어? 더 자지.”

“…잘 만큼 잤어. 어디 다녀와?”

“아, 숯 없어서 사러 나갔다 왔는데….”

“숯?”

“엉. 근데 결과적으로 숯을 사진 않았어. 옆 펜션 사람들이 많이 사 왔다고 그냥 주더라고.”

“그 사람들이 우리 숯 없는 건 어떻게 알고.”

“아니, 이지독 끌고 숯 사러 나가다가 그 사람들이 족구하길래 잠깐 구경했거든. 공이 우리 쪽으로 튀어서 주워줬는데 마침 인원이 좀 빈다고 해서 같이 놀았어, 잠깐.”

그러고 보니 강영수의 이마가 땀으로 반들반들했다. ‘이지훈도?’ 물으려던 순간 문이 한 번 더 열렸다. 이지훈이 들어서고 있었다.

“벌써 일어났어?”

날 발견하자마자 강영수와 같은 질문부터 한 놈이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옆으로 휙 던졌다. 이지훈이 다가선 것만으로도 순간 더운 기운이 훅 끼치는 기분이었다.

“…어어.”

대답하면서 나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그걸 다른 방식으로 이해했는지, 내 머리를 헝클이려다 말고 멈춘 이지훈이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땀 냄새 나지. 미안. 씻고 올게.”

머지않아 화장실 문이 닫혔다. 이지훈이 남긴 잔상을 곱씹듯 화장실 문까지 따라가던 시선을 겨우 거두고는 강영수를 불렀다. 야. 테이블 위의 핸드폰을 집어 드는 중이던 강영수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야 껄끄러운 질문이 튀어나갔다.

“…쟤 왜 벗고 있는데?”

강영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경기하느라 더워서? 쟤 말고도 많이들 벗었어.”

“…….”

“다들 체대생이라더니 확실히 장난 아니더라. 이지훈 저 새끼도 처음엔 대충 맞춰주고 나가려는 눈치였는데 나중에는 불붙어서 진심으로 했어.”

“…그래서.”

“이겼냐고?”

“어.”

“이지독이잖아.”

이겼다는 소리다.

“평균 연령 스물셋 애들 상대로 존나 선방했어. 나중엔 지켜보는 내가 눈물이 다 나는 거 있지. 더 웃긴 게, 경기가 치열해서 그런지 나중에는 다른 펜션에서도 구경 많이 왔거든. 끝까지 지켜보던 사람 중에 어떤 여자분이 와서 이지독한테… 헐. 다인 씨한테 부재중 전화 왜 이렇게 많이 왔지. 욱아, 나 잠깐만.”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전하듯 웃으며 핸드폰을 확인하던 강영수의 얼굴이 별안간 파랗게 질렸다. 핸드폰을 귀에 댄 놈이 베란다로 나가는 것까지 지켜보고서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지훈이 들어간 후 계속해서 물소리가 흐르던 곳이었다. 정확히는, 벗고 돌아다녔을 이지훈이 돌아와 씻고 있는 곳.

강영수는 여전히 등을 보인 채 통화 중이었다. 가끔 몸을 배배 꼬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보니 짧은 시간 안에 끝날 통화 같지는 않았다. 살짝 열린 베란다 문 사이로 놈의 통화 내용이 들렸기에 알 수 있는 정보였다.

“네네. 아, 오늘도 있었어요. 음, 뭐 쟤네 번호 따이는 거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서… 아, 아니에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저 진짜 괜찮은뎅… 네네. 아… 아뇨. 자신이 없는 게 아니라… 아, 알아요. 아는데… 알았어요. 다인 씨. 근데 그건 나중에 우리 둘만 있을 때 하면 안 돼요? 네네. 아뇨. 좀 부끄러워 가지구… 아아니, 저 자신이 부끄럽다는 게 아니라요. 누가 들을까 봐요….”

놈이 통화를 끝내고 안으로 들어오는 것보다 이지훈이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오는 게 더 빨랐다는 의미였다. 옷을 갈아입었는지 물색의 셔츠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젖은 머리를 넘기며 내가 보고 있던 곳부터 흘끔 확인한 이지훈이 몸을 숙였다. 내 옆에 쪼그려 앉은 놈에게서 샴푸 향이 훅 풍겼다.

“야, 나가자.”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소곤거리는 놈에게 전염된 것처럼 내 목소리마저 덩달아 낮아졌다.

“…어딜.”

“어디든.”

눈이 마주쳤다. 이지훈이 개구진 웃음과 함께 내 팔을 끌었다. 검지를 들어 입술에 가져다 대 보이면서. 쉿. 강영수는 우리가 신발을 신고 살금살금 빠져나올 때까지도 통화 중이었다. 대화 중간중간 간지러움을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목덜미를 문지르는 놈의 귓가가 붉었다.

여름밤이었다. 밤이라기에는 아직 주위가 밝아 굳이 가로등을 켤 필요가 있을까 고민하게 될 정도였다. 걷다 보면 팔꿈치가 자연스레 스칠 정도의 거리를 둔 채 이지훈과 걸었다. 낮에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이런 날씨를 놓칠 수 없는 것처럼 백사장 위에는 사람이 많았다. 바다 위로 번지듯 퍼져나간 짙은 분홍빛들이 사람들에게 그보다 더 붉은 감정을 선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멋진 광경을 두고 굳이 바다를 뒤로한 채 걷는 이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지훈과 나는 별다른 말 없이도 계속해서 앞을 향해 걸었다. 누구 하나 어디로 가자고 하지 않았는데도 갈 곳을 아는 것처럼 확신 어린 걸음이었다. 나란히 쪼리를 신은 탓에 바닥에 밑창이 쩍쩍 달라붙는 소리가 들렸다. 마을 어귀에 다다른 순간에는 풀벌레 우는 소리마저 합세했다.

아까 차로 지나온 숲길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곳인 탓에, 펜션 주변보다 훨씬 어두웠다. 나는 홀로 이곳을 걸었던 밤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보다 춥고, 어둡고, 외로웠다.

가끔가다 보행로 옆을 쌩 속도를 내며 지나치는 차가 아니라면, 굳이 이 어두운 길을 건너가려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숲에 들어선 지 5분도 되지 않아 사람들의 말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완벽한 정적이 찾아왔다. 이지훈이 기다렸다는 것처럼 손을 잡았다. 소꿉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새끼손가락을 거는 것에서 시작해 어느새 손바닥을 맞대고, 이내 손깍지를 끼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따지자면 우리가 여태껏 했던 일들과 비교했을 때 정말 아무것도 아닌 단순한 스킨십인데도, 몇 배는 더 간질거렸다. 심지어 놈과 처음 손을 잡아보는 듯 어색하기까지 했다. 몸조차 뻣뻣하게 굳어 옆을 차마 돌아볼 수 없었다. 싫어서 굳은 게 아님을 말하듯 손가락에 힘을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지훈도 웬일로 말이 없었다. 놈이 장난조차 치지 않으니 배로 더 어색한 것 같았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손을 놓진 않았다.

“…….”

“…….”

차가 주로 다니는 길이긴 했지만,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보행로도 따로 마련은 되어 있었다. 사이의 거리가 멀긴 했지만, 가로등도 존재했다. 저녁이 되었음을 알리듯 가로등에 하나씩 불이 켜지고 있었다. 우리가 막 지나친 가로등에 팟-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빛의 조명이 들어온 순간, 이지훈이 걸음을 멈췄다.

“생각보다 되게 머네.”

이지훈은 앞을 보고 있었다. 거리를 둔 가로등이 듬성듬성 자리 잡은 곳이자,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길보다도 훨씬 더 멀리 걸어야만 끝에 다다를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이지훈의 시선이 내게로 천천히 돌아왔다. 선선한 바람이 놈의 머리를 흩트렸다. 왼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로, 놈이 나를 다정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걸으면서 무슨 생각 했어?”

이지훈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솔직하게 고백했음에도 스무 살, 그 여름 우리가 이곳에서 느꼈던 감정에 대해서는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이지훈의 마음이 확신에서 비롯된 것임을 안다. 이제는 우리가 그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 것을 알고, 그럼으로써 더 단단해지리라고 믿기에 물을 수 있는 질문이라는 걸. 내가 같은 마음임을 알아서 나온 용기이기도 할 테다.

나는 놈이 그랬듯 몸을 돌렸다. 앞이 아닌 옆을 응시하기 위해서.

“널 잃어버렸고….”

어쩌면 그날 이후 내내 참고 있었을 숨이 바람처럼 흘러나왔다.

“이 길을 지나가면 널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지훈이 손을 들었다. 시원한 온도를 품은 손등이 볼 위를 부드럽게 쓸었다. 마치 달래주는 것 같았다. 그때의 나를. 그리고 그리함으로써 함께 위로받을 지금의 나를. 이지훈은 내가 현재의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있음을 확인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지금은?”

사람마저 없는 어두운 숲길을 끝조차 모른 채로 걷고 또 걷던 그때 나는 울지 않았다. 우는 것도 못 할 정도로 겁에 질려 있어서였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느껴졌다. 내가 지금 이지훈의 울타리를 찢고 나가고 있다는 걸, 다신 돌아오지 못할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걸, 결국은 그것이 나를 죽이는 길이 될 거라는 걸.

다시 그 민박집으로 돌아간대도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돌아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그저 걸어야 했던 그 밤. 누군가 내 움츠린 어깨를 돌려세우고 돌아가라고, 이지훈이 널 기다리고 있다고, 네가 돌아가면 받아줄 거라고 말해주었다면 좋았겠지. 괜찮다고, 넌 여전히 이지훈의 튼튼한 울타리 안에 있다고 말해줄 수 있었다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음을 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렇게 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난 여전히 이곳에 있었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이지훈의 손을 잡고서.

“이렇게 같이 걸으려고 그랬나보다 싶네.”

“…….”

“손잡고 걸어야 하는 길이었네, 여기….”

뱉고 보니 더욱 낯간지러운 말이었다.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 게 믿기지 않는 듯 빤히 쳐다보는 이지훈의 시선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입술을 어색하게 말아 물면서도 나는 손을 놓지도, 고개를 피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손을 좀 더 꼭 쥐며 놈과 눈을 맞췄다. 이지훈의 얼굴이 서서히 가까워졌다. 놈은 키스할 때면 늘 내 볼과 목을 함께 감싼다. 코끝이 부딪친 순간에는 눈이 스르륵 감겼다. 이지훈이 중얼댔다.

“넌 내 삶에서 한 번도 지나간 존재인 적 없어.”

놈만 알 수 있을 정도로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이 닿기 전, 이지훈이 한 번 더 말했다.

“사랑해.”

나는 대답 대신 놈의 볼에 손을 올렸다. 달뜬 숨에 서로가 엉켰다.

다행히 숲길을 끝까지 걷지는 않은 덕분에, 다시 숙소로 돌아오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어디 갔다 왔어?”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소파에 누워 있던 강영수가 고개를 번쩍 쳐들고는 물었다.

“데이트.”

심드렁하게 답한 이지훈이 손을 씻겠다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강영수가 한층 분한 얼굴로 지지 않고 빽 소리쳤다.

“셋이 놀러 왔으면 셋이 데이트해야지!”

혹시나 하는 의심마저 사라지게 만드는 말이었다. 데이트란 단어조차 강영수에게는 의심을 사지 못한다는 사실을 실감하기만 했다.

“그치, 욱아?”

동조를 구하듯 날 응시하는 놈을 보며 한숨을 눌러 삼켰다. 이걸 진짜 어째야 하나… 이쯤 되니까 진지하게 걱정이 된다. 앞에 앉혀 두고 하나하나 설명해도 믿을 것 같지 않다. 머리를 짚던 나는 당장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임을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밥이나 먹자. 배고프다.”

그래도 더 찡찡대지 않는 걸 보니, 다인 씨와 통화를 끝낸 지 그리 오래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이지훈은 손을 씻고 나오자마자 베란다로 나가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다가서서 내가 고기를 굽겠다고 했다가 집게를 뺏겼다. 포기하지 않고 도울 게 없나 주변을 서성대는데, 고기를 굽는 이지훈의 옆에 서 있던 강영수가 핸드폰을 허공으로 치켜드는 게 보였다.

“야, 사진 하나 남기자. 사진.”

“…또?”

강영수는 우리 셋 중 가장 사진 욕심이 많았다. 오늘만 해도 우리 사진을 수백 장은 찍었을 것이다. 포즈를 이렇게 해 봐라, 저렇게 해 봐라, 요청사항도 많은 탓에 이제는 카메라만 봐도 기가 빨렸다.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몰라서 매번 어색하게 서 있는데, 같은 표정을 두고 어떨 때는 좋다고 하고, 어떨 때는 좀 더 웃어보라고 했다. 강영수는 방금도 사진 찍자는 말이 나오자마자 피하려는 나를 달래듯이 빠르게 말했다. 욱아, 한 장만, 한 장만! 나는 한숨을 쉬면서도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강영수가 들고 있는 핸드폰 쪽으로 몸을 돌렸다. 고기 집게를 든 채로 강영수에게 강제 어깨동무를 당한 이지훈이 짜증을 내다가도 이내 카메라를 향해서 웃어 보였다.

“자, 하나, 두울-”

분명 버튼은 한 번만 누른 것 같은데, 진동하듯 흔들리는 화면과 함께 셔터음 소리가 끊기지 않고 울렸다. 이지훈이 눈썹을 꿈틀대며 강영수에게 뒤돌았다.

“방금 뭐냐?”

“연사 갈겼징.”

“연사가 뭔데.”

“연속 사진 줄임말. 아, 존나… 얘들아. 내가 이런 기본 용어를 설명해야 하냐?”

“넌 별지자미가 뭔지 아냐?”

“뭐? 아니? 그게 뭔데.”

“별것도 아닌 걸로 지랄하고 자빠졌다 미친놈의 줄임말.”

티격태격할 때는 언제고, 사진을 확인하려 머리를 맞댄 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다시 찍을까?”

아무래도 마음에 차는 게 없는 것처럼 묻는 강영수를 본 순간에는 또 시작이겠구나 싶었는데, 다행히도 이지훈이 가차 없이 돌아섰다.

“됐어. 그만 찍어.”

“아, 왜! 나 마지막 사진에서 눈 감았잖아.”

“지선욱 잘 나왔잖아.”

나도 모르게 움찔해 고개를 들었다.

“참나… 같이 산다고 요새 사이좋다 이거지….”

다행히 강영수는 핸드폰을 내리며 투덜대기에 바빠서 이지훈과 내가 비밀스럽게 눈을 맞추는 장면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봤다고 해도 또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덕분에 이지훈은 앞에 사진을 확인하는 강영수를 세워두고 멀리 있는 날 향해 거듭 윙크를 날려대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짓는 표정이 꽤 웃긴지 눈을 반달로 접어 웃으면서.

그러면서도 강영수가 고개를 든 순간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뗐다. 불판 쪽으로 뒤돈 이지훈이 부채로 연기를 쫓으며 툭 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야. 나한테 그거 사진 보내.”

“무슨 사진.”

“방금 찍은 거.”

“싫은데.”

“보내.”

“어허, 부탁할 때는 공손하게 말해야지.”

“좋은 말 할 때 보내주세요, 씨발놈아.”

이지훈처럼 불 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목덜미가 뜨거운 기분이었다. 더 듣고만 있기 어려워 둘의 싸움에 조용히 참전해 말을 얹었다. 어차피 보낼 거면 그냥 지금 보내라고.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쳐다보던 강영수는 그러나 더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삐죽대면서 사진을 200장이나 보냈다. 그중 내가 저장한 건 일부였다. 이지훈이 사진 끄트머리에 어떻게든 걸려 있으면 저장한 것까지 총 100장이었다.

“아, 배불러. 맥주 먹지 말걸….”

“내가 피처 두 개면 된댔지. 다 먹을 수 있다고 나댈 때부터 알아봤다.”

“어쨌든 다 먹었으니 됐잖아. 그만 싸워.”

저녁과 함께 술을 곁들였다. 강영수와 이지훈은 술을 못 먹는 내 몫까지 배로 마셨다. 나중에는 주량 싸움이나 진배없었던지라, 강영수의 항복 후 2층으로 올라와 천장을 향해 누운 지금까지도 옆에 누운 둘에게서는 술 냄새가 풀풀 풍겼다.

몇 번을 더 중재하고서야 평화가 찾아왔다. 어쩌면 천장을 통해 보이는 밤하늘을 구경하느라 그런 걸지도 몰랐다. 지붕의 모양대로 비스듬한 창문을 통해 하늘이 보였다. 별인지, 지나가는 비행기인지, 우리가 이름조차 모를 소행성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것들이 반짝대는 하늘. 달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건 또 그거대로 괜찮았다. 오히려 별들에 더 집중할 수 있었으니까.

강영수가 입을 불쑥 열었다. 술기운이 가득 묻은 목소리가 우리밖에 없는 공간에 웅웅 울려 퍼졌다.

“이거 딱 스무 살 때 내가 바라던 거야. 너네랑 같이 누워서 하늘 보는 거.”

“…….”

“…….”

“태안 살 때는 빛 축제라도 같이 봤지, 대학 가서 흩어진 다음에는 한 달에 한 번 얼굴 보기도 힘들었잖아.”

“…….”

“그래도 하늘은 어디든 있으니까, 태안이 아니라도 볼 수 있는 거니까. 그 김에 새로운 추억을 만들면 좋겠다 싶었지. 뭐…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고개만 슬쩍 들어 옆을 봤다. 이지훈과 나 사이에 누워 있는 강영수는 새삼스러운 표정이었다. 신기해하는 것 같기도, 혹은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걸 십 년 지나서 하네… 드디어….”

건너편에서 나와 비슷한 꼴로 강영수를 흘끔대는 이지훈이 보였다. 우리는 눈이 마주친 순간 잠깐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머리를 다시 침대 위로 눕혔다. 천장에 달린 창문을 보겠다고 침대에 가로로 나란히 누운 탓에 총 여섯 개의 발이 침대 밖으로 튀어나가 있었다. 나는 아래를 보던 시선을 들어 강영수처럼 하늘에 눈을 둔 채로 입을 열었다.

“추억이야 지금이라도 만들면 되지. 내년에도 해.”

“…진짜?”

건너편에서 이지훈이 말을 받았다.

“대신 다음엔 호텔 가.”

“진짜지? 약속하는 거다?”

내게로, 다음은 이지훈에게로 휙휙 고개를 돌리던 놈이 잠깐 말이 없더니 이내 내 팔을 꽉 껴안았다. 이지훈의 팔 또한 그렇게 잡고 있을 거였다. 나와 이지훈은 거의 동시에 놈에게 답했다.

“그래.”

신나서 다음은 어딜 가면 좋을지 계획을 줄줄이 늘어놓던 강영수가 차츰차츰 조용해졌다. 말 중간에 자꾸 하품 소리가 끼어들었다. 팔짱을 단단히 끼고 있던 손의 힘마저 약해지고 있었다. 익숙한 모습이었다. 이대로면 곧 잠든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과 동시에 강영수가 입을 열었다.

“너네 그거 알지. 우리 팀장, 용주 그 새끼 나한테 관심 졸라 많은 거. 나 휴가계 올린 거 보고 누구랑 어디 가냐고 꼬치꼬치 묻더니, 너네랑 간다니까 대뜸 그러더라. 자기도 우리처럼 그렇게 평생 갈 줄 알았던 친구가 있었는데, 이젠 연락도 안 하고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도 모른다고. 좋을 때라고 그러더라.”

나는 놈이 잠까지 쫓으며 전하려 드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머리 뒤에 손을 포갠 채로, 강영수의 말에 토를 다는 대신 묵묵히 듣고만 있는 이지훈도 같은 마음일 거였다. 나름의 방식대로 강영수에게 미안하고 또 고맙다고 표현하기 위해서.

“듣는데 존나 열 받는 거야. 내가 맨날 너네한테는 우리 용주 욕하긴 해도, 앞에서는 네네 하고 다 맞춰주거든. 직장인이 뭐 별수 있나… 근데 그 순간에는 못 참겠어서, 그냥 아니라고 했어. 우린 다르다고.”

“…….”

“…….”

“얘네는 내가 좋을 때만 옆에 있는 친구가 아니라고, 앞으로도 쭉 내 옆에 있을 거라고. 나 결혼할 때도 옆에 있을 거고, 얘네가 결혼할 때도 내가 옆에 있을 거고. 우리 애들은 내 친구들을 삼촌이라고 부를 거고. 그렇게 오래오래… 옆에 있을 거라고. 우리는… 우리는 그런 친구라고 했어. 오래오래 옆에 있어 줄 친구.”

오래오래…

강영수는 그 말을 주문이라도 되듯 여러 번 중얼댔다. 술 취한 사람 특유의 불규칙한 숨소리가 점차 흩어지더니, 이내 새근거리는 숨소리로 바뀌었다. 놈이 잠들고 나서도 이지훈과 나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먼저 입을 연 건 나였다.

“…적어도 얘 결혼하기 전에는 말하자.”

이지훈이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동그랗게 말려진 채로 옆으로 밀려나 있던 이불을 든 놈이 강영수의 배 위를 덮어주고 있었다.

“그래야지.”

간단한 대꾸가 돌아왔다. 나는 양팔을 몸통 옆에 두고 상체를 일으켰다. 이지훈은 강영수에게 몸을 돌린 채였다. 아까 강영수가 지었던 새삼스러운 표정을 놈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새끼 결혼하면 가장 노릇은 제대로 할지 모르겠다.”

강영수의 앞에서는 몇 번 보인 적 없는 이지훈의 애정과 걱정이 담긴 눈빛이 세상 모르게 잠든 얼굴 위에 오래 머물렀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댔다.

“앞으로도 지켜볼 테니까, 알게 되겠지.”

이지훈이 고개를 들었다. 둘 다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웃었다. 먼저 시선을 돌린 건 이지훈이었다.

“아, 따가워, 이씨. 모기 새끼들 하필 여길 무냐.”

팔뚝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쓰는 놈이 보였다. 시선을 따라가다 말고 멈칫했다. 이지훈의 팔이 그 위와 뚜렷하게 경계가 질 정도로 그을려 있었다. 아까 옆 숙소의 사람들과 함께 경기를 하느라 햇빛에 노출된 살갗이 타서일 거였다. 저녁을 먹으며 걱정이 되어 슬쩍 짚어보았을 때, 유독 뜨겁던 부분이기도 했다. 충동을 참지 못하고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엉?”

“선크림도 안 발랐으면서 왜 벗고 다니는데.”

사실 아까 강영수에게 전해 들은 순간부터 계속 신경이 쓰였다. 어둠 속에서 날 빤히 바라보던 이지훈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선크림을 안 바른 게 신경 쓰이는 거야? 벗고 다닌 게 신경 쓰이는 거야?”

나는 대답하지 않고 하늘을 봤다. 굳이 그 둘을 구분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이미 답을 아는 것처럼 피식대는 이지훈은 무시했다. 볼에 빤히 느껴지던 시선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는 집에서 틈만 나면 하듯이 껴안거나 입을 맞대는 것 대신 아까처럼 누웠다. 강영수를 사이에 둔 채로 하늘을 조금 더 구경했다.

우리가 오래오래 함께 손을 잡고 걸으며 올려다볼 하늘이었다. 어느 길로 가도 끝내는 도착하고 말 곳이었다. 비록 그 과정에서 헤매고 다친다 해도, 후에 남은 흉터조차 사랑의 증표라고 추억하게 될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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